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0)

13.

아이린은 정신없이 몰아치는 레온하르트의 공격에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다들 한참 일할 한낮이라서인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린은 자꾸만 능글능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려는 레온하르트에게 손사래를 쳤다.

“그만. 이제 그만요!”

긴 다리로 한걸음에 가까워진 그는 깊은 바다와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후후, 나의 귀여운 아이린.”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살짝 감싸 왔다.

“누가 볼까 부끄러웠구나. 그럼 아무도 못 보게 호텔로 갈까?”

‘윽, 나의 아이린이라니!’

어디선가 흑염룡이라도 출몰할 듯한 대사에 손발이 다 오그라지는 기분이었다.

이름에 소유격을 붙이는 것이 이리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인지, 웹툰을 볼 때만 해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로맨스 여주인공들은 정말 극한 직업이었구나!’

“아니에요. 저 황궁으로 갈게요! 저 갑자기 황궁이 막 가고 싶네요. 하하.”

레온하르트는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아하, 그래. 정말 아쉽네. 나 오늘 호텔에 가서 아이린과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목소리에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기분 탓인지 살짝 들뜬 것 같기도 했다.

아이린은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으으,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너무해, 레온.’

아이린은 통통한 붉은 입술을 쭉 내민 채 삐죽이며 앞서 걸어갔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기, 아이린!”

아이린이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칫! 왜 불러요.”

레온하르트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는 반대쪽에 있는데.”

순간 아이린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며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쿡, 왜 이리 귀여운 거야, 아이린!’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 * *

아이린은 그렇게 의도치 않게 황태자 집무실 옆방을 빌려 쓰게 되었다.

다행히 집무실에 이어진 비밀 통로로 들어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후우, 아무리 힘들어도 먼저 씻어야겠어.’

얼마나 흙먼지를 뒤집어썼는지, 숨을 쉴 때마다 흙냄새가 코를 찌르며 들어왔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본 아이린은 순간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아이린!”

‘헉, 문을 안 잠갔었나?’

아이린은 순간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자신은 이렇게 상거지 꼴인데, 그는 흙먼지를 잔뜩 묻히고도 오히려 더욱 매력적인 저 모습이라니!

고등학교 때 덕질했던 아이돌 그룹이 떠올랐다.

‘짐승남 컨셉으로, 검댕을 여기저기 묻히고 상처를 분장하고 나온 그들의 모습에 수많은 팬이 기절했었지.’

하지만 지금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그런 인위적으로 한 분장도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모습이 이 정도일지는 상상도 못 했던 아이린은 순간 울상이 되었다.

‘똑같이 일주일 동안 씻지 못하고 흙먼지까지 같이 뒤집어썼는데. 나는 왜 이 꼬라지인 거냐고? 이 순간도 남주 버프인 거니, 이 불공평한 작가 놈아!’

레온하르트는 깊은 상념에 빠진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아이린, 괜찮아? 어디가 아픈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흑흑, 마음이 매우 쓰리구나.’

그녀는 곧 씁쓸한 표정을 갈무리하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다친 곳은 없고?”

“네, 괜찮아요.”

짧은 시간 먼 곳까지 갔다 왔는지 땀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 어쩐지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아이린은 순간 그를 넋 놓고 바라볼 뻔했다.

‘안 돼, 정신 차려!’

다행히 그녀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이린은 더는 이 거지 같은 몰골로 그와 한 공간에 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온을 빨리 내보내고 씻어야겠어.’

아이린은 살짝 손을 배에 갖다 대며 말했다.

“레온, 저 배가 고픈 것 같아요.”

“아! 미안, 아이린. 일주일 가까이 굶었으니 많이 배고팠을 텐데. 내가 가서 얼른 가져올게. 참, 여기 갈아입을 옷.”

아이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혹시 몰라 미리 준비해 두었어.”

아이린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언뜻 보았던 방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던 것을 떠올랐다.

‘헐, 날 여기 데려오려 옷까지 준비해 두었구나. 어쩐지, 삭막했던 방 안이 엄청나게 꾸며져 있더라니.’

아이린은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난 가서 먹을 것을 가져올게.”

레온하르트는 욕실 문을 닫고 나갔다.

아이린은 얼른 문을 잠그며 빠르게 옷을 벗었다.

“아이고, 시커멓게 멍들었네.”

아이린은 배에 검푸르게 멍이 든 자리를 내려다보다가 크게 한숨을 짓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으윽”

이곳저곳 아직 생채기가 남아 있기에 물이 닿을 때마다 따끔했다.

대충 씻고 눕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아까 거울로 본 탄광에서 나온 듯했던 몰골을 떠올리며 꼼꼼하게 씻었다.

그렇게 욕실에서 나오니 레온하르트가 들어왔다.

“아이린, 의사가 지금은 수프를 먹는 것이 좋다고 해서. 양송이 수프를 가져왔어.”

‘으윽, 고기를 먹어도 모자랄 판에 멀건 수프라니!’

아플 땐 오히려 밥심으로 견디던 그녀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레온은 식사했어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수프를 기다리면서 먹고 왔어.”

그의 말에 아이린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 잘했어요.”

그렇게 그녀는 레온하르트가 가져온 부드러운 수프를 먹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아 서류를 가져와 읽었다.

다들 업무에 매진하는 시간.

아이린은 직장에 나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잠을 자볼까 했으나 일주일 동안 내리 자서 그런지 눈이 지나치게 말똥말똥했다.

아이린은 그렇게 부드러운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누워 눈부시게 화려한 샹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한숨을 지었다.

‘휴우. 이거 참 호캉스가 따로 없네. 그런데 왜 이리 한숨이 나오는 건지.’

아이린은 원래도 아무리 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잠은 되도록 집에 가서 자곤 했다.

일하는 곳에서 잠까지 잔다는 것은 이상하게도 온종일 일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런 탓인지 지금도 분명 쉬고 있는데도 어쩐지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라도 내 집이 최고인데. 지붕이 무너져 내리다니, 정말 어이없네.’

그때 언제 일어났는지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물과 약을 가져왔다.

“아이린, 이제 약 먹을 시간이 되었어.”

‘허 참. 직장에서 잠만 자고 최종 보스의 보살핌을 받다니!’

정말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침대 옆 협탁에 쟁반을 내려놓고 일어나려는 그녀를 조심히 부축했다.

아이린은 다정한 그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말자 다짐하며 단호히 말했다.

“지붕을 고칠 때까지만 이곳에 있을 거예요.”

옆에서 그녀를 부축하던 레온하르트는 아주 무너져 버린 그녀의 집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후후. 아이린, 아무래도 오랫동안 여기 살아야겠는데.’

“응. 그때 가서 아이린 맘대로 해!”

레온하르트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그녀에게 물과 약을 건넸다.

아이린은 어쩐지 좋아하는 것 같은 그를 살짝 흘기며 약을 받아먹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하긴, 날 생각해서 저러는 건데.’

그러고 보니 눈 밑까지 거뭇해진 레온하르트의 얼굴도 오전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

“레온, 일이 밀린 건 알지만 이제 그만하고 가서 좀 쉬세요.”

그녀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머뭇머뭇 그녀의 침대 앞에 서 있었다.

아이린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나가지 않으시고 뭐 하세요? 그러다 레온이 쓰러지실까 봐 걱정된단 말이에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레온하르트는 무언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런데, 아이린. 나 있잖아….”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내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자면 안 돼?”

“네? 여기서요?”

“저기 소파에서 잘 테니 여기서 잠들게 해줘.”

아이린은 놀란 맘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배에 통증이 밀려오는 바람에 미간을 찡그리며 도로 누워야 했지만.

“으윽…!”

레온하르트는 얼른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아이린, 의사가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남주야, 네가 여기서 자기까지 하면 내가 이성의 끈을 놓을 수 있단다.’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저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고생하셨잖아요. 그런데 불편하게 누워계시면 제가 너무 신경 쓰여 맘 편히 쉴 수가 없어요.”

“아이린. 제발.”

아이린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요. 어서 가서 침대에서 편하게 주무세요.”

아이린의 말에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마음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 그런데 그게 힘들 것 같아.”

“네? 힘들다니요?”

레온하르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네?”

아이린은 살짝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안 보이면 잠이 올 것 같지 않다니? 내가 무슨 수면제도 아니고.’

“그리고 네가 또다시 사라질까 봐. 자꾸만 겁이 나!”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한껏 축 늘어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려한 외모에 소드 마스터로 검술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게다가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차기 황제로 주목을 받는 그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에게선 항상 당당하고 여유 있던 황태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후우,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여기서 함께 자도록 해요.”

레온하르트는 그 순간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으윽, 저 미소 뭐야? 설레게. 왜 이리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건지!’

그때 레온하르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레온하르트는 순간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아이린은 순간 심장이 입으로 빠져나올 것 같아,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는 싱긋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잘 자.”

레온하르트는 이내 침대에서 깔끔하게 돌아섰다.

‘어? 여기서 자기로 해놓고 어디 가는 거지?’

아이린은 얼른 그를 불러 세웠다.

“레온, 어디 가요?”

레온하르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소파를 가리켰다.

“저기서 자려고.”

아이린은 그런 그의 모습에 푸스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레온,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왜 이리 댕댕이같이 귀여운 거야!’

그녀는 손을 펴 침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소파로 가지 말고 여기서 같이 자요.”

순간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며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그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아이린은 눈썹을 휘며 그에게 물었다.

“레온,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레온하르트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아이린은 그런 그에게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레온은 내가 보이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하고, 전 레온이 불편한 것은 못 보겠으니 어쩌겠어요.”

아이린은 다시 한번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얼른 와요. 저도 이제는 정말 쉬어야겠어요.”

레온하르트는 침대에 놓인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머뭇 서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뒤돌아 욕실로 들어갔다.

침대를 톡톡 두드리던 아이린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욕실에서 쏴아아 하고 물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아이린은 이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푸핫, 지금 설마 같이 잔다고 씻으러 간 거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촉촉하게 젖어 흐트러진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나오는 레온하르트.

그 자태가 가히 눈부셨다.

게다가 상의는 벗은 채 바지만 입고 나온 모습이라니!

그 순간 그녀의 두 눈동자가 그의 몸에 고정되는 것은 본능이었다.

큰 키에 넓게 벌어진 어깨.

오랜 훈련으로 탄탄히 자리 잡은

대흉근이 복부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며 잘 나눠진 초콜릿 같은 복근으로 이어졌다.

몸 전체가 근육질인 것은 분명한데, 우락부락해 보이지 않고 날렵해 보여 그녀의 눈을 즐겁게 했다.

그야말로 그녀의 마음을 매우 자극하는 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시선도 모른 채 천천히 셔츠 단추를 목까지 다 잠그고서 그녀를 바라봤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이린은 오묘한 기분에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후, 아이린. 날 보고 있었던 거야? …살짝 유혹해 볼까?’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레온하르트는 목까지 잠갔던 단추를 세 개쯤 느슨하게 풀었다.

이윽고 그는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 순간 아이린의 시선이 슬쩍슬쩍 천장과 그의 가슴 쪽을 오가더니 볼이 점점 붉어졌다.

‘이런, 이 정도로 얼굴을 붉히는 거야? 아이린, 정말 치명적으로 귀엽단 말이야.’

아이린은 살짝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그럼, 이쪽으로 누워요.”

레온은 슬쩍 그녀의 손이 놓인 자리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옆에 누웠다.

침대는 황실에서 사용하는 침대라고 보기에는 매우 작았다.

집무실에서 일하다 잠시 쉬기 위해 준비해 둔 침대였기에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정도였다.

‘후우, 괜히 여기 누우라 했나.’

아이린은 레온하르트가 옆에 누우니 자꾸만 아까 본 그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안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조용한 가운데 그의 거친 숨소리가 가까이서 크게 들려왔다.

아이린은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숨이 막혀왔다.

‘어쩌지…!’

게다가 풀어 헤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의 가슴근육이 보여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뒤돌아 누우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녀는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린은 의도치 않았지만 다소 거칠어진 자신의 숨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조심스러웠다.

숨을 크게 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때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네.”

“저기… 손잡고 자도 돼?”

아이린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헉! 저 얼굴에 저 목소리라니! 나 어떡해!’

아이린은 너무나 가까이에서 보이는 레온하르트의 얼굴 때문에 입을 열면 비명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꼴깍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요.”

레온하르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린 아이린은 왼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곧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따듯하게 감싸왔다.

‘따뜻해.’

아이린은 어쩐지 보호받는 기분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졸린 듯 감겨오는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윽고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레온, 얼른 자지 않고 왜 그렇게 빤히 봐요.”

순간 머쓱했는지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눈을 감으면 아이린이 없어질까 봐.”

이윽고 촉촉해진 그의 눈빛에 마음이 술렁였다.

아이린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는 그가 잡지 않은 다른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레온, 걱정하지 말아요.”

“…….”

아이린은 그에게 감싸인 손에 얼굴을 살짝 부비며 말했다.

“저 이렇게 레온의 손을 꼭 잡고 있잖아요.”

레온하르트는 굳었던 눈매를 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응. 나만 두고 어디 가지 마!”

아이린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겠어요.”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안심을 하며 긴장이 풀린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이린은 그런 그를 감싸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그녀도 스르륵 함께 잠들었다.

* * *

똑똑.

“으음.”

“아이린 씨, 들어가도 될까요?”

똑똑.

“저, 아이린 씨.”

아이린은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시계를 보았다.

“12시? 후우, 몇 시간을 잔 거야?”

그때 다시 노크 소리와 함께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씨.”

“제이드 님? 잠시만요!”

“네.”

아이린은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으며 말했다.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문이 열리고 맛있는 냄새와 함께 제이드가 들어왔다.

이내 제이드가 아이린의 침대 위에 작은 상을 놓아 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이린 씨의 점심을 부탁하시고 가셨습니다.”

아이린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보좌관님이 제 식사를 직접 들고 오시다니. 죄송해요. 이렇게 폐가 되는데, 그냥 호텔로 갈 것을….”

제이드는 그녀를 향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잘 오셨습니다, 아이린 씨. 덕분에 일주일째 마비된 황태자궁 업무가 이제야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네?”

아이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제이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자 친우로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이린 씨가 깨어나시면 불편해하실까 봐 온천에서 바로 집으로 모셨는데, 도착하자마자 몹시 앓으셨단 얘긴 들으셨죠?”

“…네, 드, 들었죠….”

제이드는 그날의 일이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의사를 불러 치료를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아이린 씨 옆에서 레온이 얼마나 무서운 얼굴로 지키고 서 있었는지! 정말 맹수가 따로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레온하르트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지 못했던 그녀는 제이드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설마요.”

순간 제이드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입니다. 하루는 레온을 좀 쉬게 하려고 저희가 대신 아이린 씨 옆을 지키겠다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레온의 반응이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

“아이린 씨 가까이에는 아무도 올 수 없다며 레온이 미치광이처럼 날뛰는데, 어휴….”

아이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제이드는 그때가 떠올랐는지 순간 어깨를 떨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를 말리려는 저희에게 검까지 휘두르는 통에 다 죽을 뻔했습니다.”

“설마 그, 그런 일이…!”

“후우, 그 설마가 진짜였답니다. 제가 오랫동안 레온을 봐 왔지만 그런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아이린은 어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레온은 어디 갔지?’

계속 함께 있었던 레온하르트가 보이지 않으니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황태자 전하는 어디 가셨나요?”

“황제 폐하께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가셨습니다. 가면서도 아이린 씨 옆을 비우지 말라고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는지!”

제이드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런 행동도 이번이 처음이었고요.”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움이 몰려와 고개를 숙였다.

제이드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내 스푼을 들어 그녀의 손에 쥐여준 그가 말했다.

“이렇게 깨어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이제 레온을 진정시킬 사람은 아이린 씨뿐인 것 같습니다.”

아이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수프를 떠먹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나온 그녀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일주일 후.

레온하르트의 과보호에 방안에 갇혀있다시피 했던 아이린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서류라도 볼라치면 바로 서류를 뺏겼다.

게다가 집에 가 볼까 해서 외출이라도 하려고 하면 아직은 무리라며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그렇게 레온하르트는 집무실에서 수시로 그녀가 있는 방을 오가며 함께 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그동안 밀린 업무 탓에 그도 자주 오기는 힘들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그녀가 혼자 있는 시간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TV나 스마트폰도 없는 세상에, 아무것도 안 하고 혼자 누워만 있으려니 그녀는 지루함을 넘어 좀이 쑤셔 힘들 지경이었다.

아이린은 원래 세계에서나 여기에서나 평소 일 중독에 빠져 살았다.

그 때문인지 매일 침대와 한 몸이 되다시피 한 지금의 상황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놀고먹길 원했는데 막상 이뤄지니 놀고먹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아이린은 더는 참지 못하고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지만, 별다르게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집에 가보고 싶은데. 황궁을 나서면 바로 들키겠지?’

아이린은 어쩔 수 없이 매일 점심을 먹던 벤치로 향했다.

“기분 좋다.”

겨울이지만 룩스의 수도의 한낮은 매우 따뜻했다.

아이린은 그렇게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벤치에 누웠다.

눈이 부셔 한 손을 올려 살짝 눈앞을 가리자,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정말 맑고 청아했다.

‘방에 있을 때는 혹시 누가 볼까 봐 창문도 못 열었는데.’

독방에 갇힌 죄수가 오랜만에 햇빛을 보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따스해! 역시 광합성은 나무에도 사람에게도 좋다니까!”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매섭기도 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두고 간 망토를 가져와 이불처럼 덮고 있으니 코는 시려도 몸은 따듯했다.

아이린은 어쩐지 나른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와 그녀의 단잠을 깨웠다.

“아이린.”

눈을 뜨자 평소보다 편해 보이는 차림을 한 에드먼드의 얼굴이 가까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린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2황자 전하!”

순간 그녀의 이마에서 딱 소리와 함께 별이 보였다.

“윽.”

“윽, 아이린.”

에드먼드 역시 제법 아팠는지 두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지 그랬어.”

아이린은 살짝 난처해진 표정으로 붉어진 이마를 감싸며 말했다.

“죄송해요. 순간 놀라서.”

에드먼드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 나는 괜찮아. 그나저나 아이린,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괜찮아?”

아이린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드먼드 황자가 어떻게 알았지?’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참. 에드먼드는 암흑 집단의 수장이었지.’

“지금은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레온하르트가 구하러 온 그곳에 에드먼드도 있었지만, 그녀는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그를 보지 못했다.

사실 그는 마지막까지 그곳에 남아 후작과 그의 부하들을 잔인하게 고문하였다.

재판을 받아야 하니, 딱 숨만 붙여 놓은 정도랄까?

처음으로 생긴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람, 아이린에게 고통을 준 그들을 에드먼드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으로 갚아 줘도 모자라지. 재판만 아니었으면 그냥…….’

그렇게 그가 그날의 상념에 젖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아이린의 작은 손가락이 그의 미간에 닿아왔다.

에드먼드는 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놀라 눈이 커지다가, 곧 얼굴에 열기가 올라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늘씬하게 잘빠진 그의 등이 보였다.

레온하르트와 굳이 비교한다면 요즘 아이돌 같이 마르고 날렵한 몸매였다.

‘내가 만져서 기분이 나빴나?’

아이린은 원작 속 에드먼드가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누구와 닿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이린은 계속 조용히 뒤돌아 있는 그를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에디, 허락받지 않고 손대서 미안해요. 화 많이 났어요?”

“아, 아니야.”

“정말요?”

에드먼드는 여전히 뒤돈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후우, 그럼 다행이에요. 전 그저 미간에 주름을 펴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에드먼드는 그제야 한 손을 올려 자신의 미간을 잡으며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미간에 주름?”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잘생긴 얼굴인데 벌써 미간에 주름지면 어떡해요, 아깝잖아요!”

‘설마 날 걱정해 주는 건가?’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형님 레온하르트 이후로 그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에드먼드는 순간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의 걱정을 받을 수 있다면 이대로 쪼글쪼글 주름투성이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이린에겐 이런 우울한 표정보다 웃는 모습이 더 어울려.’

에드먼드는 미간을 펴고 애써 입꼬리를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순간 아이린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후후, 그래요. 그렇게 웃으니 좋잖아요.”

아이린은 손수건에 담아온 쿠키 한 개를 그에 건넸다.

커다란 토끼 얼굴 모양의 고소한 버터 쿠키였다.

“자, 먹어봐요.”

에드먼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녀가 내민 쿠키를 받아 한 입 깨물었다.

쿠키는 매우 달고 고소했다.

속이 울렁일 정도로 달았다.

아이린은 초콜릿 쿠키를 한 입 깨물며 그에게 물었다.

“맛있죠?”

에드먼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남은 쿠키를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그는 아이린을 떠올릴 때마다 달콤한 기분이 들었고, 뒤이어 그녀를 만나고 싶어져 답답함에 속이 울렁거렸다.

어쩐지 이 쿠키를 먹고 있으니 그때와 비슷한 것 같았다.

“하나 더 먹을래요?”

에드먼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은 얼른 쿠키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고마워. 아이린.”

“뭘요. 친구 사이에 쿠키 몇 쪽이 뭐라고.”

아이린은 싱긋 웃으며 그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닦아주었다.

에드먼드의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가 그의 미간에 닿았을 때도 번개를 번쩍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입가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한순간 숨 쉬는 것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놀란 에드먼드의 얼굴에 열기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처럼 몸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속 어딘가부터 올라온 열기 탓인지, 목덜미와 귀 끝까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발갛게 익었다.

아이린은 급속도로 빨개진 에드먼드의 얼굴에 놀라 손으로 그의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에디, 괜찮아요?”

‘혹시 열 감기인가?’

그녀는 어릴 적 할머니가 열을 재듯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순간 에드먼드의 얼굴은 커질 듯 더욱 새빨개졌다.

“헉, 뜨거워! 어, 숨도 쉬지 않네.”

아이린은 얼른 그의 등을 쓰다듬듯 두드리며 말했다.

“에디, 얼른 숨 쉬어 봐요.”

에드먼드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작은 터치에도 번개를 맞은 듯했는데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라니!

그녀의 움직이는 손을 붙잡고 싶었다.

아니, 그대로 두고 싶기도 했다. 그의 마음속은 그야말로 길 잃은 강아지처럼 혼란 속에 우왕좌왕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린의 손길이 계속 등을 두드리고 있으니, 에드먼드의 심장은 전력 질주를 하듯 날뛰었고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애써 숨을 확 내뱉었다.

“헉……. 나, 난 괜찮아.”

“에디, 설마 음식 알레르기가 있나요?”

에드먼드는 더는 한마디도 하기가 힘들었다.

‘헉, 더는 안 돼!’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그녀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알레르기가 아니라면 진짜 감기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린은 다시 그의 이마에 열을 재 보려고 손을 뻗었다.

순간 그는 이러다 숨이 막혀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먼드는 손사래를 치며 얼른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애써 목소리를 짜내며 입을 열었다.

“흐읍. 아, 아이린, 내,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에요. 이리 잠깐 와 봐요. 열만 좀 재어 보게.”

에드먼드는 점점 다가오는 아이린을 피해 뒷걸음을 치더니, 급기야는 그대로 뒤돌아 달리며 소리쳤다.

“아이린, 미안!”

“어어! 에디! 어디 가요!”

아이린이 그의 뒤를 몇 발자국 뒤따랐지만 벌써 저 멀리 사라지는 에드먼드였다.

“후우, 참 빠르기도 하지. 누가 암흑세계 수장 아니랄까 봐.”

아이린은 마치 닌자와도 같이 사라지는 에드먼드를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도망치듯 사라졌지? 정말 무슨 바쁜 일이 생긴 건가?”

아이린은 에드먼드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벤치로 돌아가 누웠다.

“에잇, 몰라. 나중에 물어보면 되지. 낮잠이나 다시 자자!”

* * *

깜박 잠이 들었던 아이린은 해가 약간 기울었을 때야 겨우 눈을 떴다.

“아아함!”

벤치에 앉아 기지개를 켜던 아이린은 낮아진 기온에 망토를 단단히 둘렀다.

“헐, 벌써 해가 져가는 거야?”

그동안 답답함과 불안함에 난데없는 불면증을 앓고 있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밖에 나오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다니!

아이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한 줄기의 매서운 바람이 지나갔다.

아이린은 망토 끝을 꼭 붙잡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으으, 추워!”

아무리 날이 따뜻했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벤치에서 노숙자처럼 널브러져 잠을 잤으니 감기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콧물이 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얼른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닦았다.

그 순간 코끝이 간질간질하더니 재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에취!”

아이린은 그렇게 코를 훌쩍이며 터덜터덜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나올 때는 망보면서 나왔는데. 어떻게 몰래 들어가지?”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와 함께 방에 들어갔을 때 겨우 통과했던 비밀 통로를 떠올렸다.

길도 매우 복잡한데다 함정까지 가득했던 비밀 통로였다.

그런 그곳을 혼자 간다는 것은 바로 천국행 급행열차를 타는 것과 같았다.

아이린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길로는 잘못 들어갔다가 칼 맞거나 그대로 굶어 죽을지도 몰라.”

그때 저 멀리서 레온하르트가 숨을 헐떡이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어, 레온!”

달려온 그가 그대로 아이린을 꽉 품에 안았다.

그녀는 마치 그의 품 안에 맞춘 듯 폭 안겼다.

‘헉, 무슨 남자가 땀 냄새도 향기롭니! 어, 그런데 왜 이리 땀을 많이 흘렸지?’

아이린은 축축한 그의 셔츠를 바라보며 의아했다.

‘기사단과 훈련이 있었나?’

그래도 한겨울인데 흠뻑 젖는다는 것은 이상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볼에 살짝 닿아있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서 쿵덕쿵덕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그 순간 울음기 섞인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어딜 다녀온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어, 레온 설마 우는 거야?’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눈물을 참는 듯 그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헉, 레온! 미, 미안해요. 걱정 많이 했어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또 그렇게 나쁜 놈들에게 잡혀가 잘못되었을까 봐 내가 얼마나…!”

레온하르트는 눈물을 참는 듯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방에만 있으려니 좀 답답했어요. 잠시 벤치에만 앉아 있다 오려 했는데. 울지 마요! 제, 제가 잘 못 했어요.”

‘으악, 이건 뭐 말하면 말할수록 나 쓰레기잖아!’

아이린은 사실 잠을 푹 자다 왔다.

하지만 잔뜩 고생한 그의 얼굴을 보니, 잠을 자다 왔다는 이야기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후우, 그렇게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고!”

벤치에 있었다는 그녀의 말에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레온하르트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황궁 안에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하고 밖으로만 찾아다녔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린은 흐트러진 레온하르트의 머리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의 셔츠를 보았다.

‘저렇게 걱정하며 찾아다닐 레온을 생각지도 못하다니! 나 정말 이기적이고 못 말리는 멍청이구나!’

평소 이런 행동을 하는 여주들을 볼 때마다 고구마 만 개 먹었다며 욕하곤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자신이 이럴 줄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자신을 애타게 찾아다녔을 그를 떠올리니, 답답하다고 몰래 나온 자신에게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이린은 정말 입이 열 개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애써 입을 떼며 그에게 말했다.

“레온, 정말 미안해요.”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품에서 살짝 놓아주었다.

아이린은 순간 어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곧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옭아매듯 잡아 왔다.

“이제, 말없이 어디 가지 마!”

명령조의 말이었지만 걱정이 가득한 그의 눈빛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내게 말해.”

“레온, 지금 많이 바쁘잖아요. 제가 어떻게 그래요.”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아이린, 후작은 혐의가 있어 감옥으로 가게 되었지만, 그의 자식들은 아직도 버젓이 세를 이루고 있어. 그들이 후작의 악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심증도 있고.”

“……!”

“그러니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내가 없을 땐 그림자를 호위로 붙여 주긴 하겠지만.”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뭐야? 후작만 잡으면 그 가문이 몰락하는 것 아니었어?’

“후작의 범죄에 그 가문 사람들이 연관되어있다는 걸 밝힐 때까지는 항상 조심해야 해!”

아이린은 어쩐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던 그는 다짐하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후우, 내가 무능해서 아이린에게 피해를 줬어. 하루빨리 그 증거를 찾아낼게. 날 믿어줘, 아이린.”

‘그래, 그렇게 오랫동안 온갖 나쁜 짓을 하던 흑막이 하루아침에 잡힐 수는 없겠지.’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어 살짝 야윈 그의 볼을 살짝 만졌다.

“믿어요. 그리고 저는 괜찮아요, 레온. 그러니 무리하지 말아요.”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따뜻한 손길에 살짝 눈을 감으며 기댔다.

“잠도 푹 자고, 잘 먹고 다녀요. 그래야 일의 능률도 올라요.”

아이린은 다른 한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게다가 저… 지붕이 무너져서 저 어디 가지도 못하잖아요.”

자신의 무능으로 피해를 본 것은 그녀였다.

그런데 오히려 집이 무너진 것이 잘되었다는 듯 웃으며 그를 위로하는 아이린 때문에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레온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면 황궁 밖에는 절대 나가지 않을게요.”

아이린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를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불안해하지도 말고 초조해하지도 말아요.”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안심한 듯 다소 편안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아이린은 아까 전 그처럼 그의 손에 단단히 깍지를 끼며 미소 지었다.

“우리, 이제 들어갈까요?”

그의 커다란 손의 반도 되지 않는 작은 손가락이 앙증맞게 그의 손을 옭아왔다.

‘아이린과 나. 우리.’

그녀의 우리라는 말과 함께, 깍지 낀 손을 바라보니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했다.

이내 그는 그녀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아이린. 우리 함께 들어가자!”

그때 차가운 시선으로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자애로운 것으로 소문난 그녀의 얼굴에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군.”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황태자의 비서관인 아이린이 2주째 출근하지 않는 것이 무언가 이상했다.

데이지에게 물었지만, 그녀 또한 알고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 그녀의 호위 기사인 로만 경이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하는 기사들에게 들은 소식을 그녀에게 전했다.

바로 황태자 레온하르트가 피도르 후작의 노예시장을 불시에 덮쳤다는 소식이었다.

덧붙여 명명백백한 증거를 잡아 피도르 후작을 감옥에 넣었다는 소식도.

일 중독자처럼 밤낮없이 일하는 황태자의 곁에서 항상 붙어 있던 아이린이었다.

그러니 분명 그 현장에 비서였던 아이린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와중에 비서관인 그녀가 2주나 결근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찜찜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지나가다 수확을 얻다니. 오늘 참 운이 좋군.’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로만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도록 해요. 로만 경.”

로만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 공주님. 당신의 뜻이라면 어디든지.”

엘리자베스는 그의 손을 살짝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두 사람이 아니, 네 사람이 떠나가고.

황태자궁으로 이어진 숲길에 개미 하나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무렵이었다.

키 작은 정원수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휴우, 들킬 뻔했네.”

로만 경에게 무언가 듣고는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간 엘리자베스를 몰래 따라 나온 데이지였다.

그녀는 아이린이 걸어간 쪽과 엘리자베스가 걸어간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긴 한숨을 쉬었다.

“아이린, 그런 일이 있으면 날 찾았어야지.”

데이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린이 있는 황태자궁으로 몸을 돌렸다.

똑똑.

“황태자 전하!”

“어서 들어와, 제이드.”

달칵 소리와 함께 제이드가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손님이 왔습니다.”

현재는 아이린이 비서관 업무를 보지 못하는 상황.

원래의 절차대로라면 실장이 복귀하거나 차장이 황태자인 그의 비서를 맡아야 했다.

하지만 실장은 육아휴직으로 당장 복귀가 힘들었다.

그리고 아직 황태자 보좌관실의 스파이가 남아있기에 섣불리 업무를 바꿀 수도 없었다.

덕분에 보좌관인 제이드가 비서관의 업무까지 맡느라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름다울 정도로 보기 좋게 살이 있었던 그의 볼은 야위어 갔고 턱선마저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준수한 외모가 어디 간 건 아니었다.

예전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미남이었다면, 지금은 샤프한 이미지의 냉미남으로 많은 영애들 입에 오르내렸다.

“누구?”

“엘리자베스 공주의 시녀입니다.”

레온하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

제이드 역시 살짝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여기가 아카데미도 아니고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하는군.”

“…….”

레온하르트는 서류를 든 채로 귀찮은 듯 말했다.

“얼른 들어오라고 해.”

제이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문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문 앞에선 데이지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레온하르트와 제이드.

이름을 듣기만 해도 심장이 덜컹덜컹할, 제국 최고의 미남자 두 명.

하지만 지금은 빨리 나가라는 듯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는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데이지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며 생각했다.

‘윽, 제이드 님에게 이런 눈빛을 받다니 좀 상처인걸. 그래도 오늘은 꼭 아이린을 만나야 해!’

그날 이후 데이지는 황태자궁 주변을 얼쩡거리며 아이린을 만날 기회를 기다렸다.

웬만하면 그냥 아이린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 볼까도 했다.

하지만 아이린의 건강이 걱정되어 잠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린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길이 엇갈리는 것인지, 통 만날 수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매일 엘리자베스의 심부름 덕분에 황태자궁을 오가는 것에 대한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때 그녀의 상념을 깨고 황태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얼 그리 멀뚱히 서 있는 건가? 매우 바쁘니 줄 것이 있으면 어서 놓고 돌아가도록 하게.”

데이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그때 못마땅한 듯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단가?”

“저 그게….”

그때 제이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께선 오늘 많이 바쁘십니다. 할 말이 더 없다면 어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두 남자의 무서운 시선에 두 눈을 꼭 감은 데이지는 이내 소리치듯 말했다.

“저는 사실 아이린을 만나러 왔습니다.”

순간 두 남자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이윽고 살짝 흥분한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이라니! 그녀는 비서관으로 하급 시녀인 네가 낮춰 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사실 하급 시녀인 데이지가 비서관인 아이린을 직책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지만, 이렇게까지 화낼 일도 아니었다.

레온하르트가 화를 낸 것은 엘리자베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시녀까지 꺼려지던 참에 아이린의 이름까지 함부로 불러서였다.

“이만 나가시는 게 좋겠군요.”

그런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본 제이드가 데이지를 방에서 내보내려 다가섰다.

데이지는 얼른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제 이름은 데이지라고 합니다. 저와 아이린은 아카데미 때부터 친구입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의 친구?”

“네, 저희는 자매처럼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아이린을 만나러 그녀의 집에 갔더니 지붕이 무너져 있어서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에 살짝 눈썹을 움직이며 제이드를 바라봤다.

“이리저리 갈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어서, 몹시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제이드는 데이지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금 꼭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린에게 먼저 저를 만날 것인지 물어보고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 데이지를 지그시 바라보던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이야기는 잘 알겠다. 잠시 나가 있도록.”

데이지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때 제이드가 말했다.

“먼저 아이린 씨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는데.”

그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만약 진짜 친구라면 혼자 우울해 하던 아이린의 기분도 좀 나아질 테니!”

“응, 내 생각도 그래.”

레온하르트는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 책장을 밀었다. 그 뒤에 통로가 하나 나왔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오늘도 일이 잔뜩 밀렸거든.”

“응, 나가면서 잠시 손님용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전해줘.”

제이드는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통로 안으로 들어가 책장을 닫았다.

그리고 살짝 엎드려 바닥의 문을 여니 계단이 보였다.

그의 집무실과 연결된 방의 입구는 마법으로 매달 그 위치를 달리 했다.

어릴 적부터 암살에 시달렸던 그였기에, 잠자는 시간만이라도 안전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황궁 마법사들은 매달 한번 황태자궁에 찾아왔다.

그들은 황태자의 집무실과 연결된 방의 입구의 공간을 뒤틀고 움직였다.

그렇게 지금의 안가가 완성된 것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였다.

똑똑.

“아이린, 나야.”

“레온?”

“나 지금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대답에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아이린은 소파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혹시, 엘리자베스 공주의 시녀를 알고 있어?”

“네? 엘리자베스의 시녀라면…. 데이지요?”

“응, 그 이름이더군. 혹시 그대와 친구인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입을 열었다.

“네. 아카데미 때부터 친한 친구에요.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이리 걱정하듯 묻는 걸 보니 친구가 맞는가 보군.”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에게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집무실에 그녀가 네 친구라며 찾아왔었어. 널 꼭 만나고 싶다고.”

‘헉, 데이지에게 연락하는 것을 잊고 있었어.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었을 텐데.’

“데이지는 아직 그곳에 있나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집무실에 오래 있으면 눈에 띄어서. 우선 손님용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아이린은 급하게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저 지금 데이지를 만나야겠어요.”

레온하르트는 얼른 아이린의 손목을 잡았다.

“잠시만. 아이린이 밖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은 아이린에게도 친구에게도 위험한 일이야.”

“위험하다니요?”

“애석하게도 노예시장 일 이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적들이 많이 있어.”

“아… 그렇죠.”

아이린은 이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기다려. 피도르 가문을 하루 빨리 정리할 테니까.”

“…….”

“대신 오늘 일과가 끝나면 밤에 그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올게.”

아이린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줘.”

* * *

“데, 데이지!”

“아이린!”

두 사람은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두 손을 맞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레온하르트는 기뻐하는 아이린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데이지는 순간 울먹이며 말했다.

“아이린,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데이지.”

아이린도 데이지의 손을 맞잡은 채 울먹였다.

“흑흑, 아이린.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가 황태자 전하께 의탁한 걸 알고서 내가 너 만나겠다고… 제이드 님이… 으헝헝, 아이린!”

“으아아앙, 데이지!”

그 순간 두 사람은 얼싸안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윽고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하고 풀어내던 아이린이 말했다.

“훌쩍, 우리 우선 소파에 앉자.”

“응.”

살짝 고개를 끄덕인 데이지는 눈물을 닦으며 아이린을 따라 움직였다.

“우와, 근데 이게 다 뭐야?”

소파 앞 넓은 테이블에 색색의 디저트가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그 향기가 어찌나 달콤한지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절로 넘어갔다.

“하하, 너를 만난다고 황태자 전하께서 준비해 주셨어.”

그 순간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황태자 전하가 이 디저트들을 다 준비해 주셨다니? 설마, 아이린 너 황태자 전하랑 사귀는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글쎄, 이걸 사귄다고 해야 하는 건가?”

데이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같긴 한데, 라니?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 같긴 하다니?”

아이린은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데이지, 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너, 황태자 전하와 키스는 해봤어?”

아이린은 순간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거봐, 그런데 무슨 좋아하는 같긴 한데야?”

“그게, 아직 사귀자는 말을 듣지 못 했어.”

“뭐?”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데이지는 이내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풋, 하하하!”

“뭐야, 데이지 왜 웃는 거야?”

“왜 웃긴,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러지.”

“내가 뭐가?”

데이지는 애써 웃음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이린, 넌 아무래도 그동안 로맨스 소설 헛읽은 듯해.”

“응? 소설을 헛읽다니?”

“너 그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담긴 로맨스 소설 중에서 남주가 여주에게 ‘오늘부터 사귀자!’, ‘오늘부터 1일!’ 뭐 이딴 거 말하는 거 봤어?”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데이지를 바라봤다.

“혹시 봤다면 그 소설은 버리도록 해.”

“왜?”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그런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무언가 시작되어 있었을 테니까?”

아이린은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일 그녀를 웃게 해주고 그녀가 그를 애써 멀리할 때도 그는 자신을 놓지 않았다.

데이비는 입꼬리에 미소를 매단 채 말했다.

“생각해봐. 너와 황태자 전하의 사이가 어떠한가?”

데이지의 물음에 아이린은 매번 죽음의 고비 앞에서 그녀를 구하러 달려왔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후에게 끌려가고, 변태 후작에게 납치되고, 갑자기 지붕이 무너질 때도, 레온하르트는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온천에서의 일은! 살짝만 떠올려도 아이린의 얼굴이 붉어지고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이윽고 몸속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상념에 빠진 그녀에게 데이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네 표정을 보니 어떤 상황인지 짐작은 가지만, 확인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더 물을게.”

“……?”

“아이린, 너 지금 황태자 전하와 사귀고 있니?”

그녀의 물음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응,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 있는 것이 사귀는 거라면. 우린 지금 사귀고 있어.”

아이린의 말에 데이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우리? 네 입에서 나 외에 우리가 나와서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아이린은 순간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데이지 그래도 난 네가 가장…!”

그 순간 데이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린, 너에게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갑작스런 축하의 말에 잠시 멍하던 아이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데이지.”

“근데, 나 정말 충격이다!”

“응? 뭐가?”

“네가 나보다 남자 친구가 먼저 생기다니!”

아이린은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쏘아 보았다.

“뭐? 내가 먼저 생길 수도 있지!”

데이지는 허리를 꼿꼿이 펴며 고개를 들었다.

“봐봐,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좀, 너보다 키도 되지? 얼굴도 더 작지? 애교도 많지?”

“으윽, 데이지!”

아이린은 순간 데이지에게 달려들었다.

데이지는 얼른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머리를 검지로 밀며 내려다보았다.

아이린은 바둥거리며 소리쳤다.

“이힉, 데이지 너무해!”

데이지는 아이린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절로 삐져나왔다.

“푸웃, 그런데 내가 너보다 안되는 게 있었네.”

“응? 뭐?”

아이린은 바둥바둥거리던 것을 멈추며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데이지를 올려다보았다.

데이지는 그녀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 귀여움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지. 왠지 황태자 전하께 주기 매우 아까운걸.’

* * *

“황태자 전하. 데이지입니다.”

‘으윽, 또 왔군.’

레온하르트는 순간 와득 하고 이를 갈았다.

옆에 있던 제이드가 의아한 눈빛으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웃. 레온, 너 지금 데이지 씨에게 질투하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거칠게 서류를 펴며 말했다.

“에잇 몰라, 들어오라 그래.”

제이드는 애써 웃음을 삼키며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는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데이지 씨. 이렇게 매일 보니 반갑네요.”

데이지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방긋 웃더니, 치마를 양손으로 살짝 들었다 놓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후후, 감사합니다. 제이드 님.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가 반갑지 않으신 것 같네요.”

레온하르트는 서류를 들고는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다. 하.하. 어.찌.나. 반.가.운지!”

제이드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얼른 들어가 보세요. 아이린 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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