1.
창문 너머 눈부신 햇살이 아이린의 감은 눈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으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실눈을 떴다.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게다가 속이 쓰리고 갈증이 났다.
그러나 그동안 공부하느라 못 잔 잠이 더 고파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래. 좀 더 자야겠어.’
그녀는 숙취를 애써 무시하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이불 감촉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내 이불이…… 이렇게 부드러웠나?’
그 순간 아이린은 자신의 이불이 때수건같이 거칠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의아한 마음에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며 눈을 떴다.
“으응?”
뜻밖에도 화려한 조명의 흰 천장이 그녀를 맞이했다.
몽롱하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뭐지, 저 비싸 보이는 조명은? 아침마다 눈뜰 때 만났던 푸른곰팡이들은 어디로 간 거야?’
그런데 왠지 이 상황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세계에 처음 올 때 겪었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여기는 또 다른 이세계? 이미 소설 속이었는데, 혹시 소설 속의 소설 속 같은 곳은 아니겠지? 아, 아닐 거야.’
그녀는 아찔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린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 순간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향이 그녀의 폐부를 찔러 왔다.
‘이 기분 좋은 향기는 어디서 나는 거지……? 마치 아로마 테라피를 하는 것 같잖아.’
아이린은 마치 꽃을 찾는 꿀벌처럼 향기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엔 탄탄한 근육질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남자가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꿈인가?’
그녀는 눈을 몇 번 꿈뻑거렸다.
‘이 근육질의 남자에게서 이런 달콤한 향이……? 근데 꿈에서 향기를 맡을 수가 있는 건가?’
아이린은 순간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그녀를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그녀는 내적 비명을 지르며 얼른 주저앉아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나 술에 취해서 이 남자랑 자, 잔 거야?’
그 순간 머리를 망치로 쾅 하고 맞은 것 같았다.
아무리 연애가 자유로웠던 현대 세계에서 왔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녀의 멘탈 밖이었다.
그녀는 이 세계로 오기 전에도 오로지 2D 캐릭터랑만 사랑에 빠졌던 ‘덕후’였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치다니! 그것도 진짜 남자 사람이랑!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 멍하니 앉아 있을 때였다.
“후우…….”
갑자기 남자의 거칠고도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이린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히 눈동자만 굴려 남자를 살펴봤다.
‘휴, 깨진 않은 것 같네.’
그의 엉덩이 위에 이불 끝자락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것이 보였다.
“흐헙!”
아이린은 순간의 충격에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당황해 혼란스러운 와중인데도 계속 눈길이 갔다.
‘무슨 남자의 엉덩이가…… 살아 있네. 헉? 나 뭐라고 한 거야!’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얇은 천 이불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굴곡들이 알몸 이상으로 더 야한 상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남자 분명 이불을 다 덮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아이린은 조금 전 자신이 이불을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멍청이! 내가 이불을 다 가져와서 때문이었구나. 어쩌지? 지금이라도 이불을 덮어 줘야 하나?’
아이린은 이불 한쪽을 들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 자신의 몸을 가리자니 남자의 헐벗은 모습을 봐야 했다.
그렇다고 계속 한 이불을 덮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남자의 팔이 그녀의 허벅지 위를 턱 하고 덮었다.
“흐헙!”
그 순간 허벅지에 느껴지는 단단하고 야릇한 느낌에 그녀는 소스라치듯 놀라 얼음이 되었다.
‘어, 어쩌지? 지, 진정하자. 그래.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해!’
아이린은 멈췄던 숨을 조용히 뱉으며 그의 팔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조심조심……. 절대 깨우면 안 돼!’
아이린은 덜덜 떨며 남자의 팔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무슨 팔이 이렇게 커다랗고 무거운 거야? 마치 쇳덩이라도 드는 것 같잖아!’
그때였다.
남자의 부드러운 저음이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채우듯 울려왔다.
“으으음…….”
‘헉! 잠이 깬 거야?’
그녀는 순간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제발 다시 잠들어라. 레드 썬! 아니, 아브라카다브라! 잠들어라!’
아이린은 생각나는 온갖 주문을 속으로 외우며 그가 잠들길 기원했다.
다행히 주문이 통했는지 색색거리는 평안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그녀는 놀란 가슴을 달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이제 나가야겠어.’
아이린은 옷을 입으려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남자, 누구일까?’
문득 든 호기심이 그녀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 순간 어젯밤 처음으로 평민들이 자주 간다는 펍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벽안의 따뜻한 눈빛을 지닌 남자가 자신의 앞에 앉아 환하게 미소를 짓던 것도.
‘으악! 이 멍청아! 어떻게 그걸 잊어버리니? 아, 아니지. 이게 다 저 충격적인 실물 근육 때문이야!’
그녀는 애꿎은 남자의 근육을 탓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젯밤 그녀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실물 남자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이런 남자라면 연애를 해도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어제 그토록 고대하던 곳으로부터 합격 통보까지 받아 기분 좋게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넉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190센티는 될 듯한 키에 수영 선수들처럼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근육을 키울 목적으로 과하게 단련한 근육과는 매우 달랐다.
매우…… 날렵하고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그때 남자의 잔뜩 성이 난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항상 2D만 좋아했던 아이린은 난생처음 보는 등 근육 실사에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아름다워. 만져 보고 싶다.’
그녀의 통제를 벗어난 오른손이 홀린 듯 그를 향했다.
‘으힉? 나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얼른 왼손으로 오른손을 저지했다.
그리고 2D 캐릭터에 빠져 실제 남자에게 품어 본 적 없던 자신의 변태력에 놀랐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의 등 근육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자꾸만 손이 간다는 새우 과자를 앞에 둔 것처럼 점점 그녀의 의지와 다르게 손가락이 자꾸만 꼼지락거렸다.
게다가 눈동자 또한 점점 이성을 잃은 듯 흐려지고 있었다.
‘아무리 굶었어도 이건 아니지! 허락 없이 이러는 건 범죄라고!’
아이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이성을 지배하려는 음란 마귀를 내쫒았다.
그런데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왼쪽 옆구리 부근까지 등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 흉터…… 많이 아팠겠다. 혹시 기사였나? 어제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한 평민 같았는데.’
그녀는 남자가 자신 앞에 앉았을 때를 다시 떠올려 봤다.
그때 자신은 맥주 한 잔을 시켜 홀짝홀짝 음미하고 있었다.
‘하하……. 미치겠다. 깡소주 세 병에도 끄떡없던 내가 맥주 한 잔에 취했다니. 그래. 뭐, 이 몸으로는 첫 음주였으니.’
이전 세계에서 살 때는 집에서 혼자 자작할 때도 폭탄주를 물처럼 마셨었다.
하지만 아이린의 몸으로는 차조차 함부로 마실 수 없었다.
때문에 혼술로 시름을 달래던 취미를 더는 못 하게 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이런 나약한 몸뚱이 같으니라고!’
그녀는 제 몸을 타박하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 흉터, 어디서 본 것 같은 이 기시감은 뭐지……?’
아이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내가 이런 흉터를 볼 일이 언제 있겠어?’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 남자…… 어제랑 좀 달라 보이는걸.’
그때였다. 남자의 머리칼이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 어제는 분명 짙은 갈색 머리였는데……? 어떻게 된 거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다 급히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봤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 옆 협탁 위로 짙은 갈색의 가발이 보였다.
‘……뭐지, 저 털 뭉치는? 설마 가발이야? 그럼 저 남자…… 원래 금발이었어?!’
순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원작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등을 가로지르는 흉터, 황금처럼 빛나는 금발.
‘헉! 설마 이 남자……!’
“남주?”
“으음…….”
그때 남자의 신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 읽었던 소설 원작 웹툰 <그들의 꽃이 되었다>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래. 남주의 등짝이랑 정말 비슷한 것 같아!’
하지만 잔뜩 긴장했던 표정이 이내 스르륵 풀렸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남주는 아닐 거야. 평민들만 가는 펍에서 우연히 만난 괜찮은 남자가 남주였다는 로맨스 소설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날 리가 없잖아.’
그때 엎드려 있던 남자가 몸을 뒤척이듯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순간 남자의 어느 한 부분이 그녀의 망막에 들어왔다.
‘으악!’
아이린은 놀라 눈을 질끈 감으며 급히 이불을 던져 그의 몸을 덮었다.
눈 깜박할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이린은 보고 말았다.
절친이 보내 준 영상에서나 보았던!
아침에 기상하고 있는 그곳을!
“심봤……. 흡!”
아이린은 얼른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곧 순식간에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하……. 더워! 여러모로 참 건강한 청년이구나!’
아이린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지만 얼른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 참!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다 깨겠네. 그래도…… 궁금하니까 얼굴만 얼른 보고 빨리 나가야겠어!’
아이린은 보면 안 될 곳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남자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또 한 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저 얼굴……! 설마 진짜 남주였어?’
착각이 아니었다. 남자의 얼굴이 정말 웹툰에서 막 튀어 나온 것처럼 생긴 것이었다.
꿈인가 싶어 눈을 떴다가 감아 보았지만 원작 속의 남주, 레온하르트가 맞았다.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거였구나!’
충격과 동시에 감탄이 나왔다.
아니, 방방 뛰며 이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남주가 깰까 봐 차마 환호성을 지르지는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맙소사…….”
술에 취해 실수로 남주의 처음을 가지고 말았다.
원작의 남주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여주만 사랑하며 행복하게 산 여주 바라기였다.
‘하필이면 처음 호감 가진 인간 남자가 여주 바라기 남주라니……. 내가 남주랑 엮이다니!’
그 순간 그동안 보았던 로판들에서 여주의 대립 각을 이루었던 서브녀들의 최후가 떠올랐다.
‘설마…… 나 여기서 악녀로 몰려 죽는 거 아니야?’
그녀는 사망의 골자기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에 소름이 돋았다.
‘어제 내가 많이 취하긴 했구나. 어떻게 이 얼굴을 평범한 남자로 볼 수 있냐고!’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레온하르트는 어젯밤 마법으로 자신의 얼굴을 위장하고 있었다.
마법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제정신이었어도 그를 남주로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린으로 빙의된 후, 아카데미에서 가끔 가다 준수한 남학생들을 본 적은 있지만 이런 자체 발광의 미친 외모는 처음이었다.
물론 서브남인 제이드를 멀리서 덕질 하다 황태자인 남주를 본 적이 있었다.
먼발치에서 볼 때도 비율이 좋아 굉장한 미남 같았다.
그런데 이 정도의 저세상 외모일 줄은 몰랐다.
‘작가가 혼을 갈아 넣었구나……. 무슨 남자가 피부에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럽고 빛이 나니? 남주라고 외모에 몰빵을 받았나? 내 외모는……. 불공평해!’
갑작스런 자극들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녀는 머리가 핑 하고 도는 듯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 내가 여주가 아닌 이상 남주는 그림의 떡이고 사망 루트로 가는 지름길이야. 잘못 먹은 떡은 체하는 법! 아니, 떡을 먹으려다 죽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남주와 더 이상 엮이지 않으려면 여기서 빨리 빠져 나가야 해.’
로판의 정석 같은 생각을 마친 아이린은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녀의 뇌도 함께 번쩍 뜨였다.
어젯밤, 덥다고 술주정을 하며 남주 얼굴에 당당하게 옷을 벗어 던지던 자신이 떠올랐던 것이다.
동시에 그 기억 속에서 그녀를 막아 보려고 손을 뻗으며 당황하는 그의 표정이 오버랩 되었다.
‘으악! 어제 내가 미쳤구나, 미쳤어. 아무리 술을 마셔도 그렇지. 어디 저세상 외모인 남주 앞에서 뱃살을 드러내고 난리야!’
옷을 벗은 정황만 보였을 때는 나름 맨탈을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흑역사가 고장 난 필름처럼 반복해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이린은 벌게진 얼굴의 열기를 식히려 손부채질을 하였다.
‘뭐 어때?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런 경험도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자기 합리화 중이던 그때 남자의 옷과 사이좋게 나란히 걸려 있는 드레스를 발견했다.
‘뭐지, 이 새빨간 드레스는? 어제 분명 목까지 가리는 남색 드레스를 입었었는데……?’
잘 익은 체리색의 드레스는 앞뒤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푹 파여 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쳐다보지 못할 디자인과 색상의 드레스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펍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기성복 드레스 가게에 갔던 것이 생각이 났다.
「정열의 빨강! 나 아이린의 이름으로 널 겟☆ 해 주겠어!」
그런 미친 멘트를 하며 출근용 드레스를 살 돈으로 저 드레스를 사 탕진한 것까지.
‘윽, 피 같은 내 돈!’
밤낮없이 취업 공부를 하면서도 틈틈이 후배들의 과외를 하며 모은 돈 이었다.
‘거긴 도대체 왜 간 거야! 펍에 가기 전부터 취해 있었을 리가 없는데……. 아차, 도서관!’
문득 어제 데이지와 헤어지고 도서관 앞에서 무료로 나누어 주었던 차를 무심코 받아 마신 기억이 떠올랐다.
‘정신 나갔어!’
이 몸은 알코올뿐만이 아니라 카페인에도 매우 약한 체질이었다.
처음에는 그것도 모르고 도서관에서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공부했었다. 그리고 결국 데이지에게 업혀 들어왔었다.
‘그때 고생했던 기억을 다 까먹은 거야?’
심지어 빙의 전에는 여름마다 상자째로 먹던 복숭아도 알레르기가 있어 더는 못 먹었다.
한번은 복숭아를 좋아한다는 말에 데이지가 복숭아 조림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바로 알레르기가 올라왔고, 급히 의원에게 데리고 간 데이지가 아니었다면 아이린은 그야말로 맛있게 먹고 죽을 뻔했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또 이런 실수를 하다니.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아이린으로 산 것이 일 년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5년이나 지녔던 습관들이 바로 바뀔 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잊을 거면 차라리 모두 잊어버리지. 왜 이렇게 부끄러운 부분만 기억이 선명한 거야!’
아이린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 이불 속에 숨어 있고 싶었다.
‘일단 브리프는 찾았고…….’
바로 방 안을 스캔하며 브라셰르를 찾았다. 하지만 풍성한 속치마만 보일 뿐 브라셰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브라셰르는 어디 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덮은 이불을 살짝 들어 올렸다.
‘흐헉!’
그녀는 바로 내적 비명을 질렀다.
‘저렇게 완벽한데……. 이참에 다른 빙의 로판들처럼 나도 확 남주랑 썸을 한번 타 봐?’
하지만 그녀는 곧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수도 없이 본 원작의 결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여주 엘리자베스 옆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이 나이 되도록 썸과 쌈도 구분 못 하니? 남주는 여주만 오매불망 바라보는 여주 바라기라고!’
남주를 한번 흘끔 본 아이린은 이내 브라셰르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얼른 속치마와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호텔방을 나와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린은 빠르게 빨간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잠옷을 재빠르게 입은 후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썼다.
‘역시 곰팡이 핀 월세 방이라도 내 집이 최고지!’
그녀는 어제 데이지랑 약속이 취소되었을 때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이불 밖은 위험해. 그냥 우리 제이드 님이나 덕질 할걸.”
아이린은 제이드 얼굴이 그려진 대형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 우리 제이드 님이야.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 힐링이……. 우웁!”
아이린은 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욕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변기를 부여잡고 어제 안주로 먹었던 것들과 조우했다.
그녀는 속에서 거의 나오는 것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물로 입가를 씻어내며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판다같이 다크 서클이 얼굴의 1/3을 차지하는, 퀭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피부 하나는 맑았는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나왔어. 문 열어.”
‘참! 데이지가 놀러 오기로 했었지.’
아이린을 얼른 문을 열었다.
“밖에 춥지? 어서 들어와!”
환하게 미소 지은 데이지는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데이지가 아이린의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린, 너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데이지는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 밤까지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해. 저녁에 집에 손님만 오지 않았어도…….”
“괜찮아. 선물도 챙겨 줬으면서 뭐가 미안해.”
“정말?”
“응. 잠시만 의자에 앉아 있어.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얼른 와. 내가 따뜻한 스튜 가져왔어.”
“알았어.”
아이린은 방으로 들어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곧바로 나와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데이지는 스튜 그릇을 아이린 앞에 놓았다.
“자, 여기 네 스튜.”
금방 데웠는지 맛있는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데이지네 스튜도 맛있긴 하지만 오늘은 고춧가루 팍팍 뿌린 단골집 콩나물국밥이 정말 그립다.’
데이지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상부장을 열어 고춧가루를 꺼냈다.
“아이린, 넌 이거 넣어야 하지?”
데이지는 익숙한 듯 아이린의 스튜에 이국 물품점에서 겨우 산 고춧가루 두 스푼을 넣었다.
“역시 내 친구 최고!”
아이린은 데이지를 향해 엄지를 내밀고는 얼른 스푼을 들었다.
속을 다 비워내서인지 맛있는 스튜 냄새에 마음이 급해졌다.
“뜨거우니 조심…….”
“으, 뜨!”
아이린은 입 안이 녹는 듯한 고통에 급히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아이린을 보고 데이지가 얼른 물잔을 내밀었다.
“조심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벌써 데였구나. 너 가끔 보면 성질 매우 급한 것 같아.”
“헤헤. 내가 좀 그래.”
아이린은 얼른 데이지가 내민 물을 받아 마시며 생각했다.
‘그래. 데이지 말이 맞아. 이놈의 급한 성질머리. 사고 칠 날이 있을 줄 알았지만 이 세계에서까지……!’
아이린은 자괴감에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제 바로 집에 돌아왔다면, 아니, 그때 웹툰을 보고 홧김에 댓글을 달지 않았다면…….
‘지금 이 기억을 가지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웹툰 속에도 들어왔는데, 타임 리프 같은 건 어려울까?’
“데이지, 너 어디 알고 있는 마법사 없니?”
아이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데이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 토트 씨, 드디어 도셨군요. 이날이 언젠가 올 줄 알았습니다.”
아이린은 그런 데이지를 향해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웹툰 속 판타지 세계였지만 마법사는 고대 전설로만 남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 * *
아이린.
그녀는 이 세계로 오기 전 ‘이서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물다섯 살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서영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오빠와 심하게 차별했기에 집에 들어오면 외로움을 느꼈다.
마치 단란한 세 가족 사이에 낀 이물질 같은 존재랄까?
그래서 항상 혼자 방에 들어가 좋아하는 만화를 빌려 와 읽거나 그리면서 놀았다.
그때부터 그녀의 덕질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캐릭터를 따라 그려 액자에 걸었다. 그러다가 쿠션도 만들고 클레이로 피규어를 만들기도 했다.
부모님은 어린아이의 취미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녀가 고등학교에 가고 사정이 달라졌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녀가 덕질 하던 방 안의 캐릭터 물건들이 모두 치워져 있었다.
범인은 아버지였다.
그녀는 그날부터 아무 말 없이 공부만 했다.
어머니가 잠시 걱정하는 표정을 비쳤지만 그때뿐이었다. 다시 부모님은 의대에 간 오빠에게 집중했다.
그때부터 그녀도 가족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대학 입학 후 집을 나와 혼자 살았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더니, 알바와 학업 때문에 친구를 만들거나 연애를 하긴 힘들었다.
그건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다 도착했더니 친구가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해 왔다.
그녀는 친구를 기다리며 심심풀이로 웹툰 하나를 클릭했다.
그게 바로 원작 소설 <그들의 꽃이 되었다>를 웹툰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웹툰의 내용은 이랬다.
남자 주인공 레온하르트는 매력적인 금발의 소드 마스터로, 룩스 제국의 황태자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계모인 현 황후와 이복동생인 2황자 에드먼드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그때 공녀로 온 메르헨 왕국의 공주인 엘리자베스가 황궁 파티에 등장한다.
다른 공녀들과 달리 상냥하고 아름다운 엘리자베스에게 남주 레온하르트와 서브남들은 관심을 두게 된다.
뻔한 클리셰지만 그 뒤 착한 엘리자베스는 남주를 좋아하는 악녀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한다.
남주의 보좌관이자 서브남인 제이드나 평소 황태자를 증오하던 흑막 2황자 에드먼드까지도 그때는 한마음으로 그녀를 지킨다.
그러나 얼마 후 황후와 에드먼드의 반역이 일어난다.
레온하르트는 그를 예상했기에 빠르게 역도들을 제압해 나간다.
결국 에드먼드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황후는 제국법에 따라 처형당한다.
그 일로 황제는 자신을 자책하며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레온하르트도 어릴 적 자신을 따랐던 동생의 죽음에 괴로워한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레온하르트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고, 두 사람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었다.
어찌 보면 뻔한 결말이지만 서영은 웹툰을 보는 순간 운명을 느꼈다.
웹툰을 본 독자들 대부분은 작화의 2/3를 차지하는 남주 레온하르트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근육질보다 다정한 미남자가 이상형이었던 그녀의 덕심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서브남이지만 황태자의 능력 있는 보좌관이자 다정한 꽃 미소가 매력적인 제이드에게로.
그녀는 그날부터 매일 빠짐없이 ‘제이드 앓이’를 하였다.
제이드가 나오는 부분을 반복해 몇 번이고 보았고, 원작 소설을 매일 찾아 들어가 읽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 한 편이 너무 짧게 느껴져 연참을 빌며 작가에 대한 조공도 서슴지 않았다.
제이드가 나오는 굿즈를 받기 위해 댓글 이벤트에 참가도 하고, 직접 그림을 그려 실물 베개까지 만드는 등 그녀의 퇴근 후 시간은 덕질로 가득 찼다.
그렇게 365일 ‘어차피 덕질 할 거 행복한 덕후가 되자!’를 외치며 덕질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그런데 덕질로 매일이 행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최애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연재되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이드한테 이러면 안 되지! 작가님! 우리 제이드 살려내! 살려내란 말이야!’
얼른 웹툰의 댓글 창을 열었다.
[작가는 반성하고 우리 제이드를 다시 살려내라! 제발 다시 써! 아니, 다시 써 주세요! 네?]
그때 바로 아래에 답 댓글이 적혔다.
[그럼 네가 한번 써 봐.]
뭐?
나보고 쓰라고?
황당함, 분노, 슬픔 등 온갖 기분들이 머릿속을 오가는 그때였다.
그녀의 핸드폰에서 불꽃놀이처럼 환한 빛이 번쩍였다.
순간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원작 구성물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인물 아이린으로 빙의된 뒤였다.
그 순간 아이린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린은 룩센 제국의 평민 고아 소녀로 아카데미 졸업반에 다니고 있었다.
아이린이 어릴 적 살던 곳은 제국 수도에 위치한 가장 큰 규모의 고아원이었다.
그곳은 기숙학교처럼 고아원을 운영했는데, 아이들이 기초적인 학습들을 할 수 있었다.
개중 우수한 아이들은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아카데미에 갈 수 있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빠른 취업을 원했기에 고아원에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학습 욕구가 남달라 노력 끝에 장학생으로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고아원 때보다 더한 고난이 시작되었다.
막 입학했을 때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동급생들의 하녀 행세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행히 수석을 놓치지 않는 그녀였기에 학년이 올라가고 나서는 후배들의 과외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수석을 지키기 위해 덜 자고 덜 먹고 덜 쓰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수석으로 졸업하면 평민이라도 황실에서 일할 자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처음 눈을 떴을 때 기숙사에서 혼자 병을 앓고 있었는지 몸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낯선 세계에 남겨진 기분에 마음고생도 심했다.
차라리 갓난아기로 태어났으면 애초에 차근차근 미래라도 준비해 볼 것이 아닌가.
아니면 ‘환생 트럭에 치었다가 일어났더니 소설 속이었다!’ 같은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냥 웹툰을 보다가 댓글 하나 달았다고 작품 속으로 들어오다니.
그녀는 정말 억울했다.
‘여주까진 바라지도 않아. 이왕이면 요즘 유행하는 소설들처럼 유복한 귀족 가문에서 가족들이 어화둥둥 하는 막내딸이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힘들수록 덕질로 행복해지는 그녀의 습성은 결국 이곳에서도 발휘되었다.
그녀는 또다시 쿠션을 만들기 시작했고, 노트에 습관처럼 제이드의 얼굴을 그려 나갔다.
그러다 문득 결심했다.
기왕 웹툰 속으로 들어온 거 최애인 제이드를 살려야겠다고.
다행이 빙의 시점이 원작 내용이 시작되기 1년 전이었다.
하지만 신분이 없는 현대 사회에서 온 탓에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공작의 아들인 제이드를 직접 만나는 것은 연예인 만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현실적인 신분의 벽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아이린은 그날부터 ‘덕업일치!’를 외치며 제이드가 있는 황태자의 보좌관실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린의 기억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다시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공부하다 지칠 때면 황태자를 따라 공개 행사에 나온 제이드를 덕질 하고는 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소울 메이트보다 더 소중하다는 덕질 메이트 데이지였다.
전에 없던 인생 최고의 덕질 메이트도 만나게 된 웹툰 속 세상.
아이린은 전처럼 외롭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데이지에게 미소를 지었다.
“수상하게 웃기까지 하네? 너 지금 약간 돌아 있는 건 알겠는데 오늘만큼은 그만해 줄래?”
“오늘만큼은?”
“뭐야? 설마 너 잊었어? 오늘 황실 주최 튤립 축제의 개회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잖아!”
데이지의 말에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 튤립 축제 퍼레이드에 우리 제이드 님이 나온다 했지!”
데이지는 황당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아이린, 너 어제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네가 제이드 님이 나오는 행사를 다 잊다니.”
그 순간 아이린의 뇌리에 불끈거렸던 황태자의 등 근육이 휙 하고 지나갔다.
갑자기 속이 타는 듯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아이린은 얼른 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컵을 식탁에 턱, 하고 내려놓자 데이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어제 술을 좀 마셨더니 머리가 띵해서 그래.”
“뭐라고? 술? 네가 술을 마셨다고?”
황당해하는 데이지의 질문에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응. 어제 너랑 헤어지고 그냥 집에 들어오기 아쉬워서 펍에 갔었거든. 하하…….”
“펍? 설마 요즘 평민들 사이에서 핫 하다는 그곳 말이야?”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기. 요즘 그곳 맥주가 인기가 좋은지 귀족들까지 신분을 숨기고 많이 놀러 간다고 하더라고.”
아이린의 말을 들은 데이지의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도 마셔 보고 싶다. 뭐야, 너 혼자 가구!”
아이린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서라. 데이지 너도 나처럼 알코올에 약한 타입 같은데.”
데이지는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말했다.
“날 뭐로 보구? 너랑 다르거든. 아주 술이 세다고. 다음에는 이 언니가 함께 가 줄게. 같이 갈 거지?”
아이린은 다신 어제 갔던 펍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지의 간절한 눈빛에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아. 약속한 거다? 그건 그렇고 아이린, 이럴 때가 아니야.”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데이지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러다 축제에 늦겠어. 얼른 나가자. 명당자리 맡아야지.”
“응, 가자.”
아이린은 얼른 코트를 걸치고 그녀를 따라 나갔다.
긴 다리로 마차에 먼저 도착한 데이지가 아이린을 향해 손짓했다.
“아이린, 얼른! 이러다가 늦겠어!”
“응, 다 됐어!”
문단속을 마친 아이린은 예전에 비해 짧아진 다리를 원망하며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튤립 축제의 퍼레이드는 수도의 중심 상점가인 열정의 거리 ‘아르도르’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아르도르는 귀족들의 드레스나 보석 같은 사치품을 주로 팔았다.
금색을 입힌 거리 위로는 귀족의 이목을 끌기 위한 화려한 양식의 건물이 많았다.
밤에는 빛나는 조명들로 인해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거리로 유명했다.
아르도르는 항상 귀족들로 붐볐다.
그래서 제국의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 아니면 아이린은 아르도르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아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구경한다고 괜히 거리에 나갔다가 악의가 있는 귀족에게 걸리면 나쁜 일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빙의 전에 시대 드라마에서 눈먼 귀족의 말에 평민 아이가 치여 죽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룩스 제국 또한 드라마처럼 신분제 사회였다.
때문에 가장 낮은 계층인 평민은 귀족에게 함부로 책임을 물 수 없었다.
아이린은 이 세계에서 평민 신분인 자신에게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정말 이불 속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 외에도 다행히 아카데미 안에서만큼은 공식적으로는 신분 고하가 없었다.
때문에 귀족인 데이지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도 신분으로 차별하는 귀족은 있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한 번도 그러지 않고 오히려 아이린을 챙겨 줘 항상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아이린, 벌써 아르도르 거리에 다 왔어! 축제답게 정말 아름답게도 꾸며 놨어. 어서 봐봐!”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던 아이린은 데이지의 성화에 그제야 창밖을 바라봤다.
귀족들의 거리답게 가게의 쇼윈도에 진열된 드레스와 보석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백화점 명품관이 따로 없잖아?’
아이린이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데이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
아닌 게 아니라 빛나는 조명 아래 아르도르 거리는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그러게. 퍼레이드 하려면 아직 다섯 시간이 남았는데.”
더 이상 마차로는 못 갈 것 같자 데이지가 마부 쪽을 향해 노크하듯 창을 두드렸다.
잠시 후 달리던 마차가 스르륵 멈췄다.
“아이린,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해. 퍼레이드 때문에 거리의 마차가 이곳부터 통제되거든.”
데이지에게 대답을 하려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데이지 엄청 본격적이잖아!’
“큭큭.”
데이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으며 자신의 매무새를 살폈다.
“왜? 나 뭐 묻었어?”
“아니, 데이지 네가 평소와 다르게 플랫슈즈를 신은 것이 보여서.”
데이지는 장난스럽게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그럼. 내가 오늘 멋진 제이드 님 보려고 내 몸과 같은 힐을 집에다 놓고 왔다고!”
그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부의 손을 잡고 데이지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아이린은 그녀를 뒤따라 내리며 거리를 스캔했다.
“데이지, 저기가 좋겠어!”
아이린은 얼른 데이지의 손을 잡아끌고 2층에 자리 잡은 디저트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안은 아직은 한산한 편이었다.
“퍼레이드 지도를 보니 이 앞 도로를 지나간대. 여기 야외 테이블에서 보면 제이드 님이 더 잘 보일 거야.”
고등학생 때 아이돌을 덕질 하던 친구에게 배운 노하우 덕분에 최적의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아직 카메라가 없어서인지 사람들이 그저 가까이 가서 보려고만 한단 말이지.’
“역시 아이린 최고! 그럼 여기서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면서 기다리면 되겠다.”
아이린은 데이지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데이지, 네가 쏘는 거지?”
“그래. 오늘 내가 쏠게.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와아! 데이지 최고!”
아이린은 전부터 달콤한 것을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빙의 후에는 제대로 된 디저트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동네 빵집에서 파는 것은 당장 끼니를 때울 수 있는 호밀빵이나 딱딱한 바게트뿐이었다.
게다가 디저트는 고가의 설탕이 잔뜩 들어가서 귀족들을 위한 사치품에 속했다.
“아까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여기 엄청나게 비싼 가게 같은데?”
아이린은 뒤늦게 화려한 카페 내부를 둘러보며 불안한 눈빛으로 데이지를 바라봤다.
“아이린, 왜 이래? 이 언니 이래 보여도 ‘무역 왕’의 딸이야. 돈 많은 거 알면서.”
그랬다.
데이지의 아버지는 남작이지만 제국에서 유명한 무역상이기도 했다.
데이지는 아이린을 향해 시크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의 종을 울려 직원을 불렀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오늘 만든 디저트 종류별로 하나씩 가져다주세요.”
“데이지 언니! 사랑해!”
잠시 후, 넓은 트레이 위에 색색의 마카롱을 시작으로 예쁜 미니 케이크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금세 테이블 위로 온갖 디저트가 꽉 들어찼다.
바로 폭풍 먹방이 시작되었다.
“행복해!”
“얼른 먹어 봐, 아이린.”
“응! 샤르르 녹는다, 녹아!”
아이린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으며 입가에는 활짝 핀 꽃처럼 미소가 맺혔다.
데이지는 스푼을 들어 디저트를 조금씩 떠서 아이린에게 내밀었다.
아이린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받아먹었다.
데이지는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입 안 가득 디저트를 머금은 아이린이 귀여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때 같으면 내주지 않는 머리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데이지에게 조건 없이 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데이지도 어서 먹어 봐. 자, 아!”
데이지는 디저트를 받아먹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렇게 맛있어?”
데이지는 얼른 입 안의 케이크를 삼키며 거리를 가리켰다.
“퍼레이드가 시작됐어! 저기, 저기!”
“어? 정말?”
아이린은 들고 있던 마카롱을 내려놓고 얼른 망원경을 꺼냈다.
“어떡해! 황태자 전하 옆으로 제이드 님이 보여!”
“어머, 정말?”
데이지도 얼른 망원경을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웬일이야……. 오늘은 백마 탄 왕자님 콘셉트인가 봐!”
“그러게.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제이드 님 동화 속 왕자님 같아!”
그렇게 흥분하며 제이드를 찬양하는 동안 퍼레이드가 그녀들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왔다.
퍼레이드 앞쪽에서 말을 타고 가는 황자들의 가까워질수록 소녀들의 비명 소리가 더 커졌다.
“어머,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 너무 멋있어요!”
역시 남주여서 그런지 포스가 남달랐다.
그 순간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바람이 살짝 불었다.
그 바람에 단정히 빗어 내렸던 황태자의 금발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흐트러졌다.
황태자는 흘러내린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
‘뭐야 저 홀리는 미소는?’
“으악! 황태자 전하!”
그가 말을 몰고 나아갈 때마다 소녀들의 비명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어릴 때부터 검을 수련해서인지 그의 남자다움은 제복으로도 가릴 수 없었다.
정말 아이돌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으아! 제이드 님!”
데이지가 제이드를 부르는 소리에 아이린은 금세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바로 꽃처럼 웃고 있는 제이드를 보았다.
‘어? 나 뭐 하는 거지? 제이드 님을 보러 와서 왜 황태자를…….’
그 순간 퍼레이드 내내 굳게 닫혀 있던 황태자의 입술이 그녀를 향해 호선을 그렸다.
아이린은 순간 얼굴이 붉어져 손에 들고 있던 마카롱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설마…… 날 보고 웃은 건 아니겠지? 독수리와 맞먹는 모겐족도 아니고. 저 멀리서 날 알아보지는 못했을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또다시 그와 눈이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렸다.
그때 데이지가 그녀의 등을 팡팡 치며 말했다.
“아이린, 뭐 해!”
“아, 아파, 데이지!”
순간 데이지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러게 왜 우리 제이드 님을 두고 고개를 돌려? 벌써 이만큼 가까이 오셨잖아!”
‘저 눈빛……. 데이지, 또 덕질 하다 흥분 상태에 들어갔구나.’
아이린은 아픈 등을 문지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나 너무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말라서.”
아이린의 말에 데이지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제이드 님에 대한 마음이 그 정도였어? 당장 죽지 않을 갈증 정도는 제이드 님을 위해 참아야지! 새하얀 제복 차림의 제이드 님을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단 말이야!”
데이지는 순간 괴력을 발휘하여 아이린의 몸을 잡고 제이드 쪽으로 빙글 틀었다.
아이린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설마 이렇게 먼데 날 알아본 건 아니겠지?’
기분 탓인지 황태자는 그런 아이린을 향해 다시 빙긋 웃었다.
아이린은 자신을 향해 웃은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의 흑역사가 자꾸만 떠올랐다.
황태자 레온하르트는 이내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방향을 바라보며 곧장 말을 몰고 달려갔다.
소녀들의 비명 소리가 거리에 가득 찼다.
황태자의 미소에 놀랐던 것도 잠시, 그 뒤를 따르던 제이드가 가까워지자 아이린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멀어지는 제이드를 향해 얼른 크게 소리쳤다.
“우유 빛깔 제이드! 사랑해요, 제이드!”
그녀의 선창으로 퍼레이드에 모여 있던 소녀들 모두가 제이드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황자들의 이름들은 ‘우유 빛깔 제이드!’에 묻히고 말았다.
아이린은 그제야 어깨를 쫙 펴며 흡족한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 * *
한 달 후.
그렇게 고대하던 황궁 첫 출근의 날이 밝아 왔다.
아이린은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거의 자지 못했다고 봐야 했다.
자정쯤에 침대에 누워 ‘아, 내일부터 제이드 님과……!’ 하는 생각만 새벽 세 시까지 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시간은 진정한 ‘일반인 코스프레(일명 일코)’를 위한 정신 수양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창밖으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세수를 마치고 나와 창문부터 활짝 열어젖혔다.
“와, 상쾌해!”
조금 피곤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문뜩 빙의 전 시절의 첫 출근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알바를 하며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어서 기분이 들떴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덕업일치’까지 할 수 있다니!
정말 완벽한 직장이었다.
‘그런데 황태자와 마주치면 어쩌지? 머리를 다르게 해 볼까? 아니, 분장을 해 볼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모두 불가했다.
시험 볼 때 제출한 얼굴과 다르면 스파이로 오인받을 수도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옷을 먼저 입고 생각해 보자!’
옷이라고 해 봤자 여름용 두 벌, 봄가을용 두 벌, 이번에 취해서 질러 버린 빨간 드레스와 코트 한 벌이 전부였다.
다행히 제국은 겨울에도 영하까지는 내려가지 않아 평민들은 얇은 외투로 겨울을 났다.
아이린은 일단 가진 옷을 모두 꺼내 거울 앞에 서서 대 보았다.
“검은색은 좀 상복 같나? 이건 등이 파인 것 같고. 민트색은 귀엽긴 한데 너무 화사한 것 같고. 뭐 입지?”
거울 속에는 155센티 정도의 작은 키, 뽀얀 피부에 젖살이 볼록해 귀엽고 앳된 소녀가 서 있었다.
은빛의 보슬보슬한 웨이브 단발머리에 동글동글한 얼굴, 깊은 바다색의 큰 눈.
마치 애니메이션 속의 강아지나 토끼상의 소녀 캐릭터가 3D로 제작된 느낌이었다.
작은 얼굴에 키 크고 마른 모델형이었던 예전과는 정말 상반되는 외모였다.
아이린은 찹쌀떡같이 말랑하고 하얗고 통통한 볼을 잡아당기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후우…….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얼굴이야.”
아이린은 커리어 우먼 같았던 과거의 느낌을 떠올리며 한숨지었다.
이윽고 그녀는 검정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신입 사원이라면 역시 검은색이려나?”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린은 시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아아! 이러다 늦겠어!”
아이린은 허둥지둥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달려가 바게트 한 조각을 입에 물고 현관으로 향했다.
마부를 재촉해서 황궁 가까이에 오니 출근하려는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으윽, 여기도 교통 체증이 있구나.”
아이린은 첫날부터 지각할 수 없어 일단 마차에서 내렸다.
“어쩔 수 없지!”
아이린은 양손으로 치마를 잡고 황궁 안으로 내달렸다.
운이 좋게도 처음 길을 물어본 사람이 황태자 궁으로 들어가는 시녀였던 터라 지각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드레스라도 골라 놓고 자는 건데.”
아이린은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살짝 두드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아이린은 문을 빠끔히 열며 조심히 물었다.
“저…… 이곳이 보좌관실 맞나요?”
“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신입 직원 아이린 토트입니다!”
그녀의 씩씩한 목소리에 사무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서류 더미를 들고 위태롭게 서 있던 더벅머리의 중년이 다가왔다.
“아, 오늘 온다던 신입 직원이군. 실장 베릭 스타크입니다.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아이린은 그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목 오늘 신입 직원 오기로 한 것 다들 기억하지? 여기 새로 온 신입 직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이린 토트입니다.”
“아이린 토트 씨라고 하네요.”
아이린은 단정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황태자 보과관실에서 일하게 된 아이린 토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나도 잘 부탁하네. 미안한데 난 지금 보좌관님께 가야 해서. 이만.”
실장이 서류 더미를 들고 사라지자 마르고 큰 키에 깔끔한 네이비 슈트를 입은 미청년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환영해! 드디어 여자 직원이 들어왔어. 우중충했던 사무실이 환해지겠네.”
그 말에 옆에 있던 인자한 아저씨 같은 통통한 직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쥴리언, 당신도 여자 직원입니다.”
아이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보았다.
‘여자였어?’
쥴리언은 찡긋하며 그녀에게 윙크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앳된 청년이 걸어 나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반가워요. 전 토마스 해리슨이에요. 이번 아카데미 졸업생이죠?”
“네. 혹시 아카데미 선배님이세요?”
“저는 3년 전에 졸업했죠.”
토마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금 전의 통통한 직원에게 말했다.
“선배님, 그럼 저 드디어 막내 탈출인가요?”
“그거야 수습 기간을 거쳐야 알 수 있지.”
수습?
잠시 정적이 생긴 그때, 가장 안쪽의 자리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안경 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차장 로건 테일러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이린 토트입니다.”
차장은 살짝 내려온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 토트 씨는 오늘부터 3개월 동안 수습사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네? 수습이요?”
아이린은 황궁에 수습 기간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로건을 바라봤다.
“네, 수습. 황궁의 다른 근무지와 달리 황태자 보좌관실에는 수습 기간이 있습니다.”
로건은 그녀를 보고 말하다가 직원들을 바라봤다.
“정직원 여부는 수습 기간이 끝나면 여기 있는 선배들과 상사들의 평가를 종합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어요.”
‘수습이라니……. 이곳도 취업 지옥이구나.’
아이린은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리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습 기간 동안 아이린 토트 씨는 이곳에서 이름이 아닌 ‘수습’으로 불리게 됩니다.”
‘헐, 이름도 안 불러 주는 거야?’
아이린은 살짝 당황했지만 지난 삶에서의 사회생활 경험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면 수습 기간을 잘 버티고 정직원이 되시면 됩니다.”
순간 정적이 흐르자 토마스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습 기간 동안 제가 사수예요. 이리 오세요. 자리 안내해 줄게요.”
상황이 마무리된 듯하자 로건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인사 끝났으면 모두 자리로 돌아가서 업무 시작하세요.”
직원들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아이린도 토마스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가 사수니 말 놓아도 될까요?”
아이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네, 선배님.”
“수습 기간 동안 선배들의 서류 심부름이 많을 거야.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부탁하는 자료들을 찾아 서류로 정리하는 일이야.”
“네, 선배님.”
“잘하면 평가 점수가 높을 거야. 그럼 정직원이 돼서 계속 함께 일할 수 있겠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는 두 손을 모으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수습님, 이렇게 부탁할 테니 꼭 통과해 줘. 나 3년이나 막내였어. 이번에는 정말 막내를 탈출하고 싶다고.”
“넵! 잘하겠습니다.”
토마스는 그녀의 활기찬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은 먼저 황궁 구조를 익히고, 자료들은 도서관에 있으니까 가서 대출 카드를 만들어.”
“네.”
‘오늘은 첫날이라 업무를 안 시키려나 보다. 다행이다, 정신없었는데. 그런데 점심은 어쩌지?’
“참, 그리고 점심은 황궁 직원 식당에서 사 먹거나 개인적으로 도시락을 가지고 와도 돼.”
‘뭐야? 내 생각이 읽힌 거야?’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때 토마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도시락은 사무실에서 먹으면 저기 보이는 차장님께 혼나니까 밖으로 나가서 먹는 게 좋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참, 금지인 곳은 들어가지 말고.”
“금지요?”
그녀의 물음에 슬쩍 차장 쪽을 바라보던 토마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응, 황족들만 들어가는 곳. 거기 들어갔다가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황궁 구조를 잘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거야.”
‘뭐? 목숨이 위험하다고?’
순간 등에 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린은 정말 알아주는 길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최애를 사랑해도 내 목숨이 더 소중한데……. 나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냥 교수님들의 말씀대로 아카데미에 남을 걸 그랬나?’
속으로 고민에 휩싸여 있는데 토마스가 뭔가를 내밀었다.
“수습! 자, 이거.”
작은 쪽지였다.
“풀어 봐.”
토마스는 검지를 입가에 댔다.
아이린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지도네요?”
“응, 원래 황궁 지도를 만들면 불법이야. 이유는 알고 있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보안을 위해서죠.”
“잘 알고 있군. 하지만 신입 직원들은 이 넓은 황궁에서 쉽게 길을 잃을 수밖에 없겠지.”
아이린은 공감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토마스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당부했다.
“그러니까 이 지도는 사무실에서만 보도록 해! 절대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절대 안 돼. 알았지?”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아. 그럼 도서관에 얼른 다녀와.”
토마스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열두 시 반까지 돌아오면 돼. 도서관은 황태자 궁 안에 있으니까 지나가는 시녀에게 물어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네, 선배님.”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방금 본 지도를 떠올리며 도서관을 찾아가려는데 마침 지나가는 시녀가 보였다.
“저기…….”
“네?”
“혹시 도서관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아시나요?”
“도서관이요? 아, 황태자 보좌관실에 새로 오신 직원이시군요.”
그러면서 아이린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시녀가 연이어 말했다.
“이번에는 오래 계셨으면 좋겠네요.”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지?’
“네?”
“아, 아닙니다. 도서관은 황태자 궁을 나가 정원을 지나면 보이는 큰 건물이에요. 저는 그럼 이만.”
시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할 사이도 없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 참, 나도 빨리 움직여야겠다.”
아이린은 도서관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이린은 정원을 절반쯤 가로질러 가다 가까이 보이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헉, 헉, 뭐가 이리 넓어? 누가 황궁 아니랄까 봐.”
앞으로 일 때문에 자주 도서관에 가야 하는 그녀로서 이 먼 거리가 걱정되었다.
“으으, 따가워. 까졌나?”
살짝 치마를 올려 구두를 벗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뒤꿈치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살점이 벗겨져 있었다.
아이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오늘 신은 신발은 입사 기념으로 산 구두였다. 새 신발인 데다 굽이 어느 정도 있기에 오래 걷는 것은 무리였다.
“윽, 피도 나네. 어쩌지?”
모르고 다녔을 때와 달리 피가 나는 것을 보니 상처가 아렸다.
어쩐지 그녀는 다시 구두를 신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그녀 앞에 떨어졌다.
아이린은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봤다.
벤치 옆 커다란 나무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중저음의 동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붙여.”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근데 이건 뭐지?’
아이린은 얼른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통을 열어 보았다.
약초 향이 나는 거즈였다.
‘이 향은…… 설마 한 병에 10골드나 한다는 그 약?!’
아이린은 언젠가 손을 베였을 때 데이지가 발라 줬던 약을 떠올렸다.
그때 들은 가격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 황궁에서 한 달 일해 받을 수 있는 월급이 200실버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얼떨떨한 와중에도 호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 얼른 뒤꿈치에 거즈를 붙였다. 그리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이린은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하지만 풍성한 나뭇잎과 따갑게 내리쬐는 가을 햇빛의 역광으로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이린은 눈이 부셔 이마에 손을 대며 소리쳤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이거 어떻게 돌려 드리죠?”
여전히 상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햇빛 때문인지 황금처럼 빛나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거 가져도 돼.”
‘매우 감사하긴 한데…….’
“그렇지만 이거 엄청 비싼 건데요!”
그러나 남자는 대답 대신 엉뚱한 걸 물었다.
“황궁 직원 같은데, 업무 시간 아닌가?”
그의 목소리에서 권위가 느껴졌다.
“네……? 네!”
‘고위 귀족? 아니면 황족인가?’
아이린은 나뭇잎 사이로 얼핏 보이는 커프스 장식을 보고 그가 보통 신분이 아닌 걸 알았다.
“약은 되었으니 어서 가던 길 가도록.”
아이린은 괜히 책잡힐까 싶어 얼른 꾸벅 인사를 하고 도서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잠시 후, 아이린이 떠나자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어내렸다.
황태자 레온하르트였다.
그는 허둥지둥 달리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만났네, 나의 신데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