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0)

7.

그 순간 그녀가 내민 손이 레온하르트의 큰 손에 갇혔다.

아이린은 놀라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밖을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아이린, 제이드가 아니라 나를 따라와야지. 그대는 내 비서관이니 말이야!”

‘뭐지? 오늘 밖으로 나가는 일정은 없었는데.’

아이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았다.

“아이린, 방금 오늘 내 일정이 무언가 생각했지?”

“하하, 일정이 없으셨던 걸로 기억해서요.”

레온하르트는 호선을 그리듯 눈을 접으며 말했다.

“방금 생겼어, 그 일정.”

“네? 갑자기 무슨 일정이?”

레온하르트는 당황한 얼굴의 아이린을 보며 피식 웃더니, 이내 그대로 돌아 황태자궁 밖으로 걸어갔다.

아이린은 빠르게 걷는 그를 뒤따르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사자궁 정원에!”

“네? 갑자기 사자궁을요? 거긴 황제 폐하의 정원이잖아요!”

“…….”

“혹시 적국의 스파이라도 나타났나요?”

그녀의 스파이란 말에 레온하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스파이는 무슨. 그런 거 없어.”

사실 아이린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자궁의 정원은 황족들에게만 허락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곳에 가는 건가요? 정원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레온하르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문제는 없어. 그냥 둘러보러 가는 거지.”

“아! 미리 문제가 있는지 보시려고 그러신 거군요. 황태자 전하는 효자신가 봐요.”

그때 레온하르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바짝 따라오던 아이린은 그만 그의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앗!”

제법 충격이 있었는지 아이린의 몸이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어, 어어!”

그녀는 팔을 허우적대며 애써 중심을 잡아 보려 했지만, 몸이 막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가 얼른 그녀의 두 팔을 잡아 자신의 품에 안았다.

순간 시원하고 달콤한 향이 그녀의 폐부에 훅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뒤로 넘어갈까 봐 놀라서 그런 것인지, 갑작스레 가까워진 그의 향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두려워 얼른 다시 몸을 땠다.

결국 그녀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순간 아이린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졌다.

‘흑, 이럴까 봐 멀리 떨어지려 한 건데.’

저 자신도 잠시 놀란 레온하르트의 입술에서 이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하는 짓마다 이렇게 귀여운 거야?’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를 당겨 일으켜주며 그녀의 드레스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으힉!”

아이린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주변을 살폈다.

“제가 할게요!”

아이린은 얼른 자신의 매무새를 정리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 귀여웠다.

작고 귀여운 손으로 옷을 터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겼을 때 콩닥거리던 심장까지!

그리고 토끼처럼 부드럽고 폭신한 은빛 단발머리가 그녀의 귀여움을 더 가중시키고 있었다.

‘쓰다듬고 싶다. 따뜻하겠지? 아니 보드라울 거야!’

“황태자 전하!”

멍하니 아이린을 보던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전하 말고 레온.”

아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레온.”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근데 왜 불렀어? 아이린?”

“빤히 보시길래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해서요.”

그는 아이린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왜 자꾸만 빤히 보게 되는 걸까? 어? 나뭇잎!’

“어, 진짜 묻었다.”

아이린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디요?”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피식 미소를 지었다.

“거기.”

아이린은 레온하르트가 이마를 보는 줄 알았는지, 이마를 훔치며 다시 물었다.

“닦였나요?”

“아니.”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금은요?”

“아직!”

아이린은 결국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려 했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손이 아이린의 머리로 향했다.

하늘이 그를 도와주는 것인지, 작은 나뭇잎 하나가 그녀의 머리에 붙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얼른 아이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어? 왜 머리를?’

아이린은 그와의 거리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는 순간, 따뜻한 온기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뭐지, 이 나른하게 기분 좋은 느낌은?’

아이린은 순간 귀까지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후후, 어디 하나 작지 않은 곳이 없네. 그래서 더 귀여운 건가?’

그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린은 그의 품에 안겼을 때 맡았던 그의 향기를 자신의 코끝에서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아이린은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위 따뜻한 손길이 닿은 자리에 점점 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하고 야릇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으아, 어떡해!’

아이린은 애써 진정시켰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혼미했다.

사람을 홀리는 향수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뭔가 나 위험해!’

아이린은 머릿속이 폭발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아이린은 얼른 눈을 떠서 이 순간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의 뇌이고 눈이건만, 어째서인지 스스로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아바타처럼 조종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

그때 아이린은 귓가에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그를 바라봤다.

‘으아앗!’

그의 얼굴이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아이린은 놀라 눈이 더없이 커지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레온하르트는 웃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뭐, 뭐예요?”

그는 이내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이린의 머리에서 떼어낸 나뭇잎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

“아이린, 네 머리 위에 붙어 있었어.”

아이린은 순간 자신의 행동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순간 부끄러운 마음에 앞발차기 뒷발차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쳤어! 거기서 왜 눈을 감니? 이렇게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보이면 죽을 때라고 하던데.’

그 순간 아이린은 피식 웃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으흑, 사람이 창피해도 죽을 수 있구나.’

아이린은 그 순간 자신이 인간의 죽음에 대해 새로운 과학적 증명을 한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마치 가을 추수 때 벼와 같았다.

그렇게 아이린은 의도치 않게 이불킥을 예약하고 말았다.

‘으윽, 소주 고프다. 이따 와인이라도 깔까?’

아이린은 어쩐지 오늘 밤만은 가만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반묶음 머리를 한 그녀였기에 터질 듯이 붉게 익은 귀를 숨길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워 애써 웃음을 참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귀까지 빨갛게 익었네, 귀여운 아이린. 저렇게 날 보고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면 그녀도 날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그녀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과 같은 듯해 갑자기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모르는 척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린,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간데!”

“아, 아니에요!”

“으음, 아닌 게 아닌데.”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대었다.

아이린은 놀라 얼른 그에게서 떨어졌다.

“앗, 갑자기 뭐예요!”

“뭐긴? 열을 재는 거지.”

그리고 그는 세상 나른한 미소를 지은 채 아이린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매우… 뜨거운걸.”

속삭여서인지 살짝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묘한 색기를 더했다.

그 순간 아이린은 홀린 듯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때문에 그의 말을 뒤늦게 곱씹었다.

‘윽, 설마 지금 날 놀리는 거였어?’

또다시 얼굴이 터질 듯 열기가 올라왔다.

아이린은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소리쳤다.

“으앗! 그냥 더워서 그래요!”

그러고는 그대로 뒤돌아 뛰었다.

레온하르트는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소리쳐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아이린?”

“몰라요! 지금부터 저, 점심시간이에요! 따라오지 마세요!”

레온하르트는 짧은 다리로 멀리 도망치듯 달리는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나의 아이린은 참 귀엽기도 하지.’

부리나케 달려가는 그녀에 뒷모습에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점심시간은 아까 다 지났는데.”

그때 저 멀리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사교 시즌이 지나자 자신의 영지에 돌아갔다가 신년제 준비로 올라온 영애들이었다.

그리고 그 무리 속에 엘리자베스가 함께 걷고 있었다.

“뭐죠? 저 낯선 풍경은?”

“그래요.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날파리가 꼬였군요.”

“감히, 우리 황태자 전하 옆에!”

“저 초상집 갔다 온 것 같은 검정 드레스는 뭔가요?”

“그래요, 저런 몸에도 맞지 않은 넝마 같은 걸 드레스라고 황궁에 입고 들어오다니!”

“저건 황궁을 모독하는 행위예요!”

그때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부채를 촥 펴더니 입가를 가렸다.

이내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에 황후궁에 끌려갔다던 그 여직원이라 하더군요.”

“허, 여직원이라고요?”

“감히 여직원 따위가 우리 황태자 전하를!”

그 순간 그녀들의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꾸만 달라붙는 날파리에게는 약을 뿌려야겠죠.”

피도르 후작 영애, 메리 피도르였다.

순간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황태자와 사이가 가까워 보이는 아이린에게 질투가 났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건 단순히 골탕을 먹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메리 피도르가 낀다면 그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녀의 별명은 ‘피의 피도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먼저 정적을 깨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피도르 후작 영애시군요.”

메리 피도르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듯 거만한 눈빛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못 보던 얼굴이구나. 근데 너 날 아니?”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반말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속내를 감추며 말을 이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피도르 영지에 장밋빛의 머리에 어여쁘고 똑똑한 영애가 있다고요.”

메리 피도르는 엘리자베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넌 누구니?”

계속되는 반말에 주변의 영애들이 불편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

메리 피도르는 그녀들의 기색을 읽었는지 그녀들을 하나하나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요즘 날 못 보더니, 영애들 눈빛이 참 불순해졌군요. 영지에 돌아가더니 머릿속을 다 비우고 오셨나 봐요?”

영애들은 메리 피도르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어깨를 떨었다.

메리 피도르는 그녀들을 보며 낮게 웃었다.

“영지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신 건가?”

분명 그녀는 말을 높이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귀에는 ‘그따위로 쳐다보면 죽음이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영애들을 사냥감 보듯 노려보던 메리 피도르는 이내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그래, 그래서 네 이름이 뭐니?”

엘리자베스는 처음 보는 광경에 당황할 만도 했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 공녀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낮추는 것을 배웠다.

“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엘리자베스는 치마 양쪽을 잡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는 메르헨 왕국에서 온 공녀 엘리자베스입니다.”

“아하! 얼굴과 어투가 남다르다 했더니 공물로 온 공주였군.”

메리 피도르는 엘리자베스를 마치 흥미로운 상품을 보듯 바라봤다.

그녀의 그런 눈길에 기분 나쁠 만도 한데 엘리자베스는 싱긋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오호, 너 제법이구나! 마음에 들어. 자, 여러분!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내가 차를 좀 대접하고 싶어.”

메리 피도르는 그 말을 끝으로 앞장서 걸었다.

그리고 모여 있던 영애들과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그녀들의 뒤를 따르는 시녀 무리에 서 있던 데이지는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질 수밖에 없었다.

‘으윽, 피도르! 부녀가 쌍으로 미쳤구나! 감히 내 친구까지 건드리려고 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데이지는 그렇게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다.

* * *

아이린은 부끄러움에 눈을 감은 채 도서관이 있는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퍽!

그러다 그만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혀 넘어졌다.

“아앗!”

제법 세게 부딪혔는지 아이린은 뒤로 넘어지며 손바닥이 까지고 말았다.

그때 기분이 나쁜 듯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누군데 이렇게 앞을 보지 않고 달려오는 것인가!”

‘보자마자 반말인 걸 보니 설마 황족?’

아이린은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검은 구두가 그녀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일어나야 해!’

아이린은 얼른 일어나서 사과하려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넘어지면서 발목도 살짝 접질린 것인지 일어날 수 없었다.

‘악, 발목이! 어, 어쩌지!’

그때 아까와는 톤이 전혀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아이린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에디?”

‘뭐야? 조금 전 그 목소리가 에디의 목소리였어?’

아이린은 조금 전 다소 고압적이고 무서웠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모습에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아이린이 반가웠는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일으켰다.

“윽!”

에드먼드는 그녀의 신음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린, 다친 것 같은데 이쪽으로 앉아 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에드먼드는 그녀를 부축해 가까이 보이는 벤치로 이끌었다.

아이린은 벤치에 앉자마자 손바닥을 펴 후후 불었다.

넘어질 때 제법 많이 쓸렸는지 그녀의 손바닥은 피를 살짝 머금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얼른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물통의 물로 손수건을 적셨다.

“조금만 참아.”

아이린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드먼드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에 묻은 피와 흙을 닦아 냈다.

“아앗!”

아파하는 아이린의 목소리에 에드먼드의 눈썹이 꿈틀대며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미안, 많이 따가워?”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에드먼드는 얼른 그녀의 손바닥을 그녀처럼 호호 불어주었다.

‘소설 속에는 분명 흑막이었는데? 아니, 에드먼드가 여자에게 이렇게 다정할 수 있는 남자였어?’

아이린은 소설 속 흑막이자 비운의 서브 남주인 에드먼드를 떠올리며 눈앞의 그를 바라봤다.

곧 아이린의 손에 에드먼드의 온기가 느껴졌다.

에드먼드가 다른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아이린의 손에 묶었다.

‘그래, 이 사람은 소설 속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온기가 느껴지는데 어떻게 글자일 수 있어?’

아이린은 어색한 표정과 다르게 따뜻한 눈빛의 에드먼드를 마주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니야. 그런데,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길이었지?”

“아 그게… 도서관이요!”

“도서관은 오랜만인 것 같은데.”

사실 에드먼드는 아이린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매일 도서관에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허탕을 치고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녀를 만난 것이다.

“요즘 황태자 전하의 임시 비서관 업무를 맡게 되어서요.”

“다행이다.”

에드먼드는 자신을 피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네?”

그는 특유의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라고.”

“……?”

“사실은 걱정했었거든.”

“무얼요?”

에드먼드는 순간 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이 그날의 일로 나를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서…….”

아이린은 살짝 뜨끔 했다.

사실 황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에드먼드를 피하고 있는 게 맞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때마침 비서관 업무를 하게 되어 도서관을 찾는 일이 많이 줄기도 했다.

‘나중에는 암흑가를 아우르게 되는 에드먼드지만, 어린 시절에는 눈물이 많았다고 했어.’

아이린은 눈물이 흐를 듯한 그의 표정에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일이 많이 바빠 요즘 집에도 못 가는 날도 많은걸요.”

“정말 일이 많아서 그런 거지?”

“네!”

순간 안심했다는 듯 에드먼드가 그녀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후우, 정말 다행이다. 제 어머니 때문에 다시는 나하고 친구 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어.”

아이린은 살짝 양심에 찔렸지만,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말 말아요.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죠.”

“정말로?”

“네. 정말요.”

그 순간 에드먼드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 이러지? 아이린이 나와 영원히 친구가 되어 준다고 했는데.’

에드먼드는 정말 알 수 없는 기분에 눈을 찡그렸다.

그때 아이린 걱정스럽게 물었다.

“에디,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에드먼드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응?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얼굴이 어두워 보여서요.”

에드먼드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랬어?”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냥, 아이린과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 놀랐나 봐.”

에드먼드는 다시 그녀에게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였다.

아이린은 어쩐지 그 미소가 아프게 느껴졌다.

항상 혼자였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겹쳐 보여서였을까?

아이린은 얼른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그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럼 오랜만에 도서관에 같이 갈까요?”

그 순간 에드먼드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응, 좋아!”

항상 차갑고 날카로웠던 그의 인상이 그 순간 조그만 강아지처럼 순하게 보였다.

‘저 눈, 웃게 해주고 싶은 눈이네! 큭큭. 근데 맨날 애늙은이 같더니, 저렇게 웃으니 제 나이로 보이네?’

아이린은 그를 향해 씩씩하게 팔을 내밀며 말했다.

“자 그럼, 도서관까지 도와줄래요?”

“네. 영광입니다, 레이디!”

에드먼드는 정말로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둘은 그렇게 마주 웃으며 도서관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도서관으로 들어갈 때쯤이었다.

수풀 속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던 하녀 하나가 황후궁으로 달려갔다.

* * *

“뭐? 또 내 아드님과 그것이 같이 있었다고!”

하녀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말했다.

“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2황자 전하께서 아이린이라는 여직원과 팔짱을 끼고 걸어가셨습니다.”

“뭐라? 팔짱까지 꼈단 말인가! 으윽!”

그때 황후의 뒤에 있던 보발디 백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너는 이제 나가 보도록 해라. 문밖에 나가면 시녀들이 상을 줄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하녀는 상을 받는다는 기쁨에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황후는 옆에 있는 찻잔을 들어 보발디 백작 부인의 발 앞에 던졌다.

황후가 던진 찻잔의 파편이 백작 부인의 발목에 생채기를 냈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아무 내색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보발디 백작 부인. 그녀는 황후가 결혼할 때 본가에서부터 함께 온 그녀의 측근 시녀였다.

황후는 본가에 있을 때만 해도 매우 밝은 아가씨였다.

하지만 아버지 버나드 공작이 그녀가 사랑하는 호위 기사를 죽이고 강제로 황후로 만들었다.

그녀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밴 채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부인이 되었다.

‘그건 모두 너 때문이지! 너에게 말하지만 않았어도 그이는 살 수 있었을 텐데, 다 너 때문에!’

자매 같은 측근 시녀였던 백작 부인은 그녀를 배신했다.

버나드 공작에게 그녀의 비밀을 낱낱이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지? 왜 아직 내게 이런 소식이 들어오는가 이 말이야!”

“그것이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허, 뭐라고! 예전에는 내 남자를 죽게 하더니 이제는 내 아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셈인가!”

황후는 남아 있는 잔 받침마저 그녀에게 던졌다.

자기로 된 잔 받침은 보발디 백작 부인의 머리 옆으로 날아가서 그대로 깨졌다.

그 순간 백작 부인의 하얀 볼에 파편이 튀었는지 작은 실금이 생겼다.

앤 버나드, 룩스 제국의 3대 가문 중 하나인 버나드 공작가의 하나뿐인 딸이자 룩스 제국의 황후.

그녀는 21살의 아들이 있는 여인 같지 않게 젊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는 룩스 제국에서 가장 기품 있는 사람으로 온 백성이 칭송을 받는 황후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 아들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변해 버리곤 했다.

“보발디 백작 부인! 더는 네가 하는 그따위 변명은 듣지 않겠다! 어서 나가서 해결하도록 해!”

보발디 백작 부인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뺨을 닦아 내는 그녀의 손수건에 피가 붉게 묻어났다.

황후는 그 모습을 보며 즐거운 듯 크게 웃었다.

“하! 아하하하!”

‘그래, 보발디. 그렇게 천천히 고통스럽게, 너도 피 흘리다 죽게 될 거야! 나의 기사님 라인처럼. 기다리세요, 아버지!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내 아드님이 황제 폐하가 되는 그날, 아버지 당신을 나의 사랑하는 라인에게 선물로 보내 드릴게요!’

그렇게 광기 어린 미소를 짓던 황후는 설렁줄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문이 열리고 시녀들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황후 폐하?”

“그래, 가서 황궁 의사에게 전해라! 나의 친정아버지이신 버나드 공작께 건강에 좋은 약재들을 보내 드리라고!”

“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대답을 한 시녀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 그날이 올 때까지 꼭 건강하세요.’

남은 시녀들은 조용히 바닥의 깨진 찻잔을 치웠다.

그리고 새로운 차를 담은 잔을 그녀 옆에 가져다 놓았다.

그것은 그녀의 오랜 지병이었던 심병을 다스리는 약차였다.

황후는 씁쓸해서 마실 때마다 곤욕이었던 차가 어쩐지 오늘따라 달게 느껴졌다.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한 번에 차를 들이마셨다.

* * *

‘아이린, 오늘도 저 상태구나!’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이린은 오늘도 여전히 서류 더미에 쌓여 있었다.

신년제로 인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년제라고 하면 단순한 축제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타국의 국제 정세와 각각의 영지의 사정까지 살펴 가며 준비해야 하는 국가적인 축제였다.

황태자는 황제를 대신해 많은 실무를 맡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임시 비서관을 맡은 아이린 또한 칼퇴근은 어려웠다.

어제도 새벽이 돼서야 겨우 숙직실에서 쪽잠을 잔 아이린이었다.

결재할 서류가 산처럼 쌓이고 야근이 계속되었지만 레온하르트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온종일 아이린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집무실 밖을 나가지 못한 채 서류 더미에 묻혀 있어도 소풍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많이 지쳐 보이는 아이린의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 되겠어! 저러다 쓰러질지도 몰라!’

레온하르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책상에 다가갔다.

“아이린!”

아이린은 갑자기 가까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우리 밖에 나가자!”

“어딜요? 오늘 외부 일정 없지 않으세요?”

아이린은 얼른 수첩을 펴서 그의 일정을 보았다.

“갑자기 생긴 일정이니 따라오도록 하세요, 비서관님!”

“저 비서관 아니에요. 임시로 대행 업무를 맡은 거라고요.”

레온하르트는 발끈하는 아이린을 향해 살짝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린은 갑자기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임시든 뭐든 지금은 아이린 네가 내 비서관이고. 내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여야겠죠?”

‘뭐야, 이런 대사에 어울리지 않는 저 달달한 눈빛은?’

아이린은 자신을 녹일 듯한 눈빛에 또다시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어, 홀린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린은 그 순간 이성 끝자락을 놓지 않으려 고개를 흔들었다.

‘으윽, 이 눈빛 뭔지 모르지만, 위험해 보여!’

아이린은 애써 눈을 돌려 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피하려고 해도 눈을 맞춰오는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를 결국 마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레온하르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런 아이린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린은 순간 눈을 스르륵 감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다.

아이린은 갑자기 울려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 얼른 눈을 떴다.

‘우와, 언빌리버블! 참 바람직한 제복일세!’

곧게 펴져 있는 넓은 등 근육이 그의 몸에 딱 맞는 제복을 뚫고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레온하르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등이야!’

레온하르트가 걸어갈 때마다 그의 등 근육들이 역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 근육들을 보고 있자니 그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윽, 사람 등만 보고 얼굴을 붉히다니. 나 설마 변태니?’

그때 그녀가 홀딱 빠져 버린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등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정신을 차린 아이린은 당황스러운 발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를 그렇게 따라간 곳은 색색의 튤립이 가득한 온실이었다.

‘와, 마치 튤립 축제에 온 것 같네!’

아이린은 어쩐지 들뜨는 마음에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레온하르트는 정원 한가운데 놓인 벤치로 그녀를 이끌었다.

“여기, 이쪽으로 앉아!”

아이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벤치의 한쪽 끝자락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제복 재킷을 그녀에게 걸쳐준 후 그녀 옆에 누웠다.

“아, 따뜻하다!”

아이린은 놀라 그의 이름은 불렀다.

“레온!”

“아이린, 하늘 좀 봐 봐. 오늘 참 하늘이 맑지!”

아이린은 그의 말에 무심코 하늘을 보았다.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이윽고 그는 눈을 스르륵 감았다.

고개를 숙여 그를 본 아이린은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신년제 때문에 집무실에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지금 낮잠이 오냐고요!’

아이린은 잔뜩 소리치고 싶었지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이린!”

‘잠든 줄 알았는데.’

아이린은 갑작스런 부름에 어리둥절하며 대답했다.

“네?”

“따가워!”

“네?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어디 벌레라도 물리셨어요?”

“응, 내 얼굴. 마치 벌레 물린 듯 따가워.”

벌레에 물렸다는 말에 아이린은 얼른 그의 얼굴을 살펴봤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여전히 완벽한 왕자님 얼굴이었다.

‘윽, 무슨 얼굴도 잘생긴 남자가 피부까지도 좋아? 매일 밖에서 훈련하는 거 맞아?’

아이린은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내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멀쩡하신데요. 어디가 따가우시다는 거예요?”

“요기?”

레온하르트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네가 자꾸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내 얼굴 뚫어질 것 같아! 왜,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네? 제가 뭘 봤다고 그러십니까? 그렇게 잘생겨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아이린이 보기엔 나 못생겼어?”

아이린은 반짝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헐, 존잘인 외모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제 옆에 누워 계시니 그런 느낌이 드는 거겠죠.”

아이린은 얼른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 정말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다. 이러다 내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어!’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아이린은 벤치 끝 쪽에 앉아 있었다.

이 벤치 또한 황궁 스케일인지 족히 네 사람은 앉을 만큼 컸다.

그런데도 레온하르트에게는 작았는지 팔걸이에 발을 얹은 채 한량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내가 아이린도 누워 보라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누워 봐! 응?”

아이린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벤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어떻게 두 사람이 눕습니까?”

그때였다.

레온하르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파안대소를 했다.

“뭡니까? 갑자기 왜 웃고 그러십니까?”

“아이린, 토끼같이 귀여운 얼굴과 다르게 은근히 응큼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순간 아이린은 아까 그의 등 근육을 감상했던 것이 떠올랐다.

순간 그가 데이지처럼 자신의 마음을 읽었나 하는 생각에 당황했다.

‘설마 들킨 건가? 아니면, 생각을 또 입으로 뱉은 것은 아니겠지?’

그때 레온하르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린, 이 벤치 말이야.”

“네? 벤치요?”

아이린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벤치를 눈으로 훑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설마, 나랑 여기 함께 누우려고 했던 거야?”

“네에?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봤다.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나른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조금 전에 아이린이 그랬잖아! 이 벤치가 함께 눕기엔 좁다고.”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금방 자신이 한 말을 다시 곱씹었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이 벤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어떻게 두 사람이 눕습니까?’

그 순간 아이린은 자신이 벤치에 레온하르트와 다정히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이린은 그걸 깨달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적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악, 미쳤어! 돌았어! 며칠 야근했다고 정신을 아주 놨구나!’

레온하르트는 시시각각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그녀의 얼굴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지그시 바라봤다.

‘후후, 저렇게 귀여운 존재가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온 거지?’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모습에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황태자로 살면서 지치고 거칠어진 마음들이 한순간에 몰랑몰랑 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아이린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듯 주먹을 들어 올렸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의 주먹을 한 손으로 다정히 감쌌다.

그녀의 손이 작아서인지 그의 손안에 쏙 들어왔다.

‘후후, 주먹도 작고 귀엽잖아!’

아이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자신을 감싼 그의 손을 바라봤다.

곧 레온하르트의 다른 한 손이 아이린의 머리에 살짝 내려앉았다.

아이린은 갑작스레 머리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보았다.

에메랄드빛 바다 같은 레온하르트의 눈 속에 자신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이 터질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요 작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궁금하네.”

그렇게 말한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머리 위에서 손을 떼었다.

‘좀 더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는데.’

아이린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향해 눈을 접어 미소 지었다.

마침 레온하르트의 눈물점이 그의 눈매를 따라 야릇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아이린의 심장은 더없이 쿵쾅거리며 빨리 뛰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커다란 두 손을 들어 아이린의 두 볼을 감쌌다.

평소에 빵빵한 호빵 같은 아이린의 볼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큰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작은 것인지 두 볼을 감싸고도 여유가 남았다.

레온하르트는 그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 감싸인 아이린의 볼은 마치 마시멜로보다 더 말랑했다.

‘무슨 볼이 이렇게 보드랍고 말랑거리지?’

지금까지 여유 있게 아이린을 바라보던 레온하르트였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린의 볼을 만지는 그 순간 그의 가슴속 어딘가가 간질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심장이 조금씩 기분 좋게 콩닥거렸다.

‘그런데 이거 왠지 달콤할 것 같은데?’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마시멜로처럼 하얗고 달콤할 것 같은 아이린의 볼이 맛보고 싶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당황한 아이린은 얼른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안 돼요!”

그녀에게 볼을 잡힌 레온하르트가 불만스럽다는 듯 웅얼거리며 말했다.

“오가 안 돼(뭐가 안 돼)?”

“지금 하시려는 거 뭐든 다 안 돼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애가 올 한 닥오 그래(내가 뭘 한다고 그래)?”

“지금 제게 뽀뽀하려고 했잖아요? 아닌가요?”

레온하르트는 순간 당황했다. 아이린이 이렇게 돌직구로 물어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룩스 제국의 한 손에 꼽히는 검사인 만큼 아이린의 손쯤은 쉽게 떼어낼 수 있었다.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씨익 웃으며 레온하르트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지금 여기 아무도 없잖아!”

“아무도 없어도 밖에서는 이런 것은 안 돼요!”

“밖에서는 안 된다고?”

아이린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네!”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이린, 그럼.”

“……?”

“안으로 들어가서는 뽀뽀해도 되는 거야? 아니다, 키스까지?”

레온하르트는 말끝에 눈을 예쁘게 깜박거렸다.

남자답다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이 야릇하게 그녀를 유혹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요, 요물!’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안에 들어가서도 안 돼요!”

레온하르트는 삐진 듯 입을 쭉 내밀었다. 평소 그녀가 불만스러울 때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에잇, 이 남자가!’

“칫! 아이린, 그럼 난 잔다.”

“네? 갑자기?”

레온하르트는 벌러덩 누워 그녀의 다리를 베었다.

이윽고 그녀의 다리에 단단하고 따뜻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이린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온! 뭐예요? 얼른 일어나세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레온하르트는 오히려 그녀를 향해 돌아누우며 눈을 꼭 감았다.

“몰라, 나 베개 없으면 잠을 못 자. 이렇게 잘래.”

아이린은 순간 그의 말에 황당했다.

‘내가 그럼 베개니?’

“그럼, 얼른 베개가 있는 방에 가서 주무세요.”

아이린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살짝 고개를 움직이며 말했다.

“으으음, 업무시간에 방에서 잠들면 제이드에게 혼나.”

‘이 황태자님이 정말!’

“그럼, 업무시간에 여기서 이러는 건 괜찮고요?”

“응, 괜찮아! 여기서 잠드는 건 잠시 짬을 내 휴식하는 거잖아. 아 졸리다. 잠깐만 잘게.”

아이린은 요즘 들어 일이 많아진 그가 수면시간을 줄여 일하는 것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휴우, 알겠어요. 그럼 딱 15분만이에요.”

“응, 고마워.”

그렇게 말한 레온하르트는 아까와 달리 금방 잠이 들어 버렸는지, 금방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많이 피곤했나 보네.”

그때 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따뜻한 남쪽 나라인 룩스 제국의 한낮이었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그래서일까? 얼굴과 손끝에 닿는 바람이 제법 매섭게 느껴졌다.

잠든 레온하르트도 무의식중에 추웠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웅크렸다.

아이린은 얼른 그가 둘러준 재킷을 벗어 그에게 덮어 주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잠결에 짓는 미소였지만 그녀의 심장을 저격하기엔 매우 충분했다.

‘뭐야, 자면서 이러는 건 정말 반칙이잖아!’

그 순간 아이린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그리고 갑자기 배에 와 닿는 그의 따뜻한 숨결이 의식되었던 걸까?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살짝 숨을 고른 아이린은 지그시 그를 바라봤다.

옆으로 누워서인지 속눈썹은 더 길게 뻗어 보였고 콧날도 더 오똑해 보였다.

“…레온, 옆모습도 참 예쁘네.”

아이린은 홀린 듯 서서히 그의 얼굴에 검지를 뻗어, 그의 콧날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매번 야릇한 감정을 심어주는 눈물점도 살짝 매만져 보았다.

그 순간 아이린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 뭐야? 이거 혹시! 설마!’

그녀는 놀라서 벌어지는 입을 막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잖아!’

얼마 전만 해도 이 나라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그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일상에 서서히 스며들었나 보다.

그리고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혹시 나와 운명?’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아니다, 이 남자 원작에서 여주의 왕자님이었어. 그래, 마치 동화처럼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주인공.’

심지어 외전에서는 두 사람을 닮은 아이까지 여럿 낳아 다복하게 지내는 모습까지 보았다.

아이린은 순간 가슴이 저릿하더니 뻐근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얼른 뻐근하게 울려 오는 가슴 중앙에 손을 올려 눌렀다.

그리고 그를 바라봤다.

숱 많고 기다란 속눈썹.

베일 것처럼 날렵한 콧날.

지금은 잠들어서 감고 있지만,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에메랄드처럼 푸른 눈동자.

매 순간, 어느 한 곳도 아름답지 못한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남자가 매일 훈련하는데도 땀구멍조차 보이지 않는 거야! 나랑 너무 비교되잖아!’

아이린은 이곳에 와서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다웠던 여주가 레온하르트의 옆에 서서 웃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쩐지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머리가 흔들렸다.

‘나 뭐지? 설마 책 내용에 질투하는 거야?’

아이린은 머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서영으로서 25년, 아이린으로서 1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덕질 인생 그 자체였다.

즉, 최애는 있어도 현실의 사랑은 없었다.

그리고 최애를 다른 이들이 좋아한다고 질투를 해본 적도 없었다.

덕후에겐 자신의 최애가 가장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순간 최애인 제이드를 떠올렸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이 흐뭇했다.

그리고 곧 자신의 다리에 누워 있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이 사람을 봐도 벅차고 눈이 흐뭇하긴 마찬가지인데……. 나 뭘까?’

아이린은 어떤 영화 속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여자 주인공이 떠올랐다.

‘으악, 그런 막장은!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아니다, 이럴수록 릴렉스 해야 해. 후우.’

아이린은 흥분해 날뛰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겨우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그래, 그럼 두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있을까?’

아이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없이 아름다운 최애 제이드를 떠올렸다.

제이드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지난번과 같았다.

제이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물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저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 정도였다.

그리고 제이드의 목숨과 관련한 일들도 사실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특수 요원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그녀가 전쟁터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차라리 사람을 쓰거나 그의 친우인 레온하르트에게 미리 경고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제이드가 정 보고 싶을 때는 그의 얼굴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면 됐다.

직접 보고 싶다고 해도 예전처럼 큰 행사가 있을 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덕후로서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나고 제이드의 옆에 백합 같은 여주가 함께 한다면?

‘아! 그 모습은 정말 더없이 아름답지! 금상첨화인걸!’

아이린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운 두 사람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원작의 내용대로 레온하르트 옆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주가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데…….

‘으읍! 심, 심장이.’

순간 갑자기 심장이 바닥에 뚝 떨어지는 고통에 주먹이 꽉 쥐어졌다.

레온하르트와 그 옆에서 환하게 웃는 엘리자베스.

웹툰이나 소설로 볼 때만 해도 매우 흐뭇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함께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고 조여왔다.

그리고 무언가 목을 타고 머리끝까지 확 하고 올라가는 압박감이 들었다.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였다.

‘괜찮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어 고통스러운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시원한 바람이 다시 한번 불어왔다.

머리끝까지 올랐던 열기가 한차례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단순히 숨을 내뱉는 작은 행동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속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레온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봉긋하게 올라온 이마.

한 번씩 파르르 떨리는 곧게 뻗은 긴 속눈썹.

날렵한 콧대.

그리고 얇지만 체리를 머금은 듯한 입술까지!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떡하지, 나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나 봐!’

그를 좋아하게 된 마음을 의식하게 돼서일까?

마치 그녀의 심장이 여러 개라도 된 듯 그와 맞닿아 있는 모든 부분이 콩닥거리는 것 같았다.

‘정말 이 남자 심장에 나쁘다.’

물론 이전부터 레온하르트가 남자 주인공답게 아름다운 것은 알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근육질의 몸매.

그녀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몸집.

남자답게 커다란 손과 발.

그리고 그와 상반되게 얇고 붉은 입술.

그리고 웃을 때마다 이상야릇한 느낌을 자아내는 눈물점까지.

그의 몸 곳곳이 하나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태자 레온하르트.

그는 다이아몬드 원석이 아니라 이미 아름답게 가공된 보석 같았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으니까.

겉으로 보이는 외모조차 그런데 그의 내면은?

이미 100점 만점에 100점이었다.

일하는 집무실에 그녀의 당 충전을 위해 디저트 한 상 차려 주는 것을 보면서 뭘 더 말하겠는가?

‘그런데 그도 날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아이린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여느 집 막내 여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동그란 얼굴, 이목구비와 손발.

어느 하나 귀엽지 않은 곳은 없었다.

어두운 계열의 드레스를 입어 귀여움을 숨겨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드레스와 얼굴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귀여움을 부각한다고 레이스 달린 밝은색 드레스를 입는다면?

일할 때 신뢰감이 뚝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검정 드레스를 입은 그 모습조차 마치 엄마 드레스를 입은 아이 같아서 귀여움을 배로 더하고 있는 것을!

그때 그녀의 배를 향해 모로 누웠던 레온하르트가 몸을 뒤척이며 똑바로 누웠다.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그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맺혔다.

그런 레온하르트의 미소에 따라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그의 눈물점이 움직였다.

다른 사람이었으며 무릎 위에 누군가 누워있을 때 꽤 거리가 있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키가 155정도이다 보니 상체가 매우 짧은 편이었던 것이다.

‘후, 으윽. 너무 가까워!’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수려한 얼굴이 그녀의 눈 속에 클로즈업된 듯 콕 하고 박혀버렸다.

‘어쩌지, 이렇게 더 있다간……!’

아이린은 고개를 돌려 보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그의 눈물점에 눈이 가고 말았다.

그녀의 심장이 점점 위험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윽, 정말 위험해!’

아이린의 이성은 점점 어딘가로 유영하듯 날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마치 블랙홀에 빨려가듯 고개를 서서히 내렸다.

곧 레온하르트의 눈가에 자리 잡은 작은 눈물점 위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닿았다.

그때였다.

실크 커튼 같이 닫혀 있던 레온하르트의 긴 속눈썹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헉!”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올라가려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이린의 얼굴은 그의 커다란 두 손에 갇히고 말았다.

둘의 시선이 코가 거의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얽혔다.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의 손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순간 당황한 아이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그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아이린은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 저 저기 그게 말이에요.”

“내 입술은.”

“……?”

“그곳이 아니야. 이곳이지!”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얼굴을 감싼 채 그의 입술로 그대로 내렸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린은 순간 중심을 잃고 그의 손길에 딸려 가고 말았다.

아이린은 점점 가까워지는 에메랄드 같은 눈을 더는 마주할 수 없었다.

‘나 어떡해!’

그녀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순간 그녀의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린은 그가 움직임을 멈춘 듯한 느낌에 눈을 조심스레 떴다.

그 순간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닿아 있지만 않을 뿐, 레온하르트의 잘생긴 얼굴이 아까처럼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눈빛으로.

“후후, 이제 눈을 떴군. 보고 싶었어. 네 눈동자.”

‘으아아! 눈동자가 보고 싶다니! 이거 나에게 하는 말 맞아? 손발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아!’

그때 그녀의 말랑한 볼에 무언가 말캉하고 촉촉한 것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달콤한 디저트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

“역시 달콤하네.”

“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이린을 자신의 두 팔 사이에 가두었다.

아이린은 뒤로 물러나고 싶었다. 하지만 등에 벤치 등받이가 닿아 더 물러날 수도 없었다.

“어! 누가 보면……!”

레온하르트는 눈썹을 휘며 말했다.

“누가 봐도 괜찮아!”

“네?”

아이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하지만 그녀는 물을 수 없었다. 곧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후 매우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물을 수 없었다.

* * *

똑똑.

“들어오지 않고 갑자기 무슨 노크야, 아이린?”

레온하르트는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선 사람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메르헨의 공주시군요.”

엘리자베스는 그런 레온하르트에게 눈을 접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풍성한 치마를 양손으로 살짝 잡아 올렸다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니다. 메르헨의 공주 엘리자베스입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집무실엔 무슨 일인가요?”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레온하르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업무가 바빠서요.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제 보좌관을 통해 부탁드립니다.”

그녀에게 말을 끝낸 레온하르트는 손잡이를 당겼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급하게 말했다.

“아이린 비서관님과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레온하르트는 그때서야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그를 향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살짝 처진 눈꼬리를 접으며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레온하르트에겐 아무 감흥이 없었다.

‘답답하게 저런 드레스를 왜 입고 다니는 거지?’

아이린에게 모든 기준이 맞춰져서인지, 그는 엘리자베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코르셋으로 꽉 조였는지 엘리자베스의 허리는 기하학적으로 가늘어져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가슴이 부담스럽게 강조되었다.

그리고 드레스 안에는 얼마나 큰 크리놀린을 찼는지 치마가 종처럼 퍼져 성인 세 명도 들어갈 것 같았다.

‘뭐, 이해할 필요도 없지.’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태도를 잊지 않고 그녀의 풍성한 치마를 위해 문을 활짝 열었다.

“잠시, 들어오십시오.”

엘리자베스는 치마를 살짝 들었다 내리며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집무실에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아이린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신다는 건가요?”

엘리자베스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는데, 따뜻한 차 한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 다실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그는 금방 차 한 잔을 들고 나와서 그녀 앞에 놓았다.

“허브 차입니다.”

레온하르트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까지 직접 찾아온 의도가 불순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잔을 들어 후후 불더니 한 모금을 음미하며 말했다.

“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이곳에 온 것은 단지 직접 말씀드리는 쪽이 비밀이 지켜질 것 같아서예요.”

그녀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아까보단 경계심을 풀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피도르 후작 영애를 아십니까?”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이 아이린 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어쩐지 나쁜 예감이 들어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피도르 영애가 그녀를 언제 봤다고요?”

“두 분이 정원에 있을 때 봤습니다. 그때 많은 영애와 저는 정원을 산책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요.”

“그렇게 된 일이군요.”

‘아이린이 밖에서 조심하자고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는군.’

그때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두 분이 혹시 연인이십니까?”

레온하르트는 더없이 귀족적으로 보이는 그녀가 돌직구로 던져오는 질문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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