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때 제이드는 어두워지는 레온하르트의 표정을 보았다.
‘사랑을 하면 속내를 감추기 힘들다더니, 저 포커페이스의 달인이 저렇게 자기 표정을 다 드러낼 줄이야…….’
제이드는 쯧쯧 혀를 차며 얼른 디저트 하나를 골라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린 씨! 이거 정말 맛있어 보이는군요!”
제이드는 포크를 들어 얼른 아무 디저트나 하나 찍어 드는 동시에 팔꿈치로 레온하르트의 옆구리를 찔렀다.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이드를 바라봤다.
제이드는 씩 웃으며 눈짓했지만, 달달한 디저트가 입 안에 들어오자 곧 미간을 찡그렸다.
‘윽, 느글거려. 난 단건 정말 질색인데.’
제이드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의 보좌관으로서 그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대외적으로 보이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었다.
레온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그의 최측근이자 친우인 제이드도 언제 독살 위협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제이드는 지금 미간을 좁히면서 입꼬리는 올리고 있는 이상한 표정으로 웃는 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제이드가 달달한 디저트를 싫어하는 것을 알았기에 피식 웃었다.
‘아이린에게 그런 눈빛을 잔뜩 받더니! 많이 먹어라, 제이드 레이먼드. 큭큭.’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시원해진 기분으로 아이린과 같은 브라우니 한 조각을 접시에 담았다.
아이린은 순간 그들의 이상한 표정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풉. 두 분, 그 이상한 표정은 뭐예요?”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다 그녀처럼 대폭소를 터뜨렸다.
“큭큭, 제이드, 너 꼭 벌레라도 씹은 표정이었어.”
“레온, 너는 뭐 다른 줄 알아? 넌 뭐 마려운 강아지 같았다고.”
‘윽. 지금 보니 둘 다 참 유치하단 말이야. 아기일 때부터 친구여서인가? 저걸 보고 누가 룩스 제국의 황태자와 공작가의 영식이라 하겠어!’
아이린은 브라우니를 먹으며 관전하듯 그들을 바라봤다.
“제이드, 뭐 마려운 강아지라니! 아이린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겠어. 아이린, 제이드 너무 유치하지 않아?”
제이드는 이에 질세라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린 씨, 레온이 더 유치하지 않습니까?”
아이린은 ‘두 분 다 똑같아 보입니다만.’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친절하다 해도 상사는 무서운 법.
아이린은 그냥 말없이 포크만 움직여 브라우니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눈을 감으며 브라우니를 천천히 음미했다.
‘음, 역시 브라우니는 맛있다니까!’
그 순간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해졌다.
살짝 홍조를 띤 아이린의 동그란 볼이 브라우니를 머금으며 살짝 부풀어 올랐다.
‘호오, 레온하르트가 저 모습 때문에 매일 비싼 디저트를 사다 바치는 거였군!’
제이드는 작고 동글동글 귀여운 아이린의 볼을 잡아 보고 싶었다.
‘먹는 모습도 내 동생 메이린이랑 많이 닮았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린의 볼에 손을 뻗으려 팔을 올렸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에 의해 그의 팔이 가로막혔다.
제이드는 어이가 없어 레온하르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레온하르트가 마치 그를 태워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제이드는 팔을 털듯이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고는 다시 아이린을 바라봤다.
오물거리는 핑크빛의 통통한 입술은 보는 사람이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되는 느낌이랄까?
‘메이린도 볼이 볼록해서 정말 귀여웠는데.’
제이드는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할 것 같은 그녀의 볼을 잡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치 사신처럼 눈을 빛내는 레온하르트 때문에 그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주 본격적으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이제는 코미디 한 장면을 보듯 킥킥거리고 있었다.
‘저래서 예전에 만담이 유행했던 건가?’
“그래서 아이린, 제이드 저 녀석이 지금은 저렇게 똑똑해 보여도 어릴 때는 오줌싸개였다고.”
“야, 넌 울보였잖아, 레온. 아카데미 가기 전까지 검술 수련만 하면 질질 울면서 방으로 나 찾으러 온 거 기억나지 않는가 봐?”
아이린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오줌싸개 영식과 울보 황태자님. 저녁이 다 된 것 같은데, 우리 오늘 밤 어디서 자나요?”
그녀의 물음에 이성이 돌아온 제이드가 아이린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 씨, 저희는 피도르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야영을 해야 합니다.”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 산속에서 야영을요?”
창밖에는 정말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응, 아이린. 우리가 어딘가 호텔에 묵게 되면 황후나 피도르 후작의 귀에 그 사실이 들어갈 거야.”
레온하르트의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의 정보원들이 전국 곳곳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때문에 이 마법 마차를 타고 가고 있는 겁니다.”
“아까 마법이 걸려 있다고는 하셨지만, 그냥 편하게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건가요?”
아이린은 갸웃하며 제이드를 바라봤다.
그때 서서히 마차가 멈췄다.
“아이린 씨는 안에 계셔서 몰랐겠지만, 이 마차는 투명화 마법에 걸린 상태라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
“그리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큰길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인적이 드문 숲길로 왔구나. 그러고 보니 오는 내내 사람을 보지 못했어. 세상에, 투명 마법이라니!’
아이린은 많이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통통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그녀의 모습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마차 문을 열었다.
“나는 밖에 나가 불 좀 피우고 있을게.”
그때 제이드가 얼른 대답했다.
“그래, 나도 같이 나가.”
“저도 함께 가요.”
“아니, 아이린은 불 다 피우고 저녁 준비되면 나오도록 해.”
“아니에요. 저도 도울게요.”
“아이린 씨, 레온의 말대로 하십시오. 산속이라 수도와는 달리 밤공기가 매우 춥거든요.”
“그래도 가만히 있기는 너무 죄송해서요.”
아이린의 기가 죽은 듯한 표정에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그게 더 큰일이야. 이번 소탕 작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아이린도 알고 있지?”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 작전에서 아이린의 임무가 아주 중요해.”
“임무요?”
아이린은 갑작스럽게 들은 임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게.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도록 해.”
그렇게 두 사람이 나가고 그녀는 커다란 마차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그녀는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 어쩐지 방해가 되는 것 같은데.”
아이린은 지난 생에서 보았던 영화를 떠올렸다.
남주가 가는 길에 힘이 약한 여주들이 따라나섰다가 오히려 약점이 되는 바람에 일을 망치는 장면들.
“그래서 따라오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린은 마차 창문을 열고 그들을 바라봤다.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갑자기 오느라 먹을 것도 준비 못 했네.”
그때 창문으로 제법 매서운 바람이 들어왔다.
아이린은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또다시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아, 나 정말.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이러니!”
아이린은 눈을 감고 마차 좌석 위에 무릎을 올려 그러안고 몸을 움츠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언가 따뜻한 것이 그녀의 몸을 덮어왔다.
아이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어요?”
“금방. 근데 아이린, 어디 아파?”
“아뇨. 좀 추웠는데….”
아이린은 슬쩍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담요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젠 괜찮네요.”
“응, 이거 마법 담요야. 이렇게 추위를 타는 줄 알았으면 진작 덮어 줄걸. 미안해, 아이린.”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밖에서 준비하느라 추웠을 텐데. 도움도 안 되고.”
그때 레온하르트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은 가끔 보면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보았다.
“네?”
“나 소드 마스터잖아. 이 정도 추위로는 맨몸으로 누워 자도 감기 같은 건 안 걸린다고.”
‘아! 소드 마스터!’
아이린은 그래도 어쩐지 그가 걱정되었다.
잠깐 창을 통해 느낀 것만으로도 바람이 매우 매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는 소드 마스터라도 춥긴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저와 함께 따뜻하게 있어요.”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아이린, 매우 고맙고 기쁜 말이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뭐가 안 되는데요?”
“밖에 저녁 식사가 다 준비되었거든.”
“세상에, 벌써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이 마법 담요를 덮으면 밖에서도 춥지 않을 거야. 함께 나가자, 아이린.”
“아!”
레온하르트는 마법 담요로 아이린을 둘둘 감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맸다.
그 모습이 마치 누에고치 같았다.
아이린은 따뜻하긴 했으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 황태자 전하! 뭐 하시는 거예요, 밖에 나가야 한다면서요?”
레온하르트는 이불에 둘둘 말려 버둥거리는 그녀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그대로 안고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 어!”
그때 불 앞에 앉아 있던 제이드가 그들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이린. 정말 따뜻하겠네요.”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워 버둥거렸다.
‘제이드 님이 보고 있는데 부끄럽게 왜 이러시는 거야 황태자 전하는!’
그런데 그녀가 움직일수록 레온하르트는 더 단단히 안아 왔다.
‘어, 어쩌지!’
레온하르트는 당황하는 그녀를 그대로 안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 불 앞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아이린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너무나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맛있는 냄새가 아니라 그립기까지 했던 냄새였다.
“설마… 닭꼬치?”
“오, 웬일이야, 바로 아네?”
‘헐, 뭐야 이 세계관! 시장 닭꼬치가 여기서 나와?’
“아이린 씨, 닭꼬치를 드셔본 적이 있으신가 봐요.”
“아, 네.”
그녀는 닭꼬치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1년 전 그녀가 이 세계로 온 그날을 떠올렸다.
‘후……. 이 세계로 온 그날도 닭꼬치를 안주 삼아 팩 소주를 마시고 있었었는데. 그날 소주를 안 마셨으면 그런 댓글도 안 달았을지 몰라.’
아이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닭꼬치를 바라봤다.
“아이린, 닭꼬치 안 좋아해?”
“네?”
“어쩐지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아, 아니에요. 좋아해요. 배가 많이 고파서 표정이 그랬나 봐요. 얼른 먹죠.”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온하르트는 얼른 닭꼬치 하나를 아이린의 손에 안착시켰다.
제이드 또한 그녀에게 꼬치를 건네려 했으나 레온하르트가 한발 빨랐다.
아이린은 닭꼬치를 얼른 한 입 깨물고는 오물오물 맛있게 먹었다.
레온하르트가 제이드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이드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고 있던 닭꼬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두 사람이 준비한 닭꼬치는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것이었다.
아이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맛있네요.”
“그렇지. 제이드랑 가끔 어쩔 수 없이 야영하게 되면 이렇게 닭꼬치를 가져와 구워 먹곤 했어.”
닭꼬치는 적당히 간이 되어 담백하고 쫄깃쫄깃했다.
‘여기다 빨갛게 매운 양념을 바르면 더 맛있을 텐데.’
소금구이도 맛있었지만, 아이린은 즐겨 먹던 고추장 양념이 그리웠다.
‘뭐, 다음에 집에서 그렇게 만들어서 먹어 볼까?’
아이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꼬치를 하나 더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러다 문득 레온하르트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참! 황태자 전하, 아까 말씀하신 제 임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실 아이린의 임무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단지 그녀의 안전을 위해 무작정 데리고 온 것이었다.
아이린이 기운이 없어 보여서 뭔가 임무를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전부였다.
그러니 대답을 준비했을 리 없던 레온하르트는 순간 당황했다.
“아! 그게 무슨 임무냐 하면…!”
제이드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신 대답했다.
“그러니까… 위장 임무입니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위장 임무요?”
제이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불법 노예시장을 소탕하러 가는데 남자 둘이 나란히 들어가면 의심받을 위험이 있으니까요.”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제이드의 말뜻을 알아채고 맞장구쳤다.
“그래, 아이린과 내가 연인으로 위장하고 들어가면 의심을 받지 않을 거야.”
아이린은 연인이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연인이요?”
“아, 으응.”
아이린은 위장이지만 그와 연인 노릇을 한다는 생각에 어쩐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흐음, 아무래도 레온 혼자 짝사랑은 아닌가 보네.’
제이드는 그런 아이린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친우를 보았다.
‘저 녀석은 알고 있을까?’
* * *
짹짹, 짹짹짹.
시끄럽게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에 아이린은 눈을 뜨며 벌떡 일어났다.
“아침부터 갑자기 웬 새 소리지?”
평민들이 사는 동네라고는 해도 도심 한복판에 사는 그녀로서는 무의식중에 들려오는 ASMR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참, 어제 산속에서 잤었지!”
어젯밤 세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차에서, 두 사람은 밖에서 야영을 하며 잤다.
비록 따뜻한 마차에서 자긴 했지만, 집이 아니었기에 밤새 뒤척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정신은 아직 멍한 상태였다.
“잘 잤어, 아이린?”
아이린은 순간 앞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온하르트였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그를 비추었다.
햇빛에 익어 가는 가을 곡식처럼 그의 아름다운 금발이 반짝거렸다.
게다가 크게 호선을 그리는 그의 눈 아래 눈물점이 그의 미소에 살짝 흔들렸다.
아이린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매일 보는 광경이지만 그의 미소는 여전히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이게 웬 눈 뜨자마자 눈 호강이지? 아니, 볼수록 눈이 시린데, 안구 테러인가?’
“아이린, 여기 물.”
“고, 고마워요.”
일어나자마자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본 탓인지 그녀는 순간 말을 더듬었다.
아이린은 물을 마시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어? 마차가 움직이고 있었네?”
“응, 지금 벌써 12시가 다 되었는걸.”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헉, 벌써요? 깨우시지 그랬어요.”
“계속 마차를 타고 이동할 건데 왜 깨우겠어. 게다가 아이린, 어제 많이 뒤척이는 것 같던데.”
아이린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저 마차 안에서 잤는데, 그게 들렸어요?”
“소드 마스터가 되다 보니 시력과 청각 같은 감각 기관들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올라가더라고. ……좀 징그럽고 무섭지?”
아이린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징그럽고 무섭긴요.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좀 뭐하지만 대견하시죠.”
그녀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순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대견해?”
‘어머, 뭐야 저 대형견 같은 눈은.’
당장 그녀 앞에서 꼬리라도 흔들 것 같은 그의 표정이 귀엽게 보이는 아이린이었다.
“네, 그럼요. 어린 시절 남보다 자지도 못하고, 맘껏 쉬지도 못하고, 피나는 노력으로 소드 마스터가 되신 거잖아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마음속으로 따뜻한 무언가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 말……,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네? 그 말이요?”
“응, 대견하다는 말.”
아이린은 그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심을 알았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많이 하시던 말이었어.”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린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 또한 날 많이 사랑해 주셨지만……. 대견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서.”
보통 누군가에게 대견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는 어린 시절이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7살에 벌써 끝나 버렸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상념을 깨고 아이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와 코끝이 살짝 붉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도 어쩐지 그런 그녀를 보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허리를 숙였다.
“흠흠. 아이린, 배고프지? 잠깐만.”
레온하르트는 어제처럼 테이블을 폈다.
다시 보는 광경이지만 아이린의 눈에는 여전히 새롭고 신기했다.
레온하르트는 보물 창고처럼 바닥에서 무언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가 상자를 여니 먹음직하게 붉게 익은 딸기가 접시에 예쁘게 담겨 있었다.
“와, 딸기다!”
“후후, 좋아할 줄 알았어.”
레온하르트는 작은 과일 포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맛있게 먹어 줘서 내가 더 고마운걸.”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딸기 하나를 입에 넣었다.
“우와 달다! 그런데 전하는 안 드세요?”
“나는 아침 먹은 게 아직 소화되지 않아서. 아이린, 많이 먹어.”
“네!”
그때부터 아이린은 신나게 포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보다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딸기를 다 먹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오늘 그는 평소에 출근할 때마다 마주하는 정돈된 모습과 매우 달랐다.
작게 열어 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금실 같은 앞머리가 살살 굽이쳤다.
그때마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서류만 보았다.
답답했는지 셔츠 단추도 두 개쯤 풀고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있었다.
덕분에 아이린만 눈 호강을 하고 있었다.
‘으아아! 설마, 나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건가?’
살짝 열린 셔츠 사이로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살짝 보였다.
얼마나 수련을 열심히 한 것인지!
가운데가 갈라져 있는 커다란 그의 가슴이 불룩하게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와, 딱 소설에서 말하던 베이글남인데?’
한동안 그 가슴을 바라보던 아이린의 시선은 이윽고 팔뚝으로 옮겨갔다.
묵직한 서류를 들고 있어서일까?
유난히 불거진 힘줄에 어쩐지 그녀의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하, 어쩌지. 나 또 시작인 거야?’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볼 때마다 자꾸만 뛰는 가슴에 그만 체념하고 말았다.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즐기자.’
아이린은 슬쩍 창가를 보다가, 다시 슬그머니 그를 보기를 반복했다.
‘근데, 아까부터 저 서류만 보고 계시네. 무슨 서류길래 그러지?’
아이린은 문득 궁금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서류를 보시나요?”
“응, 피도르 후작령 북쪽 변경의 영지에 관한 서류야.”
“피도르 후작령의 변경 영지라면 세키아 영지를 말씀하시는군요.”
“알고 있었군.”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서류, 제이드 님이 주신 자료를 제가 조합해 올린 서류인걸요.”
“그래? 그럼 이곳에 관해 잘 알고 있겠군.”
“네, 지금 기아 문제가 심각한 지역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응, 맞아.”
“그래도 피도르 후작만 처단하면 그 문제도 해결되는 거 아닌가요?”
“반쯤은 그렇지.”
“반쯤이요?”
“응, 피도르 후작이 제거되면 중앙에서 보내는 지원금이 세키아의 영지민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되니까.”
아이린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레온하르트가 긴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후우, 그곳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어.”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고질적인 문제라니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그곳은 작황이 좋지 않을 때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기로 유명해.”
아이린은 무언가 생각하듯 허공을 보다 이내 그를 보며 말했다.
“그건 모두 피도르 가문 때문 아니었나요?”
“물론 그런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곳은 농지가 부족해.”
“저런. 그건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네요. 그 지역은 산림이 많은 변경 지역이니까 그렇겠죠?”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게다가 국가에서 적군을 막기 위해 무분별한 벌목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 때문에 그곳 영지민들의 수입은 매우 적을 수밖에 없어.”
아이린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적은 수입에 영주가 세금까지 걷어가니 기아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작황이 좋지 않을 때는 밀값이 폭등하니 밀가루를 많이 살 수가 없어. 사냥을 해서 먹고사는 데도 한계가 있고.”
“그렇겠군요. 사냥을 무분별하게 하면 그 일대의 동물이 씨가 말라버릴 테니까요.”
‘방법이 없을까?’
아이린은 고민을 하는지 눈을 감고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이내 눈을 뜨고 그에게 물었다.
“전하, 혹시 그곳의 지도가 있나요?”
“응, 잠시만.”
레온하르트는 옆에 쌓아 놓은 서류 더미에서 네모지게 접은 낡은 종이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이린, 여기 있어.”
아이린은 작게 접힌 낡은 지도를 조심히 펼쳤다.
그녀는 순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민 지도는 단순히 지리를 나타내는 지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도 곳곳에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주요 산업들이 꼼꼼히 표시되어 있어, 그가 오랫동안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아이린은 지도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들었다.
그리고 그가 적은 내용과 지도를 비교하며 하나하나 세밀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어, 이런 방법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아이린은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지도를 내밀었다.
“메르헨과 국경이 닿은 곳이 여기죠?”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조금 전 국경 문제 때문에 나무를 함부로 벌목하지 못한다고 하셨죠.”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그래.”
아이린은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변경 경계선에 있는 이 산 말고, 그 앞쪽에 있는 산도 벌목을 할 수 없나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할 수는 있지만, 그 산은 나무가 적어서 벌목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엔 매우 부족하지.”
아이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말은 여기서 임업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임업이 아니라니? 그러면?”
“여기서 밭농사를 하면 된다는 거죠.”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여전히 갸웃하며 물었다.
“밭농사? 산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어?”
아이린은 이전 생에서 배웠던 계단식 논을 떠올렸다.
“저도 농사 전문가는 아니라 자세히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거예요.”
아이린은 빈 종이 하나를 꺼내 책에서 보았던 계단식 논을 그려 보았다.
“자, 이런 식으로 산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는 거예요. 그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벌목할 나무가 적다고 하셨죠?”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그린 계단식 논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지역을 수도와 달라 여름철에도 기온이 서늘하다고.
‘오호, 말 그대로 고랭지 농업이 적당한 지역이잖아.’
“시원한 기후에도 잘 자라는 채소들이 있어요. 배추나 감자처럼요.”
“배추는 알겠는데 감자? 설마 악마의 열매를 말하는 거야?”
‘헐, 감자를 보고 악마의 열매라니! 에디도 그러더니 이곳의 황자님들은 참 한결같으시네.’
“악마의 열매라니요. 감자가 얼마나 맛있는데.”
아이린은 그때와 똑같은 대화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린. 어릴 적에 감자는 시체처럼 땅속에서 나서 부정하다고 배웠는데.”
아이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부정한 감자를 먹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던가요?”
“부정하게 된다고 들었어.”
“그럼, 황태자 전하는 이미 부정하시네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응? 내가 부정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드셨는걸요, 그 부정한 음식.”
“뭐? 난 지금까지 살면서 감자를 먹은 적이 없는데.”
“흐음, 있는데요.”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먹었던 음식들을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정말 감자를 먹은 기억은 없었다.
아이린은 싱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제가 싸 온 샌드위치 기억하시나요?”
레온하르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그 샌드위치 매우 맛있었는데.”
“그 샌드위치에 감자가 들어 있었어요.”
레온하르트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황태자 전하가 드신 그 샌드위치 속 재료에 감자가 들어갔다고 말씀드렸어요.”
레온하르트는 더없이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정말이야?”
“후후, 네.”
레온하르트는 순간 충격에 빠졌다.
“어, 어떻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악마의 열매일 수 있지? 설마 누군가의 음모인가?”
“엥, 음모라니요?”
“맛있으니 혼자만 먹으려는?”
그 순간 아이린은 웃음이 터졌다.
“뭐라고요? 아하하.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무언가를 고민하듯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데 아이린.”
“네. 말씀하세요.”
“아이린의 말대로라면 그 맛있는 감자라는 열매는 시원한 곳에서 잘 자란다는 것이지?”
아이린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들고 있던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하하하, 아이린, 그대는 정말 천재야!”
그녀가 살던 세계에선 초등학생들도 학교에서 배우는 게 고랭지 농업이었다.
겨우 그걸 가지고 천재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민망했다.
그때였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아이린을 폭 하고 자신의 품속에 꼭 안았다.
아이린은 갑자기 자신을 안아 오는 레온하르트 때문에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레온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순간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충동적으로 그녀를 안았을 뿐, 결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품속에 쏙 들어오는 말랑말랑한 그녀의 몸에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이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할 때처럼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지! 이러다가 내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르겠어!’
그 순간 그의 품속에 있던 아이린 역시 그와 같은 현상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잘 익어 터지기 직전의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흘끔거리며 훔쳐보았던 그의 단단하고 불룩한 가슴이 그녀의 눈과 2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의도치 않게 그의 갈라진 가슴골 사이에 코를 박고 있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에 맞춰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린은 가까이서 움직이는 그의 가슴이 온몸으로 느껴져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점점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까지 그녀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그녀 자신이 다 부끄러워졌다.
아이린은 처음에는 놀라 멍했지만, 그녀 역시 심장이 그처럼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이대로라면 정말 위험하겠다 싶어졌다.
마차 안이기는 하지만 밀폐된 공간, 게다가 다른 여자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있으니…….
‘빠, 빨리 놔줘야 하는데…….’
그의 이성은 그녀를 놓아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팔이 어째선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안고 싶다.’
그때였다.
서서히 마차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 얼른 나와. 점심 준비해야지!”
아이린은 놀라 손으로 그의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레온하르트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그녀를 안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듯 헛기침을 하였다.
“흠흠, 알겠어. 나갈게.”
겨우 표정을 바로 한 레온하르트는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아이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린이 어느새 어젯밤 덮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린은 이불 속에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렇게 웃지 말고 얼른 나가 보세요.”
“큭큭, 알겠어. 아이린도 준비 다 되면 나오도록 해.”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불을 덮어쓴 채 그러고 있으니, 마치 애벌레가 꿈틀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마차 밖으로 나갔다.
이미 점심 준비를 마쳤는지 제이드가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야?”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긴. 대낮에 음식 만든다고 오래 머물 수도 없고, 그림자들이 가까운 마을에 가서 사 왔어.”
그때 아이린이 마차 문을 열었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한걸음에 달려가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부축했다.
아이린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에게 살짝 묵례를 했다.
제이드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호밀빵 하나를 내밀었다.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와, 호밀빵 샌드위치네요.”
“네, 예전에도 이 마을을 지날 때 먹어 봤는데 매우 맛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커다란 호밀빵 사이에는 새콤달콤한 소스로 버무리고 잘 익힌 고기와 신선한 채소가 듬뿍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푸짐한 샌드위치는 정말 오랜만이네.’
아이린은 원래 세계에서 자주 갔었던 샌드위치 체인점을 떠올리며 빵을 크게 한 입 깨물었다.
“으음, 정말 맛있어요.”
“그렇죠!”
그때 그녀 옆에 앉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아이린, 이것 좀 마시면서 먹어.”
아이린은 샌드위치가 제법 맛있었는지 또 한 번 크게 깨물어 먹고는 물었다.
“그게 뭐예요?”
“우유.”
“에이, 키 크는 아이도 아니고 무슨 우유예요.”
“그렇다고 그대가 차를 마실 수는 없잖아.”
아이린은 씁쓸하게 웃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후우, 그러네요.”
‘이놈의 몸뚱이. 어쩌지, 계속 차를 마셔서 주량 키우듯이 차량을 키워야 하나?’
아이린은 정말 마음이 답답했다.
어찌 된 몸인지 그녀가 원래 즐기던 차도, 커피도, 술도, 어느 하나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 차는 마실 수 없지만 우유를 많이 먹으면 적어도 키는 더 클지도 몰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키가 크다니?”
“아이린, 아직 20살이잖아! 아직 늦지 않았어. 우유를 먹다 보면 키가 클 거야.”
아이린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입만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제이드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아이린 씨. 우유를 좀 더 드시는 게 좋겠어요.”
“으힉, 제이드 님까지 그러기예요?”
제이드는 말없이 그녀를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아이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호밀빵을 한입에 다 넣고 씹었다.
“으악! 아이린 그 큰 걸 입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해!”
“내 입이에요. 내 맘대로 먹을 거라고요!”
“알겠어. 그래도 우유도 마셔가면서 먹어.”
아이린은 그에게서 우유를 받아들고 한 번에 꿀꺽 마셨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했다.
“아이린 그렇게 먹다 탈 나!”
아이린은 그를 살짝 흘겨보고는 다시 남은 호밀빵 하나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때 조용히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씨, 드시는 것도 좋지만 이러다 드레스가 맞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린은 잠시 먹던 것을 멈추며 제이드를 바라봤다.
“드레스라뇨?”
“우리는 불법 노예 시장에 잠입하는 겁니다. 부자 남자 역할의 레온과 연인 행세를 하려면 그에 걸맞는 드레스를 입어야겠죠.”
“아! 그렇겠네요.”
아이린은 살짝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펍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챙겨 왔으면 좋았을 텐데.’
“어쩌죠. 그런지도 모르고 편한 드레스만 가져왔는데.”
그때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가 일어서더니 마차로 걸어갔다.
그 순간 아이린의 시선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움직였다.
레온하르트는 마차 지붕 위에 있는 작은 문을 조심히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은빛의 커다란 상자를 꺼내왔다.
“자, 아이린. 선물이야.”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물이요?”
레온하르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내 연인으로서 입을 드레스와 구두야.”
그때 제이드가 시계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아이린 씨, 출발 할 시간이 다되었네요. 아무래도 그 드레스는 지금 마차로 가서 갈아입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이린이 놀란 눈으로 제이드를 보며 물었다.
“벌써요?”
그녀의 물음에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그곳에 도착하기 전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도착해서 숙소까지 잡으려면 지금 출발해도 조금 촉박할 수도 있겠네요.”
“알겠어요. 얼른 준비할게요.”
레온하르트는 마차로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드레스와 구두가 든 상자를 마차 안에 조심히 넣었다.
아이린은 옷을 갈아입으러 얼른 마차 가까이 다가갔다.
상자를 마차 안에 넣은 레온하르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그녀를 안아 마차에 올렸다.
‘히익!’
아이린은 순간 놀라 귀까지 붉어지며 마차 문을 닫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레온하르트 뒤에선 제이드가 그를 향해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레온, 연애하는 것은 좋은데 오늘따라 이 친구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 같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배려라니? 내가 언제 제이드 너를 배려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제이드는 그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잡았다.
“레온, 정말 너무하군! 솔로인 내 앞에서 자꾸만 염장을 지르고 얼굴 붉어지게 꽁냥거려 놓고는 시치미라니!”
레온은 순간 짠한 눈으로 제이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이드, 미안했어. 내 배려가 많이 부족했군.”
제이드는 장난스럽게 말하던 아까와 달리 진심인 듯 말했다.
“네가 지은 지금 그 표정이 더 나에게 상처가 된 것 같아.”
“후후, 그것도 미안하군.”
그때, 마차안에서 아이린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저 다 준비 되었어요.”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에게 가볍게 눈을 찡긋하고는 마차로 걸어가 올라탔다.
그런데 마차에 탄 그의 모습에서 왠지 멈칫거리는 기색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붉히며 마차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아이린 씨가 귀엽기는 하지만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바보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제이드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마음으로는 아무리 봐도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편 그 시각, 마차에 탄 레온하르트는 천국과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제이드 이 녀석, 도대체 왜 이런 드레스를 사 온 거야!’
제이드가 급하게 그림자들에게 시켜 준비한 드레스는 정말 귀엽고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레온하르트의 심장에는 정말 매우 좋지 않았다.
아이린이 입은 드레스는, 일단은 어린 소녀들이 즐겨 입을 것 같은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물론 그건 수도의 귀족 소녀들이 아닌 활동이 많은 시골의 평민 소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시골길은 수도처럼 도로가 매끄럽게 닦여있지 않았다.
그리고 사설 마차도 잘 다니지 않아 평민들은 가까운 거리 정도는 걸어서 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시골 소녀들은 길어 봐야 무릎 살짝 아래 정도까지 오는 짧은 치마를 선호했다.
비가 와서 길이 질척해지기라도 하면 긴 드레스 자락은 온통 진흙으로 엉망이 되니까.
그런데 그의 심장에 찌릿한 고통을 일으키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드레스가 연보랏빛의 샤 원단을 여러 겹 겹쳐 만든 옷이어서였다.
이게 왜 문제였냐면, 평소에는 펑퍼짐한 옷으로 가리고 다니던 아이린의 몸이 확 도드라져 보였다.
게다가 얇은 천이 가슴 부근을 살짝 덮은 모습이 오히려 레온하르트의 가슴을 더 뛰게 했다.
‘거기다 한겨울인데 저 얇은 레이스 스타킹은 대체 뭐냐고!’
레온하르트는 수줍게 발그레한 그녀의 동그란 볼이 귀여웠다.
평소의 무거워 보이는 무채색 계열의 드레스가 아닌, 발랄해 보이는 밝은색 드레스가 그녀의 귀여운 분위기를 배가 되게 했다.
한편 원단이 만들어낸 아찔한 느낌은 자꾸만 그의 마음을 들뜨게 해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와 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 지금이 너무 좋기도 하면서도 아찔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아름다운 이 모습을 결코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레온, 그렇게 많이 이상해요?”
아이린은 아까 전 마차에 탄 뒤부터 그녀를 보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했다.
말도 없이 얼굴빛만 저렇게 열두 번도 더 바뀌니 혹시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었다.
“아! 미안!”
아이린은 당황하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정말 많이 이상했군요.”
레온하르트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난 그저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정말이에요?”
레온하르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 표정이 널 불안하게 했다면 미안해! 정말 네가 아름다워서.”
아이린은 순간 긴장이 풀린 듯 긴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럼 다행이에요. 이런 드레스는 처음이라 이상하게 보일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때였다.
살짝 눈을 접어 웃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는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보이기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리고….”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리고요?”
“동화 속에나 나오는 요정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그, 그래서….”
‘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고 싶어.’
아이린은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오그라드는 멘트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 요정이라니!’
그러나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설레는 마음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래서일까?
그에게서 유일하게 연약해 보이는 얇으면서도 붉은 입술에 그녀의 시선이 자꾸만 머물게 되었다.
“후후, 그래서요.”
그 순간 오늘따라 목이 타는 것인지 레온하르트의 붉은 혀가 살짝 나와 입술을 적시고 들어갔다.
그 모습이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체구와 상반되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린은 그에게 말을 계속 시키고 싶었다.
어쩐지 레온하르트를 볼수록 나쁜 생각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긴장으로 목이 타는 듯한 그에게 물도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때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진득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지금 네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나만 보고 싶어져.”
아이린은 그의 속삭임에 귓속이 간지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속삭인 곳은 분명 귀인데 아이린은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이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레온하르트는 살짝 눈물을 머금은 듯한 그녀의 눈동자에 홀린 듯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그리고 아이린 또한 그의 긴 속눈썹에 자꾸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호수 같은 눈동자에 폭 빠져 버렸다.
언제 마차가 멈췄는지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한데, 이제 그만들 하고 내리는 게 좋겠어.”
먼저 상념에서 깬 레온하르트가 얼른 그녀 몸에 자신의 재킷을 둘러주며 입을 열었다.
“벌써 도착했군.”
“벌써는 무슨, 한참 전에 도착했어. 계속 불렀는데 두 사람 아무 대답이 없더라고.”
그때서야 아이린 또한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성이 돌아온 아이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이드 님. 얼른 내릴게요.”
그때 레온에게 말한 목소리와 달리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에요. 천천히 준비되면 내리세요.”
그 순간 마차 문을 연 레온하르트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제이드를 바라봤다.
제이드는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레온하르트가 마차에서 내리고 아이린도 그의 도움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로 위장한 제이드는 조용히 그들에게 말했다.
“저쪽에 있는 호텔 보이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림자들의 정보에 의하면 저 호텔 지하에서 매주 대규모의 불법 노예 시장이 열린다고 해.”
그때 아이린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악의 축인 호텔이군요.”
“네, 오늘 두 분의 임무는 저 호텔에 숙박하면서 노예 시장에 잠입하는 것입니다.”
아이린은 어쩐지 살짝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태자 전하와 저 이렇게 둘만 들어가나요?”
제이드는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곳엔 이미 그림자들이 여러 명 잠입해 있으니까요.”
아이린은 그제야 안심을 한 듯 눈을 접어 웃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섭섭한 투로 말했다.
“아이린, 네 곁에는 소드 마스터인 내가 있잖아. 우리 둘만 있어도 겁먹을 필요 없다고.”
제이드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 씨, 그건 레온의 말이 맞습니다. 이곳에 잠입시켜둔 그림자들을 모두 모아도 레온이 가장 강할 겁니다.”
“우와! 정말요?”
제이드는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레온 옆에만 딱 붙어 계십시오. 그 누구와 있는 것보다 이 녀석 옆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테니까요.”
레온하르트는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들어가지.”
아이린은 그의 손을 잡으며 몸을 돌렸다.
순간 제이드는 돌아선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제이드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아이린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온의 곁에 꼭 붙어 계시라는 말, 명심하십시오.”
그 순간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돌려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제이드는 자꾸만 몰려오는 나쁜 예감에 한참을 그들이 들어간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 *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은 채 호텔 안으로 들어간 아이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밖에 서서 볼 때만 해도 그곳은 그냥 평범해 보이는 호텔이었다.
그런데 안에 들어와 보니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부터 바닥에 깔린 타일까지 모든 것이 휘황찬란했다.
그때 직원 둘이 다가와 그들을 향해 살짝 묵례하고는 레온하르트와 아이린의 가방을 받아 들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들은 중앙에 위치한 프론트로 두 사람을 안내하였다.
그림자에 따르면 저 중앙 프론트에서 일반 고객과 노예 시장에 참여하는 고객을 가린다고 했다.
레온하르트는 이미 마차 안에서 어두운 갈색 가발을 쓰고 얼굴을 바꾸는 물약까지 먹었다.
그녀를 만난 그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한껏 한량처럼 차려입은 공단 재질의 옷이었다.
얼굴은 다른 모습으로 바꿨다지만, 체격은 도저히 가려지지가 않았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반짝이는 공단 재질 때문에 더 도드라져 보이는 그의 근육질 몸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더 움직임을 크게 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 순간 아이린은 호텔 안에 앉아 있던 여인들의 눈빛이 진득하게 그를 따라다니는 게 느껴져,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프론트에 도착한 레온하르트는 직원에게 살짝 속삭이듯 말했다.
“내 귀여운 종달새가 노예를 사고 싶다고 말해서. 이곳에서 살 수 있다고 하던데. 가능한가?”
‘갑자기 웬 종달새? 뭐야, 나 완전히 새 된 거야?’
아이린은 순간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갈무리하며 생각했다.
‘…들키지 않으려면 장단을 맞춰야겠지?’
아이린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나의 꿀물도 참. 저 너무 부끄러워요.”
아이린은 순간 자신이 뱉은 말에 자신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꿀물이 달콤한 것이 아니라 속을 느끼하게 만드는 거였나 봐….’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호텔 직원도 흠칫하였다.
아이린은 쓰게 웃으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호텔 직원 정말 극한직업이었구나.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그 직원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레온하르트는 그 직원에게 작은 다이아몬드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요즘 잘나간다는 블루 다이아몬드인데 말이야.”
순간 놀란 표정을 짓던 직원은 빠르게 다이아몬드를 받아 들고 품에 넣으며 말했다.
“내일 밤 12시 이곳 지하에서 열립니다.”
“그럼 내일 그냥 지하로 내려가면 되는 건가?”
“아닙니다. 이 통행패가 있어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직원은 시커먼 해골 무늬가 새겨진 통행패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레온하르트는 직원이 내민 통행패를 밭아 주머니에 넣으며 싱긋 웃었다.
“고맙네.”
그때 직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건 손님께서 머무실 스위트룸 열쇠입니다.”
그때 아이린이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어머, 나의 꿀물, 이곳 직원들이 참 친절하군요. 이곳에 매일 오고 싶어졌어요.”
레온하르트는 살짝 발그레해진 그녀의 얼굴을 긴 검지로 살짝 훑어 내렸다.
“후후, 그럼 나의 귀여운 종달새와 함께 이곳 스위트룸에서 둥지를 틀어야겠어.”
“우와! 기뻐요, 꿀물.”
그렇게 무슨 정신인지 모르게 꿀물을 외치며 그들은 룸에 겨우 도착했다.
아이린은 직원들이 가방을 놓고 나가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으아아, 속이 느글거려 죽겠어. 내가 다시는 꿀물 타 먹나 봐라…!”
그때 레온하르트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후후, 왜 그래 종달새. 난 꿀물이라고 불러 주는 것 너무 귀엽고 좋았는데. 앞으로 나 황태자 전하 말고 꿀물이라고 불러줘.”
“으악! 그만하시죠. 저 정말 그 단어 계속 말했다가는 온몸이 녹아 없어질 것 같거든요?”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지, 종달새! 내일 밤 12시까지는 그대는 나의 종달새이고 나는 그대의 꿀물인걸.”
아이린은 그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내려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레온이라 불러 주면 내려 주지.”
그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이린은 어쩐지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린은 내 품을 매우 좋아하는 군.”
그녀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레온. 내려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은 채 방 한가운데 있는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가 조심히 그녀를 내려놓았다.
‘휴우, 심장 파괴자 같으니라고!’
아이린은 긴 한숨을 쉬고는, 그제야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놀라움에 눈이 절로 커졌다.
“와아……, 아까는 몰랐는데 방이 참 넓고 아름답네요.”
방안은 대충 둘러봐도 50평은 넘어 보였다.
천장 한가운데 크리스탈로 장식된 화려한 샹들리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5명이 누워도 남을 법한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벽에는 고가의 미술품이 걸려있었고 군데군데 조각들이 방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벽지조차도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미술 작품 같았다.
‘침대가 참 크네. 아참! 침, 침대가 하나잖아! 어쩌지?’
그 순간 그녀는 그와 단둘이 한방에 있는 것이 의식이 되기 시작했다.
‘나 왜 이러지? 매일 한방에서 일도 했으면서.’
그때 레온하르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이것 좀 먹어봐!”
아이린은 무심코 그가 내민 디저트를 받아먹었다.
‘이건, 혹시 마카롱?’
그야말로 레온하르트 때문에 나갔던 정신이 번쩍 드는 맛이었다.
‘와, 이거 완전 천상의 달콤함이잖아!’
“어때, 맛있지?”
아이린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정말 맛있어요!”
아이린은 한 입 한 입 마카롱을 깨물어 먹을 때마다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리고 이내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각종 디저트와 달콤한 과일이 올려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건네준 디저트에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후후. 자, 아이린! 이 맛도 한 번 먹어봐! 맛있어 보여.”
색색의 마카롱들은 각각 다른 크림들이 넘칠 정도로 가득 찼다.
마치 이전 세계에서 먹었던 뚱카롱을 연상시켰다.
“으아! 이것도 맛있어요.”
레온하르트는 활짝 함박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도 기분이 좋아져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거물들이 많이 올 듯한 호텔에 주방장을 아무나 쓰지 않을 것 같았어.’
아이린은 마카롱이 맛있었는지 마카롱 종류만 세 개째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커다란 재킷 속에 감싸인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불편해 보였다.
“아이린, 재킷은 이리 주고 편하게 먹도록 해.”
아이린은 마카롱을 입 안 가득 넣은 채로 고개를 살짝 끄떡였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재킷을 받아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보며 생각했다.
‘고귀한 혈통의 황태자 신분이라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는데. 참 자상하단 말이야.’
그때였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올 사람 없지 않아요?”
아이린은 순간 불안해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아이린, 걱정 마.”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문으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그때 밖에서 기름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예 시장의 주인입니다.”
‘피도르 후작?’
두 사람은 살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온하르트는 곧 이성을 찾으며 걱정 말라는 듯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노예 시장은 12시라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직원이 특별 고객이 왔다고 연락을 주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잠시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슬쩍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애써 안정을 차린 듯 소파에 다리를 꼬며 여유 있게 앉아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방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피도르 후작은 소문대로 70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나마 몸은 관리하는 건지 보통의 할아버지처럼 대머리에 배가 나오진 않았다.
그냥 나이 든 영국 신사를 보는 느낌이랄까?
외모만 봐서는 소문처럼 악랄해 보이지는 않았다.
피도르 후작은 모자를 벗어 정중히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호텔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특별한 용무가 있으십니까?”
“다른 용무는 없습니다. 그저 룸서비스를 선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였다. 옆으로 찢어진 뱀 같은 눈동자가 아이린을 핥듯이 바라봤다.
마치 뱀의 날름거리는 긴 혓바닥이 그녀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에 아이린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의 눈길에서 그런 기색은 싹 사라졌다.
‘뭐지? 착각이었나?’
레온하르트도 그녀와 같은 기분이었는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무가 끝나셨으면 이만 가셨으면 합니다. 제 종달새가 마차 여행에 지쳐 있어서요.”
“하하, 그래야죠. 고객님의 귀여운 종달새가 어디가 아프면 안 되죠.”
그렇게 말한 피도르 후작은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아이린은 순간 소름이 돋아 두 팔로 몸을 가리며 그의 시선을 피해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얼른 숨었다.
피도르 후작은 능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좇았다.
이윽고 그녀가 숨자 입꼬리를 올리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하에서 뵙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절로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다행히 애써 살기를 감출 만큼의 이성은 있었다.
하지만 굳이 목소리까지 부드럽게 내 주고 싶지는 않아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쉬어야 하니 빨리 나가시죠.”
피도르 후작은 살짝 묵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도 피도르 후작은 아이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문을 세게 끌어당겨 닫았다.
그만 바닥을 치는 기분이 들어 순간 살기가 끓어올랐다.
그때 잔뜩 겁에 질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 레온. 저 무서워요.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언제 그쪽으로 갔는지 침대에 가서 이불을 둘둘 감싸고 있는 아이린이 보였다.
‘후우, 이곳에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이린의 연약하고 겁먹은 토끼 같은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레온하르트는 긴 다리로 한 걸음에 다가가 이불 채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품속에 안겨 있으니 어쩐지 포근하고 안락함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불안해 보이는 그녀를 위로하듯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평소 누군가가 머리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레온하르트의 손길이 그녀의 머리를 만질 때면 더없이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따뜻해. …어쩐지 안심이 돼.’
아이린은 그대로 레온하르트에게 안긴 채 잠이 들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품에 폭 감싸여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린, 왜 이리 경계심이 없는 거야. 설마 내가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 건가?’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입가에 미소가지 머금은 그녀의 평화로운 모습에 초조해졌다.
그는 멍하니 아이린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계속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린처럼 그의 마음도 점점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후후, 마법의 머리카락인가?”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솜사탕 같은 머리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나지 않아 그 또한 그녀처럼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방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아이린은 계속 울려오는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긴 시간 마차로 이동해서 그런지, 잠을 자도 영 피곤이 풀리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이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자정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은 그제야 자신이 방안에 혼자 있음을 알았다.
“레온은 어디 간 거지?”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고객님.”
목소리는 호텔에 막 들어왔을 때 프론트에서 들었던 직원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아이린은 얼른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고객님께 전할 물건이 있습니다. 이 문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그냥 문 앞에 놓고 가세요.”
직원은 난처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건 안 됩니다. 고객님의 연인 분께서 고객님께 꼭 직접 전해 드리라 했습니다.”
아이린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민했다.
“레온도 없는데 문을 열어도 될까? …그런데 정말 레온의 심부름이면 어쩌지?”
아이린은 방문 앞을 그렇게 잠시 서성였다.
“고객님 제가 다시 업무를 보러 가야 해서요. 얼른 이 물건만 전해드리고 가겠습니다.”
아이린은 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후우, 알았어요.”
‘그래, 하나 둘 셋 하면 문을 아주 작게 열고 얼른 문을 닫는 거야.’
아이린은 작게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아이린은 문을 작게 열어 빼꼼 밖을 보았다.
그 순간 아까 보았던 뱀 같은 눈동자의 피도르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피도르 후작은 사냥감을 발견한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이린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얼른 닫아야 해!’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작게 열린 방문에 힘을 주어 닫으려 했다.
“하하, 지금 문을 닫으려는 거야? 자, 한번 닫아봐, 귀여운 아가씨!”
그 순간 밖에서 문을 당기는 강한 힘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버렸다.
“어어어!”
밖에 있던 자들은 그런 아이린의 모습을 비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그 순간 아이린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른거렸다.
‘하아, 나 정말 왜 이렇게 바보 같지? 레온, 어디 간 거예요! 나 정말 무서워요!’
아이린은 잔뜩 겁에 질려 몸이 벌벌 떨려왔다.
하지만 고개를 흔들며 애써 이성을 끌어올렸다.
‘안 돼, 이대로 맥없이 끌려 갈 수는 없어! 시간을 끌어야 해!’
아이린은 마지막 힘을 다해 문을 당겼다.
“으아악!”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밖에서 당기는 힘을 이겨 내지 못하였다.
아이린은 그대로 문을 잡은 채 끌려갔다.
이내 밖에서 당기는 큰 힘이 그 문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꺄악!”
문고리를 잡고 버티고 있던 아이린은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으윽!”
“하하하하.”
악당들은 악당답게 그녀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어 댔다.
마치 그녀를 작은 장난감으로 보는 듯했다.
그사이 프론트 직원을 선두로 시커먼 장정들이 방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때 무리 중 하나가 그녀를 향해 음흉한 눈길을 내보이며 말했다.
“완전 자그만 꼬마 숙녀였네. 으음, 꼬마가 아닌가?”
“후후, 딱 보스의 취향이군. 얼굴은 소녀 같으면서도 몸은 소녀 같지 않은.”
‘으윽, 이것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순간 아이린은 눈이 번쩍 뜨였다.
데이지가 말했던 피도르 후작의 변태적 취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들 옆에서 함께 웃고 있는 피도르 후작의 음흉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윽, 늙은 구렁이 같으니라고! 이, 이대로 끌려가서는 안 돼!’
“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
아이린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커다란 복도에 메아리치듯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남자들을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에구, 귀여워. 도와 달라고 소리치는 거야?”
“아가씨, 더 소리쳐봐!”
“그래, 목소리가 참 귀엽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그래, 아가씨. 더 절실해야지. 그래야 잡아가는 재미가 있지!”
그 순간 아이린은 남자들에 의해 양 팔이 잡혔다.
“놔! 이거 안 놔!”
아이린은 몸을 흔들며 힘껏 저항을 했다.
그들은 그런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달랑 들었다.
아이린은 그렇게 붕 뜬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고 저항을 했다.
“놔! 놓으라고!”
“그만해, 아가씨가 그러면 우리가 더는 참기 힘들다고. 흐흐흐.”
남자들은 하나같이 음흉한 시선으로 그녀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훑고 있었다.
‘이것들도 후작 같은 변태잖아!’
아이린은 변태들에 잔뜩 둘러싸인 이 상황에 머릿속이 아득했다.
그때 프론트 직원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보스가 기다리시니 이만하고 얼른 데리고 내려가!”
아이린은 프론트 직원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도, 도와주세요.”
“미안해요, 아가씨. 이것이 제 일이라 어쩔 수 없네요.”
직원은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린의 입에 손수건을 말아 넣고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그리고 그녀를 시커먼 자루에 넣었다.
아이린은 갑작스러운 어둠에 두려움이 배가 되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눈물이 흘렀다.
그때 후작이 말했다.
“난 먼저 북부 영지로 갈 태니. 노예 시장 마무리는 네가 알아서 하도록.”
프론트 직원이 대답했다.
“네, 보스.”
“자, 우리는 당장 떠난다. 요 뜻밖의 소득에 참기가 힘들구나. 으흐흐”
피도르 후작의 음흉한 미소에 그의 부하들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뒷문으로 향했다.
프론트 직원은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매우 아끼던 것이 떠올랐다.
‘후우, 고객님, 이 귀여운 아가씨만 혼자 두지 말았어야지.’
* * *
레온하르트는 노예 시장이 열리는 지하로 내려갔다.
“문에 마법 처리를 하고 나왔으니 괜찮겠지.”
레온하르트는 곤히 자고 있던 아이린을 떠올렸다.
“그녀가 안에서 직접 열어 주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지하에 도착한 레온하르트는 노예 시장이 열리는 입구의 커다란 문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서 시장이 열린다고?’
떠들썩할 것만 같았는데 입구는 매우 조용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레온하르트는 문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 통행패를 내밀었다.
직원은 살짝 묵례를 하며 커다란 문을 열어 주었다.
삐걱 하며 문이 열리자, 노예 시장 안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허, 이 정도 보안에 방음 처리까지 해두었으니 그동안 증거를 잡기 힘들었던 거군.’
안쪽으로 들어가니 직원에 의해 문 하나가 더 열리며 소음이 더 커졌다.
시장 안을 둘러보던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곳은 단순히 노예 시장만 열리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노예 경매가 열리고, 또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술과 약에 취한 사람들과 그들에게 희롱당하는 여인들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악마의 소굴 같았다.
‘더러운 악취가 심하군.’
레온하르트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노예 경매장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술잔이 담긴 쟁반을 든 직원하나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주군. 오늘 후작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심어둔 그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