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0)

2.

조용한 황궁의 정원에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정말 멀다, 멀어. 무슨 정원이 대공원 수준이야! 이러다 도서관까지 선배가 말한 시간에 맞춰 가지 못할지도 몰라!”

아이린은 투덜거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끝까지 달려갔다.

다행히 탈진하기 직전에 도서관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저 건물이 황궁 도서관이구나? 역시 황궁이라서 그런지 아카데미 도서관과 비교할 수 없게 웅장하고 화려하네. 아마 책도 더 많겠지?”

아이린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서가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사서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신입 직원이시군요.”

“네!”

‘어떻게 보는 사람마다 내가 신입인 걸 알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볼을 긁적였다.

“어떻게 신입인지 아냐고요?”

아이린은 놀란 얼굴로 사서를 바라봤다.

‘뭐지? 내가 방금 입으로 말했나?’

“이 시간에 방문하시는 분들 중 제가 얼굴을 모르는 분이 있다면 십중팔구 황태자 보좌관실 신입 직원이라서요.”

‘이상하네. 다른 직원들은 도서관에 오지 않나?’

“다른 직원분들은 거의 오지 않습니다.”

‘헐, 혹시 독심술이라도 하시나? 돗자리 까셔도 되겠어! 근데 왜 도서관에 사람이 안 온다는 거지?’

“사서님, 황궁 도서관인데 다른 분들이 찾지 않는다니,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그 질문에 사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황족이나 고위 귀족분들은 각자 개인 서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곳의 책들은 거의 유물이라고 봐야 해요.”

“유물요?”

‘무슨 유물? 도서관이 아니라 박물관이었어?’

“네. 오래된 유물이자 보물이죠. 오직 황궁에서만 소유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서적이 가득합니다.”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군요.”

“작은 훼손에도 목숨이 오갈 정도로 귀중한 책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사서의 눈빛이 마치 자신의 목숨과 책을 비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으힉!’

아이린은 순간 한기를 느끼며 목을 쓸었다.

“하지만 그렇게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세요! 책 때문에 죽을 수 있다며!’

사서는 커다란 문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저 문 안쪽으로만 들어가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휴,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렇다고 문 밖의 서적을 훼손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문의 재산을 통째로 바쳐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가문의 재산이라니……. 가문이 없는 내가 책을 훼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 여기서 무사히 일할 수 있는 걸까?’

사서의 말에 아이린은 땀이 삐질 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 신입 직원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네?”

“대출 카드 만들러 오신 것 아닙니까?”

“아, 네! 제 이름은 아이린 토트입니다.”

잠시 사서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그가 곧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대출 카드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린은 사서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규모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높은 천장 아래 셀 수 없는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역시 황궁 도서관이구나.’

아이린은 수업 시간에 제목으로만 들었던 희귀한 서적들을 직접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책 욕심이 많았던 그녀였다.

아카데미에서 보지 못했던 귀한 책들이 가득 차 있자 마음이 심히 흐뭇해졌다.

아이린은 얼른 시계를 보았다.

‘음, 한 시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둘러볼까?’

아이린은 어쩐지 신이나 이리저리 다니며 도서관 내부며 책 따위 등을 구경하였다.

그때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던 도서관 창가에서 돌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이린은 무심코 바람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랑거리는 새 하얀 커튼 사이로 기대어 서 있는 웬 인영이 보였다.

‘누구지?’

키가 180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적당히 짧고 짙은 붉은 머리를 말끔히 넘기고 있었다.

남자는 책에 잔뜩 몰입했는지 전혀 미동이 없었다.

바람이 한 번씩 살랑일 때마다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는 그때마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단정히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유명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우와……. 누군지는 몰라도 혼자 영화를 찍고 있잖아?’

그때였다.

뒤늦게 시선을 느꼈는지 어두운 갈색 눈이 그녀를 향해 날카롭게 빛났다.

곧 잔뜩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지?”

‘헉, 너무 대놓고 구경했나 봐.’

당황한 아이린은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 저는 그러니까, 새로 온 황궁 직원입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서관 직원이 새로 올 시기는 아니고. 혹시 황태자 보좌관실 소속인가?”

“네! 맞습니다.”

‘……뭐지? 내가 가는 곳마다 내 소속을 알고 있잖아?’

그때 남자가 비웃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형님의 유별난 직원 채용이 또 시작 되었군.”

“네? 유별난 직원 채용이라니요?”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왜 갑자기 가까이 오는 거야!’

아이린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남자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린은 이내 등에 책장이 닿아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뭐지, 이 상황은? 마치 키스 직전 같잖아?

그녀는 너무 혼란스러워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그때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은 살그머니 눈을 떠 보았다.

남자는 그녀의 머리 위쪽 책장에 들고 있던 책을 꽂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린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으악, 나 뭘 상상한 거야! 오늘 밤 이불 킥은 예약이구나!’

“앞으로 고생 많겠어. 그럼 잘해 보도록.”

남자는 그 말과 함께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유유히 아이린 옆을 지나쳐 나갔다.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들어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되뇌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분명 황태자를 형님이라 불렀어. 그럼 저 남자가 설마…….’

“에드먼드?”

2황자 에드먼드는 원작에서 악당 캐릭터로 구타를 유발하였다.

‘하지만 자기 죄를 짊어지고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마지막은 처연하고 아름답기까지 했지.’

마지막에 에드먼드의 주식을 샀다는 이들도 있었다.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이 컸다며.

무관심한 아버지에 폭력 성향의 어머니였으니.

아이린 또한 그의 마지막에는 동정심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불쌍하다고 용서해 주기에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하지만 방금 그녀가 직접 본 에드먼드는 아직 순수한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어 앳되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아이린은 그에게 예정된 새드 엔딩이 갑자기 안쓰럽게 느껴졌다.

‘제이드 님도 2황자도 모두 죽지 않고 행복하게 끝날 수는 없을까?’

그때 상념에서 깨어난 그녀는 시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점심시간! 늦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한 아이린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 토마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계를 가리켰다.

“수습님, 늦었어.”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헉, 헉……. 늦어서 죄송합니다.”

토마스는 문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말했다.

“다음에는 그러면 안 돼. 우린 퇴근 시간은 몰라도 점심시간은 칼같이 지킨다고!”

“죄송합니다!”

“첫날이라 봐주는 거야. 지금도 늦었으니 얼른 따라와. 직원 식당을 안내해 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를 따라간 곳은 직원 식당이라 부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에서 직원들이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드라마 속에서나 본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토마스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워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문할 때 체크하고 월말에 한꺼번에 계산하는 시스템이야.”

아이린은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네? 직원 식당인데 무료가 아니고요?”

“응. 메뉴마다 다르지만 한 끼에 1실버 정도. 월급에 별도로 식비가 30실버 나오거든.”

“식비요?”

“응. 그 돈으로 이곳에서 점심을 사 먹거나 개인적으로 싸 오거나. 자유야.”

‘30실버라니. 식비만 모아도 금방 부자 되는 거 아냐?’

그때 토마스가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자, 여기 메뉴판.”

“감사합니다.”

아이린은 그중 저렴한 가격인 오늘의 메뉴를 보았다.

‘……가장 싼 오늘의 메뉴가 소고기 스테이크라니.’

아이린은 옆 테이블 접시를 본 순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세계의 직원 식당에 나온 어설픈 고기 덩어리 스테이크가 아니었다.

가니쉬까지 멋들어진 럭셔리한 스테이크였다.

토마스는 넋이 나간 아이린에게 장난스럽게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우리 수습님 입사 기념으로 사 줄게.”

“우와, 정말요? 선배님 최고!”

‘역시 레스토랑 하면 두툼한 소고기 스테이크지!’

아이린은 선배의 점심 대접이 당근이었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바로 그날 점심 이후부터 그녀의 지옥행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슨 지옥이냐고?

현대 직장인들의 전매특허!

야근 지옥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소처럼 일한 적이 있었을까?’

그녀는 소를 먹고 싶었지 소처럼 일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매일 목적 없이 반복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일을 하고 나서의 뿌듯함은커녕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원래부터 그녀는 황궁 일이 꿈은 아니었다.

단지 제이드의 죽음을 막아 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해! 근무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제이드 님의 뒤통수조차 보지 못하다니…….’

이곳은 그야말로 업무 지옥이었다.

아이린은 막내인 만큼 선배들을 위해 수집한 자료가 책상 한가득 쌓여 있었다.

때문에 업무 시간 동안 거의 도서관에 살았고, 자료 정리를 위해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황태자일 때도 이 정도 업무량인데 황제가 되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망했다. 이번 생은 놀고먹으며 덕질 하고 싶었는데.’

“수습님? 그렇게 멍 때릴 시간이 없을 텐데. 혹시 시간 남으면…….”

“아닙니다. 보시는 것과 다르게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선배들 눈치에 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첫날 토마스가 말한 것처럼 점심시간만큼은 꼭 지켜진다는 것이다.

“수습, 점심시간이다.”

그녀는 벽시계를 흘끔 보았다.

초침까지 정확하게 지난 열두 시 반이었다.

그때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은 뻐근해진 어깨를 움직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휴우, 이제 좀 쉬겠어…….’

그때 토마스가 그녀의 앞으로 오더니 물었다.

“수습, 오늘도 도시락이지?”

“네, 선배님.”

그녀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들과 식사를 하면 좋겠지만, 한 끼 식사비로 써 버리기에 1실버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그녀는 그래도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직원 식당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토마스는 소매가 낡은 아이린의 드레스를 보며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선배로서 점심을 사 주겠다고 그녀에게 함께 가길 권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선배라도 얻어먹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후배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토마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맛있게 먹고 이따가 보자.”

“네. 선배님도 맛있게 드십시오.”

아이린은 선배들이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 나가는 모습에 허리 굽혀 깍듯이 인사했다.

곧 혼자 남은 그녀는 허리를 통통 두드리다가 폈다.

그리고 책상 아래 놓아두었던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녀가 그렇게 도시락을 들고 간 곳은 출근 첫날 정원을 달리다 발견한 벤치였다.

한겨울이었지만 다행히도 오후 햇살이 따뜻했다.

아이린은 기지개를 쭉 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 상쾌해. 점심시간이라도 건물을 빠져나오니 살 것 같네.”

제이드를 향한 덕업일치 하나로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제이드는 보지 못하고 일만 죽을 것같이 하는 황궁 생활에는 스트레스가 가득했다.

아이린은 바구니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크게 한 입 물었다.

“으음, 맛있어!”

아이린은 샌드위치를 음미하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공기 좋다……. 오늘 정말 하늘 정말 예쁘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유명 사진작가의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아이린은 조금은 나아진 기분에 살짝 시계를 보았다.

“아직 한 시간은 남았구나.”

그녀는 얼른 바구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고전의 이해와 역사.

제목만으로도 졸음을 유발할 수 있을 법했다. 하지만 그녀가 책을 펴자 그 속 제목은 그와 달랐다.

공작님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제목만큼이나 핫한, 요즘 제국 내에서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래. 이 재미라도 있어야지.’

예전에도 점심시간이나 버스로 출퇴근하는 길에 로맨스 장르의 소설이나 웹툰을 읽던 그녀였다.

다행히도 이 세계에도 로맨스 소설이 존재했다.

‘내 뺨을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와, 대사는 진부한데 이 남주 왜 이렇게 매력 있는 거야?’

아이린은 그렇게 이곳에서도 업무 스트레스를 틈틈이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풀었다.

‘점심시간까지 건드렸으면 제아무리 나라도 제이드 님을 향한 덕업일치를 포기하고 말았을 거야.’

“그런데 이 집 정말 로맨스 맛집이네? 역시 남주는 이래야지.”

아이린은 소설에 푹 빠져 감탄사를 외치다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

“헉, 5분 전이잖아! 늦었다!”

아이린은 후다닥 바구니를 들고 사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 탁 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황태자 레온하르트였다.

허둥지둥 달려가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던 그는 그녀가 앉았던 벤치를 바라봤다.

“이런, 책을 놓고 갔네.”

아이린이 감탄하며 읽고 있던 책이 놓여 있었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재미있게 읽었지?”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에 털썩 앉았다.

‘고전의 역사와 이해? 이게 그렇게 감탄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이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책의 한 부분을 대충 펴서 읽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그는 순간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곧 얼굴이 화르륵 하고 사과처럼 붉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책이 이렇게……!’

그는 바닥에 떨어진 책을 흘끔 보며 매우 민망해했다.

물론 그라고 남녀 관계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차기 황제로서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그에게 성교육 자료라며 적나라한 화첩이 제공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산적한 업무와 그에 관한 전문 서적만 읽기에도 너무나 바쁜 그였다.

그 때문인지 그런 쪽으로 적나라한 문장에 면역이 없었다.

잠깐 보았지만 화첩들보다 더 야릇한 상상을 일으키는 문장들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혹시 누가 볼까 두리면거리면서 얼른 책을 주워 들었다.

그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었다.

‘후우, 다행히 아무도 없군…….’

“그런데 이 책을 어쩌지? 돌려줄 수도 없고.”

직접 돌려주기도 그렇고, 누군가를 통해 돌려주는 것도 이상했다. 내용을 알고 나니 책을 들고 있기조차 민망했다.

그러면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은 왜일까?

그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찾으러 오겠지?”

그녀가 책을 찾으러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제목부터 이상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이대로 놓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쩔 수 없지.’

레온하르트는 얼른 책을 숨기듯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빠르게 황태자 궁으로 걸어갔다.

* * *

그 시각, 아이린도 고개를 숙이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쩐지 손이 가볍게 느껴졌다.

‘급히 오느라 책을 놓고 왔나 보네. 누가 보면 어쩌지?’

하지만 이미 업무 시간이어서 되돌아가 찾아볼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아이린은 조용히 들어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었다.

그때 차장이 걸어와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수습은 또 점심시간 지각이군요. 벌점입니다.”

아이린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차장은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본 후 바로 돌아서 갔다.

‘무서웠어……. 차장님은 정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아.’

그때 토마스가 위로하듯 눈을 찡긋거렸다.

아이린은 그에게 괜찮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짓고는 서류 더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딸깍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린은 무심코 고개를 들다 순간 사무실에 환한 빛이 가득 찬 듯한 느낌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새하얀 누군가가 보였다.

‘천사?’

하늘하늘한 은발에 바다를 연상시키는 짙고 푸른 눈, 명품 백자같이 빛나는 새하얀 피부.

레이먼드 공작가를 상징하는 고고한 학이 그려진 문장의 하얀 제복.

바로 아이린이 그렇게 만나길 고대하던 황태자 보좌관 제이드였다.

‘꺄악! 제이드 님!’

보좌관실 실세인 그의 갑작스런 등장과 함께 아이린을 제외한 직원들은 얼굴을 책상 위로 더 파묻었다.

“차장.”

“네, 보좌관님!”

자리를 비운 실장 대신 차장이 앞으로 나갔다.

아이린은 뒤늦게 선배들처럼 서류 더미에 얼굴을 묻는 척하며 눈은 그를 향했다.

‘드디어 제이드 님을 만났어! 그런데 매사 날카로운 차장님이 저렇게 군기가 든 건 처음 보네. 역시 우리 제이드 님! 잠깐. 그런데…… 지금 내 상태가 어떻지?’

아이린은 조심스레 책상 밑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그녀는 자신의 엉망인 몰골에 경악하며 내적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거뭇거뭇한 다크 서클, 야근으로 인한 늦은 취침에 푸석해진 피부, 거기다 살짝 떡진 머리까지!

그야말로 더러웠다.

아이린은 도저히 더티한 이 모습으로는 제이드와 첫인사를 할 자신이 없었다.

‘최애에게 이런 더러운 첫인상은 절대 안 돼!

그녀는 무언가 줍는 척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때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습!”

“네!”

“뭐 하고 있나? 나와서 보좌관님께 인사드리도록!”

‘그래. 사람은 외모가 중요한 게 아냐 알맹이가 중요하지…….’

제이드는 잠시 후 책상 아래에서 슬그머니 나오는 은발의 작은 소녀를 보았다.

‘메이린……?!’

“보좌관님, 수습인 아이린 토트입니다.”

“아.”

제이드는 잠시나마 어릴 적 잃어버린 동생과 매우 닮은 그녀를 보고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차기 재상 후보로 손꼽히는 인물답게 얼른 감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아이린 토트 씨.”

천상의 목소리 같은 미성에 아이린은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곧 제이드의 시선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보좌관님.”

아이린은 그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힝, 첫 만남인데…….’

그때 헛기침을 하는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흠, 수습? 이제 그만 고개를 들지.”

아이린은 깜짝 놀라며 굽혔던 허리를 팍! 하고 폈다.

“넵, 차장님.”

그렇게 허리를 들었지만 도저히 제이드와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제이드의 구두코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머리라도 감고 출근할걸.’

얼굴을 조금이라도 감춰 보려고 고개를 숙였지만 이번에는 기름진 정수리가 신경 쓰였다.

그동안 최애를 맨날 만나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녀였다.

‘제이드 님 구두코를 바라보는 것에도 심장이 날뛰는데, 앞으로 나 어떡하지?’

자신의 연약한 멘탈에 대해선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순간 아이린은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서 흥분해 기절했던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때 제이드가 차장에게 말했다.

“그 일은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예, 보좌관님.”

제이드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나중에 봐요, 아이린 토트 씨.”

아이린은 그의 꽃 미소에 순간 청력까지 상실한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역시 제이드 님……. 나의 시청각을 모두 가져가시다니!’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차장을 따라 제이드의 등에 기계처럼 인사했다.

그때 잠시 정신이 떠나 있던 그녀를 깨우는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렸다.

“수습!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네? 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차장은 얼빠진 표정의 그녀에게 화가 나는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저는 두 번 말하는 것 싫어합니다.”

아이린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그런 말보다 죄송한 짓은 이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린은 제이드 때문에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내리며 대답했다.

“네…….”

차장은 그런 그녀를 다시 한번 날카롭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주부터 실장님을 따라 황태자 전하의 보좌 업무를 교육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아,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구나. 나 이제 매일 제이드 님을 만날 수 있는 거야? 어떡해!’

“또 그 멍한 표정이군요.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넵! 듣고 있습니다.”

차장은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 앞에서는 그 넋 나간 표정은 주의하시길.”

“네, 죄송합니다.”

차장은 그녀의 살짝 떡진 머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음 주 출근 복장은 최대한 단정하고 깔끔하게. 아시겠습니까?”

그녀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와중에 보좌관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표정을 한 상태였다.

‘우리 수습님도 보좌관님 때문에 눈이 멀었구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 보좌관님이 넘치게 멋지긴 하지…….’

토마스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이린은 그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차장에게 폭풍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도서관에 가려고 서류를 잔뜩 챙기면서도 흥얼흥얼거렸다.

아이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도서관 다녀오겠습니다!”

모두들 그녀를 보며 드디어 미쳤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 * *

도서관에 도착한 아이린은 법전이 가득한 서가를 찾았다.

그날처럼 2황자가 명당인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자리를 참 좋아하는구나.’

창밖에서 뻗어 나오는 햇살이 그의 머리칼을 장밋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이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오늘도 왔군.”

오늘은 그녀의 기척을 느꼈는지 그는 아이린이 오자마자 바로 고개를 들며 아는 척을 했다.

아이린은 어쩐지 반가워 환한 미소를 지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늘도 참 잘생기셨네. 황궁에 오니 눈이 호강한단 말이야.’

주조연들의 주요 무대여서인지 황궁은 아카데미와 다르게 남다른 인물들이 많았다.

그중 예상치 못한 냉미남 스타일의 에드먼드가 있었다.

그녀는 과거에 역하렘물을 즐겨 보곤 했다.

여러 종류의 꽃미남들이 대거 출연하여 그 매력들을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에드먼드는 황태자 레온하르트를 음해하는 장면에서만 주로 등장할 뿐 구체적인 인물 묘사는 거의 없었다.

웹툰에서도 외모를 강조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그랬는데 이렇게 잘생겼을 줄이야.

그때 그녀의 책 수레를 본 에드먼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역시 형님의 업무량은 어마무시하군.”

아이린은 책들을 책상에 얹으며 말했다.

“2황자 전하도 많은 업무량을 소화 하시고 계신다 알고 있습니다.”

“황태자 보좌관실 막내인 네 앞에 놓인 서류를 보니 내 업무량이 많은 것 같지 않구나.”

‘황자인데 나보다 일이 적다니? 황태자 궁만 일감 지옥인 거야?’

그 순간 2황자 궁으로 옮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제이드 님만 아니면…….’

아이린은 사실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자리싸움은 평민인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생각이었다.

예전부터 모든 평민들의 삶은 왕이 누구로 바뀌어도 언제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물론 더 폭정을 하는 왕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선정을 하더라도 그 이익은 귀족들에게나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다행히도 그녀가 살게 된 룩스 제국은 강화를 맺은 여러 왕국들이 있을 정도로 강대국이였다.

그리고 평민이지만 부를 축척한 상인이나 전문적인 법률가 등이 신흥 계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평민의 삶도 다른 나라보다 대우가 좋았고, 딱히 누가 황제가 되든 관심이 없었다.

아이린은 최애인 제이드만 살려 놓고 나면 일이 편한 곳으로 이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린은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황후인 어머니의 학대 속에 자란 비운의 황자.

원작을 읽을 때는 천사 같은 제이드와 적이기에 그를 막연하게 악당으로 정의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 악당이기보다는 그냥 책을 좋아하는 미청년 같았다.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건가?”

‘나도 모르게 너무 봤네.’

“그게, 참 잘생기신 것 같아서요.”

에드먼드는 순간 놀란 얼굴로 그녀를 봤다.

“내가?”

“네”

‘뭐지? 자기가 잘생겼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순간 그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너, 보기와 다르게 거짓말을 잘하는구나. 네가 그렇게 말해도 내가 네게 해 줄 건 없다.”

에드먼드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책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설마 자신의 미모를 모르는 거야?’

아이린은 왠지 이대로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뭘 바라고 말한 것 아니에요. 그냥 사실을 말씀드린 거예요.”

그를 향해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들은 조용히 각자 책을 읽었다.

잠시 후, 아이린은 어깨가 결려 스트레칭을 하며 2황자를 바라봤다.

그는 책을 보며 아까 그녀에게 인사했을 때처럼 삐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뜩 그가 읽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저 책이 무언지 알면 저 미소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이린은 조용히 일어나 에드먼드가 책을 일고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서서 책을 들고 있었기에 제목을 볼 수 있었다.

‘오늘도 나는 시를 읽는다……?’

아이린은 의아했다.

어쩐지 시문학과 그는 어울리지 않았다.

외모만 본다면 전쟁 영화의 소년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투나 정치 쪽 서적을 읽고 있을 분위기였다.

“시를 좋아하시나 봐요.”

에드먼드는 그녀의 물음에 순간 당황해 책장에 책을 얼른 꽂았다.

“아니야. 그냥 앞에 있어서 본 거다. 그러니 괜한 오해 하지 마.”

“시를 읽는 것이 어때서요. 전 좋은 것 같은데. 힐링도 되고요.”

그때 2황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어? 무표정이랑 비웃는 미소만 지을 줄 알았는데. 귀엽네?’

그때 에드먼드가 조심히 물었다.

“너도…… 시를 읽으면 기분이 좋아 져?”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시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분을 좋게 하는 내용의 시면 기분이 좋아 지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사랑에 관한 시라든가.”

에드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에 관한 시?”

“네. 사랑에는 희로애락이 모두 있으니까요. 그중 행복한 시면 기분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2황자는 곧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그래.”

아이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2황자 전하도 해피 엔딩을 좋아하세요?”

“어느 누가 해피 엔딩을 좋아하지 않겠어?”

아이린은 그의 엔딩이 배드 엔딩인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네, 맞아요. 누구나 해피 엔딩을 꿈꾸죠. 2황자 전하는 어떤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싶으세요?”

“나의 해피 엔딩?”

에드먼드는 그녀의 물음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학대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그것이 습관이 돼 그냥 따르고 있었다.

‘난 도대체 무얼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 때문일까?’

이곳에서 시를 읽고 있는 그였지만 그는 본래 사람을 죽이는 검술에 능했다.

때문에 어머니의 친정 가문 산하, 어둠 세계의 수장이 되었다.

아이린은 고민에 빠진 그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아이린? 아이린!”

누군가 아이린의 어깨를 흔들었다.

“으음, 누구……?”

“휴……. 아이린, 너 어제도 일하다 밤새운 거야?”

아이린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어? 데이지? 네가 어떻게 우리 집에 있어?”

“바보야, 아무리 밖에서 두드려도 답이 없길래 놀라서 허겁지겁 들어왔잖아! 이걸로!”

우체통 아래 숨겨 둔 비상 열쇠였다.

“걱정돼서 뛰어 들어왔는데 네가 시체 같이 누워 있는 게 아니겠어? 죽은 줄 알고 얼마나 놀랐다고.”

아이린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놀라게 해서 미안.”

데이지는 얼른 주방으로 가 물을 가져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물 마시고 정신 좀 차려 봐!”

“고마워, 데이지. 콜록콜록.”

아이린은 갑작스런 데이지의 방문에 정신이 없었는지 물을 그만 잘못 삼키고 말았다.

데이지는 능숙하게 그녀의 등을 살살 두드리며 말했다.

“이러다 제이드 님을 보기도 전에 너부터 죽겠어.”

“흐흐흐……. 데이지, 그건 아냐.”

“뭐야, 그 음흉한 미소는? 니 미소 오늘 너무 음흉하다. 근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혹시…… 너 이미 제이드 님을 만난 거야?”

“응!”

아이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크게 여러 번 끄덕였다.

“이야, 아이린!”

“데이지!”

“와아!”

데이지와 아이린은 손을 마주 잡고 방 안을 펄쩍펄쩍 뛰었다.

“우리 아이린, 그렇게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고생하더니 드디어 소원 성취 했구나!”

“응! 너 알지? 나 아카데미 때 밤새공부해도 지치지 않았던 거.”

“그때 네 별명이 지치지 않는 은토끼였잖아!”

“그 별명 엄청 웃겨. 은발이라 은토끼인가?”

“왜? 난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걸. 아이린 네가 토끼같이 귀엽기도 하잖아.”

아이린은 거울 속 자신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며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얼른 정신 차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 진짜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사표 쓰고 싶었어. 수습인데 이 정도 업무량이면 정직원 되는 순간 정말 오래 살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데이지는 아이린이 안쓰러운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일 중독자인 제이드 님 아래에 있는 거니 막내인 네 생활은 더하면 더했겠지.”

“웅, 웅.”

아이린은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데이지를 바라봤다.

“아이린, 기운 내.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거지. 어쨌든 제이드 님을 근거리에서 볼 수 있게 되었잖아! 이건 잃은 거에 비해 엄청난 소득 아냐?”

죽어라 일을 해도 최애를 볼 수 없었던 예전 세계가 떠올랐다.

‘내가 복에 겨웠네.’

아이린은 강림한 천사 같은 제이드의 미소를 떠올리자 굳었던 얼굴이 스르륵 풀어졌다.

“생각만으로 행복해!”

데이지가 짙은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어땠어?”

아이린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제국 미술관에 진열된 명화를 찢고 나왔다고 해야 할까?”

데이지가 눈썹을 휘며 그녀와 같이 두 손을 모으며 감탄했다.

“정말 그 정도야? 완전 부럽다. 나도 황궁 시녀를 지원해 볼까? 그럼 너랑 맨날 만날 수도 있고…….”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넌 황궁에 예쁜 옷 입고 놀러 들어 올 수 있는데 뭐 하러 나 같은 고생을 하려 해!”

“나도 제이드 님 덕질 처음 시작했을 때 너처럼 생각했었어. 그래서 아카데미 쉬는 날마다 예쁜 드레스 입고 황궁을 얼쩡거렸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야, 생각해 봐! 서두만 들어도 각이 딱 나오지 않니?”

“……?”

“휴……. 일 중독자인 제이드 님이잖아. 개인 집무실에서 살다시피 하시더라고.”

아이린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알 만하다. 오죽하면 난 황태자 궁에 출근한 지 좀 되었는데도 어제 처음 뵈었다니까?”

“그래도 그렇게 본 게 어디야? 좋겠다, 기집애.”

그때 아이린이 입 안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런데 데이지, 나 더 좋은 소식이 있어.”

“무슨 소식? 빨리빨리 말해 봐.”

“나 황태자 전하 보좌 교육 때문에 당분간 제이드 님 집무실로 바로 출근하게 됐어!”

데이지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짝!

“으악, 데이지!”

“그런 건 빨리 말해야지! 이제 제이드 님의 일하는 모습을 실컷 볼 수 있다는 거잖아.”

아이린은 순간 등의 아픔을 잊었는지 흥분한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가만히 서 있는 제이드 님도 그림 같았는데, 일하는 모습은……!”

데이지는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으윽……. 아이린, 나 상상만으로도 심장 떨린다.”

“나도 그래. 일코 중이라 바로 앞에서 사진은 찍을 수 없지만 제이드 님의 멋진 모습 많이 그려다 줄게.”

“역시 아이린 최고! 나가자! 기념으로 네가 좋아하는 초코 디저트 먹고 싶은 만큼 쏜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중심가로 향했다.

“데이지, 마차가 너무 천천히 가는 것 같아.”

“그러게. 많이 밀리나?”

아이린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열한 시도 안 되었는데? 너무 이른 시간 아니야?”

“그러게. 그런데 그 시계 네가 공방에 맡겨 만든 시계야?”

“응. 매번 가방에서 회중시계 꺼내기 불편했거든. 이렇게 손목에 차면 편하잖아.”

“아이린은 독특해.”

아이린은 데이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너도 하나 만들어 줄까?”

데이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럼 시곗줄은 정열의 빨강으로 부탁해!”

“하하……. 정열의 빨강…….”

「정열의 빨강! 나 아이린의 이름으로 널 겟☆ 해 주겠어!」

‘그 오글거리던 멘트가 데이지 영향이었구나. 제발 없던 일로 지워 버리고 싶다…….’

그때 마침 마차가 멈췄다.

“아가씨들 목적지에 다 왔습니다.”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며 마차 문이 열렸다.

아이린은 마차에서 내리며 앞을 보았다.

익숙한 카페 간판에 미소가 만개했다.

카페 안드레.

“데이지! 여기는 저번 퍼레이드 때 왔던 그 디저트 카페잖아!”

“그래. 우리 제이드 님이 매일 집무실에만 계시니 성지 순례는 힘들지만 이렇게 그때를 기념할 장소는 갈 수 있지. 게다가 너에게 기념할 만한 일이 생겼는데 이 정도는 와야지.”

“데이지, 정말 감동이야!”

데이지는 자신을 향해 두 손을 모으며 활짝 미소 짓는 아이린이 귀여워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이린은 데이지의 손길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으, 귀여워. 이럴 때마다 제이드 님 아니라 아이린으로 덕질을 갈아타고 싶다니까.’

데이지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자.”

“응, 데이지.”

데이지가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2층 테라스로 예약했어요.”

“데이지, 예약했어?”

“응. 아까 너희 집 가기 전에 미리. 우리가 제이드 님을 가까이서 영접했던 그 자리에 앉고 싶어서.”

“역시 최고야, 데이지!”

“이쪽으로 오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이린은 데이지를 따라 저번에 앉았던 자리로 가 앉았다.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된 따끈따끈한 브런치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우와, 좋은 냄새…….”

데이지가 웃으며 말했다.

“이 카페는 브런치가 유명해.”

커다란 접시 위에 따끈한 빵과 큐브 스테이크, 상큼한 샐러드가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그때 데이지가 걱정스럽게 아이린을 바라봤다.

“너 아침도 못 먹었잖아. 디저트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아.”

“데이지는 이럴 때 보면 엄마 같아.”

“그럼 앞으로 엄마라 불러.”

“그럴까? 데이지 엄마!”

데이지는 아이린의 부드러운 은발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따님.”

“네, 엄마.”

아이린은 대답과 동시에 포크로 큼직한 고기를 찍어 먹었다. 저절로 눈이 감기는 맛이었다.

“입에서 살살 녹아!”

“고기만 먹지 말고 호밀빵에 야채랑 고기를 함께 얹어서 먹어 봐.”

“응!”

아이린은 데이지 말대로 얇게 썰린 호밀빵에 고기와 샐러드를 얹어 한 입 크게 깨물었다.

“정말 맛있어. 데이지도 먹어 봐!”

아이린은 얼른 빵에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얹어 내밀었다.

데이지는 얼른 받아먹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린이 고개를 돌린 채 데이지를 불렀다.

“어? 데이지!”

“응? 왜?”

“저 멀리 보이는 행렬은 뭐야?”

데이지는 아이린이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무슨 퍼레이드 행사 있어? 그래서 길이 막힌 건가?”

데이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왕국의 공녀들이 온다고 하더니, 오늘이구나.’

“아니, 오늘 퍼레이드는 없어. 아마 저건 공녀들의 행렬일 거야.”

“공녀들의 행렬? 무슨 공작 딸들이 다 같이 마차 타고 어디로 놀러 가는 거야?”

데이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이린, 마차의 문양을 자세히 봐.”

아이린은 데이지의 말에 마차 행렬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유심히 봤다.

가늘어졌던 그녀의 눈이 곧 놀라움에 동그랗게 떠졌다.

“마차마다 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네? 무슨 다른 나라 공주들의 행렬이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제국과 힘없는 왕국 사이의 희생양이라고 할까?”

“그럼…… 혹시 공물로 바쳐지는 그 공녀?”

마차들을 향해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데이지가 대답했다.

“응, 맞아, 그 공녀. 신년제에 맞춰 왕국들에서 선별한 공녀를 보낸 걸 거야.”

아이린은 문뜩 원작의 여주가 공녀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럼 엘리자베스가 저 마차 중 하나에 있을 수도 있잖아!’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즐겨 보던 원작의 명장면을 드디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원작의 시작 부분을 잊고 있었다니. 그런데…… 원작이 시작되면 제이드 님의 죽음도 가까워진다는 거잖아?’

잠시 흥분으로 날뛰던 아이린의 심장이 순간 착 가라앉았다.

제이드의 죽음은 그때도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제이드의 죽음을 목도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정말 끔찍했다.

“아이린, 왜 그래?”

“왜?”

“너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졌잖아. 무슨 생각 했어? 혹시 황궁에서 누가 너 괴롭혀?”

데이지는 갑자기 소매를 걷어붙이며 두 주먹 불끈 쥐었다.

“누구야! 말만 해!”

데이지는 마치 전사라도 된 듯 그녀를 향해 물었다.

“하하……. 그게 아니라…….”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아니면?”

“그, 그게…… 갑자기 초코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래!”

“……뭐? 초코케이크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 진작 말하지.”

데이지가 오른손을 드니 직원이 다양한 초코 디저트를 트레이에 담아 줄줄이 가져왔다.

데이지는 얼른 포크로 초코케이크를 떠서 아이린에게 내밀었다.

“아이린, 얼른 한 입 먹어 봐!”

“응!”

아이린은 입을 벌려 얼른 받아먹었다.

“맛있지? 내가 특별히 여기 파티셰에게 부탁한 거야.”

아이린은 입 안 가득 초코케이크를 우물거리며 행복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해……. 그래! 근심 걱정 생기면 맛있는 거 먹고 잊어버리는 게 바로 행복한 인생 아니겠어?’

아이린은 그 모든 게 입 안의 초코케이크처럼 녹아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데이지는 아이린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가방에서 핑크색의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데이지, 그거 뭐야?”

“이거? 네 입사 선물이지.”

“선물은 수습 끝나면 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었는데 상점가를 나갔다가 이걸 보니 도저히 지나갈 수 없었어.”

“뭔데?”

“궁금하면 열어 봐, 아이린.”

아이린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하얀 털 뭉치가 두 가 들어있었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털 뭉치는 뭐야, 데이지?”

데이지는 털 뭉치 하나를 꺼내 그녀의 머리 왼쪽에 꽂아 주며 눈을 접어 웃었다.

“뭐긴? 핀이지. 이것 봐 봐.”

데이지는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아이린을 비추며 말했다.

“정말 귀엽지 않아?”

아이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물론 더 화려한 머리를 하고 황궁에 출근하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원래 21세기에서 왔다.

원작의 아이린은 막 성년이 된 동안인 얼굴이었지만, ‘이서영’의 영혼은 시크한 얼굴의 25세 직장인이었던 것이다.

상상해 보라! 25세의 직장인 여성이 회사에 털실 뭉치 핀을 꽂고 출근하는 모습을!

그녀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거 나 하라고 사 온 거야?”

데이지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 진심이구나……?’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성의를 봐서 집에서만 할게.”

데이지는 그녀의 대답에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이드 님 만날 때 이 핀을 하고 가면 내가 만나는 것 같고 정말 기쁠 것 같은데, 안 될까?”

아이린은 순간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데이지의 부탁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이 더 어이가 없었다.

데이지는 신이 나는지 남은 털 뭉치 핀을 그녀의 반대쪽 머리 위에 꽂았다.

아이린은 해탈한 듯 허허 웃고 말았다.

“아이린! 이렇게 하니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잖아!”

‘안 그래도 초딩 얼굴인데 이런 머리핀까지 하면……. 정말 앞날이 깜깜하구나.’

선배들의 반응이 상상이 되어 눈앞이 깜깜했다.

‘안 되겠어. 데이지에게 못 하겠다고 말해 봐야겠어.’

아이린은 선물을 준 그녀가 상처받지 않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데이지……. 출근용으로는 너무 튀는 것 같지 않아? 역시 너랑 만날 때 하면 어떨까?”

데이지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너 출근할 때 맨날 어두운 드레스만 입잖아. 이 정도는 포인트로 괜찮다고.”

데이지는 다시 손거울을 꺼내 아이린을 비추며 말했다.

아이린은 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몰골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지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씨익 웃었다.

아이린은 게임 벌칙 같은 현실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백옥같이 하얀 피부.

등까지 아름답게 흘러내리는 금실을 녹여 놓은 듯한 부드러운 금발.

거기다 녹음이 우거진 것 같은 눈동자는 우수가 짙어 신비한 매력을 더했다.

우아한 미소를 머금으며 메르헨 왕국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엘리자베스는 난생처음 마차 안에 앉아 이를 갈고 있었다.

‘내가 왜 그 멍청한 피오나 공주를 대신해 여기 끌려와야 하는 거야! 당장이라도 마차를 돌릴까?’

하지만 메르헨 왕궁에 인질로 잡혀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녀는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꽃이 되었다> 원작의 여주 엘리자베스 하이드.

메르헨 왕국의 가장 부유한 공작가에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막내딸.

사교계의 꽃이자 금지옥엽으로 유복하게 자란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녀 한 명조차 마음대로 데리고 올 수 없는 약소국에서 바친 공녀의 신분일 뿐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 대부분의 왕국은 한미한 가문의 영애를 공주로 만들어 공녀로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룩스 제국조차 그런 관례에 이의를 제기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작 가문의 딸인 그녀가 공녀로 가는 마차에 태워진 것이었다.

사악하게 미소 짓던 피오나 공주가 떠올랐다.

이건 모두 사교계 꽃이었던 그녀를 시기한 피오나 공주의 음모였던 것이다.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엘리자베스를 질투해 종종 장난 같은 함정에 빠트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그 정도가 심해도 매우 심했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으윽, 피오나……!”

엘리자베스는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살면서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힘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엄지손톱을 짓씹었다.

원래부터 예정된 공녀의 자리였다면 그녀는 이 순간 룩스 제국을 원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룩스 제국에서 원한 것은 공주였다.

이 굴욕은 자신이 아니라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절대 권력을 누린 그들이 치러야 할 몫이었다.

그들은 메르헨 왕족으로 태어나 돼지처럼 누리기만 했다.

그리고 메르헨의 왕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이렇게 비겁한 수를 써서 엉뚱한 귀족가 딸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지!’

딸 또래인 자신을 향해 기름기가 번들대는 낯빛으로 음흉한 눈길을 보내던 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더러운 왕족들.’

모든 일은 공작인 아버지가 영지에 간 사이에 이루어졌다.

잠시 외출을 나갔던 어머니를 납치해 탑에 가둔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어머니는 엘리자베스가 공주라 속이고 대신 룩스 제국으로 가겠다 약속하자마자 풀려났다.

하지만 갇혀 있던 사이 몸과 마음이 상해 딸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나오지도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초췌해진 어머니가 떠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내 가족을 건드려? 더러운 왕! 피오나, 이 나쁜 년. 이번만큼은 널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때 마차가 멈추며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공주님.”

엘리자베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흥분했던 감정을 능숙하게 갈무리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어.”

마차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엘리자베스의 소꿉친구이자 호위 기사 로만 경이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가시밭길인 공녀행에 자청해서 따라왔다.

‘메르헨 왕국에 있었으면 예쁜 아가씨와 결혼해서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로만은 백작가의 차남으로, 메르헨에서 엘리자베스와 함께 사교계의 꽃과 나비로 불렸다.

‘로만에겐 미안하지만 함께 와서 다행이야. 혼자 이 낮선 땅에 떨어졌다면…….’

엘리자베스는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직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그녀라도 평생을 금지옥엽으로 살아왔기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곧 마부에 의해 발받침이 놓였다.

로만이 마차에서 내리는 엘리자베스를 도우려 손을 내밀었다.

“고맙네, 로만 경.”

로만은 기분이 가라앉은 엘리자베스를 향해 살짝 윙크를 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엘리자베스는 어쩐지 장난스러운 그의 미소에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로만의 손을 잡고 마차에 서 내렸다.

그때 시종과 시녀가 다가와 그녀에게 인사했다.

“메르헨에서 오셨습니까?”

로만은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종과 시녀는 뒤를 돌아 어딘가로 그들을 인도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따라 걸으며 다른 마차들 쪽을 바라봤다.

모두들 자신과 다르지 않게 시녀 한 명 시종 한 명이 나와 맞이해 주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급하게 어두워졌다.

분명 공주의 신분으로 이곳에 왔다.

하지만 환영받을 수 없는 공녀라는 사실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왔다.

분명 공물로 바쳐지는 공녀가 아니라 정식 사절이었다면 이런 홀대는 없었을 것이라.

그녀는 다시 한번 무의식적으로 엄지손톱을 짓씹었다.

그때 로만의 손이 그녀의 손을 에스코트하듯 따뜻하게 감싸 왔다.

그녀가 놀라 올려다보니 로만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힘드시면 제 손 잡고 걸으십시오.”

시녀와 시종은 그들을 흘끔 보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로만이 그녀에게만 들리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어릴 때 버릇이 또 나왔네.”

엘리자베스는 그때야 자신의 엄지손톱 끝에 피가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로만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감아 주며 말했다.

“걱정 마, 언제나처럼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림을 느끼며 다시 가면을 쓸 수 있었다.

사교계의 꽃 엘리자베스로.

* * *

아이린의 휴일은 금방 지나갔다.

오랜만에 꿀같이 달콤한 휴식을 취했고, 최애 제이드를 만날 생각에 새 옷을 두 벌이나 장만했다.

덕분에 약간의 출혈은 있었지만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최애와의 꿈같은 덕업일치를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했다.

‘아무리 눈부셔도 일코는 꼭 성공해야 해!’

그렇게 월요일 아침이 밝아 왔다.

아이린은 새벽같이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숱이 많아 붕 떠오르려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내렸다.

그리고 새로 산 네이비 색의 드레스를 꺼내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목과 손목에 하얀 레이스가 포인트로 달려 있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였다.

마치 황궁 직장인의 정석을 보는 듯 꽤 단정해 보였다.

하지만 또래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이는 그녀의 얼굴 때문에 엄마 옷을 빼앗아 입은 아이처럼도 보였다.

“전에는 그래도 어두운 계열의 정장은 어울렸는데. 아쉽네. 음……. 그냥 평소에도 안경을 써 볼까? 그럼 좀 제 나이로 보이려나?”

서류나 책을 읽을 때 쓰는 뱅글이 안경을 서랍에서 꺼내 썼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얼굴을 왼쪽 오른쪽으로 돌려 보았다.

‘쓰기 전보다 나이 들어 보이긴 하네. 그리고 얼굴을 가려 주니 어쩐지 안정감도 있어 보이고.’

안경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초능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안경을 쓰고 있으면 최애인 제이드 앞에서도 덜 당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린은 마지막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초코 향이 나는 립밤을 입술에 발랐다.

거울을 보니 살짝 붉어진 입술이 촉촉해 보였다.

“입술 하나는 참 요염하단 말이야. 이만하면 반전 입술이지!”

아이린는 귀여운 얼굴과 다르게 체리같이 귀엽고 섹시한 입술에 만족해 미소 지었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살짝 훑었다.

“달콤해! 완벽해!”

준비가 끝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아침이라 하기엔 살짝 어둑한 새벽이었다.

이른 새벽이라 마차조차 없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황궁 방향으로 걸어갔다.

“정말 상쾌한 아침이야.”

지난주까지만 해도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출근한다고 매일 퇴직을 꿈꿨는데.

“예쁜 새들아, 안녕? 오늘도 멋지게 블랙 슈트를 장착했구나?”

새벽마다 울어대는 까마귀를 욕하면서 새총을 만들겠다며 출근한 것이 며칠 전이었는데.

그런데 오늘은 공기도 달고, 까마귀 소리조차 아름답게 들렸다.

출근 첫날 이후 처음으로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흥얼거렸다.

발걸음도 가볍게 타닥거리는 구두 소리를 즐기며 출근했다.

아이린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휴일 잘 보내셨습니까!”

그때 사수인 토마스가 졸린 눈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으아암……. 잘 보내긴. 난 어제도 출근했다가 아직 퇴근 전이다.”

아이린은 잔뜩 피곤한 토마스의 모습을 질린 얼굴로 바라봤다.

‘……설마 미래의 내 모습이야?’

그녀는 수습을 끝나면 퇴사를 해야 할까 생각했다.

아무리 황궁 월급이 엄청나고 정년이후의 연금이 빵빵하다 해도 건강하게 오래 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일까? 토마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수습, 정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어제만 특별하게 일이 생겨 출근했던 거야. 오해하지 마!”

“아, 네…….”

건성으로 대답한 아이린은 선배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잔뜩 피곤에 찌들어 오늘 내일 하는 모습이었다.

아이린은 어쩐지 토마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실장 베릭 스타크가 문을 열고 급히 들어왔다.

“수습!”

아이린은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넵!”

“시간 없으니 얼른 날 따라오도록!”

토마스는 아이린을 향해 얼른 가라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아이린은 토마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얼른 가방을 들고 실장을 따라 나갔다.

‘오늘 황태자 보좌 교육을 받는다고 했으니 제이드 님을 오래 볼 수 있는 건가?’

그녀가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실장이 말했다.

“지금 우리는 황태자 전하를 뵈러 가는 것이다.”

“……네? 보좌관님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를요?”

“그래. 오늘부터 황태자 전하의 보좌 교육이니까.”

바쁘게 걸어가는 실장의 뒤를 뛰다시피 따르던 그녀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밀려드는 기억에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근육질의 남주 옆에서 맨몸으로 일어났던 그날.

난생처음 보는 남자의 알몸 실물.

서영일 적 대중목욕탕조차 가지 않았던 그녀이기에 남에게 맨몸을 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평소 근육질 남자는 징그러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박물관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웠다.

굳이 급을 따져 보자면 최상급 명품이라고 할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이린은 아무리 바빴다 해도 그 엄청난 사실을 잊고 있던 자신에 어이가 없었다.

저만치 먼저 걸어가던 실장은 아이린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뒤를 돌았다.

그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아이린에게 다가갔다.

“수습, 혹시 어디 아픈 건가?”

아이린은 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알아보면 어쩌지……?’

“아니면 얼른 따라오게. 보좌관님은 늦는 것을 제일 싫어하셔.”

“넵, 알겠습니다.”

아이린은 얼른 가방을 줍고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 실장을 초조한 마음으로 따라갔다.

‘아니야! 못 알아볼 수도 있어.’

아이린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날과 다르게 드레스도 단정한 스타일의 네이비 색이고. 커다란 안경도 꼈잖아.’

아이린은 순간적으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안경을 껴서 못 알아보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멍멍이 같은 소리였다.

그 순간, 아이린은 그날 펍에서 황태자와 이야기가 잘 통해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기억났다.

황태자가 안면인식장애가 있지 않고서야 안경을 꼈다고 못 알아볼 수 있을까?

‘정신 차려! 이대로 들킬 수도 있다고! 이게 점 하나 찍고 복수하러 돌아온 아내를 못 알아보는 드라마도 아니잖아!’

아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나 황태자 먹튀했다고 참수형 당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때 그녀의 복잡한 상념을 깨고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습, 이제 다 왔네! 여기가 황태자 전하의 집무실이네. 지금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 들어오게.”

아이린은 첫 출근의 불안함에다 황태자가 자신을 알아볼까 하는 두려움까지 겹쳐 멘탈이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내가 웹툰 속에 들어온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안경 쓰고 옷 갈아입었다고 사람을 못 알아보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거야. 그럼. 그렇고말고.’

아이린은 그렇게 혼자 정신승리를 이룩하며 보좌관실 실장 베릭 스타크를 따라 들어갔다.

* * *

레온하르트는 무언가 고민에 빠졌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웬만해선 무슨 일에 눈 하나 깜짝할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이렇게까지 고민에 빠지게 한 것은 북쪽 지방에서 일어나는 겨울철 기아 문제 때문이었다.

매우 풍족하기로 소문난 룩스 제국에 기아 문제라니 그보다 더 아이러니할 수 없었다.

룩스 제국의 북쪽 지역 ‘세키아’는 메르헨 왕국과 경계가 되는 지역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때문에 농지보다는 나무가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의 영지민들은 약초를 캐고, 나무를 하거나 사냥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나마도 성과가 나쁠 때는 식량난에 허덕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때마다 지원금과 식량을 보냈지만, 애석하게도 영지민들에게는 그것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곳이 수도까지 악명 높은 피도르 후작의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황후파의 실세인 피도르 후작은 온갖 불법적인 악행으로 부를 축적했다.

물론 이 또한 황후가문인 버나드 가문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다 보니 그가 다스리는 영지는 해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고자 청렴한 관리를 파견해서 비리의 증거를 잡아 보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데다, 이미 그 일대를 오랫동안 장악해온 피도르 가문이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거기다 그 지역은 황태자인 그가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류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지역이었다.

7년 전에 끝났던 메르헨 왕국과의 전쟁에, 황태자인 레온하르트가 아버지인 황제 대신 참전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었다.

만약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수도에만 머물렀다면 그 또한 이런 실정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사실을 귀족회의에 회부하고 피도르 후작을 법정에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피도르 후작은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했다.

아니 오히려 그 이후 룩스 제국에서 더 큰 부를 이루었다.

그때 황태자인 그가 문제 제기한 일들의 모든 책임을 영지 관리관에게 미루고 자신은 빠져나간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영지의 기아 문제로 국가의 재난지원금까지 해마다 받아 가며 재산을 더욱 긁어모으고 있었다.

모두 알고 있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하지만 굶어 죽는 국민이 있기에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거라도 주어야 그들이 추운 겨울에 묽은 수프 한 끼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인 그로서는 정말 답답하고 통탄할 일이었다.

‘수도는 신년제라고 행복한 소리로 떠들썩한데 북쪽은 해마다 굶어 죽는 제국민이 늘어난다니….’

그는 턱을 괸 채 긴 한숨을 쉬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때 그의 보좌관인 제이드 레이먼드가 조용히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서류를 노려보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살피며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제이드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신년제 파티 초대인 목록입니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서류를 향해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놓고 가.”

제이드는 그가 들고 있는 서류를 슬쩍 보며 말했다.

“북쪽 지역 서류입니까?”

레온하르트는 눈을 감고 눈 주위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곧 긴 한숨을 쉬면 입을 열었다.

“후우, 그래.”

제이드 또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지원금을 빨리 승인하는 방법밖에 없을 겁니다.”

“알고 있어.”

“그런데 뭘 그렇게 고민하고 계십니까?”

레온하르트가 한층 짙어진 벽안으로 제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북쪽 지역의 지원금의 승인 여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야.”

“아니, 그럼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그곳 백성들에게 지원금이 돌아갈 수 있을까 해서.”

제이드의 얼굴도 그처럼 어두워졌다. 그가 조합해서 올린 서류이기 때문이었다.

서류상으로는 숫자에 불과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그 숫자는 매년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세키아 영지에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늘고 있었지만, 그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영주의 허락이 없으면 그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제국 법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 수도 없었다.

때문에 세키아의 영지민들은 대대로 그곳에 노예처럼 묶일 수밖에 없었다.

피도르 후작 가문은 그 시조부터 악랄하고 그 후손들은 더한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상황이니 이 문제는 정말 영주 가문을 바꾸지 않으면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전처럼 쓰러지십니다.”

레온하르트는 작년 이맘때에도 이렇게 고뇌에 빠져 불면에 시달리다 쓰러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매년 그렇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어떻게 그러겠어. 그곳의 백성들도 다 나의 제국민인데.”

제이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말 그대로 이제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레온하르트는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후후, 피도르 후작을 칠 준비가 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

“이제 더는 법적으로든 사람을 써서든 빠져나오지 못할 겁니다. 황후가문조차도 더는 그를 비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하, 간만에 매우 좋은 소식이군!”

레온하르트는 잔뜩 구겨졌던 미간을 확 펴고는 크게 웃었다.

“네, 마지막으로 증거 서류들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증인들만 잘 관리하면 이제는 정말 끝이 날 것입니다.”

레온하르트는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 지난 7년 묶었던 체증이 드디어 날아가겠군.”

“그래서 말인데요, 황태자 전하. 부탁이 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시원하게 웃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부탁? 무엇이든 다 말해 보도록 해.”

그때 제이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입을 열었다.

“오늘 보좌관 비서실 수습 직원이 올 겁니다.”

‘부탁한다더니. 갑자기 왜 직원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 인사하러 오는 것인가?”

“아니요, 오늘부터 한 달간 비서실장이 수습에게 비서관 업무를 교육하기로 했습니다.”

황태자 레온하르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군.”

‘후후, 아이린 토트 양. 이젠 숨바꼭질을 끝낼 수 있겠군.’

레온하르트는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면 당황할 아이린을 떠올렸다.

그때 제이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황태자 전하, 그 음흉한 미소는 도대체 뭡니까?”

“뭐기는? 그냥 오늘따라 너무 기분이 좋아서 웃는 건데. 세키아 영지의 기아 문제도 해결되었고.”

레온하르트는 자신은 해롭지 않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런 레온하르트에게 제이드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안 됩니다!”

제이드의 주어 빠진 대답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건가?”

제이드는 불량 학생에게 주의를 주는 학생주임처럼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바로 그것 말입니다.”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래.”

황태자는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저는 지금 생각하고 계신 것 보좌관으로서 절대 반대합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잔소리 그만하고 그 부탁이라는 것을 털어놔 보지, 보좌관 제이드 레이먼드.”

제이드는 여전히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희 보좌관실에 이번에는 꼭 신입 받아야 합니다.”

레온하르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받아. 그래서 신입을 뽑은 거잖아!”

제이드는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번에는 제발 좀 가만히 계십시오.”

레온하르트는 짓궂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으라니? 제이드 너는 내 친구이자 보좌관이면서 사사건건 가만히 있어라, 안된다, 하는군! 가끔은 나랑 같은 의견을 내줄 수 없는 건가?”

“의견도 의견 나름입니다만.”

“이건 뭐 막장 소설의 시어머니가 따로 없어. 네가 자꾸 이러면 나도 자꾸만 비뚤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제이드는 레온하르트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흠칫 놀라며 물었다.

“뭐지, 그 미소는?”

“저희는 매일 정시퇴근도 못 하고 야근에 시달리는데,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런 막장 소설을 읽을 시간이 있으신가 봅니다. 앞으로 결재 서류를 좀 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뛰는 레온하르트 위에 나는 보좌관 제이드 레이먼드였다.

순간 사색이 된 레온하르트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보좌관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가 그런 소설을 읽을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이드는 말없이 레온하르트에게 그가 지었던 미소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