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데이지는 두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능숙하게 책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책장이 닫혔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휴우, 내 안가가 언제부터 저렇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된 것인지.”
제이드는 소파에 앉아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언제부터긴. 아마도 네가 아이린 씨를 좋아 하면서 부터겠지.”
레온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었지.”
“왜? 후회돼?”
제이드의 물음에 레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그럼, 받아들여.”
“……?”
제이드는 읽던 서류를 한 장 넘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데이지 씨라는 친구도 아이린 씨의 일부이니. 내가 네 친구인 것처럼.”
“네가 내 친구인 것처럼. 그래, 받아 들여야겠지. 그런데 제이드.”
“응?”
레온하르트의 부름에 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보자.”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
“너랑 나랑 둘이 있으면 아이린이 질투하는 것 같아?”
그의 물음에 순간 제이드는 어이가 없었다.
“레온, 너 네 친구 레온이 맞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내 질문이 좀 이상했지.”
“아니, 조금이 아니라 정말 많이 이상했다. 너 아무래도 내일 의사 좀 만나보자.”
레온하르트는 산만한 어깨를 구부린 채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제이드는 그런 자신의 친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각, 데이지는 아이린을 만나러 안가로 들어갔다.
“아이린, 나 왔어.”
아이린은 갑자기 등장한 데이지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데이지! 이렇게 자주 와도 돼?”
“왜? 나 오는 거 싫어?”
“싫긴, 매일 오면 네가 번거로울까봐 그러지.”
“번거롭기는. 이렇게 매일 보니 좋은걸.”
“후후, 그렇지.”
“뭐하고 있었어?”
아이린은 덮었던 책을 들어올렸다.
“저번에 네가 빌려준 책 읽고 있었어.”
데이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작 영애의 남모르는 사생활? 그거?”
“큭큭, 응, 너무 재미있던 걸!”
“그래, 거기 나오는 여주, 정말 남다른 사생활을 즐기시더라고. 좋게 이야기하면 사귀고 싶은 남자 버킷리스트려나?”
데이지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큭큭, 그거 좋네. 버킷리스트. 어찌 되었건 시한부로 착각한 남작 영애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목록을 만들어 실행하는 내용이니까.”
아이린이 테이블 위에 있던 초코 쿠키를 데이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먹어.”
“응, 고마워.”
둘은 쿠키를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책을 하나씩 들고 소파에 앉았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자기가 시한부라고 착각해서 그런가? 여주인공이 얼마나 대담한지, 연애 행각이 장난 아니더라고.”
“후후, 그래. 클리셰긴 하지만, 가장무도회에서 만난 황태자와 춤추다 만나 그렇게 됐었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쿠키를 한입 베어 물었다.
촉촉한 초코 쿠키는 입 속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참, 아이린. 그 책 들키지 않게 조심해. 잘못하다 황태자 전하나 보좌관님께 들키면…!”
“으으, 그날로 직장에선 사회적 매장이겠지. 집에선 이불 엄청 걷어차고.”
데이지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속옷을 넣어두는 곳에 숨겨두고 있었어.”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다행이구. 그런데 아이린, 다음 주부터 출근이랬지?”
“응.”
“그럼, 우리 내일 쇼핑가지 않을래?”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쇼핑?”
“갑자기는 무슨. 우리 함께 외출한지도 오래 되었고. 얼마 후면 신년제잖아!”
“함께 외출하는 건 좋기는 한데, 파티에 참석할 것도 아닌데 무슨 쇼핑?”
“에이, 아이린. 파티에 참석해야만 드레스 입어? 함께 축제 구경도 가야지!”
“…….”
“그리고 아이린, 넌 황태자 전하의 비서관이니 파티에 참석해야 할걸?”
아이린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보좌관님이 황태자 전하와 함께 참석할 텐데. 그리고 난 시끄러운 파티는 좀.”
데이지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이린, 너 그거 직무유기다.”
“직무유기?”
“응, 직무유기. 보좌관은 보좌관으로 할 일이 있고. 비서관은 비서관으로 할 일이 있는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데이지를 바라봤다.
“그런가?”
데이지는 고개를 여러 번 격하게 끄덕였다.
“그렇고말고.”
‘황태자 전하와 함께 파티에 가면 귀족 영애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텐데. 후우, 꼭 가야 하나?’
아이린은 상념에 빠진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데이지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아이린. 혹시 너, 춤은 출줄 알아?”
“춤? 무슨 춤?”
“뭐긴. 왈츠 같은 거 말이야.”
아이린은 잠시 멍하니 있다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춰본 춤이라고는 원래 세계에서 유치원 때 춰본 개다리 춤이 다였다.
로판 소설로 넘어 오긴 했지만 귀족이 아니기에 사교춤은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적도 없었다.
‘헐, 갑자기 파티에 춤이라니 어쩌지?’
아이린은 주눅이 들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지, 파티에 가면 춤을 꼭 춰야 해?”
“꼭 춰야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넌 황태자 전하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는 거잖아! 그러니 한 곡 정도는 춰야지.”
아이린은 커다란 드레스를 입고 뒤뚱뒤뚱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데이지, 신년제 이제 겨우 1주 남았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무리야!”
“뭐가 무리야? 노력하면 한 곡 정도는 가능하지.”
아이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게다가 여기 훌륭한 춤 선생이 네 앞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이린은 살짝 윙크하며 강남 제비 같은 멘트를 날리는 데이지의 모습에 순간 움찔했다.
“훌륭한 춤 선생이라니? 설마 너?”
데이지는 싱긋 웃더니 테이블과 소파를 한쪽 끝으로 밀었다.
그리고 드레스 룸으로 걸어가 드레스가 걸린 옷걸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윽고 데이지는 그대로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와! 데이지!”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하게 웃으며 빙글빙글 도는 그녀를 바라봤다.
예쁜 접시꽃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두 개의 드레스가 아름답게 퍼졌다.
음악은 없었지만 데이지가 움직이면서 구르는 스텝이 흥을 더했다.
데이지는 곧 그녀 앞에 다가와 춤을 멈추었다.
그리고 영화 속에 나오는 영국신사처럼 팔을 크게 들어 호선을 그리며 인사를 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귀여운 아가씨.”
아이린은 아까 보았던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차분히 대답했다.
“호호, 기꺼이요.”
데이지는 아이린의 손을 잡으며 왈츠의 기본자세를 알려 주었다.
“자 이쪽 팔은 이렇게 이쪽은 이렇게.”
“왈츠는 너도 들어 본적이 있지?”
“응, 쿵짝짝 쿵짝짝 하는 세 박자의 춤이라는 정도?”
데이지는 그녀의 대답이 많이 웃겼는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응, 아이린. 그거 맞아. 큭큭, 쿵짝짝이라니.”
아이린도 어쩐지 자신의 대답에서 익숙한 뽕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 내발을 천천히 따라 와 볼래?”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데이지는 아이린을 리드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치마가 원을 그리며 방안의 이곳저곳을 누볐다. 그런데…….
“으윽.”
“데이지, 괜찮아?”
데이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입가에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계속 움직여.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윽!”
“으악! 어떡해! 미안해!”
“악!”
“미안, 데이지!”
그 후로도 춤과 함께 데이지의 비명소리가 박자 맞춰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린의 발 밟는 경지는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빠르게 추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데이지의 발만 골라 콕콕 밟는지, 이정도면 일부러 밟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때 다급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두 사람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순간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뭐지, 춤추는데 이리 비명이 난무할 수가 있는 건가?’
그때 또다시 데이지의 비명이 우렁차게 들려왔다.
“으악! 아이린!”
“미, 미안해! 데이지, 이제 그만하자!”
“괜, 괜찮아. 계속해! 내가 다친 만큼 네 춤이 늘겠지. 흑흑.”
‘내 춤은 늘겠지만 네 발에 시커멓게 멍이 들 것 같은데.’
아이린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느라 오히려 집중을 못 했고, 또 다시 그녀의 발을 밟았다.
데이지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춤을 멈추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흥겨운 왈츠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이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아이린의 손을 이어 받았다.
“아이린, 나 좀 나갔다 올게.”
데이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
아이린은 그런 데이지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데이지!”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를 달랑 들어 자신의 발위에 얹었다.
아이린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어, 뭐야 갑자기!’
“레온!”
그녀의 부름에 싱긋 윙크를 한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허리와 팔을 잡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이린의 입에서 흥겨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야!”
‘우와! 정말 신나!’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레온하르트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몸도 허공에 뜬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데이지와 춤을 출 때 만해도 그녀의 드레스는 찌그러진 원을 그렸다.
그런데 이젠 그녀가 춤을 추지 않아도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접시꽃처럼 아름답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이린은 그 순간 동화 속 공주님이 된 듯한 기분에 환하게 웃었다.
* * *
레온하르트는 여느 때와 같이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갈증이나 차를 마시려 잔을 드는데 씩씩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데이지입니다.”
“후우, 들어오게.”
레온하르트는 소풍이라도 온 듯 신이 나 들어오는 데이지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얄미웠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말인데 집에도 가지 않는 건가?”
데이지는 그런 레온하르트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방실방실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이제는 아이린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절 많이 괴롭게 하셨지요. 호호, 나 이제 예전의 데이지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무서웠지만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순간 섬뜩한 눈빛에 멈칫하긴 했지만, 데이지는 이내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여차하면 아이린에게 일러야지!’
“쉬는 날이라 아이린과 외출하려고 왔습니다. 이곳에 오면서 보니 날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
“황태자 전하께서는 일.하.고. 계셨군요.”
황태자는 그녀의 약 올리는 듯한 말에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데이지는 아이린이 있는 방으로 가는 책장을 열며 말을 이었다.
“그럼 계속 일.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전 아이린에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온하르트의 고운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
‘계속 일을 하라니! 정말 너무하는 군.’
일에 복귀한 레온하르트는 요즘 난데없는 업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잔뜩 쌓여있는 서류만 보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업무가 아무리 많아도 황태자로서 어려움 없이 처리해냈는데.
지금은 아이린을 보지 못하는 금단 현상 때문에 도저히 일이 되지 않았다.
그 또한 아이린을 보살피느라 2주나 일을 쉰 데다 신년제가 코앞에 닥쳐서 일이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끼니도 거를 정도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레온하르트는 데이지가 연 책장을 바라보았다.
문만 열면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있지만 어쩐지 전보다 더 보기 힘들어졌다.
아이린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늦은 밤 뿐.
그런데 애타게 기다리던 그 시간마저 그녀의 절친이라는 데이지에게 뺏기고 말았다.
그녀는 아이린의 친구라고 선언한 그날부터 매일 저녁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까지 일을 하고 있는 그를 약 올리듯 잠까지 자고 새벽에 돌아갔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데이지에게 쌓인 게 많았다.
그녀의 뒤통수만 봐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으윽, 뒤통수 따가워! 오늘도 엄청 속으로 욕을 하시고 계시는군.’
그때 그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데이지가 그를 향해 뒤돌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린 채 이를 앙다물고 말했다.
“황태자 전하, 저에게 무슨 하신 말씀 있으십니까?”
그는 이내 긴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나와 거래를 하는 것이 어떤가?”
그의 말에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 하였다.
“네? 갑자기 무슨 거래를 말씀하는 것 입니까?”
“제이드를 좋아하는 것 알고 있네.”
데이지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내가 그렇게 티가 났나? 나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레온하르트의 표정을 보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데이지는 더는 숨기지 않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티가 많이 났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런 행동을 한 기억이 없는데요.”
레온하르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겉으로야 티가 나지 않았지만 제이드를 볼 때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눈빛을 하더군.”
‘헉, 100% 들통 났구나! 제이드 님도 알고 계실까? 어쩌지? 직장에서 들통 나다니. 나 덕후로서 실격이네.’
레온하르트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데이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럴 때 보니 두 사람이 친구는 맞긴 하네.’
이내 데이지가 할 말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하, 그 것이 연애감정은 아니고 동경하고 있습….”
레온하르트는 변명을 잔뜩 늘어놓던 데이지의 말을 끊었다.
“좋아하건, 동경하건 그게 한마디로 좋아하는 것 아닌가?”
순간 데이지의 머릿속에는 집에 고이 모셔둔 제이드 컬렉션이 촤르르 펼쳐지며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황궁에서 항상 프로의식을 가지고 단정한 표정을 고수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스르르 잔뜩 풀린 얼굴로 푸시시 웃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가면을 벗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움찔 했다.
곧 그녀의 입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전 제이드 님을 매우 좋아합니다.”
데이지의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선 위험한 표정에 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나에게 제이드의 어릴 적 초상화가 있는데….”
레온하르트는 서랍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 앞에 펴서 보여주고는 얼른 다시 말았다.
순간 데이지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곧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헉, 이 이것이 진짜 제, 제이드 님의 어릴 적 초상화입니까?”
‘뭐지, 저 표정. 혹시 저주 같은 데에 사용하진 않겠지.’
레온하르트는 조금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 거래, 제가 꼭 하고 싶습니다.”
데이지는 어떤 일이든 해내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대답할 정도로 어려운 것 아니네. 오늘 두 사람 신년제 드레스를 사러 외출한다고 들었는데.”
“네? 네! 그러기로 했습니다.”
“내가 아이린에게 드레스를 선물하고 싶은데.”
“네, 좋은 생각이십니다.”
‘뭐지? 왜 저런 표정을 지으시지?’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자신감이 결여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내가 가자고 하면 가지 않을 것 같아서.”
“……?”
“아이린이 내가 말하는 드레스 샵으로 가도록 도와주면 이 초상화를 주겠네. 어떤가?”
데이지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오호라, 나는 제이드 님 초상화가 생기고 아이린은 드레스가 생기는 거야? 이런 거래를 안 하면 상가의 딸이 아니지!’
데이지는 눈을 접어 웃으며 얼른 치마를 살짝 올렸다 내렸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아, 알겠네. 고맙네.”
‘거래는 성립이 되었는데 왜 이리 찜찜하지?’
활짝 웃는 데이지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레온하르트였다.
“그럼 전 가서 아이린을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밀린 서류에 얼굴을 묻고 손을 휘휘 저었다.
데이지는 싱긋 웃으며 아이린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린! 나 왔어.”
“데이지! 나 준비하고 있었어.”
아이린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이린, 지금 그렇게 입고 갈 거야?”
“응. 왜?”
아니나 다를까. 아이린은 평소 일할 때 입는 목까지 단추가 채워진 검정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야근할 때 갈아입으려고 미리 챙겨다 둔 탓에 옷 한 벌은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데이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준비해 오길 잘했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 했다.
“뭐를?”
“이거 한 번 입어봐!”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데이지를 바라봤다.
“어, 갑자기 웬 드레스야?”
“너희 집 지붕이 갑자기 무너져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잖아. 그리고 이곳 드레스 평소에 입기에 너무 불편하다고 해서 가져와 봤어.”
아이린은 무심코 그녀가 내민 드레스를 받아 머리를 넣었다.
단추가 상의 앞쪽에 있어 혼자 입기에도 매우 편한 드레스였다.
그렇게 그 상의 단추를 잠그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드레스 좀 이상한데. 왜 이리 프릴과 리본이 많지?’
그렇게 그녀가 드레스를 다 입었을 때 데이지가 소파를 툭툭 치며 그녀를 불렀다.
“사이즈는 잘 맞네. 아이린, 잠시 여기 앉아봐.”
‘뭐지? 뭐가 불길해. 데이지 뭔가 저지를 것 같은 표정인데.’
아이린은 쭈뼛쭈뼛 거리며 작게 대답했다.
“응.”
데이지는 아이린의 머리를 살살 빗겨주었다.
그리고 머리에 무언가 간단한 장식을 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제 얼굴.”
아이린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얼굴을 내밀며 눈을 감았다.
곧 데이지는 아이린의 입술에 촉촉하게 핑크색 립을 살살 발라 주었다.
“와! 다 됐다. 으아아! 역시 생각한데로 너무너무 귀여워! 아이린, 얼른 가서 거울 한 번 봐봐!”
데이지는 마치 다 이루었다는 눈빛으로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이린은 어쩐지 싸한 기분에 얼른 일어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보았다.
그녀는 순간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내 두 손을 올려 입을 막았다.
“으악! 데이지! 이게 뭐야?”
“뭐긴, 요즘 이국에서 유행하는 드레스라던데. 거기 말이야, 네가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래, 크라티아!”
‘헉, 그곳은 중계무역이 왕성해 온갖 문화를 받아들인 곳이라고!’
룩스에서는 아직 이런 드레스는 좀 무리였다.
데이지는 즐거운 듯 아이린을 향해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윽, 이 놈의 입이 문제였구나!’
아이린은 거울을 보고 순간 머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상체는 타이트하게 단추로 잠겨 있었고, 무슨 처리를 하였는지 둥글게 퍼지는 치마는 종아리를 살짝 가렸다.
문제는 네크라인, 손목, 치마 끝에 달린 프릴과, 허리 부분에 있는 리본 장식이 그녀의 시선을 자극한다는 점이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구제관절인형에게나 입힐 것 같은 느낌의 드레스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머리에 데이지가 달아놓은 장식은 한 술 더 떴다.
‘성년인 내가 커다란 리본 장식이라니!’
대한민국에서 25년을 살아온 그녀였기에 벌써 현타가 왔다.
아이린은 왠지 오늘밤 이불킥을 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데이지, 미안하지만 나 이거 도저히…!”
아이린은 이 옷 말고 다른 것을 입겠다고 하려고 데이지를 불렀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데이지는 슬쩍 아이린을 바라보며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불행히도 문이 열리며 레온하르트와 제이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순간 입구에서 얼음이 되었다.
프릴이 달린 핑크색의 드레스를 입고 두 볼이 살짝 붉어진 아이린은 그야말로 귀여운 인형 같았다.
“하하, 좀 이상하죠.”
두 사람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아이린은 그들의 여전한 넋이 나간 눈빛에 몸들 바를 몰라 얼른 뒤돌려 했다.
그러나 데이지가 더 빨랐다. 그녀는 얼른 아이린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며 문 쪽으로 밀었다.
“자, 이러다 늦겠어. 가자!”
그렇게 두 사람의 외출은 네 사람의 외출이 되었다.
사실 레온하르트 혼자서도 아이린과 데이지를 호위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러나 셋이서 외출했다간 데이지의 방해로 아이린에게 말도 못 붙여 볼 것 같았다.
그래서 레온하르트는 아이린과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일념에 바쁘다는 제이드를 억지로 끌고 나왔다.
처음에는 제이드도 함께 간다는 말에 데이지의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나 이내 살짝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두 남자의 외모가 너무 눈에 띄다 보니 변장을 했기 때문이다.
변장한 제이드의 얼굴을 본 데이지는 제법 충격이 컸는지 ‘헉, 문화재를 훼손했어!’ 같은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빠르게 회복한 후 곧 아이린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 길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갖 귀여운 소품들을 아이린에게 장식해주며 즐거워했다.
레온하르트는 잔뜩 부러운 눈으로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아이린, 이거 너무 귀엽지 않아?”
아이린은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그런 것 같아.”
아이린도 평소 둘만 다닐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레온하르트와 제이드가 데이지의 ‘인형놀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제이드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아예 등을 돌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서 있었다.
“이제 신년제에 입을 드레스를 보러 갈까?”
‘아, 그럼 이 민망한 드레스를 벗을 수 있겠구나!’
아이린은 광명을 찾은 듯 환하게 웃으며 얼른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게 데이지 손에 끌려 바로 마차에 올라타 도착한 곳은, 화려한 귀족의 거리로 유명한 아르도르 가였다.
“어? 데이지, 이곳에는 왜?”
그때 레온하르트가 말했다.
“오늘 신년제 드레스는 직원 복지 차원으로 황태자인 내가 사주기로 했어.”
‘헐, 직원 복지 차원으로 고가의 드레스를 사준다니! 그런 건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아이린은 어쩐지 부담스러워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제이드가 말했다.
“아이린 씨, 그렇게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신년제 파티는 어찌 보면 업무의 연장선이니까요.”
“업무의 연장선요?”
“네, 단순히 룩스의 축제가 아니라 국격을 보여 주는 국제적인 행사라고 할 수 있죠.”
데이지는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아이린. 제이드 님 말씀처럼 비서관으로서 파티도 업무의 연장선이니 당연한 거야.”
‘제이드 님과 데이지의 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아닌 것 같은 느낌도 드는 것은 뭐지?’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먼저 내린 레온하르트가 아이린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동화 속 왕자님 같은지! 아이린 뒤에 있던 데이지가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였다.
아이린 또한 설레어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원래 세계에서는 항상 스스로 모든 일을 했던 터라 이런 도움이 아직은 어색했다.
그러나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레온하르트의 따뜻한 배려가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마차에서 내리자 보기에도 번쩍번쩍하고 화려한 가게가 눈앞에 나타났다.
수도 최고의 드레스 샵 ‘아티티아’ 였다.
아이린의 눈은 더없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헉, 여긴 황족이나 고위 귀족이나 온다던 그 드레스 샵!’
아이린은 아카데미 때 귀족 영애들이, 아티티아에서 평민들의 1년치 생활비를 드레스 한 벌에 쓰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런 드레스 샵을 누가 가나 했는데. 저기, 황태자 전하? 직원 복지라기에는 좀 과한 것 같은데요!’
아이린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뒤의 세 사람을 힐끔 돌아보았다.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이린이 귀여워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때 데이지가 멀뚱멀뚱 서 있는 아이린의 등을 밀며 안으로 향했다.
“자자, 우리 귀여운 아가씨. 얼른 들어가세요.”
‘데이지, 드레스는 내가 받는데 왜 네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간 거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경험상 그 불안한 마음은 틀린 적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드레스 샵에 들어가자마자 데이지의 인형놀이가 다시 시작 된 것이었다.
이 정도로 촉이 들어맞다니, 수도 광장에 돗자리를 깔아도 되겠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된 게 수난이 끝나질 않는구나!’
아이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드레스를 입고 그들 앞에 나왔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는 직원의 도움으로 은은한 화장을 하고 머리를 올려 루비 핀으로 장식했다.
아이린은 옷 하나 고르는데 화장이나 머리를 왜 할까 생각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예쁜 드레스를 고르기 위한 기본이라며 그녀를 설득시켰다.
그렇게 아이린이 입고 선 드레스는 신년제라는 분위기에 맞춘, 고전적인 디자인의 푸른빛 드레스였다.
새틴 재질의 은은한 광택이 평소에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관능미까지 느껴지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스커트 끝자락의 하얀 프릴로 귀여운 반전미까지 시도했다.
아이린은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가 어색한지, 치마를 그러잡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을 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오늘, 황태자 전하의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는걸.’
아이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데이지 오늘 날 잡았구나. 윽, 답답해. 예뻐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 순간 예뻐지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속 깊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통을 감내해서일까?
코르셋으로 잔뜩 조인 허리는 더욱 가늘게 강조되었다.
그리고 크리놀린으로 과하지 않을 정도로 둥실하게 부풀린 스커트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 선을 극대화 하였다.
“아, 아이린.”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황홀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에 몸이 배배 꼬였다.
“데이지, 그냥 지금 입은 걸로 하면 안 될까?”
“응, 안 돼! 얼른 다음 것 입고 나와 봐!”
“후우, 알겠어.”
아이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때 제이드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아이린 씨는 데이지 씨에게 매우 약하군요.”
‘으윽, 눈부셔! 뭐 일상이 이렇게 눈부신 거야? 이러다 눈이 멀겠어. 아이린은 도대체 어떻게 견디며 저 제이드 님과 일하고 있는 거지?’
데이지는 제이드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하하, 그런가요.”
그때 레온하르트는 신이 난 듯 싱글벙글 웃으며 소파에 앉아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다.
‘이것도 아이린에게 어울릴 것 같고. 아, 이것도 예쁘겠어.’
데이지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이린이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들어갔을 때 얼른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자, 이거 받으세요.”
요즘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연극표였다.
레온하르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물어보려는 듯 입을 달싹였다.
그 순간 아이린이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후후, 전하 이건 좋은 거래에 대한 덤입니다.’
“어머, 어머머! 아이린, 나 어떡해!”
갑작스런 데이지의 비명에 세 사람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곧 드레스 치마를 살짝 든 채로 그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데이지, 무슨 일이야?”
데이지는 잔뜩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세, 내가 그만 방에 불을 끄지 않고 나온 게 생각나서.”
‘방에 불을 끄지 않은 게 그리 큰일인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에 불?”
“응, 아, 아로마 향초. 갑자기 생각났는데 불날까 봐 걱정이 되네. 나 먼저 돌아가야겠어.”
“어, 향초를 켜놓고 왔다니! 큰일이네. 데이지 그럼 나도 함께….”
데이지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야, 아이린. 모처럼 외출을 나왔는데 황태자 전하와 재미있게 있다 와.”
그때 제이드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두 분 즐겁게 보내시고 오십시오. 데이지 씨는 제가 안전히 모셔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제이드는 데이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데이지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그의 손을 잡았다.
‘큭큭. 데이지, 오늘 완전히 계 탔구나!’
아이린은 다정히 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데이지와 제이드가 밖으로 나가고 레온하르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두 사람 잘 어울리는데.”
아이린은 과거에 읽은 로판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 들어온 여주가 인과율을 어기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서 결말을 바꾸는.
결론은 해피엔딩이었다.
‘두 사람이 잘된다면! 어쩌면 제이드 님의 불행한 결말이 바뀔 수도 있겠어.’
그의 말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리자베스 님, 왜 그렇게 표정이 시무룩하세요?”
한 영애의 물음에 엘리자베스는 처연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 아니에요.”
“무슨 일 있나요? 엘리자베스 님.”
“제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
함께 있던 영애 중 한 명이 걱정되었는지 그녀 곁에 의자를 끌어 앉으며 말했다.
“항상 밝으시던 엘리자베스 님이 그러시니 제가 다 마음이 아프네요.”
그녀 옆에 있던 영애들은 무슨 일 이든 다 해결해 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무슨 일인지.”
엘리자베스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한 영애가 가까이 다가오며 그녀의 팔짱을 꼈다.
평소에 소문내기를 좋아하는 영애였다.
“말하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우리 사이에.”
“그게, 영애들께서 황태자 전하를 많이 사모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하기가 망설여져서요.”
영애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 가까이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서 말씀해주세요, 엘리자베스 님.”
“그래요. 우리끼리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말할 듯 말 듯 입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의 여성 비서관을 아시고 계시죠.”
영애들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여성 비서관이 이번 노예상 소탕 작전에 함께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엘리자베스의 한 마디에 영애들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허, 그 말 정말이세요?”
엘리자베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네요. 아무리 비서관이라도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가는 거죠.”
“그래요. 참 천박한, 그 수가 보이는 상황이군요.”
“허, 어디 우리 황태자 전하께 꼬리를 치려고.”
잔뜩 뿔이 난 그녀들의 대화에 조용히 앉아있던 엘리자베스는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도 그녀를 데리고 신년제 드레스를 맞추러 갔다고 들었어요.”
“네? 그게 사실이에요?”
“와! 정말!”
영애들은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 소문을 즐기는 영애가 물었다.
“어디로 갔다고 하나요?”
엘리자베스는 곤란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티티아’라고 들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들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어머, 아티티아라고요?”
“들어만 가면 기쁨으로 가득차서 나온다는 그 아티티아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곳은 고위 귀족과 황족들이 주 고객인 곳이잖아요.”
“그래요! 저희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곳이 그곳이라고요!”
“허, 이번 일은 황태자 전하도 정말 너무하셨네요.”
“황태자 전하가 무슨 잘못이겠어요. 다 그 평민 계집 때문이지.”
“그래요! 어떻게 평민 따위가 그 아티티아를 들어갈 수 있죠?”
그때 엘리자베스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조용히 말했다.
“친우 같은 영애들이 걱정돼서 말씀드린 건데, 혹시… 제가 영애들과 그분을 이간질했다는 오명을 쓸까 두렵네요.”
그때 한 영애가 다가와 고개 숙인 엘리자베스의 등을 위로하듯 살살 쓰다듬었다.
“엘리자베스 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그래요.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세요. 다 저희를 생각해서 한 말인데.”
엘리자베스는 이내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래도 제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요.”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들려왔다.
“그 괜한 소리가 무엇이지? 나도 듣고 싶군.”
피도르 후작 영애가 그녀들을 뱀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영애들은 순간 겁을 집어먹으며 몸을 움츠렸다.
“뭐지? 왜 말 하지 않는 거지? 나 기다리는 거 매우 싫어하는데.”
그때 눈치 빠른 영애가 앞으로 나서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피도르 후작 영애.”
메리 피도르는 권위적인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가?”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고.”
메리 피도르는 그녀를 재촉하듯 바라봤다.
“그저 소문을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하하, 소문이라! 그 아무 일도 아닌 일이 매우 궁금해지네. 무슨 소문이기에 우리 어여쁜 영애들이 쥐새끼처럼 모여 조용히 속닥거리고 있을까?”
피도르 후작 영애는 특유의 뱀 같은 눈을 번쩍이며 그녀들을 훑었다.
영애들은 하나같이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다들 입을 뗄 엄두조차 못 내고 있을 때 그나마 용기 있게 나선 영애가 그녀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여성 비서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메리 피도르의 눈이 위험하게 변하며 이를 갈듯 말했다.
“나도 그 괘씸한 비서관 이야기를 들었지. 감히 내 가문과 아버지를 건드는데 일조를 했다고. 으득.”
“게다가 오늘 황태자 전하께서 그 비서관의 신년 드레스를 아티티아에서 맞추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메리 피도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허, 감히 ‘아티티아’라니!”
엘리자베스 옆에 서 있던 한 영애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피도르 후작 영애께서 그곳의 단골이에요.”
그때 메리 피도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은 바삐 갈 곳이 있어 이만 가보겠어.”
영애들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조심히 가세요. 피도르 후작 영애!”
그렇게 피도르 후작 영애가 바쁘게 자리를 떠나고, 남은 영애들은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엘리자베스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 비서관,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네요.”
“호호호, 그러게요.”
그때 엘리자베스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후작 영애가 저리 가시니 그 비서관이 걱정되네요. …괜찮을까요?”
“어머, 엘리자베스 님이 왜 그런 걱정까지 해요.”
“정말 엘리자베스 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그래요. 저는 너무 기대대 되는데요. 우리의 피도르 후작 영애께서 어떻게 우리의 답답한 속을 뻥 뚫어 주실지.”
엘리자베스는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비웃고 있었다.
‘그래, 여러분. 나의 말이 되어 주세요. 그래야 내가 이 체스 게임의 승리의 여신이 될 수 있으니까! 호호호.’
* * *
아이린은 태어나 처음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들을 입어 보았다.
처음에만 해도 아름다운 드레스에 살짝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 없이 입고 벗는 과정서 매우 지치고 허기졌다.
‘아, 배고파!’
시계를 보니 5시였다.
‘헐, 나 몇 시간을 옷만 갈아입었던 거야!’
아이린은 물끄러미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저녁 먹자고 하기에는 시간이 애매한데. 황궁으로 돌아가자고 할까?’
‘아이린, 드레스를 갈아입는다고 많이 배고팠을 텐데. 아무래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야겠어.’
레온하르트는 눈치 빠르게 드레스값을 계산하고 그녀를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이 또한 황족이나 고위귀족들이 많이 찾는다는 수도 최고급 레스토랑 ‘벨루스’였다.
그동안 룩스에서 평민으로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인테리어가 어쩐지 그녀에게 부담스럽게 다가와 주춤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레스토랑 안에는 화려한 귀부인들과 신사들이 가득했다.
‘헉, 내가 여기 와도 되는 걸까?’
이전 생에서 패밀리 레스토랑을 이용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화려한 레스토랑은 가본 적이 없었다.
아이린은 혹시 누가 볼까 신경 쓰였다.
다행히 직원의 인도로 들어간 곳은 둘만 있을 수 있는 룸이었다.
‘그런데, 다행인 건가?’
아이린은 어쩐지 지난 온천에서의 일 이후로 그가 너무도 의식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레온하르트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잘생긴데다, 자신에게 매우 다정하기까지 한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수시로 심장이 내려앉는 경험을 했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던 누군가의 말처럼, 익숙해지니 전보다 조금은 편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단둘이 있을 때면 온천에서 보았던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시로 떠오르는 그의 단단한 상반신 근육.
가슴 위로 살짝 맺혀 흘러내리던 물방울들.
그래서인지 그가 기사들과 훈련을 마치고 가죽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올 때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다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의 근육들이 땀으로 젖은 셔츠 아래로 도드라져 보여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어쩐지 날마다 점점 변태가 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온은 내가 이러는 것을 모르겠지.’
그녀는 자꾸만 솟아오르는 음흉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래, 오늘도 이겨내는 거야! 할 수 있다! 아자!’
아이린은 그에게 자꾸만 뻗어나가려는 손을 다잡았다.
그녀는 어쩐지 자신의 이런 시선에 희생된 레온하르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복잡한 상념을 깨고 직원들이 줄지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 어머!”
여섯명은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가득 찼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이린, 이거 한번 먹어봐!”
육즙이 촤르르 흐르는 스테이크는 그 향기마저 매우 유혹적이었다.
‘어,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되는데.’
아이린은 어쩐지 그가 흔드는 음식의 유혹에 넘어가면 이성을 잃고 게걸스럽게 먹을 것만 같았다.
‘그래, 예쁘게 입고 멋진 레스토랑까지 왔는데… 조금만 맛보는 거야!’
어쩌면 이 레스토랑이 첫 데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아이린은 오늘만큼은 레온하르트의 기억 속에 예쁜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아이린은 애써 이성을 다잡으며 그가 내민 스테이크를 받아먹었다.
‘으아아, 고기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고 있어!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지!’
그녀의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스테이크 조각이 놀라움으로 벌어진 입으로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스테이크를 씹었다.
알맞게 레스팅을 거친 스테이크는 그녀가 씹을 때마다 촉촉하게 육즙을 자아냈다.
평소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 이런 장면이 나올 때 마다 고개를 저으며 읽었던 그녀였다.
‘어떻게 고기가 녹겠어!’ 하며.
하지만 그건 정말 오산이었다.
고기는 정말 입에서 살살 녹았다.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었다.
알맞게 숙성된 두툼한 고기는 고급 올리브유에 레몬과 와인, 질 좋은 소금과 후추와 허브로 마리네이드를 해 더 연하고 부드러웠다.
적당히 구워진 양파와 양송이, 브로콜리에 아스파라거스까지 곁들여 그 맛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아이린은 그 순간 애써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끝을 놓고 말았다.
‘으아아, 눈앞에는 미남에, 맛있는 요리에, 그야말로 눈 호강, 입 호강을 하는구나!’
아이린의 눈과 입이 스르르 풀렸다.
‘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귀여울 수 있지? 아이린은 역시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최고로 귀엽다니까!’
레온하르트는 그 순간부터 신나게 그녀의 앞 접시에 열심히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아이린 또한 그에 맞춰 빠르게 음식을 먹어치워 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배가 불렀을 때야 그녀의 집 나간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으아아! 나 뭐한 거야?’
그때 직원들이 들어와 깨끗이 비워진 접시들을 가지고 나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는지 뒤 이어서 보기만 해도 달콤하고 예쁜 디저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아무래도 레온이 날 돼지로 아는 것 같아.’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난감한 마음은 모르는지 입이 귀까지 찢어진 채 싱글벙글 웃었다.
그리고 아이린의 앞으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당겨 놓았다.
그러더니 그중 아이스크림처럼 차갑게 얼린 미니슈를 그녀의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아이린은 또다시 반사적으로 미니 슈를 한입에 받아먹었다. 그 순간 그녀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으아! 그의 판단이 맞았나봐! 난 역시 돼지였어!’
아이린은 가끔 작가를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이곳에 보냈냐고!’
그렇게 소리치고 원망하고 싶은 날도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작가야! 너 정말 칭찬해 주고 싶구나!’
그때 그녀의 상념을 깨고 다정한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연극 좋아해?”
원래 세계에서는 그녀도 혼자 소극장 연극을 즐겨 보러 다녔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는 처음에는 학생, 뒤이어 사회초년생의 삶을 사느라 그런 취미도 사치였다.
아이린은 연극 이야기가 어쩐지 반가워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연극 정말 좋아해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와 마주 웃으며 데이지가 준 표를 내밀었다.
“오늘 함께 보러 가지 않겠어?”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웃으며 끄덕였다.
“안내도를 보니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네요. 우리 함께 걸어갈까요?”
레온하르트의 동그랗게 커지던 그의 눈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말했다.
“좋지. 그럼 레이디, 함께 가실까요?”
아이린은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애써 가다듬었다.
‘아, 정말 심장에 위험한 미소라니까!’
그녀는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귀족 영애들의 가느다란 목소리와 말투를 따라하였다.
“네, 기꺼이.”
두 사람은 순간 오글거림을 못 참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풋하하.”
“호호호.”
그렇게 두 사람은 맛있고 배부른 저녁을 즐겼기에 극장까지 걸어가기로 하며 레스토랑을 나섰다.
오랜만에 온 아르도르 가의 야경은 정말 그 어느 때 보다 아름다웠다.
겨울이라 일찍 어둑해진 거리에 맞게 아름답게 디자인된 가로등이 은은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게다가 신년제가 가까워서인지 건물들과 상점들 곳곳이 아름답게 장시되어 있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손이 닿을 듯 말 듯 묘한 기류가 흐르는 채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막 시작하는 연인들 같은 순수한 모습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자아냈다.
그렇게 아이린과 레온하르트는 슬쩍 서로를 바라보다 다시 거리를 보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손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보는 사람조차 설레게 만드는 그 모습에, 그들의 은밀한 호위를 위해 숨어 있던 그림자 중 몇은 심장을 움켜잡았다.
그 때 자신도 모르게 고인 침을 꼴깍 삼킨 아이린이 어색한 정적을 깨고 말했다.
“아, 거리가 정말 아름답네요.”
“그, 그렇지!”
아이린은 거리를 하나하나 눈에 담듯 고개를 천천히 움직이며 말했다.
“이 거리를 이렇게 걸어 보는 건 처음이에요.”
레온하르트는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응? 처음이라니?”
아이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거리지만 평민 여인이 이 시간에 돌아다니기에는 안전한 곳은 아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이른 저녁 시간인데도 술에 취한 남자 귀족들이 보였다.
그들이 건들건들 거리를 걸으며 허름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을 희롱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윽고 그의 은밀한 고갯짓에 그림자들이 거리를 빠르게 청소하기 시작했다.
‘수도의 치안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군. 꼭 아이린이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를 만들겠어!’
아이린은 취객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에 순간 놀라 멈칫하다가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저들은 그림자들이 치안대로 보내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후, 고마워요. 덕분에 거리가 깨끗해진 것 같네요.”
그 순간 아이린은 용기를 내어 그의 손을 잡았다.
‘왠지 이 사람의 손을 잡으면 더는 외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을 것 같아!’
아이린의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린의 말간 눈동자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또 심장이!’
레온하르트는 순간 호흡이 곤란해짐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이린의 손을 잡은 것을 잊은 채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단단한 그의 가슴이 그녀의 작은 손등에 닿았다.
두 사람 다 예상치도, 의도치도 않았던 접촉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린은 어색함에 얼른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흠흠, 아까 연극 제목이 뭐였더라?”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레 손을 내리며 표를 꺼내 들었다.
“제목이 ‘안녕.’이군.”
해피엔딩이인지 새드엔딩인지 가늠 할 수 없는 제목에 둘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극장에 도착했어.”
멍하니 걷고 있던 아이린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순간 놀라 멈칫했다.
‘헉, 누가 귀족의 거리 아니랄까봐!’
압도적인 크기에 화려함을 뽐내는 모투스 극장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고, 촌스럽게 보이지 말자! 그래! 많이 다녀 본 듯 당당하게 행동하는 거야!’
하지만 아이린은 이렇게 규모가 큰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압도되기도 했지만 어쩐지 기대감이 더 크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극장이니 배우들도 연기력이 엄청나겠지!’
“레온, 우리, 얼른 들어가요.”
“그래, 아이린.”
극장직원에게 표를 내미니 깍듯하게 인사를 하며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로비 직원은 얼굴을 보고 뽑는지, 키 크고 훈훈하게 생긴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그를 경계하며 그녀의 손을 꼭 그러잡았다.
이내 거리를 두듯 천천히 직원을 따라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지금 저거 질투 하는 것 같은데. 으으으, 귀여워, 레온! 근데 레온은 거울을 보지 않는 걸까?’
직원의 외모가 꽤 훈남이긴 했지만 레온하르트에 비하면 매우 평범한 편에 가까웠다.
굳이 비교해본다면 저 직원은 서비스 교육을 받으며 꾸며진 것이겠지만, 레온하르트는 있는 그대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등 뒤에 숨기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에 아이린의 입가에 자꾸만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렇게 직원에게 안내된 곳은 극장 2층에 있는 커튼이 쳐진 좌석이었다.
아이린은 순간 촌스럽게 보이지 말자는 다짐을 잊고 감탄했다.
“우와! 이게 말로만 듣던 로얄석이군요! 이런 곳에서 연극 보는 건 처음이에요.”
‘저런, 데이지 영애. 꽤 출혈이 컸겠는데.’
“응, 이곳은 휴식시간에 먹을 물과 음료, 쿠키도 준비되어 있어.”
아이린은 좌석에 앉자마자 무심코 쿠키 하나를 들고 한 입 깨물었다.
그녀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맛있지? 이 극장 로얄석의 쿠키는 수도 유명 제과점에서 공수하는 것으로 유명해!”
아이린은 정말 과자까지도 완벽한 서비스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연극이 시작되고 밝은 음악이 극장 안을 가득 메웠다.
배우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서로를 보고 춤추듯 걸어가며 노래하듯 인사했다.
‘어? 단순한 연극인 줄 알았는데. 노래와 춤이 가미된 뮤지컬이잖아!’
그녀는 밝은 분위기의 뮤지컬에 빠졌는지, 몸을 앞으로 내밀며 감상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후후, 저렇게 좋아하는데 다음에도 자주 와야겠어.’
극의 내용은 귀족 고용주와 평민 고용인의 사랑 이야기였다.
이내 그들의 모습과 닮은 연극에 그 또한 그녀처럼 극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극은 두 주인공의 결혼을 하며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아이린은 두 시간 동안-중간에 10분간의 휴식시간이 있긴 했다.-극에 몰두해 굳어지고 긴장했던 몸을 풀었다.
‘하아, 제목만 빼고 참 아름다운 연극 아니, 뮤지컬이었다.’
레온하르트 또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린에게 말했다.
“후후, 꼭 우리 이야기 같지 않았어?”
‘나도 저렇게 레온하르트의 옆에 서서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게 되는 걸까?’
연극의 남주인공에 레온하르트를, 여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하며 상상하던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워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이린, 신년제가 며칠 남지 않아서 광장 분수대 쪽으로 가면 가판 시장이 열리는데 가보지 않겠어?”
“하하, 그럴까요?”
“가면 아이린이 매우 좋아할 것들이 많아! 그곳에 가면 재미있는 것도 많고 맛있는 먹거리도 많거든.”
“후후, 안 그래도 두 시간이나 긴장하며 봤더니 좀 출출해지네요.”
아이린은 순간 극장에 오기 전 레스토랑에서 식신이 강림한 것이 떠올라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얼른 나가자.”
“그래요.”
그렇게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거리로 나가 10분쯤 걸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시끌시끌한 것을 보니 이제 다 왔나 봐요.”
아이린은 기대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내 활짝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기분이 좋아 보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어서 가볼까?”
그렇게 둘은 손을 잡고서 빠르게 걸어 분수대에 당도했다.
아이린은 분수대를 바라보며 그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흔히 상상하는 고인 물이 흐르는 작은 분수대 정도가 아니라 넓은 스케이트장이 나타나서였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이곳 참 오랜만이네. 어릴 때는 제이드와 함께 많이 왔는데.’
순간 감상에 젖었던 레온하르트는 넋이 나간 아이린의 얼굴에 피식 미소가 터져 나왔다.
“여름에는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중앙광장 분수대지만, 겨울에 얼어붙으면 저렇게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지. 수도의 명물이야.”
아이린은 처음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스케이트장을 둘러보았다.
그곳엔 가족으로 보이는 이도 있고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다정한 연인들이 주를 이뤘다.
스케이트를 타는 연인들이 손을 마주 잡고 서로를 이끄는 달달한 모습은 보는 사람들마저도 설레게 했다.
아이린을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언제 빌려 왔는지,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작고 귀여운 흰색 스케이트를 내밀었다.
“아이린, 우리도 타볼까?”
“후후, 그래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데이지가 권해준 종아리까지 오는 드레스는 스케이트를 타기에 최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여인들은 대부분 긴 치맛자락을 틀어쥐고 힘들게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빙상에 나아갔다.
이내 많은 여인들이 부러운 모습으로 아이린의 드레스를 흘긋대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안 들릴 거라 생각한 것인지, 작게 속삭이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저렇게 짧은 드레스가 있었나요?”
“네! 크라티아에 사는 저희 친척이 저런 드레스를 입고 온 적이 있었어요.”
“전 종아리가 살짝 보이는 것이 좀 과해 보이는군요.”
“저는 부러운데요. 매일 무거운 드레스가 끌릴까 봐 들고 다니는 것도 힘들잖아요.”
아이린은 생각 외의 호평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순간 아이린을 향해 살짝 고개 숙인 레온하르트의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려왔다.
“나도 아이린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 오늘 그대는 매우 귀엽고 아름다워.”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엉켰다.
레온하르트의 그윽한 눈빛에 아이린은 순간 심장이 멈출 뻔했다.
‘윽, 무슨 남자가 매 순간 이렇게 훅 들어오는지. 미리 방어할 틈이 없잖아!’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레온하르트는 멈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는 아이린의 두 팔을 살짝 감싸 쥐었다.
아이린의 동그란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이윽고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점점 그녀에게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린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어디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고개를 든 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이 스케이트장 한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와 그들을 응원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이들 몇몇이 그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이린은 순간 얼굴을 붉히며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고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왔다.
뒤따라오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도 얼굴이 터지기 직전의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아이린은 그 모습에 왠지 자신이 더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을 얼른 놓고 손부채질을 하던 아이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아이린은 한쪽 스케이트를 벗으면서 말했다.
“움직였더니 배가 고프네요. 이제 그만 타고 저쪽으로 가볼까요?”
아이린은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에 아무 데나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술은 절대 안 돼!”
“네? 술이라니요?”
아이린은 눈을 돌려 자신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은 술을 음료처럼 커다란 용기에 담아 파는 곳이었다.
“아차! 음료인 줄 알았네요. 제가 아까부터 목이 말라서 좀 정신이 없었어요.”
아이린은 반대쪽 스케이트를 마저 벗으며 찌릿한 발목을 주물렀다.
‘오랜만에 타서 그런가? 얼마 타지도 않았는데 뻐근하네.’
아이린은 살짝 몸을 숙여 종아리를 통통 두드렸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얼른 그녀를 안아 들었다.
곧 그는 구석진 곳에 있는 벤치로 걸어가 그녀를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거절할 틈도 없이 벤치 위에 그녀의 다리를 올리며 신발을 재빨리 벗겨냈다.
아이린은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이린은 발을 빼보려 힘을 주었지만, 그의 단단한 손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아이린의 작은 발을 들어 자신의 다리에 얹었다.
아이린은 순간 당황하며 그를 저지하듯 손목을 잡았다.
“레, 레온!”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발을 지압하듯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전쟁에 나가면 먼 길을 걸어서 행군해야 할 때가 있어.”
“……!”
“15살 때 맨 처음 전쟁에 나갔을 때 나도 행군을 했어. 평소 훈련을 많이 했다고 자부했던 나였는데, 그만 그 행군에서 쓰러지고 말았지.”
레온하르트는 이어서 그녀의 발목과 종아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때 나이 든 노병 하나가 다가와 내 발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어. 오랜 행군에 군화에 갇혀 있던 발에선 악취가 진동했지. 그는 그 악취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근육을 풀어주더군.”
아이린은 순간 자신의 발을 바라보며 어색한 듯 발을 꼼지락거렸다.
“물론 그대의 발이 악취가 난다는 건 아니고. 그대의 발은 매우 귀엽고 향기로우니까.”
‘헉, 발이 향기롭다니. 이 무슨 망언이십니까, 황태자 전하!’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이 확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은 얼른 발을 빼려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발목을 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가 아픈 건지 애써 통증을 참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그대가 내게서 도망치려 할 때마다 나의 애간장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그대가 알까?”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고통을 넘어 슬픔에 빠져 버린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가가 발갛게 변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발을 잡은 손을 놓으며 이내 벌떡 일어났다.
“가서 따뜻한 음료 좀 사 올게.”
아이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레온하르트의 뒷모습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심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헉, 이게 뭐야!”
무심코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별빛이 아닌 시커먼 무언가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순정만화에서 꽃잎 비가 내릴 때처럼 떼거리로 내려온 시커먼 자객들이 그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헐, 이제 하다못해 닌자냐?’
눈만 살짝 보이게 내놓고 시커먼 옷을 입은 그들은 평범하게 걸어오지를 않았다.
마치 영화 속 닌자처럼 앞돌기 옆돌기를 하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나 당황하면 최악의 상황에서 스스로를 타인처럼 느낀다더니!
아이린은 이 순간이 어쩐지 코미디 프로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타 소설 여주들은 어둑한 골목에서나 건달들을 만난다는데…. 여주도 아닌 내가 사람들 많은 곳에서, 자객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뭐라 해야 하나?’
“…똥 밟았다?”
그때 가장 가까이 온 자객 중 하나가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 뭐 지금 우릴 똥이라고 한 건가?”
‘으악, 내가 뭐라고 한 거야?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모자란 판에!’
아이린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그, 그게 아까 개똥을 밟아서.”
자객은 무심코 그녀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짧은 드레스 때문에 그녀의 옆에 놓인 구두가 확연히 보였다.
“너, 똥 밟지 않았는데.”
“허허, 자객을 두고 똥이라 하지 않나. 거짓말을 하지 않나. 간도 큰 아가씨일세.”
또 다른 자객이 아이린에게 한걸음에 다가와 그녀를 달랑 들었다.
“움직이면 이 단도가 지금 당장 너의 어딘가에 꽂힐 거야!”
그의 손에 들린 반짝이는 단도를 본 아이린은 두려움에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주변을 나머지 자객들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미행과 은신술에 특화된 이들로 이뤄졌기에 그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가볍고 몸집은 왜소했다.
하지만 그녀보다는 큰 키였기에 작은 그녀를 드는 건 매우 쉬웠다.
그때였다.
자객을 본 아이들이 달려오며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스케이트장 뽀뽀 누나가 검은 악당에게 납치당하고 있어요!”
아이린은 순간 미간이 구겨졌다.
‘헐, 스케이트장 뽀뽀 누나라니!’
그 순간 자객들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매우 당황했는지 멈칫했다.
“뭐, 뭐야!”
아이린은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위험해! 얼른 도망가! 이쪽으로 오면 안 돼! 가서 어른들에게 도와달라고 해!”
그러나 아이들은 그녀의 말에도 멈추지 않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도와주세요! 나쁜 사람들이 저 누나를 잡아가려 해요!”
그들의 소란스러움에 뒤늦게 자객을 발견한 어른들은, 오히려 두려워하며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그러나 달려오는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이린을 향해 오히려 안심하라는 듯 씨익 웃었다.
“아니, 재들이 어쩌려고!’
아이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무기가 될 것이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그 와중에 그들 앞에 도착해 자객들에게 다가선 아이들은 각각 이상한 포즈를 취하기 시작하며 소리쳤다.
“이 시커먼 악당들아!”
“정의의 이름으로!”
“우리들이 용서 하지 않겠다!”
‘뭐야, 설마 변신이라도 하나? 혹시 마법사?’
그 순간 자객도 아이린도 얼음이라도 된 듯 굳고 말았다.
정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위험한 와중에 저렇게 귀엽고 오글거리는 모습을, 자객들과 함께 감상하는 상황이라니!
그때였다.
그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그리고 아이린을 둘러싸고 있던 자객 중 하나의 어깨에 꽂혔다.
“으악!”
순간 그들의 대형이 무너졌다.
저쪽에서는 레온하르트가 들고 오던 음료까지 내던진 채 무서운 속도로 그림자들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만화나 영화에서 야생동물 무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 같았다.
“아이린!”
잠시 넋을 잃고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던 아이린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대답했다.
“레온! 조심해요!”
자객들은 순간 미간을 구기며 그녀를 든 채로 도망을 치려 몸을 틀었다.
“얘들아, 모두 덤벼!”
“이얍!”
“어딜 가려고 해, 이 악당들아!”
그 순간 아이들이 몸을 날려 아이린을 들고 있는 자객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자객들의 다리를 물어뜯고 할퀴어댔고, 자객들은 그런 아이들을 떼어내느라 야단법석이었다.
그때 나이 든 부인 하나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얘들아, 그러면 위험해! 어서 이리 와!”
그때였다. 전력으로 질주하던 레온하르트가 아이린을 들고 있는 자객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레온하르트의 날카로운 공격에 자객은 당황하며 중심이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빼앗듯 안아 들었다.
‘헉,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순간 자객은 검을 들고 레온하르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린을 든 채로 자객의 공격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를 안은 채 싸우는 통에, 아이린은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처럼 공중에서 이리저리 돌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