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제이드와 그림자들은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비켜 달라고 부탁한 것인데 소녀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여인들까지 필요 이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그때 멍하니 아이린을 바라보던 에드먼드는 일어서서 움직이는 소녀들의 복장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아이린도 저렇게 입었다는 거잖아! 피도르 후작 이 변태 놈, 죽여 버리겠어!’
에드먼드는 그대로 후작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를 발견한 후작은 순간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듯 그를 보며 기이하게 웃었다.
“하하, 2황자 전… 꿱!”
에드먼드는 자신을 부르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뻥 소리가 나도록 후작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얼마나 거세게 걷어찼는지, 피도르 후작은 마치 만화 속 한 장면처럼 쭉 벽까지 미끄러져 쿵 부딪쳤다.
“꿰엑!”
아이린은 순간 후작의 돼지 멱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2황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슬쩍 에드먼드를 바라보고는 아이린에게 말했다.
“아이린, 잠시만 이대로 움직이지 말아줘!”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린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녀를 꽁꽁 싸맸다.
아이린은 그 순간 자신이 지금 입은 옷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아이린을 안아들고 성 밖으로 나갔다.
에드먼드는 그대로 서서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린, 형님을 좋아 하는 구나.’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벽에 납작하게 붙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후작은 에드먼드와 눈이 마주쳤다.
후작은 갑자기 주변의 그림자들에게 소리쳤다.
“나 좀 체포해주게! 나중에 큰 사례를 하겠네.”
하지만 후작에게 살벌한 눈빛으로 다가가는 에드먼드를 본 그림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소녀들에게 망토를 벗어 덮어 주고 후작의 부하들을 수습했다.
그때 제이드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소리쳤다.
“레온, 발목이 아니라 손목을 잘랐어야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들은 제이드의 말에 자신들의 손목을 보며 몸을 움찔했다.
“매번 발목을 자르면 얘들 다 어떻게 들고 가라고! 그림자들 근무환경도 생각해 줘야지!”
제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림자들.
그렇게 소녀와 여인들은 아까 자신이 타고 온 마차에 나누어 태워졌다.
이젠 살았다는 희망에 모두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줄라이, 아이린 언니는 어디로 갔을까?”
“글쎄요? 아까 분위기를 보니 황태자 전하와 그런 사이인 것 같던데, 흐흐.”
“그렇지? 줄라이, 너도 우리 집에 함께 가자.”
“정말요? 그래도 돼요?”
그 순간 매리는 케이크를 후작의 얼굴에 날리며 칠면조 다리로 머리를 가격하던 아이린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럼, 우리 수도로 가서 꼭 아이린 언니를 만나자!”
“후후, 그래요. 꼭이에요!”
* * *
“아이린, 많이 춥지?”
“아, 아니에요. 따뜻해요.”
“그래? 그런데, 왜 이리 떨어?”
아이린은 그의 물음에 얼굴을 붉히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런 게 상체는 망토로 어찌어찌 덮어졌다.
그러나 얇은 샤를 하나 두고 말이 움직일 때마다 닿아 오는 그의 단단 한 허벅지에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피도르 후작성이야. 그 곳에 가서 입을 만한 걸 찾아보자!”
피도르 후작성이라는 말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아이린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까는 기지를 발휘해 벗어났지만 더는 끔직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싫어요! 절대 그곳은 가고 싶지 않아요!”
아이린은 눈물을 머금으며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를 품에 감사며 말했다.
“미안, 내가 경솔했어. 아이린 네가 피곤하고 추울까봐! 이 근처에는 후작성외에 인가가 없어서.”
아이린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전 이 망토로 충분해요. 그러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
레온하르트는 품속에 쏙 안겨오는 아이린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안겨 오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3일은 말을 타고 움직여야 하는데.’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드레스를 떠올리니 어딜 들어가 쉬는 것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휘이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전서구 하나가 날라 와 그의 손에 앉았다.
레온하르트는 품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더니 전서구 다리에 매서 날려 보냈다.
“그럼, 아이린, 1시간쯤 더 가면 온천이 있는데 그곳에서 잠시 쉬다 가는 것은 어때?”
“온천요? 룩스 제국에 온천이 있어요?”
“그럼, 있지.”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가끔 보면 아이린은 룩스 제국 사람이 아닌 것 같다니까.”
아이린은 순간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저 룩스 제국민이에요.”
“후후, 그래 알고 있어.”
아이린은 순간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가 북쪽을 향하던 산길 있었지? 그 곳에 룩스의 온천중 하나가 있어.”
“아, 그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곳이!”
“그래, 아이린도 봤구나. 그곳이 바로 온천이야.”
“생각지도 못했어요. 나무만 무성할 것 같은 산속에 온천이라니.”
“후후, 깊은 산속에 있고 규모가 작은 편이라 사람들이 많이 찾지는 않는 편이야.”
“그래요? 그런데 그곳을 어떻게 알았어요?”
“예전에 제이드와 그림자들과 함께 국경을 향해 움직일 때 중간에 쉼터로 사용하던 곳이야.”
레온하르트의 말에 아이린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까 전서구를 보내 놨으니까 그곳에서 쉬고 있으면 우리가 타고 온 마차와 아이린이 입을 만한 옷이 도착할 거야.”
“후우, 다행이에요. 하암….”
아이린은 긴장이 풀린 탓에 졸음이 쏟아졌다.
“아이린, 피곤하면 자도 돼!”
레온하르트는 고삐를 잡지 않은 한손을 올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음, 그래도 돼요…?”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그럼, 조금만…요.”
순간 아이린의 몸이 말 위에서 기우뚱했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붙잡고 그녀를 단단히 품안에 안았다.
그리고 고삐를 느슨하게 잡으며 말에게 작게 속삭였다.
“워워. 조금만 천천히 가자.”
색색 숨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왔다.
어쩐지 이 시간이 계속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긴 겨울밤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왔다.
아이린이 미간을 찌푸리자,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깰까 봐 얼른 망토로 그녀의 머리까지 씌우며 빛을 가렸다.
아이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 *
“…이린.”
“으음.”
“아이린!”
‘끄응, 더 자고 싶은데…. 어, 근데? 나 어디서 잔 거지?’
아이린은 손바닥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언가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근데, 무슨 벽이 이렇게 따뜻하지? 온돌인가?’
순간 난처한 듯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아이린은 갑자기 들려오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레온하르트는 붉어진 얼굴로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이린, 계속 이러면 곤란해!”
아이린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그녀는 순간 그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마구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거칠게 더듬었는지 그의 셔츠 앞섶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손이 위치한 곳은 그의 셔츠가 아닌 맨가슴이었다.
‘아… 이래서 따뜻했구나. 온돌이라니, 내가 무슨 생각을…….’
자기가 조금 전까지 한 생각에 어이없어하던 아이린은 얼른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말했다.
“미, 미안해요.”
그의 얼굴을 보기 얼마나 민망한지, 자기 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이눔의 손모가지! 자면서도 이렇게 응큼하니!’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인 아이린에게 레온하르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괜찮아. 잠결에 모르고 그랬잖아. 그리고 온천에 도착했어.”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정말 산속에 온천이 있었는지 뿌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그 경관이 정말 장관이었다.
소설 혹은 애니메이션 속에서나 볼법한 녹음이 우거진 노천 온천이었다.
“우와!”
레온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하는 아이린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내려 줄게.”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안은 채 말위에서 부드럽게 뛰어 내렸다.
순간 아이린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어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말간 눈을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온천 입구에 그녀를 내려 주었다.
“자, 난 저쪽에 가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을 테니. 몸을 좀 녹이도록해!”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커다란 나무가 보이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린은 돌아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망토를 벗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납치되어 끌려 다니느라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통증만 느껴졌던 배에 시커먼 멍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작을 잡겠다며 케이크와 음식들을 휘둘렀던 것도 그제야 기억났다.
거울로 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몰골이 얼마나 엉망일지 이제야 자각이 되었다.
아이린은 순간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얼른 온천 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그리고 머리까지 물속에 넣고 머리에 엉켜 있던 케이크의 기름기를 살살 문질러 뺐다.
‘바보. 거지꼴을 해가지고 그렇게 그의 품에서 잠까지 든 거야?’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하지만 좋아하는 남자 품에 그 꼴로 안기다니 정말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무언가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 왔다.
아이린은 놀라 물 밖으로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였다.
“아이린! 걱정했잖아!”
아이린은 놀라 눈을 크게 깜박이며 물었다.
“네? 걱정이요?”
“너무 조용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네가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온천 가까이 와 보니 네가 물속에… 흐흡!”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이린은 순간 그런 그에게 당황했다.
‘왜 등을 돌리지? 화났나?’
“내가 물에 빠진 줄 알았구나. 미안해요, 레온. 그냥 머리를 감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그녀의 눈에 그의 귀 끝이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첨벙 첨벙.
다시 한 번 수면에 파동이 일었다.
마치 붉게 타오르듯 뒷목까지 붉어진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말을 묶어둔 아름드리나무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전히 그녀를 등진 그가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빠르게 손부채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지? 화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아이린은 무심코 자신을 살펴보았다.
‘하하, 나 이러고 있었구나.’
아이린은 그제야 자신이 비키니 수영복과 다름없는 것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거라도 입은 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원래 세계에선 친구들끼리 워터파크를 갈 때 비키니를 입곤 했기에, 지금도 그냥 수영복을 입은 것 같아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런데 부끄러운 듯 붉어진 레온하르트의 뒷목을 보니 그녀도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벗은 건 난데 왜 자기가 부끄러워하는 거람. 아니지, 완전히 벗지도 않았다고!’
가뜩이나 깊은 산속이라 조용한 곳이었다.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아이린은 이 상황에 첨벙대며 씻는 것은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에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서 착 달라붙은 셔츠와 바지에 그의 뒷태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흐흐, 거참… 보기 좋은 광경일세.’
그때 레온하르트의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 저러다 감기 들 텐데.’
온천인 만큼 물속은 따뜻했지만 물 밖은 말할 때 입김이 보일 정도로 추웠다.
아이린이 먼저 정적을 깨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온!”
그녀의 부름에 역삼각형으로 잘 빠진 근육질의 등이 순간 움찔했다.
아이린은 화들짝 놀란 듯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얼굴을 붉히는 그가 어쩐지 귀여웠다.
커다란 키와 덩치에 맞지 않는 반전 매력이라고 할까?
순간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물에 푹 젖어 있었던 레온하르트는 살짝 몸을 떨었다.
“레온,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와요.”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부름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면 어쩐지 목소리가 떨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으윽, 심장이야!’
희뿌연 김 사이로 새색시처럼 수줍게 서 있는 그의 뒷태를 보면 볼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아이린은 빠르게 이성을 찾으며 그에게 말했다.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나갈 거예요.”
레온하르트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흐흠, 안 돼! 아이린, 거기 그대로 있어.”
‘큭큭, 부끄러워하기는.’
“그러면, 얼른 들어와요. 이렇게 추운데. 제이드 님이 오실 때까지 레온도 갈아입을 옷이 없잖아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난 소드 마스터라 이 정도 추위는 견딜 수 있어. 걱정하지 마.”
그의 말에 아이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소드 마스터는 뭐 인간도 아닌가?’
“네, 견딜 수는 있죠. 그렇다고 춥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전 레온이 추운 거 정말 싫어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살짝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한 말을 물어요. 그러니 나 그만 걱정하게 얼른 들어와요.”
레온하르트는 순간 가슴 한쪽이 뭉클했다.
‘아이린이 나를…!’
레온하르트는 몸을 돌려 돌아서던 중 그녀를 보았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여신처럼 앉아 있는 아이린의 모습 때문에 긴장해 숨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와 같은 온천에 들어간다니!
이 상황이 현실인지 망상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망상이라면 어쩐지 허탈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현실이라면!
그는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부끄러우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아이린을 향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우물쭈물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정, 정말 괜찮아.”
환하게 웃어 보이는 아이린의 얼굴이 요정 같았다.
“걱정 마요. 여기 물속에 몸을 푹 담그고 있으면 김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아요.”
다행히 물 높이는 그녀가 앉으면 어깨가 살짝 나올락 말락 한 정도였다.
아이린은 물속에서 뒤로 돌아 앉앉다.
그 순간 그녀가 움직이는 소리에 레온하르트는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설마 밖으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
그때 웃음기 묻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 저 뒤돌아 앉았어요. 그러니 얼른, 젖은 옷은 거기 나뭇가지에 널어두고 들어와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망설이다 젖은 옷가지를 벗어 물기를 쭉 짰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물속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제법 덩치가 있는 그였기에 순간 첨벙 소리와 함께 수면에 파동이 일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서 최대한 떨어진 곳에 등을 대고 앉았다.
아이린은 그를 향해 돌아앉으며 말했다.
“으이그, 빨리 들어오지. 추운데 그렇게 고집부리고 그래요.”
그 순간 희미한 빛을 비추던 해가 완전히 얼굴을 내밀려는지 그의 등 뒤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이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헉,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이건 정말!’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살짝 흐트러져 젖어 있는 금발은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고.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호수 같은 푸른 눈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그녀를 향한 가득 찬 열망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모습이 서정적으로 붉게 물든 노을에 어우러져 녹아들어 마치 명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이윽고 아이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꾸만 그의 모습이 의식되었다.
불행이라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녀와 달리 큰 키의 레온하르트가 온천에 앉으니 불룩한 맨 가슴이 수면 위로 드러나 있었다.
‘레온, 이렇게 보니 엄청난 베이글남이잖아! 으윽, 심장 아파!’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씻었는지 물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위험할 정도로 매혹적인 모습에 보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시선이 쏠리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아이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세수를 했다.
맑은 물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걱정해서 불러준 아이린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인다면, 그는 더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왜 이렇게 빤히 보는 거지?’
에메랄드빛 바다 같은 그의 눈동자가 아무 미동이 없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어쩐지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의 시선에 영혼까지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헉!’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엑스자로 가로지르며 가슴을 가렸다.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흐릿해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향했다.
그녀의 심장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라도 하듯 쿵쿵 뛰어댔다.
그리고 그것은 레온하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아이린은 오롯이 자신을 향한 그의 눈동자를 더는 마주할 수 없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어쩐지 목이 타고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심코 마른 입술을 적셨다.
아이린의 작은 혀가 살짝 나와 붉은 입술을 핥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아이린은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조차 모른 채, 빠르게 뛰는 심장을 들킬세라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물을 가르며 아이린 앞에 다가왔다.
아이린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멈춰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린의 어쩐지 그의 눈빛이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늑대와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상체를 숙여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에 아이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렇게 ‘어?’하는 사이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거야!’
갑자기 그와의 거리가 의식이 된 아이린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를 바라봤다.
코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 거리.
깊은 심연 같은 그의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헉! 어떻게 하지?’
“아이린, 숨 쉬어.”
그의 낮은 목소리에, 아이린은 멈췄던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들썩였다.
그제야 한 줄기의 이성이 돌아온 아이린은 아까처럼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런데 돌릴 수가 없었다.
그의 커다란 두 손이 살며시 그녀의 머리를 감싸왔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순간 당황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 레온.”
순간, 더 짙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려왔다.
“응, 아이린.”
온천의 열기 때문인 걸까?
촉촉하게 젖은 얇지만 붉은 입술이 영화 속 장면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는 듯했다.
살짝 벌어진 그 입술 사이에 흐르는 그의 목소리가 섹시하게 들려왔다.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떨며 홀린 듯 그를 바라봤다.
그와 닮은 굵고 남성적인 턱선.
그녀를 유혹하는 촉촉이 젖은 붉은 입술 위의 날렵한 콧날.
긴 속눈썹 사이로 흐릿하게 빛나는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
아이린은 순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린은 모든 상황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분위기에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다.
곧 터질 듯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은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아이린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잘 익은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분홍빛 혀끝이 보일 듯 말 듯 그를 감질나게 했다.
순간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이린은 긴 정적이 어색했다. 이내 붉어진 뺨으로 수줍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토끼 같이 무방비한 눈동자에 실낱같이 남아 있던 그의 이성의 끈은, 결국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눈꼬리가 길게 호선을 그리며 내려갔다.
곧 왼쪽 눈꼬리 아래에 있는 작은 눈물점이 그녀를 유혹하듯 묘하게 흔들렸다.
그를 바라보던 아이린의 바다색 눈동자가 파도가 일렁이듯 요동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순간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살짝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의 이마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아이린은 그제야 놀란 눈을 깜박이며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
이윽고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그의 얼굴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레온하르트의 잇따른 시간차 공격에 아이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은 지독하게도 그녀를 갈망했다.
그의 강렬한 눈빛은 그녀를 묶어두기 충분했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그를 그저 바라보던 아이린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헉, 어떡해! 너무 가까워!’
아이린은 놀란 맘에 본능적으로 얼른 두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밀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그의 뜨겁고도 단단한 가슴에, 번개라도 맞은 듯 했다.
마치 몸 어딘가가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이성이 그를 밀어내야 한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어쩐지 자꾸만 힘이 빠지고 밀어낼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주인을 배반한 심장은 어찌나 세게 뛰기 시작하는지!
아이린은 정말 어찌 할 바를 몰라 애꿎은 자신의 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와인의 달콤한 향과 함께 레온하르트의 뜨거운 숨이 그녀의 입안으로 밀려왔다.
“흐흡.”
이윽고 부드럽고 말랑한 무언가가 그녀의 혀를 살짝 두드렸다.
‘뭐지?’
그것이 그의 혀라는 사실을 아이린이 인지한 것은 잠시 뒤였다.
‘어? 어! 헉!’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린은 순간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이런 느낌은 실로 처음이었다.
그 순간 아이린은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와 더 얽혀 들었다.
그녀는 도망치고 그는 쫓아오고.
그렇게 계속 되는 아찔한 감각에 그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어지러웠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를 감싸던 그의 손이 점점 내려가더니 그녀의 등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검을 잡으며 생긴 단단한 굳은살이 그녀의 맨 살을 쓸고 갈 때마다 이상한 기분에 몸이 움찔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으음.”
아이린은 순간 자신이 낸 소리에 놀라 그의 가슴에 닿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아이린은 어쩐지 아쉬움이 밀려와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싼 채 내려다보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은 심장을 저격하는 레온하르트의 치명적인 미소에 숨이 차올랐다.
“헉….”
그 순간 볼이 발갛게 익은 아이린도 덩달아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자신이 너무 빨리 다가오는 바람에 그녀가 놀랄까 애써 자제력을 발휘했던 레온하르트였다.
하지만 아이린과 이렇게 있으려니 더는 참기 힘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촉촉한 입술을 핥았다.
그 순간 아이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곧 아쉬움에 달싹이던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참았던 숨이 입술 사이로 살짝 새어 나왔다.
“하아….”
레온하르트는 한층 짙은 눈빛으로 아이린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곧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며 그녀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애써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내 그는 아이린의 부드러운 입술을 마음껏 탐하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매달리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달빛에 빛나는 그의 황금발의 머리가 살짝 흐트러지며, 애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곧 레온하르트의 강인한 팔이 그녀를 감싸안자, 둘의 몸은 한껏 밀착되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눈썹을 크게 움찔하더니 살짝 떨어졌다.
의아해하던 아이린은 무심코 그를 바라봤다.
곧 그녀는 자신의 시야에 한가득 들어온 그의 단단한 몸에 넋을 잃었다.
‘어머! 이렇게 가까이! 어떡해!’
처음 만날은 경황이 없어 이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게 된 그의 몸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온천의 열기로 맺힌 물방울들이 갈라진 근육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습이 어찌나 유혹적인지!
그 순간 아찔함에 눈을 감고 싶은 마음과 감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레온하르트의 단단한 팔에 갇힌 아이린은 뱃속이 간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뜨거운 열기를 내뱉던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다소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급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아이린은 아슬아슬한 이성을 붙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밀착 된 몸이 얇은 옷감 사이로 느껴져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레온하르트와 닿아 있는 모든 곳이 녹아 버릴 듯이 뜨거웠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아이린은 몸이 무너지듯 스르륵 내려앉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아이린은 흐릿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던 레온하르트의 손이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때였다.
그들을 찾는 제이드와 그림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거기 계십니까?”
아이린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나쁜 장난을 들킨 어린아이 같았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이윽고 그는 아이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거칠어진 숨을 깊이 들이 쉬었다.
레온하르트의 열락에 들뜬 뜨거운 숨이 아이린의 어깨에 닿았다.
그녀는 순간 간지러운 기분에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레온하르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습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렇게 움직이면 멈출 수가… 없어져.”
곧 아이린의 왼쪽 귀 아래 여린 피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때 또 한 번 그를 부르는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놀라 몸을 움츠린 아이린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써 몸을 굳혔다.
그러나 아이린은 곧 약한 신음을 흘렸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먹을 듯이 다시 입맞춰온 것이다.
그녀는 놀라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부르며 단단한 가슴을 밀어냈다.
“레, 레온! 이제 그만….”
하지만 마치 뱀파이어처럼 목덜미에서 맴도는 그의 입술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발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
아이린은 불안한 듯 어깨를 떨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워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이드, 나 여기 있어. 잠시 그곳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혼이 나간 그녀를 살짝 들어 벽에 기대었다.
그리고 붉게 흔적이 남은 그녀의 목을 살짝 누르며 속삭였다.
“예쁘게 물들었네.”
아이린은 순간 머리끝까지 열기가 차오르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아이린!”
그 순간 멍하니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던 아이린은 그의 부름에 살짝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마차에 가서 담요를 가져올게. 잠시 혼자 있을 수 있지?”
아이린은 레온하르트를 향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 잠시 눈 좀 감아 주겠어?”
‘갑자기 뭐지, 눈은 왜? 설마 또 키스하려는 거야?’
레온하르트의 말에 아이린은 얼굴이 확하고 달아올랐다.
그녀는 이내 붉어진 얼굴을 감싸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으음, 보고 있어도 되고.”
레온하르트는 말이 끝나자마자 뒤로 돌더니 그대로 일어났다.
그때였다.
그의 맨몸인 뒷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움직였다.
“헉, 엄마야!”
아이린은 그대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셔츠만 벗은 줄 알았는데 다 벗고 들어온 거였어?’
아이린은 순간 방금 전까지 레온하르트와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 웃음기 어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아이린, 다녀올게.”
아이린은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물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첨벙.
그렇게 첨벙대는 소리가 끝나고 주위가 조용해졌을 때가 돼서야, 그녀는 얼굴을 가린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물 밖으로 나간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몸을 망토로 감쌌다.
아이린은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내 그는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이린은 그 모습에 순간 피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큭큭거리며 웃고 나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하품이 절로 나왔다.
“하암.”
그리고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으음, 잠들면 안 되는데.”
점차 눈앞이 희미해지며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이린은 애써 눈을 뜨려 했지만 더는 수마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옷을 입은 레온하르트가 손에 담요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 왔다.
3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그녀를 혼자 두기가 불안했다.
그렇지만 아이린을 지금 상태로 제이드나 그림자들에게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불안함에 바지만 챙겨 입고 헐레벌떡 그녀를 향해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그녀가 쓰러져있는 것이 보였다.
그나마 얼굴을 물 밖으로 내놓고 엎드린 상태였다.
레온하르트는 걱정하며 그녀가 엎드린 물가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급한 마음에 그녀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넣어 그대로 빠르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물속에서 나온 그녀의 몸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보였다.
“흐흡!”
레온하르트는 순간 놀라 숨을 멈추며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곧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얼른 그녀를 담요로 감싸 안았다.
그때였다. 아이린이 따뜻했는지 그의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더 깊게 전해지는 그녀의 따뜻한 온기에 가슴이 떨려 왔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점점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는 이내 그녀를 안아 들고 마차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마차 앞에 당도하니 제이드가 그를 향해 입을 열려는 모습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입가에 검지를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눈치 빠른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마차 문을 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감싸 안은 채 마차에 조심히 올랐다.
제이드는 그녀의 드레스를 놓아둔 쪽을 가리켜 보이고는 조심히 마차 문을 닫았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무방비하게 잠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후, 엄마 품에 잠든 아기 새도 아니고.’
그 순간 아이린이 그를 불렀다.
“으음, 레온.”
잠결인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등을 살짝 토닥이며 그녀를 달랬다.
아이린은 그의 토닥임이 기분이 좋았는지 잠결에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품속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 또한 그런 아이린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으음.’
잠결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아이린은 익숙한 곰팡이 냄새에 눈을 떴다.
곰팡이가 잔뜩 핀 집이라도 자신의 집이어서일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참, 나 벗고 있었는데.’
아이린은 얼른 이불을 들어 보았다.
다행히 자신이 매일 밤 입었던 원피스 잠옷이었다.
그녀는 어쩐지 긴장이 풀려 검푸른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미친 변태 후작에게 납치되었고 대환장 파티에 열 받아 음식을 던져 응징해 주었다.
그리고 동화 속 왕자님처럼 레온하르트가 짜잔 하고 등장해 그녀를 구했다.
그 후 따뜻한 온천 물속에서의 일은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린은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꿈이었나?”
원래 세계의 서영이나 이곳의 아이린이나, 출퇴근과 월급에 목매는 평범한 그녀였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라니. 영 현실감이 없었다.
그 순간 문 쪽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괜찮아?”
“설마, 레온?”
그녀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한걸음에 달려왔는지 순간 입술이 부딪칠 뻔했다.
아이린은 놀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1인용 침대라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환자는 건드리지 않으니까.”
“환자요?”
레온하르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좁혔다.
“아이린. 그대가 쓰러진 지 일주일이나 지났어.”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일주일이요?”
“응, 일주일.”
‘세상에, 일주일을 누워있었다니!’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비루한 몸이 사고를 단단히 쳤구나. 어쩐지 삭신이 쑤시더라니. 이참에 홍삼이라도 만들어 몸보신을 해야 하나?’
그때 레온하르트의 낮은 음성이 그녀의 상념을 깨며 조용히 들려왔다.
“처음에는 지독한 독감처럼 열이 오르고 힘들어해서 황궁 의사를 불러왔어.”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감기 걸릴 만도 했지. 꼬박 하루를 헐벗다시피 했는데.’
“의사는 열이 가라앉으면 그대가 일어날 거라며 약을 지어 주고 갔어.”
순간 레온하르트의 눈가가 붉어지고 목소리가 먹먹해져 갔다.
아이린은 점점 울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에 놀라 그를 보았다.
“레, 레온?”
“그렇게 열이 가라앉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이린, 그대가… 일어나질 않았어.”
레온하르트는 그날이 떠오르는 듯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그런 그가 안타까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레온하르트는 떨리는 두 손으로 마치 그녀가 도자기 인형이라도 만지듯 조심스럽게 볼을 감쌌다.
잠시 후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를 영영 잃을까 봐. …너무도 무서웠어.”
평소 항상 우아하고 여유 있던 황태자의 모습은 어디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엄마를 잃고 초조하게 불안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대가 살아야 내가 살고. 그대가 죽으면….”
“…….”
“나도 죽어.”
갈라진 듯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욱 애달프게 다가왔다.
“레온.”
낮게 울리며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그의 고백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의 눈가에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린의 작은 손이 천천히 올라가 레온하르트의 두 볼을 감쌌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그녀를 보았다.
아이린은 이내 엄지로 그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쳤다.
이윽고 그녀 또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말아요. 레온이 울면 나도… 아파요.”
아이린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그가 지긋이 바라봤다.
“아이린, 정말 내가 울면 그대도 정말 슬퍼?”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아이 같은 물음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는 날 좋아해 주는 거야?”
아이린은 그의 물음에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절대로 레온을 좋아하지 않아요.”
레온하르트는 순간 귀가 축 처진 대형견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살짝 쳐진 눈꼬리와 그 아래의 묘한 느낌을 주는 눈물점이 어쩐지 가학성을 불러일으켰다.
‘하하, 어쩐지 울리고 싶네.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나도 참.’
아이린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 순간 보석 같은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아이린을 가득 채우며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예쁘니 내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잖아!’
아이린은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마치 꿈이라도 꾼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이린. 지금 뭐라고 했어?”
“후후, 못 들었음 말고요.”
“아니야! 들었어. 들었어. 다시 한 번만 말해줘.”
아이린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뭘 말해요?”
레온하르트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에 그 말.”
아이린은 그런 그를 무해하게 바라보며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뭘 말했던가요?”
순간 레온하르트의 눈가가 붉어지며 소리쳤다.
“아이린!”
아이린은 귀를 막으며 말했다.
“몰라요. 몰라.”
레온하르트는 절실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애원했다.
“아이린, 제발 부탁이야! 응?”
‘후후, 레온. 그러게 왜 그렇게 귀엽게 굴어가지고는.’
아이린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의 마른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레온, 사랑해요!”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그런데 레온의 입술이 많이 텄네.’
그러고 보니 그의 눈가가 붉고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게다가 턱을 둘러싸고 그의 황금색 머리에 이어져 수염이 자라나고 있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왜 저렇게 초췌해 보이지?’
물론 그는 아무리 초췌해 보여도 평범한 사람보다는 윗길이었다.
아이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단순히 걱정한다고 저렇게 되지는 않는데.’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다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레온! 설마, 지난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은 거예요?”
레온하르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잘 수가 없었어.”
아이린은 왜 잘 수가 없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을 다 잃은 듯한 레온하르트의 절절한 눈빛에 그녀는 입을 달싹일 뿐이었다.
잠시 후 목이 멘 듯 잔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불러도 그대는 눈을 뜨지 않았어. 그때마다 내 가슴 한쪽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거든.”
“……!”
“결국, 너무 고통스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그 어느 호수보다 더 아름다운 눈. 정말 그리웠어.”
아이린은 어쩐지 그 미소가 가슴 한쪽이 찌릿하며 아팠다.
레온하르트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이윽고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짙은 에메랄드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내 침대 아래로 무릎을 꿇었다.
“레, 레온! 뭐 하는 거예요?”
아이린은 놀라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의 품에 파고들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이린은 그대로 그를 안은 채 침대에 푹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평소 같은 달콤한 향이 아닌, 남성다움을 짙게 머금은 듯한 향기가 훅하고 풍겨왔다.
이윽고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정말 괜찮아. 이렇게 그대가 깨어났으니까!”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스스로 안심시키는 듯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레온하르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그녀에게 전해졌다.
뜨거우면서도 간지럽기도 한 이상한 기분.
그녀는 왠지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가 아이린
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얇은 천 너머로 닿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앗, 하필이면 배에…!’
아이린은 디저트를 즐기다 보니 살이 늘어난 배에 힘을 꽉 주었다.
이내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더 단단히 그녀를 옭아매듯 안아왔다.
살짝 민망했지만, 그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와 대형견을 섞어 놓은 듯했다.
190에 육박하는 큰 키의 그는 무릎을 꿇어도 그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순간 아이린의 입가에 미소가 퍼져나갔다.
‘후후, 이렇게 커다란 남자가 아이처럼 품에 안겨 머리를 비비적대다니. 어쩐지 귀엽네.’
아이린은 레온하르트를 품에 쏙 안아 주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그가 너무 컸다.
그녀는 이내 고민을 끝내고 한 손으로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안도한 듯한 긴 한숨이 빠져나왔다.
“그런데. 레온.”
그녀의 부름에 손길을 즐기듯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레온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으응?”
계속 쓰다듬어 달라는 듯한 대형견 같은 눈빛에 그만 심장이 다 아팠다.
‘윽! 내 심장! 가슴이 아프구나!’
아이린은 애써 이성을 끌어모았다.
‘그래도 이제 집에 돌아가서 주무셔야죠. 황태자님! 분명 일도 잔뜩 밀렸을 거야.’
“레온, 저 이제는 괜찮아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어서 황궁에 돌아가서 쉬세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도리도리하듯 흔들었다.
“싫어, 아이린!”
‘싫어라니! 아, 너무 귀여워. 어쩌지, 정말 영원히 내 방에 가둬놓고 싶다.’
아이린은 이 소설 속 세계의 장르를 바꾸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레온이 가야 저도 쉴 수 있죠.”
“아니야, 아이린은 내가 돌봐줄 거야. 내 곁에서 편히 쉬어.”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어느 나라의 황태자 전하가 수습 말단 직원의 병 시중을 들어요.”
“그게 어때서. 그대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안 갈 거야.”
“후우, 왜요?”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거니까!”
“화장실 갈 때도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화장실 갈 때도.”
“아니, 그건 좀….”
레온하르트는 무얼 상상하는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말했다.
“문 앞에서 기다리면 돼!”
점점 더 아이처럼 구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아이린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긴 집이잖아요. 안전해서 괜찮아요. 아마 황궁보다 안전할 걸요?”
아이린은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황후를 떠올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안전하긴! 마치 아기 돼지 삼 형제의 나무집 같은데.”
“네? 아기 돼지 삼 형제의 나무집이라니요?”
“응, 단단해 보이지만 늑대의 입김에 훅하고 날아가는.”
‘아니, 이 집이 곰팡이는 좀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정말 오바십니다, 남주님!’
“에이, 레온. 이 집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그때였다. 천장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
아이린이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지붕이 내려앉았다.
레온하르트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 그녀를 안은 채 벽 쪽으로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등 뒤로 꽤 커다란 지붕의 잔재가 떨어졌다.
순간 아이린의 등에 삐질 진땀이 흘렀다.
“아이린, 괜찮아?”
아이린은 뿌옇게 흩날리는 돌가루에 절로 기침이 나왔다.
“콜록. 콜록. 괜찮아요. 레온은요?”
“난 괜찮아.”
레온하르트는 혹시 2차 붕괴가 일어날까 싶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하고 커다란 품에 안긴 아이린은 어쩐지 안심이 되어 긴 숨을 내쉬었다.
곧 그녀는 구멍 난 지붕을 통해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와, 정말 제대로 무너졌구나! 저 지붕보다 레온의 품이 더 안전하긴 하겠네…….’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썸남과 꼭 껴안고 있는데. 아름답게 흩날리는 눈발도 아닌 흩날리는 돌가루를 함께 맞다니.’
“콜록 콜록.”
“아이린, 더 무너지기 전에 빨리 나가야겠어.”
아이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안은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이린은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침대의 반을 깔고 내려앉은 지붕을 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헐, 날 진짜로 죽일 뻔한 건 후작도 황후도 아닌 낡은 지붕이었어?’
그렇게 그에게 공주님처럼 안겨 나온 아이린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집을 보며 긴 한숨을 지었다.
‘어디로 가지? 데이지에게 신세 질 수도 없고.’
데이지 또한 엘리자베스 공주의 시녀로 있기에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때 아이린은 집에서 가까운 평민 거리의 호텔을 떠올렸다.
레온하르트와 처음으로 만났던 바로 그곳.
“레온, 이제 내려줘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계속 안고 있고 싶었다.
자신의 품 안에 쏙 들어 오는 그녀는 아무리 안고 다녀도 깃털처럼 가벼웠다.
레온하르트는 아쉬운 듯 그녀를 살짝 내려놓으며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었다.
마법 처리가 된 것인지, 보통 망토보다 따뜻하고 아늑했다.
‘후후, 마치 레온 같네.’
아이린은 망토를 여미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망토, 고마워요. 전 이만 호텔로 가서 쉬어야겠어요. 황태자 전하도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레온하르트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린, 그건 안 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안 된다니요?”
“호텔에 가는 것은 절대로 안 돼!”
아이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집이 무너졌는데 호텔이라도 가야죠.”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이린, 호텔은 정말 위험한 곳이야!”
“물론 위험한 곳도 있겠지만 제가 가려던 호텔은 안전해요. 저번에 가봤는데 위험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에 순간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구기며 으르렁대듯 물었다.
“호텔을 저번에 가봤다고! 누구랑 간 거야?
‘뭐지, 이 사랑과 전쟁의 남편 버전은?’
레온하르트는 평소엔 늘 느긋하던 그답지 않게 질투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린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햇살이 온통 그에게만 비치는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금발에, 잠들지 못해 붉어진 눈가조차도 매력적이었다.
‘후우, 이 상황에서도 남주 버프인가? 내가 저렇게 잠을 못 잤다면 완전 거지 꼬라지였을 텐데.’
게다가 윗단추가 두 개쯤 열려 가슴 근육이 보일락 말락하는 새하얀 셔츠.
튼실한 하체에 딱 달라붙어 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검은색 가죽바지.
아이린은 침을 꼴깍 삼키며 슬쩍 그를 훑었다.
그녀는 훈련 때 입는 저 복장을 볼 때마다 순간적으로 홀리는 것 같았다.
매번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저도 모르게 눈이 가는 것을 애써 참곤 했을 정도로.
‘그런데 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난 남자가 나 때문에 질투라니!’
어쩐지 자존감이 상승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은 순간 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누구랑 갔긴요. 저번에 펍에 갔을 때 만났던 아주 아주 잘생긴 사람이랑 갔죠.”
아이린을 자신을 빤히 보던 레온하르트의 한쪽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곧 그는 잔뜩 열 받은 듯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되었다.
‘나 말고 다른 남자라고?’
레온하르트는 생각만으로 불쾌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끓어오는 기분이랄까?
그는 애써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 그 사람이 누군데.”
아이린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하지만 자꾸만 삐져나오려는 웃음에 입술을 말아 물며 말했다.
“글쎄요. 한 번 밖 못 만난 사람이어서요. 그 사람 참 재미있고 괜찮았었는데…. 또 만났으면 좋겠네요. 후후.”
‘뭐? 또 만나겠다고?’
레온하르트는 주먹을 꽉 쥐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은 눈을 접으며 그를 바라봤다.
‘레온, 바보. 자기인지도 모르고.’
아이린의 입가에 매달린 상큼한 미소를 본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생각했다.
‘그 녀석을 생각하며 저렇게 웃다니! 꼭 알아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주겠어.’
그 순간 아이린은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레온. 지금 ‘그 사람을 찾아내서 죽이겠다.’ 같은 그런 무서운 생각 한 것 아니죠?”
레온하르트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 아니야, 아이린! 나 그런 무서운 사람 아니야. 하하하.”
아이린은 그를 향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아, 아니구나. 그렇구나.”
레온은 그제야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눈빛에 자신이 놀림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아이린이 말한 그 사람이… 나인가?’
“아이린… 설마? 그 펍에서 만난 남자가 혹시 나야?”
순간 아이린은 배꼽을 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하,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마냥 붉어졌다.
“왜요? 잡아서 죽인다고 생각한 것 아니었어요?”
그는 마음을 읽힌 듯한 기분에 순간 당황하였다.
“아, 아니래도.”
“그럼, 다행이구요. 하마터면 스스로를 죽일 뻔했네요.”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오늘 밤 이불을 엄청나게 걷어찰 것 같다는 예감에 머리를 잡았다.
“암튼 저는 이만 호텔로 갈게요.”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혼자 가는 건 안 돼! 나랑 가!”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네? 어디를요?”
“그대가 가려는 그곳.”
“설마, 호텔을요?”
레온하르트는 눈썹을 둥글게 휘며 말했다.
“응!”
아이린은 얼른 팔을 엑스자로 교차하며 말했다.
“그건 안돼요! 절대 안돼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입매를 느른하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으음. 뭐가 안되는 걸까?”
아이린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레온이 생각하는 그거 말이에요.”
레온하르트는 눈매를 곱게 접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 그게 뭐지?”
아이린은 순간 당황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 순간 그의 짙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왔다.
“이런 건가?”
그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싸오더니, 재빠르고도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순간 부드러운 감촉에 아이린의 마음이 떨려왔다.
더없이 달콤하며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이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