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0)

3.

“안 돼! 제이드 레이먼드, 더 이상의 서류는 안 된다고!”

“…….”

“그래! 그래! 항복이야! 항복! 나 오늘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게. 그냥 이렇게 딱 석상처럼 서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신입 받으세요, 보좌관님.”

제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그 말씀 믿어도 되겠습니까, 황태자 전하?”

“왜 이래, 믿어봐! 이래 봬도 내가 이 나라의 황태자라고.”

제이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레온하르트를 지긋이 바라봤다.

“으흠.”

“뭐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은?”

“뭐긴요.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신뢰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말에 발끈하며 말했다.

“내가 왜? 내가 얼마나 신의 있는 사람인데.”

“다른 건 모르겠지만 직원을 뽑으시는 부분은 저희 모두에게 신뢰를 잃으셨습니다.

“내가 그동안 뭘 했다고 그래?”

제이드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

“참 뻔뻔도 하십니다. 지금까지 신입을 뽑아 놓고 쫓아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었나?”

레온하르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기까지 하니 제이드의 입장에서는 정말 분통이 터졌다.

제이드는 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보좌관실 마지막 신입이 3년 전 입사한 토마스입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아! 그거야 수습이었던 이들이 못 버텨 그런 것이지.”

제이드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황태자 전하께 접근하기 위한 이들이라 일부러 그러신 것 알고 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면 앞으로도 이해 부탁해. 제이드 레이먼드 보좌관님!”

“그래도 2황자 쪽 스파이가 아니면 그냥 좀 뽑으면 안 됩니까? 그 정도는 이제 우리의 정보력으로 쉽게 파악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답 없는 미소에 답답한 듯 제이드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황태자 전하! 이러다 저희 직원들 이러다 모두 과로사로 죽습니다. 스파이든 뭐든 우선 일부터 시키십시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좌관실 실장이 도착했습니다.”

제이드는 얼른 레온하르트를 향해 말했다.

“아시겠죠. 이번 수습에게는 엄한 장난치시지 마시고 잘해주십시오.”

“후후, 걱정 마, 제이드! 적어도 저번처럼 쫓아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니까.”

제이드는 그에게 다짐을 받는 듯 말했다.

“약속하는 겁니다.”

“그래, 약속하지.”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향해 믿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오랜 친우이자 보좌관 제이드는 어쩐지 레온하르트의 순순한 대답에 불안함이 밀려왔다.

‘이번 수습은 아카데미 수석이라고 했으니 꼭 잡아야 해. 레온 저 녀석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번 수습은 제대로 보호해 줘야겠어.’

제이드는 장난기 가득한 레온하르트를 흘긋 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 하게.”

스르륵 문이 열리고 그들에게 낯익은, 초췌한 모습의 남자가 들어왔다.

황태자 보좌관실 실장 베릭 스타크였다.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비서실장은 곧 고개를 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보좌관실에 이번에 새로 들어 온 수습입니다.”

레온하르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반가운 수습이군.”

실장 베릭 스타크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 올해의 아카데미 수석으로 아주 유능한 친구입니다. 일 처리도 제법 꼼꼼하고요. 수습, 어서 이리 와서 황태자 전하께 예를 올리게.”

그때 비서실장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자그마한 인영이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옆으로 섰다.

‘후후, 드디어 왔군. 아이린 토트 양!’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보자마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겨우 참으며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혹시나 들킬까 초조한 마음으로 살짝 허리를 굽혔다.

“룩스 제국의 별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이린 토트입니다.”

아이린은 굽혔던 허리를 살짝 펴며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바라봤다.

‘오호라, 이 아가씨 좀 봐. 아무래도 괘씸하게 날 모르는 척을 할 요양이군.’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숨기려는지 귀여운 정수리 부분만 보여주는 아이린을 향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닥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가?”

“아, 아닙니다.”

“아이린이라고 하였지.”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황태자 전하.”

“이제 그만 고개를 들도록 하게.”

하지만 아이린은 머뭇거리며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후후, 계속 그렇게 모른 척하시겠다. 이거지?’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함께 일할 직원인데 내가 얼굴은 익혀야지 않겠어?”

그 순간 아이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최애인 제이드가 옆에 서 있는데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등줄기에서 진땀이 흘렀다.

‘큰일이다! 나 어떡하지!’

그때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제이드의 천사 같은 다정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이린 토트 씨. 황태자 전하는 그리 무서운 분이 아니에요.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 말고 고개를 들어 보도록 하세요.”

‘으윽, 역시 마성의 미성, 내 귀가 녹아버릴 것 같아! 그래, 우리 제이드 님이 이렇게 힘을 주시는데 용기를 내야겠죠. 믿습니다!’

아이린은 침을 꼴깍 한 번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키 차이가 제법 나는 터라 아이린의 시선은 한참을 올라가서야 그의 얼굴에 겨우 닿았다.

그 순간 그녀는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이린은 순간 놀라 멈칫하였다.

황태자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내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으아 어쩌지? 떨려! 제발 못 알아봐야 할 텐데.’

그때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아이린의 상념을 깨우며 울려왔다.

“난 앞으로 네가 보좌할 황태자 레온하르트다.”

레온하르트의 푸른 눈이 아이린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어쩐지 낯이 익은데.”

그의 말에 아이린은 멈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으악! 없어! 없다고! 없습니다!’

순간 내적 비명을 지른 아이린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황태자 전하를 처음 뵙습니다.”

‘정색하는 것을 보니 날 알아봤군.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나타나네.’

레온하르트는 모르는 척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으흠, 그래? 그래도 매우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아이린은 당황하는 자신의 애써 이성을 다잡으려 입술을 짓씹었다. 이윽고 군기가 잔뜩 든 신병처럼 ‘다나까’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절대 아닙니다! 착각이십니다! 저는 쭉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음, 그래도 가끔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갈 것 아닌가?”

“아닙니다. 저는 공부만 하느라 아카데미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았습니다.”

‘당황하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인가? 역시 귀여워. 나의 아이린 토트 양!’

레온하르트는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황궁 근처에 온 것도 취직시험을 보았을 때가 처음입니다.”

“그래? 그런단 말이지.”

아이린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넘어갔나? 으익, 제발 좀 넘어가라!’

아이린은 이제 그가 남주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첫 만남에 맨몸 인사까지 한 남자를 상사로 만났다. 그 누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에게 눈을 더욱 빛내며 바라봤다.

“그렇습니다. 아마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혹시, 날 봤는데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고?”

“절대 아닙니다!”

“아니면…. 기억하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순간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와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뜨끔한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네, 아닙니다. 둘 다 절대 아닙니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 레온하르트의 피부색과 잘 짜인 근육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눈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몸을 은근하게 훑었다.

아이린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상승한 변태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악, 나 뭐야? 사람을 앞에다 두고 그날 본 근육을 떠올리다니! 변태냐? 아님 욕구불만?’

그 순간 그가 한걸음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흐흡,”

갑작스럽게 그녀의 폐부를 테러하는 듯한 그의 체향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어디가 불편한가?”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대었다.

순간 이마에 닿는 그의 따뜻한 체온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리고 마치 불에 덴 듯 곧바로 그에게서 떨어져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닙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터져버릴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다스려 보려고 숨을 조심히 몰아쉬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붉어졌지? 혹시 어디 아픈 건가?”

레온하르트는 또다시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아이린은 얼른 피하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를 처음 뵙기에 긴장 되서 그렇습니다.”

‘으윽, 어떡해.’

아이린은 심장이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전력 질주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날뛰는 이유가 먹튀를 들킬까 봐서인지 그의 달콤한 체향에 홀려서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려 노력하는 그녀가 귀여워 싱긋 웃었다.

‘계속 모르는 척하시겠다? 귀엽네. 그럼 당분간 나도 못 알아본 척해 줄까?’

그때 제이드가 얼른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잘못 보신 듯한데, 그렇게 추궁하듯 물어보시면 수습이 겁먹습니다.”

“그래? 추궁하는 건 아니었어, 수습. 그냥 어디서 본 것 같아 물어본 거였지.”

아이린은 입안이 말라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평소에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제 얼굴이 평범하고 흔한 상이라서 그럴 겁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린이 초조해하는 모습에 제이드가 레온하르트를 쏘아 보았다.

“흠흠, 이제 그만 업무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지그시 바라보며 점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아이린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이내 그녀의 앞에 멈춰 서더니 뒤편 책상으로 긴 팔을 뻗어왔다.

그녀는 순간 가까워진 레온하르트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체향에 아찔함을 느꼈다.

‘헉, 이게 무슨……!’

아이린은 멈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레온하르트가 그녀 뒤편에 놓인 서류철을 들며 그녀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스쳐지나가며 작게 속삭였다.

“왜 이리 얼굴이 붉어진 거지?”

그는 유유히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때 실장 베릭 스타크가 아이린에게 다가왔다.

아이린은 순간 긴장이 풀려 숨을 살짝 몰아쉬었다.

“앞으로 한 달간은 내가 하는 비서관 업무를 따라다니며 배우는 것이 자네 업무네.”

“네. 실장님.”

‘으악 한 달이나 이렇게 근무해야 한다고! 어떡하지!’

아이린은 들킬까 하는 두려움에 숨이 답답하고 심장이 쫄깃했다.

이렇게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어떻게 한 달이나 버틸지 정말 눈앞이 깜깜했다.

‘어둡구나, 어두워! 흑흑, 혹시 이게 나의 미래인가?’

그때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최애 제이드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그녀는 제이드의 환한 빛이 자신을 감싸는 듯했다.

울상이던 아이린은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다.

‘으허헉, 제이드 님! 그래! 제이드 님이 있었지!’

제이드는 불안해 보이는 그녀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뭐지? 저 눈부신 미소는? 사람의 미소는 도저히 아니야! 햇빛인가? 매번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제이드 님을 볼 수 있다니, 으아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아이린은 멍하니 석상이 된 듯 제이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제이드의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간질였다.

“아이린 토트 씨, 혹시 일하다 어려운 일 있으면 내게 말해요.”

‘제이드 님, 얼굴도 달콤하신데 목소리까지 달콤하시다니!’

“내가 누군지는 알죠?”

아이린은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보, 보좌관님이십니다.”

제이드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그녀가 귀여워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래요. 내 집무실은 바로 옆방이에요.”

‘우와, 옆방이라고! 이거 불행 중 횡재? 역시 내 최애는 피부도 마음도 비단결이야.’

아이린은 제이드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보좌관님.”

제이드는 오른 주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럼, 오늘도 힘 나는 하루 되세요.”

아이린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네, 보좌관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후후, 그래요. 이따 또 봐요.”

제이드는 그녀에게 눈썹을 휘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이린은 순간 그의 주변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눈부신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왠지 거룩해진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가 살짝 묵례하며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아이린은 여전히 은혜를 받는 기분에 빠져 멍하니 서 있었다.

‘천사? 제이드 님이 지금 날 보고 웃었어! 나 이제 저 미소를 매일 볼 수 있는 거야? 정말 대박이잖아!’

아이린은 제이드의 천사 같은 미소에 방금 전까지 초조했던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원래 황궁에 들어온 목적이 제이드 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덕업일치였잖아.’

아이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잘된 일이야. 그동안 우리 제이드 님,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 매일 만날 수 있게 되었잖아.’

그때 마지막 남아있는 이성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는 그녀에게 실장 베릭 스타크가 다가왔다.

“수습, 교육 기간 동안 이쪽 책상을 사용하도록 하게.”

아이린은 순간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황태자의 책상과 자신의 책상 간의 거리를 가늠한 후 힘없이 대답했다.

“네…….”

실장이 알려준 아이린의 책상은 레온하르트와 마주 보는 위치였던 것이다.

아이린은 얼른 책상에 돌아가 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온하르트의 책상과 가장 멀리 떨어진 책상이라는 점이었다.

‘다행은 무슨 다행! 고개를 들면 정면에서 보이는데!’

아이린의 머릿속은 복잡한 마음으로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그녀는 서류를 보는 척하며 슬쩍 그를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아까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으로 서류에 무언가 끄적이고 있었다.

‘다행히 못 알아봤나 봐. 혹시 이 뱅글이 안경 덕분인가?’

아이린은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편 레온하르트는 안도한 표정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보며 애써 입꼬리를 내렸다.

‘설마 안경 때문에 못 알아봤다고 생각하는 건가? 안심하는 모습이 토끼 같네. 저렇게 귀여워 어떡하지.’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어느새 근심이 모두 가신 듯했다.

게다가 저렇게 귀여운 모습이라니! 근심이 가신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확 좋아졌다.

살짝 그의 시선을 피하는 아이린의 모습은 마치 늑대를 피했다고 안심하는 아기 토끼 같았다.

어쩐지 깨물어 주고 싶게 매우 귀여웠다.

그때 그녀에게 무언가 지시하던 비서실장이 그에게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이 서류 결재 부탁드립니다.”

레온하르트는 실장이 놓아둔 서류를 훑으며 그녀를 흘끔 보았다.

처음 만난 그날의 아이린이 떠올랐다.

‘아이린. 그날도 참 귀여웠는데.’

술에 취해 자신에게 조잘조잘 떠들던 그녀는 참 귀여웠다. 마치 이 세계에서 처음 보는 생물처럼 신기하기까지 했다.

귀여운 얼굴이 보고 싶어 계속 그녀를 흘긋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습을 숨겨보려는 것인지 고개를 통 들지 않았다.

“잘했군. 이대로 처리하면 되겠어.”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내리고는 결재란에 인장을 찍었다.

그때 서류를 다시 받아든 비서실장이 말했다.

“그럼, 전 보좌관님께 이 서류를 전해 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도록.”

아이린은 비서실장이 집무실을 나가는 소리에 어쩐지 초조해졌다.

‘어쩌지, 둘만 남았어. 제발 말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녀는 황태자의 비서관 업무를 배우는 중이었다.

이렇게 한 공간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데 상사인 그가 말을 시키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린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이린이 아무 일도 없길 바라며 서류 더미들 사이로 고개를 더 깊게 파묻었을 때, 레온하르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린!”

‘뭐지 이 호칭? 그런데 왜 이름을 부르지?’

다른 선배들처럼 수습이라 부르지 않는 그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뒤늦게 대답했다.

“네, 황태자 전하.”

“왜, 내가 이름을 불러서 당황했어?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다른 이유 때문인가?”

아이린은 순간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아, 아닙니다!”

레온하르트가 그런 아이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쪽이 아닌 거지? 전자? 아니며 후자인가?”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둘 다 아닙니다.”

레온하르트는 짓궂은 눈빛으로 아이린을 바라봤다.

“흐음, 그렇다고? 둘 다 아니라는 거지?”

순간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눈이 다 녹아버릴 듯한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으익, 뭐야 저 심장 떨리는 미소는!’

그녀는 이러다 ‘황족 먹튀범’으로 벌을 받기도 전에 심장이 녹아 죽을지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이 다 들었다.

“이름 불렀다고 당황하지 말도록. 참, 절대 그대를 무시하거나 그래서 이름을 부른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고. 난 업무적으로 간소함을 선호해.”

아이린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참, 아이린도 이렇게 둘만 있을 때 레온이라고 이름 불러도 좋아.”

아이린은 그와 친해지고 싶기는커녕 잔뜩 굵은 선을 긋고 싶었다.

그냥 먹튀도 아니고 ‘황태자’ 먹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평민 신분인 그녀에겐 정말 운 나쁘면 목숨이 오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 내 목은 정말 소중하니까.’

아이린은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서영일 때 보았던 사극 드라마를 떠올렸다.

특히 간 쓸개 다 빼줄 것 같은 간신들의 대사들을 입으로 읊었다.

“황송하옵니다, 즈은하! 제가 감히 어떻게 황태자 즈은하의 존명을 함부로 입에 담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대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뭔가? 최고령의 늙은 귀족들조차도 쓰지 않는 그 고시대 말투는? 우리 막내 수습 님은 어디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오셨나?”

아이린은 순간 뜨끔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하, 다른 세상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신은 뼛속까지 룩스 제국의 사람입니다, 즈은하!”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지그시 바라봤다.

‘영혼은 아니지만. 저 눈빛 뭐지? 설마 내가 원작 밖에서 온 걸 들킨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 표정은 무언가 수상한데. 정말 다른 곳에서 온 거 아니야? 혹시 적국 스파이신가?”

아이린은 스파이라는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네?”

아이린은 순간 놀라 사극 대사고 뭐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레온하르트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라고? 설마 스파이라고 지금 실토한 건가? 새로 온 신입이 스파이였다니. 정말 충격이군,”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스파이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아이린은 순간 그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먹튀든 적국 스파이든 원작 밖에서 왔든 어느 쪽으로 몰려도 묫자리조차 무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가? 아니면 말고.”

‘아이고, 다행이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말했다.

“참! 저쪽에 가면 간식과 차가 있는 다실이 있어. 커피 좀 부탁해.”

‘무슨 집무실 안에 다실이?’

“무슨 집무실 안에 다실이 다 있냐고 생각했지?”

안 그래도 큰 눈의 아이린이 더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아셨…?”

“어떻게 알았냐고?”

그의 물음에 아이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나중에 스스로 얼굴을 거울로 관찰해봐! 그 귀여운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우리 수습 님의 생각이.”

‘헉! 얼굴에 쓰여 있다고?’

아이린은 얼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후다닥 다실로 향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뒷모습에 말을 이었다.

“내 것만 가져오지 말고 아이린도 챙겨 먹으면서 일하도록 해.”

어느새 아이린은 다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으으, 귀여워. 정말 치명적인 귀여움이야! 정말 사람이 맞나?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귀여 울 수 있지?”

들킨 줄도 모르고 자신의 머리만 숨긴 은토끼 같은 아이린이 참을 수 없이 귀여운 레온하르트였다.

‘하아, 양털처럼 복슬복슬해 보이는 머리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어떤 기분이 들까?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데.’

레온하르트는 잔뜩 풀어진 얼굴로 다실 쪽을 보며 헤실헤실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다실에서 아이린이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서류를 들고 소드 마스터이자 제국의 2인자답게 능숙하게 표정을 숨겼다.

“여기 말씀하신 커피입니다.”

“그래, 고마워.”

레온하르트는 얼른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는 커피를 그대로 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왜 뱉지? 커피 맛이 그렇게 이상한가? 설마 독?’

“으윽. 아이린 토트, 정말 적국 스파이였군!”

아이린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태자 전하! 저 절대 스파이 아닙니다.”

‘나보고 적국 스파이라니 진짜 독이라도 든 거야?’

아이린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하르트는 곧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혹시 자객?”

“네? 자객이라뇨? 아니에요. 설마 거기 독이라도 들었어요? 얼른 황궁 의사를 부를게요.”

아이린은 순간 사색이 되며 고집해오던 ‘다나까’말투를 잊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는 잔을 원수 보듯 하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 이거 완전 써. 순간 식도가 타들어가는 줄 알았어.”

“네?”

“정말 이 커피는 그 어떤 독약보다 더 극독 같아.”

아이린은 그제야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정말 심장 떨어질 뻔했네. 으이그, 갑만 아니었으면!’

그녀는 곧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독약보다 극독 같다니 마치 독약을 먹어 보신 것처럼….”

아이린은 순간 원작이 떠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2황자의 모친인 현 황후에 의해 독살당할 뻔한 적이 많았다.

‘아차! 실수했어. 진짜 독살 시도를 많이 당했을 텐데.’

아이린은 얼른 말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독약은 아니라는 것이죠?”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향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응, 그런데 무지 쓰더군.”

‘왜 그러시지? 커피니까 쓴 게 당연한 건데. 헉, 커피가 쓰다고 저런 거야? 뭐야, 이 인간? 설마 소설에서나 보았던 핵 돌아이 상사님?’

아이린은 뒤돌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잔을 들고 다실로 들어갔다.

아이린은 그의 커피에 설탕과 크림을 다섯 스푼씩 더 넣었다.

‘그래, 쓰다는데 팍팍 넣어 줘야지!’

아이린은 설탕을 쏟아부은 커피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고민이 되었다.

‘이거 괜찮을까? 으윽, 보기만 해도 느글거려. 에이 뭐? 자기가 쓴 커피 싫다고 했잖아.’

아이린은 설탕통을 들어 설탕을 쏟아부어 넣고 커피를 힘껏 휘저었다.

너무 많이 부었는지 설탕이 잘 녹지 않는 듯해 더 열심히 저었다. 설탕이 티스푼 끝에 거의 느껴지지 않을 때쯤 그녀는 휘젓는 것을 멈췄다.

“으아, 팔 아파. 이제 녹았겠지.’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잔을 쟁반에 담아 다실 밖으로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잔뜩 굳어진 표정을 모르는 것인지 못 본 척하는 것인지, 그녀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커피 고마워. 아이린.”

아이린은 그런 그에게 묵례하고 바로 뒤돌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괜찮을까? 설마 나 잘리는 거 아냐?’

그런데 그때 어디서 많이 듣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그래, 이 맛이야!”

‘뭐지 이 익숙한 광고 멘트 같은 대사는’

아이린은 그 순간 자리를 향해 걷다 말고 무심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레온하르트는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뭐지? 저게 그렇게 맛있나?’

그녀는 곧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입매가 헤실헤실 풀어져 있던 것이었다.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저기… 황태자 전하!”

아이린의 조용한 부름에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바라봤다.

살짝 열린 긴 속눈썹 사이로 사파이어 같은 그의 두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반짝였다.

“응? 왜, 아이린?”

순간 아이린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의 눈빛 공격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커피 많이 달지 않으세요?”

‘뭐지 눈도 풀어졌어. 설마 진짜 약이라도 들은 거야?’

레온하르트는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다 입매를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많이… 달아.”

아이린은 순간 달콤한 목소리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여 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 그러면 드시지 마셔야죠.”

그리고 이내 커피잔을 치우려 손을 뻗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만류하듯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 TV 광고의 한 장면처럼 커피잔을 우아하게 들고 마셨다.

“왜? 난 먹고 싶은데?”

“많이 달다고 하셨잖아요.”

“응, 많이 달아.…그러니까 더 먹고 싶지.”

레온하르트는 살짝 입술을 핥으며 그녀를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린은 순간 그의 참을 수 없는 항마력에 숨이 멈춰 버린 듯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그런 상태를 모르는지 살짝 윙크를 하고는 커피를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으윽! 내 심장! 저 목소리!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은 달달한 눈빛! 헉 그런데 뭐지? 왜 내게 그런 눈빛을 하는 거야?’

아이린은 순간 이성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혹시, 소문과 다르게 바람둥이인 건가?’

황태자 레온하르트는 황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스캔들을 일으킨 영애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일 중독자 제이드와 함께 묶어 둘이 연인이라는 오해를 종종 받기도 했다.

아이린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심장 때문에 기침을 하는 척 입을 손에다 가져다 댔다.

그리고 살짝 심호흡한 후 물었다.

“혹시, 단 거 좋아하세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엄청 좋아해.”

‘하하, 그냥 단 거를 좋아한 거였구나. 책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여주 중심의 서사였던 원작은 남주인 그의 기호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원작의 최대 수혜자는 여주였구나.’

그때 레온하르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아이린,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다. 극비.”

“네? 뭘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이린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단 거 좋아하는 것 말이야. 아버지와 제이드 그리고 실장만 알고 있는 사실이거든.”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이 왜 비밀이에요?”

“후후, 그래 그게 왜 비밀일까? 한번 생각해 보겠어? 룩스 제국에서 내 입지와 상황들을. 황태자의 비서관으로써 말이야.”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아카데미 수석으로 똑똑하잖아? 지금쯤이면 내 정적들이 머릿속에 한둘쯤은 떠오를 거야.”

아이린은 ‘서영’이었을 때 보았던 원작을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황후인 새어머니와 황후파 귀족들에게 목숨이 노려지는 일들이 많았던 것을 떠올렸다.

제이드를 보기 위해 읽은 것이지만 수도 없이 읽은 웹툰과 원작인 소설의 내용이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혀 있었다.

활자로 읽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이렇게 레온하르트와 마주 보고 있으니 어쩐지 측은한 감정이 밀려왔다.

살짝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래, 네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그 정적들 때문에 내 기호가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은 매우 위험해.”

순간 어두워지는 그녀의 얼굴에 그는 검지를 들고 말했다.

“뭐, 그렇다고 그렇게 날 불쌍하게 보지는 말고.”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불쌍하게 본 것이 아니라 걱정되어서요.”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에게 오히려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은 참 고마워. 그래도 내가 이래 봬도 황태자인데, 말단 수습인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린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그를 슬쩍 바라보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뭐야, 걱정해줘도 난리야! 그래, 제일 쓸데없는 게 황족 걱정이지. 그냥 금수저도 아니고 황금 다이아몬드 수저에다 원작의 남주로 끝까지 행복하게 살 사람이잖아. 걱정은 우리 제이드 님이지.’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아이린, 지금 속으로 내 욕했지?”

“아, 아닙니다. 전 그만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당황한 아이린은 얼른 자리로 돌아가 아까처럼 서류 더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표정이 참 다양해. 어떻게 저렇게 순간순간 확확 변하지? 귀여워. 너무 귀여워! 그리고 저 입술, 너무 달콤해 보여!’

레온하르트는 붉은 체리를 머금은 듯한 그녀의 입술이 토라진 듯 나와 있는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갔다.

‘그날도 그랬지만 역시 달콤해 보여. …맛보고 싶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자신의 생각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릴 적부터 황제가 공들여 키운 대 룩스 제국의 후계자였다.

그런 만큼, 아카데미 때부터 그녀의 근처엔 항상 아름다운 귀족 영애들이 가득했다.

손만 뻗으면 어여쁜 여인을 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여인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황태자인 그에게 사람은 적 아니면 아군 두 부류였다.

날 때부터 지금까지 룩스 제국의 황태자로 살아온 레온하르트였다.

어릴 적 어머니를 황망하게 잃은 뒤 그의 인생 그 어디에도 이런 감정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귀엽게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릿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은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지 눈을 슬쩍 흘기고 서류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타는 듯한 심장을 식히려 다식은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얼른 서류를 들어 올렸다.

* * *

“으윽, 발바닥이야.”

아이린은 벤치에 앉아 신발을 벗으며 발을 통통 두드렸다.

아무래도 붉게 잔뜩 부어오른 발을 보니, 오늘도 몸살 각 당첨이었다.

사실 레온하르트에게는 결재할 서류 업무가 많은 만큼 아이린도 주로 사무실에서 서류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하루에 두세 시간 업무 시찰을 나가는 그를 따라다니는 것도 비서관의 업무 중 하나였다.

아이린은 원래부터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서영’일 때도 학창 시절 내내 교실을 지키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직장 생활도 사무실 밖으로 나갈 일 없는 사무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렇게까지 걸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레온하르트의 팬으로 보이는 영애들의 선물 공세가 쏟아졌다.

아이린은 한가득 안고 온 선물과 편지를 집무실 한쪽에 쌓아두고 나온 참이었다.

덕분에 디저트에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볼록 나왔던 배가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다.

“뭐 이제는 들어갈 데가 들어갔으니 나름 베이글녀가 된 건가? 큭큭.”

아이린은 쏙 들어간 배가 신기해 쓰다듬었다.

‘이런 게 바로 노동 다이어트라고 할 수 있지. 남들은 다이어트하느라 먹을 것도 못 먹고 수천 골드 깨진다는데 돈 받고 다이어트하는 것을 감사해야 하나?’

그렇게 상념에 빠졌던 아이린은 슬쩍 주변을 살피고 그대로 벤치에 누웠다.

그리고 바구니에서 달콤한 계란빵 하나를 꺼내 입에 물며 책을 꺼내 들었다.

<제국법의 이해>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이었다. 책을 펴니 그 속 제목은 달랐다.

아이린은 순간 눈을 빛냈다.

<마성의 공작과 101명의 하녀들 제1권>

책에서는 체향으로 폐로몬을 마구 뿌려 댄다는 마성의 공작님이 남주로 등장한다.

그의 곁에 가는 순간 모두 그를 숭배하기 시작하고, 이 공작님은 그것을 아주 즐기는 미남이었다.

그 마성의 미남 공작과 공작 성의 하녀들 101명이 썸을 타는 이야기였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매우 긴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누가 마성의 공작에게 간택될 것인가?

궁금해 책을 놓을 수가 없었지만, 몰려오는 피곤에는 장사가 없었다.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한 커다란 인영이 그녀가 누워있는 벤치에 다가왔다.

레온하르트였다.

“아이린, 잠들었네.”

레온하르트는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귀여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리맡엔 빵이 들어있는 바구니와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책과 바구니를 자신의 무릎에 올리며 그녀의 머리맡에 앉았다.

‘오늘은 또 무슨 책이지? ‘제국법의 이해’?’

그는 습관처럼 책 표지를 열었다.

<마성의 공작과 101명의 하녀들>

그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 색기발랄한 제목은?’

레온하르트는 제목만으로 이상한 상상을 일으키는 책을 얼른 덮어 벤치에 던지듯 내려놨다.

그러다 저번에 그녀가 읽던 책의 주인공도 공작인 것을 떠올렸다.

‘흠, 황태자보다는 공작이 좋은 건가?’

레온하르트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병에 타온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씁쓸한 기분을 씻던 레온하르트가 무심코 아이린의 바구니에 든 빵 한 개를 입에 넣었다.

순간 레온하르트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이거! 뭐가 이렇게 맛있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달콤하고도 고소하면서도 짭짜름한 계란빵에 완전 반하고 말았다.

어린 시절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다 살아난 이후로 식탐이 없는 그였다.

그런데 순간 이성을 잃고 바구니에 있던 그녀의 점심을 그만 다 먹고 말았다.

‘이런, 어쩌지?’

그는 그녀만 만나면 감당하기 힘들게 달라지는 자신에 당황스러웠다.

그때 아이린의 붉은 입술이 움직이며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헉, 잠에서 깨려나 보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책과 바구니를 그 자리에 놓아두고 자신의 집무실로 달아났다.

얼마 후 아이린이 투덜투덜 잔뜩 찌푸린 얼굴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모르는 척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린,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세요, 황태자 전하. 제가 벤치에서 잠깐 졸았는데요. 그사이에 점심을 도둑맞았어요.”

레온하르트는 순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으잉, 벼룩의 간을 빼먹지. 누군지 몰라도 잡히기만 해 봐라!”

레온하르트는 작게 쥐어진 그녀의 주먹을 보며 뜨끔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는 척 걱정스럽게 말했다.

“배가 많이 고프겠군.”

아이린은 억울한 듯 얼른 대답했다.

“네, 제가 한 조각밖에 못 먹고 잠들었거든요.”

레온하르트는 다실 쪽으로 슬쩍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그럼, 다실로 한 번 가보도록 해.”

“네? 다실이요?”

“응, 다실로 가서 먹고 싶은 거 가져다 먹어.”

아이린은 슬쩍 시계를 바라보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점심시간 끝났는데요.”

“배고프면 머리도 안 돌잖아. 그럼 업무능력도 떨어질 것이고.”

“그래도 좀….

“정 마음에 걸리면 먹으면서 해.”

아이린은 고민하듯 슬쩍 자신의 배를 바라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아이린은 배가 고팠는지 얼른 다실로 들어갔다.

‘다실’ 안에는 달콤한 디저트가 가득 담긴 커다란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우와! 이거 황궁 파티셰의 유명한 파티 디저트잖아!”

아이린은 원작 속에 들어와 이곳을 공부하며 도서관에서 황궁 파티셰의 요리책을 본 적이 있었다.

요리책은 매우 두꺼웠으나 디저트의 종류대로 그림이 곁들여져 있어 읽기 편했다.

‘으아아! 내가 황궁 파티셰의 디저트를 맛보다니! 야근은 많아도 먹는 거 하난 잘 준다니까! 정말 보기만 해도 행복해!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아이린은 얼른 자신이 좋아하는 초코 디저트 세 종류와 허브티를 쟁반에 담아 나왔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가 들고 나온 쟁반을 봤다.

“아이린은 초콜릿을 정말 좋아하나 봐!”

“네! 정말 좋아요!”

아이린은 잇몸을 만개하며 활짝 웃었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였다.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그녀의 미소에 얼굴이 붉어지려 했다. 그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 얼른 먹도록.”

아이린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는 얼른 초코가 듬뿍 발린 빨미까레(기다란 파이에 초콜릿을 묻힌 빵) 한입을 깨물어 먹었다.

바스락.

그 순간 표면의 바삭한 소리와 함께 극강의 달콤함이 입 안 가득히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으음, 달콤해!’

아이린은 혀를 녹일 듯한 달콤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빨미까레 한 조각을 다 먹은 아이린은 그제야 자신을 보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보았다.

순간 잠시 눈이 마주쳤긴 했지만, 그는 다시 서류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 남아있는 디저트가 눈앞에 더 어른거렸다.

‘아무래도 멈출 수 없겠어. 실장님도 없는데 다 먹고 일해야지.’

그녀는 옆 테이블을 흘긋 보고 얼른 나머지 디저트를 맛보기 위해 차로 입안을 씻었다.

그렇게 다음에 맛본 디저트는 겉과 속에 초코가 한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크루아상이었다.

‘으아! 이 크기 정말 바람직해!’

아이린은 자신의 미각을 만족시키는 극강의 달콤함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렇게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 칼로리를 신경 쓰는 것은 디저트에 대한 실례야!’

아이린은 어차피 황태자 전하를 따라다니면 이렇게 먹어도 배가 금방 고플 것을 알기에 더 거침없이 빵을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 진한 초콜릿 향이 훅하고 폐부까지 들어오는 듯했다.

마치 이 빵 하나를 다 먹으면 몸속이 모두 달콤한 초콜릿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그럼, 다음 생은 초콜릿 빵 빙의인가?’

아이린은 머릿속까지 초콜릿이 된 것처럼, 조금씩 이상한 생각을 하며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어? 저 웃음소리 많이 귀에 익는데.’

레온하르트는 서류를 읽다가 그녀의 킥킥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처음 만난 그날! 그래, 그때 아이린이 자주 내던 그 웃음소리였어!’

그랬다.

그녀는 달콤한 초코에 한눈이 팔려 그만 ‘차’를 마시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레온하르트는 순간 놀라 의자를 박차고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 * *

두 달 전.

레온하르트는 하얀 제복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재질의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때 제이드가 노크를 하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오늘도 나가십니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미약이 그 펍에서 유출되었다고 했으니 그곳에 가면 단서를 가진 인물을 만날 수도 있겠지?”

레온하르트는 여인들이 쓰는 화장품을 꺼내 얼굴빛을 어둡게 칠했다.

그리고 가발을 꺼내어 거울을 보며 능숙하게 썼다.

“휴, 그런 건 그건 그냥 기사들에게 맡기십시오.”

그 순간 그의 호수 같았던 푸른 눈이 더욱 짙어졌다.

“제이드, 그럴 순 없어.”

“……?”

“그 미약,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몸에서 나던 향과 비슷한 것 같아.”

“뭐! 레온, 그것이 사실인 건가!”

제이드는 놀란 맘에 어릴 적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림자들이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피해자들이 향수 형태의 미약을 복용한 후 나왔던 증상들이 어머니와 비슷해.”

“레온!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레온하르트는 화가 난 제이드를 보며 멋쩍은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증거가 완전해지면 말하려 했지. 지금은 그저 정황 증거밖에 없으니까.”

제이드는 긴 한숨을 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너의 보좌관인 내게는 바로 말해 줬어야 했어.”

레온하르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확신할 수 있을 때 말하려고 했어.”

평소에 매사 차분하고 이성적인 제이드였지만 이번만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제이드는 화난 듯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난 너의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자 지금은 보좌관이야! 네 생각까지 알고 있을 자격이 있다고.”

“미안해. 제이드.”

“후……. 넌 정말 왜 자꾸 혼자 해결하려 하는 거야. 네가 매번 이럴 때마다 정말 섭섭하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사과할게, 제이드.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나 같아도 화날 것 같아. 앞으론 네게 꼭 미리 의논하도록 할게.”

제이드는 그제야 화가 조금은 풀리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네가 말한 그 펍에 같이 가도록 해! 나도 오늘은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어.”

레온하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너도 가는데 난 왜 안 돼?”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 약이 도는 이상 그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야. 검술이나 독에 능하지 못한 너라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제이드는 그를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지?”

“……?”

“내가 너를 따라다닌 전투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데, 이 정도에 위험하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응, 너 나보다 엄청나게 약하잖아.”

제이드는 벙찐 표정으로 자신의 친우인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그건 네가 괴물처럼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지!”

“큭큭, 친구한테 괴물이란다. 그래도 독약에 내성이 없는 너에게는 정말 위험해. 난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제이드는 어릴 적부터 밥 먹듯 독살 시도를 당했던 그를 떠올리며 분한 듯 입을 앙다물었다.

“그래, 가서 다 잡아와!”

“응, 이번에는 꼭 잡아 올게.”

‘그래, 레온. 잡아만 와! 내가 그 사돈에 팔촌까지 다 파헤쳐서 그 족속들까지 다 씨를 말려 버릴 테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까지 실종된 후 형제처럼 자란 레온하르트였다.

제이드의 입에 매일 머물러 있던 천사 같은 미소가 지워졌다.

그리고 그의 깊은 바다 같은 눈이 결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항상 고마운 친우 제이드에게 씨익 한 번 웃어주고는 ‘펍’으로 향했다.

* * *

‘지성과 이성’.

술을 즐기는 펍의 이름으로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간판을 보고 슬쩍 웃으며 펍 안으로 들어갔다.

제국민들 사이에 유명해서인지 펍 안은 매우 시끌벅적했다.

평민들 사이 유행하는 재즈가 잔잔히 들려왔다. 가수로 보이는 한 여인이 작은 무대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큰 원형 테이블에 앉은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펍의 맥주와 안주를 순수하게 즐기러 온 것처럼 보였다.

미약 사건에 어울리는 진득하고 위험한 느낌이 아닌 소탈한 분위기의 펍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펍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겉으로만 봐서는 미약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토론을 하던 청년들 틈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때 남성들이 모인 틈에 홍일점으로 껴서 목소리를 높이는 한 여인이 보였다.

얼굴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데, 그 귀여움과 상반되게 가슴이 반쯤 드러나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로 아이린이었다.

그녀는 매우 즐겁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귀족들의 사치품, 그러니까 예를 들면 보석 같은 것에 세금을 부과하는 거죠!”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은 방법이군요. 사치품을 사용할 때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된다고 한다면, 귀족들의 불만을 잠 재울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아이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그렇게 그 세금이 어려운 백성의 복지에 사용된다면 룩스 제국도 좀 더 이상적인 국가로 발전 할 수 있겠죠.”

그때 펍의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따라 펍에 은닉한 그림자들에게 슬쩍 신호를 주고 화장실로 향했다.

빠르게 화장실에 도착한 레온하르트가 얼른 문을 열었다.

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얼굴에 무언가를 뿌리는 것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곧바로 그 남자의 뒤통수를 남은 한 손으로 가격했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기절했다.

“향수병?”

레온하르트는 남자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 어릴 적 기억 속 어머니의 향수병과 같음을 떠올렸다.

“이거야, 이거였어! 드디어 잡았어!”

그때 그림자들이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범인의 멱살을 잡고 그들에게 던지듯 넘겼다.

“여기 쓰러진 사람은 의사한테 보이고, 그자는 데리고 가서 배후를 알아내도록.”

“존명.”

그림자들은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잠시 서 있었다.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0년.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드디어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과 왠지 모를 허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오늘 같은 날은 한잔 하는 것이 좋겠지.”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자정을 넘어서였을까? 토론의 열기가 잦아들은 펍은 매우 조용해 졌다.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여인을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달콤한 꽃향기에 더러운 벌레들이 꼬였군.’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양옆에 앉아 웃으며 뭐라고 대답하고 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그 남자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흘끔거리며 간간이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구기며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그들을 향해 짙은 살기를 내 뿜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이었다.

사색이 된 남자들은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살려고 도망쳤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술기운 때문인지 잠시 엎드려 있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웃었다.

“킥킥, 아까 그 사람이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를 기억해요?”

아이린은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운다고 말했잖아요? 저 머리 엄청 좋아요.”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자신을 기억한다고 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후후, 그래요. 그래 보여요.”

아이린은 맥주잔을 들며 신이 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폭탄주도 엄청 잘 만들어요. 드셔 보실래요?”

“폭탄주요?”

‘폭탄이 뭐지? 술을 만들 때 넣는 재료인가?’

레온하르트가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박이고 있자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폭탄 몰라요? 음, 이 세계에는 폭탄이 없었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곧 씨익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 세계라니요? 혹시 아가씨는 다른 세계에서 오셨어요?”

아이린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어? 그거 비밀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떡하지? 어떡해! 그거 아무도 몰라야 하는데.”

그녀의 동그란 볼이 살짝 붉어지고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레온하르트는 취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녀가 어쩐지 더 귀여워 보였다.

‘정말 다른 세계에서 온 게 맞나 보네. 인간이 저렇게 귀여울 수 있겠어?’

“후후, 걱정 말아요. 귀여운 토끼 아가씨. 비밀은 꼭 지킬 테니.”

아이린은 그를 향해 눈을 깜박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요? 꼭 지켜주시는 거죠?”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역시 좋은 분이셨군요!”

그렇게 말하고 활짝 웃던 아이린은 커다란 맥주잔에 작은 양주잔을 넣어 흔들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전 아이린 토트에요.”

레온하르트는 얼떨결에 그녀가 내미는 잔을 받아들었다.

“전 레온입니다.”

“우리 이렇게 만난 기념으로 짠 해요!”

“짠이요?”

“뭐지, 여기는 짠 하는 것도 없나?”

‘여기는 그런 것도 없다니? 이 아가씨, 다른 나라에서 온 건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는 레온하르트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고 잔을 비웠다.

“카! 시원해!”

아이린은 다시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자, 이렇게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거예요. 해 보세요.”

레온하르트는 잔을 높이 들어 올리고 덕담을 하는 건배는 많이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잔을 부딪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린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의 잔에 살짝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잔과 잔이 마주치며 마치 노래를 연주하듯 맑은 소리가 났다.

이내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셔요! 원샷!”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하듯 한입에 잔을 털어 마셨다.

‘으음, 먹을 만한……. 으윽.’

첫맛은 맥주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점점 씁쓸함이 진해지다 마지막에 훅 하고 도수 높은 양주가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는 순간 머리가 띵해 오며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가 재미있었는지 향해 까르르 웃었다.

한쪽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던 레온하르트도 이내 전염이 된 듯 함께 웃었다.

둘 사람은 늦은 시간까지 아이린이 만든 폭탄주를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그녀 덕분에 오랜만에 맘껏 웃었다.

“러브샷이라고 들어봤어요?”

“러브샷이요? 하하, 그건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요?”

“킥킥, 어느 나라 말이라뇨? 대한민국 말이지.”

“대한민국? 거긴 또 어디인가요.”

그 순간 아이린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레온하르트의 입술에 닿았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입술에 닿는 그녀의 손가락에 순간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윽, 심장이! 도대체 나 왜 이러는 거지!’

그때 장난꾸러기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땍! 몰라도 돼요. 레온, 알면 다쳐요.”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심장이 왜 이리 빨리 뛰는 거지? 혹시 나도 그녀처럼 취한 걸까?’

아이린의 몸은 서영일 때와 다르게 원체 알콜이나 카페인에 약했다.

아이린은 서영으로 산 날들이 더 길기에 가끔 그 사실을 잊은 채 취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레온하르트는 알콜의 기운을 날리며 마셨기에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이린이 일어서더니 옆으로 와 앉았다.

그 순간 달콤한 딸기 향이 훅 하고 그의 폐부로 들어왔다.

‘무슨 사람 몸에서 딸기 향이 나지?’

레온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이 향수와 관계가 있었음을 기억해서인지 레온하르트는 향수를 혐오했다.

그동안 보아 왔던 아카데미 동문들이나 황궁의 여인들은 향수로 목욕이라도 하는 듯 독한 향이 났다.

어쩌면 그 때문에 여인을 멀리한 것일 수도 있었다.

여인이 가까이 다가올 때면 진한 향수 때문에 구토가 일어날 정도로 역겹다고 할까?

그래서 그 또한 비누로 몸을 씻는 것이 다였다.

‘과일향이 나는 향수가 새로 나왔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린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때 아이린이 새로 만든 폭탄주 잔을 레온하르트의 손에 쥐어주었다.

“여기 받으세요.”

그리고 갑자기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가슴이 그의 팔에 살짝 닿아왔다.

레온하르트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대로 굳었다.

아이린은 그런 그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한 번 킥킥 웃더니 잔을 든 팔을 교차하며 술을 마셨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멍한 표정이 되어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 마셨다.

이처럼 여인과 친밀하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린은 다시 한 번 그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레온, 이런 러브샷도 있어요.”

그때였다.

아이린이 갑자기 그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커다란 레온하르트에 비해 몸집이 워낙 작은 그녀였기에 그의 허리만 겨우 안을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했다.

‘헉!’

말 그대로 전쟁터에서 살기 위해 전력 질주를 할 때나 빠르게 뛰던 심장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의 심장이 사람을 향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육체가 갑자기 온몸으로 의식되기 시작했다.

“아, 아이린, 잠깐만요. 지금 여기서 이렇게!”

그때 그를 안은 아이린의 팔이 스르륵 풀렸다.

그는 그렇게 뒤로 넘어 가려는 그녀를 얼른 부축했다.

“휴우……. 참.”

그렇게 아이린은 레온하르트를 안은 채 잠이 들고 말았다.

워낙 거구인 레온하르트였기에 그녀에게 안긴 것인지 그녀를 그가 안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심장은 그대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위험해. 얼른 이곳을 나가야겠어.’

그는 주변을 얼른 살폈다.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다행히 다들 술에 취해 정신없어 보였다.

그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이런, 벌써 새벽 3시네. 제이드가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내 그는 슬쩍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가누기 힘들었는지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술에 취한 사람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펍의 주인에게 팁을 크게 얹어 주며 그녀를 등에 업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린! 아이린, 정신 좀 차려 봐요!”

“음 냠냐.”

“아이린, 집이 어디야?”

“으응. 지입?”

“응, 그래 집 말이야.”

“집 멀어. 저기 대한민, 웁, 우웩!”

그때였다.

뒤에서 아이린의 구토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함께 등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윽…….”

레온하르트는 순간 절망했다.

그는 등에 업었던 아이린을 벤치에 내려 놨다.

그리고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살살 닦았다.

아이린은 뭐가 좋은지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잠들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난생 처음 겪는 일에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건너편에 호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어쩔 수 없군. 저기로 가야겠어.”

말 그대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레온하르트의 등과 아이린의 드레스 앞섶에 토사물이 잔뜩 묻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몰래 잠행을 나왔기에 황궁 마차를 부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사설 마차를 탔다간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몸을 숙여 잠이 든 아이린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얼른 호텔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호텔은 전체적인 규모는 작았지만 다행히도 제법 깔끔했다.

레온하르트는 로비 한쪽에 보이는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가장 좋은 룸으로 두 개 주십시오.”

그때 직원이 미안한 기색을 띠며 대답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주말이라 룸이 딱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에게 안겨서 세상 모르고 잠든 아이린을 바라봤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직원에게서 키를 받아들었다.

“305호입니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안은 채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참 작기도 하네.’

펍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실 때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작은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안아든 그녀는 매우 작고 가벼웠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니, 룸은 평민들이 주 고객인 호텔답게 작고 아담했다.

다행스럽게도 침대는 두 개였다. 아니, 불행인가?

레온하르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애매한 기분을 날려버리려고 고개를 여러 번 흔들었다.

이윽고 아이린을 먼저 룸의 바닥에 내려놓은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드레스의 앞섶에는 토사물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아까 벤치에서 그녀의 입 주변 토사물은 닦아 냈지만, 가슴 쪽은 노출이 심해 어쩐지 손 댈 수가 없어서였다.

그렇지만 토사물이 묻은 채 그냥 두기도 찜찜했다.

“어쩌지. 허락 없이 벗겨도 될까?”

레온하르트는 토사물이 잔뜩 묻은 그녀의 드레스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확 올라오는 역한 냄새에 그의 인상이 절로 찌그러졌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얼른 그녀의 드레스를 벗겨 욕실로 던져 넣었다.

그때 무언가가 그녀의 드레스에서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그것을 들어올렸다.

“신분패?”

평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동색 신분 패에 그녀의 생년월일과 주소, 아이린 토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이린 토트가 본명이었네. 얼굴만큼 귀여운 이름이군.”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이름을 속이지 않았음에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는 얼른 신분패를 그녀의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아이린을 깨끗한 이불로 감싸 안고 그대로 침대로 걸어가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휴. 그런데 아이린 토트라는 이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고개를 갸웃하던 레온하르트는 얼른 더러워진 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한 뒤 토사물이 묻은 곳만 대충 빨았다.

“참, 내가 빨래를 다 하게 될 줄이야.”

아무리 전장을 돌아다니며 바깥 생활을 많이 했어도 그는 룩스 제국의 황태자였다.

황궁의 가장 낮은 하녀들이 하는 빨래를 해 보는 것은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

레온하르트에게 그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하, 아이린 토트! 어디서 들어 봤나 했더니 이번에 뽑은 신입 이름이었어!”

레온하르트는 그때 지방 영지를 시찰하느라 그녀의 면접을 직접 보진 못했다.

하지만 ‘토트’라는 독특한 성을 가진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을 신입으로 뽑았다는 서류에 결재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보통 신입이 수습 딱지를 떼기 전에는 이름을 외우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뽑은 신입인 데다 성이 독특해서 그의 뇌리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수석 졸업생이 황궁 행정부에 지원하지 않고 그의 보좌관실에서 일하겠다고 지원한 것도 특이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드레스와 자신의 옷을 꽉 짠 후 탁탁 털고 방에 가져와 옷걸이에 걸었다.

나란히 걸려 있는 그 모습이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져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언제 일어난 건지 아이린이 킥킥거리며 이불을 끌어내렸다.

혀가 잔뜩 꼬인 말투로 말하는 것이 여전히 술에 취한 모양이었다.

“으앙! 더워 죽을 뻔 했넹.”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깨어난 그녀에게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순간 아이린이 비틀거리며 침대 한가운데 일어섰다.

중심을 잡으려는 것인지 한참을 비틀거리다 샤가 풍성한 속치마를 벗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만 벙긋거렸다.

“어! 어!”

그 순간 아이린은 씨익 웃더니 속치마를 들고는 그를 향해 던졌다.

레온하르트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속치마를 받았다가 놀라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이린은 그런 그를 향해 깔깔대며 배를 잡고 웃었다.

“이제 그만…!”

레온하르트는 이불을 들고 잔뜩 취한 아이린을 만류하려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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