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공주께 제가 그걸 대답할 의무는 없군요.”
엘리자베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메르헨에 있을 때도 궁금한 것을 못 참고 솔직한 성격 때문에 어머니의 속을 썩였답니다.”
“그렇군요.”
엘리자베스는 경계가 조금씩 풀리는 듯한 레온하르트의 표정에 눈매로 호선을 그렸다.
그런 그녀에게 레온하르트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일부러 말씀해 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인걸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표정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음부터 이런 이야기는 저의 보좌관을 통해 부탁드립니다.”
“네?”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에 순간 당황하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가면 이렇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직접 오시면 공주님께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붙을까 두렵습니다. 자, 문은 이쪽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했다.
그러나 곧 그를 향해 돌아서며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저에게 보답을 주십시오.”
“보답이라? 어떤 보답을 말씀하십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를 향해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큰 것은 아닙니다.”
레온하르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그녀는 그의 딱딱한 말투에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가까운 시일에 저를 사자궁 정원에 데려가 주시길 바랍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사자궁 정원은 왜 가고 싶은 것입니까?”
아이린은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사자궁 정원의 온실에 제가 매우 좋아하는 백합이 피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구경을 하고 싶지만, 황족의 인도가 아니면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이유라면 내일이라도 잠시 시간을 내 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기쁜지 눈을 사르르 접으며 말했다.
“내일 시간을 내주신다니! 정말이십니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업무시간 중에는 어렵고 1시쯤 잠시 짬을 낼 수는 있겠군요.”
“네, 신년제 준비로 바쁘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신다니 정말 감사해요.”
엘리자베스는 양손으로 치마를 잡으며 살짝 들었다가 놓았다.
레온하르트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는 제가 업무를 봐야 해서요.”
“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엘리자베스가 문을 향해 몸을 돌리자 드레스가 꽃을 엎어 놓은 듯 핑그르르 돌며 춤을 췄다.
그녀가 나가고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이린도 저렇게 치마가 찻잔처럼 거대하게 펴진 드레스를 좋아하려나?”
엘리자베스가 입은 드레스는 분명 영애들 사이에 유행하는 드레스였다.
레온하르트는 평소 여인들의 드레스에 관심이 없었다.
황궁 곳곳의 영애들과 귀족 부인들은 허리를 조이고 치마는 넓게 퍼지는 형태의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공주로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활동하기 좋아하는 그가 공주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매일 불편한 차림으로 외출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린이 그런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드레스의 색깔조차도 어두운색을 즐겨 입었다.
‘아니지, 처음 펍에서 만났던 그 날은 붉은 드레스였어!’
레온하르트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는 마치 파티에 온 것처럼 몸매가 드러나는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열띤 토론을 하던 그날의 아이린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곳이 직장이라서 그런가?’
예전에 있던 보좌관실의 여직원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도 처음에는 아이린과 비슷하게 일하기 편한 복장으로 다녔다.
하지만 곧 황궁 영애들의 영향으로 점점 화려한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다른 부서로 전출을 가거나 황궁 시녀로 전직하는 직원이 대부분이었다.
‘슈트를 즐겨 입는 쥴리언을 빼고는 모두 그만뒀었지.’
표면적인 이유는 각각 달랐으나 내면적인 이유는 같았다.
드레스를 입기 시작하면 그녀들은 꾸밀 시간, 쇼핑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보좌관실은 잠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이린도 그만둔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직원을 충원해야겠어.’
“그런데 드레스를 입은 그 모습 다시 보고 싶다. 선물해 줄까? 그럼 그녀가 출근할 때 입을까?”
생각하던 레온하르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무리 예쁜 드레스를 선물한다고 하더라도, 편한 걸 좋아하는 아이린은 지금의 드레스를 입고 출근할 것 같았다.
“아차! 신년제 파티가 있었지!”
신년제가 이뤄지는 4일 동안 황궁에서 파티가 열린다.
약혼자가 없어 매번 혼자 입장했던 그였다.
때문에 아이린도 그날 함께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은 아이린도 파티 드레스를 입겠지?’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아이린을 떠올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떨려왔다.
‘후후, 아이린이 어떤 드레스를 입으면 예쁠까? 예쁜 찻잔처럼 퍼지는 드레스? 그날처럼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
레온하르트는 펍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늑대들의 눈빛이 떠올라 급히 고개를 저었다.
‘몸매는 좀 덜 드러나는 게 좋겠어. 아니다. 그전에 피도르 가문부터 정리해야겠지!’
피도르 후작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도 불법적인 일을 밥 먹듯 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동안 놓아둔 것은 후작이 황후파의 핵심 인물이기 때문에 천천히 그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서였을 뿐이다.
‘아이린까지 건들기 전에 손봐줘야겠군. 이제 황후파의 자금줄을 끊을 때가 되었어.’
그렇게 엘리자베스의 방문은 그녀의 의도와 다르게 아이린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아이린은 멍하니 도서관으로 향하는 정원을 걷고 있었다.
어제 잠시 그녀가 보좌관실을 방문했다가 돌아왔을 때였다.
레온하르트의 집무실에서 엘리자베스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이린은 얼른 기둥 뒤에 숨었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린은 기둥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그들을 보았다.
모델 같은 몸매에 사람들의 연민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요즘 영애들 사이에 유행하는 은은한 아이보리색의 폭넓은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
그리고 그 앞에 남주인 레온하르트가 우아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한 폭의 화보 같았다.
아이린은 더는 볼 수 없어 다시 보좌관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대로 차장에게 허락을 구하고 조퇴를 했다.
그렇게 집으로 온 아이린은 곧바로 책상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원작 내용을 적어 놓은 노트였다.
“역시 원작대로인가? 아니야! 원작대로라면 그들의 첫 만남은 신년제부터였어.”
그들의 만남이 원작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원작의 시작이 한 달이나 이르게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거잖아. 이미 레온하르트와 그녀의 운명은 시작되고 있는 것일까?”
아이린은 어쩐지 마음이 아파 왔다.
“아니야, 올 게 온 거야.”
아이린은 그들이 원작의 장기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울고 말았다.
그렇게 밤새 울고 새벽녘에 겨우 잠든 아이린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두 눈덩이가 잘 익은 살구처럼 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으악, 나 어떡하지! 오늘 출근하지 말까?”
하지만 그녀는 어제도 조퇴하고 나온 참이었다.
아무리 멘붕에 빠졌어도 오늘은 출근을 해야 했다.
“얼음도 없고!”
아이린은 얼른 욕실로 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하지만 그다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가려 보자!’
아이린은 어쩔 수 없이 평소 입던 검은 드레스에, 일할 때 쓰는 안경을 쓰고 베일이 달린 검은 모자까지 썼다.
괴상할 거라고 상상은 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예상보다 더 괴상했다.
“으악!”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것이, 귀신이 따로 없었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도 경비병들의 검문에 걸렸고, 간신히 들어가서도 황태자궁까지 향하는 내내 사람들이 슬금슬금 그녀를 피했다.
‘도저히 황태자 전하 집무실로는 못 가겠어.’
그때 옆에서 하이 톤의 비명이 들려왔다.
“끼아악!”
시녀의 목소린가 하고 돌아보니 사수인 토마스가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그때 비명을 들은 선배들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 짠 듯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누, 누구십니까? 설마 사신?”
“우리 단체로 사신에게 끌려가는 거야?”
“그럼, 우리 과로사로 죽은 거였어?”
“으아악,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밤새워 일한 거야!”
“끔, 끔찍해. 몰라, 나 지금이라도 집에 갈래!”
아이린은 연타로 뼈를 때리는 선배들의 말에 놓았던 정신을 겨우 차리며 말했다.
“저예요.”
“어? 사신의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그때 사무실에서 차장이 나오며 말했다.
“다들 뭐 하는 겁니까? 얼른 업무들 시작하세요!”
그때 쥴리언이 주먹을 쥔 오른팔을 앞뒤로 흔들며 외쳤다.
“으악, 악덕 차장! 일하다 죽었는데도 업무를 시키는 악덕 차장 물러가라!”
토마스는 차장의 옆에 서서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헉, 차장님. 설마 저 사신한테도 일을 시키려는 거예요?”
“역시 차장님은 악덕 상사 중에서도 최고이십니다.”
그때 차장이 혀를 차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요즘 업무량이 많이 줄었나 봐요. 이렇게 농담할 시간도 있고. 얼른 들어와 업무들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아이린 토트 씨!”
“뭐? 아이린?”
아이린은 머쓱해 하며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네!”
차장은 곧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모자를 가리켰다.
“업무시간에 모자는 규율에 어긋납니다. 미리 숙지하세요.”
‘헉, 차장님에게서 사장님 스멜이?’
“알겠습니다. 사, 아니, 차장님.”
“알겠으면 얼른 들어오세요. 제 책상에서 서류들 더 가져가시고요.”
그때 토마스가 소리쳤다.
“으악! 나 죽은 거 아니었어? 진짜로?”
쥴리언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뭔가 계속 끝나지 않는 이야기 같아! 마치 영원불멸의 서류 지옥에 빠진 것처럼…….”
차장은 살짝 정신이 나간 듯한 그들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이내 그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분발하세요. 곧 그 서류 지옥에서 구원받을 겁니다.”
“언제요? 오늘요? 내일요?”
“어제 황태자 전하의 명령으로 직원 모집 공고를 아카데미에 보냈습니다.”
의기소침해 있던 아이린은 순간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정말요?”
그때 복도에 쓰러져 있던 토마스가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아이린, 너 완전 좋겠다. 나는 네가 들어오기 전까지 3년이나 막내였는데.”
쥴리언이 아이린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막내 왜 오늘 상갓집 복장이야? 혹시 누가 돌아가셨어?”
“아니에요. 그냥 어제 좀 슬픈 소설을 읽다 눈이 부어서요, 헤헤…. 죄송해요.”
“어디 좀 봐봐!”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모자를 벗었다.
“으헉!”
“으아악!”
쥴리언이 말했다.
“아이린, 이건 운 게 아니라 맞은 정도인데!”
토마스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혹시 누가 때린 거야?”
아이린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그때 차장이 얼음주머니를 들고 와 말했다.
“아이린 씨, 잠시 자리에 앉아 눈 좀 가라앉히고 업무 시작하세요.”
“감사합니다.”
차장의 찌릿한 눈빛에 자리로 돌아가던 토마스가 말했다.
“아이린! 다음부터는 재미있는 소설만 읽도록 해. 소설 두 번 읽다가는 앞도 안 보이겠다.”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선배님!”
모두 자리로 돌아가고 조용히 업무가 시작되었다.
아이린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얼음주머니를 눈두덩이에 살짝 올렸다.
‘휴……. 오늘도 황태자 집무실에 가야겠지. 실장님의 휴가가 아직 두 달은 더 남았는데. 어쩌지?’
아이린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두 주인공을 보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두렵기까지 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무책임하게 도망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제이드 님만 무사해지면 생각했던 대로 떠나는 거야.’
아이린은 긴 한숨을 쉬었다.
비서관이라는 업무 특성상 레온하르트와 매일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썸남이었던 사람이 다른 여자랑 썸 타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니! …하지만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알고는 있었잖아.’
아이린은 슬쩍 고개를 들어 선배들 쪽을 바라봤다.
업무가 많은지 다들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이린은 조용히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멍하니 얼음주머니를 눈두덩이에 굴리며 집무실에 다다랐을 때 제이드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아이린 씨?”
아이린은 얼른 얼음주머니를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이드 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네, 비서실에요. 그런데 아이린 씨, 몸이 안 좋은가요?”
아이린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니요. 그냥 어제 소설 좀 보다가 울어서 그래요.”
제이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설이요?”
아이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이드는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떤 내용인데요?”
아이린은 잠시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입을 열었다.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짝사랑을 하는데요. 끝내 사랑을 못 이루는 내용이었어요.”
“슬픈 내용이네요.”
“네.”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떨구며 그의 발끝을 바라봤다.
그런 아이린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이드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씨!”
“네!”
“그 소설, 더는 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린은 고개를 다시 푹 숙이며 말했다.
“업무에 지장을 주어 죄송해요.”
제이드는 어쩐지 그녀의 모습에 여동생이 떠올랐다.
‘살아 있다면 이 정도 나이겠지.’
어린 나이에 뒷배가 되어 주는 가족도 없이 고군분투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제이드는 천천히 고개 숙인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작은 그녀는 그의 품 안에 폭 안겼다.
순간 아이린은 매우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서 전해오는 따뜻한 온기에 시린 마음이 감싸지는 듯했다.
그녀는 제이드의 품에 살짝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저는 아이린 씨가 이미 아는 소설의 내용을 다시 읽으며 아프지 않았으면 해요.”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소설에는 당신의 죽음도 있어요.’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슬그머니 그의 품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에게 알겠다는 듯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는 그런 그녀를 향해 눈썹을 활처럼 휘었다.
그리고 그녀를 응원하듯 깊고 아름다운 눈을 빛내며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내요! 아이린 씨!”
제이드의 미소에 이은 감미로운 목소리의 2연타.
아이린의 정신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불가항력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제이드는 친절함의 대명사답게 항상 미소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저렇게 순수하게 환하게 웃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이린의 머릿속까지 순간적으로 꽃밭이 될 지경이었다.
‘으앗, 뭐야? 이 개연성 없이 폭발하듯 솟아오르는 덕심은!’
아이린은 지하로 땅굴을 파고 내려가던 기분이 지상으로 올라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우주로 쏘아 올라가는 로켓에 탄 것처럼.
‘으아아! 저 미소 지켜주고 싶다.’
그 순간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하얗고 긴 손을 모아 잡았다.
제이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잡힌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다시 환하게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거짓은 조금도 없이, 세상의 겨울을 모두 없앨 것 같이 눈이 부시게 따뜻한 미소였다.
아이린은 그의 미소에 성스러워지고 거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동안의 무거운 짐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 그동안 너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어. 나 참! 여긴 현실도 아닌데 왜 그랬지? 그래, 그리고 나 황궁에 성덕 되러 온 거였잖아!’
아이린은 그 순간 머리에 무언가를 쾅 하고 맞은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은 상상 속에서만 만나던 최애캐가 눈앞에서 숨 쉬고, 말하고, 웃고 있는, 더없이 복에 겨운 상황이었다.
어쩐지 힘들어하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아이린, 너 정말 바보였네. 그래, 이렇게 된 거 맘 놓고 덕질을 하자! 덕질할 시간도 부족한데 다른데 한눈팔 시간이 어디 있어!’
아이린은 그에게 마주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힘이 났어요. 제이드 님, 정말 감사해요.”
제이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 씨, 기운을 차렸나 보네. 다행이다.’
제이드는 곧 그녀에게 살짝 묵례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 그녀가 걸어오던 길을 향해 걸어갔다.
제이드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그 순간 아이린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다.
‘미안해요, 제이드 님. 그동안 제 이기심으로 당신의 죽음을 외면하려 했었어요. 하지만 더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제이드 님, 당신을 꼭 살리고 말겠어요.’
그때 집무실을 향해 걸어오던 레온하르트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뭐…뭐지?’
그리고 이내 도망치듯 다시 돌아서 오던 길 그대로 밖을 향해 빠르게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멍하니 걷다 보니 벤치 하나가 보여 털썩 주저앉았다.
‘왜지? 제이드가 아이린을? 아, 아닐 거야. 그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 위로해준 것일 거야.’
레온하르트는 오른손을 올려 머리를 흩뜨렸다.
‘뭐지? 무슨 일인 거야, 아이린. 나는 왜 네게 물어볼 수가 없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한참을 벤치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두통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한 손을 올려 머리를 잡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런데 진한 장미 향이 밀려와 그의 폐부를 찔렀다.
아름다운 것을 넘어 독한 향기에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엘리자베스였다.
“이곳에 계셨군요.”
그 향과는 상반되게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보니 기사단의 휴식 시간에 부하들이 떠들던 것이 떠올랐다.
‘사교계의 순결한 백합이라고 했던가?’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일어나 살짝 묵례를 했다.
드레스는 순수한 하얀색이었으나 그 디자인은 매우 화려해 보였다. 치마 부분의 널따란 폭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지 부담스러워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쩌면 또래 아가씨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화려한 드레스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매일 남자들만 가득한 기사단 생활에 익숙한 그였다.
그래서일까? 불편할 정도로 폭이 넓은 저 치마는 정말 이해 불가였다.
게다가 평소 편하고 수수한 디자인을 즐겨 입는 아이린과 함께해서인지 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왜인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부하들이 엘리자베스를 왜 그렇게 찬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여긴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무뚝뚝한 대답에 잠시 멈칫하던 엘리자베스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의 약속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어제의 약속? 무슨 약속 말입니까?”
‘내가 어제 저 여자랑 무슨 약속을 했던가?’
“네, 어제 사자궁 정원에 데려가 주신다고…….”
엘리자베스의 눈꼬리가 울음을 참는 듯이 살짝 내려갔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모습에서 계모인 황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황후는 매우 가식적인 사람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레온하르트를 온화하게 대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저런 식으로 그를 곤란하게 하곤 했었다.
처음에는 그 또한 황후의 그런 모습에 속아 죄책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자라나면서 황후의 겉모습은 꾸며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황후의 시선 속에서 희미한 적의를 느낄 수 있게 되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앞에서 울거나 동정심을 구하는 여자들을 멀리했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금 가도록 하죠.”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돌아 사자궁을 향해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그의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
‘어? 레온하르트! …엘리자베스 공주!’
점심을 먹으러 벤치로 걸어오던 아이린은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는 레온하르트를 보게 되었다.
아직 어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아이린은 두 사람의 모습에 가슴 한쪽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저쪽은 사자궁으로 가는 방향인데.’
아이린은 사자궁에 화려한 장미 정원이 있다는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함께 산책하러 가는 걸까?’
아이린은 그렇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도 아직 못 가 봤는데…….’
그때 엘리자베스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말에 앞서 걷던 레온하르트가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곧 엘리자베스의 걸음에 보폭을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역시 두 사람이 주인공이구나!’
아이린의 눈에는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모습조차 그림을 그린 듯 아름다워 보였다.
‘내, 내가 진짜 방해꾼이었구나.’
아이린은 순수해 보이면서도 요즘 아가씨들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현대에서 살아온 그녀로서는 치마폭이 과하게 넓은 디자인이 어색했었다.
하지만 여주인공인 엘리자베스가 입으니 꽃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이린은 상복 같은 자신의 검은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남자라도 엘리자베스를 더 좋아하겠어.’
아이린은 현실을 자각하고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도시락을 슬쩍 바라본 아이린은 그대로 도서관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레온하르트는 사자궁 정원에 엘리자베스를 데려다주고 얼른 달려왔다.
어깨가 축 처진 채 힘없이 걸어가는 아이린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 저렇게 힘이 없는 거지?’
“아이린!”
그녀를 불러 보았지만 못 들은 것인지 대답이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 * *
「에드먼드, 넌 꼭 황제가 되어야 한다!」
황후의 말에 7살의 에드먼드가 소리쳤다.
「어머니, 전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형이 있잖아요!」
「너 뭐라고 하였니?」
황후는 마치 원수라도 보듯 살기를 띤 눈빛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크게 올려 그의 뺨을 내리쳤다.
짝!
어린 에드먼드는 그대로 날아가듯 바닥에 쓰러졌다.
이렇게 황후인 어머니에게 맞는 것은 처음이었다.
벌겋게 볼이 부어오른 에드먼드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눈빛으로 황후를 바라봤다.
그때 얼음보다 차가운 황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다시 말해 보아라!」
에드먼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이내 소리쳤다.
「저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황후는 옆에 서 있던 시녀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감히 이 나라 황후인 내게 소리치다니! 황자,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너희들은 가서 채찍을 가져오너라!」
그때 그들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드먼드의 유모 메어리가 얼른 에드먼드를 자신의 뒤로 감췄다.
「황후마마, 아직은 어리신 황자님이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순간 황후는 미친 듯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정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럼, 황자 옆에서 잘못 보필한 메어리 너에게 죄를 물어야겠구나!」
그 순간 모두 숨을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놀란 에드먼드는 유모 뒤에서 나와 정적을 깨고 소리쳤다.
「안 돼요! 어머니!」
메어리는 황후의 유모이기도 하기에 이미 고령이었다.
그걸 떠나 황후에게도 엄마 같은 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벌을 준다고 하는 것일까?
황후의 옆에 시녀들은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시녀가 채찍을 가지고 들어왔다.
황후는 채찍을 받아들고는 메어리를 향해 내리쳤다.
「으헉!」
나이가 지긋한 메어리는 갑작스런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유모!」
그때 황후가 채찍을 고쳐 잡으며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황자를 잡아라!」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황후는 이내 황자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소가죽으로 만든 채찍은 철썩 소리와 함께 메어리의 등에 큰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메어리는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 황자는 보아라! 다 네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다!」
철썩!
「안 돼!」
그렇게 에드먼드의 비명과 함께 채찍을 내리치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그만 하세요!」
쓰러지듯 엎드린 백발의 메어리의 등에 핏물이 점점 짙게 맺히기 시작했다.
황후는 여인의 힘을 넘어선 것 같았다.
채찍을 내리치는 소리만 들어도 황궁 안에서 한 발자국 나가지 않은 여인이라고 보기에 힘들 정도였다.
그런 황후의 채찍을 오래 견디기 힘들었던 메어리는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채찍에 쓰러진 메어리를 보며 소리치던 에드먼드 또한 그대로 까무러치듯 쓰러지고 말았다.
황후는 입가에 머물던 웃음기를 싹 지워 버리고 피가 묻은 채찍을 시녀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서 걸어가며 말했다.
「치워라!」
시녀들은 얼른 두 사람을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황후는 그대로 조소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내 말을 거역하는 것들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게 자식이든, 부모든……!」
방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으나, 메어리는 결국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에드먼드는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그날로 황후의 친정에 있는 살수 집단으로 보내졌다.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는 황궁의 행사가 있을 때만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린 아들을 살수 집단에 보낼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 또한 에드먼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외가에 보냈다는 말 하나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황후의 학대는 그녀의 기분이 나쁠 때마다 계속되었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철썩.
황후는 채찍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꼴 보기 싫구나! 나가거라!”
에드먼드의 하얀 셔츠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에드먼드는 잠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화를 자신의 등에 풀어놓고선, 정작 그녀의 얼굴이 더 초췌해 보였다.
손을 짚고 있던 의자에 걸어 둔 재킷을 걸친 그가 조용히 황후의 방을 나섰다.
에드먼드는 습관적으로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몸집이 커지면서 반항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같은 유모를 잃으며 황후인 어머니를 원망했다.
이유 없는 학대에 아프고 무서워 도망을 치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품에 안고 목 놓아 울던 어머니를 왠지 그냥 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외가를 오가면서 알게 되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의 계략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마음이 병들었음을.
그래서 에드먼드는 자신의 어머니가 폭주할 때마다 그저 등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한바탕 풀고 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하지만 나아진 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눈빛은 광기로 물들었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일까?
에드먼드는 오늘따라 유독 갑갑함을 느꼈다.
땅을 보며 멍하니 걷던 그는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때 그와 같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린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에드먼드는 아이린과 멀리 떨어진 나무 뒤에 숨는 레온하르트를 보았다.
‘왜 숨지? 몰래 따라오고 있었던 건가?’
에드먼드는 평소 당당한 모습과 다른 형님의 모습에 황당했다.
어린 시절 함께 숨바꼭질을 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둘은 매우 친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황후로 인해 둘 사이에 골이 만들어졌지만.
그렇게 점점 벌어진 사이인 만큼 서로의 진실한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어릴 때만 해도 친했었는데….’
어쩐지 더는 자신에게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심통이 났다.
에드먼드는 슬쩍 아이린의 뒤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크게 불렀다.
“아이린!”
아이린은 갑작스럽게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얼른 에드먼드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그에게 말했다.
“에디!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에요?”
에드먼드는 주변을 의식하는 그녀를 보며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처럼 속삭였다.
“그게… 보고 싶은 책이 있어서. 그런데 아이린은 이 시간에 도서관엔 무슨 일이야? 점심은 먹었어?”
아이린은 도시락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이에요. 에디는요?”
에드먼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나는 벌써 먹었지. 하하.”
그때였다.
에드먼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거짓말을 알리듯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은 순간 웃음이 터졌다.
“풉!”
에드먼드는 민망한지 배에 손을 가져가며 얼굴을 붉혔다.
“에디, 배꼽시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아요. 날 따라와요.”
“……응.”
아이린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에드먼드는 레온하르트가 숨어 있는 나무 쪽을 슬쩍 바라본 뒤 피식 웃으며 아이린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아이린은 직원에게 살짝 묵례를 하고 열람실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은 얼른 일어나 아이린 뒤에 걸어오는 에드먼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린이 에드먼드를 데리고 간 곳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도서관의 창가였다.
여전히 그곳은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원래 위치도 외진데다 오래된 고서와 법전들만 잔뜩 모여 있기에 더더욱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였다.
아이린은 창문을 살짝 열고 주변을 슬쩍 살폈다. 그리고 창가 앞 테이블에 도시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에드먼드를 향해 돌아서며 속삭였다.
“이쪽으로 앉아요.”
하지만 에드먼드는 뭔가 망설이는 듯이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에드먼드의 팔을 살짝 잡고 당겼다.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그 순간 에드먼드는 등 쪽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윽, 상처가 옷에 쓸렸나 보군.’
에드먼드는 아이린을 향해 애써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통증이 컸는지 여전히 미간은 찌푸린 채로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어? 어디가 아픈가?’
아이린은 순간 소설 내용 한 부분이 떠올랐다.
에드먼드가 황후에게 어릴 적부터 학대당했다는 그 부분.
외전에서 아주 잠깐 나온 내용이라, 반복해서 읽지 않았다면 기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이린은 에드먼드가 등을 살짝 굽힌 채 어색하게 선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얼른 그의 뒤로 돌아가 재킷과 셔츠를 한 번에 올렸다.
순간 놀라 눈이 커진 에드먼드가 얼굴을 붉혔다.
한편 아이린은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한 그의 등에 피맺힌 상처들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지?’
아이린은 얼른 자신의 가방에서 손수건과 약을 꺼냈다.
그녀가 손을 뗐는데도 에드먼드는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이리 앉아 봐요.”
에드먼드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의자에 앉았다.
이내 아이린은 다시 그의 셔츠를 들어 올렸다.
에드먼드는 이번에는 얼른 셔츠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아, 아이린!”
아이린은 얼른 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쉿! 소리치면 어떡해요. 이러다 누가 오겠네. 부끄러워하지 말고 얼른 이쪽으로 등을 대봐요.”
에드먼드는 얼굴에 열기가 확 몰리는 것을 느끼며 얼른 등을 돌렸다.
아이린은 귀 끝이 빨개진 에드먼드를 보며 귀여워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 웃으면 안 되는데 왜 이리 귀여운 거야! 이렇게 대형견같이 귀여운데 어떻게 흑막이라는 건지.’
미소를 짓던 아이린은 이내 그의 상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얼른 깨끗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고 연고를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때 에드먼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다쳤는지 묻지 않을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덤덤히 말했다.
“에디가 말하고 싶었으면 벌써 말했겠죠.”
아이린은 올라간 그의 셔츠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자! 다 됐어요.”
에드먼드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 고마워, 아이린.”
아이린은 머쓱한 기분에 도시락에서 구운 감자 하나를 꺼냈다.
“이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먹어봐요. 식기는 했어도 맛있을 거예요.”
에드먼드는 그녀가 내민 감자를 보더니, 순간 놀라 소리쳤다.
“어! 이건 악마의 열매잖아!”
아이린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헉, 뭐야! 감자가 얼마나 맛있는 건데.’
“악마의 열매라니요? 얼마나 맛있는데.”
아이린은 에드먼드에게 주려던 감자에 케첩을 찍으며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으음, 역시 감자에는 케첩이 진리지.’
에드먼드는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 안 돼, 아이린! 먹으면 죽는다고!”
아이린은 순간 이곳이 도서관인 것을 잊고 대폭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푸하핫! 먹으면 죽는다뇨? 살면서 감자 먹다 죽은 사람 한 명도 못 봤어요. 맛만 좋은데.”
에드먼드는 아이린이 말리는 그를 신경도 쓰지 않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또 한 번 그의 뱃속에서 음식을 달라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저 열매가 그렇게 맛있나? 혹시 맛있어서 그런 소문이 돈 건가?’
에드먼드는 그녀가 감자를 먹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아이린은 작은 감자 하나를 케첩에 찍어 그에게 내밀었다.
“에디, 얼른 하나 먹어 봐요.”
에드먼드는 고민하듯 그녀와 감자를 번갈아 보았다.
“아님 내가 다 먹어요!”
그 순간 에드먼드는 마치 뱀의 유혹을 받는 이브처럼 그녀가 내민 감자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감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작게 한 입 깨물었다.
새콤달콤한 케첩과 속이 포슬하게 익은 감자는 그야말로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세상에, 이런 맛이! 설마 정말 맛있어서 악마의 열매로 불렸던 건가!’
아이린은 에드먼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감자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에드먼드의 표정을 보니 아까의 음울한 기운도 가신 듯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던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 힘든 일은 맛난 걸 먹으면 좀 나아지지.’
그녀는 자신 또한 기분이 나아진 것을 느끼며 손에 들고 있던 감자를 입 안에 쏙 넣었다.
어느새 그녀의 도시락통이 텅텅 비었다.
원래 그녀의 점심으로 싸 온 것이기에 감자는 네 덩이 정도였다.
에드먼드는 아쉬운 듯 빈 통을 바라보았다.
“후후, 맛있죠?”
“응, 악마의 열매가 아닌 천상의 열매 같았어. 그런데 난 분명 감자는 독이 있다고 배웠는데 어떻게 아무 탈이 없지?”
“싹이 난 부분만 살짝 도려내고 먹으면 괜찮아요.”
“싹이 난 부분만?”
“네, 싹 난 부분에 독성이 있어서 탈이 날 수 있는 거예요. 먹는 방법만 알면 아주 착한 음식이에요. 건강에도 좋구요.”
에드먼드는 감자에 관해 알고 있던 사실이 단지 제국에 퍼져 있는 괴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 몰랐던 사실이야. 왜 이렇게 맛있는 열매가 악마의 열매가 되었는지 모르겠어.”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룩스 제국은 신전을 숭배하는 나라도 아닌데 감자를 왜 악마의 열매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이유 난 알 것 같아.”
“……?”
에드먼드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대부분 귀족들은 땅속에서 나오는 작물이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보통 땅속에 묻히는 건 시체들이니까.”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시체고요. 밭에서 나는 채소를 시체와 동일시하다니! 참 바보 같고 무지한 생각이에요.”
에드먼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린의 말이 맞아! 참 무지했어.”
“정말 그래요. 프렌치프라이도 있고, 감자 샌드위치랑 감자볶음이랑, 감자샐러드, 감자로 할 수 있는 맛있는 요리가 얼마나 많은데요!”
에드먼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참 이상하군. 유명 요리사가 만든 진미도 먹을 만큼 먹어 봤는데…. 왜 단순하게 굽기만 한 이 악마의 열매가 훨씬 더 맛있는 거지?’
에드먼드는 아까 맛있게 먹었던 감자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그렇게 요리법이 많아?”
아이린은 즐겁다는 듯이 눈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그럼요!”
에드먼드는 입을 달싹이다가 말을 꺼냈다.
“저, 혹시….”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예요?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에드먼드는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다음에 또 감자 요리를 하게 되면 나눠줄 수 있을까?”
“당연히 되죠.”
에드먼드는 감자 요리도 좋았지만, 아이린을 또다시 만날 수 있는 기대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
“네, 정말이죠.”
“아이린, 그럼 나중에 되는 날 이곳 사서에게 일정을 남겨줘.”
“음, 그럼 당장 약속 잡는 것이 어때요. 내일 점심에 시간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에드먼드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괜찮아!”
“후훗, 내일 점심에 제가 감자로 만든 맛있는 요리 한 번 더 대접할게요.”
“그럼, 난 디저트를 가져올게!”
아이린은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좋아요. 마치 소풍 가는 것 같네요.”
“소풍?”
“네. 맛있는 것 싸 들고 밖으로 놀러 나가 먹는 것 말이에요.”
“그게 소풍이었구나.”
조금씩 어두워지려는 에드먼드의 얼굴을 본 아이린은 얼른 그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일 이곳에서 보기로 해요.”
그 순간 어둑한 그림자가 지던 에드먼드의 얼굴에서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아이린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저것이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활짝 웃는 표정인 것을 알았다.
‘뭐, 어색한 미소긴 하지만. 저렇게 웃으니 아직 소년 같네.’
아이린은 그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도 좋아요!”
* * *
“아이린!”
집무실을 향해 멍하게 걸어오던 아이린이 고개를 들었다.
“어? 데이지! 점심시간 끝나지 않았어? 여긴 무슨 일이야?”
“응, 끝났지. 지금은 업무 중이고.”
“……?”
데이지는 손에 든 바구니를 들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공주가 심부름을 보내서.”
‘또 엘리자베스네. 혹시 벌써 황태자 전하와 사귀는 걸까?’
요즘 들어 황태자 집무실에 자주 방문하는 엘리자베스를 보는 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데 요즘 왜 이렇게 멍해?”
“하하, 그러게. 정신 좀 차려야 하는데.”
데이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린의 머리에 손을 살짝 얹었다.
아이린은 그 따뜻한 손에 어쩐지 위로를 받는 듯해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데이지가 말했다.
“아이린 네가 정말 걱정되어서 그래. 나도 일하느라 널 자주 보러 갈 수도 없으니… 어휴, 답답해.”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어. 그러니 그렇게 답답해하지 않아도 돼.”
아이린을 내려다보던 데이지는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네가 없다고 하면 없는 거겠지. 그래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나중에 꼭 얘기해 주기야.”
아이린은 데이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데이지가 아이린을 꼭 껴안았다.
데이지의 품은 따뜻했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의 품처럼.
“아이린,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널 많이 사랑해.”
아이린은 때아닌 사랑 고백에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나도.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네게 가장 처음으로 말해 줄게.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지 마.”
“그래. 꼭 그래야 해! 약속이야!”
아이린은 데이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참, 데이지가 엘리자베스 공주 심부름을 왔다고 했었지.’
아이린은 데이지의 품에서 벗어나며 물었다.
“데이지, 엘리자베스 공주님 심부름 왔다고 하지 않았어?”
데이지는 자신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말했다.
“참! 깜박 잊었네. 황태자 전하는 안에 계셔?”
엘리자베스가 레온하르트와 함께 사자궁 정원에 간 날 이후부터였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일정을 어떻게 아는 건지 그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찾아오거나 데이지를 통해 간식을 보내왔다.
아이린은 엘리자베스와 관계된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아마도 그럴걸. 들어가 봐.”
아이린은 갑자기 어딘가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오던 길을 조금씩 뒷걸음을 쳤다.
“아이린, 넌 어디 가는 거야? 지금 너도 업무 시작하는 시간 아니야?”
데이지는 집무실을 검지로 가리켰다.
“나?”
그리고 그 검지로 다시 아이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여기 너밖에 더 있어?”
“하하, 그래 근무시간이었지.”
“얘가 왜 이리 정신이 없어? 아무 일 없는 것 맞아?”
아이린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응, 정말 없어. 걱정하지 마!”
그때 데이지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럼, 나와 같이 들어가자. 나 황태자 전하 좀 무섭단 말이야.”
“무섭다고?”
데이지의 무섭단 말에 아이린은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지, 네가 말하는 무서운 사람이 그 황태자 전하를 말하는 거 맞아?”
데이지는 고개를 살짝 어깨를 떨며 속삭였다.
“응, 네가 보좌하는 그 황태자 전하! 내가 엘리자베스 공주 심부름 전할 때마다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으윽.”
데이지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이, 살벌하긴. 그분이 얼마나 다정한 분이신데.”
“정말이야. 분명 방 안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난방이 되는 곳이었거든. 근데 어느새 기온이 북부 지방처럼 뚝 떨어져 있더라니까!”
아이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데이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없을 때만 그런 것 같네. 혹시… 황태자 전하, 이중인격인가?”
아이린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분은 아니야. 그냥 그날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보지.”
데이지는 의심스럽다는 듯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아이린 네가 나와 함께 들어가 줘야겠어.”
데이지는 그렇게 아이린의 등을 밀며 황태자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엘리자베스 공주님의 시녀입니다.”
순간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도록.”
아이린은 낯선 그의 냉랭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네, 황태자 전하!”
데이지는 집무실 문을 열기 전 아이린을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아까만 해도 기분 좋아 보이셨는데. 점심시간에 무슨 일이 있으셨나?’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남극처럼 냉기가 풀풀 풍기던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그녀를 보자마자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눈매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지더니, 냉랭한 표정을 지우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
그때 아이린의 뒤로 데이지가 따라 들어오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저거, 저거 봐봐! 아이린 앞에서만 저렇게 표정이 풀린다니까. 아이린의 말대로 이중인격이 아니라면 혹시…. 황태자 전하가 아이린을 좋아하는 건가?’
데이지는 살짝 고개를 올려 두 사람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칼바람 부는 한겨울처럼 차가운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아이린을 볼 때마다 햇살 가득한 봄날처럼 변했다.
‘저 눈빛! 내 촉이 틀림없어! 저건 분명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만 나올 수 있는 눈빛이야!’
데이지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우리 아이린에게도 봄이 오는 건가?’
그때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아까보단 한층 부드럽게 들려왔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시녀가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뭐야, 귀가 다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저 목소리는?’
데이지는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대체 아이린은 매일 어떻게 저 목소리를 견디면서 한 방에서 일하는 거지?’
같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천상의 외모에, 들을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다 지쳐버릴 것 같은 목소리.
어떤 면으로 아이린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았다.
데이지는 애써 이성을 불러 모으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 엘리자베스 공주님께서 간식을 보내셨습니다.”
아이린은 순간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하지만 얼른 데이지가 내미는 바구니를 받았다.
“그리고 내일 점심때 혹시 시간 괜찮으신지 여쭈어보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이린이 입술을 짓씹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또 입술을…. 저러다 나의 아이린 입술이 다 상하겠군.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더는 보내지 말라고 강하게 단속해야겠어.’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불안한 듯 입술을 짓씹는 아이린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서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내일 사자궁 정원으로 나오라고 전하도록.”
데이지는 순간 황태자가 엘리자베스 공주 이름을 이야기하며 아이린을 살피는 것을 보았다.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 아이린을 신경 쓰신 게 확실해!’
딱딱한 말투지만 평소보다 따뜻한 목소리에 데이지는 애써 입꼬리를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더 할 이야기가 없으면 이만 나가보도록.”
데이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가다가 문이 닫히기 전 고개를 돌려 살짝 그 둘을 보았다.
황태자 전하의 긴 손가락이 아이린의 도톰한 입술에 살짝 닿는 것이 보였다.
뒤이어 아이린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까지!
데이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얼른 황태자궁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우와, 이거 실화야? 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입술 터치라니! 보는 내가 설레어서 심장이 다 떨리네!’
하지만 그녀는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린이 아까 입술 씹는 것 같던데… 걘 고민 있을 때마다 입술을 씹잖아. 무슨 고민이 있었나?’
순간 데이지는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쳤다.
‘아! 엘리자베스 공주의 바구니를 받으면서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어. 혹시… 아이린도 황태자 전하를 좋아하는 건가?’
데이지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머리를 탕 맞은 듯 멍해졌다.
아까만 해도 아이린에게 봄이 왔다고 생각한 자신이 멍청했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보면, 아이린의 평민 신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 룩스 제국에서 평민의 위상이 많이 높아지긴 했다지만, 신분의 격차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거 멍청하게 좋아할 게 아니었잖아! 어쩌지? 우리 아이린, 상처받으면 안 되는데.’
데이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태자궁을 돌아보았다.
* * *
한편 황태자 집무실 안.
아이린과 레온하르트 두 사람이 한 집무실에 있지만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레온하르트는 요즘 들어 아이린과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정적이 너무도 힘들었다.
웃음이 많던 그녀가 예전처럼 웃지도 않고 부쩍 말수가 줄어든 아이린이 걱정되었다.
“저, 아이린!”
아이린은 고개를 서류에 파묻은 채 대답했다.
“네, 황태자 전하.”
‘…내 얼굴이 보기 싫은 건가?’
레온하르트는 애써 불안함을 숨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아이린은 미동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걸어 나오며 물었다.
“얼굴이 좋지 않아 보여. 어디 아픈 거야?”
아이린은 여전히 서류 더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아프지 않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그가 아이린에게 물으면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저렇게 항상 단답형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조차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정도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더 답답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잘 웃던 아이린이 더는 웃지 않고, 어쩌다 웃어도 진심으로 웃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린 또한 그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도저히 레온하르트를 보고 웃을 자신이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관찰이 정확했다.
비겁하다고 할지 몰라도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책이니까 내 맘대로 해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마음을 주었다.
하지만 더는 무딘 척, 상처받지 않은 척 버틸 힘이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그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앞으론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왜 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웃을 수 없는 거지? 레온과 내가 무슨 사이라고.’
레온하르트와 그녀 사이에는 공식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아이린은 찌질해 보이는 자신이 한심하고 답답했다.
드라마를 보면 뒤에선 울어도 앞에서는 쿨하게 행복을 빌어주며 미소 짓던데.
왜 자신은 그럴 수 없는지.
그래서 더더욱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피하고 있었다.
“아이린, 잠시 쉬면서 이것 좀 먹고 나서 해.”
레온하르트가 아이린의 책상 위에 미니슈를 내려놓았다.
오전에 업무적 이유로 암행을 나갔다가 아이린이 생각나 사 온 것이었다.
그때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아. 어떻게 된 게 미간을 찌푸린 얼굴도 저렇게 잘생긴 거지?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매일 적응해야 할 정도라니까.’
아이린은 마음이 답답한 상황에서도 저 얼굴에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이 매우 한심스러웠다.
아이린은 시선을 옮겨 그가 책상 위에 놓고 간 미니슈를 보았다.
달달한 향이 어느새 그녀의 코끝에 닿아왔다.
이처럼 레온하르트는 매일 그녀에게 따뜻하고 친절했다.
그녀가 차갑게 선을 그은 이 순간에도.
‘차라리 싫어할 수 있으면 좀 더 편할 텐데.’
아이린은 또다시 그에게 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때 사자궁 정원으로 걸어가던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의 다정한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동화 속 엔딩 장면 같았어. …남주인공 옆에는 여주인공이 있어야 해피엔딩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