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권) (6/20)

6.

“……맛있네.”

차게 식은 수프가 어쩐지 아이린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듯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린, 마음 단단히 먹어! 약해지면 안 돼!’

아이린은 반쯤 남은 수프 그릇을 얼른 주방으로 치워버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긴 한숨이 나왔다.

‘결국 나도 목숨 앞에서는 이기적이 되는구나!’

아이린은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결국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아이린은 빠르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책상 위에 있던 사직서를 가방에 넣었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막상 사직을 하려니 선배들 보기가 두려웠다.

자꾸만 두근거리는 마음에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데이지가 떠올랐다.

어제 레온하르트가 물을 건네줄 때, 처음에는 그게 데이지인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서로 뜸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데이지가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다.

아이린은 걱정이 되었지만 잦은 야근에 그녀를 통 만나러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데이지에게도 너무 무심했어. 얼른 사직서를 제출하고 데이지를 만나러 가야지.’

그녀는 얼른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사직서는 직속 상관인 차장님께 드려야겠지?’

아이린은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보좌관실로 향했다.

최대한 선배들이 사무실에 없길 바랐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아이린에게 토마스가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

“수습,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괘, 괜찮습니다.”

아이린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으으, 생각할수록 열 받네! 어렵게 들어온 우리 막내를!”

“그래, 우리의 유일한 홍일점인데!”

그때 통통한 직원 브라운이 말했다.

“쥴리언, 당신도 여성이라는 것을 자주 잊으시는 것 같네요.”

“우리 수습은 유일하게 귀여운 홍일점이니까요.”

정신없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순간 차가운 냉기가 그녀의 등에서 느껴졌다.

아이린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차장님!”

“아이린 토트 씨, 당신의 일로 오늘 황실 직원 긴급 회의가 열릴 것입니다.”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갑자기 긴급 회의라니요?”

그때 토마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수습, 네 일로 우리 차장님이 머리끝까지 화나서 각 궁의 직원 대표들을 소집했다는 거 아니겠어?”

“네? 대표들을요?”

‘헐, 도대체 내가 뭐라고?’

아이린은 아직 황궁 수습이 된 지 한 달이 겨우 넘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위해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큭큭, 우리 귀염둥이 수습이 놀랐구나? 우리 차장님이 겉으로 냉기가 좀 풀풀 풍기시긴 하지만 마음속은 뜨거운 분이라고.”

“당사자를 앞에 두고 냉기가 풍긴다고 하다니 쥴리언 씨는 여전히 예의가 없으시군요.”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거라니까요?”

순간 아이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사직서가 담긴 가방을 꽉 안을 수밖에 없었다.

“수습, 우는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숙인 채 좌우로 저었다.

아이린은 우는 모습을 애써 숨겼다.

하지만 토마스의 다정한 목소리에 어깨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많이 무서웠구나, 우리 막내! 이런 개 같은 황족 같으니라고!”

브라운이 얼른 문 쪽을 살피며 말했다.

“쥴리언, 쉿! 누가 들으면 큰일납니다.”

“이런 ABC! 들으라고 해! 원래 없는 데서는 나랏님 욕도 해도 되는 거라고.”

“맞아요. 우리 수습이 이렇게 당했는데 욕 좀 하면 어때요?”

아이린은 함께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을 위해 화내 주는 선배들에게 고마움과 든든함을 느꼈다.

쥴리언은 손수건을 꺼내어 아이린의 눈물을 조심히 닦았다.

“우리 막내, 이제 뚝! 계속 울면 힘들어.”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들을 바라보았다.

토마스는 그런 아이린의 등을 위로하듯 살짝 두드렸다.

그때 차장인 로건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황제 폐하가 즉위하시고 잠잠한 것 같더니 결국 이런 일이 또 일어나는군요.”

그때 브라운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황자 전하들께서는 공명정대하시잖아요.”

브라운의 말에 쥴리언이 오히려 분개하며 말했다.

“그럼 뭐 해? 황족이 두 분만 계시는 것도 아니고.”

그때 토마스가 말했다.

“차장님, 이번에 꼭 기선 제압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간다면 또다시 황궁에서 황족들의 횡포가 기승을 부릴 거라고요!”

차장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아카데미 출신 직원들이 이번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내 차장은 두툼한 서류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모두 모여 이 항의 서한을 황제 폐하께 제출 할 예정입니다.”

그때 토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정말입니까?”

“네. 이제 걱정은 그만들 하시고 업무에 집중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이린 토트 씨는 지금 황태자 전하 집무실로 가도록 하세요.”

“네, 차장님!”

“하하, 막내 다행이야! 모두 잘됐어!”

아이린은 선배들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감, 감사해요.”

선배들은 힘내라는 듯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아이린은 집무실을 향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선배들의 마음이 그녀의 황폐해진 마음에 단비를 내려주는 듯했다.

이전 생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함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래! 그만 둬도 보고 싶을 때 만나러 오면 되는 거지.”

아이린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집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왠지 마음이 점점 약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듯 서 있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토트 씨!”

아이린은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만화 속 한 장면처럼 후광을 뒤에 단 제이드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허허, 이 상황에서도 내 최애는 반짝반짝 빛이 나시는구나!’

마음이 어둡던 아이린은 그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제이드 님!”

가까이 온 제이드는 얼른 문을 열며 말했다.

“자, 레이디 먼저.”

“고맙습니다.”

아이린이 사직서를 넣어둔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제이드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아이린을 불러세웠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봐요.”

“네?”

“제가 아이린 씨에게 드릴 게 있어서요.”

아이린은 멀뚱히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이드는 얼른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핑크색 작은 상자를 들고 나왔다.

신이 빚은 명품 같은 그가 들고 나오니 핑크색 상자까지 명품백이라도 된 것처럼 빛이 났다.

제이드는 그녀에게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아이린, 이따 배고플 때 먹어요.”

아이린을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요.”

아이린은 작은 상자의 뚜껑을 조심 이 열었다.

순간 달콤한 냄새가 확 하고 풍겨왔다.

“우와, 토끼 모양 마카롱이네요! 너무 귀여워요!”

제이드는 아이린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저번에 보니 마카롱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제이드 님……!”

아이린은 울먹이며 그를 바라봤다.

‘흑흑, 나만 살겠다고 이렇게 착한 사람을, 거기다 최애를 두고 도망 치려 했다니! 난 정말 나쁜 년이었어!’

제이드는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하고는 얼른 그녀를 달랬다.

“흠흠, 아직 기분이 우울한 것 같네. 얼른 한입 먹어봐요.”

아이린은 그의 말에 들고 있던 마카롱을 작게 한 입 깨물었다.

마카롱은 정말 눈이 번쩍 뜨이게 달고 맛있었다.

씁쓸한 커피가 그리운 맛이라고 할까? 서영이었을 땐 물처럼 마셨던 커피가 순간 그리웠다.

아이린은 제이드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으음, 정말 맛있어요!”

“그래요? 다행이에요. 이거 먹고 힘내요! 그리고 힘든 일 있으면 내게 와서 말해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선배로서 함께 해 드릴게요.”

아이린은 그의 따뜻한 말에 얼었던 눈이 녹듯 눈물이 흐르기 시작 했다.

‘그래요. 우리 죽지 말고 함께 살아요.’

“흑…….”

“어어, 울지 말고. 그러다 마카롱이 다 짠맛 되겠어요.”

“흑흑, 제이드 님이 주신 마카롱이 너무 맛있어서요.”

제이드는 그녀를 위로하듯 머리 위에 손을 살짝 얹었다.

“제이드!”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레온하르트가 인기척도 없이 그들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

눈물을 흘리던 아이린도 순간 놀라 눈물을 그치며 그를 바라봤다.

‘이렇게 다가올 때까지 기척이 없다니! 이런 게 바로 제국 제일의 검사라는 건가?’

막 훈련을 하고 오는 것이었을까?

레온하르트는 평소의 단정한 차림과 다르게 헐렁한 흰 셔츠 차림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그의 벌어진 어깨와 팔 근육들이 얇은 셔츠 위로 도드라져 보였다.

거기다 살짝 흐트러져 있는 그의 머리칼은 오히려 그의 남성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아아, 역시 이래서 남주인 건가 봐.’

아이린은 어쩐지 그에게선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노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얼른 치워!’

제이드는 레온하르트의 찌르는 듯한 눈빛에 멈칫하며 얼른 아이린에게서 손을 거둬들였다.

“하하, 레온.”

“제이드, 너 왜 나의 아이린을 울리고 있는 거지!”

아이린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봐요, 남주 씨. 제 소유권이 언제 당신한테 이전되었나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재빠르게 제이드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아이린은 갑자기 눈앞에 가까이 보이는 살아 있는 등 근육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이런 걸 등빨이라고 하는 건가?’

땀에 젖어서인지, 그의 등 근육이 도드라져 움직이는 모습이 아이린의 눈에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순간 아이린은 그와 처음으로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미술관 조각품같이 아름다운 근육들이 잔뜩 성이 나 있었지!’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으아, 어떻게 해!’

아이린은 의식적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저절로 눈이 돌아간다고 할까?

그녀는 무심결에 손을 내밀었다.

‘헉, 나 사직서 내러 와 놓고 무슨 미친 변태력 상승이야! 정말 정신 나갔구나!’

바닥을 치던 우울했던 감정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민망함에 움찔거렸다.

아이린이 그렇게 레온하르트의 등 근육과 사투하며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고 있을 때였다.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손을 모두 태워 버리겠다는 듯이 쏘아봤다.

제이드는 이성을 잃은 듯한 레온하르트의 눈빛에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아이린은 벽처럼 움직이지도 않은 채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이리 가만히 서 있는 거지?’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본 아이린은 제이드의 눈에 두려움이 일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왜 제이드 님이 저렇게 두려워하지?’

아이린은 제이드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제이드의 시선이 향한 방향에 보이는 것은 레온하르트 뿐이었다.

그제야 등 근육 실사에 현혹되어 못 보던 것들이 보였다.

살짝 보이는 레온하르트의 옆얼굴은 그의 등처럼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설마 제이드 님이 날 울렸다고 저러고 있었던 거야?’

살짝 고개를 젓던 아이린은 얼른 그의 등 뒤에서 빠져 나와 그들 옆에 섰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쏘아보느라 그런 아이린을 보지 못했다.

아이린은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셔츠의 소매 끝을 살짝 붙잡았다.

순간 움찔한 그가 그제야 제이드에게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돌아봤다.

아이린은 토끼처럼 눈물이 살짝 맺힌 귀여운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으윽, 이렇게 귀여우니 일 외에는 모든 일에 무덤덤한 제이드 녀석도 손이 나갈 만 하지.’

레온하르트 또한 제이드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그때 아이린은 그의 소매를 다시 한 번 살짝 잡아당겼다.

‘흡. 뭐, 뭐지?’

그런데 분명 그녀가 잡은 것은 소매인데 가슴 속 어딘가가 알레르기라도 생긴 것처럼 간지러웠다.

그리고 살짝 느껴지는 그녀의 손끝이 뜨겁게 느껴졌다.

이상야릇한 느낌에 어쩐지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아이린,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어?”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의 상태를 모르는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제이드 님은 잘못이 없어요. 제가 마카롱이 정말 너무 맛있어서 그랬어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에 순간 당황하며 되물었다.

“뭐? 마카롱이 맛있어서 울었다고?”

아이린은 영화 속 장화 신은 고양이의 미친 귀여움을 떠올리고 그 장면처럼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속으로는 온통 닭살이 돋고 손발까지 오그라들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친, 아무리 그래도 마카롱이 맛있어 울었다는 말을 어떻게 내뱉을 수 있냐고!’

아이린이 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해도 이번만은 자신의 멘탈을 구해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거 제이드만이라도 구해 보자는 마음에 애써 입 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린을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이내 제이드를 바라봤다.

갑작스런 그의 시선에 제이드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그녀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아무튼, 선수를 빼앗겼군.”

‘선수를 빼앗기다니? 무슨 말이지? 설마 내 사직서를 직접 받고 싶었다는 건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나도 아이린을 위해 달콤한 디저트를 많이 준비해놨는데.”

‘갑자기 이 분위기에 웬 디저트?’

그때 제이드의 급박한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었다.

“아이린 씨, 난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들어갈게요.”

갑자기 그렇게 말한 제이드는 도망치듯 자신의 집무실로 쏙 들어갔다.

‘어, 제이드 님! 여기에 나만 두고 가면 안 돼요! 황태자 전하가 위험해질지 몰라요!’

아이린은 방금 자신이 그를 빨간 모자에 나오는 늑대라도 빙의 한 듯 음험하게 바라본 것을 떠올렸다.

지금도 입체적인 존재감을 나타내는 레온하르트의 근육들을 눌러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우울한 현실을 애써 떠올리며 겨우 참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난처해진 아이린은 멍하니 제이드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고 섰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상념을 짓듯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우리도 들어가지.”

‘어쩌지? 사무실에 뭘 놓고 왔다고 할까?’

아이린은 자꾸만 물 밖의 물고기처럼 날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네.”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기가 순간적으로 그녀의 폐부에 가득 찼다.

순간 그녀는 온 몸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때 레온하르트는 저세상에나 있을 것 같은 달콤한 미소를 그녀에게 흩뿌리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윽, 달콤한 향기에 저 미소까지! 이건 반칙이잖아!’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틈으로 빠져나오는 달콤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와! 이게 다 무슨 냄새지?’

온갖 감각을 열어주는 달콤한 냄새에 놀란 그녀는 홀린 듯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따라 들어가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집무실 중앙에 놓여 있는 커다란 소파 앞 테이블에 달콤한 디저트들이 꽉 차 있었다.

“어머!”

마치 베이커리를 통째로 옮겨온 것 같았다.

그렇게 색색의 디저트들은 자신을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며 그녀를 유혹했다.

‘우와, 정말 아름답다!’

아이린은 꽃보다 아름다운 디저트들의 자태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저 티라미수는 표면에 금을 입혔네. 황궁 스케일 정말 장난 아니다. 이게 다 얼마짜리야?’

테이블 위의 디저트는 단순히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맛있고 비싸기로 소문난 수도 유명 베이커리 ‘델’의 디저트였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멋모르고 동네 빵집처럼 방문했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

마카롱 하나가 그녀의 10일치 생활비와 맞먹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어마어마한 디저트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겸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아이린, 얼른 와서 맛 좀 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던 아이린은 그제야 레온하르트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헐, 이게 몇 인분이야?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 남자 혹시 날 살찌워서 잡아먹으려는 건가?’

“자, 아이린! 아 해 봐!”

여전히 멍하게 있던 그녀는 무심코 입을 벌리며 그가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니슈?”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아이린은 그녀 앞에 미니슈가 산을 이룬 접시를 바라봤다.

‘산처럼 쌓인 미니슈라니! 으아아, 이번 생은 최고구나! 그래, 어떤 분위기에서도 디저트는 항상 옳은 거야!’

아이린은 이전의 삶에서도 미니슈를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그 가격이 사악해서 이곳에서는 사먹지 못했던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먹어본 적이 있었다.

단지 차의 카페인에 취해 먹었던 사실을 잊었을 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지난번에 미니슈를 먹으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짓는 아이린을 분명히 보았다.

때문에 오늘 준비한 디저트 중 미니슈에 가장 공을 들였다.

‘이거면 그녀를 웃게 해줄지도.’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진심으로 웃게 하고 싶었다.

“아이린, 자, 하나 더. 아!”

아이린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미니슈가 그녀의 입에 들어가는 순간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녀의 입안에 들어간 미니슈는 달콤함만 남긴 채 금방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린은 그 순간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고 말았다.

‘그래, 저 미소였어!’

평소의 업무적으로 짓는 미소가 아닌 진실한 미소였다.

그 모습을 보는 레온하르트는 가슴이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디저트에게 질투가 났다.

‘디저트 하나가 저렇게 아이린을 미소짓게 하다니. 내가 디저트였으면 좋겠다……. 헉!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디저트가 되었으면 좋겠다니!’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의 향연에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느끼는 감정들에 어쩐지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아이린 또한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멍했다.

당분을 갑자기 너무 과다하게 주입시킨 부작용이었다.

‘뭐지? 나 여기 뭐 하러 왔더라?’

그렇게 그녀가 디저트가 가져간 이성을 다시 되찾으려는 순간이었다.

레온하르트의 달콤한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먼저 상념에서 깬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미소에 중독된 것 같았다.

때문에 그녀 앞에 놓인 접시가 비워질 때마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디저트를 계속 날랐다.

“아이린, 여기 딸기 케이크.”

“저 이제 배불러요, 더는 못 먹겠어요.”

아이린은 그대로 소파 뒤로 무너지며 KO를 선언했다.

“후후, 이제 기분이 좀 괜찮아?”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갑작스런 물음에 잔뜩 풀려 있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나 사직서 내러 와 놓고!’

아이린은 자신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조금만 더 이곳에 머물까?’

아이린은 애써 이성적인 생각을 해보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이성은 의도치 않은 그의 계략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잖아.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어. 그리고 난 미래를 알고 있잖아. 이 세계 누구보다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을 마친 아이린은 이내 눈을 접어 웃으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네, 기분이 좋아졌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황태자 전하.”

그때 레온하르트가 소리치듯 말했다.

“아이린, 왜 갑자기 날 그렇게 부르는 거야!”

평소 커다란 마물을 만나도 더없이 차분한 그였다.

하지만 아이린이 황태자라고 부르는 것에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버림이라도 받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린은 흥분한 그를 잠시 조용히 바라봤다.

레온하르트가 왜 그렇게 흥분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자신에게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처럼 아름다운 여주가 레온하르트의 인생에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앞날엔 여주가 함께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이린은 자신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의 호감은 여기서 차단 하는 게 맞아. 그리고 최애도 지키면서 가늘고 길게 살려면 황자들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어.’

아이린은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그에게서 50cm정도 떨어져 앉았다.

“딱 이 정도가 좋겠어요.”

“뭐가?”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갑자기 멀어지는 것에 당황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전하와 저 사이의 거리 말이에요.”

레온하르트는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린!”

“전 평민이에요. 황족과 귀족이 있는 신분제 사회인 이 나라에서 평민은 발에 이리저리 차이는 돌과도 같아요.”

레온하르트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발에 차이는 돌이라니! 그렇지 않아! 아이린이 얼마나 우수한 인재인지 모두들 알고 있어.”

아이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저는 매우 우수해요. 아카데미 수석인걸요.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저에게 잘해주시는지도 알아요.”

“그런데 왜……!”

아이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 신분은 평민이에요. 노예가 없는 제국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죠.”

그녀가 너무 현실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이었다. 그것도 목숨과도 결부된.

“……!”

“평민은 아무리 우수해도 높으신 분들의 눈에 띄면 평화로운 일상이 무너질 수 있어요.”

‘그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에도 끝은 있을 수 있어.’

아이린은 황후에게 끌려갔을 때 소중한 일상이 무너지고, 목숨까지 위험 할 수 있음을 몸소 체험했다.

레온하르트는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이린! 그게 무슨 소리야? 너의 일상이 무너지다니! 내가 있는 이상 너에게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손목이 동아줄이라도 된 듯 꽉 잡았다.

이렇게 잡지 않으면 그녀가 자신을 두고 더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없는 황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결국 나를 잊고 운명의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이린은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그의 눈을 조용히 마주했다.

그리고 이윽고 잡히지 않은 쪽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조심스레 풀었다.

풀어질 것 같지 않았던 그의 단단한 손이 맥없이 풀려 나갔다.

“선배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달콤한 디저트에 행복감을 느끼는 평범한 일상이요. 그 하나하나의 일들이 저에겐 소중해요.”

인생은 작은 일들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이야기와 같다.

무심코 보낸 일상이 나중에 돌이켜 보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매우 소중하고 그리운 시간일 수도 있다.

‘그래, 그리고 이곳에 갑자기 온 것처럼 갑자기 되돌아갈지도 모르지.’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가슴 어딘가가 저릿해졌다. 그는 곧 가슴 한켠을 그러잡았다.

‘아이린, 네가 바라는 그 일상에 나는 없는 것인가? 아니, 없을 수도 있지. 그런데 내 마음이 왜 이렇게까지……!’

처음엔 그저 장난과도 같았다.

단 한 번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이후 다시 또 부하 직원으로서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그의 부하 직원 중 여직원은 많았다.

물론 황태자인 그를 노리고 들어오는 귀족가의 영애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매우 아름다웠고 똑똑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부하 직원을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녀를 다시 황궁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잃어버리고 간 속옷을 돌려주며 조금 놀려주려는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커진 거지?’

아이린은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른 채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그래,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제이드의 목숨을 구한 후에 크라티아로 떠나면 되겠지?’

매일 누구에게 밟힐지 모르는 불안한 황궁의 삶은 현대에서 온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이 왜 오래 못 살았는지 알겠네. 이렇게 계속 살다간 암 걸리겠어.’

상념에 빠졌던 아이린은 따가운 시선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큭큭. 뭐야, 저 얼굴.’

그의 눈빛은 매우 따가웠지만 표정은 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대형견과 같았다.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저런 귀여운 표정이라니.

아이린은 정말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윽, 너무 귀엽잖아! 하지만 가까기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아이린은 순간 자신을 아들을 꾀는 창부처럼 취급한 황후가 떠올랐다.

‘으으, 정말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아이린은 그와의 떨어진 거리를 바라봤다.

‘그래, 정신 차리자! 딱 이 정도가 좋아.’

아이린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

“응?”

“앞으로 저와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주는 것이 절 도와주는 거예요.”

레온하르트 또한 황후를 떠올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네? 갑자기 무슨 조건이요?”

‘뭐지, 이 상황에 갑자기 조건이라는 단어가 나올 수 있는 건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선 내게 거리를 두지 말아줘!”

“네?”

“네가 이 조건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나도 지키지 않겠어.”

레온하르트는 싱긋 웃으며 자신과 아이린 사이의 빈자리를 바라봤다.

‘헐. 뭐지, 저 음험한 미소는? 아까 그 대형견 멍뭉이는 어딜 간 거야?’

아이린은 갑자기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고집쟁이 아이처럼 돌변한 레온하르트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향해 눈을 더욱 빛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뭐야, 저렇게 예쁘게 웃는게 어디 있어!’

주연 중에 기골이 장대하고 가장 남성다운 레온하르트였다.

하지만 저렇게 눈웃음을 칠 때면 왼쪽 눈꼬리 아래의 눈물점이 그를 매우 매혹적이게 만들었다.

마치 유혹하는 듯한 그의 미소에 그녀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난 얼빠인거냐고! ……그래, 예뻐서 져 준다.’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의 조건,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이린의 긍정의 대답에 레온하르트의 기쁜 듯 붉은 입술이 크게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여주와의 미래를 아는 아이린에게 레온하르트는 그림의 떡과 같았다.

‘으윽, 위험한 미소야. 레온아, 이 누나가 너무 오래 굶었단다! 제발 그 미소는 여주에게 가서 날려주렴.’

아이린은 쉬지 않고 그녀의 시력과 이성을 다방면으로 공격하는 레온하르트의 미소에 순간 넘어갈 뻔했다.

‘헉, 위험했어!’

아이린은 얼른 그의 눈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 사람들 있는 곳에선 꼭 이 거리! 유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응, 알겠어.”

레온하르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애써 피한 그녀의 시선에 시리도록 아름다운 눈동자를 맞춰왔다.

아이린은 순간 멈칫하며 그를 바라봤다.

“대신 둘이 있을 땐 전처럼 내 이름 불러 주겠어?”

“네? 전하의 이름을요?”

“응, 내 이름.”

“그건 좀…….”

레온하르트는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는데.”

아이린은 가까이 다가서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 이름으로 부르는 것쯤이야. 괜찮겠지?’

아이린은 얼른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레온하르트 전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부름에 살짝 미간을 구겼다.

“그거 말고. 전에 네가 날 레온이라고 불렀잖아.”

아이린은 놀라 펄쩍 뛰며 말했다.

“네? 제가요? 언제요?”

“기억 안 나?”

아이린은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내 집무실에서 디저트와 함께 차를 마셨을 때 말이야. 네가 나에게 레온이라고 불렀다고.”

아이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으악! 취해서 사고 쳤구나!’

“죄송해요. 그날은 제가 차에 취해서 황태자 전하께 큰 실수를 했어요.”

“아니, 취하지 않은 때에도 날 레온이라고 부른 적이 있어.”

“네? 제가요? 설마요.”

아이린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생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님’ 자 조차 붙이지 않고 레온이라고 불렀다고?’

“황태자 전하께서 꿈꾸신 거겠죠.”

아무리 마음속으로는 맘대로 부른다 해도 그는 이 제국의 2인자이자 황금수저, 아니, 다이아 수저 아닌가?

진짜 그랬다면 모가지가 댕강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아, 머릿속까지 호칭을 통일해야 했어!’

아이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제발 아니라고 해줘!’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그와 마주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황후궁에서 나오던 그날 나를 레온이라고 불렀잖아.”

아이린은 그날의 일을 곱씹었다.

‘내가 황태자 전하와 황후궁에서 나와서…. 헐, 나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정신을 황후궁에 두고 나왔던 거야!’

서영일 때도 술에 취해 직장 상사에게 반말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취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다니!

아이린은 그대로 벌떡 일어나 폴더 폰처럼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덩달아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이린, 이러지 마! 이러면 내가……!”

아이린은 그대로 허리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린, 왜 자꾸 날 밀어내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가슴 한쪽이 조여 오는 느낌에 왼손을 올려 가슴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이린! 얼른 고개를 들어. 네가 이러는 건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거야!”

아이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며 그를 마주 봤다.

“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거리를 두지 않는다고 했잖아.”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황태자 전하.”

“레온이라고 불러!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나도 네 조건을 들어 주지 않겠어!”

레온하르트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래도 제가 어떻게 황태자 전하를…….”

“내가 허락했으니 문제 없잖아. 제이드도 날 그렇게 부르는걸.”

“그야 제이드 님은 황태자 전하의 친우니까요.”

“제이드는 제이드 님이니까 나는 레온이라고 불리고 싶어.”

아이린은 그의 어린아이 같은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아이린, 응?”

또다시 그는 강아지 같은 눈빛을 내뿜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어쩐지 심장이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둘이 있을 때만인데……. 그래, 불러 주자. 여주랑 결혼하더라도 황태자를 친구로 두면 나쁠 게 뭐 있겠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뭐가 힘든가 하겠지만 그녀로서는 굉장히 큰 결심이었다.

제국의 2인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평민.

귀족이나 황족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그녀는 매우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름다운 미간에 더는 근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린은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레온.”

찌푸려진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쫙 펴졌다.

예쁘게 쌍꺼풀진 눈이 놀란 듯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휘어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으윽, 미소 지을 때마다 빛나는 것은 반칙이잖아! 게다가 저 눈물점은 정말 치명적이야! 결코 심장에 좋지 않아!’

“저 급한 일이 있어서요. 도서관에 다녀올게요.”

아이린은 그대로 급하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레온하르트는 늑대를 피해 도망치는 토끼 같은 뒷모습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아이린은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아, 정말 위험했어.”

“뭐가 위험한가요?”

아이린은 이슬이 또로록 굴러갈 것 같은 낭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모델 같이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도 아름다운 여자가 그녀를 향해 화사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사? 여신? 아니 여주다!’

아이린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눈을 접어 미소를 지었다.

“속국의 공녀인 날 알고 계시다니. 아이린 님은 역시 소문처럼 똑똑하신 분이군요.”

‘뭐지 첫 만남에 이름을? 게다가 소문이라니?’

아이린은 조심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문이라니요?”

그녀는 아직까지 일개 수습이었다.

드넓은 황궁 안에서 그녀에 대한 어떤 소문이 퍼지기에는 상식적으로 너무 일렀다.

“황자님들 이야기는 영애들 사이에 항상 이슈가 되는 이야기인 건 아시죠?”

“네.”

‘그렇지, 황자들은 룩스 제국의 핵인싸이자 금동아줄이니!’

“황태자궁에 제국 아카데미 수석인 우수한 인재가 들어왔다고 영애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답니다.”

아이린은 갑자기 들어오는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우수하다니요. 정말 부끄러운 소문이군요.”

“어머, 겸손하시기까지 하시군요.”

엘리자베스는 말간 물빛 눈동자를 아름답게 빛내며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으아, 눈부셔! 역시 이 언니 여주라 후광이 따르는구나……. 어? 데이지? 네가 왜 거기 있어?’

아이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짝 데이지가 여주의 후광 뒤에서 시녀 복장으로 조용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주 후광이 엄청나다 해도 어떻게 모를 수 있었지?’

“데…….”

아이린이 데이지를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

그때 여주 뒤에 서있던 데이지가 단호한 눈빛으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왜?’

아이린은 복잡한 마음을 숨기려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공주 전하, 제가 업무를 보러 가야 해서요. 죄송하지만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쉬운 듯 살짝 눈꼬리를 내렸다.

“네, 그럼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다시 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여주 언니가 예쁘긴 하지만, 이 이상 히로인과 엮일 순 없어.’

“황송합니다, 공주 전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대화 즐거웠어요.”

아이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도서관으로 걸었다.

아이린은 데이지가 궁금해 얼마 안 가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 순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데이지 또한 그녀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1시 이곳에서.’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따르던 데이지 또한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아이린에게 지었던 미소를 지우며 데이지를 불렀다.

“데이지.”

데이지는 한걸음에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네, 공주 전하.”

“저 아이린이라는 직원을 알고 있나요?”

“얼마 전 황후궁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도 있었나요?”

“네, 황후마마께서 시녀들을 시켜 강제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이유는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황태자궁의 직원을 황후께서 데려갔다면, 황태자 때문은 아닐 것이고. 혹시 그녀가 2황자와도 안면이 있는 건가요?”

데이지는 오히려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2황자와요?”

“2황자님의 일이 아니라면 황후께서 섣불리 사람을 움직이시는 분은 아니죠.”

‘2황자라니! 아이린, 도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음험한 구석이 많은 황궁이었다.

데이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순백의 백합 같은 엘리자베스.

그녀의 눈은 그 순수함과는 다르게 복수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피오나 공주를 떠올리며 차게 웃었다.

사랑받는 공녀였던 그녀를 가족들과 생이별하게 만든 원수!

‘복수! 내 앞에서 살려달라 빌며 무릎을 꿇게 만들겠어!’

룩스 제국의 공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녀의 첫 번째 목표는 황태자였다.

‘황태자 레온하르트 칼립스. 그의 비가 되어 장차 황후가 되겠어!’

룩스 제국의 황후가 되어 자신을 이리 만든 메르헨의 왕과 피오나 공주에게 꼭 복수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려면 우선 아이린이 자신의 적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샤르르 접으며 말했다.

“데이지, 부탁이 있어요.”

정말 세상 어느 꽃보다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데이지는 이상하게도 그런 그녀의 눈빛이 웃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데이지는 동요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지긋이 바라봤다.

데이지 또한 그동안 귀족 영애로서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말씀하십시오, 공주님.”

“방금 만났던 여직원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주겠어요?”

엘리자베스의 부탁에 데이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을 왜? 무슨 속셈이지?’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자신의 방 쪽으로 향했다.

앞서 걸어가는 엘리자베스의 우아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데이지는 복잡한 심경에 조심히 긴 숨을 내쉬었다.

* * *

“우와, 날씨도 좋네.”

한겨울이지만 춥지도 않고 가을날처럼 선선한 날씨였다.

점심이 든 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걷던 아이린은 이내 잔뜩 움츠렸던 몸을 쫙 펴며 숨을 들이쉬었다.

“후후, 공기도 좋고.”

그때 저 멀리 친숙한 인영이 보였다.

“어, 데이지!”

“아이린!”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서로를 꼭 안았다.

“데이지, 이쪽으로 와!”

아이린은 자신이 매일 점심을 먹는 벤치로 데이지를 이끌었다.

데이지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참 한적하고 좋네.”

“그치? 도서관 쪽이라 그런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더라고.”

“하긴 이 볼 것 많은 화려한 황궁에서 책을 읽는 귀족은 거의 없지.”

“쿡쿡, 덕분에 난 좋아.”

“그래, 아이린. 넌 아카데미서도 책 벌레였으니!”

“그런데 데이지, 점심은 먹었어?”

데이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래? 잘됐다. 그럼 이거 먹어봐!”

아이린은 얼른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데이지에게 내밀었다.

데이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크게 한 입 깨물었다.

“역시 맛있다. 나 이 샌드위치 정말 많이 그리웠어.”

“그래? 그럼 먹고 싶을 때 우리 집 놀러오지 그랬어.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 줄 텐데.”

데이지는 말없이 조용히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이린은 더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데이지, 이 복장은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황궁에 와서 엘리자베스 공주의 시녀가 되어 있는 거야?”

아이린의 물음에 데이지는 남은 샌드위치를 한 입에 우겨 넣더니 곧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했다.

“어머, 데이지!”

아이린은 얼른 물통을 건네며 그녀의 등을 쓸어줬다.

데이지는 아이린의 따스한 손길에 이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데이지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하였다.

“데, 데이지 무슨 일이야?”

아이린은 데이지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린은 데이지와 친구가 된 지난 1년 동안, 그녀가 울거나 우울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울지 마, 데이지! 내가 다 도와줄게.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 줘!”

데이지는 다정하게 자신을 달래는 아이린의 목소리에 더 울컥했다.

“아이린! 으어엉, 나 어떻게 해!”

“그만 울어, 데이지. 네가 우니 나도 눈물이 나잖아! 으엉엉!”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데이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우리 집이 망했어.”

아이린은 놀란 눈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물었다.

“망했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것 같아.”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말도 안 돼! 너희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실 분은 아니잖아!”

데이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절대 그럴 분은 아니지. 그런데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어서 피하지 못한 것 같아.”

“배신이라고?”

“응, 아버지의 오랜 친우이자 부하 중 한 명인데. 새로 들어간 사업 자금을 들고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갔어.”

“사기를 당하셨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 사업조차 그 아버지 친우가 따온 거였거든.”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라고?”

그러나 데이지는 이제 좀 진정이 된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그 일을 수습 중이시고.”

“그럼 데이지 네가 아버지를 도와 드려야지 어떻게 여기 황궁에 와 있는 거야?”

그 순간 데이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후우……. 아버지가 이번 사업을 시작하실 때 피도르 후작에게 투자를 많이 받으셨어.”

“피도르 후작이라면……. 설마 내가 아는 그 악독한 사람 말하는 거야?”

데이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 아니, 악마!”

“……!”

“아버지 친우가 사업 자금을 들고 도망을 간 시점에 사업이 망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리고 갑자기 피도르 후작이 투자금액을 회수한다고 연락을 해 왔지.”

“뭐? 그럼 나도 도울게. 급한 돈이 얼마야?”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을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 네가 도울 수 없는 천문학적인 돈이야.”

‘으윽, 이곳이나 저곳이나 돈이 웬수구나!’

“실은 아버지가 백방으로 뛰면서 애쓰고 계시는데, 피도르 후작은 돈을 갚지 않으면 나와의 결혼을 강행하겠다고 협박을 해 왔어.”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결혼? 피도르 후작에게 네 또래 아들이 있었어?”

“내 또래 아들은 무슨. 내 또래의 딸이 있고 아들들은 모두 장성해서 손주까지 줄줄이 있다고.”

아이린은 순간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쭈글쭈글 영감탱이가 너와 결혼하자고 한 거야?”

데이지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아파오는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이린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이 미친 늙은이가 노망났나! 어떻게 50살도 더 차이 나는 너를!”

화가 나 주먹을 꽉 쥔 아이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데이지는 오히려 위로하듯 아이린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아이린.”

아이린은 눈가에 눈물을 잔뜩 머금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데이지, 어떻게 내가 네 걱정을 안 할 수 있어!”

데이지는 오히려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나 그래서 황궁 시녀로 들어온 거야.”

“뭐? 그래서라니?”

아이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황궁 시녀는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거든.”

눈물을 그친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말? 그런 법이 있었어?”

“응, 네가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몰랐을 거야. 그리고 그건 황궁 직원인 너도 마찬가지야.”

‘대박, 그럼 밖에 나가 돈 떼먹고 황궁에서 일하면 되겠네?’

“물론 직접 친 사고는 수습해 주지 않아. 가족들이 사고 친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

‘앗, 내가 입 밖으로 말했나?’

“넌 생각이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아이린.”

‘윽, 레온하르트도 그런 말을 했는데. 설마 진짜 볼에 글이라도 써지나?’

아이린은 얼른 얼굴을 닦듯이 손으로 훔쳤다.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워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큭큭, 아이린. 네 덕분에 내가 웃는다니까?”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워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을 돌리듯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제국의 황족도 아니고 공녀로 오신 엘리자베스 공주님의 시녀가 되게 된 거야?”

“그거야 내가 황궁에 힘 있는 뒷배가 없어서 아니겠어. 이젠 돈도 없고 말이야.”

‘휴, 어딜 가나 백 없고 돈 없으면 서러운 일뿐이구나!’

그때 데이지가 아이린의 미간에 검지를 갖다 대며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엘리자베스 공주님이 잘해 주셔.”

“그래도….”

“나이도 어린 게 그러다 늙는다.”

아이린은 발끈하며 말했다.

“뭐야, 나 너랑 동갑이거든?”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귀여운데 나랑 동갑이라니! 아무래도 네가 있던 고아원에서 나이를 잘못 안 거 아니야?”

“에잇, 아니야! 그건 그렇고 데이지, 네 일인데 어떻게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쭈쭈, 우리 아이린 다 컸네. 이 언니 걱정도 할 줄 알고.”

데이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아이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포근했다.

데이지는 그동안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기분이 어느새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긍정적인 기운이 다시 퐁퐁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아, 진작 아이린을 만날 것을.’

그동안 데이지는 혹시 자신이 아이린에게 피해를 줄까 봐 만나지 않았다.

피도르 후작은 어린 소녀를 학대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녀를 확보하는 데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데이지를 주시하는 피도르 공작이 아이린을 보기라도 한다면?

호위 기사 하나 없는 평민 아가씨로서는 정말 위험할 수 있었다.

피도르 공작은 정말 그 이름처럼 피도 눈물도 없다고들 할 정도로 악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후파의 자금줄이었기에 룩스 제국의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의 위기도 처음부터 그 후작의 짓일 수도 있겠어.’

데이지는 무언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버지가 지금은 위기시지만 곧 일어서실 거야. 그리고 난 안전한 데서 보호받으면서 높은 보수 받고 일해서 좋은 거구.”

“……!”

“그러니 내 걱정은 넣어 두세요.”

아이린은 힘든 상황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를 바라봤다.

‘데이지는 현실 세계까지 합해 26년을 살아온 나보다 항상 더 어른스럽다니까!’

아이린은 도망치려고 했던 자신이 떠올라 고개를 숙였다.

“참, 지금 내 걱정 할 때가 아니야! 아이린 너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

“괜찮기는, 얼굴이 핼쑥한데.”

아이린은 아침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떠올렸다. 핼쑥은커녕 호빵맨 그 자체였다.

아이린은 머쓱해져 웃었다.

데이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금요일에 황후궁에 끌려갔었다며. 오늘에야 그 직원이 너인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게, 좀 말하자면 길어.”

데이지는 단호한 목소리로 추궁하듯 물었다.

“길더라도 간단히 말해봐!”

‘어떻게 말하지? 사실대로 말하면 걱정할 텐데.’

아이린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데이지에게 자신의 고민까지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고심하다 이내 말을 꺼냈다.

“그냥, 황후 폐하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내가 황자님들과 가깝다고 생각하셨나 보더라고.”

데이지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

“뭐가 그냥이야! 너 엄청 위험했던 거잖아!”

아이린은 애써 부인하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그 정도는.”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으음, 분명 황후 폐하가 움직였다는 것은 2황자 전하 때문일 텐데…….’

“아이린, 혹시 2황자 전하를 알아?”

아이린은 우물쭈물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도서관에서 우연히 몇 번 만난 게 다야.”

“바로 그거구만.”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데이지를 바라봤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데이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너, 이 황궁에서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 반드시 피해야 하는 세 가지가 있는 것 알아?”

“황궁에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 세 가지? 그런 게 있었어?”

‘뭐지, 토마스 선배가 그런 건 알려 주지 않았는데?’

“응. 잘 들어 둬! 우선 첫 번째는 네가 모시고 있는 황태자 전하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태자 전하는 왜?”

데이지는 살짝 미간을 접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와 가까우면 우선 황후 폐하의 표적이 될 수 있어.”

“표적이라고?”

“응, 표적.”

데이지는 곧 주변을 살피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도 어릴 적부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런데?”

“2황자 전하를 황태자로 미는 황후 폐하는 황태자 전하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좌천시키거나 제거하기 시작했지.”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데이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혹시 제거라면, 죽, 죽인 거야?”

데이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가 마셔야 할 독을 대신 마시고 죽은 이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사들의 얼굴 복지가 좋은 나름 꿀직장이라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요단강 물에 발 담그고 있었던 거야?’

아이린의 얼굴은 금방 사색이 되고 말았다.

“지금 황자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마 황후 폐하도 건드리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거거나 이미 황후 폐하의 끄나풀일 거야.”

“뭐, 정말?”

아이린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리 데이지의 말이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아이린은 레온하르트가 매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은 그의 직장이기도 하지만 집이기도 했다.

제국의 2인자이자 황제의 아들이면 무엇 하겠는가?

매일 편히 쉬어야 할 집에서 안심하고 먹고 잘 수도 없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니!

아이린은 생각만으로도 답답하고 끔찍했다.

항상 그녀를 보며 실없이 잘 웃는 레온하르트였기에 그의 그런 아픔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난 어쩌면 그를 돌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때 데이지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깼다.

“그리고 두 번째는 2황자 전하야! 그건 왜인지 너도 알 만하지?”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데이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 2황자 전하의 짝으로 황후파 가문의 영애를 점찍어 놨다는 소문이 있어.”

“그건 황자로써 당연한 거겠지.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2황자 전하와 내가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데이지는 아이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미리미리 단속하시는 거지. 황후 폐하는 2황자 전하 주변에 시녀조차 두지 않으실 정도니까.”

“뭐?”

아이린은 황후의 행태가 황당해 입이 벌어졌다.

‘이건 무슨 이세계판 올가미인가?’

“황후 폐하가 네게 그러는 것만 보아도 알겠어. 2황자 전하는 지금까지 연애는커녕 주변에 남자들만 무성했을 거야.”

아이린은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자식 단속을 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그때 데이지의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그래도 네가 무사히 나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니?”

“내가 선배 시녀에게 들었는데 말이야.”

데이지는 갑자기 소리를 죽이며 아이린의 귀에 속삭였다.

“2황자 근처에 있던 여인 중 신분이 낮은 이들은 모두 제거되었다는 소문이 있어.”

아이린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 제거가?”

아이린은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동작을 해 보였다. 데이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린의 어깨가 떨려 왔다.

‘헉, 역시. 내 예감이 맞았어.’

그 순간, 얼굴은 무심한 듯 보였지만 눈빛은 살기를 띠고 있었던 황후가 떠올랐다.

하지만 더는 무섭지 않았다. 무서움보다 억울함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황후 정말 너무하잖아! 내가 뭘 했다고! 뭐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

“계속 그러면 나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때 데이지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래, 아이린! 가만히 있지 마! 우리 둘이 뭉쳤는데 뭘 못해. 널 힘들게 하면 나한테도 적이야!”

아이린은 주먹을 불끈 쥐는 데이지를 바라봤다.

조금 전 아이린이 한 말은 들켰다간 황족을 모독하는 반역행위로 당장 처형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린은 이전 생의 부모님에게서도 이런 관심과 애정은 받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도, 직장 생활을 할 때도 그냥 그 공간에 함께 할 때만 어울리는 딱 그 정도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피해 보기 싫다고 피하려 했을 텐데.’

곤경에 처했을 때 변하지 않는 우정, 그리고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것이 아닐까?

아이린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차오르는 것 같은 뿌듯함이 느껴졌다.

처음에 분명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힘든 순간들을 당장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더는 자신의 안위만 챙길 수는 없었다.

데이지, 그녀는 아이린에게 단순한 덕질 메이트가 아니었다.

이계에 홀로 떨어져 두렵고 외로울 때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준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이린은 아무리 이기적인 자신이라 하여도 소중한 친구의 위기 앞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득 데이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데이지 세 번째 피해야 할 사람은 누구야?”

“누구긴,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제이드 님이지!”

아이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우리 제이드 님은 왜?”

놀라는 아이린의 모습에 데이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치적으로 황태자 전하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있지만?”

“두 황자 전하와 함께 룩스 제국 영애들의 공공재잖아!”

“뭐? 공공재?”

데이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응. 외모는 천사 같고, 신분도 좋고, 천문학적인 재산에 권력까지 있는 세 분이 아직도 솔로인 것 보면 모르겠어?”

아이린은 너무 납득이 되어버려 데이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아마 그 세 사람 주변의 여자들, 황후가 제거하지 않더라도 무사하긴 힘들었을걸.”

‘헐, 이거 정말 사생팬을 가진 아이돌이 따로 없잖아!’

“자, 그럼 아이린, 오랜만에 해볼까?”

데이지는 아이린 앞에 팔을 내밀었다.

아이린은 순간 멍하게 데이지를 바라봤다.

“뭐 해, 아이린. 빨리 들어오지 않고!”

그렇게 말하던 데이지는 여전히 멍한 아이린의 팔을 끌어다 자신의 팔을 가로질렀다.

“크로스!”

“킥킥, 데이지, 갑자기 크로스가 뭐야!”

“큭큭, 하하하하!”

그렇게 킥킥거리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 * *

“아이린, 오랜만이야!”

“네, 오랜만이에요.”

아이린은 휴가를 낸 실장 대신 그의 업무를 임시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지라 보좌관실을 찾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쥴리언도 반가운지 가까이 와 그녀의 머리를 흩뜨렸다.

“요즘 기분이 좋은가 보네! 얼굴이 환하고. 황태자 전하랑 일해서 그런가?”

아이린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이제 적응이 되었나 봐요.”

옆에서 있던 토마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얼마 전까지 죽상이더니! 잘됐네!”

아이린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하, 제가 그렇게 죽상이었어요?”

그때 쥴리언이 말했다.

“난 이해해! 우리 막내가 그럴 만도 하잖아, 우리 사무실의 살인적인 업무의 양을 생각하면.”

“그래도 너무 죄송하네요. 제가 그런지 잘 몰랐어요. 앞으로는 알려 주세요, 선배님들!”

토마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너 잘하고 있어.”

그때 차장이 조용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제 잡담은 그만하시고 업무에 집중하죠.”

그 순간 조용히 문이 열리고 브라운이 들어왔다.

그는 순간 아이린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까닥하고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브라운, 우리 막내가 오랜만에 왔는데……!”

“쥴리언 선배님, 브라운 선배님이 바쁘신가 봐요.”

아이린은 얼른 차장 자리로 가서 서류를 내밀었다.

“차장님, 이 서류 보좌관님이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어요.”

서류를 받아든 차장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윽. 차장님 인상 쓰신 거 봤죠, 쥴리언 선배!”

“그래, 저 표정을 보니 우리 오늘 야근 확정인가 보다.”

차장은 쥴리언과 토마스에게 찌릿한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 손을 살짝 흔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차장은 다시 아이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류는 잘 받았으니 아이린 씨도 얼른 돌아가도록 해요. 비서관은 항상 황태자 전하의 주변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차장님. 얼른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거 왠지 느낌이 싸한데. 중요한 거라도 놓고 왔나?’

그녀는 사무실을 나가기 전 사무실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친 브라운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뭐지? 저 선배한테 내가 뭐 잘못했나?’

눈을 피하는 듯한 브라운. 무언가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차장의 빨리 가라는 눈빛에 얼른 밖으로 나갔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아이린은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황태자 집무실 앞에 다다랐을 때 미성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씨!”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으아아, 제이드 님! 하마터면 귀 녹을 뻔했네. 어쩜 목소리조차 존잘이야?’

그때 레온하르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이린, 왜 그렇게 땅만 보고 걸어? 돈이라도 떨어뜨렸어?”

아이린은 최종 보스인 그를 타박할 수 없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했다.

‘뭐, 돈을 떨어뜨렸냐고? 황태자 너 잘생겼으면 다니? 아주 날 거지로 아는 거야 뭐야. 그런데 우리 제이드 님은?’

그때 제이드가 환하게 웃으며 레온하르트보다 한발 앞서서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아이린의 눈이 스르르 호선을 그렸다.

‘아아, 이곳이야말로 꿈의 직장! 여기 정말 복지가 너무 좋다니까!’

“아이린 씨, 무슨 고민 있어요?”

‘아, 날 부르는 목소리조차 달콤하구나! 역시 다정한 제이드 님!’

아이린은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오늘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였다.

제이드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한걸음에 가까이 다가왔다.

‘헉, 언제 온 거야?’

아이린은 갑자기 불쑥 고개를 내미는 레온하르트에게 흠칫 놀랐다.

“아이린, 오늘 머리 귀엽다!”

“고, 고마워요.”

아이린은 머쓱하게 손을 올려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오늘따라 일할 때마다 흘러내리는 머리가 성가셨다.

점심때 만난 데이지에게 그 말을 했더니 핑크색 리본 끈으로 반묶음을 해주었다.

끈의 색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는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아서 그대로 놔두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를 만나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핑크는 너무 부담스러운데.’

아이린은 자신의 은빛 머리와 핑크빛 리본 끈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리본을 풀까 생각하며 머리로 손을 올리려고 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얼른 그녀 앞에 작은 상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갑자기 나타난 상자에 멈칫한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에게 물었다.

“갑자기 뭐예요?”

“뭐긴, 아이린이 좋아하는 달콤한 것들이지.”

그때 옆에 서 있던 제이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급히 할 일이 생겨서요.”

제이드는 그대로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이린은 얼른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제이드 님, 이거 같이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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