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맛있네.”
순간 아이린은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윽, 심장이야! 이러다 죽겠어! 이런 걸 심쿵사라고 하는 건가?’
아무래도 아이린이 레온하르트의 모든 것들에 익숙해질 날은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매 순간 떨리면서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는 게 아닐까?
아이린은 레온하르트를 대할 때마다 빠져들듯 그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는데. 난 왜…?’
그렇게 남주 레온하르트의 저세상 외모는 점점 더 빛을 발하며 다방면으로 그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욕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이린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맛있는 음식을 바라볼 때의 눈빛과도 흡사했다.
“다시 맛보고 싶다.”
‘뭐야? 저 눈빛은? 맛, 맛보고 싶으면 샌드위치를 먹으면 되지! 왜 나를 보는 건데?’
레온하르트는 마치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라도 된 듯이 지그시 바라봤다.
아이린은 피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의 시선에 묶인 듯 피할 수가 없었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점점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아이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으아, 어떡해?’
레온하르트의 코끝이 그녀의 코끝에 닿는 순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헛기침 소리와 함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이린과 레온하르트는 동시에 눈을 번쩍 뜨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이지와 제이드였다.
아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제이드와 킥킥거리는 데이지를 보자마자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게.”
레온하르트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두 사람, 여긴 어쩐 일이야?”
그때 제이드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쩐 일은. 점심 먹으러 왔지.”
이내 데이지도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점심 먹으러 왔습니다.”
아이린은 그제야 조금 진정되었는지 살짝 발그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 어떻게 같이 오는 거예요? 혹시…?”
그때 데이지가 확 얼굴이 붉어지더니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으음, 그런 게… 뭔데?”
“아 그러니까 이쪽으로 오다 보니 제이드 님을 만났던 것뿐이라고.”
아이린은 그런 데이지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알겠어. 그렇다고 생각할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말고 진짜 그런 거야, 아이린! 응?”
“응, 알겠어.”
제이드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한편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와 데이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엔 직원 식당에 잘만 가더니 오늘따라 왜 이리로 몰려오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을 참고 제이드에게 작게 말했다.
“다른 데 가서 먹지?”
제이드는 아이린의 옆에 앉으며 레온하르트에게 말했다.
“싫은데. 나도 아이린 씨와 점심 먹고 싶은데.”
“뭐? 네가 왜!”
순간 발끈한 레온하르트의 낯빛이 울그락불그락했다.
그때 데이지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오늘은 마침 시간이 나서 아이린과 점심 먹으러 여기로 온 걸요.”
‘어제 하루 종일 고심한 내 데이트 계획이…!’
“윽, 두 사람 정말!’
그렇게 레온하르트는 잔뜩 약이 오른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이린 또한 그의 모습이 귀여워 쿡 하고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배신이라도 당한 듯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큭, 미, 미안해요. 레온이 귀여워서요.”
“뭐, 내가 귀엽다고?”
순간 제이드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 씨,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옆에 있던 데이지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이 욕을 먹는 듯한 찝찝함은?’
레온하르트는 귀엽다는 소리도 황당했지만 아니라는 저 반응이 뭔가 더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고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그가 스스로 귀엽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건 참 그것대로 그야말로 미친 소리 아닌가.
그래서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어?’
그제야 데이지가 아이린의 옆에 앉지 않은 것이 보였다.
마지막 남은 그녀 옆을 사수하기 위해 레온하르트는 몸을 던지듯 아이린 옆에 털썩 앉았다.
이내 그는 데이지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야말로 승자의 미소였다.
데이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제이드 옆에 앉았다.
그때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어? 에드… 2황자 전하!”
‘에드? 아이린이 2황자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에드먼드의 미묘한 표정 변화도 보았다.
2황자라 불릴 때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는 것을.
‘저 아이 성격에 이름을 허락했다고?’
레온하르트는 에드먼드를 바라보다 곧 미간을 찌푸렸다.
레온하르트가 아는 한 에드먼드는 어린 시절부터 사소한 것에도 결벽증이 발동하는 아이였다.
때문에 누군가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게 둘 정도로 말랑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를 함부로 대한 사람들의 말로는 결코 좋은 적이 없었다.
가문이 무너지거나, 목숨이 위태로워지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허락하다니!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이드와 데이지 역시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린과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에드먼드는 그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아이린만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린,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점심 먹고 있었어요.”
“좀 늦은 점심이네.”
아이린은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먼드는 그녀 옆에 있는 바구니를 바라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샌드위치네! 나도 하나만.”
레온하르트와 제이드, 데이지는 순간 얼어붙었다.
어둠세계의 수장, 피의 흑황자로 불리는 2황자 에드먼드였다.
그 엄청난 별명은 흑막인 그의 외가 쪽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그가 어느 상황에서도 웃은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레온하르트는 함께 놀던 어린 시절 이후에 그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두 사람, 언제 저렇게 가까워진 거지? 저 눈빛! …2황자가 아이린을 좋아하고 있어.’
레온하르트는 에드먼드의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 그 눈빛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순간 상념에서 깨었다.
“에드먼드! 그거 내 샌드위치야!”
에드먼드는 샌드위치를 먹으려다 깜짝 놀라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지금 형님이, 내 이름을 부른 거야?’
7살 이후 처음이었다.
레온하르트 또한 자기가 한 말에 놀랐는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아이린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쿡쿡, 다 큰 어른들이 먹는 걸로 싸우는 거예요?”
그녀는 곧 바구니에서 접시와 빵 나이프를 꺼내 샌드위치를 반으로 갈랐다.
“자, 이렇게 반 나눠 드세요.”
레온하르트와 에드먼드는 얼떨결에 그녀가 내민 샌드위치를 받았다.
두 형제는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보다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둘은 밖에서 놀다 배가 고파지면 서로가 숨겨 나온 간식을 이렇게 나눠 먹곤 했다.
멍하게 서 있던 에드먼드는 레온하르트 옆에 털썩 앉아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깨물었다.
레온하르트 또한 그처럼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었다.
두 사람은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제이드와 데이지도 조용히 자신의 점심을 꺼내 먹었다.
두 형제를 바라보던 아이린은 다시 바구니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귀엽게 리본이 묶여진 하얀 종이봉투를 보았다.
그녀는 얼른 봉투를 꺼내 리본을 풀었다. 얇은 종이를 벗겨 내니 초콜릿이 가득 박힌 쿠키가 나왔다.
‘우와, 초콜릿 크기 봐!’
초콜릿 칩 하나하나가 엠엔X 땅콩만 한 크기였다.
그것을 큼지막하게 한 입 깨문 아이린은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촉촉한 쿠키 베이스에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초콜릿이라니!’
바삭하게 부스러지는 쿠키보다 촉촉한 쪽을 선호하는 그녀는 순간 천국을 맛보는 것 같았다.
‘하나 더 먹을까?’
아이린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 며칠 후면 신년제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데.’
아이린이 황태자궁에 들어온 뒤로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사육이라도 하듯 매일 맛있는 음식을 공수해 왔다.
그러다 보니 요즘 부쩍 볼이 통통 해지고 배도 조금 나온 차였다.
평소에야 품도 낙낙하고 색도 어두운 드레스를 입었기에 별로 눈에 띄진 않았다.
하지만 신년제 때는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어야 하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데이지가 바구니에서 쿠키를 하나 더 꺼내 내밀었다.
“먹어, 아이린. 다이어트는 내일부터야.”
“풋, 그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였지.”
아이린이 눈을 질끈 감으며 쿠키를 베어 먹으려는 찰나.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눈을 떴다.
가만 보니 모두 숨죽이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저 기대에 찬 눈빛은 뭐지? 데이지, 넌 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거니?’
아이린은 고개를 잠시 갸웃하며 생각했다.
‘나눠 달라는 건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커다란 쿠키를 부숴서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자, 이거. 먹어 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순간 모두 어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쿠키를 받아먹었다.
이내 아이린은 남은 쿠키를 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맛있죠?”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아이린은 남은 쿠키를 한입에 넣고 오물오물 입을 움직였다.
볼록한 볼이 더욱 부풀어 마치 귀여운 아기 다람쥐 같았다.
그렇게 손바닥만 한 초콜릿 쿠키에 푹 빠진 아이린을 제외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내적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귀여워! 이 방해꾼들만 없었으면 정말 완벽한 데이트였는데.’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지 못한 것에 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정말 완벽한 하루였는데. 왜 다들 여기로 몰려오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귀엽게 볼살이 씰룩이는 아이린을 모며 한숨을 지었다.
‘후우, 아이린과 단둘이 있으려면 어디 여행이라도 가야겠어. 그때는 꼭 저 방해꾼들 몰래 가야지.’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자신의 연애 전선이 험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지 역시 헤벌레 웃으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제이드 님도 좋지만 역시 우리 아이린의 귀여움은 대륙 최강이라니까! 이번 주말에 새롭게 생긴 디저트 샵에 얼른 아이린을 데리고 가야겠어.’
‘아이린 씨. 귀여운 게 꼭 내 동생 먹는 모습과 매우 닮았어.’
제이드는 어쩐지 포기했던 동생 찾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내가 아이린을 포기할 수 있을까?’
사실 에드먼드는 황태자인 형님과 아이린이 사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암흑가의 수장이었던 그였다.
귀족들의 은밀한 정보들을 모으는 것이 기본이었기에 두 사람의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이 늦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친구. 그리고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었다.
물론 욕심이 났다.
‘하지만… 아이린의 저 행복한 미소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아.’
그들은 그렇게 각자의 상념에 빠져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이린은 곧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 나 또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때 데이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먹는 그 쿠키가 맛있어 보여서.”
* * *
신년제의 날이 밝았다.
신년제는 룩스 제국에서 가장 큰 국제적 행사이기에, 직원들은 새벽부터 나와 마지막 점검을 했다.
그들이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건 정오쯤 되었을 때였다.
토마스는 직원 휴게실 소파에 몸을 푹 묻으며 긴 한숨을 지었다.
“하아, 오늘만 잘 지나가면 쉴 수 있어.”
아이린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것 같은 토마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네, 선배님. 몇 시간만 더 버티세요.”
“수습도 오늘 저녁때까지는 외교 사절들 잘 익혀 둬야 하는 거 알지?”
아이린은 경례를 하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넵, 어젯밤까지 완료했습니다.”
토마스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아이린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역시, 수석이야! 제발 오래오래 함께해 주세요, 후배님아. 덕분에 내가 요즘 수면시간이 늘었어.”
아이린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네? 요즘 네다섯 시간밖에 못 주무셨잖아요.”
“이전에는 두 시간밖에 못 잤는걸. 그것도 숙직실에서.”
아이린은 젊디젊은 나이에 사무실에 갇혀 있는 그가 안쓰러웠다.
‘선배님, 연애는요? 결혼은요?’
귀족들과 달리 평민들은 대부분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한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럴 시간도 없어 보였다.
“아마 다른 선배님들도 주말까지 숙직실에서 지내시는 분이 대부분일걸.”
“헉! 정말요?”
‘이러다 다들 노총각 노처녀로 늙어 버리겠어!’
그때 토마스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두 황태자 보좌관실에 전문 인력이 부족한 탓이지.”
“스파이나, 암살자 같은 문제 때문이죠?”
“응, 하지만 연말에 신년제 준비가 겹쳐 정신없을 때는, 스파이든 암살자든 손만 빌려주면 고마울 지경이라니까.”
“네? 그래도 암살자는 좀….”
“나 좀 봐! 이게 사람의 몰골인가.”
‘말은 못 했지만, 좀비에 가까운 몰골이긴 해.’
“이러다 과로사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암살자나 스파이가 두렵겠어? 아니, 오히려 반갑다.”
아이린은 토마스의 몰골과 말에 설득이 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요즘 같으면 차라리 어디 좀 다쳐서 유급 휴직 좀 하고 싶어. 육아 휴직한 실장님이 너무 부럽다니까.”
아이린은 토마스의 얼굴을 짠하게 바라봤다.
‘그나마 난 수습이라 저녁에 퇴근이라도 할 수 있었던 거네.’
아이린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부스럭부스럭 가방에서 무얼 꺼냈다.
“이거 당 떨어질 때 드세요.”
아이린이 내민 것은 속이 비치는 얇은 종이로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토마스는 마치 잘 키운 아이를 보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작은 리본이 우리 수습 닮았네. 잘 먹을게.”
그때 파바박 소리와 함께 토마스의 고개가 팍하고 꺾였다.
“그런 표정은 삼 년 차인 네가 짓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아, 토마스?”
토마스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쥴리언이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으윽, 살살 좀 때려요. 이럴 때 보면 암살자보다 더하다니까!”
토마스는 순간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쥴리언을 바라봤다.
“그런데 쥴리언 선배! 이 복장 뭐예요? 설마, 올해도 신사복을 입고 연회장에 들어가는 거예요?”
쥴리언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것 아냐? 이거 요번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상이야! 신상!”
트랜디한 디자인의 슈트는 샤프한 이미지의 쥴리언에게 매우 잘 어울렸다.
아이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쥴리언 선배, 정말 잘 어울리세요.”
아이린이야 빙의하기 전에도 바지 정장을 입은 커리어우먼들을 많이 봐서 아무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쥴리언처럼 입으면 엄청 편할 거라는 생각에 부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 아이린도 하나 빌려 줄까? 우리 집 드레스룸에 많은데.”
아이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입고는 싶지만 사양할게요.”
쥴리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의적으로 말한 거구나. 사실은 좀 별로인 건가?”
아이린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선배님 정말 예뻐요. 움직임이 편해 보여서 부럽기까지 한걸요.”
“그런데 왜…?”
아이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저는 앞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사는 게 꿈이어서요.”
쥴리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하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네.”
“네, 우리 수습이 지난 3개월 동안 좀 다사다난하게 지냈죠.”
“뭐 다사다난까지야…….”
쥴리언은 짠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사다난 맞아.”
옆에 서 있던 토마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쥴리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이린, 네가 황궁에서 겪은 일들은 내가 지난 7년 동안 근무하면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일이야.”
토마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린이 준 초콜릿의 포장을 벗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건 아무래도 아이린 네가 먹어야 할 것 같아.”
아이린은 초콜릿을 받으며 똑같이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오늘따라 초콜릿이 참 쓰구나.’
아이린은 시계를 보았다.
“선배님, 지금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
그 말에 토마스가 앞장서서 달리며 말했다.
“어, 얼른 가자! 지금 아니면 파티 끝날 때까지 굶을지도 몰라!”
그렇게 그녀는 선배들과 점심을 먹고 잠시 쉬러 방으로 돌아왔다.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면서도 긴장된 마음에 귀빈들의 신상정보를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 순간,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데이지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데이지, 왜 그렇게 뛰어와! 무슨 일 있어?”
“헉헉. 아이린, 아무래도 지금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응? 시간이 없으면 이따 파티에서 만나면 되지.”
데이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그, 이럴 때 보면 바보라니까. 너 드레스 입는 것 도와주러 왔지.”
아이린은 볼을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데이지,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혼자 입나 궁리하고 있었는데. …황태자궁 시녀는 아직 불편해서.”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제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데이지 역시 귀족 출신인 시녀들이 아이린을 잘 대해줄까 걱정스러워 도우러 온 것이었다.
아이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데이지가 아이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 얼른 방으로 가자!”
아이린이 머무는 방으로 도착한 그들은 얼른 드레스를 꺼냈다.
데이지의 도움으로 아이린은 코르셋과 크리놀린을 착용한 후 드레스까지 속전속결로 입었다.
“코르셋을 꽉 조이지는 않았어. 그래도 많이 먹으면 답답할 수 있으니까 적절히 조절해서 먹어.”
“응, 고마워.”
그 순간 데이지는 시계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자, 얼른 이쪽으로 앉아 봐!”
“어? 또 뭐가 남았어?”
“너도 참, 드레스 예쁘게 입었는데 걸맞게 화장을 해야지.”
아이린은 머쓱해 볼을 긁적이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하하, 그렇지.”
데이지는 아이린의 얼굴을 화장수로 적시고 잘 스며들게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파우더를 옅게 펴 바르며 말했다.
“우와! 아이린, 넌 피부가 좋아서 파우더를 얼마 바르지 않아도 되네. 부럽다! 난 겨울 되니까 더 푸석푸석해졌는데.”
“아니야, 데이지는 항상 아름다운걸.”
“후후, 이건 화장발이지. 넌 화장이 필요 없는 자연산 피부고.”
아이린은 얼굴에 대한 칭찬이 어색해 얼굴을 붉혔다.
매일 보는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화장을 안 해도 마치 포토샵 보정이라도 한 듯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엇,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귀여운 아가씨.”
아이린은 살짝 혀끝을 내밀었다.
“미안. 데이지.”
데이지는 아이린의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립 제품을 촉촉하게 발랐다.
“자, 그리고 이건 비장의 무기!”
“응?”
“눈 감아 봐!”
데이지는 색조화장품을 꺼내 아이린의 눈에 그라데이션을 넣었다.
음영까지 넣으니, 눈이 더욱 크고 그윽하게 보였다.
“자, 그리고 이제 머리.”
데이지는 아이린의 머리색과 비슷한 부분 가발을 가방에서 꺼냈다.
“응? 그건 뭐 하려고.”
“너 단발이잖아. 이걸 이용해서 올림머리 하려고.”
데이지는 화장대 거울에 비치는 아이린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근데 아이린, 많이 피곤해 보여. 오늘 새벽부터 힘들었지?”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조금.”
“그럼, 눈 감고 잠시 쉬고 있어.”
아이린은 데이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아이린은 스르륵 눈을 감으며 오늘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정말로 잠이 들고 말았다.
“아이린.”
“으음.”
“일어나 봐. 다 되었어.”
아이린은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어, 어! 미안. 나 많이 잤어?”
“후후, 아니. 얼마 안 잤어. 자, 거울 봐봐!”
아이린은 눈앞의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피부는 평소와 달리 건강한 윤기가 흘렀고, 코럴 계열의 립을 발라 상큼한 과일을 머금은 듯했다.
거기다 눈가와 볼에도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화사하면서도 단아해 보였다.
그리고 입체감도 살아 눈매가 더 짙고 커 보이고, 코도 한층 오뚝해 보였다.
“와아, 데이지 너 완전 능력자다!”
손을 올려 브이를 그리며 씨익 웃던 데이지는 시계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 이제 가야겠다. 이따 봐!”
아이린은 뛰어나가는 데이지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응! 고마워 데이지!”
* * *
줄지어 들어오는 화려한 마차에서 귀빈들이 우아한 걸음으로 내렸다.
신년제에 초대된 인원들은 각 나라의 외교 사절단과 제국의 고위 귀족들, 그리고 황궁의 외교부 직원들이었다.
모인 사람들로 보나 파티의 규모로 보나 여느 파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화려했다.
아이린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연회장을 질린 듯 바라보다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헐, 내가 정말 저 많은 사람을 다 외운 거야?’
아이린은 자신의 앞을 지나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들의 신상정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그 순간 아이린은 이전에 본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속에서 비서 역할의 여주가 파티 초대인들의 신상을 외우는 것을 보고 뜨악했는데.’
그녀는 그때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더니, 역시 사람은 닥치면 다 하는 거였어.’
그때 데이지가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린!”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보았다.
“어, 데이지! 엘리자베스 공주는 어떻게 하고 여기 있어?”
“어떡하긴, 휴게실에 고이 모셔 두고 심부름 왔지. 엘리자베스 공주가 목마르다 해서.”
“그렇구나.”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어?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입장하는 거 아니었어?”
아이린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으윽, 그건 좀 아니라고 봐! 그랬다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파티 음식을 한 점도 못 먹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아이린에게는 첫 파티인데, 함께 입장하고 싶지 않았을까?’
데이지는 주변에 가면을 쓴 듯 거짓된 미소를 짓는 영애들을 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러나 이내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린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뭐… 괜찮으려나?’
“역시 아이린! 파티에 음식 먹으러 왔구나!”
순간 아이린의 양쪽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당연히 파티의 꽃은 음식 아니겠어?”
‘어쩌면 아이린이 가장 파티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후후.’
데이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 나랑 직원 휴게실에서 같이 먹자.”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원 휴게실?”
데이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바보같이, 난 직원 휴게실은 생각도 못 했어. ‘여기에서 벽의 꽃이 되어서 먹는 게 좋을까?’ ‘음식 테이블에 서서 먹는 게 좋을까?’ 엄청나게 고민했거든.”
“뭐?”
데이지는 순간 황당함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이린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데이지 네 덕분에 본격적으로 먹을 수 있겠는걸!”
“풉, 파티에서 음식 생각만 하는 아가씨는 너밖에 없을 거야! 아이린 네 덕분에 웃는다.”
“그래, 웃으면 복이 온다더라. 많이 웃어. 그리고 이따가 10시쯤 시간 괜찮아?”
“10시는 늦지 않아?”
아이린은 연회장 내부의 바글바글한 사람들 쪽으로 쓱 고갯짓하며 말했다.
“지금 돌아가는 것을 보니 그때쯤이나 돼야 좀 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겠네, 황태자 전하 따라다니려면.”
“응, 외국 사절단들과 황태자 전하가 한 번씩 인사만 나눠도 시간이 훅 갈 것 같아.”
“그래도 뭐 괜찮아. 중간마다 시종들이 들고 다니는 핑거 푸드로 조금씩 예열해 놓을 거니까.”
“뭐 예열?”
“응, 빈속에 먹으면 더 많이 못 먹어.”
“큭큭, 너처럼 파티를 전투적으로 먹으러 온 사람은 처음 봐!”
“그럼 더 좋지, 경쟁자들도 줄고. 후후, 아무튼 너랑 직원 휴게실에서 만날 때까지는 많이 먹지 않을 거야.”
데이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이린, 너 그때 작정하고 많이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아이린은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야 당연하지. 내가 업무 지옥에 빠지게 한 신년제를 욕하면서도 기다린 것은 파티 음식 때문인걸!”
데이지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긴 기다릴 만도 하지. 대륙 최고의 요리사들의 만든 회심의 역작들이 대거 등장할 테니까.”
데이지의 말에 아이린은 신이 난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맞아! 내 경쟁자들은 다 새 모이처럼 조금밖에 못 먹겠지만.”
데이지는 그 상황을 상상했는지 파안대소를 하였다.
“푸하핫,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녀들은 코르셋을 너무 조여 물 한 모금 들어갈 틈도 없을 거야.”
그때 아이린이 작은 손을 올려 배를 통통 두드렸다.
“나 이따 휴게실에서 코르셋 풀고 먹을 거야. 말리지 말아줘.”
데이지는 이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나 말리지 마. 나도 오늘은 너처럼 작정하고 먹을 거야.”
“푸하하, 우리 먹을 것에 걸신들린 사람 같아.”
“쿡쿡, 그러게.”
“나 이제 가봐야겠다. 엘리자베스 공주가 기다려서.”
아이린은 뒷걸음질하는 데이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알겠어. 이따가 봐!”
“그래. 이따 봐!”
데이지는 손을 흔들며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한 남자의 목소리가 아이린의 뒤에서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아이린 토트 양.”
아이린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는 아르펜스 백작가의 삼남 세르딕 아르펜스라 합니다.”
넉넉한 외모의 세르딕 아르펜스는 아이린을 향해 두터운 눈을 접으며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참 다른 의미로 심장을 저격하는 미소였다.
아이린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며 치마를 살짝 잡으며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파티가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에게 감히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황태자의 연인, 혹은 최측근이라는 소문 때문에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때 멍청하고 문란한 망나니로 소문난 아르펜스 백작가 삼남 세드릭이 아이린에게 다가왔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떨떠름하게, 어떤 이들은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세르딕 아르펜스는 아이린에게 한쪽 눈을 찡끗하며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아이린 토트 양에게 한눈에 반했습니다. 제 고백을 받아 주십시오.”
아이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헐, 뭐지 자기소개도 없이 갑자기 고백 타임? 그런데 무슨 저런 재수 없는 표정으로 고백을 말하는 거야?’
그의 표정은 마치 ‘내가 고백하는 걸 너는 황송하게 생각해야 해!’라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세르딕 아르펜스는 아이린이 이미 자신의 연인인 것처럼 예의상의 거리도 두지 않고 가까이 다가섰다.
아이린은 깜짝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등에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이런!’
아이린은 도와줄 이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귀족들은 마치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자신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쩌지!’
아이린은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빠져나왔다.
“제가 일이 바빠서 이만.”
그런데 다른 곳으로 피하려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가 느끼하게 웃으며 앞을 막아섰다.
“후후, 그 일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때 2층에서 제이드와 이야기를 나누던 레온하르트가 무심코 연회장 홀을 내려다보았다.
‘뭐지, 저 기름진 돼지 녀석은?’
레온하르트는 그 모습을 본 순간 미간을 구기며 날다시피 그녀가 있는 1층으로 내려왔다.
한걸음에 달려온 그는 아이린의 곁으로 다가서서, 세르딕을 향해 살기를 뿜어내며 으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이건 무슨 일이지?”
그 순간 세르딕 아르펜스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아무리 멍청하다 소문난 그라도 죽음의 위협은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 황태자 전하.”
“내 직원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저 혼자 계시기에 적적하실까 말동무를….”
레온하르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동무라니. 무슨 말동무를 이렇게 가까이 서서 하려는 것이지?”
세드릭 아르펜스는 두려움에 조금씩 뒷걸음을 쳤다.
이내 레온하르트는 그를 향해 눈을 번쩍이며 검집에 손을 천천히 얹었다.
“으앗, 죄, 죄송합니다!”
그 순간 세드릭 아르펜스는 걸음아 나 살려라 연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린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헐, 저 덩치에 엄청난 스피드네.’
그때 레온하르트의 낮은 한숨 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며 들려왔다.
“휴, 한순간도 그대를 혼자 두지는 못하겠어.”
아이린은 어쩐지 미안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레온하르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들며 물었다.
“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니요?”
그 순간 은은한 살구색의 드레스를 입은 아이린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요정 같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그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이린은 이내 수줍음이 묻어나는 어조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대가 오늘 정말 너무….”
아이린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았다.
“예뻐서.”
‘큭, 내가 예쁘다니! 저세상 미모의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라 믿긴 힘들지만, 어쩐지 기분은 좋네.’
아이린은 순간 가슴속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데이지가 꾸며 줄 때 무심한 듯 했지만, 속마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드레스만 하더라도 고르는 데 엄청 고민을 했었다. 그날 드레스샵에서 보내진 드레스는 총 다섯 벌.
원작 여주를 떠올리게 하는 순백의 드레스도 있었고 관능미 가득한 푸른빛의 새틴 드레스도 있었다.
처음에는 푸른빛의 새틴 드레스를 입을까 했으나, 생각해 보니 그와 처음으로 참석하는 파티였다.
그래서 관능미가 있는 새틴 드레스보다 조금은 풋풋하고 소녀스러운 드레스가 마음에 닿았다.
그렇게 고민 끝에 입게 된 것이 지금의 드레스였다.
사실 아이린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레온하르트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분명 성공이었다.
‘다행이야.’
그 순간 아이린은 그를 향해 초승달처럼 눈을 접어 웃었다.
“황태자 전하도 평소보다 더 멋있으신 것 같아요.”
“하하, 정말?”
아이린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모습은 정말 어마무시했다.
평소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던 황금빛 머리는 단정하게 넘겨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그 때문에 그의 아름다움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신년제 준비로 밀려드는 업무 때문에 거칠어 보이던 피부는 오늘따라 반들반들 빛이 났다.
그리고 살짝 야위어 오히려 날렵해진 몸매에 딱 맞는 하얀 제복을 입은 레온하르트.
그야말로 신화에 나오는 남신 같았다.
그녀처럼 그도 신경 쓴 것이었다.
‘그냥 있어도 예쁜데 저렇게 더 예쁘게 꾸미고 올 것은 뭐람. 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아이린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그 순간 부드러운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미간에 닿아왔다.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그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며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평소 꾸미지 않는 모습일 때도 미모에서 빛이 나던 레온하르트였다.
퍼레이드 때 멀리서 보던 모습을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데 부드럽게 닿아오는 손길이라니!
‘으아아! 어떡해!’
아이린은 순간 긴장이 되어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괜찮으신가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가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눈동자로 서 있었다.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눈을 접어 웃었다.
“다행이에요.”
그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 순간 주변에서 한숨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의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살짝 훔치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그 모습에 어쩐지 씁쓸해 멋쩍게 웃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남자가 철벽이라는 것이네.’
원작에선 눈꼬리만 살짝 접어도 여주의 매력에 넘어간다고 묘사되었던 그 미소.
레온하르트는 그 미소를 보는 둥 마는 둥 아이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린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에드먼드가 검정 제복을 입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반가워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아이린을 보지 않고 그대로 엘리자베스 옆에 섰다.
“엘리자베스 공주,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 순간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들을 바라봤다.
‘왜 황후가 엘리자베스 공주를 찾는 거지?’
엘리자베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2황자 전하.”
이내 황태자를 향해 치마를 살짝 올렸다 내린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황태자 전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온하르트도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는지 살짝 미간을 접으며 말했다.
“네, 가 보십시오.”
그리고 그때, 더 이상한 것이 목격되었다.
평소 그 누구도 에스코트하지 않기로 유명한 2황자 에드먼드가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순간 그들 주위로 정적이 흘렀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에드먼드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며칠 전 황후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 * *
“룩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치마가 그녀의 손에 의해 살짝 올라갔다가 꽃처럼 내려왔다.
그 자태는 이루 말할 수 없게 아름다웠다.
황후를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꽃에 비한다면, 엘리자베스는 단아하고 새하얀 백합과도 같아 보였다.
“네가 메르헨에서 온 그 공녀인가?”
엘리자베스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네, 황후 폐하.”
황후는 살짝 손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 보라!”
엘리자베스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황후는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듣던 대로 아름답군.”
엘리자베스는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때 갑자기 차가워진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그대는 황태자에게 마음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닙니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나이 든 하녀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의 방은 위치가 여느 공녀들보다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사용인들의 휴게실이 매우 가까웠다.
하지만 정보에 목마른 그녀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러다 며칠 전 하녀들의 휴게실을 지나가다 듣게 된 내용은 그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나이 든 하녀 둘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황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황후 또한 가문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것을.
“아니라?”
엘리자베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황태자 전하께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황후는 한쪽 입꼬리를 휘며 그녀를 향해 일갈하였다.
“그럼 우리 황족들만 갈 수 있는 사자궁에 황태자가 너를 데리고 간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설마 네년은 메르헨의 스파이인 것이냐?”
‘뭐, 지금 나보고 스파이라고!’
엘리자베스는 황태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는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메르헨의 유력 귀족 하이드 공작가의 금지옥엽 공녀인 엘리자베스였다.
때문에 메르헨 스파이 소리까지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자존심에 실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을 이 상황까지 몰고 간 메르헨 왕궁의 왕과 피오나 공주를 떠올렸다.
‘가만두지 않겠어.’
이내 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황후는 그런 그녀를 번쩍이는 눈빛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냐?”
“전 메르헨 왕국의 스파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에 대한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그럼?”
이내 엘리자베스는 복수에 불타는 눈빛으로 살짝 주먹을 쥐며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황태자 전하를 향한 마음이 아니라 메르헨의 국왕에 대한 복수심 때문입니다.”
황후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 단순히 복수심에 룩스 제국의 황태자에게 접근하였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황후인 내 앞에서 하다니! 넌 목숨이 여러 개인가 보구나.”
엘리자베스는 황후의 살을 에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에 납작 엎드린 채 어깨를 떨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황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르헨 공녀는 일어나서 고개를 들어 보라.”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살짝 고개를 들어 황후를 보았다.
황후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의 진의를 알아보려는 듯 황후의 눈빛이 매서웠다.
거짓이라면 당장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엘리자베스는 긴장되는 마음에 조용히 숨을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모든 게 잘 될 거야. 지금까지 그래 왔잖아.’
그렇게 그녀가 초조하게 주문처럼 잘될 거라는 말을 수십 번은 되뇌고 있을 때였다.
이내 황후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넌 네 조국의 왕을 향해 복수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 복수는 진정 네 아비를 향하는 것이 맞느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메르헨의 왕은 제 아비가 아닙니다.”
황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보았다.
“네가 공주인데 메르헨의 왕이 아비가 아니다? 그럼 넌 누구란 말이냐?”
엘리자베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메르헨 왕국 하이드 공작가의 딸입니다.”
황후는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뭐? 하이드 공작가라고!”
“네”
“허허, 하이드 공작가는 메르헨을 대표하는 가문 아닌가? 그 공작가의 영애가 메르헨 사교계의 꽃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그게 너인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그러합니다.”
“그런데, 어찌 한미한 가문도 아닌, 사교계의 꽃인 네가…?”
황후는 아버지에게 떠밀려 황가에 시집오게 되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황후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하이드 공작가에서 널 강제로 룩스 제국 공녀로 보낸 것인가?”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흑흑, 절대로 아닙니다.”
“뭐? 가문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
“전 메르헨 왕과 그의 딸 피오나 공주의 함정에 빠져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황후는 순간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봤다.
자신도 그녀와 같은 공작가의 공녀였다. 때문에 그녀의 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공작가의 금지옥엽을 부모의 허락 없이 공녀로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 짓을 했다가 귀족 세력이 불만을 품기라도 하면 왕실은 물론 나라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그때 하이드 공작가의 기사들은 무얼 했는가?”
엘리자베스는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기사들이 손쓸 틈이 없었습니다.”
황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손쓸 틈이 없었다니?”
“그들은 제 아버지인 하이드 공작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저의 어머니를 왕궁에 불렀습니다.”
“……!”
“그리고 어머니를 탑에 가두어 놓고 저를 협박하였습니다. 이미 공식적으로 피오나 공주가 공녀에 예정된 상태였기에, 그 누구도 이런 일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가 공녀로 떠나고 메르헨 왕국이 발칵 뒤집혔겠구나.”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황후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하, 메르헨 왕국의 왕은 머저리인가?”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이내 엘리자베스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제가 황태자에게 접근한 것에 정말로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오직 복수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뿐입니다.”
황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진실로 복수 하나 때문에 황태자에게 접근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하하하하.”
황후는 그 순간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이윽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어왔다.
“그래, 메르헨의 공녀. 네 이름이 무엇인가?”
“엘리자베스입니다, 황후 폐하.”
“엘리자베스 하이드 공녀.”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황후의 입에서 메르헨의 공녀가 아닌 그녀의 정식 이름이 나온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황후 폐하.”
황후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다 이내 눈을 접어 호선을 그렸다.
“황태자비보다 내 아들 2황자의 비가 되는 것은 어떠한가?”
엘리자베스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나의 친정 가문은 버나드 공작가이다. 어머니가 평민이라 뒷배가 없는 황태자와 다르지.”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태자의 어머니, 전 황후가 평민이었어?’
하지만 이내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황후를 바라봤다.
황후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내 아들, 2황자 에드먼드의 비가 된다면 너는 복수의 길에 좀 더 빠르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
“대신, 너는 내 눈과 귀가 되고 손과 발이 되어라. 그리고 네 복수가 이뤄지는 날. 메르헨 왕국을 나에게 바쳐라.”
엘리자베스는 순응하는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후 폐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 * *
“아르펜스 가의 삼남! 가만두면 안 되겠군.”
에드먼드는 아이린의 곤란한 상황을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뛰어들어 기름기 줄줄 흐르는 아르펜스 가 삼남을 끌고 나와 그대로 불에 던져 넣고 싶었다.
하지만 화장실을 갈 때 빼곤 파티 내내 황후가 붙인 감시자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황후가 알게 되면 아이린이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상황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 녀석이 아이린을 희롱한다면!’
그는 당장 독침을 쏴서 죽이겠다고 생각하며 이를 앙다물었다.
잠시 후 다행히도 형님인 황태자가 아이린을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주는 것이 보였다.
에드먼드는 어쩐지 레온하르트가 부러워졌다.
‘백마 탄 왕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흑기사만큼은 내가 하고 싶었는데.’
그 순간 자신의 가슴을 멎게 했던 아이린의 그 눈웃음이 레온하르트를 향하는 것도 보였다.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때 에드먼드의 상념을 깨고 옆에서 함께 서 있던 엘리자베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껏 온화한 눈빛을 흩뿌리면서.
에드먼드는 엘리자베스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메르헨에서 온 공녀, 엘리자베스 하이드.
사실 진짜 공주는 아니지만, 메르헨 사교계의 꽃으로 통하는 공작 영애라고 부하들에게 들었다.
그리고 메르헨 공녀의 신분에도 룩스 제국의 영애들 사이에 가장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는 여인이라 했다.
황후는 어제 그를 불러 엘리자베스 공주를 신년제 때 그의 약혼자로 발표할 것이라 했다.
에드먼드는 순간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린이 황태자와 함께할 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 대한 마음은 반쯤 접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벌써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어머니인 황후를 닮은 이와는.
그때 시종이 와서 황후의 메시지를 전했다.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같이 오라는 전갈이었다.
에드먼드는 아이린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다 이내 엘리자베스가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뭘 꾸미는 것일까?’
어쩐지 엘리자베스의 미소를 보니 어쩐지 불안했다. 무엇을 이룬 것 같은 승리자의 미소랄까?
황후인 어머니도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 저런 미소를 짓곤 했다.
전 황후 폐하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랬다.
‘엘리자베스 하이드. 그 미소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지?’
에드먼드가 보기에 엘리자베스는 꽃같이 미소를 지으며 등 뒤로는 비수를 숨기고 있는 독사 같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의 불길한 눈빛이 아이린을 향하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아이린을 지키기 위해서는 꺼림칙해도 엘리자베스 옆에 붙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먼드는 이내 표정을 굳히며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아이린이 자신에게 인사하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아이린을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드는 그 순간 심장이 옥죄어왔다.
‘윽, 엘리자베스. 너 때문에 내가 아이린과…!’
곧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해 나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와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을 거다.”
엘리자베스는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제가 뭘 원했는지 알지도 못하시면서 단정하지 마십시오.”
에드먼드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단정하지 마라? 후후.”
웃고는 있지만 음험하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정말 하룻강아지처럼 아무것도 모르는가 보군.”
순간 동요한 듯, 엘리자베스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에드먼드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내 차갑게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내 손을 잡은 영애들은 하나 같이 가문이 박살 났지.”
엘리자베스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이린 토트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넌 살려서 네 나라로 보내주겠다.”
엘리자베스는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짓다 갈무리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토트. 후후, 또 아이린 토트군요. 도대체 그 평민 계집애가 무엇이길래 두 황자 전하께서 이렇게 목을 매시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을 들은 에드먼드의 눈빛이 생각에 빠진 듯 가라앉았다.
“‘무엇’이라? …나 또한 그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너와는 다른 진실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지.”
엘리자베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와 다른 진실한 여인? 보통 남자들은 진실을 좋아하지 않던데, 두 황자 전하는 그런 것이 취향이신가 보군요.”
“…….”
“그런데 그 약속은 지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뭐?”
“이미 황후 폐하의 손과 발이 된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도 내 말을 따르는 것이 네 신상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후후, 고국을 떠나 온 지 한 달 남짓인데 내 목숨은 벌써 바람 앞에 흔들거리는 촛불과도 같군.’
“그럼 전 2황자 전하의 말을 들으면 황후 폐하에게 죽고. 듣지 않으면 2황자 전하에게 죽겠군요.”
“…….”
“어차피 죽는다면 저와 합당한 거래를 해주신 황후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을 끝내며 그의 손을 놓고 앞서 걸음을 옮겼다.
* * *
“룩스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아이린이 황태자 옆을 함께 걸으며 작게 속삭였다.
“모르간 왕국의 외교부 차장 프란츠 공작입니다.”
모르간 왕국은 메르헨 왕국보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나라로, 룩스 제국과 국경이 맞닿은 왕국이었다.
“아, 모르간 왕국의 이번에 임명된 외교부 차장이시군요.”
“하하, 지난 차장님을 수행했던 절 알아보시다니 정말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셨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어떻게 잊겠습니까? 모르간 왕국에서 이곳까지 좋은 평판이 들려오던 프란츠 공작을요.”
“하하, 감사합니다.”
“지난해 모르간 왕국의 밀이 대풍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좋으셨겠습니다.”
“네, 저희 모르간의 신께서 비옥한 대지를 주신 은혜 덕분이지요.”
“그런데 그 밀이 주변 국가에 수출하고도 왕국 창고에 남아돌아 처치 곤란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하.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번에 그 문제를 타개하고자 이번 신년제 후에 제국에서 열릴 국제회의에 상정하려 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제가 의논드릴 일이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요?”
“네, 저희 북쪽 국경 지역에 그 밀을 팔아 주셨으면 합니다.”
황태자의 말에 프란츠 공작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저도 그 생각은 해보았지만 어려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지역으로 가는 것은 돈이든 물건이든 죄다 그곳 영주 피도르 후작 주머니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예전엔 그랬지요. 하지만 그 영주가 이번에 노예시장을 운영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임시로 영주 대행을 맡고 있고요.”
“네? 황태자 전하께서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국가재난지원금을 바로 피도르 영지로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모르간 왕국에서 밀을 사서 보내는 방법을 취하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좋은 방법이군요. 국경 지역까지만 가지러 오신다면 모르간 왕국에서 밀을 룩스 제국에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것은 신년제 이후에 협의……!”
그때 대 연회장의 중앙 단상 입구에서 웅장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시종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룩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와 룩스 제국의 달 황후 폐하가 듭십니다!”
파티가 무르익기 시작하며 시끌벅적했던 황궁 대연회장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파티의 귀빈인 각국의 외교관들과 룩스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황제는 황후를 에스코트하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곧 룩스 제국의 황제와 황후의 자리가 마련된 단상에 도착하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드시오.”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도 룩스 제국의 신년제에 찾아 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오. 모쪼록 신년제 기간 동안 룩스 제국에서 마음껏 즐겨 주시고, 귀빈 여러분 모두 행복한 한 해를 시작하길 바라는 바요.”
그렇게 황제의 간단한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와 황후는 그에 맞춰 환하게 웃으며 그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대 황제가 황궁 악단을 향해 손을 올려 신호를 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던 대연회장을 흥겨운 음악이 채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