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이린은 원래부터 높이 빙글빙글 도는 것은 질색이었다.
원래의 삶에서도 놀이기구는 거의 타지 않았을 정도로.
그런데 지금, 아이린은 의도치 않게 놀이기구를 탄 듯 빙빙 돌려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통에 멀미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으윽, 어떻게 해! 욱! 토할 것 같아!’
어찌 보면 아름다운 왕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구토’였다.
그 순간 아이린의 입에서 참지 못하고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그녀는 자객의 얼굴에서 오늘 저녁식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아하하, 오늘 정말 많은 것을 먹었구나.’
아이린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잡으러 온 자객에게 순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버렸다.
자객의 눈빛을 보니 매우 충격이 커 보였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를 상대하느라 차마 그녀의 토사물을 피하지 못한 자객은, 그만 눈을 뜬 채 얼음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짠하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레온하르트 또한 그들을 짠하게 바라보며 휘두르던 검을 멈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사물을 맞지 않은 자객들이 잔뜩 인상을 썼다.
곧 그들은 아이린의 토사물을 맞은 자객을 피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때였다.
자객들이 약속이라도 하듯 벤치 옆 아름드리나무를 타다닥 타고 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이 나무 저 나무를 타며 사라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뒤를 그림자들이 따라갔다.
‘허허, 닌자인 줄 알았더니 타잔이었구나!’
아이린은 어쩐지 그들의 뒷모습이 초라하고 안쓰러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그녀의 상념을 깨고 레온하르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아이린은 먼 산 쳐다보듯, 제3자처럼 관조하듯 상황을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납치될 뻔 했는데 괜찮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불안한 얼굴로 울먹이는 그의 모습에 더 마음이 쓰였다.
아이린은 안심하라는 듯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요. 레온은 어디 다치지 않았어요?”
레온하르트는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아이린의 목소리에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아이들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레온, 나 좀 내려 줄래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아이린을 내려놓았다.
아이들과 아이린은 서로를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그때 옆에 함께 달려온 나이 든 부인이 그들을 꾸중했다.
“너희들, 위험하면 어쩌려고 거길 달려들어!”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귀부인은 얼른 부푼 치마를 살짝 들었다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 아이들 때문에 오히려 자객을 놓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용감한 아이들 덕분에 제가 납치되지 않았는걸요.”
아이린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깐 정말 고마웠어. 하지만 다음에 이런 상황이 있을 때는 치안대에 도움을 청해줘. 아까처럼 달려들다 크게 다칠 수 있어.”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하, 이럴 때마다 이 방법은 백이면 백 위험한 적이 없었어요.”
“네, 그래요! 아까 보셨죠. 다들 그렇게 당황하더라고요!”
“혼자 있으면 약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도 무리를 지어 덤비면 저런 악당들을 잡을 수 있다고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나이 든 부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외출을 나올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구나!”
아이린은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나무라는 부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부인, 아이들이 참 많으시네요.”
그 순간, 아이들도 나이 든 부인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린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이분은 수도 고아원의 원장인 베스나 토트 부인이야.”
그때 베스나 부인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린’이라면… 혹시 아이린 토트?”
“네, 제가 아이린 토트인데…!”
‘토트 성이 같구나. 이 부인이 내게 성을 준 것인가?’
“아이린, 이렇게 입고 나오니 못 알아보겠구나! 그런데 왜 날 알아보지를 못하는 거니?”
아이린은 어찌 말할지 몰라 작게 얼버무렸다.
“그게… 제가 작년에 크게 아픈 적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 어릴 적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가 많아요.”
그녀는 아이린의 기억을 고스란히 물려받긴 했다.
하지만 기억은 필요에 따라 사라지기도, 새롭게 새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아이린에게 남주와 여주, 서브남들에 관한 기억들은 오히려 선명했다.
반면 고아원과 원장에 대한 기억은 원작의 아이린에게는 소중했겠지만, 그녀에게는 잊히고 만 것이었다.
‘나 정말! 진짜 아이린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을 텐데.’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그때 귀여운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헐, 아까 그 스케이트장의 뽀뽀 누나가 우리 아이린 누나였다는 거야?”
“헉, 진짜 충격이다!”
“어쩐지 우리 아이린 언니랑 목소리가 비슷하더라 했어!”
그러던 중 아이들 중 가장 조그만 아이가 그녀에게 아장아장 걸어왔다.
작은 아이는 빨개진 눈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아이린 온니야! 혼자서 많이 아팠구나. 흑흑, 너무 슬프다.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여기가 더 아픈데.”
아이는 자신의 작은 가슴을 통통 쳤다.
어쩐지 뭉클하고 코끝이 찡한 마음이 밀려와, 아이린은 순간 아이처럼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흑흑, 으아앙!”
“으앙, 누나!”
“온니야! 으잉잉.”
아이들은 아이린을 둘러싸며 등을 토닥이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
베스나 부인과 레온하르트는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많이 놀랐을 텐데 돌아가서 쉬어야지. 많이 늦어서 아이들도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고.”
아이린은 그제야 시계를 보고 울음을 그쳤다.
그 순간 이성이 돌아 왔는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머, 죄송해요.”
아이들과 베스나 부인은 어벙벙한 표정의 아이린을 보고 한바탕 웃었다.
“하하, 저 표정 봐! 이제야 우리 헛똑똑이 아이린 누나 같잖아!”
“맞아. 옛날에도 공부만 잘했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았다니까!”
아이들은 짐짓 어른처럼 한마디씩 하더니 뒤로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그 아이들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갔다.
“뭐야, 이 녀석들이!”
베스나 부인은 그런 아이들과 아이린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후후, 우리 아이린. 언제 크려는지.”
레온하르트는 아이들을 잡으러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린이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베스나 부인처럼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그녀의 목에서 무언가 반짝이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뒤따라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목걸이?”
아이린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가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목걸이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 목걸이, 눈에 익은데….”
레온하르트는 목걸이를 바라보다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때 고아원 원장 베스나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이 이 고아원에 처음 왔을 때부터 차고 있던 목걸이에요.”
“……!”
“사실 저도 그 목걸이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는 귀족들에게 수소문을 해보았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때는 전쟁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던 때였으니까요. 평민들뿐만 아니라 귀족들 중에도 자기 아이를 잃어버린 집안이 많았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레온하르트는 참담한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악덕 노예상들은 그 상황을 악용해서 고아들을 자기 아이라며 납치해 버리기도 했고요.”
레온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베스나 부인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의 배후도 이번에 황태자 전하께서 잡아들였다는 그 피도르 후작일지도 모르겠군요.”
레온하르트는 동의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피도르 가문 자체가 그전부터 권력에 줄을 대고 대대로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베스나 부인은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어쨌든, 그래서 저는 아이린의 부모를 찾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더 찾아보았다가는 노예상에게 속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부모의 얼굴도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아이이기에 더 조심스럽더군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목걸이를 바라봤다.
‘어쩌면 이 목걸이로 그녀의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레온하르트는 아이들과 함께 뛰면서 해맑게 웃는 아이린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이린, 내가 네 가족을 찾아 줄게.’
* * *
그 시각.
아이린을 납치하려던 자객들은 빠르게 수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뒤를 따르는 한 무리의 자객들이 그들을 빠르게 추적하고 있었다.
말도 타지 않고 도주하던 그들은 더는 달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뛰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도망치던 자객 중의 우두머리가 그들 앞에 서서 소리쳤다.
“누, 누구냐! 누군데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냐!”
그 순간, 그들을 따라오는 자객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스르륵 복면을 벗었다.
도망치던 자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뜨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흐허헉, 2, 2황자 전하!”
‘이런 낭패가! 2황자라니! 오늘 이렇게 죽는 것인가!’
암흑가의 수장으로 이름을 떨친 2황자를 알아본 자객들은 그만 전의를 상실하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때 더없이 어둡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부터 셋을 셀 것이다. 그 안에 내 질문에 바른 대로 대답한다면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누가 시킨 짓이냐?”
“헉!”
“하나!”
자객들은 하나같이 망설이듯 입을 달싹 거렸다.
“그, 그것이!”
“둘!”
바닥에 꿇어앉은 자객들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더니 벌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때 한 자객이 용기를 내며 소리쳤다.
“말, 말하겠습니다!”
그때 주변의 자객들이 그의 팔을 잡고 말렸다.
“안돼! 그분이 알면 우리들의 가족들조차 무사할 수 없을 거야!”
“그래, 맞아!”
‘이곳이 우리가 죽을 자리구나.’
자객들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그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자객들이 혀를 세게 깨물려고 입을 벌린 그 순간, 에드먼드가 소리쳤다.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너희들의 목숨도 가족의 목숨도 살려 주겠다.”
암흑가의 수장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약속은 꼭 지켜지기로 유명했다.
그들의 눈빛에 살 수 있다는 희망이 한가득 맺혔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나서서 말했다.
“저희에게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은 피도르 후작 영애입니다.”
“네, 저희는 그분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입니다.”
에드먼드는 분노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납치를 한 것은 중죄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니!”
“2황자 전하,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희의 가족이 그 영애의 가문 영지에 볼모로 잡혀 있습니다.”
에드먼드는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가족들이 볼모로 잡혀 있다니! 무슨 말인가?”
자객들의 우두머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저희 가족들을 볼모로 잡은 것은 3년 전이었습니다. 저희 마을은 땅이 척박해 대부분 남자들이 용병 길드 생활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결코 누굴 음해하는 일은 의뢰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2황자 에드먼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용병 길드인데 그것이 가능한가?”
“네, 저희가 주로 하는 일은 타국으로 상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경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을 전체가 거의 무력집단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볼모로 잡힌 것인가?”
그때 또 다른 자객 하나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용병 일을 의뢰 받고 떠났을 때 피도르 후작의 수하들이 저희마을에 들이 닥쳤습니다.”
“네! 그놈들은 정말 나쁜 놈들입니다! 해적처럼 마을을 약탈하고 저희 가족들을 싸그리 잡아갔습니다.”
에드먼드는 황당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하, 그 아무리 피도르 후작가라도 이곳은 룩스 제국이다! 한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잡아갈 수는 없는일!”
“물론 그들이 내세운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에드먼드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 이유가 무언가?”
그 순간 자객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며 말했다.
“그건 후작 가문의 악덕 고리대 때문이었습니다.”
“악덕 고리대라니?”
“재작년에 극심한 가뭄이 닥친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한다.”
“그때는 용병 일조차 구하기 어려워, 저희 마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양식을 꾸어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까막눈인 저희들이 그만 잘못된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고 만 겁니다.”
에드먼드는 그 말을 듣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언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익히기가 매우 힘들지.’
그의 생각처럼 룩스 제국의 언어는 하나하나 뜻을 가지는 의미 문자였다.
아이린조차도 원작 아이린의 기억이 없었다면 배우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때문에 룩스 제국의 평민들 사이에는 문맹률이 매우 높았다.
“그 고리대의 계약서를 보여 주게.”
자객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얼른 가슴팍에서 꼬깃꼬깃한 누런 종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에드먼드는 얼른 계약서를 펴 보았다.
[계약서
윈드밀드 마을은 피도르 후작 가문에서 밀과 콩을 한 집당… (중략) …이로서 한 달 안에 5배로 갚지 않을시 마을의 용병대는 피도르 가문에 종속되며 그 가족들 또한 노예가 되겠습니다.]
계약서를 읽은 에드먼드는 순간 갑갑한 마음에 가슴을 크게 두드리며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암흑가의 수장으로 있던 그였지만 힘없는 이들을 상대로 이렇게 악독한 계약서는 처음 보았다.
“한 달 안에 5배로 갚지 않으면 노예가 되는 계약이라니! 이렇게 악독하고 말도 안 되는 계약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에드먼드의 수하들 또한 놀랐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때 자객들의 수장이 물었다.
“한 달 안에 다섯 배라니요? 분명 그들은 내년까지 두 배로만 갚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계약서의 내용을 자세히 모르는 듯 경악한 눈으로 계약서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부르르 떨며 오열하듯 말했다.
“바보같이, 친절하게 다가오는 그들에게 속고 말았군요. 흑흑, 으아아!”
“두 배도 갚기 힘든데 다섯배라니!”
“흑흑, 글을 알았다면 이런 계약을 하지 않았을 텐데!”
“정, 정말 억울합니다! 2황자 전하, 저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자객들은 복면을 벗으며 눈물을 닦았다.
복면을 벗은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순박해 보였다.
에드먼드는 잔인무도한 암흑가의 수장으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가 잔혹하게 처단한 건 악독한 이들뿐이었다.
어려운 사정에 처한 이들을 만나면 남몰래 도움을 주었다.
어머니 황후 때문에 억지로 끌려가 살수 훈련을 받았고, 어쩔 수 없이 암흑가의 수장이 되었을 뿐.
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이 룩스 제국의 2황자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부국강병을 이루어 백성 모두가 잘 사는 룩스 제국을 만드는 것!
그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역시 사과의 썩은 부위를 도려 내지 않으면 더 깊이 썩어 들어가는 것인가!’
어머니 때문에 병폐를 키운 것 같아, 에드먼드는 죄책감으로 탄식하였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너희의 가족들을 무사히 구해 너희에게 돌려보내주겠다.”
고개 숙여 울던 자객들은 에드먼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2황자 에드먼드의 울분에 가득 찬 얼굴을 보았다.
순간 그들 모두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2황자 전하! 평생 주군으로 따르겠습니다!”
“아니다. 날 따를 필요 없다. 난 그저 이 나라의 2황자일 뿐이니. 그대들은 룩스 제국과 황제 폐하에게 충성해라. 이 모두 황제 폐하의 은덕이시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자객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존명! 2황자 전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 * *
“휘유, 오늘부터 출근이네.”
뜻하지 않은 긴 휴가에 아이린은 좀이 쑤셨다.
그러나 막상 출근을 하려니 어쩐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이궁, 근데 뭘 입지?”
지붕이 무너지는 바람에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한 벌도 들고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레온하르트와 제이드가 준비해준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 옷들이 하나같이 업무용으로 입기에는 너무 밝고 화사하다는 점이었다.
“커리어우먼에게 업무복은 갑옷과 같은 건데….”
입고 일을 하러 나가기보다는 산책을 나가야 할 것 같은 드레스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젊은 영애들 사이에 유행하는 크리놀린으로 부풀린 드레스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아이린은 먼저 하늘하늘한 재질의 엠파이어 드레스를 몸에 대고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드레스를 내려놓고 다시 옷들을 살폈다.
그러다 평소 보지 못했던 디자인의 옷이 보여 몸에 대 보았다.
남성 제복을 개량한 듯, 종아리를 살짝 가려주는 스커트와 재킷으로 이뤄진 투피스 형태의 옷이었다.
묘사하자면 판타지 속의 도서관 사서 같은 복장이랄까.
“그나마 이게 일할 때 편하겠네.”
그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데이지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다다다 달려와서는 아이린을 폭 품에 안으며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엉엉, 아이린!”
“어, 어, 데이지? 왜, 무슨 일 있었어?”
“흑흑, 무슨 일은 너에게 있었잖아! 어디 다친 거 아냐?”
데이지는 그녀의 몸을 살피듯 샅샅이 훑어보았다.
어쩐지 눈에 살기까지 어린 그녀의 박력에 아이린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난 괜찮아.”
“괜찮기는! 아침에 시녀들이 속닥거리는 것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헐, 시녀들이 엄청난 소식통이구나! 이 정도면 LTE급인데!’
손수건을 꺼낼 정신도 없었는지, 눈물을 팔로 대충 훔친 데이지는 얼른 그녀를 소파로 이끌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뭐 어떻게 되긴? 네가 들은 대로 지.”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데이지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지 말고 다 말해줘.”
아이린은 더는 데이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데이지… 나 오늘부터 출근이야. 그래서 준비해야 한다구.”
데이지는 쓱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아직 네 출근 시간이 두 시간이나 남았어. 보아하니 오늘 입을 옷도 준비해 놓으셨고, 네가 아침에 그렇게 시간을 들여 꾸미는 스타일 아닌 거 다 알아!”
아이린은 어쩐지 발가벗겨지는 느낌에 팔로 제 몸을 감싸며 말했다.
“헉,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데이지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 그러니 차분히 풀어봐! 네 이야기를 듣지 않고선 오늘 하루 일하기도 힘들 것 같으니까!”
아이린은 그녀에게 꽉 잡힌 손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데이지 시녀 생활을 하더니 어쩐지 더 철저해졌단 말이야! 도망갈 틈도 없이 붙잡혔네 이거.’
“그게 그러니까… 네가 제이드 님과 함께 떠나고 난 황태자 전하와 레스토랑을 갔어. 그리고 연극을 보고 수도 중앙 분수대에서 스케이트를 탔지.”
“……!”
‘뭐지? 이 눈빛은 걱정스럽다기보다는 내 데이트가 흥미롭다는 표정인데.’
아이린은 어쩐지 찝찝한 느낌을 받았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오랜만에 스케이트를 타서 다리가 아팠거든. 그래서 벤치에 앉아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아이린은 그때의 민망함이 떠올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윽, 궁금해! 무슨 일이기에 그래. 얼른 말해봐!”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워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내 구두를 벗기고 발을 주물러 주셨어!”
순간 데이지는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뭐! 구두를 벗기고 발을 주물러줘?”
아직까지 보수적인 관습이 남아 있는 룩스 제국이었다.
‘치료사나 안마사가 아닌 사람이 이성의 신을 벗기고 만졌다.’
그런 행위는 연인들이나 하는 은밀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발을 주물러 줬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사람들 많은 중앙 광장 벤치에서 그랬다니.’
그런 걸 알 리 없는 아이린은 생각보다 크게 놀라는 데이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린, 너 가끔 가다 보면 내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너무 대범하단 말이야.”
“대범? 내가?”
“응, 너 엄청 대범해!”
데이지는 아이린을 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황태자 전하도 주변 눈치를 안 보는 대범한 스타일이셨네. 이런걸 천생연분이라 해야하나?’
아이린은 여전히 데이지가 하는 말에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스케이트 타다 키스할 뻔했던 이야기는 뺐는데 도대체 어느 시점이 대범하다는 것이지?’
그때 잠시 상념에 잠긴 아이린을 깨우며 데이지가 말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어떻게 된 건데.”
“그러고는… 황태자 전하가 따뜻한 음료를 사러 간 사이에 자객이 하늘에서 쏟아졌어.”
“뭐? 널 혼자 두고 음료를 사러 갔단 말이야!”
“혼자는 아니었는걸. 광장에 스케이트를 타러온 사람들과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았거든. 나도 다리가 좀 아팠고.”
“다른 호위는 없었던 거야?”
“황태자 전하와 나왔는데 다른 호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
데이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린, 내 친구 아이린!”
“응?”
“지금 널 노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은 작은 틈을 공략해 널 위험에 빠뜨릴 거야!”
“그거야 나도 알고 있어.”
그때 데이지가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아니, 넌 모르고 있어. 널 습격한 그 자객들 뒤에 피도르 후작 영애가 있다는 말이 있다고.”
아이린은 순간 예상치 못한 이름에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뭐? 피도르 후작 영애? 난 그녀를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네가 아파서 결근하는 동안 황태자의 노예상 소탕 작전에 네가 따라갔다는 소식이 황궁 안에 쫙 퍼졌단 말이야.”
“뭐? 그거 기밀이었는데….”
“그래, 기밀이었겠지. 그런데 이 황궁에서는 기밀도 기밀이기 힘들어! 곳곳에 눈과 귀가 숨어 있거든.”
아이린은 순간 사극 드라마에서 본 궁녀들의 ‘쥐부리 글려, 쥐부리 지져’ 의식이 떠올랐다.
새로 들어온 어린 궁녀들이 함부로 말을 퍼뜨리지 못하게 겁주는 의식이었다던가?
그럴 정도로 궁 안에서 떠도는 많은 말들이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뜻이겠지.
그건 이곳 황궁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공주를 조심해!”
“응? 엘리자베스 공주를 왜?”
아이린은 데이지의 말뜻을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서 여주 엘리자베스를 성녀처럼 묘사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그런데 조심하라니?’
순간 아이린은 자신이 읽었던 원작과 지금 이 현실이 많이 다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보이는 것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야. 호위기사 로만 경과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는데….”
데이지는 순간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메르헨의 공주도 아니고, 진짜 공주 대신 끌려온 공작 영애랬어.”
“뭐? 공주 대신 끌려온 공작 영애?”
데이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응!”
‘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원작에선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아이린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데이지를 바라봤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고국의 왕과 공주를 증오해. 그래서 이곳에서 권력을 잡으려 혈안이 된 인물이야!”
‘말도 안 돼, 분명 백합꽃처럼 순수한 여주 엘리자베스였는데, 복수심과 권력욕에 가득 차 있다니? 그런데 그거랑 내가 무슨 상관이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데이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내가 엘리자베스를 조심해야 하는 거야?”
데이지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쯧, 넌 지금 모든 영애들의 공공의 적이라는 거 몰랐어?”
아이린은 그녀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뭐? 공공의 적?”
“당연하지. 네가 매일 가까이 있는 남자들이 룩스 제국 최고의 미남들이라는 걸 생각해 보라고.”
“……!”
“게다가 그들과 결혼만 하면 단숨에 부와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지. 그러니 귀족 영애들 사이 일등 신랑감 아니겠어?”
“하아, 일, 일등 신랑감.”
데이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거기다 넌 그중 한명과 사귀기까지 하고 있잖아.”
“그래도 아직은 사람들이 모르는데 괜찮지 않을까?”
아이린은 원래 세계에서 인기 아이돌 가수에게 연인이 생겼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행복을 빌어 주는 팬들도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연인을 험담하고 심지어 해코지하려 드는 사생팬들도 종종 있었다.
“넌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얼마 못 가 들킬 거라는 데 난 뭐든지 걸 수 있어. 황태자 전하랑 아이린 너, 두 사람 너무너무 티가 난다구!”
아이린은 순간 얼굴이 붉어지며 두 볼을 감쌌다.
“저, 정말 그렇게 티나?”
데이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것도 아주 많이. 어쩌면 엘리자베스 공주는 벌써 눈치 채고 있을 거야.”
“엘리자베스 공주가?”
“응, 그러지 않으면 널 그렇게 경계할 리가 없어.”
“그런데… 데이지, 난 엘리자베스 공주가 날 경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걸?”
“으그으그, 아이린! 이렇게 순수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세상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도 원래 세계에서 사회생활 좀 해 봤는데! …잠깐, 혹시 그때 나랑 정말 눈이 마주쳐서 웃은 건가?’
아이린은 순간 멈칫하며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데이지가 그녀의 상념을 깨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이린? 혹시 어디가 아픈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픈 게 아니라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나서.”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뭔데?”
“저번에 엘리자베스 공주와 황태자 전하가 함께 사자궁 정원으로 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어.”
“……?”
“그때 그녀가 나를 본 것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는데. 왠지 느낌이 날 보고 비웃는 것 같아서 좀 찝찝했어.”
“아! 그거 아마 너 보고 웃은 것 맞을 거야.”
“뭐? 정말?”
데이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시녀들 모임에서 들은 게 있어. 엘리자베스 공주가 황태자 전하에게 일부러 사자궁 정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거라던데.”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부탁을 했다고?”
데이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엘리자베스 공주가 황태자 전하에게 가서 피도르 후작 영애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나 봐. 그녀가 아이린 너를 노리고 있다고.”
‘헐, 나 이미 피도르 영애에게 오래전부터 노려지고 있었던 거구나.’
아이린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미리 알려 줬다니 고맙네. 근데 피도르 가문 사람들 왜 그런다니, 나랑 무슨 원수가 졌다고?”
데이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게, 악연이지. 그런데 계속 들어봐. 엘리자베스 공주는 일부러 그 사실을 황태자 전하께 말한 것 같았어.”
“일부러라니?”
“내가 엘리자베스 공주의 전담 시녀잖아. 지난번에 그녀가 영애들을 만나는 자리에 피도르 후작 영애가 갑자기 들이닥쳤거든.”
“…….”
“그런데 거기서 네 이야기를 영애들이 나쁘게 떠들도록 일부러 유도하더라고.”
아이린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일부러 유도했다고?”
데이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도 아카데미 다녀 봐서 알잖아. 착한 척 자신은 빠지면서 남들을 이간질하는 그런 사람들.”
아이린은 정말 충격이 컸다.
엘리자베스에게 권력욕과 복수심이 있다는 얘기만으로도 믿기 어려운데.
그동안 수없이 읽으며 보았던 성녀 여주의 본색이 그런 사람이라니.
“그리고 그날부터 엘리자베스 공주가 황태자궁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잖아!”
“아, 그랬지!”
데이지는 진저리를 치듯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맨날 엘리자베스 공주의 편지를 가지고 방문할 때마다 황태자 전하 때문에 원형탈모 올 뻔 했었어.”
아이린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 미안.”
“네가 사과할 것은 아니지. 아무튼 엘리자베스 공주는 고수 중의 고수야. 얼마나 자신을 잘 숨기는지. 시녀인 나랑 호위기사 말고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아무도 모를 걸.”
“헉, 그 정도야?”
“그렇다니까. 지금 너도 완전히 못 믿고 있잖아. 이번 피도르 후작 영애 일도 아마 그녀가 뒤에서 조종했을 가능성이 많아.”
아이린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원작을 많이 읽다 보니, 최애인 제이드만큼은 아니라도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모두 애정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 피도르 영애에게 납치까지 사주했으려고?”
“직접 사주하지야 않았겠지. 어제 우리가 외출했을 때 영애들의 티파티가 있었다고 들었으니까. 그때 피도르 영애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가도록 만들었을 거야.”
아이린은 어쩐지 점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아이린, 내 말을 믿어줘. 그리고 그녀를 조심해.”
“……!”
“그녀의 겉모습만 봐서는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어. 지금이라도 당장 연극계로 나가면 대번에 연극계의 샛별로 성공할걸.”
아이린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알겠어. 데이지, 걱정 마. 난 내 친구인 널 가장 믿고 있으니까. 그냥 좀 충격이 컸을 뿐이야.”
데이지 역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좀. 엘리자베스 공주는 우리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그녀의 그런 면모를 처음 알았을 때는 나도 매우 놀랐어.”
아이린은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공주 문제가 아니더라도 황궁에서 조심할 필요는 있어.”
순간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다. 일부러 조심할 필요는 없으려나?”
아이린은 데이지의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깜박였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에게 항상 널 구해줄 백마 탄 왕자님이 있잖아!”
“백마 탄 왕자님이라니? 그게 누군데?”
“생각해봐! 요즘 네가 위험할 때 마다 누가 구해 줬는지. 네가 아플 때마다 누가 돌보아 주고 지켜줬는지.”
그랬다.
그녀가 위험했던 모든 순간.
아프고 외로웠던 그 순간에 레온하르트가 그녀와 함께 있었다.
전에도 알고는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아이린은 새삼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를 떠올리자 쫒기고 불안한 마음들이 가라앉으며 점점 편안해졌다.
“그래, 아이린. 그렇게 편안하게 생각해. 네게는 나도 있잖아!”
아이린은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데이지에게 마주 웃었다.
“그래, 나에게는 데이지 너도 있어!”
* * *
아이린은 출근 후 황태자 집무실의 서류를 들고 보좌관실로 들어갔다.
사수인 토마스가 얼른 책상을 돌아 나오며 말했다.
“수습! 오랜만이야! 몸은 괜찮아?”
“네, 이젠 괜찮아요. 그런데 쥴리언 선배님은 안 보이시네요?”
“응, 지금 신년제 문제로 현장 실무 나갔어.”
“그렇구나. 못 보니 아쉬워요. 저 왔다 갔다고 안부 전해 주세요.”
“그래, 차장님 기다리시니 얼른 가봐!”
“네.”
아이린은 얼른 차장의 책상으로 가 살짝 목례를 하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번 신년제 관련해 결재하신 서류들입니다.”
차장인 로건 테일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제 아픈 곳은 다 나은 겁니까?”
아이린은 두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네, 이제는 멀쩡합니다!”
“후, 다행입니다. 이제는 위험한 곳에는 따라 가지 않도록 하세요. 우리에겐 몸이 재산입니다.”
‘표정은 저리 뚱하면서 걱정 가득한 말을 해주시네. 차장님은 참 츤데레라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렇게 서류를 차장에게 전하고 사무실을 나서던 아이린은 통통한 직원 브라운을 복도에서 만났다.
“아이린 씨.”
“하하, 브라운 선배님. 저 아직 수습이니 그냥 수습이라 불러 주세요.”
“에이, 무슨 수습이 비서관 역할을 그리 잘 수행하나요. 아이린 씨는 이미 보좌관실 직원이나 다름없어요.”
아이린은 머쓱해하며 볼을 긁적였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근데 저, 아이린 씨….”
“네?”
브라운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무슨 부탁요?”
“이 서류를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자베스 공주에게요?”
‘엘리자베스 공주라니. 좀 찜찜한 기분이 드는데.’
출근 전 데이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이름이 나오니 어쩐지 불안감이 들었다.
“네, 공녀들에게 나눠줄 내년 예산에 관한 서류에요. 제가 직접 가야 하는데 너무 바빠서 통 시간이 나지 않아서요.”
브라운은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끙, 내가 너무 앞서 갔나? 바쁘다는 선배를 저런 표정 짓게 하는 건 막내의 도리가 아니지.’
아이린은 브라운을 향해 싱긋 웃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당연히 막내인 제가 가야죠. 서류 이리 주세요. 제가 바로 전하고 올게요.”
브라운은 얼른 그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아이린 씨. 혹시 아무도 없으면 방안에 살짝 놓고 나와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은 막내인 저에게 일임해 주세요.”
아이린은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엘리자베스 공주의 방으로 향했다.
백합궁. 타국 공녀들이 머무는 방이 있는 곳이었다.
백합처럼 순백의 건물은 곳곳이 하얀 조각상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하얀 백합꽃 정원이 넓게 펼쳐졌다.
‘후우, 아무리 백합 궁이라도 그렇지, 모든 게 새하얗잖아!’
아이린은 어쩐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칭하는 백합궁에 이질감을 느꼈다.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다간 멀쩡한 사람도 미쳐 버리겠어. 에고, 얼른 서류를 전하고 돌아가야겠다.’
아이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빠른 걸음으로 백합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디가 엘리자베스 공주의 방이지?”
그때 시녀 하나가 다가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 전 황태자궁 보좌관실에 근무하는 아이린 토트입니다. 엘리자베스 공주께 전달할 서류가 있어 찾아 왔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아이린은 시녀를 따라 4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이 엘리자베스 공주의 방입니다.”
방에 도착한 아이린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시녀가 그녀에게 살짝 묵례를 했다.
아이린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이만.”
시녀는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이린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얗고 아름다운 조각과 장식들, 고가의 가구들이 즐비한 일 층과는 매우 달랐다.
그곳은 마치 다락방을 연상시키는 외향이었다.
‘하, 설마. 방 내부는 그렇지 않겠지. 그래도 공주 자격으로 온 거잖아!’
아이린은 긴 숨을 내쉬며 문을 두드렸다.
“엘리자베스 공주 전하? 황태자궁의 아이린 토트입니다.”
똑똑.
“혹시 안에 계십니까?”
아이린이 몇 번 방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지? 돌아갔다 다시 올까?’
아이린은 바쁘기도 했지만 어쩐지 이 불길한 궁에 다시 방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아까 브라운 선배님이 아무도 없으면 두고 와도 된다고 하셨어.’
아이린은 주인이 없는 방에 들어가는 것이 어쩐지 찜찜했다.
‘얼른 두고 나오자!’
아이린은 문을 다시 한 번 살짝 두드렸다.
역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방안으로 들어간 아이린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헉!’
엘리자베스 공주는 색상은 은은해도 디자인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건지 정작 공주의 방은 아이린이 살던 집보다 더 작고 허름했다.
‘아무리 가짜 공주라도 공주인데, 우리 집보다 나은 게 곰팡이가 없는 것뿐인 방이라니!’
아이린은 데이지에게 들었던 엘리자베스의 복수심과 권력욕이 어쩐지 이해가 되었다.
‘그래, 나 같아도 화려한 공작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살다가 이런 데 끌려와서 가족들과도 못 만나면 없던 권력욕이 샘솟겠다.’
아이린은 긴 한숨을 쉬며 서류를 소파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래도 이런 서류는 직접 전해 줘야 하는데.’
아이린은 어쩐지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린은 사실 레온하르트와 사귀게 되면서 엘리자베스의 행복을 빼앗은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더는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만나지 않으려 선을 긋고 멀어지려는 노력까지 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한 레온하르트를 결국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얼른 서류 옆에 메모를 남겼다.
[황태자궁의 아이린 토트입니다.
방안에 아무도 계시지 않아 내년 예산 관련 서류를 놓고 갑니다.
확인하시는 대로 황태자궁의 보좌관실로 보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쪽지를 남긴 아이린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방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방문 밖을 나섰다.
아이린은 그렇게 백합궁을 가로지르는 정원을 달리듯 빠르게 빠져 나왔다.
그리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보이는 아름다운 소나무 아래 섰다.
그녀는 이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어쩐지 답답했던 마음이 깨끗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으아! 이렇게 좋은 데가 있었네.”
아이린은 평소 황자궁에서 도서관으로 가는 길만 오가곤 했다.
그 때문인지 새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녀는 멀리 보이는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푸르른 소나무 숲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아, 이곳에서 낮잠 자고 싶다. 오랜만에 출근인데 벌써 땡땡이가 치고 싶어서 어쩌지.”
피식 웃은 아이린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크게 숨을 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에 가득 찬 더러운 공기가 깨끗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은은한 솔 향이 상쾌해 발걸음도 가벼웠다.
아이린은 어쩐지 기분이 매우 좋아져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즐겁게 걷다 보니 금방 도서관 입구에 다다랐다.
“어, 벌써 도착했네.”
아이린은 한 손 가득한 서류 더미를 보며 한숨을 폭 쉬었다.
“으싸, 얼른 해 놓자!”
아이린은 파이팅을 외치며 씩씩하게 열람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정말 사람이 없구나.’
생각해보니 그녀가 지금까지 이 도서관에서 본 사람이라곤 매일 바뀌는 사서들과 에드먼드뿐이었다.
제국 최고의 장서 수를 자랑하는 황궁 도서관에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니,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의 지정석으로 갔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아이린은 가방의 서류 더미를 꺼내 읽었다.
그런데 첫 번째 서류부터 난관이었다.
“흠, 지역별 특산품이라?”
아이린이 이 세계에 산 것이 겨우 1년.
진짜 아이린도 수도에서만 살았기에 지역의 특산품에 관한 지식은 없는 듯 보였다.
“이 부분이 좀 이상하단 말이야.”
고민하듯 펜 끝을 살짝 물고 있던 아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책을 찾아봐야겠어.”
아이린이 그동안 보았던 업무 서류는 역사나 법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항상 법전 앞에 지정석처럼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에드먼드를 만났었지.’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분야의 서류 때문에 낯선 서가로 들어갔다.
“으음, 어디 있지?”
그리고 벽면에 가득 찬 책꽂이의 분류표를 보았다.
“룩스 제국… 특산품.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찾던 책들이 하나같이 서가 꼭대기에 꽂혀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지? 사다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이린은 주변을 둘러보며 사다리를 찾았다.
‘어, 사다리!’
그때 바로 뒤쪽의 서가에서 1m쯤 되는 사다리를 발견하였다.
얼른 달려가 사다리를 밀고 온 아이린은 재킷을 벗고 셔츠를 걷어붙였다.
‘자, 이제 올라가 보자고!’
낮은 사다리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녀에게는 꽤 높은 난관 같았다.
‘익, 어쩐지 벌써 무서워지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아이린은 금세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책은 그녀의 손에 닿을락 말락 했다.
“아, 왜 이리 안 잡히는 거야!”
아이린이 뒤꿈치를 들어 올리자 겨우 책에 손이 닿았다.
“잡았다!”
그때였다. 순간 사다리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린은 이윽고 사다리의 꼭대기에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어, 어쩌지! 으악, 떨어지겠어!’
1m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사다리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안정하게 떨어진다면 어디 하나쯤 부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뻔히 예상되는 낙상 사고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 뭐지? 이상하네.’
정말 이상하게도 바닥에 닿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 하나 부러진 곳도 없었다.
‘뭐지? 여기 사서들이 사실은 마법사라더니, 도와준 건가?’
살짝 떨어지다 말고 마치 둥둥 떠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에 아이린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마법이 아니라 레온의 품에 안겨 있어서였어?’
“레, 레온, 아니, 황태자 전하!”
“아이린, 우리 둘만 있는데 레온이라 불러야지.”
“어떻게 여기에 왔어요?”
“어떻게라니. 나도 찾을 책이 있어서 왔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필요한 책은 빌려다 드리는 것도 제 업무인데요.”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오랜만에 출근한 아이린이 도서관에 있으니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레온하르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30분만 있으면 점심시간이야. 그리고 정말 다행이지 않아? 내가 아이린을 찾아온 덕분에 이렇게 그대를 구할 수 있었잖아!”
아이린은 그제야 자신이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내 다리를 버둥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구해주신 건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빨리 내려 주세요. 누가 보겠어요.”
아이린이 움직일수록 레온하르트는 더 그녀를 단단하게 안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어, 이러다 떨어지겠어.”
그리고 이내 볼을 가리키며 아이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후후, 자. 요기 입 맞춰 주면 내려 줄게.”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달콤한 목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잔뜩 붉어졌다.
아이린은 망설이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볼 쪽으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순간 촉촉하고 말캉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아이린은 그녀가 예상한 느낌이 아니었기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헉! 내가 왜 눈을 떠서!’
그녀의 눈앞에는 레온하르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뒤로 빼며 말했다.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해요. 얼른 내려 주세요.”
그 순간 그의 농도 짙어진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하다니? 그럼 아무도 없는 방에서는 괜찮은 건가?”
아이린은 순간 이상한 기분에 빨개지는 귀를 손으로 가렸다.
“히힉!”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에게 살짝 윙크를 하며 그녀가 앉았던 의자에 내려 줬다.
“걱정하지 마. 이쪽 서가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는 곧 허리를 숙여 아이린이 떨어뜨렸던 책을 주워주며 말했다.
“특산물에 관한 책이군.”
아이린은 날뛰는 심장을 애써 가다듬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올해 각지에서 세금 대신 올라온 특산물들을 보고 있었어요.”
룩스 제국의 세금 제도는 기본적으로 각각의 영지에서 돈을 걷어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것이지만, 특산품 또한 세금으로 인정해 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이미 거둬들인 세액인데 이런 부분도 책을 찾아 볼 것이 있어?”
“네, 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요.”
“이상한 부분?”
아이린은 손가락으로 책에 있는 지도를 짚었다.
“이곳, 이곳, 이곳이 제일 이상해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북쪽 국경 지대와 최남단에 있는 마을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곳이 왜?”
“우선 이 마을부터 보세요.”
그녀는 먼저 최남단의 바닷가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서 올라오는 특산품들은 대부분 수도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상할 수 있는 어류예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생선을 부패하지 않게 처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선을 말리지 않는 이상 상하지 않고 대량으로 수도까지 운반하는 것은 무리예요.”
레온하르트는 서류를 다시 살펴보며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여기 이 서류에 나온 대로라면 그들이 올리는 생선은 건조한 것이 아니고….”
“네, 말 그대로 날생선이에요.”
‘쥐새끼가 있었군.’
룩스 제국은 많은 국가의 조공을 받고, 넓은 대륙에 수도 없이 많은 영지를 보유한 나라였다.
보통 세금은 화폐로 걷고 있었지만, 특산물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찾아가 확인해 보는 것은 무리였다.
“우린 이 새어 나가고 있는 세금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서 먼저 각 지방의 특산품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예요.”
레온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래 봬도 저 아카데미 수석이에요.”
“그러네. 고마워. 덕분에 일 처리가 매우 빨라졌어.”
아이린은 어쩐지 쑥스러워 서류를 괜스레 뒤적였다.
그때 레온하르트는 시계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벌써 점심시간이네. 오늘은 내가 준비해 왔어.”
그는 언제 가져왔는지 바닥에 놓아둔 피크닉 바구니를 들어보였다.
“후후, 우리 어서 나가요.”
* * *
‘하아, 정말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레온하르트는 이내 관자놀이를 짚은 채 긴 한숨을 쉬었다.
전혀 약속이 없었던 제이드와 데이지, 거기다 나중에는 에드먼드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합류했던 것이다.
‘으윽, 아이린과 단둘이 있고 싶었는데.’
레온하르트는 단둘이 피크닉을 즐기려던 벤치에 찾아온 불청객들을 쏘아보았다.
벤치에는 아이린, 레온하르트, 제이드, 데이지, 에드먼드까지 다섯 명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널따란 황궁 벤치였지만 벤치 하나에 성인 다섯 명은 보기만 해도 답답해 보였다.
그가 상상했던 건 아이린과의 오붓한 점심 피크닉이었는데, 완전히 망하고 만 것이었다.
처음 아이린과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벤치로 다정히 걸어갈 때만 해도 좋았다.
따뜻한 햇살이 그들 머리에 내리쬐고 하늘도 더 없이 맑고 청명했다.
심지어 한겨울인데도 바람 한 점 없었다.
그야말로 나들이 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하늘도 자신을 돕는다는 생각이 들어 유쾌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이린!”
그가 불쑥 부르자, 아이린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아이린의 작고 앙증맞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곧 그녀의 볼록한 두 볼이 복숭아 빛깔로 변했다.
아이린은 갑자기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걸었다.
자기 심장 보호 차원이랄까?
그의 얼굴을 보면 어쩐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여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나온 그녀의 귀 끝이 불그스름해졌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의 귀를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으윽, 심장 아파! 어떻게 이 세상에 저렇게 귀여운 생물이 있는 거지?’
그는 그녀의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충동을 참았지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이린은 그의 웃음소리에 어깨를 움찔하며 더 고개를 숙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웃음소리를 죽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린의 보폭에, 레온하르트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맞춰서 걷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또각또각.
고요한 정원에 그들의 발걸음 소리만 조용히 들려왔다.
설렜다.
사랑하는 사람과 발걸음을 맞추는 것.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작은 행위였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두근두근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린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쉬움이 담긴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네.”
“하아, 벌써요.”
두 사람 모두 서로만을 신경 쓰고 있느라 벤치까지 온 줄도 몰랐다.
“응.”
아이린은 피크닉 바구니를 슬쩍 보았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가 싸온 점심보다 함께 나란히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니 언제까지 걷기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저렇게 준비해온 정성이 있는데.’
아이린은 그의 손에 들린 바구니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저거 분명 커다란 바구니인데, 왜 이리 작아 보이지?’
피식 웃은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 앉아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휘며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앉을 자리에 얼른 손수건을 펴주었다.
아이린은 순간 다시 빠르게 뛰려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앉았다.
‘후우, 정말 매 순간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면 어쩌라는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자 레온하르트는 피크닉 바구니를 열었다.
바구니 안에서 살짝 김이 나오며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흘러 나왔다.
‘헉. 뭐지, 이 냄새?’
아이린은 본능적으로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아! 이건!”
갓 구운 빵에 양상추 올리브 토마토 등 보기만 해도 신선한 채소.
적당히 녹아있는 모차렐라 치즈.
게다가 얇은 햄이 겹겹이 접혀 재료들을 한가득 둘러싼 샌드위치였다.
아이린은 순간 울컥했다.
맛있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원래 세계에서 즐겨 갔던 샌드위치 체인점의 샌드위치와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소스는 무슨 맛일까? 하긴 무슨 맛이든 저 조합은 맛있을 수밖에 없어!’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린의 눈은 잔뜩 기대에 찼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샌드위치 하나를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음!”
아이린의 도톰한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발사믹 소스다! 모차렐라 치즈, 토마토, 양상추 모든 것에 어울리는 최상의 소스지!’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기분이랄까?
“아이린, 맛있지?”
아이린은 말없이 한입 가득 물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정말 말이 필요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감동과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금세 커다란 샌드위치 하나를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야 말았다.
아이린은 어쩐지 허탈한 마음이 들어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헐, 나 뭐야! 또 정신 나간 것처럼 먹은 거야?’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시선이 레온하르트의 흐릿해진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내 레온하르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천천히 짙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보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그의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묻었네.”
‘뭐가 묻어서 저렇게 빤히 본 거였어? 나 정말 뭐야? 허겁지겁 먹은 것도 모자라 아이처럼 묻히기나 하고.’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로 오른쪽 입술을 문질렀다.
“…닦였어요?”
레온하르트는 더욱 짙어진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검지로 반대편을 문질렀다.
“지금은요?”
레온하르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아니.”
‘윽,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입술만 보이는 거지?’
아이린은 자꾸만 그의 입술이 의식이 되었다.
때문에 그가 앞에 있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려는 찰나.
레온하르트가 손을 뻗어 엄지로 그녀의 입가를 훑고 지나갔다.
순간 놀라서 눈썹을 꿈틀거리던 아이린은 얼음처럼 굳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의 붉은 혀가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살짝 나와 그의 엄지 끝을 핥았다.
아이린은 두 손을 올려 입을 가렸다.
‘흐헉!’
이내 그녀의 얼굴이 잘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