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0)

4.

그때였다. 그가 잠시 방심한 사이 아이린은 기세당당하게 브라셰르마저 벗어 던지며 깔깔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잠시 후 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에 그는 눈을 살짝 뜨고 그녀를 보았다.

“헉! 아이린!”

아이린의 손가락이 점점 내려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붉히며 뒤로 돌아 섰다.

그때 그녀 쪽에서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를 돌아봤다.

아이린이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로 침대에 쓰러진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지도 모른 채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접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하아, 정말 못 말리는 여인이군.”

그는 더없이 붉어진 얼굴로 애써 고개를 돌리며 이불로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아이린 토트 양,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

레온하르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아이린을 바라보며 저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입에서 하품이 터져나왔다.

“하함!”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잠든 그녀를 보아서 그런지 그 또한 졸음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어제 범인을 잡을 준비를 하느라 늦게까지 야근한 여파가 컸는지도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누운 침대 반대편에 있던 빈 침대를 슬쩍 바라봤다.

침대를 보니 몸이 더없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잠깐만 쉬었다 갈까?’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깨기 전까지 잠깐만 쉬어갈까 생각하며 침대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그런데 생각보다 포근한 침대의 안정감에 그만 깊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녘 여전히 취한 채 화장실을 다녀온 아이린.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레온하르트가 누워 있는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다 이른 아침에 먼저 깨어난 아이린이 놀라 혼비백산 도망을 친 것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떠나고 한참 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려 그녀가 누웠던 침대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떠난 방 안을 살피며 허탈하게 웃었다.

“응? 이게 뭐지?”

다리 아래 무슨 천 조각이 느껴져 들어올려 보니 그녀가 잊어버리고 간 브라셰르였다.

“풋, 하하하하.”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그에게 웃음을 주고 달아났던 것이다.

그 순간, 어릴 적 잠들 때 어머니가 들려 주셨던 동화가 하나 떠올랐다.

여자 주인공이 왕자님에게 구두를 남기고 떠났다는 ‘신데렐라’라는 여인의 이야기였다.

‘그 이후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더라?’

매번 그쯤에서 잠이 들어 그 이후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에게 동화를 들려 줄 이는 없었다.

순간 갑자기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레온하르트였다.

레온하르트는 헐레벌떡 도망가듯 룸을 떠났을 아이린이 상상이 되어 웃음이 났다.

거기다 아이린은 그 이야기와 조금은 다르게 브라셰르를 남기고 떠난 것이었다.

그대로 서서 한참을 웃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브라셰르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호텔을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그를 태우러 온 마차가 도착했다.

레온하르트가 얼른 마차에 오르자, 마부에 의해 마차 문이 닫혔다.

그는 창가로 앉아 창밖으로 그녀와 머물었던 호텔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곧 출발하였다.

“분명 제이드가 신입 직원의 출근 날이 한 달 후라고 했었어.”

레온하르트는 한 달 뒤면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날 그녀가 황궁에서 나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레온하르트는 어제 저녁 가발을 쓰고 마법으로 얼굴을 가렸던 것이 떠올랐다.

“……알아보는 게 더 힘들겠네.”

그는 살짝 실망한 기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 입가에 미소를 띠는 레온하르트였다.

“아참! 마법 물약의 효과가 아침까지였는데. 그렇다면 혹시 내 얼굴을 보았을 수도 있겠어.”

레온하르트는 한 달 뒤 아이린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

그는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하며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집으로 돌아간 아이린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잔뜩 이상한 오해를 하며 이불 킥을 날리고 있었다.

* * *

‘그때처럼 취한 것 같은데. 뭐에 취한 거지? 설마 차에 술이 들어 있었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찻잔을 바라보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린, 괜찮아?”

“킥킥, 나 괜찮아요. 그냥 좀 기분이 좋네요. 혹시 초코빵 효과인가? 이거 기분 좋아지는데, 레온도 한입 줄까요?”

‘레온이라 불러 줘서 좋기는 한데 괜찮은 걸까?’

레온하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우웅, 이거 엄청 맛있는데.”

단 음식을 즐기는 레온하르트는 당연히 브라우니가 혀가 녹아 없어질 정도로 달고 맛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취한 것 같은 그녀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순간 멍했다.

지금은 오로지 그녀의 행동을 저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그런 복잡한 마음을 모르는 아이린은 오직 브라우니를 바라보며 헤실거렸다.

‘뭐지, 브라우니에게 진 것 같은 느낌은?’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시선을 사로잡는 브라우니가 어쩐지 불쾌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빛은 오로지 자신만이 독점하고 싶었다.

아이린을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진득하게 가라앉았다.

아이린은 그의 짙어진 눈빛을 모르는 채 쫀득한 브라우니 접시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봤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정말 맛나게 생겨써!”

그러다 브라우니를 한 입 크게 깨물더니 눈을 스르륵 감았다.

“으앙, 마시쪄!”

레온하르트는 순간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마시쪄라니!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한편 아이린은 브라우니를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맛있게 음미하던 중 갑자기 목이 말랐다.

결국 그녀는 다 식은 찻잔을 들더니 남은 차까지 벌컥벌컥 다 마시고 말았다.

“으앙, 마셔도 마셔도 답답하네!”

‘이런, 설마 그날처럼 답답하다며 옷을 벗는 건 아니겠지?’

레온하르트는 놀라 얼른 그녀가 있는 책상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아이린,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아이린은 안절부절 못하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무해한 눈빛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우웅? 레온, 왜요? 뭐가 안 되는데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뭐, 뭐라고 말하지?’

정말 그는 그야말로 난감했다.

아무리 잘 포장해 말해도 잘못하면 변태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빨리 말해 봐요! 응?”

아이린을 눈을 귀엽게 깜박이며 그를 추궁하듯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에게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저기 그게……. 벗으면 안 된다고.”

레온하르트는 얼른 손을 올려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앗, 내가 뭐라 말한 거야!’

“으음, 왜요? 왜 여기서 벗으면 안 되는데요?”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향해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도톰한 입술을 삐죽이며 쭉 내밀었다.

그 순간 찻물에 촉촉이 젖어있는 그녀의 입술이 잘 익은 체리처럼 그를 유혹했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레온하르트! 너야말로 여기서 이러면 안돼! 정신 차리라고!’

아이린은 그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한 채 고개를 귀엽게 오른쪽 왼쪽으로 천천히 갸웃하며 눈을 깜박였다.

그런 아이린의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어쩐지 색스러워 보여 그의 심장을 간질였다.

레온하르트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아이린!”

“네? 왜요, 레온?”

철저하게 황태자 전하라고만 부르던 아이린이었다.

그런데 마치 오늘의 아이린은 술에 취한 듯 처음 만난 그날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술에 취한 듯한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로 반가웠다.

평소에 그를 모르는 척 철저히 철벽을 치던 아이린도 귀엽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달콤하게 불러오는 아이린의 목소리에는 귀가 녹아 없어질 듯 했다.

“레온!”

레온하르트는 무언가에 홀린 듯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응? 아이린?”

“그런데요. 나 너무 답답해요! 이제 나 벗고 싶어요.”

레온하르트는 그날 더러워진 그녀의 드레스를 벗겨 주며 얼핏 보았던 그녀의 몸이 떠올랐다.

“안돼, 아이린! 여기선 절대 안돼!”

그때였다. 아이린이 갑자기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답답해서 안경을 벗은 건데 왜 자꾸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아니, 벗는다는 게 안경이었어?’

레온하르트는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아쉬움이 밀려와 고개를 저었다.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바라보는 아이린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레온하르트는 순간 말갛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았다.

푸른 산호처럼 빛나는 그녀의 두 눈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이린은 그날도 날 이런 눈으로 바라봤지.’

단 하루.

잠깐의 시간이었다.

누구와 그렇게 긴 시간을 즐겁게 이야기한 것은, 친구인 제이드 이외에는 없었다.

이성과의 만남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조용히 불렀다.

“저기, 아이린!”

아이린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네, 레온!”

“그 안경, 그렇게 매일 벗어주면 안 될까?”

그의 눈에는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도 귀여웠다.

하지만 그녀의 말간 눈을 이렇게 계속 보고 싶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린은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레온, 근데 나 졸려요.”

“응? 그럼 퇴근할래? 데려다 줄게.”

아이린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워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음, 부드러워. 그런데 뭐지, 이 기분은?”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그의 가슴 한켠을 작은 깃털이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 포근하고 힐링이 되는 느낌이 몰려왔다.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기 힘들었다.

어릴 적부터 중독된 달콤한 것을 여전히 못 끊는 것처럼, 마치 그녀에게 중독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제이드가 들어왔다.

제이드는 들어오자마자 레온하르트의 행태에 놀랐다.

그는 얼른 레온하르트의 손을 아이린의 머리에서 잡아 떼어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아이린이 깰까 조용히 속삭였다.

“레온, 너 뭐하고 있는 거야? 자고 있는 직원한테 이렇게 손대면 안 되는 거 몰라? 이거 성희롱이다!”

아이린을 향해 미소짓던 레온하르트는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냥 직원이 아니야.”

제이드는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직원이 아니라니? 너 설마?”

레온하르트는 더할 나위 없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는 여자야.”

“뭐, 좋아하는 여자? 너 설마 아이린 토트 양을 좋아한다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향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제이드는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둘만의 접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이린이 뒤척이며 잠꼬대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추워.”

레온하르트는 얼른 제복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둘러 주었다.

아이린은 따뜻한지 그제야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미소를 지었다.

레온하르트가 엄지를 펴서 문을 가리키자, 제이드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그때 제이드가 그에게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레온, 내 집무실에서 이야기 좀 하자!”

“알았어. 먼저 가!”

그 시각 아이린은 따뜻한 초코 퐁듀에서 수영을 하는 꿈을 꾸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제이드가 레온하르트의 집무실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집무실로 먼저 들어갔다.

레온하르트는 그를 따라 걷다 자신의 집무실을 슬쩍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차가웠던 집무실이 그녀로 인해 따뜻한 기운이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집무실 앞을 지키는 기사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집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않도록.”

“네,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이내 제이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제이드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오는 레온하르트를 보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뭐야 그 징그러운 표정은? 여기 소름 돋는 거 보여?”

제이드는 소매를 올려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징그러운 표정이라니! 이건 사랑에 빠진 표정이라고.”

“헉, 사랑이라고?”

레온하르트는 젠체하며 말했다.

“제이드, 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구나!”

제이드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참 나, 그 표정은 뭐지? 레온, 네가 언제부터 사랑을 알았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27년 네 인생 평생 동안 오는 여자조차 밀어내는 모태솔로였으면서.”

레온하르트는 그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나의 귀여운 아이린을 만나기 전이지.”

“뭐?”

제이드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 듯 말했다.

“어쩌면 나, 아이린을 만나려고 그동안 여인을 멀리한 것 아닐까? 그래, 아이린과 난 운명인거야.”

제이드는 순간 말 한 마디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생소한 경험을 했다.

그는 고운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세상에, 네 입에서 ‘나의 귀여운 아이린’이라는 닭살스러운 소리를 듣게 되다니!”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한층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제이드. 너도 일 중독자처럼 집무실에만 박혀 있지 말고 이제는 연애를 해보는 것 어때?”

제이드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일 중독자라니! 내가 누구 때문에 일 중독자가 된 건데!’

“나보고 일 중독자라고? 뭐, 연애를 하라고? 어릴 적 해맑게 뛰어 놀기 좋아했던 내가 왜 일 중독자, 연애고자, 게이로 불리게 되었을까? 친, 구.”

레온하르트도 양심에 찔렸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글세,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내 친우 제이드 레이먼드는 이렇게 반짝반짝, 잘생기고 멋진데 말이야.”

제이드는 그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이미 구겨져 있던 미간을 더욱 구기며 말했다.

“레온, 너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지! 요즘 황태자 전하께서 아무래도 업무량에 여유가 넘쳐나나 봅니다. 그럼 오늘부터 결재 서류 양을 좀 더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사색이 되며 손사래를 쳤다.

“안돼! 그러면 아이린의 귀여운 얼굴을 볼 시간이 줄어든다고!”

“매일 한 방에서 얼굴 보며 일하면서 앓는 소리 하지 마!”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시무룩한 얼굴로 제이드를 바라봤다.

“제이드,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데도 매일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있어.”

제이드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며 레온하르트를 쳐다보았다.

‘뭐지, 이 아무 말은? 이거 신종 괴롭힘인가?’

“아이린도, 그리고 나도 서류가 얼마나 산처럼 쌓여 있는지! 한 방에 같이 있는데 얼굴도 보지 못하면 얼마나 더 애가 타는지 모를 거야.”

제이드는 친우의 처음 보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린이 힘들다고 퇴사하면 어떻게 해!”

그 순간 제이드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긴 막 들어온 신입이 처리하기에는 살인적인 업무량이긴 하지.”

“그래, 요즘 연말이라 업무량이 과하긴 했어. 나도 좀 버거울 때가 있더라고.”

“나도 일이 많아 요즘 집무실 소파에서 묵고 있는 판이니까. 아이린은 보좌관실 막내니 더하겠네. 내가 소홀했군.”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보좌관님. 어쩌면 쉬지 않고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악덕 상사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제이드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쏘아봤다.

“그러게 내가 진작 사람 좀 뽑자고 했지. 뽑는 사람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내쫓더니!”

제이드의 타박에 레온하르트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휴……. 나도 요즘 엄청 후회하고 있어.”

* * *

한 달 후.

“제이드 님!”

눈을 감고 쉬고 있던 제이드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어린 시절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은발의 아이린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린 토트 씨.”

아이린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황태자 전하처럼 아이린으로 부르셔도 되는데요.”

제이드는 그런 아이린에게 빙긋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랬다가는 레온 그 녀석에게 맞아서 어디 하나가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아이린은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최애 제이드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으아, 계탔다!’

아이린은 그의 천사 같은 미소에 녹아내리려는 심장을 부여잡고 일코를 애써 유지했다.

“음, 저……. 여기서 뭐하고 계셨어요?”

제이드는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제이드는 아이린이 매일 점심을 먹으러 가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린은 잘 몰랐지만, 이곳은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도 피곤할 때 가끔 찾는 장소였다.

그때 아이린이 제이드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혹시 점심은 드셨어요?”

제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입니다. 사실 오늘은 점심보다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더 나는군요.”

제이드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곧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제 못 들어가셨다고 실장님께 들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굶으시면 몸 상하세요.”

그때 제이드는 자신의 코 앞에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 맡아보는 음식 냄새에, 뭔가 해서 눈을 떴다.

눈앞에는 동그란 모양에 여러 색이 섞여 있는 알 수 없는 음식이 있었다.

제이드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이게 뭐죠?”

아이린은 바구니에서 김밥을 하나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김밥이라는 음식이에요.”

“김밥이요?”

아이린은 눈매를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릴 적에 제가 자라던 곳에선 오늘 같이 햇살 좋은 날 소풍을 가곤 했는데, 그때 이 김밥을 싸 가지고 갔어요. 제이드 님도 하나 드셔보시겠어요?”

제이드는 얼떨결에 그녀가 내미는 김밥 하나를 받아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어릴 적부터 비위가 약한 제이드는 낮선 음식이라 살짝 겁이 났다.

하지만 고소한 참기름 향이 자신을 먹어 달라고 유혹하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눈을 감고 얼른 김밥을 입에 넣었다.

‘뭐, 뭐지? 이 맛은?’

제이드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하하, 제이드 님이 이렇게 놀라신 건 처음 보네요.”

제이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 안의 김밥을 마저 먹었다.

“맛있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치즈 김밥이에요.”

제이드는 그녀의 바구니 안에 든 김밥을 살펴보며 말했다.

“식재료들이 제국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아이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치즈랑 우엉, 당근, 시금치, 그리고 요 하얀 밥까지 모두 제국의 것이에요.”

“제국의 것이라고요?”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그리고 나머지 재료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식재료를 파는 상점가에서 구입했고요.”

“그래도 이 음식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입니다. 아무래도 제국의 음식 같지는 않은데 어느 나라 음식입니까?”

‘끄응, 대한민국이라 말할 수도 없고.’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리듯 말했다.

“글쎄요. 그냥 어릴 적 먹었던 기억으로 싸봤어요.”

“어릴 적에 먹었던 음식이라면 아이린 씨의 부모님은 혹시 이방 국가 사람입니까?”

“글쎄요? 저 7살부터 고아원에서 자라서 그런지 부모님은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대한민국의 가족 이야기를 할 순 없었기에 아이린은 대충 얼버무렸다.

원작의 아이린은 고아원에서 자란 게 사실이기도 했고.

제이드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아이린은 사실 가족이 그립지 않았다.

원래 사이가 좋지 않기도 했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원작의 아이린으로 점점 동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드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도 제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이린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제이드 님?”

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부탁이요?”

“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돼요.”

“말씀하십시오.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따뜻한 햇살이 그를 비추었다.

아름다운 은발과 진주처럼 하얀 피부가 햇빛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였다.

제이드는 그렇게 천사가 강림한 듯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

‘헉, 역시 저세상 미모! 저렇게 천사 같아서야 험한 세상 살아 나가시기 힘들겠지! 역시 우리 제이드 님은 내가 지켜줘야겠어.’

제이드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레온하르트의 보좌관으로 지내며 온갖 일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친우인 레온하르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을 해하는 일조차 아무렇지 않게 처리했다.

그런 제이드가 아이린의 이런 생각을 몰라서 다행이지, 알면 정말 코웃음을 칠 것이었다.

“제이드 님, 다른 데 가서 그 표정으로 뭐든 들어주신다 하시면 안돼요! 아셨죠?”

“네? 그게 무슨?”

“그러다가 호구 된다고요.”

“네? 호구요?”

제이드는 평소 자신이 귀족들 사이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이성으로 불리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 자신을 보며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이린에게 어이가 없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크흠. 그래서 부탁이 무엇인가요, 아이린 씨?”

아이린은 도시락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저랑 이 도시락을 함께 먹어주시겠어요?”

제이드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이린을 바라봤다.

사실 제이드는 그녀에게 큰 실례를 한 것 같았다.

때문에 그녀가 무언가 비싼 보석 같은 것을 바란다고 해도 들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탁이 함께 자신의 점심을 먹어달라는 것이라니! 참 엉뚱했다.

마치 잃어버린 그의 어린 동생처럼.

‘내 동생 메이린도 참 엉뚱하고 귀여웠는데.’

“제이드 님, 얼른 드세요. 제 부탁 들어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제이드는 웃음짓는 아이린을 향해 마주 웃으며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밥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세상에, 맛있어! 이게 뭐지?’

고소하면서도 적당하게 간간한 맛이 그의 취향을 저격하였다.

그는 김밥을 먹으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내 동생처럼 은발에……. 이름도 비슷하네.’

제이드는 어릴 적 잃어버린 동생과 비슷한 그녀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제이드 님, 여기 물이요.”

제이드는 그녀가 내민 물컵을 받아 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겨울에도 가을처럼 따뜻한 룩스 제국이기에 즐길 수 있는 소풍 같은 점심 시간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소풍 가는 기분으로 먹으려 김밥 싸 왔는데, 제이드 님이랑 함께 점심을 먹다니! 나 완전 계 탔다, 으히히!’

그때였다. 낯익은 커다란 인영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이린! 제이드!”

“어? 황태자 전하!”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일어났다.

레온하르트는 매번 철벽을 치는 아이린이 자신 때문에 불편하게 점심을 먹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때문에 그녀가 낮잠을 자거나 자리를 떠난 후에 벤치에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평소 낮잠을 즐기는 시간인데, 제이드가 함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과 같은 친우를 질투할 수는 없기에 환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제이드는 금방 눈치챘다.

두 사람은 부모보다도 서로와 함께 한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었다.

제이드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보며 살짝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표정에서 자신의 질투를 들켰음을 느끼고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황태자 전하.”

제이드는 어쩐지 심통이 났다.

“전하,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입꼬리를 휘며 환한 미소를 지은 제이드가 레온하르트에게 자신의 옆에 앉으라며 팔을 살짝 잡아 이끌었다.

레온하르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에 앉으며 속삭였다.

“너 자꾸 이럴래?”

“뭘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 혹시 전하께서 친구인 저에게 질투…… 읍.”

레온하르트는 얼른 김밥을 들어 제이드의 입을 막았다.

아이린은 그들의 속도 모르고 흐뭇하게 바라봤다.

‘와아, 참 므흣한 광경일세. 천사 같은 내 최애와 꽃보다 잘생긴 남주가 서로 먹여주는 광경이라니!’

“아이린, 그 표정 왠지 무섭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제 표정이 어때서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보며 자신의 몸을 보호하듯 두 팔을 교차했다.

“너 지금 당장 거울 봐봐. 마치 동화에 나오는 미친 마녀 같았어.”

아이린은 순간 뜨끔했다.

‘그래도 마녀는 너무하잖아!’

아이린은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예요, 마녀라니요? 너무하세요.”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이 그런 목소리를 내자 당황했다.

“아이린, 그게 아니라!”

아이린은 제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이드 님! 제 표정이 정말 그랬어요?”

제이드도 사실 그녀의 음험한 눈빛에 좀 당황하기는 해서, 그녀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렸다.

“저, 나도 그게 좀…….”

‘윽. 제이드 님, 너무 단호박!’

아이린은 자신의 음흉한 머릿속을 들킨 것 같아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얼른 뒤돌아 뛰며 소리쳤다.

“이잇, 저 먼저 가요! 그 김밥은 사이좋은 두 분이서 다 드세요!”

레온하르트는 달려가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많이 화난 거 같지?”

“응, 그러게. 넌 아이린 씨를 좋아한다면서 마녀가 뭐냐, 마녀가? 예쁜 무언가를 말해도 부족할 텐데.”

“그거야. 난 왜 쟤만 보면 괴롭히고 싶을까?”

제이드는 순간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아이고, 우리 황태자 전하 27살이나 솔로로 살더니 살짝 정신이 나갔구나! 무슨 애 같은 소리야?”

“아니, 애 같은 소리라니?”

“너, 철부지 꼬마 남자애들이나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짓궂게 장난치는 거 몰라?”

레온하르트는 순간 자신의 행동이 떠올라 멋쩍어졌다.

“앗, 내가 좀 그랬나?”

“응, 좀 그랬어. 너 그러다가 아이린이 너 말고 다른 남자 좋아하면 어떻게 할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않구나!’

레온하르트는 아이린 옆에 다른 남자가 서 있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른 남자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혹시 제이드 너야? 아니면 보좌관실의 토마스가 그래, 아이린에게 관심 있다고?”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황궁에서 사이좋게 지내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제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정말로 아연실색했다.

‘사랑은 미친 짓이라더니!’

“거기서 내 이름이 왜 나와? 우리 황태자님, 사랑을 하시더니 혹시 미치셨습니까?”

“제이드, 미치다니! 나 지금 지극히 정상이야.”

“레온, 그럼 아까처럼 날 질투하거나 정신나간 짓 그만하고 아이린 씨에게 잘해줘.”

레온하르트는 머쓱해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질투한 것 알고 있었구나. 역시 넌 내 친구야. 날 너무 잘 안단 말이지.”

제이드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사랑을 하면 저리 머저리가 되어가는 건가?’

“참 엉뚱한 데서 친구 찾고 있어. 그래서 넌 그 친구한테 말도 안 되는 질투심이나 갖는구나. 이거 참 섭섭하다.”

레온하르트는 이내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뭘 또 그렇게 생각해. 제이드 네가 매우 잘생기고 워낙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으니 그러지. 가끔 널 보는 아이린의 눈빛도 평범하지 않고 말이야.”

“흐흠.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황태자 전하. 나에게 아이린 씨는 그냥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이니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동생 같은 느낌이라니?”

제이드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릴 적 헤어진 내 동생 메이린 기억해?”

레온하르트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듯 허공을 바라보다 그를 바라봤다.

“아, 제이드 네 동생도 아이린처럼 은발에 짙은 바다색 눈동자를 가졌었지?”

제이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름까지 비슷하잖아! 왜 내가 그 사실을 잊고 있었지?”

“응, 나도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어렴풋이 떠올렸는데, 보면 볼수록 뭔가 닮았어.”

레온하르트는 살짝 걱정스런 눈빛으로 제이드를 바라봤다.

“혹시 아이린의 지난 행적에 대해 알아봤어?”

“응. 먼저 그녀가 나온 고아원을 조사해 봤어.”

레온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데?”

“그녀가 있던 고아원은 수도에서 가장 큰 룩스 제국 고아원이었어. 그런 만큼 그 시기에 길에서 데려온 아이도 많았고.”

“그럼 은발과 파란 눈을 중점으로 찾아보지 그랬어.”

그 순간 제이드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며 말했다.

“처음 메이린을 잃어버렸을 때, 가장 먼저 그곳을 찾아 보았어.”

“…….”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은발에 파란 눈의 여자 아이가 30명도 넘더라고.”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머리를 흩뜨리며 말했다.

“후우, 어렵다.”

그때 제이드가 벤치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곧 점심시간도 끝나겠군. 들어가자.”

“그래.”

레온하르트는 먼저 집무실로 향하는 제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동생을 잃어버리고 매우 힘들었음에도 제이드는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이 두고 간 물건을 챙겨들며 말했다.

“같이 가!”

그의 말에 제이드의 걸음이 한층 느려졌다.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레온하르트가 집무실에 들어가니 잔뜩 입이 나온 아이린이 서류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책상 위에 챙겨온 물건을 놓아주고는 두 손을 모았다.

“미안해, 아이린. 많이 화났어?”

아이린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서류더미에 납작 엎드렸다.

“아닙니다, 즈은하! 감히 미천한 제가 어찌 전하를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겨우 참았다.

“아이린, 이거 먹고 화 풀어 주면 안 될까?”

레온하르트는 작은 초콜릿색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를 한번 흘깃 바라본 아이린은 조심히 뚜껑을 열어보았다.

상자 속에는 달콤한 초콜릿 크림으로 가득한 귀여운 마카롱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아이린은 뾰루퉁하게 입술을 내밀며 혼자 투덜거리듯 말했다.

“칫, 내가 뭐 돼진가? 맨날 먹고 화 풀라 그러고.”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속으로는 웃었지만, 겉으로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린,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나한테 해.”

아이린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냥 저 혼자 혼잣말 한 거예요. 가서 일 보세요,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빌듯이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오늘 정말 잘못했어. 저기, 혼자 그러지 말고 나한테 해! 아니, 막 때려도 돼.”

아이린은 여전히 입을 쭉 내민 채 그를 보지 않았다.

“제가 감히 황태자 전하를요? 혹시 저 싫어하세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작은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허락하면 괜찮아! 자, 때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손에 머리를 가져다대며 말했다.

아이린은 깜짝 놀라 손을 빼며 말했다.

“으힉! 누구 죽일 일 있어요? 그랬다간 저 황궁 기사단에 곧바로 잡혀 갈걸요.”

“하하, 내가 잘 말해 둘게. 절대 이런 걸로 잡혀가지 않아! 걱정 마!”

그 순간 아이린은 붕붕 소리가 날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분명 황제 폐하께서는 저를 보자마자 이러실 것이에요. ‘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 레온하르트, 귀하디귀한 룩스 제국의 이인자인 황태자를 해하려고 하다니! 당장 죄인을 끌고 가 참수형에 처하라!’”

레온하르트는 근엄하기로 유명하신 황제 폐하를 흉내내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푸하하. 아이린, 너 왜 이리 귀여운 거야? 이렇게 귀여운 게 지금까지 어디 있다 온 거야?”

아이린은 다시 입을 쪽 내밀고 말했다.

“칫, 그렇게 대폭소하실 건 뭐람.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큭큭큭, 놀리다니. 그냥 네가 말하는 것이 너무 독특하고 귀여워서 그렇지. ‘대폭소’, 그건 어느 지방에서 쓰는 말이야? 하하.”

아이린은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였다.

‘헉, 무슨 입술이 저렇게 치명적이지! 아무래도 아이린은 내 심장에 좋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입술을 보며 꼴깍 침을 삼켰다.

아이린은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계속 조잘조잘 귀여운 참새처럼 지저귀었다.

“어느 지방이 아니라 그냥 제가 만든 말이죠. 뭐 이리 매번 어디 말이냐 물으신대.”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귀여움에 살짝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이린의 언어생활이 참 귀엽고 독특해서.”

아이린은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감추며 말했다.

“언어생활이라고 할 것 까지 없어요. 당연히 저는 평민인데 황족이나 귀족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죠.”

레온하르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이린,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칫. 저는 몰라요, 그런 거.”

레온하르트는 팔짱을 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 그렇게 자꾸 그렇게 입을 내밀고 있을 거야?”

아이린은 살짝 겁이 났지만 그에게 따지듯 말했다.

“제 입술 제 맘대로도 못해요? 평생 쭉 내밀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러다 나 이러다 황족에게 개겼다고 감옥 가는 거 아냐?’

그때,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짓던 레온하르트가 책상을 돌아 그녀 바로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그의 달콤한 체향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리고 그걸 인지할 틈도 피할 틈이 없이 그가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왔다.

아이린은 그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아이린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아이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오묘하고도 요염한 색기를 띠고 있었다.

아이린은 순간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들킬까봐 그에게 잡혀있는 손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전, 전하. 이 손 제발 놓아 주세요. 왜 그렇게 바라, 읍……?”

그 순간이었다. 레온하르트의 남성다운 얼굴이 코가 닿을 것 같이 가까워졌다.

아이린은 놀라 얼른 피해보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뒤로 더는 피할 수 없는 단단한 벽이 닿았다.

그 순간 그의 짙어진 눈동자가 오로지 그녀를 담고 있었다.

아이린은 더는 그 눈빛을 감당 할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의 부드러운 입술과 말캉한 혀가 그녀의 입술을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아이린의 입술을 훔치는 레온하르트의 눈도 더 할 나위 없이 커졌다.

‘으윽, 달, 달콤해. 무슨 입술에서도 초콜릿 맛이 나지? 초콜릿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조금 전까지 뾰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던 아이린은 얼른 입술을 말며 두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더없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개구지게 미소지었다.

“앞으로 내 앞에서 그렇게 또 그 귀여운 입술을 내밀어 봐! 그때마다 나랑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이린은 머릿속으로 레온하르트의 말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가까워지려는 그의 얼굴에 멈칫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씨익 웃으며 그제야 잡았던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마카롱 상자를 그녀의 손에 쥐어줬다.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카롱 상자를 바라봤다.

곧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달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나의 귀여운 아이린, 배고프지? 이거 아이린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어!”

아이린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언제 다실에 다녀왔는지 따뜻한 차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나 잠시 제이드에게 갔다 올게. 편하게 먹고 있어.”

아이린은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향해 환하게 미소짓고는 곧 밖으로 나갔다.

아이린은 멍하니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얼굴이 더없이 화르륵 붉어졌다.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이 자신의 입술과 이마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아이린은 왼손으로는 입술을 가리고 오른손은 이마를 만졌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참았던 숨을 뱉어내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나 어떻게 해!”

아이린의 얼굴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토마토같이 붉어졌다.

아이린은 어쩐지 목이 타는 느낌에 그가 놓아두고 간 차를 한입에 마셨다.

다행이 찻물이 어느 정도 식어 입안이 데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거세게 날뛰며 가슴께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집무실을 나온 레온하르트의 얼굴도 그녀와 다름없었다.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제이드의 집무실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으익, 깜짝이야! 레온, 노크 좀 해!”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그의 집무실 중앙의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레온, 무슨 일이야? 집무실에 들어간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나와?”

제이드는 책상에서 돌아 나와 그의 옆에 앉아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었다.

“레온, 너 귀까지 터지려고 하는 걸 보니 혹시……. 방금 아이린 씨랑 무슨 일 있었구나!”

“……!”

“설마 너 키스했어?”

레온하르트는 순간 놀라서 벌떡 고개를 들며 제이드를 바라봤다.

“아이고. 했구나, 했어. 그냥 잘해주라고 말을 한 지가 20분도 안 지났는데 가자마자 키스를 한 거야?”

레온하르트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야! 키스는 하지 않았어.”

제이드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키스가 아니라면……. 그럼, 살짝 입을 맞추는 뽀뽀라도 한 건가?”

레온하르트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드를 볼 뿐이었다.

“오호라, 우리 황태자 전하가 신성한 집무실에서 여인과 입을 맞추셨구나.”

레온하르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하하하…….”

“그런데 보아하니 네가 일방적으로 입을 맞췄겠지?”

제이드는 자신의 물음에 아무 말 못하는 레온하르트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으아! 레온, 너 어쩌려고 그래? 어떻게 된 놈이 적당히가 없어요. 너무 당기는 것 같아서 밀라고 했더니 이거 완전 절벽에서 죽으라고 밀어버리네.”

레온하르트는 순간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린, 많이 화났을까?”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휴우, 그럴지도.”

“나 다시는 안 보려고 할까?”

“응, 어쩌면 그럴지도.”

“지금 다시 들어가 미안하다고 해볼까?”

“그러든지.”

제이드는 계속 되는 질문에 지쳤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서류 한 묶음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친구, 보시다시피 지금 일이 많아. 난 지금부터 일을 해야 하니 있을 만큼 있다가 가세요, 황태자 전하.”

그때였다. 멍하니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으악! 큰일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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