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0)

9.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해피엔딩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래, 난 언제나 잘 참아 왔잖아. 지금만 잘 참으면 다 지나갈 거야. 이번에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아이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며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고맙습니다, 황태자 전하.”

“하하, 고맙기는. 그러지 말고 얼른 먹어 봐, 아이린!”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아려와 그녀처럼 애써 미소를 지었다.

‘왜 또다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거야? 아이린, 왜 그렇게 아픈 미소를 짓는 거야! 말해줘, 제발!’

레온하르트는 소리쳐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잔뜩 상처받은 듯한 아이린의 얼굴에 더는 물을 수 없었다.

아이린 또한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로판 소설을 볼 때마다 왜 원작에 얽매이냐며 ‘그만 좀, 네 인생 네가 개척해라!’ 하며 욕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구나. 결국 나도 원작에 이렇게 얽매이면서.’

지금의 아이린에게 그들은 더는 소설 속 글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인생에 소중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만 생각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아이린은 원작 속 두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레온하르트에게 자신의 해피엔딩을 위한 모험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래, 정신 차려! 저 아름다운 미소도 따뜻함도 모두 원래는 엘리자베스의 것이잖아! 그들의 해피엔딩을 방해하는 것은 정말 나쁜 짓이야!’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와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함께 일하고 이야기하고.

‘그래, 좋아하면 행복을 빌어 줘야지. 아니지, 아직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난 잊을 수 있어.’

아이린은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더는 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을 더욱 키워나가는 것은 자신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애써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아이린은 현실 세계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자신은 가족들에게도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기대하고 사랑할수록 아팠다. 그래서일까?

일찍 철이 들어 겁이 많아졌다.

‘그래, 이곳도 마찬가지야. 난 이곳에서도 이방인일 뿐이지. 언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지 모르니까.’

아이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같은 일이야. 난 또 그때처럼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려는 레온하르트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아이린?”

하지만 아이린은 감정 없는 딱딱한 투로 말했다.

“지금 밀린 업무가 많아서요. 용건이 없으시다면 아까 보던 서류를 마저 보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당황했다. 뭔가 진솔한 대화를 하려고 부르나 싶어서 기대했는데.

“아… 알겠어, 수고해. 난 잠시 제이드에게 다녀올게.”

아이린은 감정 없는 인형처럼 그에게 살짝 묵례하고는 또다시 서류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아이린. 잘하고 있는 거야. 제이드 님의 목숨을 살릴 때까지만 버티면 돼!’

집무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이린이 이따금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미니슈가 저렇게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아이린, 무엇이 널 그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자신을 피하는 아이린을 볼수록 불안감이 커져,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그의 어설픈 위로가 그녀에게 더 큰 아픔을 줄 것만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결국 그대로 자신의 집무실을 나갔다.

아이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가 나간 문 쪽을 바라봤다.

심장 어딘가가 고장이라도 난 듯 두근거리고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신의 집무실을 나온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제이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노크 소리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컥 열리는 문에 놀란 제이드가 눈을 크게 떴다.

“레온! 놀랐잖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물음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괴롭고도 멍한 표정으로 집무실 중앙에 놓인 소파로 곧장 걸어가 털썩 주저앉을 뿐이었다.

‘아이린 씨가 아직도 기운이 없나?’

요즘 들어 아이린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착 가라앉은 친우의 모습에 제이드는 긴 한숨을 쉬었다.

전 황후였던 레온하르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후 그가 저렇게 축 처져 있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인지 보고만 있어도 답답하고 짠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는 조용히 레온하르트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아이린 씨가 아직도 기운이 없어?”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끄덕였다.

“네게 황태자 전하라 부르고?”

레온하르트는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또다시 끄덕이기만 했다.

“내가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이드를 보았다.

제이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의 간절한 눈빛에 놀라 잠시 움찔했지만 말을 이었다.

“아이린 씨가 네게 이성으로서 호감이 있었던 것 아닐까?”

레온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성으로서의 호감?”

“응.”

레온하르트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뭐, 처음에는 있었을지도 몰라.”

제이드는 머리를 갸웃했다.

“처음에는?”

‘뭐지? 레온과 아이린 씨 사이에 첫 만남부터 무슨 일이 있었나?’

레온하르트는 이마를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지금은 아닌 것 같다니?”

레온하르트는 긴 한숨을 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도 알겠지만, 요즘 아이린이 업무 얘기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잖아. 혹시 엘리자베스 공주가 자꾸 찾아오는 것 때문일까?”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응, 맞는 것 같아. 아이린 씨가 미소를 잃기 시작한 게 그때쯤이니까.”

레온하르트도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는 달라진 일상이 없었잖아. 혹시 아이린 씨 집에 무슨 일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때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가 하고 생각해 봤는데, 아이린이 집에 무슨 일이 있다고 이렇게 확 나에게 선을 그을 사람은 아니야.”

제이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고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 생긴 질투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어두워.”

“그렇다면 무슨 일일까?”

“후……. 그래, 분명 무언가 더 있는데 물어볼 수가 없어.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눈빛에 뭔가 있단 말이야.”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요즘 아이린이 2황자와 함께 점심을 먹는 것 같더군.”

“뭐라고?”

두 사람의 얼굴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2황자 에드먼드는 그의 이복동생이지만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만 해도, 1황자파와 2황자파의 어른들은 서로 날을 세웠지만 둘의 사이는 가까웠다.

하지만 황후의 계략으로 목숨의 위협을 수없이 겪으며 레온하르트는 둘이 결코 함께 할 수 없음을 알아야만 했다.

결국 둘은 서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동생을 전처럼 대할 수 없게 되어 레온하르트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정도 점차 무뎌져 갔다.

시간이 지나 에드먼드가 성년이 지나고부터는 황태자 자리를 건 싸움이 본격적으로 치열해졌다.

수시로 자객이 습격한 것은 물론이고, 매수된 황자궁 요리사에 의해 독살당할 뻔한 뒤로는 음식도 믿을 수 없었다.

황궁 안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그에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인 황제와 제이드뿐이었다.

이런 시기에 에드먼드가 아이린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일지도 모른다.

에드먼드는 아이린에게 나쁜 목적이 없다고 해도, 황후까지 그러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이미 한 번 안 좋은 사건도 터진 적이 있는데 말이다.

“황후 때문에 죽을 뻔한 적도 있었으면서, 왜 또 2황자와…!”

그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조용히 레온하르트를 지켜보고 있던 제이드가 그를 불렀다.

“레온.”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조용한 부름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응?”

“네가 이렇게 축 처진 건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또 다른 이유? 무슨 이유?”

제이드는 레온하르트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했다

“레온, 너 에드먼드를 질투하고 있잖아.”

잠시 그들 사이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온하르트가 먼저 정적을 깨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래, 그러네. 네 말이 맞아. 내가 에드먼드를 질투하고 있었어.”

제이드는 맥없는 그의 목소리에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

이윽고 그는 레온하르트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쳤다.

짝!

“윽! 갑자기 뭐야, 제이드?”

레온하르트는 화끈거리는 등으로 팔을 뻗었다.

하필이면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자리였다.

제이드는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에게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들지?”

레온하르트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제이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두운 얼굴은 당당하신 룩스 제국의 황태자이자 내 친우인 레온하르트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

여리고 가늘어 보이는 제이드의 손이 얼마나 매운지, 그의 말대로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긴 했다.

“레온하르트, 너 이렇게 넋을 놓고 멍 때릴 때가 아니야.”

“……?”

“네 연애 전선도 중요하지만 우린 지금 목숨을 건 전쟁 중이잖아! 황위 계승 전쟁! 여기서 잘못하면 너와 한배를 탄 나까지 죽은 목숨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온하르트의 복잡했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제이드의 말이 맞았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황제가 되어도 정적을 숙청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황후는 에드먼드가 황제가 되는 순간 레온하르트는 물론 그의 사람들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우선 두 사람에게는 진심 어린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

“하지만…!”

“2황자가 그녀와 가까워진다면 아이린 씨가 상처받는 게 문제가 아니야. 아이린 씨의 목숨이 위험에 놓인 거라고. 지금, 이 순간도.”

“뭐?”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말에 눈이 커졌다.

“정신 차려! 레온, 이성적으로 생각해. 황후가 공식적인 루트로 아이린 씨를 해치지 못하게 되면 더 은밀한 루트를 찾겠지. 안 그래?”

‘그래, 황후라면 그럴 수 있어! 내가 너무 안일했어.’

“오늘부터 아이린에게 그림자를 붙여야겠어.”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엘리자베스 공주가 이야기했다던 피도르 후작 영애 말이야.”

“……?” “그 가문 사람 중 피도르 후작과 가장 닮았어. 황후에 버금가는 미치광이라고 할까? 매우 위험한 인물이더라고.”

레온하르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림자에게 전해 들었어. 그 후작 영애의 손에 죽어 나간 사람들이 수도 없다고 하더군.”

“응, 때문에 나도 신년제가 오기 전에 피도르를 해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말인데 당장 내일 움직이는 것 어때?”

레온하르트는 갑작스러워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내일?”

제이드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일.”

“그렇게 갑자기?”

“이미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그리고 평일에 자리를 비우면 티가 나니까 주말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네 말이 맞아. 내일이 금요일이고 일요일 밤 불법 노예 경매가 이뤄지니, 적당한 타이밍이네.”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 보안이 약해져.”

“그래, 불시에 불법 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덮쳐 증거를 잡으려면 보안이 필수니까.”

제이드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아이린 씨의 목숨만 구하는 일이 아니지. 레온, 너도 알 거야.”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응,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이 잘된다면 황후의 자금줄을 완전히 끊어 놓을 수 있겠지.”

“그래, 정치에는 돈이 기하학적으로 많이 들어가니까.”

그때 제이드가 담백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아이린 씨를 데려가는 것이 좋겠어.”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그의 말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이드, 그게 무슨 말이야? 피도르 후작 영지는 일반적인 영지가 아닌 것 너도 알잖아! 무법천지인 곳이라고!”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레온,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2황자가 아이린 씨에게 접근한 지금 이 수도에서 황후로부터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어.”

레온하르트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이내 긴 한숨을 쉬며 제이드를 바라봤다.

제이드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그나마 소드 마스터인 네 옆이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만약 우리가 수도를 비웠을 때 아이린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도 피도르 영지에 가는 것보다 이곳에서 그림자들이 지키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그래, 어떤 면에선 이곳이 안전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림자’는 ‘그림자’야. 황후 쪽에서 우리가 없는 틈을 타 공식적인 문제를 만들어 낸다면?”

레온하르트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 그래. 그림자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존재이지.”

“지난번 일은 레온 네가 도와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우리가 없다면, 어쩌면…. 아이린 씨는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몰라.”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더 어둡게 그늘이 졌다.

이내 그는 소파에 기댔던 몸을 곧게 펴고 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이린. 이번에는 내가 꼭… 지키겠어!’

* * *

똑똑.

“으음.”

이른 새벽,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이린은 눈을 떠 책상에 있는 시계를 봤다.

새벽 4시였다.

12월은 황궁이 가장 바쁜 달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인데다가, 월말에, 신년회까지 가까워졌다.

아이린은 휘몰아치는 일을 집에까지 가져와 처리하다 잠이 들었다.

뒷목이 뻐근하고 절로 하품이 났다. 아이린은 뻐근한 목을 좌우로 기울였다.

“아함,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그녀는 요즘 들어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에 대한 고민과 넘쳐나는 일 탓에 편히 잠들 새가 없었다.

어쩐지 머릿속이 멍해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 들었나?”

피곤이 몸을 물먹은 솜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아이린은 그대로 침대로 걸어가 몸을 던지듯 누웠다.

그녀가 사는 곳은 평소 방음이 되지 않는 낡은 집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으나 새벽이라 그런지 적막했다.

그 적막을 깨고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똑똑.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분명한데. 누가 왔나?”

아이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 더미와 펜을 피해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가니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 같은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아참, 출장!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아이린은 어제 출장이 잡혔다는 말을 퇴근하기 직전 들은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밤새 서류 작업을 하다 보니 정신이 멍했는지 그만 잊어버렸다.

“윽, 짐도 안 싸놨는데.”

“아이린, 문 좀 열어줘!”

짐을 못 싼 것도 문제였지만 어제 씻지도 않고 책상에서 잠드는 바람에 모습이 엉망이었다.

이런 꼴로 문을 열어줄 순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나갈게요!”

아이린은 얼른 욕실로 가 세수를 하고 나왔는데… 문제가 있었다.

평소 입는 업무용 드레스들이 모두 빨래 바구니에 들어가 있던 것이었다.

안 그래도 세탁기도 없는 세상인데, 밀려드는 일 때문에 빨래도 제대로 할 틈이 없었다.

“이거 낭패잖아, 주말에 하려고 미뤘더니…!”

아이린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작년 봄에 산 파스텔 톤 드레스 두 벌과 흑역사를 선사한 빨간 드레스, 그 셋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깊게 파인 빨간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었기에 선택지가 따로 없었다.

아이린은 얼른 큰 가방을 꺼내 연한 분홍색 드레스를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윽, 흑역사 갱신이네. 출장에 꽃분홍 드레스라니! ……이번 보너스 타면 내가 꼭 옷 사고 만다!”

마치 회사에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가는 기분이었다.

아이린은 지난 생에서도 출근할 때는 항상 단정한 복장을 고르는 편이었다.

‘회사에 꽃단장하고 오는 애들 보면 몰래 욕했는데……. 내가 이렇게 되다니!’

물론 이곳에서 아이린이 공단도 아닌 면으로 된 파스텔 톤 드레스를 입는 것이 꽃단장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요즘 영애들 사이에 유행하는 드레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이웨스트 스타일의 롱 원피스라고나 할까?

다른 로판 소설에 빙의한 주인공들은 이세계의 옷도 디자이너가 주는 대로 잘만 입는다지만, 그녀에게는 도저히 어려운 일이었다.

속에 코르셋을 차고 치마를 부풀리는 속옷을 껴입는 것은 너무도 불편했다.

아이린은 옷장에 남아 있는 연하늘색 드레스를 꺼내 서둘러 갈아입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려 거울을 보았다.

……당연하게도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지는 않았다.

‘역시 난 엑스트라가 맞나 봐.’

아이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만졌다.

“윽, 뭐야! 뒷머리가 눌렸잖아!”

아이린은 원래 머리숱이 많아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잘 눌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잠깐 누웠는데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머리를 감을 수도 없고, 어떡하지?”

밖에서 기다리는 일행들이 신경 쓰여 마음이 급했다.

“그래, 맞아! 데이지가 저번에 준 리본이 있었지!”

아이린은 얼른 책상 서랍을 열어 리본을 꺼냈다.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이 리본은 최고급 공단으로 만든 것 같았다.

선물로 받은 후 꺼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꺼내지 않았던 것은 아껴둬서라기보다는 부담스러워서에 가까웠다.

진한 남색 공단으로 만든 리본에는 연하늘색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현실에서 레이스 리본은 공주를 꿈꾸는 유치원생들의 전담 아이템이 아닌가?

공주 같은 건 꿈꿔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리본을 들고 있는 것조차 소름이 돋았다.

이 세계에서 결혼한 부인들은 주로 올림머리를 했고, 어린 아가씨들은 긴 머리를 풀어 장식하거나 예쁘게 묶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까지는 그녀가 살던 원래 세계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장식하는 도구가 다양하지 않아 보석이 달린 머리핀이나 리본 정도가 다였다.

이런 상황에는 차분한 색의 보석 핀이 무난하겠지만 그런 건 그녀가 사기에는 너무 비쌌다.

때문에 그녀가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것은 리본뿐이었다.

“너무 깔맞춤인가?”

아이린은 손에 잡힌 레이스 리본을 보며 살짝 갈등했다.

‘그냥, 눌린 머리로 갈까?’

그런데 그러기에는 그녀의 드레스가 평소보다 매우 화사했다.

허름한 운동복을 입었을 때는 대충 씻고 슬리퍼 끌고 다녀도 별로 창피하지 않다.

하지만 잘 차려입었을 때는 머리나 화장도 덩달아 신경이 쓰이는 법이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린은 거울을 보며 리본을 머리에 살짝 대어 보았다.

아무리 봐도 마치 애니메이션 속 마법소녀 같아 미간이 찌푸려졌다.

“후우, 이래서 리본은 절대 안 하려고 단발을 유지했는데…. 리본으로 묶지 말고 머리띠처럼 해볼까?”

아이린은 얼른 수습이 안 되는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 내렸다.

그리고 리본을 머리띠처럼 머리에 두르며 목 뒤에서 묶었다.

은실 같은 머리카락에 연하늘색 레이스는 다행히 제법 잘 어울렸다.

“어째 손에서 얼음 뿌리면서 노래하는 여왕님 같은데…. 음, 그래도 리본이 머리 위에서 달랑거리는 것보단 낫겠지.”

아이린은 초조한 마음에 시계를 보았다. 벌써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으악, 너무 늦었다.”

아이린은 얼른 간단한 여행용품을 가방에 밀어 넣고 현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그녀는 문을 나서자마자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치고 말았다.

팍!

‘뭐지? 문 앞에 갑자기 벽이 생겼나?’

“으아앗!”

부딪힌 충격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 순간 아이린의 왼팔을 누군가 붙잡았다.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반동으로 몸이 누군가의 따뜻한 품에 안겼다.

그녀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향에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아, 달콤하고 시원한 향. 레온하르트구나.’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참! 가슴이 바람직하게 단단하기도 하지. 검술로 단련돼서 그런가?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뭐, 레온하르트?’

“흐흡.”

“어, 어머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이린은 이내 놀라 레온하르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이린은 얼른 붉어지려는 얼굴을 감추려고 그대로 인사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만나면 말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은 듯, 말 한마디라도 더 못 해서 안달이었다.

그런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어찌나 조용한지 그의 숨소리가 매우 크게 들려왔다.

‘레온, 아니 황태자 전하가 이렇게 조용하다니 이상한걸.’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금실 같은 앞머리가 살랑거렸다.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호수처럼 빛나는 푸른 눈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계속 바라보다가는 빠져 버릴 것만 같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일상에서 매일 보는 그였지만, 잠시 방심하면 이렇게 정신없이 빠져 버리곤 했다.

사내 연애는 매우 위험하다.

회사 사람이랑 크게든 작게든 얽히게 되면 매우 큰 단점이 있다는 걸 아이린도 모르지 않았다.

그건 바로 출근하면 좋건 싫건 매일 봐야 한다는 것.

안 보려고 퇴사를 하자니, 지금 그녀처럼 연고도 없고 재산도 없는 상황에서는 굶어 죽자는 소리였다.

자본주의 현실이나 룩스 제국이나 참 그녀에게는 먹고사는 게 달린 슬픈 현실이다.

‘읍, 정신 차려, 아이린!’

애써 이성의 끈을 잡으며 그를 바라보니, 그의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분명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눈빛은 다른 무언가 저 너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황태자 전하!”

“아, 아이린.”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레온하르트는 갈라지려는 목소리에 헛기침을 하였다.

“아, 흠흠. 그런가 봐!”

레온하르트는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남주답게 일주일 밤을 새워도 힘든 것을 느끼지 못하는 먼치킨 같은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사실 그는 피곤한 게 아니라 그녀를 보고 매우 놀란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설렜다.

발목이 살짝 보이는 연 하늘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릴 적 읽은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단순히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딘가 그의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어두운색의 품 넓은 드레스를 입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몸매가 드러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새삼 가슴이 두근거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흠칫했는데, 그녀가 그의 품에 뛰어들었을 때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 순간적으로 숨이 탁 막히는 듯했다.

아직도 그의 가슴과 손에 부드러운 느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이린의 귀여운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황태자 전하?”

멍하게 서 있던 레온하르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출장을 잡아서 미안해, 아이린. 준비할 게 많았을 텐데.”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덕분에 수도를 벗어나 보는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전부 구해다 줄게.”

“네, 감사해요. 그런데 제이드 님은 함께 안 오셨나요?”

레온하르트는 순간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왜 난 황태자 전하라 부르고 제이드는 저렇게 다정히 이름을 부르는 거지. 설마 제이드를 좋아하는 것인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는 사이 레온하르트의 마음엔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순간 자신의 친우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명백한 질투였다.

최측근이자 어린 시절부터 벗이었던 그에게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수많은 여인을 봐 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특히나 여자 때문에 제이드에게 이런 감정을 가질 것이라고는 더욱 상상도 못 했었다.

누가 들으면 어떻게 친구에게 그럴 수 있나 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린에 관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고 했던가?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보고 있으면 마치 백치라도 된 듯 실없이 웃으며 멍하니 그녀만 보고 있게 되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에 대한 질투심이 치솟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기분 좋게 미소 짓는 아이린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마차 안에서 자고 있어. 제이드 그 녀석은 아침잠이 좀 많거든.”

평소 제이드는 일에 중독된 수준이라 부하들은 그를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아이린은 그런 제이드가 아이처럼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쩐지 귀엽네.’

보고 있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미소에 질투가 났다.

자신을 생각하며 미소 짓지 않는 그녀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정말 질투의 화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낀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에게 이런 마음을 들킬까 싶어졌다.

그래서 얼른 그녀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고 앞서 걸었다.

“어, 전하! 제가 들 수 있는데…!”

아이린은 놀라 그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린은 빠르게 걸어가는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렇게 레온하르트가 먼저 마차에 도착하고 곧바로 그녀의 짐 가방을 마차 지붕에 실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까이 다다랐을 때 딱 맞게 마차 문을 열었다.

‘후후, 무슨 공주님이라도 된 것 같네!’

아이린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미소를 본 순간 레온하르트는 잔뜩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도 그녀를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이라 달빛의 은은한 빛이 그의 얼굴에 비쳤다.

음영이 진 그의 얼굴은 우수에 찬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안 그래도 명화 찢고 나온 얼굴인데, 저 치명적인 미소까지 지으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이린은 이러다 심장이 날뛰다 못해 너덜너덜해질 것 같았다.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 안에는 한쪽 의자를 다 차지하고 누워있는 제이드가 보였다.

‘어쩌지? 이래서는 레온하르트와 나란히 앉아 가야 할 텐데.’

장시간 마차 여행인데 그의 옆에 앉아 가는 것은 매우 심장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마차에 오르려 손을 뻗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아이린의 허리를 잡아 가볍게 마차 안으로 올렸다.

‘헉 허리에 손, 손이!’

아이린은 순간 허리에 닿아 오는 그의 손길에 놀라 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이 닿은 곳에 타는 듯한 열기가 몰아쳤다.

코르셋조차 하지 않은 얇은 드레스 때문에 그의 손이 마치 맨살에 닿은 듯해 살짝 몸이 떨려왔다.

야릇한 기분에 그녀의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그녀에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윽, 나 어떡하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차 안이 어둡다는 것이었다.

아이린은 목까지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그가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녀는 얼른 창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차 벽에 붙어 앉았다.

그녀의 뒤에 따라 올라온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사실 레온하르트 또한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 또한 순간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올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인을 멀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사도가 있었기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 때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보통 여인들은 넓게 펼쳐진 드레스의 치마 때문에 마차를 타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마차에 타려 하는 여학생이 곤란해할 때 도와준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단순히 손만 빌려준 거였다.

‘그런데 왜?’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두 손을 흘끔 보았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붉어진 그녀의 귀 끝을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제이드의 말대로, 어쩌면 아이린이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린은 피곤한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잠이 들어 힘이 없어진 그녀의 고개가 이쪽저쪽 위태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왼팔에 살짝 기대었다.

워낙 키 차이가 있어서인지 어깨를 빌려주는 것은 무리였다.

그제야 아이린에게서 편안한 기색의 숨소리가 색색 들려왔다.

어찌나 편안해 보이는지,

철벽 방어를 한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후후, 자는 모습도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거지?”

꿈속에서도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것인지 아이린의 통통한 입술이 연신 오물거렸다.

“헐, 너 내 친구 레온 맞아?”

언제 잠에서 깨어났는지 제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검지를 입술에 대며 눈짓을 했다.

제이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속삭이듯 말했다.

“룩스 제국의 별, 레온하르트 황태자 전하! 지금 네 표정 정말 익숙하지 않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살짝 응시한 뒤 나지막이 대답했다.

“후후, 내가 무슨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표정이 네가 익숙하면 이상한 거 아닌가?”

제이드는 미간을 구긴 채 그를 바라보며 자신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헉, 순간 나 소름 돋았다. 원래 능글맞기는 했지만, 이거 요즘 들어 증세가 더 심해졌어!”

레온하르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제이드를 향해 으쓱했다.

제이드는 어쩐지 가슴 어딘가부터 닭살이 돋는 듯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는 너랑 한 마차에 못 있겠다. 더 보고 있다간 속이 좋지 않을 것 같아.”

“…….”

“나는 마차를 지키는 그림자들이랑 함께 이동할 테니 좋은 시간 보내라. 친, 구.”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향해 짓궂게 씨익 웃었다.

“진작 그러지 그랬어, 친구. 눈치 없게 애초에 이 마차에 함께 타질 말았어야지.”

제이드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향해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차 앞쪽을 살짝 두드렸다.

“정지!”

제이드의 낮은 명령에 마차가 스르륵 섰다.

제이드는 레온을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마차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마차는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둘만 남았네, 아이린.”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그녀가 잠드는 모습을 바라보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렇게 레온하르트의 팔에 기대었던 아이린은 불편했는지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결국 레온하르트의 허벅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허벅지에 닿는 따뜻한 무게감에 스르륵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뜬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누워있는 아이린을 보고 정말 놀라 자빠질 뻔했다.

그는 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참았다.

레온하르트는 잠든 아이린이 깰까 봐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이린이 차를 마셨던 그 날처럼, 레온하르트의 허벅지를 베개 높이 가늠하듯 손으로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린! 이, 이게 무슨 일…!’

한 번 겪었던 일이어서일까?

아이린이 주는 자극이 더 배가 되어 그에게 돌아왔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패닉에 빠져 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정작 아이린은 매우 편했는지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베개 삼아 이리저리 머리를 비비적대기까지 했다.

정말 숨 쉴 틈도 없는 그녀의 공격이었다.

순발력 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룩스 제국 최고의 검사이자 소드 마스터인 레온하르트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방어할 새도 없었다.

수많은 적군의 무차별 공격에도, 숱한 미인들의 미인계에도 당황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레온하르트였다.

그래서 심지어 동성을 좋아한다는 오해까지 받을 정도였는데.

그런 그의 단단한 철벽을 이렇게 간단히 와르르 무너뜨리다니! 적들이 알면 통곡할 노릇이었다.

아이린은 참 여러모로 그를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 이건 단순히 놀랐다고 표현할 정도를 넘어섰다.

살면서 지금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더없이 냉철하던 레온하르트였는데.

그렇던 그의 이성을 그녀가 송두리째 쥐고 흔들고 있었다.

자신의 보좌관 제이드와 함께 제국 최고의 이성으로 손꼽히던 황태자 레온하르트가 이런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도 사랑 앞에서는 27세의 건장한 성인 남성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안 돼! 레온하르트! 정신 차려!’

레온하르트는 검술을 연마하듯 단전에 힘을 주고 주먹을 꽉 쥐며 달아난 이성을 애써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의 등줄기에 땀이 다 맺힐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의식돼서일까?

아이린이 자신도 모르게 뒤척이며 생기는 야릇한 마찰에 그의 이성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그야말로 죽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미친 듯이 빠르게 뛰던 그의 심장이 더 거세게 항의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몸의 한 부분이 단단해지려는 것이 느껴졌다.

‘읍. 이러다 정말 죽겠군.’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아이린을 깨울 수도 없었다.

그의 얼굴은 지금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진퇴양난에 빠져버렸다.

안 깨우자니 자기가 정말 위험한 상황인데, 아이린이 이 모습을 보면 크게 오해할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한 가지 방책을 떠올렸다.

‘…그래, 잠든 척을 하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얼른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허리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의 말랑한 팔이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아와서였다.

‘읏!’

그러면서 아이린의 얼굴이 그의 복부에 밀착되었는지 따뜻한 숨이 느껴졌다.

‘으흡!’

그렇게 마차가 미묘하게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는 속으로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그런 그의 상황을 모른 채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배고 있는 베개가 점점 단단해지며 자신의 머리를 압박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린은 서서히 잠에서 깼다.

‘아 참, 나 마차에서 잠들었지! 그럼 내가 지금 베고 있는 건 뭐지?’

아이린은 순간 놀라 번쩍 눈을 떴다.

그 순간, 언제 옷자락이 밀려 올라갔는지 단단한 구릿빛 복근이 눈앞에 보였다.

‘뭐지 이 초콜릿 복근은?’

그런데 그녀가 더 놀란 것은 자신의 손이 그 복근의 갈라진 곳을 매만지며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얼른 그의 배에서 손을 뗐다.

어쩐지 손끝에 그의 단단한 복근의 촉감이 새겨진 듯해 손을 꼼지락거렸다.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이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하하… 그럼 내가 지금 베고 있는 것은?’

아이린은 조심스레 일어나 자신이 누웠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흐흡!”

아이린은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넓고 단단한 허벅지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차 의자에 앉아 있어서인지 그의 단단한 근육들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리고 이후 그녀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

아이린은 말을, 아니, 생각조차 잇지 못했다.

이건 그녀 평생의 모든 흑역사 중에서도 베스트 오브 베스트가 될 일이었다.

아이린은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자신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이 멍청이, 아무리 피곤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남주의 허벅지를 베개처럼 베고 잘 수 있는 거야! 제이드 님도 함께 있는데.’

아이린은 제이드가 앉아 있는 쪽을 슬쩍 보았다.

‘어, 제이드 님은 어디 가셨지?’

건너편에 앉아 있었던 제이드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린은 순간 긴장이 풀렸다.

정말 그녀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최애인 제이드가 목격했다면!

상상만으로도 창피해서 스스로 연소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아이린은 갑자기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최애를 매일 앞에 두고 있는데 제이드 님을 볼 땐 왜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거지?’

아이린은 이전 생에서 제이드가 나오는 부분을 보려고 웹툰과 소설을 백 번도 넘게 읽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서울대, 아니 하버드에도 갔을 것이다.

심지어 웹툰이 나왔을 때는 스스로 베개나 티셔츠, 머그컵, 엽서 등등 제이드의 얼굴이 도배된 굿즈를 만들어 방안에 온통 전시까지 했다.

정말 오덕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이 세계로 넘어와서는 어떠했던가?

이 세계에 적응도 하기 전에 최애인 제이드를 살려 보겠다고 100:1의 살벌한 경쟁률을 뚫고 황궁에 취직까지 했다.

정말 제이드의 덕후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녀였는데…….

아이린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잠들어 있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매일 천사 같은 미소로 그녀에게 감동을 주는 제이드를 떠올렸다.

그 엄청난, 꽃 그 자체인 얼굴은 옆에서 매일 보는 것이 황송할 지경이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절로 행복한 미소가 지어지는 기분이랄까?

아이린은 다시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제이드에게 느끼는 감정과 레온하르트에게 느끼는 감정은 많이 달랐다.

제이드를 봐도 물론 설레고 심장이 두근거리긴 했다.

하지만 지금 레온하르트를 볼 때처럼 심장이 터질 듯 뛰지는 않았다.

그것을 자각한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안돼! 정말 위험해!’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붉은빛을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감정이 아무래도 어느 순간 ‘좋아해!’에서 ‘사랑해!’로 바뀐 모양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경계를 했는데. 어느새 그렇게 된 거야?’

어쩌면 아이린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인정을 하면 그게 더 문제니까.

아이린은 그와 해피엔딩을 이루는 여주의 이야기를 소설뿐만 아니라 웹툰까지 정독해 달달 외우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연애를 하는지 그 과정을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열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더 레온하르트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한 놈 도대체 누구야! 내가 그렇게 미친 듯이 노력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배신당할 수 있는 거냐고!’

일단 한번 그렇게 물꼬를 튼 감정은 정말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아이린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왜 이 남자는 이 순간에도 이렇게 멋있는 거야! 정말 너무해!’

아이린은 눈을 감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가지런한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정말 분하게도 엑스트라인 자신과는 달리 명화 속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아이린은 순간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이런 건 결코 좋지 않아! 좋은 생각! 행복한 생각을 하자!’

아이린은 살짝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얼른 마차의 창문을 열어 밖을 바라봤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폐 속까지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도 보고, 하늘도 올려다보고.

눈 부신 햇살에 손바닥을 펴 하늘을 가리자,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제법 따뜻하게 얼굴에 와 닿았다.

이제야 기분이 좋아진 아이린은 미소를 지으며 숨을 한 번 더 크게 들이마셨다.

‘아, 기분 좋아! 요 며칠 제법 쌀쌀했는데 오늘은 따뜻하네.’

그러고 있는 동안, 레온하르트가 언제 깨어났는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멈추고 마차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사람은 제이드였다.

“아이린 씨, 일어났네요. 배고프지 않아요?”

아이린은 무심코 배에 손을 올렸다.

“아하하, 좀 그런 것 같네요.”

“그럼 우리 뭐 좀 먹으며 갈까요?”

아이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제이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린과 레온하르트를 번갈아 보며 미소 지었다.

아이린은 붉은 단풍이 우거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긴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겨울인데도 풍경이 꼭 가을 같네요.”

“응. 룩스 제국은 원래 따뜻한 편이고, 수도는 그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하니까 진짜 겨울 날씨는 매우 짧지.”

‘겨울이 짧다니. 정말 날씨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는 나라라니까.’

아이린은 추운 날씨가 매우 싫었다.

초등학교 시절, 한겨울에 집 밖에서 밤늦게까지 덜덜 떨었던 기억이 있어서 더 그랬다.

오빠가 1등 성적표를 들고 왔다고 온 가족이 그녀만 빼고 외식을 갔던 그 날.

날씨가 추워지면 가끔 그날의 악몽이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이곳은 정말 따뜻했다. 날씨도, 사람도.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던 아이린은 그들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의 풍경을 보자 정말로 수도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아이린은 지난 1년 동안 룩스 제국에 대해 공부하며 직접 가보고 싶었던 곳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대한민국과는 달리 이곳은 수도를 벗어나면 치안이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황후의 손에 죽을 뻔하고 나서 타국으로 도망가려 했던 것도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다.

호위 기사가 있는 귀족 영애도 아니고, 평민 여자 혼자서 수도를 벗어날 생각을 하다니!

보나 마나 수도를 떠나는 순간 결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 어쩌면 수도를 벗어나는 마차를 타는 순간 납치를 당하거나, 도적 떼를 만나거나, 사고를 당했을지도 몰라.’

아이린은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제국을 떠나려던 그때가 참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때는 살고 싶어서 무작정 했던 생각이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냥 황궁에서 죽을지 길에서 죽을지 선택하는 것 아니었겠는가.

‘그나저나, 확실히 황궁 마차라서 그런지 승차감이 다르네.’

벌써 몇 시간째 마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지만, 좌석이 편안해 흔들림조차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마법 같다…….”

그때 바닥을 향해 몸을 숙이던 레온하르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린, 어떻게 알았어? 그거 황궁 기밀인데.”

“네? 기밀요?”

아이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그녀보다 더 놀랐는지 경악한 표정으로 아이린을 보고 있었다.

아이린은 자신이 한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런 표정으로 기밀이라고 하는 거지? …설마, 마법이 기밀이라는 거야?’

“설마 마법 말씀하시는 거 아니겠죠?”

그간 아이린이 읽었던 책에서는 분명 마법사는 전설 속에나 있는 존재들이라고 했다.

아이린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그들을 보자, 레온하르트와 제이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동시에 끄덕였다.

“네? 저, 정말 마법이랑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말씀이세요?”

제이드는 말 그대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이린 씨는 몰랐나요?”

아이린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네, 몰랐죠. 마법사는 고서에나 존재하는 자들이잖아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붙잡았다.

“허……. 우리, 참 바보 같군. 제이드.”

제이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밀을 이렇게 쉽게 술술 이야기하듯 누출하다니.”

잔뜩 어두워진 두 사람의 분위기에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입 무거워요. 그러니까, 두 분 말씀은 이 마차가 마법 처리가 되었다는 말인가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아이린.”

“어, 황궁에서는 마법사들을 볼 수 없었던 것 같은데. 혹시 다른 곳이 있는 건가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은 황궁에 있어.”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정말요?”

“응.”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사 복장을 하거나 마법을 다루는 이 같은 걸 본 기억은 없었는데.

“마법사는 기밀이라 눈에 띄지 않아.”

그때 제이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그들은 황궁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고 있죠.”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렸다.

“네? 설마 제가 자주 가는 그 황궁 도서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이린 씨.”

“얼굴이 매일 다르던데….”

“한 명씩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사서 근무를 하고 나머지 인원은 마법 연구를 하니까요.”

‘어쩐지 매일 사서가 바뀌더라니.’

그때 아이린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고 소리치듯 말했다.

“혹시 도서관 안에 삼엄하게 금지된 그곳이…!”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그런 그녀가 귀여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응, 맞아. 그곳에 마법사들이 연구를 하는 연구실로 통하는 문이야.”

‘헐,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어떻게 몰랐을까?’

아이린은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몰랐다고 황당해하지 않아도 돼. 그곳은 나와 제이드, 그리고 황제 폐하밖에 모르는 사실이니까.”

아이린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그리고 제이드 님만 아는 사실이라니! 나 너무 거물급 비밀을 알고 말았어!’

처음에는 마법사의 존재가 그저 놀랍고 신기했다.

하지만 평민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이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때 제이드가 그녀를 향해 씽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린 씨,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황태자 전하를 보좌하는 사람들이니까, 기밀을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하죠.”

그 순간 아이린은 천사의 강림을 본 것만 같았다.

“…네, 제이드 님!”

‘네, 우리 제이드 님의 말씀 믿습니다! 으아아, 역시 제이드 님! 이 와중에도 저 미소에 녹을 것 같아!’

아름다움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한 미소에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마치 신을 영접하듯 제이드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는 레온하르트는 순간 화가 났다.

‘또 저 표정. 아이린은 왜 제이드만 보면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지금 아이린의 표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 같은 미소랄까?

즉 얼빠진 표정으로 아이린은 제이드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레온하르트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후, 아이린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제이드 저 녀석은 왜 저리 아이린을 보면서 웃고 있는 거야!’

사실 제이드는 귀여운 여동생 같은 아이린과의 대화가 즐거워 활짝 웃고 있을 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참지 못해 발을 살짝 들어 제이드의 발을 밟았다.

제이드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라 소리쳤다.

“으악! 레온!”

레온하르트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 왜 그래, 제이드.”

“내 발을 밟으면 어떡해!”

아이린은 그의 비명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제이드 님?”

“괜찮아요, 아이린 씨. 달리는 마차에서 일어나면 위험하니 얼른 앉으세요.”

아이린은 레온하르트를 나무라듯 바라봤다.

뜨끔한 레온하르트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게 간식을 꺼내려고 움직이다 보니 그렇게 됐네. 미안해, 제이드.”

‘레온 저 녀석, 분명 질투심 때문에 내 발을 밟았을 거야. 참 나, 사랑에 눈이 멀어 이런 짓까지 하다니.’

제이드는 여자들에게 차갑게 대하던 이전의 레온을 떠올리며 어이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의자 아래 놓아둔 간식 바구니를 꺼냈다.

제이드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 바닥 가운데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테이블을 꺼내 설치했다.

아이린은 마술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우와 마차 바닥에서 테이블이 나오다니! 정말 엄청나네요!”

레온하르트는 오랜만에 보는 아이린의 함박웃음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기 아이린이 좋아하는 것 많이 가져왔어.”

아이린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감사해요.”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의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멍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뭐야, 저 눈빛? 저거 완전히 주인을 보고 꼬리치는 강아지잖아!’

제이드는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가 아기였던 시절부터 레온하르트와 함께했지만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다른 외모, 건장한 체격의 소드 마스터, 룩스 제국의 황태자인 레온하르트가 저럴 줄이야.

그동안 아카데미 시절부터 레온하르트에게 접근하려던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작 그는 하도 여성에게 무관심해 제이드와 열애설이 날 지경이었지만.

그런 레온하르트가 아이린에게 호감을 가진 것도 놀라 자빠질 일인데.

‘심지어 저런 표정까지 짓다니!’

제이드는 오랜 시간 레온하르트를 보아 왔지만, 그가 누군가에게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기는 처음이었다.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아이린을 바라보는 레온하르트.

제이드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는 살짝 넋이 나간 레온하르트에게서 포크와 접시를 빼앗아 아이린에게 내밀었다.

“아이린 씨, 포크 여기 있습니다.”

아이린은 제이드가 내민 포크와 접시를 받아들며 그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해요. 제이드 님.”

순간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제이드 저 녀석이!’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제이드는 그런 레온하르트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기 다분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은 사실 디저트 바구니를 여는 순간부터 먹고 싶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온하르트가 포크를 든 채 주지 않은 채 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손만 바라보며 입맛만 다셔야 했다.

‘오늘 나 왜 이러지? 황궁에서 레온하르트가 디저트를 줄 때만 해도 입맛이 없었는데.’

황궁 밖을 벗어나서일까, 그녀를 둘러싼 고민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아 한층 마음이 가벼웠다.

아이린은 보기만 해도 눅진눅진한 브라우니 하나를 얼른 접시에 내려놓았다.

‘와! 이 먹음직스러운 빛깔 좀 봐!’

아이린은 순간 입안에 침이 고였다.

바구니 속 디저트들의 달달한 냄새가 마차에 가득 퍼지자, 미소도 절로 피어났다.

‘보기만 해도 입이 녹을 것 같이 달달한 디저트들에, 눈이 멀 것 같은 꽃미남 둘과의 마차 여행이라니! 이거야말로 입도 눈도 호강이잖아!’

아이린은 슬쩍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브라우니 한 조각을 크게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아이린의 동그랗게 커진 큰 눈이 저절로 스르륵 감겼다.

꾸덕꾸덕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의 브라우니는 아이린이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도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이윽고 초콜릿의 깊고 진한 풍미가 그녀의 입안을 감돌았다.

역시 그녀가 기대한 것처럼 흔한 브라우니가 아니었다.

‘으음, 맛있어! 혀가 다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아!’

“아이린, 맛있지!”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정말 맛있어요.”

“수도에 ‘퐁당 쇼콜라’라고 새로 생긴 디저트 카페가 있는데. 요즘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 유명하대.”

‘아, 거기 데이지랑 가려고 했던 디저트 카페잖아!’

아이린은 아는 곳 이름이 나와 반가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친구에게 들어보긴 했어요.”

레온하르트는 덩달아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 디저트 내가 어제 그곳에 가서 포장해 온 거야!”

“어머! 정말요?”

아이린은 생각지 못한 입 호강에 기분이 확 좋아졌다.

“응!”

“어쩐지 입에서 살살 녹던데요. 감사해요. 황태자 전하와 제이드 님도 얼른 드셔보세요.”

아이린의 환한 미소를 보니 레온하르트도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며 선을 긋자, 레온하르트의 기분은 그대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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