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레온하르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림자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1시간 전에 북부로 떠났다고 하더군요.”
1시간 전이라면 그가 방 밖으로 나온 시간과 얼추 비슷했다.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몰려오는 나쁜 예감에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심장이 경고라도 하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아이린에게 잠깐 가보고 와야겠어!’
레온하르트는 벌떡 일어났다.
그때였다.
그들 가까이 있던 덩치 하나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비수를 던졌다.
그는 얼른 검으로 막으며 오러를 이용해 역으로 공격을 했다.
“으윽!”
덩치는 자신이 던진 비수가 목에 꽂히며 그대로 쓰러졌다.
레온하르트는 쓰러진 덩치에게 다가갔다.
‘복장을 보니 이곳의 직원은 아니군.’
의심 많은 피도르 후작이 손님들 사이에 부하들을 심어 놓았던 게 분명했다.
그때 또 다른 덩치가 그를 향해 검을 찔러 왔다.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검을 쳐올리며 방어를 했다.
그리고 바로 덩치를 처단하며 그림자들에게 명령을 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포박해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그 순간 곳곳에 숨어있던 그림자들이 검을 뽑아 들며 그를 향해 외쳤다.
“존명!”
그 순간 아비규환이 된 듯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노예 시장의 직원들을 빠르게 처단해 나갔다.
‘후우, 아이린에게 빨리 가야 하는데.’
그때 제이드가 한 무리의 그림자를 데리고 그에게 달려왔다.
“큰일 났어, 아이린 씨가 보이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뭐라고!”
“방에 도착하니 문이 열려 있었어. 바닥에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반항한 흔적이 있었고!”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님, 설마 여기 아이린을 이곳에 데리고 온 건 아니겠지?”
남자는 머리까지 쓴 망토를 거칠게 벗으며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2황자 에드먼드였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에드먼드를 지나쳐 아이린이 있던 방으로 달려갔다.
제이드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림자를 이끌고 빠르게 노예 시장 안을 정리해 나갔다.
한편 에드먼드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노예 시장을 맡은 프론트 직원 론에게 다가갔다.
“아까 피도르 후작이 작고 귀여운 아가씨 한 명 끌고 가는 것 보았나?”
사실 론은 에드먼드가 심어 둔 부하였다.
론은 살짝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네, 1시간 전에 그녀를 데리고 북부 영지로 향했습니다.”
“후우, 북부 영지라면… 여기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국경을 넘을 수도 있겠군.”
“네, 지금쯤이면 이곳 소식이 피도르 후작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에드먼드는 론에게 말했다.
“이곳은 오늘부터 정리한다.”
프론트 직원은 개운해 보이는 표정으로 얼른 대답했다.
“존명.”
“그리고 지금 바로 피도르 후작을 쫓는다.”
론은 깜짝 놀라며 그에게 되물었다.
“네? 정말 피도르 후작을 쫓는다는 말입니까?”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가 이번에는 선을 넘고 말았어.”
“선을 넘었다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에드먼드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감히 내 것을 함부로 넘보았거든.”
‘윽! 저 눈빛은!’
론은 순간 부르르 떨며 생각했다.
‘오늘이 피도르 후작의 장례식이겠군.’
그러나 그동안의 피도르 후작의 잔인한 악행들을 보아왔던 론은 어쩐지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에드먼드가 빠르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론은 재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 * *
그 시각 레온하르트는 그림자를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곧 지하에서 올라오는 에드먼드와 마주쳤다.
“형님, 이곳에 아이린을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지! 이곳이 얼마나 위험 한 곳인지 몰라?”
레온하르트는 눈을 번뜩이며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황후가 있는 수도보다 말이냐?”
‘…형님은 어머니 때문에 아이린을 데리고 온 것이었나!’
에드먼드는 그 순간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피도르 후작은 어디로 갔지?”
“…북부 영지 쪽으로 향했대. 빨리 따라잡아야 할 거야. 이곳 소식을 전하러 그들을 따라간 그의 부하들이 있어.”
“그럼 국경을 넘으려 하겠군.”
에드먼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북쪽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 순간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그의 흑마 헤드스톤이 달려와 그의 앞에 섰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헤드스톤의 등에 올라타며 고삐를 당겼다.
“히이잉!”
전시에 레온하르트가 타던 군마인 헤드스톤은 앞발을 들어 올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제 주인을 태운 채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말을 타고 따랐다.
에드먼드도 부하들과 함께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으윽, 배, 배가!’
아이린은 검은 자루에 넣어진 채 짐짝처럼 말에 실렸다.
말이 달리며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배에 통증이 일었다.
‘아무래도 멍이 들겠어.’
하지만 아이린은 애써 신음을 감췄다.
그녀가 신음을 흘릴 때마다 그들의 음흉스러운 웃음들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들을 향해 말을 탄 누군가가 빠르게 따라오는 것 같았다.
다그닥, 다그닥!
그때 후작이 소리쳤다.
“다들 경계해!”
“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후작님!”
후작은 달리던 것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을 따라오던 말발굽 소리는 그의 부하가 낸 것이었다.
“후작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호텔의 노예 시장이 급습당했습니다!”
“또 1황자의 짓이더냐?”
“네, 그의 보좌관 제이드가 뒤이어 급습한 걸로 보아 1황자가 먼저 잠복한 것 같습니다.”
짝!
후작은 그대로 부하의 얼굴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어떻게 그들이 내부에 잠복한 것을 모를 수 있단 말이야? 어떻게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 것이야!”
그때 함께 움직이던 부하가 말했다.
“후작님, 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들이 급습했다면 곧 우리를 따라올 수 있습니다.”
후작은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가자! 영지에 도착하면 빠르게 준비해 국경을 넘어야겠다.”
“네, 후작님!”
후작은 자신의 앞에 매어둔 검은 자루에 대고 속삭였다.
“아가씨, 이제는 어쩔 수 없겠어. 아까보다 속도를 내야 해! 흐흐.”
그는 고삐를 당기며 자신의 영지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아이린은 애써 비명을 삼키며 통증을 참다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피도르 후작은 국경에 닿아있는 자신의 영지에 도착했다.
그는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부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난 급히 챙길 것이 있어 들어갔다 오겠다. 메르헨에 팔 노예 사이에 던져둬!”
“네, 알겠습니다.”
아이린은 다시 짐짝처럼 그들의 중 하나의 어깨에 들쳐메진 채 지하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감옥 안에 자루 채로 그녀를 던져두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 던져진 아이린은 둔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흔들리지 않는 걸 보니 말이나 마차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린은 손목에 묶인 줄을 풀어 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으읍!”
‘윽, 풀리지 않아! 너무 꽉 묶였어.’
그 순간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납치한 이들의 걸음 소리와는 달리 매우 작았다.
‘누구지?’
아이린은 움직임을 잠시 멈췄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가 들어간 자루의 입구를 열었다.
“괜, 괜찮아요?”
아이린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아이린 입에 묶인 손수건을 풀어 주며 말했다.
“입을 풀어 드릴 테니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아이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아이린 입에 물린 손수건을 마저 빼주며 작게 속삭였다.
“소리를 지르면 그들이 와서 저희를 괴롭히기 시작해요.”
소녀는 아이린의 손목과 발목을 마저 풀어 주었다.
‘저희를? 누가 또…?’
아이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순간 놀라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들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소녀들은 그녀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조용히 앉았다.
감옥 안 어둠이 익숙해져서일까?
그중 몇 명은 감옥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옅은 피 냄새가 느껴졌다.
“언니도 납치되었군요.”
“으, 응.”
그녀를 풀어 준 소녀가 말했다.
“여긴 납치된 애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저는 아버지가 후작에게 팔았지만요.”
“뭐?”
“팔려 가면 저도 굶는 일은 없을 것이고 가족들도 굶지 않을 거라고 했거든요.”
“무슨 아버지가 그럴 수 있어!”
“후후, 그래요. 참 이상한 가족이죠?”
아이린은 참혹한 현실에 말을 잃었다.
그 소녀는 자신의 옆에 있던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도 언니처럼 납치되었어요.”
아이린은 또다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아이를 바라봤다.
“이 근처에서 우리 나이 또래 아이들이 없어지면, 고아원 아니면 후작의 손에 있을 거예요.”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래, 후작의 어린 소녀를 밝히는 변태적 취향은 유명하지.’
그때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아이린을 도와준 소녀보다 더 어려 보이는 아이였다.
“저는 제 발로 찾아왔어요.”
아이린은 놀라서 물었다.
“왜?”
“더는 나무껍질을 끓여 먹고 싶지 않아서요. 이렇게 감옥에는 있지만 여기서 밥은 제때 주거든요.”
아이는 말끝에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가슴이 아팠다.
그때 아이린을 도와준 소녀가 말했다.
“여기 있는 애들 다 비슷해요. 납치되거나, 팔려 오거나, 제 발로 찾아오거나.”
아이린이 물었다.
“가족들이 보고 싶지는 않아?”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있을 때도 아버지가 맨날 술 먹고 때려서요. 차라리 이곳이 몸은 편해요. 아직까지는요.”
소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아는 건지 어깨를 떨었다.
소녀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서 소리치던 아이들은 모두 어딘가로 끌려갔어요. 그들은 돌아오지 않거나 저기 누워 있는 아이처럼 되었죠.”
바닥에 누워 있는 아이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정신이 나가 보이는 아이도 있었고 피투성이로 끙끙 앓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아까 느낀 피 냄새가 저 아이들에게서 나는 거였구나.’
아이린은 쓰러진 소녀에게 다가갔다.
“혹시 물이 있을까?”
아이린이 묻자, 소녀 한 명이 물병을 내밀었다.
아이린은 물병을 받아 손수건에 물을 적셨다.
그리고 물을 꼭 짜서 피가 묻은 곳을 살살 닦아 주었다.
그때 그녀를 풀어 준 소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그 아인 가망이 없어요. 데려갔다가 이곳에 둔 걸 보니 치료조차 해주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그래도, 열만 좀 내리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아이린은 쓰러진 소녀의 겉옷을 벗기려 손을 댔다.
그 순간 쓰러진 소녀가 눈을 번쩍 뜨며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소녀 한 명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소녀는 아이린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도 다 해봤어요.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저리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면서 소리를 지르니 손쓸 방도가 없었다고요.”
그때 한 소녀가 아이린의 손목을 붙들며 말했다.
“그래요, 이 아이 비명 때문에 또 한 아이가 잡혀갔어요! 그만 착한 척하시고 저리 꺼져 주시죠!”
그때 아이린을 도와준 소녀가 말했다.
“그만해.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 되겠어?”
“후, 저 언니 때문에 우리 중 누가 또 잡혀갈까 봐 그러지.”
아이린의 손목을 잡던 소녀는 그녀의 손목을 뿌리치듯 풀어 주며 벽으로 걸어가 기대앉았다.
아이린은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후, 알면 되었어요.”
그때 아이린을 도와준 소녀가 아이린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전 줄라이예요. 17살이고요. 성은 없어요.”
“반가워, 줄라이. 난 아이린 토트야. 난 20살.”
줄라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귀족이신가요?”
“아니, 나도 평민. 고아원 원장님이 성을 지어 주셨어.”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셔서 귀족인 줄 알았어요.”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도 평소엔 이런 옷 입을 일은 없지. 직장 상사의 사정으로 입게 되었네.”
아이린은 곧 줄라이 옆에 있는 소녀에게 물었다.
“넌?”
“매리 히아신스예요. 곧 15세가 되죠.”
‘히아신스? 어디서 본 것 같은 성인데?’
그 순간 한 달 전 신문 일 면에 실렸던 기사가 떠올랐다.
“설마, 너 귀족이야?”
소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럼 한 달 전 실종된 히아신스 백작 가문의 영애?”
매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게 저예요. 저를 아세요?”
“응, 신문에서 봤어. 네가 사라지고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고.”
이내 매리는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시겠죠.”
“응, 분명 그럴 거야. 실종 사건이 신문 1면에 실린 것을 보면 네 부모님이 힘을 쓰신 것 같아.”
매리는 고개를 모로 숙이며 눈물을 훔쳤다.
아이린은 손수건을 건네며 그녀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때가 여기저기 탔지만, 고가의 비단으로 만든 하얀 드레스였다.
‘피도르 후작, 아주 제대로 미쳤구나! 귀족 자녀들까지 건들다니…!’
“이곳에 와서 안 건데, 그들의 부하들은 홀로 떨어진 소녀를 보면 마구잡이로 납치해 와요.”
그때 줄라이가 말했다.
“그들은 귀족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에요.”
아이린은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귀족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줄라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저번에 먼저 팔려나간 아이한테 들었는데 황후 폐하가 뒤를 봐준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린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황후가 그런 놈들의 뒤나 봐주다니. 아무래도 나라가 망하려나 봐요.”
‘황후파의 돈줄이라 하더니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구나.’
아이린은 소녀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떡하지? 이렇게 많은 소녀들이 감금된 걸 보면 어딘가로 팔려 갈 것 같은데.’
그 순간 아이린은 말 위에서 기절하기 전 들었던 그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국경, 맞아 국경을 넘는다고 했어! 설마, 나 다른 나라로 팔려 가는 건가?’
아이린은 노예 시장이 룩스에서 열리기에, 어디로 가게 되든 룩스 제국 안에는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있다 보면 레온하르트가 언젠가는 찾으러 올 테니까.
하지만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끌려간다면 희망이 없었다.
일국의 황태자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범죄자를 잡겠다는 명분이라고 해도 함부로 국경을 넘었다간 전쟁이 날 수도 있으니까.
안 그래도 국경에 맞닿은 이 지역은 피도르 후작의 횡포 때문에 치안도 재정도 좋지 않았다.
‘이곳에 전쟁까지 일어난다면?’
지금 이곳에 갇힌 소녀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게 뻔했다.
‘레온, 보고 싶어요.’
아이린은 나지막이 그를 부르며 암담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끼이익.
갑자기 금속이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감옥 안의 소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벌벌 떨며 벽 쪽으로 붙었다.
그때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녀를 끌고 왔던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었다.
“키킥, 저거 보라고. 마치 겁에 질린 생쥐 같지 않아?”
아이린은 소녀들을 최대한 등 뒤로 감추며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나서다니 용감한걸!”
“하하. 이 아가씨, 아까 보스가 데려온 그 아가씨잖아.”
“무슨 일이시죠?”
남자들은 무엇이 웃긴지 서로 배를 잡고 웃었다.
“킥킥킥, 무슨 일이냔다.”
“하하하하.”
‘뭐야? 저것들 갑자기 왜 웃는 거야? 중2병이야?’
아이린은 그런 그들이 어이가 없었다.
그때 그들 중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니.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 데리러 왔지!”
아이린은 멈칫하며 물었다.
“가야 할 시간이라니요?”
“후후. 말 그대로야, 아가씨!”
그때 입가가 찢어진 남자가 말했다.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닌데, 귀여운 아가씨. 킥킥, 잠깐 손을 좀 봐줄까?”
남자는 마치 영화 속의 조커를 닮아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때 뒤에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말했다.
“크렘린! 오늘은 그럴 시간 없어. 빨리 애들 챙겨 나가자고!”
“후후, 아쉽네.”
미소를 지운 크렘린은 소녀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들 나가! 말 안 듣는 아이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의 말에 소녀들은 모두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들 움직여!”
소녀들이 남자들을 따라 우르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린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녀를 보며 물었다.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크렘린은 쓰윽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버리고 간다!”
“이대로 두면 죽을지 몰라요.”
크렘린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린의 턱을 잡았다.
“넌 너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좋을 텐데. 난 인내심이 바닥이라 말이야.”
그때 앞서 나갔던 남자 한 명이 달려들어 왔다.
“빨리 데리고 나와, 그 여자 괜히 건들지 말고.”
크렘린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보스가 직접 데리고 온 여자라고. 어쩌면 보스의 다음 부인이 될지도 몰라!”
크렘린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욕심도 많군. 벌써 결혼만 몇 번째야?”
남자는 턱짓을 하며 말했다.
“암튼 괜히 건드렸다간 네 녀석이 쟤처럼 바닥에 눕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고.”
크렘린은 아쉽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턱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빨리 따라 나와!”
“잠시만요.”
아이린은 얼른 소녀 가까이에 물과 음식을 가져다 놓고 그녀의 이마에 젖은 손수건을 올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꼭 버텨! 조금 있으면 누군가 구하러 올 거야.”
아이린은 어쩐지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찾으러 이곳으로 올 것을 직감했다.
그 때문에 더 여기서 버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크렘린은 쭉 찢어진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밖으로 끌어냈다.
아이린은 그대로 밖으로 끌려 나가 마차에 태워졌다.
마차라고는 하지만, 지붕도 없는 커다란 짐마차에 가까웠다. 아이린은 침착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가 앉기도 전에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하였다.
아이린은 순간 반동에 휘청거렸다. 그때 매리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붙들었다.
“이쪽으로 붙어 앉아요.”
매리 옆쪽에 줄라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순간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흙먼지와 함께 소녀들을 덮쳐왔다.
아이린은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있었기에 말도 못 하게 추웠다.
몸이 절로 벌벌 떨려왔다.
그때 줄라이와 매리가 그녀를 폭 끌어안았다.
다른 소녀들도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린은 그제야 마차 안을 둘러봤다.
마차는 좌석조차 없어 소녀들이 딱딱한 바닥에 빽빽이 앉아 있었다.
승차감조차 좋지 않은 마차는 포장되지 않은 길을 빠르게 달리느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급기야는 멀미를 하는 아이들이 마차 벽에 대고 토하기 시작했다.
아이린 또한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에, 악취까지 밀려와 속이 좋지 않았다.
그때 매리가 물병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언니, 이거 마셔요.”
줄라이가 아이린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요. 좀 마시면 괜찮을 거예요.”
아이린은 얼른 매리가 건네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다행히 그녀들 말처럼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좀 나아졌어.”
아이린은 그제야 좀 기운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아까 감옥에서는 못 봤던 얼굴도 보였다.
“저기 저 아이들은 못 본 얼굴인데.”
줄라이가 말했다.
“다른 감옥에 있던 애들이에요.”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다른 감옥도 있었어?”
“아까 우리가 있던 그 성 있죠?”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곳은 비밀 감옥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어요.”
“뭐? 한두 곳이 아니라는 거야?”
“네, 몇 번 황태자 전하가 불시에 검문한 적이 있었지만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다고 해요.”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있던 곳은 평범한 감옥 같아 보였는데?”
그때 줄라이가 대답했다.
“네, 우리가 갇혀 있던 곳은 그냥 보통 지하 감옥이에요. 임시적으로 사람을 가두어 둘 때 사용하죠.”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줄라이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 순간 줄라이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팔려오기 전에는 성에서 종종 허드렛일을 하곤 했어요. 담당 업무가 주로 감옥을 청소하는 거였고요.”
아이린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말, 말도 안 돼.”
“그런데 제가 그곳에 갇히다니 참 아이러니 하죠?”
아이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곧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그때 매리가 말했다.
“제가 아까 들었는데 국경지대에 커다란 성 하나가 있나 봐요.”
“성이라고?”
“네, 그곳에서 국경이 열리는 오전 9시까지 있을 거라고 했어요.”
“휴, 정말 국경을 넘으려는 거구나.”
“네, 보통은 후작의 부하들만 국경을 넘었는데 이번에는 후작도 함께라고 하더라고요.”
‘후작이 국외로 도주하려는 속셈이구나.’
아이린은 뱀 같은 피도르 후작의 눈빛을 떠올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차 입구를 바라보았다. 후작의 부하 둘이 문을 봉쇄하듯 앉아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섣부르게 반항해봤자 다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막연하게 끌려가자니 마음이 답답했다.
‘아카데미를 다닐 때 검술도 배울걸.’
기사가 아니기에 졸업과 취업에는 도움이 안 될 거라며 멀리한 그때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꼭 배우고 말 거야!’
아이린이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그렇게 얼마가 지났는지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 속 소녀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흔들림을 버텨냈다.
그때 문 입구의 남자들이 일어서며 살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두 내려서 따라와! 밖에서 소리 지르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알지?”
소녀들은 남자의 경고에 몸을 떨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은 멍하니 소녀들이 빠져나가는 마차 문을 바라보았다.
‘저 문을 나가면 어떻게 될까?’
끌려 온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문 앞에 설 때마다 무섭고 초조했다.
그때 매리와 줄라이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따스한 손길들이 그녀의 등에 닿았다.
그녀가 가장 나이가 많지만 가장 마지막에 들어왔기에 배려라도 하는 듯했다.
‘정신 차려! 어린 이 아이들도 버티고 있잖아!’
그때 문이 열리고 소녀들은 한 명씩 마차에서 끌어 내려졌다.
매리는 아이린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언니, 가요. 티 나게 머뭇거리면 곤욕을 당할 수 있어요.”
‘매리, 참 씩씩하구나! 그래, 나 혼자가 아니야. 함께 버텨내다 보면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레온, 내게 힘을 줘요!’
그렇게 그녀들은 마차에서 내려졌다.
“뭐지, 이곳은?”
아이린은 소녀들에게 국경에 있는 성으로 끌려간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린 곳은 성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하기까지 한 허허벌판이었다.
그때 남자들이 그녀들을 그 벌판 한가운데로 끌고 갔다.
‘뭐지? 이곳에서 노숙이라도 할 셈인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앞쪽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철컥하고 들려왔다.
소녀들은 깜짝 놀라 모두 멈칫했다.
맨 앞에 앞장선 남자들 중 입꼬리가 쭉 찢어진 크렘린이 그녀들을 비웃듯 키긱 하며 웃었다.
그때였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크렘린의 키만 한 문 하나가 열리듯 네모난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의 안쪽으로 입구를 장식하는 장식장들이 보였다.
아이린을 놀라 두 손을 입으로 가렸다.
‘마법인가? 어떻게 황실에서도 기밀이라는 마법이 이곳에?’
“얼른 들어가!”
남자들은 뒤쪽에서 겁먹은 그녀들을 밀치며 낄낄 웃고 있었다.
아이린은 매리와 줄라이의 손을 꼭 잡으며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 맨 앞쪽에 걷고 있는 소녀들 사이에서 비명이 들렸다.
“끼아악!”
“꺄악!”
아이린은 매리와 줄라이를 쓰윽 보고 그들의 손을 놓고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학교 다닐 때 과학실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약품 냄새가 진하게 그녀의 폐부를 찔러왔다.
아이린은 코와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렇게 문 앞에 선 그녀는 순간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서 보였던 대형 장식장에는, 가까이서 보니 사람의 신체 부위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아이린은 그것을 보자마자 그 신체들이 살해당한 소녀들임을 직감했다.
후작은 이곳에서 제 마음에 드는 소녀들을 희롱한 후 죽여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영화 속에나 나오는 사이코패스처럼.
소녀들은 충격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중에는 밖으로 뛰쳐나가 토하는 이들도 있었다.
남자들은 그런 그녀들을 보며 낄낄대며 비웃었다. 그리고 쓰러져 겁에 질린 소녀들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피도르 후작뿐 아니라 이들 모두 사이코패스 집단인 것이 분명했다.
아이린은 얼른 쓰러진 소녀들을 일으켰다.
그때 한 무리의 덩치 큰 여자들이 계단으로 내려왔다.
남자들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여자들은 40~50쯤 되어 보였는데 덩치처럼 힘 또한 좋은지 소녀들을 한 명씩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아이린 역시 그 여인들 중 한 명에게 손목이 붙들려 끌려갔다.
“매리! 줄라이!”
“아이린 언니!”
소녀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불렀다.
그 중 꼭 안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소녀들이 있었는데, 보아하니 자매 같았다.
그 순간 소녀들은 덩치 큰 여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기 시작했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는 동생을 더 감싸 안았다.
아이린이 말려 보고 싶었으나 그녀 또한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언니로 보이는 아이가 쓰러진 듯 바닥에 널브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때 킬킬 웃던 사내들이 그 아이를 달랑 들고 가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덩치 큰 여인에게 들려가며 언니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아이린을 끌고 가는 덩치 큰 여인이 턱짓을 하며 속삭였다.
“쟤들한테 끌려가기 싫으면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아.”
아이린은 무심코 힘주었던 손목에 힘을 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게 아이린이 도착한 곳은 욕실이었다.
문을 닫은 여자는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어딘가로 팔려 가는 게 여기 있는 것보단 나을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옷 벗고, 여기 통 안으로 들어가서 씻어.”
“네.”
빠르게 옷을 벗은 아이린은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목욕통에 쏙 하고 들어갔다.
“아직 어린 아가씨가 어떻게 잡혀 온 거야?”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저 납치된 건지 어떻게 아셨어요?”
“아가씨가 입은 드레스를 보고 알았지. 보아하니 원단부터 최고급이던데?”
여인은 그녀에게 쌓인 먼지를 살살 닦아주며 말했다.
“아주머니는 이곳에 어떻게 오셨어요?”
“후우, 나? 나도 아가씨와 비슷해.”
아이린은 궁금했지만 그녀의 사연 있는 눈빛에 말없이 조용히 기다렸다.
욕실 안에는 아이린에 몸에 물을 끼얹는 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후 그 여인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30년 전이였을 거야. 나도 아가씨와 비슷한 꽃 같은 나이였어.”
여인은 회한에 빠진 표정을 지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나는 제국의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어.”
“네? 제국 아카데미를요?”
여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응.”
“선배님이시군요. 저도 아카데미를 나왔어요. 지금은 황궁에서 일하고 있고요.”
여인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런. 나도 계속 다녔으면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텐데. 황궁 취직은 잘 모르겠지만 시집을 가 아가씨 같은 딸을 낳고 살고 있었을 거야.”
그늘진 여인의 표정에 아이린은 숙연해졌다.
여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난 이렇게 되었지만, 아가씨는 희망을 잃지 마!”
아이린은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감사해요.”
“내가 이곳에서 가장 예쁘게 치장해줄게. 그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전 이곳에 남고 싶어요.”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아이린은 레온하르트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이곳에 있으면 제 상사가 데리러 올지도 모르는 걸요.”
“상사?”
“네, 사실 전 노예 시장을 급습하려는 상사를 따라왔어요.”
“그랬구나. 그럼. 그 상사 옆에 바짝 붙어 있지 그랬어.”
“후우, 어떻게 된 건지 깜박 잠든 사이 상사가 방을 비웠고 그때 납치가 되었어요.”
여인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 봤다.
아이린은 왠지 모를 따듯한 느낌에 마음 속 무언가가 울컥했다.
하지만 애써 눈물을 참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곳에 오셨어요?”
“후…. 그날 나는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 늦은 귀가를 하고 있었어. 아카데미 앞에서 마차를 혼자 기다리다 이곳에 잡혀왔지.”
아주머니는 말끝에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왜 이런 일이 죄 없는 어린 소녀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거야!’
아이린은 순간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다 끝났어. 이리 나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목욕통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여인은 커다란 수건을 들어 그녀를 감쌌다.
“감사해요.”
“고맙기는 뭘.”
그녀의 머리를 살살 말리던 여인은 옷장으로 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미안하지만…, 이걸 입어야 해.”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가 들고 있는 옷을 보았다.
하얀 망사 천으로 된 옷이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아이린은 여인이 건네주는 대로 옷을 입었다.
여인이 맨 처음 건넨 것은 아슬아슬하게 중요 부위를 살짝 가린 비키니 같은 것이었다.
‘뭐지, 이곳에도 이런 속옷이 있었나?’
그리고 그 이후 여인이 그녀에게 입힌 옷은 가관도 아니었다.
신부 의상 같은 하얀 드레스는 한 겹의 얇은 샤로 되어 있었다.
아까보다 한 겹은 더 입었는데 속안이 훤하게 비치니 어쩐지 야해 보이는 느낌에 눈앞이 캄캄했다.
“좀 야하지?”
“네, 민망할 정도로요.”
여인은 부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도 예쁘네. 나도 예전에는 이렇게 뚱뚱하지 않았었는데.”
아이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저런, 많이 힘들구나?”
아이린은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끄덕였다.
“버텨. 그리고 하루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아.”
아이린은 고개를 들고 여인을 바라봤다.
“그래도 국경을 넘지 않아야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이린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기 시작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래서 이곳에 남으려고 나름 머리를 썼지.”
아이린은 갑자기 방향을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여인은 아이린의 입술에도 연지를 바르며 피식 웃었다.
“이곳에 처음 잡혀왔을 때였지. 끝장이다 싶었는데, 다행히도 후작이 선호하는 얼굴이 아니었던 거야.”
“네? 선호하지 않는 얼굴이라니요?”
“글쎄, 내 얼굴이 너무 성숙했다나? 참 나.”
아이린은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변태 자식!”
“그래. 피도르 후작은 미친 변태 자식이었지. 그래서 너처럼 어린 소녀 같은 얼굴을 좋아했고.”
여인은 이어서 아이린의 눈두덩에 옅은 분홍색의 가루를 살살 펴 바르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난 메르헨의 노예 시장에 팔려갈 예정이었어. 하지만 나도 아가씨처럼 이곳에 남아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아이린은 동의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지금의 나 같은 여인들을 보았어. 덩치가 큰 여인들. 때마침 국경 근처에 황궁의 단속이 뜨는 바람에 이곳에 세 달을 머물게 되었고.”
여인은 이야기를 하며 빠르게 욕조 주변을 치우고 있었다.
“그때부터 난 열심히 먹기 시작했지. 다행히 나를 담당한 여인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기름지고 살찌는 음식들을 밤마다 날라다 준 거야.”
아이린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그 여인이 가져다 준 음식을 밤늦게 먹고 바로 잠들며 세 달 동안 급하게 살을 찌워 나갔어. 갇혀있으며 운동량이 없으니 살을 찌우는 건 매우 쉽더구나.”
‘헉, 그렇게까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하겠지만, 난 그만큼 절실했으니까. 아까 입구에서 장식장 보았지?”
아이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그 당시 난 어딘가로 팔려 나가도 입구의 장식장 속 소녀들처럼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이곳에서 기다리면 가족이 꼭 찾아올 거라 생각했던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분은 절 꼭 찾으러 올 거예요.”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난 팔리기 힘든 상품으로 이곳에 남는 것을 선택했어. 하지만 그렇게 나는 30년이라는 시간을 이곳에 갇혀 있었지.”
아이린은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물론 아무도 날 찾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 가끔씩 바로 지척에서 기사들이 날 찾는 소리를 듣기도 했거든. 하지만 결국 그들은 날 찾지 못했어.”
“어, 어째서요?”
“이곳은, 보이지 않는 요새야! 아무도 절대 찾지 못하는 요새!”
아이린은 순간 절망이 눈앞을 가려와 눈을 질끈 감았다.
“난 나중에서야 깨달았어. 이곳을 벗어나려면 노예 시장에 팔려나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래야 희망도 있다는 것을 말이야.”
여인은 눈을 번뜩이며 아이린의 어깨를 붙들었다.
순간 아이린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넌, 나처럼 실패하지 마! 꼭 이곳을 벗어나!”
“네. 고마워요.”
“이제 다 되었어, 아가씨. 이쪽으로 따라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갔다.
어두컴컴한 복도가 길게 이어지고 한 참을 걸어갔을 때 그 끝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빛이 환해질수록 갓 구운 빵 냄새와 달콤한 냄새들이 그녀의 코를 자극하였다.
그때 여인이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도 이곳에서 많이 먹어둬. 마차로 이동하면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몰라.”
아이린은 여인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나 긴장의 연속에 정신적으로 피곤해서였을까?
아이린은 평소에 즐겼던 달콤한 냄새에도 식욕이 동하지 않았다.
빛이 보이는 곳 입구로 들어선 아이린은 그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무슨.”
‘이런 변태 새….’
아이린은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욕설이 올라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는지 100평은 넘어 보이는 공간에 기다란 식탁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식탁 중앙에는 피도르 후작이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소녀들이 앉아 있었는데 지금 아이린이 입은 것처럼 얇은 샤 웨딩드레스만 걸치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아이린의 눈에 순간 살기가 흘렀다.
‘저 놈은 죽어야 돼! 내가 죽더라도 죽이고 말겠어.’
그때 후작이 아이린을 발견하며 눈을 번뜩였다.
후작은 여인에게 아이린을 데려오라고 손짓으로 명령했다.
아이린은 순간 긴장감에 숨이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여인도 아이린의 긴장감을 알았으나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였다.
그녀가 눈물을 참으려는 아이린의 붉어진 눈가를 손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참아! 살아남아! 그리고 이곳을 꼭 벗어나!”
그때 아이린은 쉬어지지 않는 숨을 애써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그래서 레온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아이린은 다짐이라도 하듯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때 여인이 후작을 향해 아이린을 데리고 걸었다.
아이린이 가까이 오니 여인을 본 후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순간 아이린은 여인처럼 이 음식을 다 먹고 살을 찌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린은 후작에 의해 그의 옆에 앉혀졌다.
아직 진정되지 않는 상태의 아이린은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후작의 음흉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나를 보니 막 숨이 멎고 그러는가 보구나!”
아이린은 순간 팍 치솟는 짜증에 후작을 노려보았다.
후작은 그런 아이린을 내려다보며 독사 같은 눈빛을 반짝였다.
“그렇게 가슴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니 내가 흥분이 되는구나.”
그때 여기저기서 소녀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꺅!”
“끼약!”
“흑흑, 하지 마세요!”
소녀들 사이사이 끼어 앉은 그의 부하들이 소녀들을 희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그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 나쁜 놈아!”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접시를 후작의 머리에 엎었다.
그녀가 엎은 건 커다란 핑크색 케이크였다.
기다란 식탁 위에는 음흉한 후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색의 케이크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으윽!”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후작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케이크의 크림이 들어갔는지 후작은 계속 제 눈만 비비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래! 너 죽고 나 살자!”
아이린은 그 순간 눈에 띈 커다란 칠면조 다리를 양손에 들고 그의 머리와 뒷목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 * *
“헤드스톤, 정말 미안해! 조금만 더 힘내자!”
레온하르트의 재촉으로 그림자들을 모두 제치고 쉼 없이 빠르게 달리던 헤드스톤이었다.
헤드스톤은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몸이 비틀거렸다.
레온하르트도 헤드스톤의 그런 상태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고삐를 더 세게 당길 수밖에 없었다.
“히이잉!”
“헤드스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헤드스톤은 침이 질질 흘러나올 정도로 힘들었지만 주인의 부탁에 더 몸을 거세게 움직이며 달렸다.
그렇게 북쪽 영지에 앞서 도달한 그는 피도르 후작의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성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린을 찾았다.
레온하르트는 비밀 감옥 하나를 찾아낼 때마다 문을 열고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아이린이 보이지 않아 초조함에 숨이 막혀 왔다.
‘어찌 된 거지? 벌서 국경으로 출발한 건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국경이 열리는 시간은 아직 멀었어. 아무것도 없어 숨지 못하는 국경에 미리 출발하진 않았을 거야.’
레온하르트는 고용인 하나 보이지 않는 성을 이리저리 해매 다니며 결국 지하 감옥에 다다랐다.
‘그래, 마지막으로 이곳만 살펴보고 국경으로 가 보자.’
레온하르트는 살짝 열려 있는 감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감옥 안쪽에는 누군가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한걸음에 달려가 그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가 찾던 아이린은 아니었지만, 소녀는 막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가 아닌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하는 것일까 불행이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물, 무울….”
레온하르트는 얼른 소녀의 이마에 놓여 있던 손수건에 물을 충분히 적셔 그녀에 입술에 떨어뜨렸다.
“…어, 그런데 이 손수건?”
딸기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보니 아이린의 것이 분명했다.
아카데미를 다닐 때 영애들이 자신의 가문 문장을 수놓거나 꽃을 수놓은 손수건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종종 그녀가 건네는 손수건에는 앙증맞은 딸기 두 개가 수놓아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손수건을 볼 때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레온하르트의 가슴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이린이 이곳에 있었어.”
그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구, 국…….”
하지만 그 소리는 신음소리처럼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조차도 힘이 들었는지 소녀의 눈이 자꾸만 감겼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입 가까이 귀를 대며 말했다.
“아가씨, 다시 한 번 만 말씀해 주세요. …제발!”
그의 절실한 목소리가 들렸을까?
소녀는 다시 한 번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국…경으로, …갔어요.”
소녀는 힘들었는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때 제이드가 그림자들과 함께 감옥으로 들어왔다.
“레온!”
“제이드, 이 소녀를 의사에게 보내. 난 국경으로 가야겠어.”
“아직 이곳을 다 살펴보지 않았는데 국경이라니?”
곳곳에 비밀 감옥이 숨겨져 있기로 유명한 성이었다.
때문에 매번 헛걸음한 경험이 있었던 제이드는 레온하르트가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녀가 말해줬어. 아이린이 국경으로 갔다고.”
제이드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뭐?”
“이것 좀 봐, 소녀의 이마에 올려져 있던 손수건이야. 눈에 익지 않아?”
“이건 아이린 씨의 손수건이 맞군.”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레온하르트는 얼른 성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제이드는 그림자들에게 소녀를 옮기라 명령하고 그를 뒤따라 나갔다.
“레온, 기다려!”
레온하르트는 못 듣는 것인지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제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에 있던 그림자들에게 신호를 했다.
밖에 먼저 도착한 레온하르트 앞에 헤드스톤이 아닌 다른 말이 달려와 섰다.
레온하르트는 뒤에서 달려오는 제이드를 쳐다봤다.
제이드는 가까이 달려와 속삭였다.
“레온, 헤드스톤은 우리가 도착해서 보니 이미 쓰러져 있었어.”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 때문에….”
“그래, 너 때문이지. 너도 아이린 씨를 구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후우…….”
레온하르트는 멍하게 쓰러진 헤드스톤을 바라보았다.
“레온, 지금은 이렇게 자책할 때가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떠올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또다시 말에 올라타 국경을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들이 뒤따랐다.
그때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2황자 에드먼드였다.
* * *
“내가 할머니한테 제대로 배워서 한 다듬이질 하지! 오늘 내가 네 뇌를 빳빳하게 다 펴주마!”
아이린은 식탁에 올라가 후작의 머리에 칠면조 다리를 빠르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남자들의 욕설이 들려왔다.
곳곳에 앉아 있던 남자들은 벌떡 일어나 아이린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때였다.
다들 벌벌 떨던 소녀들이 그녀처럼 케이크를 던지고 칠면조 다리를 들고 그들을 향해 내리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덩치가 큰 남자들이라지만 남자의 수는 10명, 소녀들의 수는 50이 넘었다.
소녀들은 살벌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에 눈을 질끈 감으며 팔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또 다른 소녀들은 아이린처럼 식탁에 올라가 칠면조 다리나 단단한 접시 같은 것들을 들고 남자들을 내리쳤다.
아까 그녀들을 비웃던 크렘린 역시 한 소녀의 공격에 의자 채로 뒤로 넘어가, 소녀들 밑에 깔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근자근 밟히고 있었다.
일어나 보려 몸을 꿈틀거렸지만 쓰러진 그의 몸 위에서 덤블링을 하다시피 날뛰는 통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고통스러워하던 소녀들을 비웃던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남자들은 버릇대로 자신들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단도를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기로 사용할 포크조차 없었다.
월례 행사처럼 일어나는 화려한 만찬과 소녀를 희롱하는 시간.
상품을 심하게 훼손하면 안 된다는 피도르 후작의 방침 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의 두목인 피도르 후작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에 문밖에 있던 여인들이 들어왔다.
“이얏!”
“죽어! 죽어! 죽으라고!”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 그녀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으아악!”
“살려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남자들의 비명소리와 칠면조로 타닥타닥 때리는 타격음까지!
그 순간 여인 몇이 달려들어 소녀들을 남자들에게서 때어 내려 붙잡았다.
소녀들은 남자를 문 팔을 놓지 않으려고 치아가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앙 물었다.
남자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우락부락한 여인은 소녀의 머리를 잡아 당겼다.
소녀는 머리가죽이 벗겨질 것 같은 여인의 악력에 그만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넘어 갔다.
쓰러진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였다.
“이야압! 죽어라!”
한 여인이 남자를 향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비틀거리던 그 남자는 그대로 콰당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순간 머리가 깨진 것 같은 둔탁한 소리에 아리린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아이린의 목욕을 도와 준 여인이었다.
아이린은 씨익 웃으며 죽겠다고 소리치는 후작의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 독사같이 죄 많은 네 눈을 응징해 주겠다!”
후작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으아악! 살, 살려줘!”
몇몇의 소녀들이 그를 저지 하며 후작의 손과 종아리를 물었다.
“으악!”
아이린은 비명을 지르는 후작의 이빨에 칠면조를 날렸다.
“에잇, 이거나 먹어라!”
그 순간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덩치 큰 여인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소녀들과 여인들은 희망과 희열을 느끼며 더 과격하게 그들을 몰고 갔다.
여기저기 남자들의 곡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식당의 입구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급박하게 열렸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입구를 바라봤다.
남자들은 혹시 지원군이 오지 않았나 기대하였고 여자들은 순간 겁에 질렸다.
아이린 역시 순간 다듬이질을 멈추며 문을 바라봤다.
후작은 그 틈에 의기양양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황, 황태자…!”
피도르 후작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입구에 서서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민망한 드레스를 입은 아이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자, 그는 그만 얼굴을 붉혔다.
하루도 안 되는 잠시 몇 시간 떨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너무도 보고 싶었고,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불안감에 안달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보게 되었는데 눈을 어디 둘지 모르겠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했다.
아이린은 갑자기 공주를 구하러 온 백마 탄 왕자같이 등장한 그의 모습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날 구하러 와 줬어!”
그 순간 후작은 독사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널 구하러 와?”
“그래, 날 구하러 왔다고, 후작! 아니 이제 후작도 못 하려나!”
“네 옆에 있던 그 한량 같은 놈이 저 황태자였다는 것인가?”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독사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후작에게 살기가 끓어올랐다.
그때였다. 후작이 아이린에게 두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목을 옥죄었다.
갑자기 나타난 레온하르트 때문에 멍하니 있던 옆의 소녀가 뒤늦게 후작을 말리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후작의 팔을 향해 검기를 날리며 아이린을 향해 달려갔다.
살기를 띤 눈으로 아이린의 목을 조르던 후작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들에 의해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에겐 더는 두 손이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재빨리 아이린의 목에 감긴 후작의 손을 풀어 벽으로 던졌다.
그가 날린 검기로 손목부터 잘린 후작의 손은 흉물스럽게 벽으로 날아갔다.
주위에 있던 소녀들이 아이린의 등을 쓸어주자, 숨이 막혔던 아이린은 숨을 토해냈다.
“후훅, 콜록콜록.”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목을 졸랐는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목숨을 다할 뻔 했다.
레온하르트는 넋이 난간 듯한 아이린의 눈빛에 얼른 그녀를 품안에 꼭 안았다.
“아이린, 늦어서 미안해!”
그제야 긴장이 풀린 아이린은 눈가에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의 등을 통통 때리며 말했다.
“흑흑, 레온,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미안.”
그러는 사이 후작의 부하들이 소녀들과 여인들을 제치며 그를 향해 아귀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눈을 질끈 감고 그를 폭 안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그들의 향해 검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소녀들과 여인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검기를 피하였다.
하지만 후작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다리에 검기를 맞으며 그대로 몸과 다리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으악!”
“으아악, 살려줘!”
그들은 주변의 소녀들이나 여인들에게 도와달라며 기어갔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그들을 도와주는 여인들은 하나도 없었다.
적게는 20년, 많게는 3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누구나 그들에게 갚아줄 한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은 다들 그들에게 달려들어 응징하기 바빴다.
그 순간.
휘리릭!
휘파람 소리와 함께 제이드와 에드먼드가 그림자들과 함께 들어왔다.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본 순간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그들 중 먼저 정신이 든 제이드는 얼른 그림자들에게 명령했다.
“재들 저러다 다 죽겠다. 얼른 가서 말려봐!”
그제야 정신이 든 그림자들은 조용히 대답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네.”
“죽을 때 죽더라도 그동안 지은 죄들 다 벌 받고 죽게 해야지.”
에드먼드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이린을 찾았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품속에 폭 안겨 있었다.
‘저러니 찾기 힘들었구나.’
험한 꼴 당하지 않아 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입안이 씁쓸했다.
그림자들은 여인들을 남자들에게서 떼어 내려 했으나 그들이 말려도 듣지를 않았다.
그동안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자신의 복수를 방해하는 그림자들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제이드는 흥분한 여인을 말리다 그녀들이 날린 주먹에 맞는 그림자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긴 한숨을 쉬며 인파를 가르며 아수라장이 된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아이고, 이러다 하루 종일 걸리겠군. 여러분! 저희는 황실에서 나왔습니다. 죄송하지만 죄인들을 포박해야하니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소녀들은 그림자의 손에서 줄을 빼앗듯이 가져가더니 그들의 손목을 묶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