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0)

5.

제이드도 그의 비명소리에 놀라 덩달아 일어서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전쟁이라도 났어?”

“아니, 나 무심코 아이린에게 초콜릿이 들어간 디저트와 홍차를 주고 왔어.”

제이드는 그를 타박하듯 소리쳤다.

“야, 레온하르트 칼립스!”

“알아, 나도 아니까 빨리 가보자고!”

둘은 얼른 레온하르트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그대로 얼음이 되고 말았다.

“우와아, 레온이랑 우리 제이드 님이다!”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순간 머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발그레한 볼을 한 아이린이 머리 위에 흰 털뭉치 두 개를 토끼 귀처럼 꽂고 있었다.

집무실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깔깔 웃어대면서.

“우웅, 둘 다 왔네! 어디 갔다 이제 와요! 심심했는데!”

그녀의 모습에 안 그래도 얼음이 된 두 사람은 넋이 완전히 나가고 말았다.

“나 어때요? 깡충깡충, 토끼 같아요?”

아이린은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향해 깜박거렸다.

그 모습은 그녀의 별명 그대로 귀여운 은토끼 같았다.

이윽고 아이린은 제이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앞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거 봐요, 제이드 님.”

제이드는 그녀의 검지가 가리키는 머리를 보았다.

“내 친구 데이지가 이거 제이드 님 보여 주라고 했어요. 킥킥, 귀엽죠?”

제이드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얼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며 등줄기에 진땀이 흘렀다.

레온하르트가 그를 향해 살기를 내뿜듯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눈빛으로 무언가를 태울 것처럼.

‘아이린 씨가 귀엽긴 하지만 내 목숨은 소중하지. 하하.’

“……전 이만. 할 일이 많아서요.”

제이드는 이러다 타 죽겠다 싶어 얼른 집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때 토끼처럼 작은 머리를 갸웃하던 아이린이 물었다.

“어? 우리 제이드 님 어디 갔지?”

“아이린, 내가 있잖아. 제이드는 이제 그만 찾아.”

“안돼요. 내 친구 데이지가 이 털뭉치 핀 꽂고 제이드 님 보여주라 했단 말이에요. 헤헤.”

“안 돼! 그 핀 꽂은 거 앞으로 나만 보여주도록 해.”

아이린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크게 저었다.

레온하르트는 계속 볼을 부풀리는 그녀의 양 볼을 저도 모르게 잡았다.

‘와, 무슨 느낌이!’

레온하르트는 세상 무엇보다 말랑거리는 촉감에 자기 기분까지 말랑말랑해졌다.

“앙돼요. 내 친구 데이지가 제이드 님 보여주라 했쩌요.”

그녀는 레온하르트에게 볼이 잡혀서 그런지 마치 유치원생이 된 것처럼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다른 사람들이 그랬으면 단칼에 베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린이 내는 소리는 그녀의 귀여움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그대로 안아들었다.

“와아! 윙 윙 비행기다!”

아이린은 좋다고 양팔을 뻗으며 소리쳤다.

“아이린, 비행기는 또 뭐야?”

“있어요. 하늘을 나는 기계!”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아이린을 소파에 눕혔다.

아까의 기세로 봐서는 다시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린은 많이 피곤했었는지 그대로 누운 채 소파에 얼굴을 부비며 그에게 칭얼거렸다.

“으잉 레온, 나 너무 불편해! 베개가 필요해요.”

레온하르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표정과 다르게 자상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는 보는 것만큼 폭신 하면서 부드러웠다.

아이린은 그의 남은 한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이리 저리 돌려 보았다.

“아함, 레온. 손 정말 따뜻하다. 아, 기분 좋아. 손이 커서 그런가? 우리 할아버지 손 같아.”

‘할아버지!’

아이린은 그가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에 어린 시절 그녀를 예뻐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아이린은 서영이었을 때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을 때마다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께 도망가듯 내려갔었다.

가족들에게 서영은 환영받지도 못하는 이방인 취급을 당했지만 두 분에게는 사랑받는 손녀였으니까.

하지만 두 분 모두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그 이후 그녀는 그 따뜻함을 애써 잊고 살았다.

아이린은 어쩐지 그 따뜻함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껏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잠들었나?”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슬쩍 내려다봤다.

이내 그녀의 행복한 미소에 그 또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잠들었던 것 같았던 아이린이 갑자기 그의 다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헉!”

“으잉, 무슨 베개가 이렇게 단단해! 뭐야, 돌 베개야?”

그녀는 자신이 베고 누운 것이 진짜 베개인 줄 아는 것인지 그의 허벅지를 쓱쓱 쓰다듬고 두드렸다.

그때마다 레온하르트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몸 어딘가에 열기가 확 하고 모이기 시작했다.

“헉, 흐흡, 아이린!”

레온하르트는 놀라 다리를 확 빼려 했다.

그런데 취해서 그런 것일까?

그녀의 손힘이 세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힘이 빠진 것인지 다리가 빠지지 않았다.

그때 아이린이 잠꼬대하듯 소리쳤다.

“잉, 누가 내 베개 뺏어 가는 고야!”

“윽, 제발, 아이린. 내 다리는 베개가 아니라고…….”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의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바디 필로우라도 안은 것처럼 그의 다리를 팔과 손으로 감으며 얼굴을 부볐다.

“따뜻해…….”

레온하르트는 어쩔 수 없이 머릿속으로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그를 잡은 그녀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휴우, 위험할 뻔 했어.”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잠든 아이린을 내려다봤다.

“후후, 잠든 모습도 아기토끼 같네.”

레온하르트는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으면 쓰다듬을수록 어쩐지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카락도 은실 같은데 얼굴도 새하야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얼굴에서 마치 하얗고 달콤한 설탕이 묻어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이린의 이마에 그의 입술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잠시 후 나지막이 그가 말했다.

“역시 달콤하군.”

* * *

아이린은 그날 이후 레온하르트를 볼 때마다 무언가 편하지 않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자꾸 그날의 입맞춤이 떠올라 순간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지기도 했다.

때문에 실장이 있을 때면 일 핑계를 대며 도서관으로 피해 업무를 보았다.

아이린은 그렇게 도서관을 찾을 때면 에드먼드와 마주치기도 했다.

특별히 무얼 함께 하기보다는 그저 같이 책을 읽는 친구 정도랄까?

‘오늘도 도서관에 2황자 전하가 있으려나? 아, 저기 있네. 근데 얼굴이 왜 이리 어둡지?’

에드먼드는 항상 그가 좋아하는 창가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얼굴이 매우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아이린은 얼른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심각해요.”

“아이린.”

순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에드먼드는 그제야 그 특유의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은 에드먼드의 그런 미소가 반가웠다.

보좌관실 실장의 심부름으로 황궁을 돌아다니다 2황자를 마주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얼굴은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와는 매우 달랐다.

마치 쌍둥이나 서로 다른 인격의 사람처럼, 아이린이 아는 에드먼드가 아닌 것 같았다.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는 무표정은 인상을 날카롭게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무언가 어두운 오러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아이린도 도서관 밖에서는 그에게 아는 척할 수 없었다.

아이린은 무심코 그가 읽는 책의 제목을 읽었다.

“제목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어쩐지 그와 어울리는 책의 제목은 아니었다.

“에이, 뭐예요. 이거 읽으면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은! 이거 그냥 달달한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장르도 좋아하세요?”

“…나 같은 것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해서.”

그의 말에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같은 거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후우……. 나처럼 못생기고 무능력한 사람을 누가 좋아해 줄까 싶어서.”

에드먼드는 마치 새드엔딩의 주인공처럼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쩐지 처연한 분위기가 더해져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했다.

‘헐, 저 얼굴이 못생겨? 게다가 무능력하다니? 도대체 어디가? 혹시 나를 놀리는 건가?’

“지금 2황자 전하 말씀하신 거 맞아요? 그건 무슨 새로 나온 농담이에요? 아침에 세수하고 나서 거울 안 봐요?”

에드먼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무능력하다는 사람이 그 많은 일을 처리하고, 시간이 남아돌아 여기 와서 여유 있게 책까지 보네요. 아니, 도대체 누가 그런 멍멍이 같은 소리를 한대요?”

아이린은 어쩐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

그때 에드먼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으음, 어머니랑 외숙?”

‘헐, 이것들이 어린애를 두고 뭔 소리를 하며 키운 거야!’

“나중에 그 분들에게 명망 있는 안과 의사라도 불러 드리세요. 아무래도 그분들이 나이가 드시더니 시력이 많이 나빠지셨나 봐요.”

“푸핫하하하.”

‘헐, 갑자기 대폭소? 이렇게 웃는 건 형제가 똑같네.’

“이제 이상한 소리 그만 하시고 이거나 드세요.”

아이린은 얼른 작은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다.

에드먼드는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오른손에다 꼈다.

그리고 그녀의 눈치를 보며 초콜릿을 받았다.

“미안해, 아이린.”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친구끼리 미안하다고 하는 것 아니에요. 이렇게 달콤한 선물을 받으면 그냥 고맙다고 해야죠.”

“친구?”

“네, 2황자님과 나는 이렇게 도서관 친구잖아요. 친구가 별건가요? 이렇게 자주 만나 이야기하고, 맛있는 거 나눠 먹으면 친구지.”

에드먼드는 지나친 결벽증 환자였다.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닿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아이린은 원작의 황후가 그에게 어떤 짓들을 벌였는지 읽었기에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얼른 먹어 봐요. 내가 엄청 아껴둔 건데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사실 에드먼드는 레온하르트와 달리 단 음식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그녀의 재촉에 얼른 포장을 뜯고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초콜릿은 생각 보다 달지 않았다.

“후후, 달콤 씁쓸한 게 맛있죠. 다크 초콜릿이에요.”

에드먼드는 삐뚜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직도 넌 2황자 전하라 부르네.”

아이린은 속으로 뜨끔했다.

사실 그에 대한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아이린은 제이드를 살리러 황궁에 들어왔다.

때문에 그녀는 황태자 진영에서 근무해야 한다.

그리고 에드먼드의 새드엔딩을 알기에 섣부르게 친해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름을 안 부르는 것으로 어느 정도 그와 선 긋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야 2황자 전하니까요.”

“그래도 친구라면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않을까?’라니요? 마치 친구 사귀어 보지 않은 사람처럼.”

에드먼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이 내 첫 친구야.”

‘뭐지, 이 초딩 멘트 같은데 눈물 날 것만 같은 기분은.’

“알겠어요. 그럼 에드먼드 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저 책에서 보니까 친구끼리는 애칭도 부르던데……. 에디로 불러 주지 않겠어?”

에드먼드는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후후, 알겠어요.”

에드먼드는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며 또다시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웃을 수 없는 어릴 적 환경이 만든 미소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더 활짝 웃게 해 줘야겠네.’

아이린은 그를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그때 황급히 도서관 안으로 시녀가 들어왔다.

“2황자 전하!”

에드먼드는 어느새 날선 무표정으로 돌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시녀는 아이린을 흘끔 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이린, 어쩌지? 나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2황자 전하.”

아이린은 그가 뭐라고 할 것 같아 그에게 살짝 눈치를 줬다.

누군가 있는 곳에서 황자의 애칭을 부르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 황후궁의 시녀 앞에서는 말이다.

에드먼드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그대로 빠져 나갔다.

‘시녀의 눈빛이 좋지 않았는데 무슨 일은 없겠지.’

아이린은 다시 책을 펴고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피곤했는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밤이 되었다.

기온이 떨어진 것을 느낀 아이린은 어깨를 떨며 일어났다.

눈을 떠 보니 암흑 속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일하다 도서관에서 잠든 사실을 기억했다.

아이린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의지하며 겨우 서가 입구로 걸어갔다.

문을 흔들어 봤지만 꽉 잠겨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도서관 문을 닫았나 보네.”

아이린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일하다 잠이 든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갇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방조차 꺼졌는지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아니, 그냥 난방을 껐다기엔 이상할 정도로 도서관 안이 추웠다.

안 그래도 한겨울인데, 에어컨까지 틀고 있는 느낌이었다.

“으으, 추워.”

하필이면 낮에 황태자 집무실에 코트까지 놓고 온 참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추운 것 같아!’

팔을 둘러 자신의 몸을 감싼 아이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쾅쾅 두드렸다.

성인 평균 남자 키의 2배나 되는 육중한 문은 그녀의 두드림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지?”

그녀는 점점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몸을 움직이는 거야!”

아이린은 널따란 도서관을 이리저리 달리며 체온을 올리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체온이 올라가는 것 같았으나 그에 반해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문 옆 벽에 기댄 채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뭐지, 설마 이대로 얼어 죽는 걸까? 죽으면 난 어떻게 되는 거야?’

그녀는 갑자기 이세계로 소환 당했다.

현실 세계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기에 이곳에서의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었다.

“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녀는 그렇게 서서히 의식을 잃어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아이린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린! 아이린!”

그리고 그녀 옆쪽의 육중한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들어온 누군가가 아이린의 몸을 흔들었다.

“아이린, 어서 일어나! 정신 좀 차려 봐!”

빨갛게 잘 익은 체리 같았던 그녀의 입술이 퍼렇게 변해있었다.

“아이린 토트 씨, 정신 차려요!”

그녀는 그제야 겨우 눈꺼풀을 올렸다.

애써 눈을 뜨니 레온하르트와 제이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제이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온, 빨리 따뜻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어.”

레온하르트는 얼른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둘렀다.

그리고 단단한 팔로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제이드, 집무실 안쪽 방으로 옮길 거니까 의사를 불러와!”

제이드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레온.”

둘은 빠르게 도서관을 빠져 나갔다.

‘하아, 하아……. 더워. 나 너무 아파. 엄마, 어디 있어요……!’

아이린은 이마에 열기가 오른 가운데 눈을 억지로 떠 보았다.

그곳은 부모님과 살던 집이었다.

‘나 돌아온 건가? 내가 아파서 부모님이 이리 데리고 왔나?’

그녀는 막상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가족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엄마! 아버지!”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기어 나갔다.

“오빠! 모두 어디 있는 거예요?”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 다시 혼자인 건가?’

그때였다.

갑자기 어릴 적 기억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서영이 독감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가족들이 서영의 상태를 모른 채 그녀만 혼자 두고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서영은 아프고 배고프고 힘든 3박4일을 보냈다.

그녀는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이젠 아무렇지 않다 생각했는데 그녀의 상처는 속에서 계속 곪고 있었던 것이다.

“흑, 흑흑…….”

“아이린!”

그때 그녀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난 서영인데.’

“아이린, 눈 좀 떠 봐!”

‘그래, 난 아이린이기도 해.’

그 순간, 불이 날 것처럼 뜨거운 그녀의 이마를 무언가가 시원하게 해 주고 있었다.

아이린은 빨리 이 지긋지긋한 악몽을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을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제발, 신이 계시다면 도와주세요!’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레온하르트가 보였다.

그는 잠을 못 잤는지 눈이 붉고 눈 밑이 거무스름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섹시하게 보였다.

‘하하, 이 상황에서 섹시하다니! 내가 열이 올라서 제정신이 아닌가봐.’

정신없이 아픈 가운데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레온하르트가 곁에 있어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아이린, 물 좀 줄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의 등을 받치고 일으켜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아이린은 열기에 무심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 순간 그의 시원한 향이 그녀의 머리를 개운하게 해 주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입에 컵을 대어 주었다.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은 따뜻했다.

하지만 열이 오른 아이린은 시원한 물이 먹고 싶었다.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무….”

하지만 목 안이 매우 따갑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

“아이린, 따뜻한 물을 많이 먹어야 빨리 낫는대. 우리 조금만 참자.”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다 큰 자신을 아기 같이 다루는 그에게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리고 가슴 속이 따뜻한 것으로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은 그가 입에 대주는 물을 받아 마시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어쩐지 편안해진 마음에 스르르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린은 그렇게 이틀을 꼬박 앓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지, 저 화려한 상들리에는? 황궁?”

눈을 뜨니 그녀의 손이 무언가에 잡혀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레온하르트였다.

‘나 설마 지금까지 계속 황궁에 있었던 거야?’

그때 잔뜩 가라앉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이제 괜찮은 거야?

“네, 괜찮은 거 같아요.”

“다행이다.”

레온하르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보다 전하가 더 아파 보이시는데요.”

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잠을 좀 못 자서 그래.”

“네? 설마 이틀을 꼬박 새신 거예요?”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후우, 아이린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걱정이 돼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그녀는 이전 생의 악몽을 꾼 것을 떠올렸다.

아이린은 현실이 더 악몽이 될 수도 있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단순히 이곳은 웹툰 속 세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곳에 와서 덜 외로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친구인 데이지는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 힘든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가족조차 해 주지 않았던 일들을 그녀에게 해 주었던 것이다.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 아이린은 문득 자신이 누워있는 이곳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황태자 전하, 이곳은 어딘가요?”

레온하르트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집무실과 연결된 내 방이야. 처음 와 보지?”

“네? 헉, 여기가 황태자 전하의 방이라고요?”

레온하르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 방.”

어쩐지 숨을 쉴 때마다 그의 향기가 폐부에 가득 차는 것이 느껴진다 했다.

‘가까이 있어서 그의 향이 짙어졌나 했는데, 그가 쓰는 방이어서 그랬구나!’

“그런데 제가 왜 전하의 방에 있는 거예요?”

“혹시 도서관에 갇혔던 건 기억나?”

아이린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는데도 아이린이 돌아오지 않아서, 제이드와 함께 도서관에 와 봤더니 쓰러져 있었어.”

“황궁 안에는 직원들이 갈 수 있는 병원이 없나요?”

“응, 황궁 안에는 병원이 따로 없어. 의사가 직접 와서 진료하는 시스템이지. 그래서 의사를 부르려면 어쩔 수 없었어.”

“집무실 소파에 눕혀 둬도 됐잖아요……!”

“사경을 헤매는 널 어떻게 집무실에 두겠어.”

“그럼, 집으로 보내 주시면 되죠.”

레온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너 혼자 사는 것 아는데 어떻게 그래. 열도 펄펄 끓고, 위험할 수도 있고. 그리고.”

“……!”

레온하르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얼마나 서럽다고.”

아이린은 그의 말에 그동안 가슴 한쪽에 뚫려 있던 구멍이 메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뚝 하고 떨어졌다.

“…레온, 감사해요.”

‘후후, 이제야 이름을 불러주네.’

레온하르트는 내심 기뻐하며 얼른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감사하긴. 그런 말 마. 내겐 당연한 것을…….”

꼬르륵.

그때 분위기를 깨고 배꼽시계가 울려왔다.

‘아, 하필이면 지금!’

아이린의 얼굴이 순간 붉게 물들었다.

“미안, 이틀이나 굶어서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 가서 먹을 것 좀 가져 올게. 쉬고 있어.”

고개를 살짝 끄덕인 아이린은 그대로 휙 하고 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가렸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그 모습이 토끼굴에 얼굴을 반쯤 숨기고 있는 은토끼 같아 너무 귀여웠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린은 이불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런데 시녀가 아니라 왜 황태자인 그가 직접 먹을 걸 가지러 가지? 제국 황실은 그런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시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그녀를 돌보고 음식까지 가지고 오는 황태자님이라니.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던 아이린은 가슴에 와닿는 까슬까슬한 느낌에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헉!”

역시 그녀가 입었던 남색 드레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보기에 민망하게도 맨몸에 커다란 셔츠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뭐지? 이 셔츠, 설마 레온 건가?”

그녀는 얼른 이불을 끌어 올렸다.

아이린의 식었던 얼굴이 다시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드레스는 어디 있지?”

아이린은 방안을 눈으로 훑듯이 둘러보며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히 환자였는데 왜 이런 야릇한 옷차림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들어왔다. 그는 곧 놀란 눈으로 한걸음에 다가왔다.

“아이린,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간 거야! 설마 열이 다시 오르는 건가?”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뜨겁네. 다시 열이 오른 것 같아! 기다려, 내가 얼른 가서 의사를 불러올게!”

‘으아, 아픈 게 아닌데! 게다가 맨정신으로 이 차림에 의사까지 만날 순 없어! 그럼 새로운 흑역사 갱신이라고! 나 요즘 도대체 왜 이러니!’

당황한 아이린은 그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레온, 저 정말 괜찮으니 얼른 이리 와서 앉아요!”

밖으로 뛰어 나가려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에 수프를 가지고 그녀 가까이 앉았다.

“알겠어. 그럼 일어나서 이거 한 번 먹어봐. 금방 해서 내온 거라 따뜻해.”

아이린은 나지막이 물었다.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응, 물어봐.”

“제 드레스는 어디 갔어요?”

레온하르트는 순간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야! 헐벗고 있는 건 난데 왜 네가 얼굴이 붉어지는데!’

“그게, 제이드가 세탁한다고 가지고 갔어.”

“네? 제이드 님이 제 드레스를요?”

‘헐, 이 상황 뭐지? 황태자는 내 시중을 들며 수프를 가지고 오고, 공작가의 공자가 내 드레스를 빨러 가고. 이것 좀 이상한데?’

레온하르트는 의아해하는 그녀의 표정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아이린의 평판이 나빠질까 봐 시녀에게 시키지 못했어.”

‘하아, 그래서 수프를 직접 들고 왔구나.’

“그러니 걱정 마, 아이린! 그냥 내 집무실에서 야근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고마워요.”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서영이었을 때도 직장인이었기에 직장 내 평판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직장에서 여직원들의 적이 될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단순히 직장을 다니고 못 다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황태자와 그의 보좌관은 룩스 제국과 주변 왕국들의 모든 귀족 여성들에게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그들과 깊게 엮일 때에는 목숨을 걸 생각을 해야 한다.

밥 먹을 때마다 누가 독약을 함께 조리해 줄지도 모르고, 잠잘 때 자객의 손에 고이 잠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위 귀족이면 또 모르겠지만.

아이린은 퍼레이드 날을 떠올렸다.

그날 많은 인파 중 대부분이 젊은 여성이었고, 그들은 거의 두 남주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아이린은 가난한 평민이기에 지켜줄 호위 기사도 없었다.

아무리 평민의 대우가 예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그래도 남주들을 욕심낸다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바람 위의 등불일 수가 있었다.

아이린은 그 순간들이 상상되어 얼른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으아아! 그래, 매일 자객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는 없지.’

순간 아이린은 정말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등에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꺼끌꺼끌한 내 이불 속이 그리워지는구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최애를 덕질하는 것도 우선 살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수프 그릇을 들고 마시며 얼른 비워냈다.

“…저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응, 조금만 기다려 줘. 조금 있으면 제이드가 옷을 들고 올 거야. 그때까지 쉬고 있어.”

레온하르트는 당장 일어나려는 그녀를 다시 눕혔다.

아이린은 누워서 그를 바라봤다.

‘저 눈빛에 약해지면 안되는데.’

레온하르트는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지켜준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그런데 왜 이리 졸리지?’

그녀는 배도 부르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렇게 다시 까무러치듯 잠이 들고 말았다.

아이린은 이번에는 꿈조차 꾸지 않고 푹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린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창 밖을 보니 날이 저무는 것이 보였다.

‘헉, 나 도대체 얼마나 잔 거야?’

“아이린, 잘 잤어?”

레온하르트였다.

어찌 된 건지 그의 얼굴은 아까 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죄, 죄송해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갑자기 뭐가 죄송해?”

“일도 많으실 텐데 이렇게 누워서 잠만 자서요.”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살짝 접으며 말했다.

“그런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어.”

“아니에요. 지금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데 지금 몇 시에요?”

“5시 좀 넘었어.”

‘아침 8시쯤에 잠들고 오후 5시에 깨다니! 나 출근 시간 내내 잠만 잔거야?’

아이린은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과로한 탓에 기력이 많이 상했나봐. 닭이라도 삶아 먹어야 하나?’

아이린이 자는 동안 제이드가 왔다갔는지, 그녀의 드레스가 테이블 위에 곱게 개어져 있었다.

“잠깐만 나가 주시겠어요? 옷 좀 갈아입고 싶어서요.”

“어, 응.”

레온하르트가 나가고 아이린은 얼른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제이드 님의 하인들 솜씨가 좋네. 어떻게 드레스가 전보다 더 부드러워지고 향기도 좋지? 그런데 이 향기……. 어디서 많이 맡아본 향기 같은데.’

아이린은 드레스에서 나는 익숙한 듯한 비누 향에 뭔가 그리운 감정이 올라왔다.

서영이었을 때 맡아 본 향기도, 아이린으로 빙의해서 맡아본 향도 아니었다.

무언가 그리운 감정이 울컥하고 밀려왔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파팍 하고 무언가가 지나갔다.

솜사탕을 먹고 있는 어린 아이린의 모습이었다.

‘뭐, 뭐지? 어린 아이린의 기억인가?’

지금 자신이 아이린의 기억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어린 아이린일 때의 기억은 없었다.

아이린은 그 순간 몰려오는 두통에 그대로 쾅 하고 주저앉았다.

제법 큰 소리가 난 것인지 밖에 서 있던 레온하르트가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아이린?”

아이린은 계속 밀려오는 두통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머리가 갑자기 아파 와서요.”

“아이린, 그냥 좀 더 쉬다 가면 안 될까?”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내일 주말이기도 하고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어요.”

레온하르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가 데려다 줄게.”

아이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그냥, 저 혼자 갈게요.”

“그래도 내가……!”

그녀는 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그동안 밀린 일들이 많으시잖아요.”

레온하르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도 이렇게 아픈 얼굴을 하고선.”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또 괜찮아졌어요. 그리고 제가 평민들만 사는 동네 살아서 전하의 황궁 마차가 들어온다면 난리 날 거예요.”

“그럼 황궁 입구까지 사설 마차를 불러 줄게. 그건 제발 허락해 줘.”

아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후후, 고마워요. 그럼 오늘만 조기 퇴근할게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보내기 싫었기에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아이린. 월요일에 건강하게 만나.”

“네, 레온도 주말에 푹 쉬세요. 약속이에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말했다.

“응, 알겠어. 내가 황궁 앞까지만 데려다 줄게.”

“그냥 저 혼자 갈게요.”

“정말, 괜찮겠어?”

레온하르트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순간 숨을 작게 몰아쉬며 그를 보았다.

‘어휴, 생긴 것만으로도 우쭐하고 거만할 만도 한데. 내가 뭐라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정말 따뜻한 사람이야.’

아이린은 그런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갈게요.”

아이린은 그대로 황태자궁을 빠져나와 마차가 있는 곳을 향해 멍하니 걸었다.

‘에고, 오늘따라 몸이 무겁네. 아니, 가방이 무거운 건가?’

묵직한 가방에 손을 넣어보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나왔다.

“아차, 오늘까지 책 반납해야 하는데!”

그녀는 어쩐지 찜찜한 마음에 책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후우. 이것만 반납하고 가야겠다.”

아이린은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한겨울이라 해 지는 시각이 빨라져서인지 6시쯤인데도 어둑어둑하고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아이린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며 도서관으로 향하는 정원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덩치 큰 시녀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맨 앞에 서 있던 시녀가 무감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아이린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네가 아이린 토트인가?”

‘시녀들은 다 예쁘고 가냘픈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저 덩치들은 어디서 온 거야?’

아이린은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네,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그 순간 시녀들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도 않고 아이린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어어! 뭐야, 이 여자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나 일진이 왜 자꾸 이리 사나운 거니!’

당황한 아이린은 황태자궁을 바라봤다.

점점 올무처럼 죄어 오는 시녀들을 피해 도망치려 했지만 등 뒤에 단단한 나무가 닿았다.

그때 그중 가장 연배가 있는 시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어서 끌고 가라!”

그녀의 명령에 그들 중 가장 덩치 큰 시녀 둘이 나와 아이린의 팔을 옭아맸다.

‘으윽, 멍이 들겠어!’

얼마나 힘이 센지 그녀들에게 잡힌 팔이 아파왔다.

“악! 제게 왜 이러세요? 무슨 일이 십니까? 저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시는 거죠?”

아까의 연배가 있는 시녀가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 넌 알 것 없다! 이 궁에서는 상전의 부름에 조용히 따르는 것이 아랫사람의 도리다.”

‘이게 무슨 멍멍이 같은 소리야! 옷은 서양풍인데 대사는 동양풍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때 한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와 아이린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이제 좀 조용하군!”

아이린은 몸을 움직였지만 꽁꽁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순간 자신이 진짜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설마 이대로 고문당하다 죽는 거야?’

아이린은 이전 생에서 보았던 조선시대 사극을 떠올리며 절망에 빠졌다.

드라마 속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양반이 잡아가면 그대로 잡혀가 봉변을 당하곤 했다.

‘힉! 설마, 나 끌려가서 손발톱 뽑히는 건가? 으악, 살려줘! 레온!’

아이린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곧 그녀는 속절없이 그대로 시녀들에게 양팔을 잡혀 질질 끌려갔다.

그때 에드먼드는 일을 끝내고 도서관에 가는 길이였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려와 그쪽을 바라봤다.

‘…아이린? 저게 뭐하는 짓이지? 저들은 어머니의 측근 시녀들인데!’

보통 같으면 타인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이린이었다.

‘아이린을 왜 끌고 가는 거지? 어머니, 도대체 또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

에드먼드는 붉어진 얼굴로 두 주먹을 힘껏 꽉 쥐었다.

그리고 곧 그들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아무래도 아이린을 황후궁에 도착하기 전에 빼내야겠어.’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에드먼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황태자 레온하르트였다.

에드먼드는 얼른 그에게 인사를 하였다.

“황태자 전하, 오랜만입니다.”

레온하르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인사는 되었다, 2황자. 저들이 왜 내 직원을 저렇게 무도하게 끌고 가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에드먼드 또한 그처럼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지금 막 발견하여 따라가던 참입니다.”

레온하르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네 어머니인 황후 폐하의 일을 네가 모른다니 말이 되는 것인가?”

에드먼드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 어머니의 일이라고 제가 다 알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곧 긴 숨을 뱉으며 말했다.

“후우, 알겠다. 그럼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따라오너라.”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끌고 가는 시녀들을 따라 조심히 움직였다.

“어디를 계속 가십니까?”

황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디 가긴? 저들을 따라가 보려고 하지.”

“그냥, 지금 그녀를 데려 가십시오. 어머니께 데려가면 이미 늦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저들을 불러 멈추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에드먼드를 만류했다.

“아니다. 지금 멈추면 다음에 더 은밀히 손쓸 것이 아니냐? 이번에 담판을 짓겠다.”

에드먼드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님. 그것이 오히려 좋은 방법이겠군요. 어머니께 눈엣가시가 되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이미 눈 밖에 났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일을 공론화하려는 것이고.”

‘그래, 형님 말대로 하는 것이 아이린에게도 좋겠어.’

“네, 그렇게 하십시오.”

레온하르트는 이복동생 에드먼드의 순순한 대답에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봤다.

지금이야 정적이나 다름없는 사이지만, 에드먼드도 어린 시절에는 그를 따르던 귀여운 동생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황후 폐하는 너의 어머니이다. 괜찮겠느냐?”

에드먼드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전 괜찮습니다. 아니, 저도 함께 따라가 돕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2황자의 의외의 대답에 당황했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알았다, 2황자.”

아이린은 그들의 예상대로 황후궁으로 끌려들어갔다.

에드먼드는 그들을 뒤따라 레온하르트와 함께 황후궁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으로 황후궁의 시종들은 매우 놀랐다.

하지만 그가 에드먼드와 동행하였기에, 곧 각자의 일에 다시 집중하였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황후의 집무실이었다.

예법대로라면 시종에게 고하게 하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와 있는 이상 시종이 쉽게 문을 열어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이린, 조금만 기다려!’

에드먼드는 시종을 밀치고 바로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안을 본 두 사람은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아이린이 아름다운 은발을 온통 산발한 채로 덩치 큰 시녀들에게 눌려 바닥에 꿇어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먼드는 주먹을 꾹 쥐며 황후를 바라봤다.

그때 황후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내 허락 없이 함부로 사람을 들이라 했지?”

황후가 시종과 시녀들을 날카롭게 쏘아보자, 그들은 벌벌 떨며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함부로라니요? 이곳이 제가 꼭 허락을 받아야 들어올 수 있는 곳 입니까?”

황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여긴 내 집무실이다. 업무를 보는 곳이지! 아무리 내 아들이라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에드먼드의 뒤에서 레온하르트가 나타나 말했다.

“네, 맞습니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겠지요, 황후 마마.”

“화, 황태자?”

“그런데 이곳은 황후 마마의 집무실인데 왜 황태자궁의 직원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없이 꿇어있던 아이린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레온!’

그녀는 곧 눈물을 흘렸다.

아이린은 그제야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의 말대로 했으면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쯤 집에서 잠자고 있었을 텐데.’

그때 황후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난 황후로서 황궁의 누구든지 이 궁으로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반박하며 말했다.

“황후 폐하! 여기 있는 제 직원은 황궁에 종속되어 있는 시녀도, 하녀도 아닙니다. 오직 행정부의 시험을 보고 올라온 여성 관료지요.”

황후는 그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하, 그래봤자 평민 계집이 아닙니까?

“평민 계집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황후는 눈썹을 휘며 말했다.

“평민 계집을 평민 계집이라 하는 데 말이 지나치다니요? 오호라, 지금 보니 황태자도 이 계집에게 미혹 되었군요!”

“……!”

“그럼, 이 계집이 황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마녀가 아닌지 이 어미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때 에드먼드가 큰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마녀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궁에 소문이 들리더군요. 이 평민 계집이 감히 내 아드님을 미혹한다는 이야기가요.”

에드먼드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보십시오. 이 계집 하나 때문에 두 아드님이 다 오셔서 제게 대드시는군요. 그럼 답이 되지 않습니까?”

그때 레온하르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전혀 답이 되지 않습니다. 황족 또한 국법을 모범적으로 따라야 하니까요.”

“허! 이 나라 황후인 내가 이 평민 계집을 데려오는 것이 무슨 국법을 운운할 일입니까?”

레온하르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 직원은 그냥 평민 계집이 아니라 나라의 시험을 보고 들어 온 관료입니다. 죄가 있으면 법에 따라서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겠지요.”

황후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재미있는 소리를 다 듣는군요. 바로 그래서 내가 데리고 온 것입니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심이 가는 자가 있다면 황후로서 죄가 있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황태자가 말했다.

“그러면 그냥 이 직원에게 물어보셨어야지요. 이렇게 행정부 직원을 강제로 궁으로 끌고 오시는 것은 납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황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허, 납치라니요?”

“황후 마마께서 하신 일이 납치지요. 저는 이 일을 공론화할 것입니다.”

그 말에 황후도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태자?”

“말 그대로입니다. 황후 마마.”

잠시 입을 앙다물던 황후가 말했다.

“황태자, 난 이 나라의 황후입니다!”

“네, 황후이시니 국법을 더 준수하셔야지요.”

황후는 레온하르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황후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며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직원은 황후 마마의 하녀도 시녀도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 뽑은 실력 있는 인재입니다.”

“……!”

그의 말을 듣고 있는 황후의 얼굴빛은 점점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런데 그 인재를 함부로 하셨으니, 이젠 그들이 나서겠군요.”

아무리 황후라도 국가를 직접적으로 운영하는 황궁 인재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황후의 세력이 대폭 축소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황태자. 그냥 데려 가도록 하고 조용히 끝냅시다.”

레온하르트는 에드먼드를 힐끔 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에드먼드가 마음에 걸려 한 걸음 물러나기로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제 직원을 함부로 건드리시지 않겠다면 공론화 시키지 않겠습니다.”

황후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아이린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레온하르트와 함께 황후궁 밖으로 걸어 나온 아이린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린!”

레온하르트는 얼른 아이린을 팔에 안았다.

아이린은 갑자기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레온, 저 좀 어서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아이린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지금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조금 더 쉬다 가는 게 어때? 내가 나중에 집에 데려다 줄게.”

아이린은 고개를 크게 저으며 어깨를 떨었다.

“아, 아니에요. 저 빨리 이 황궁에서 나가고 싶어요, 레온. 저 무서워요, 흑…….”

아이린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레온하르트는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는 그녀를 더 단단히 안은 채 빠른 걸음으로 황궁 밖으로 데려 갔다.

그리고 함께 마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때 에드먼드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님이 아이린을……?”

에드먼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치밀어 오는 기분이 들었다.

에드먼드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안 돼! 아이린만은…….’

그는 그렇게 주먹을 꽉 쥔 채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아이린은 현실 세계에서도 그리 오래 살아 보지는 않았다.

인생이 작은 결정에도 크게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해 본 선택이라고는 잠깐의 늦잠을 선택해 버스를 놓치는 정도의 경험이 전부였다.

‘흑흑, 무, 무서워. 돌아가고 싶어! 하나님, 돌아가면 교회에 열심히 나갈게요! 제발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자신이 떨어진 이 현실의 공포가 이제야 몰려왔다.

이곳에 온 1년 동안 자신의 머릿속이 얼마나 꽃밭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끼자, 어쩐지 온몸이 용광로라도 된 듯 뜨거웠다.

‘으윽, 더워!’

아이린은 목까지 덮어있던 이불을 차내었다.

하지만 이불은 어느새 다시 덮였다.

‘분명 이불을 차냈는데……. 갑갑해!’

아이린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뜨고 싶어 힘겹게 눈꺼풀을 올려 보았지만 흐릿한 형체만 보일 뿐 이었다.

‘누구지? 데이지인가?’

아이린은 몰려오는 열기에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마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으음……. 좋아. 시원해!’

그 순간 지옥에서 온 것 같은 쓰디쓴 액체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들어 왔다.

그녀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으악, 써! 물!”

어릴 적부터 쓰거나 신 것은 못 먹었던 그녀였다.

그래서 집에서 독립한 후에는 감기에 걸렸을 때도 약을 사 먹기는커녕 꿀물을 타 먹는 것이 다였다.

그때 그녀 앞으로 물컵이 내밀어졌다.

아이린은 얼른 물컵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리고 바로 내밀어진 손에 컵을 맡기며 말했다.

“고마워, 데이지!”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언제 데이지의 손이 저렇게 듬직해진 거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컵을 든 커다란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곧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레온? 나 혹시 황궁에서 쓰러진 건가?’

아이린은 얼른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 곰팡이들을 보면 분명 우리 집인데 왜 황태자 전하가? 설마 꿈인가?’

그녀는 한 손을 이불속에 넣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데.’

아이린은 얼른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저희 집엔 무슨 일이십니까?”

레온이라고 불러줬으면 했는데.

어쩐지 선을 긋는 듯한 황태자라는 호칭에 레온하르트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린, 널 집 앞에 내려 줬는데 갑자기 쓰러졌어. 그렇게 쓰러진 너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말하고 썰렁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결로로 인한 곰팡이가 핀 그녀의 방은 환자에게는 결코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후, 또 쓰러지다니!’

서영일 때는 워낙 몸 하나는 튼튼한 편이었기에,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이틀이 지났어. 그동안 계속 고열을 앓더군.”

‘계속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네. 전에 쓰러졌을 때를 합치면 나흘이나 샌 거잖아!’

그의 눈 밑이 사뭇 더 거뭇거뭇해 보였다.

아이린은 그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참 따뜻한 사람이야.’

하지만 아이린은 곧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미쳤구나! 벌써 잊었어? 그때 죽을 뻔한 거?’

아이린은 황후궁에 끌려간 일을 떠올리며 어깨를 떨었다.

‘나 같은 평민이 황족과 가까운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야. 겪어 봤잖아, 멍청이! 이런 일은 겪어 보기 전에 알았어야 했어!’

아이린의 마음 속은 매우 복잡했다.

아픈 자신의 곁을 지켜준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만큼 아이린에게 연달아 닥친 일들은 그녀의 단단한 멘탈에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아이린의 마음 속처럼 그녀의 얼굴빛도 점점 어두워졌다.

레온하르트는 그늘이 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이린, 아직도 아픈 건가?”

곧 아이린은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레온하르트는 이제 막 깨어난 그녀가 몹시 걱정되었다.

때문에 그녀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겠어. 그럼 이 수프 여기 둘 테니 꼭 먹도록 해.”

아이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고개 숙인 그녀를 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후 문이 닫혔다.

아이린은 문 쪽을 슬쩍 보고는 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책상에 앉아 작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적어 놓은 노트였다.

그녀는 노트를 펼치며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에초에 능력치 권력치 만렙인 히로인들 사이에 놓인 하찮은 엑스트라 따위가 무얼 바꿀 수 있겠어! 그런 생각을 가진 것 자체가 오산이었어.”

그녀는 펜을 꺼내 거칠게 X를 긋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이 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그래, 돌아가기 전까지 살아남는 게 중요해!”

사실 이 문제는 그녀가 이 세계로 넘어 왔을 때 바로 고민해 봐야 했던 문제였다.

어쩌면 그동안 이 세계에 넘어온 것을 하나의 유희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휴가로 외국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그래서 단순히 최애를 살리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정말 멍청하고 오만했어! 자신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누구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거야!’

그 순간 또 다시 황후의 죽일 듯한 눈빛이 떠올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만약 그때 황태자 전하가 오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몰라. 이곳에서 죽는다면 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이린은 앞으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서 다시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곳에서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가문이나 가족조차 없는 평민 고아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소설 보면 황제의 딸이다, 공작의 딸이다 난리인데. 난 이 세계에 와서도 현실은 시궁창이구나.’

그녀는 두려움에 자꾸만 떨려오는 손으로 펜을 꽉 잡고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평민이 많은 안전한 도시를 찾아가기.]

‘황족, 귀족이 많은 곳보다 평민들이 주를 이루는 도시……. 그래, 크라티아로 가야겠어!’

아이린은 현실의 베네치아처럼 중계무역을 통해 도시국가로 성장한 크라티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얼른 책상 서랍 속 작은 함을 꺼냈다.

그 함 속에는 그동안 그녀가 모아온 돈이 들어 있었다.

물론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큰돈은 없었다.

하지만 당장 크라티아로 갈 여비와 두세 달 정도의 숙박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인데 가면 할 일이 없겠어?”

무얼 하든 황궁보다 보수도 대우도 나은 곳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목숨은 구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내일 출근해 사직서를 제출하자고 생각하며 생전 처음 사직서를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사직하고 싶어했는데, 결국 사직하게 되는구나.’

그렇게 바라던 일이었지만 막상 사직을 하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럴 만도 하지. 황궁에 들어간다고 일 년 가까이 고생했잖아.’

제이드를 살려 보겠다고 시작하긴 했지만 매일 밤새 공부해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었다.

‘제이드 님은 어떻게 하지?’

최애인 제이드의 죽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평민에다 엑스트라인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은 없어. 비겁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곧이어 레온하르트의 걱정스런 눈빛도 마음 위에 얹혔다.

‘아니야, 더 근무했으면 더 정이 들어서 힘들었을 거야. 지금 떠나는 것이 현명한 거야.’

그녀는 차라리 수습일 때 이렇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꼬르륵.

순간 배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그가 놓고 간 야채 수프를 보았다.

“후, 이런 순간에도 배는 고프구나.”

많은 일을 겪고 거기다 이틀을 꼬박 앓아서인지 무언가 음식을 만들 기력은 없었다.

그녀는 무심코 수프 쪽으로 손을 뻗어 스푼을 들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했던가? 수프는 식었지만 그 맛은 일품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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