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0)

17.

“황태자 전하께선 첫 번째 춤을 누구와 추실까요?”

“글쎄요. 황제파 집안 영애 중 한 명이겠죠? 누굴까요?”

“저는 2황자 전하의 상대가 궁금합니다.”

“저도요. ‘차가운 수도의 미남자’로 통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피도르 후작 영애일까요?”

“아닐 거예요. 작년에 보셨잖아요. 2황자 전하께 뿌리침을 당했던 것 벌써 잊으셨어요?”

“흠흠, 조용하세요. 저쪽에 걸어오네요.”

그때 한 영애가 조용히 속삭였다.

히아신스 백작 영애였다.

“‘차가운 수도의 미남자’라면 제이드 보좌관님도 빼놓을 수 없지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얼마 전만 해도 따뜻한 훈남이셨는데 이제는 2황자 전하와 함께 냉미남으로 회자 되다니!”

“전 그래서 더 좋은걸요?”

히아신스는 피도르 후작에게서 구출되었을 때, 회장을 정리하던 제이드가 자신에게 겉옷을 덮어준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우와! 제이드 님! 그날도 한 미모 하셨는데 저렇게 입으시니 심장이 녹을 것 같아! 어머님께서 이번 신년제는 쉬라고 하셨는데 그냥 나오길 잘했어.’

그때였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각자의 파트너를 찾아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아이린은 이때다 하며 소란스러움을 피해 변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에는 춤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목을 축이고 있었다.

아이린은 벽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으아, 힐 신고 비서관 임무라니. 발바닥이 타는 것 같아.’

평소 낮은 굽만 선호하는 그녀였기에 오랜 시간 힐을 신고 서 있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힐을 잠시 벗고 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발이 너무 부어 다시 신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레온하르트와 에드먼드 그리고 제이드의 첫 춤 상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게, 누굴까?’

아이린이 레온하르트와 연인이긴 했지만, 아직 그 사실을 공개하진 않았다.

그 때문에 아이린도 레온하르트의 파트너가 궁금했다.

그 순간 그녀의 주변이 일순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지? 왜 이리 조용한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그녀의 주변의 사람들이 다 어딘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이 홍해가 갈리듯 길이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로 레온하르트가 제이드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린, 여기 있었어? 찾아다니느라 연회장을 다 돌아다녔어!”

그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여인은 누구지?”

“왜 있잖아, 이번에 새로 뽑힌 황태자 보좌관실 직원.”

“뭐? 보좌관실 직원?”

“그런데 보좌관실 말단 직원이 파티에는 어떻게 참석한 거래?”

“듣기로는 임시 비서관 업무를 맡고 있다는데.”

“그래?”

아이린은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주변에 순간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

‘으윽, 레온 정말. 내 ‘가는 실 라이프’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아이린은 이런 상황을 미리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막상 겪으면 담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평범한 일반인인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매우 벅찬 일이었다.

사람들의 눈빛을 보니, 웬만한 아이돌이 받을 만한 관심 그 이상이었다.

그와 사귄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나는 아이린이었다.

‘우리가 사귄다는 것을 지금 사람들이 알면… 나 오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이린은 그 순간 두려워졌다.

아이린은 레온하르트를 향해 살짝 고갯짓을 했다.

‘에비, 지금 오지 마! 오지 마라니까!’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의 신호의 의미를 눈치 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한걸음에 다가갔다.

‘어쩌지?’

아이린의 머릿속엔 얼른 이 상황을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얼른 그들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하이힐 때문인지 몸이 옆으로 휘청였다.

거기다 무거운 크리놀린까지 착용한 상황이라, 아이린의 몸은 중심을 잃으며 그대로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어어, 레온하르트의 연인이라고 돌 맞아 죽을 줄 알았는데. 나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수치사하는 건가?’

아이린은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더는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아 왔다.

아이린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온, 황태자 전하!”

그냥 올려다보면 고개가 뻐근할 정도로 커다란 레온하르트의 키가 그녀의 눈높이로 낮춰져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다행히 사람들 앞에서 바닥과 뽀뽀하는 수치사는 면했다.

그러나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게 문제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얼음이 된 그녀를 똑바로 일으켜 주며 물었다.

“아이린, 괜찮아?”

옆에 있던 제이드도 제법 놀랐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아이린 씨!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괜, 괜찮아요.”

사람들은 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황태자 전하가 허리를 감아올렸어!”

“제이드 님이 팔을 부축하고 있어!”

그때 레온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아이린, 이곳에 있으면 더 시끄러워질걸. 이제 그만 날 피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나와 첫 춤을 추는 게 어떻겠어.”

아이린은 폭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이드는 아이린을 부축했던 손을 놓으며 싱긋 웃었다.

“그럼, 두 번째 춤은 저와 추시는 걸로.”

‘으악, 제이드 너까지! 날 두 번 죽이려는 거니!’

그 순간 주변의 서 있는 영애들의 험악한 표정이 보였다.

아이린은 위기를 느끼며 그를 불렀다.

“제이드 님!”

레온하르트 또한 분한 듯 그를 불렀다.

“제이드!”

제이드는 두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모습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란 남자의 파급력이란!’

그들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제이드가 속삭였다.

“아이린 씨, 제가 얼른 업무 보러 갈 수 있게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제이드의 눈빛에는 첫 춤만 추고 바로 가서 일만 할 거라는 투지가 담겨 있었다.

아이린은 황태자 옆에서 그를 도와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던 것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각국 귀빈들이 오는 신년제라 외교관들과 이야기할 것이 많겠지.’

레온하르트도 이내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잠시 모르간 왕국 외교부 차장을 만나고 있겠습니다.”

제이드는 사람들을 향해 비켜 달라는 듯 살짝 묵례하며 인파를 가르고 빠져 나갔다.

그때였다.

대연회장 안에 다시 다음 곡을 알리는 전주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그녀가 연습한 왈츠곡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악단을 바라보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린, 이제 다음 곡이 시작되려고 해.”

레온하르트는 이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 저에게 그대의 첫 춤을 함께 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아이린은 그의 커다란 손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으며 활짝 웃었다.

“네, 기꺼이.”

두 사람은 사람들의 관심의 눈길을 받으며 연회장 중앙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2황자 에드먼드와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에드먼드는 순간 아이린을 보고 멈칫했지만, 곧 엘리자베스를 이끌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어 레온하르트와 아이린도 곡에 맞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춤을 추며 주변을 흘끔 보았다.

연회장 곳곳에서 방울꽃처럼 둥글게 퍼진 드레스가 아름답게 춤을 추는 것이 장관이었다.

‘와,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그때 레온하르트가 살짝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제 나에게 좀 집중하지.”

아이린은 멋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혹시 알고 있나요, 귀여운 아가씨? 지금이 우리에게 또다시 오지 않을 첫 춤이란 걸.”

‘아, 그래 레온과 나의 첫 춤.’

아이린은 순간 그의 단단한 팔과 손이 의식되어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후후, 이제야 떠올랐나 보네. 그래, 아이린.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하는 모든 것은 다 처음이야.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처음.”

그 순간 아이린은 뭔가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어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한가득 그를 담으려는 듯 지그시 그를 보았다.

‘그래요. 당신과 나의 아름다운 처음이네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동안 그들의 첫 춤은 끝이 났다.

아이린은 속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하,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었어.’

누가 지금 그 말을 들으면 할머니 같다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영으로서의 지난 삶이 끝났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아이린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

룩스 제국에 온 지 1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가끔은 지금이 죽고 난 후 두 번째 삶이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더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아름다운 추억들을 사람 하는 사람과 함께 많이 남기면서.

그때 그녀의 상념을 깨고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씨, 이제 저와 함께 추실까요?”

제이드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는 순간 등에서 소름이 올라왔다.

아이린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헐, 맹수의 눈빛!’

주변 영애들 모두가 불타오르는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당장 저 눈빛에 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름다운 추억이 생겼으니 죽어도 여한이… 많다고! 이제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죽을 수는 없지!’

그녀는 눈을 딱 감고 제이드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래도 최애와 추는데 실눈이라도 떠야지!’

제이드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웠는지 그녀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이드와의 춤이 끝난 후, 아이린은 다시 벽 한쪽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를 그곳까지 데려다 준 제이드는 또 다른 나라의 외교관을 만나러 간다며 손을 흔들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레온은 어디 있지?’

레온하르트 또한 다르지 않은지 메르헨 왕국의 외교관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린은 비서관으로써 그에게 가야 했지만 하이힐에 갇힌 발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소녀 한명이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 있다!”

“어디?”

아이린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한 무리의 영애들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쩌지, 피해야 하나?’

아이린은 안절부절못하며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한 상태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아이린 토트 양.”

“네, 안녕하세요. 피에르 백작 영애.”

“흥, 그대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군요.”

“네?”

“비서관의 업무를 보러왔으면 업무만 볼 것이지 황태자 전하에 이어 제이드 영식과의 첫 춤도 앗아가다니요.”

“우리가 1년 동안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는데!”

“헉, 1년이나요?”

“그래요, 신년제가 두 분이 유일하게 참석하는 파티라고요.”

‘헉, 나 정말 잘못했네. 대역 죄인이네.’

“흑흑, 이번에는 내 차례였는데.”

영애들은 사실 그들끼리 남몰래 순번을 정해두고 레온하르트와 제이드의 첫 춤 상대가 되고 있었다.

본래 이번에 레온하르트와 춤출 차례였던 영애가 눈물을 흘렸다.

곧 주변의 영애들이 그녀를 위로하며 아이린을 쏘아봤다.

그때 한 영애가 분을 참지 못했는지 지나가던 시종이 든 쟁반 위의 물 잔을 들더니 그대로 그녀에게 뿌렸다.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이린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 뭐지? 왜 물에 젖지 않지?’

아이린은 시간이 지나도 젖는 느낌이 들지 않아 실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하늘빛의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물에 맞아 홀딱 젖은 채 서 있었다.

“어머!”

아이린은 얼른 벌떡 일어났다.

다들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 말문을 잇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얼른 손수건을 꺼내 그 영애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아이린은 그제야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어, 매리?”

“아이린 언니!”

“어떻게 해! 많이 차갑지!”

그때 아이린에게 물을 뿌리려던 영애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히아신스 백작 영애!”

매리 히아신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아하게 고개를 들며 그 영애를 향해 말했다.

“해밀턴 남작 영애, 각국의 귀빈들이 참석한 신년제 중에 이런 행동을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게 제 잘못이 아니라….”

“잘못이 아니라니요. 당신은 물을 뿌렸고 나는 맞았습니다. 그럼 누가 잘못한 걸까요?”

그때 옆에 서 있던 매리 히아신스 백작 영애의 무리들이 한 마디씩 그녀를 거들었다.

“그래요. 가만히 쉬고 있는 황궁 직원에게 물을 뿌리려 하다니! 같은 룩스 제국의 귀족으로서 정말 부끄럽군요.”

“죄송합니다.”

“나 말고, 여기 아이린 토트 양에게 사과하세요.”

그 순간 해밀턴 남작 영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분한 것인지 부끄러운 것인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그녀는 입만 달싹였다.

“뭐하시는 겁니까? 사과를 하지 않으신다면 소란을 피운 죄로 당장 황궁 기사를 부르겠습니다.”

해밀턴 남작 영애 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매리를 바라봤다.

“황궁 기사를요?”

“네, 전 히아신스 백작 가문의 영애로서 당신을 고발할 것입니다.”

그 말에 피에르 백작 영애가 해밀턴 남작 영애 곁으로 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내 해밀턴 남작 영애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이린 토트 양. 죄송합니다.”

그때 피에르 백작 영애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자, 이제 사과도 했으니 가도 되겠지요.”

피에르 백작 영애 무리가 자리를 피하려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매리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리세요.”

피에르 백작 영애는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네? 또 무슨 볼일이 남으셨습니까?”

매리 히아신스가 눈을 예쁘게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하나 생각나서요.”

“……?”

매리는 피에르 백작 영애 뒤에 있는 해밀턴 남작 영애를 보며 말을 이었다.

“황궁 직원도 아니고 남작 영애인데 어떻게 황궁 신년제 파티까지 오실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그게, 저.”

해밀턴 남작 영애는 친구인 피에르 백작 영애를 흘끔 보았다.

그때 매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피에르 백작 영애랑 함께 온 듯한데. 피에르 영애, 함께 온 이들을 잘 단속하시길 바랍니다.”

피에르 백작 영애는 자신이 데려온 해밀턴 남작 영애를 쏘아 보고는 무리를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해밀턴 남작 영애는 매리와 그 주변 영애들에게 묵례를 하며 그들의 뒤를 따라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감사합니다. 매리 히아신스 백작 영애.”

“언니, 갑자기 말을 높이고 그래.”

아이린은 메리 히아신스 주변의 영애들을 흘끔 보며 말했다.

“그래도 여긴 황궁이고 다른 귀족 분들도 계신데.”

“칫,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그리고 여기 모두 내 친구들이야.”

“언니,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 하도 들었더니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지 않아!”

매리 히아신스는 아이린을 향해 씨익 웃었다.

아이린은 매리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매리… 저 애들에게 뭐라고 했기에 눈빛이 저러니?’

아니나 다를까? 하나같이 그녀를 우상처럼 바라보았다.

그때 매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며 말했다.

“언니, 더 함께 있고 싶은데 어머니가 보기 전에 옷 갈아입으러 가야겠어.”

“어, 그래. 춥겠다. 어서 가. 오늘 정말 고마웠어.”

매리가 아이린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응, 다음에 연락할게. 우리 집에 놀러 와!”

아이린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이내 매리와 함께 온 영애들도 그녀를 향해 웃으며 묵례를 하고 매리의 뒤를 따랐다.

‘허허, 너무 조용하니 이상한 걸.’

매리와 피에르 백작 영애가 휩쓸고 간 자리에 사람이 한산했다.

몇몇은 멀리서 그녀를 보며 소곤거리기도 했지만 다가오진 않았다.

아이린은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에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배고프다. 뭐래도 먹고 다시 레온을 도와주러 가야겠어.’

때마침 데이지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내 데이지는 손짓을 하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직원 휴게실.”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그렇게 데이지를 뒤따라 15분쯤 걸어가니,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외진 곳이 나왔다.

에 ‘직원 휴게실’이라는 팻말과 함께 데이지가 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구나!’

아이린은 좀 더 속도를 내어 그곳으로 갔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의 폐부에 온갖 맛있는 냄새가 가득 찼다.

직원휴게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갓 구워진 빵과 스테이크, 수프, 그리고 디저트까지 한곳에 모여 있었다.

‘와! 패밀리 레스토랑 같네!’

아이린은 푸짐하고 맛있는 저녁에 환하게 웃으며 데이지를 바라봤다.

“아이린, 이리 와. 옷 갈아입는 것 도와줄게.”

“옷을 갈아입어?”

“응, 황태자 전하께서 이제 만나야 할 사람은 대부분 만났다며, 퇴근해도 된다고 전해 주라 하셨어.”

“휴우, 다행이다.”

아이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힐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데이지가 얼른 굽 낮은 구두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후후. 자, 이거 신어.”

아이린은 발이 뜨거운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아니, 이따 신을래. 나 지금 발이 퉁퉁 부어 막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아이린의 말에 데이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옷은 갈아입자. 너 아까 이거 먹으려고 코르셋 푼다며.”

그녀의 말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그래. 내가 이 음식 때문에 신년제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데이지는 아이린의 크리놀린과 코르셋을 풀어주며 간편한 옷을 주었다.

몸이 좀 편안해진 아이린은 데이지를 꼭 껴안았다.

“우와, 이제 살 것 같다. 고마워. 역시 데이지 너밖에 없어.”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이 귀여워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린, 이러다 음식 다 식겠다.”

“응, 얼른 먹자.”

아이린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쓱쓱 썰어 한입에 넣었다.

“으음, 맛있어!”

“정말, 와… 황궁에 납품하는 소고기가 다르긴 다르네.”

“그러게, 이런 맛이 날 수 있다니. 소가 다 같은 소가 아닌가 봐.”

“아이린, 여기 주스도 마셔가며 먹어.”

아이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건 스테이크에 대한 모독이야! 끝까지 스테이크와 가니시만 즐기며 가야 한다구.”

“큭큭, 그래. 아, 맞다. 너 황태자 전하뿐만 아니라 제이드 님과도 첫 춤을 췄다며? 제이드 님과 첫 춤이라니, 아이린 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하하, 이런 것을 성덕이라고 하지!’

아이린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조용히 쿡쿡 웃었다.

“뭐야? 그렇게 웃지만 말고 빨리 이야기 좀 풀어봐!”

“그게, 말이야….”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소녀가 들어왔다.

소녀는 거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누구지?’

그 순간 옆에 있는 데이지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데이지, 갑자기 왜 그래?”

데이지는 아이린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삭였다.

“피도르 후작 영애야!”

“여기 있었군, 아이린 토트.”

“이곳은 직원 휴게실입니다.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이니 나가 주십시오.”

“허허, 뭐라고. 지금 감히 나에게 나가라고 한 것인가?”

“네, 나가라고 했습니다. 나이도 어리신데 벌써 귀가 안 들리시나 봅니다.”

메리 피도르는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화가 났는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진 얼굴로 그녀를 향해 삿대질을 하였다.

“너, 너!”

‘소문으로는 어마 무시했는데, 이렇게 보니 어린 소녀로군. 얼른 보내고 스테이크나 마저 먹어야겠다.’

아이린은 그녀를 향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식사 중이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옆에 서 있던 데이지가 깜짝 놀라 어깨를 떨며 아이린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아이린, 어쩌려고 그래?’

그 순간 메리 피도르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지금 나 피도르 후작 영애에게 덤벼드는 거야?”

“하하, 덤벼들다니. 생각하는 것도 유치하십니다.”

피도르 후작 영애는 잠시 이를 앙다물다가 이내 그녀를 비웃었다.

“후후, 정말 가소롭구나!”

메리 피도르는 이내 아이린의 가슴 위쪽을 검지로 툭툭 찌르며 말했다.

“너 말이야. 내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지?”

‘어린 게 어디서 이런 것부터 배워 가지고.’

아이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검지를 탁 쳐내었다.

“잘 듣고 있습니다. 소문에 멍멍이 같은 짓을 많이 하신다던데. 직접 보니…. 으음, 비교된 강아지가 불쌍하네요.”

피도르 후작 영애는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뭐? 너 내가 누군 줄 몰라? 나 피도르야! 네가 요즘 황태자와 같이 다니더니 날 우습게 아는구나!”

‘큭큭. 뭐지, 이 진상 손님 같은 멘트는? 그런데… 얼굴이 참 악녀 같지 않고 귀엽네.’

악독한 말을 중2병 걸린 애처럼 마구 뱉어내고 있지만 생긴 것은 귀여운 강아지 상이었다.

아이린은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내고는, 웃음기 어린 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무서워라. 제가 뭐라고 황태자 전하를 믿고 그러겠습니까? 그 어마무시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피도르 가문 덕분에 정신이 개조되었는걸요. 매우….”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숙여 피도르 후작 영애 귓가에 속삭였다.

“지랄 맞게 말이야.”

피도르 후작 영애는 순간 당황한 눈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이렇게 발칙하게 말한 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그녀를 보면 두려워하며 피하거나 복종했으니까.

피도르 후작 영애는 곧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후후, 재미있네. 그래 너, 망아지처럼 어디 날뛰어봐. 한 번 놀아는 줄게.”

아이린은 의기양양한 메리 피도르를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그래요, 놀아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럼 신나게 한 번 날뛰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날뛰다 보면 눈앞에 얼쩡거리는 독사 한 마리 정도는 밟을 것 같습니다만.”

메리 피도르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뭐라고!”

아이린은 흥분한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지 조용히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식사 중이라서요. 나중에 또 찾아 주시면 그때는 놀아 드리겠습니다.”

메리 피도르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그녀는 아이린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너, 너! 정말!”

아이린은 그런 메리 피도르를 향해 심드렁하게 말했다.

“참! 그리고 후작가로 돌아가시거든 박하차 좀 끓여 마시도록 하십시오. 심신 안정에 매우 좋다고 합니다.”

그때 메리 피도르가 휴게실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들어오지 않고 뭐하는 거야!”

그때 문밖에서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쿵쿵쿵쿵 들어왔다.

아이린은 스테이크 조각 하나를 들어 입안에 넣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후우, 하나 가면 하나가 오는구나. 그런데 난 이 상황에서 왜 이리 맛있니?’

그러나 그녀 옆에 데이지는 놀랐는지 아이린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아, 아이린, 어떡해?”

이내 아이린은 의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여기 황궁 안이야. 아무리 황궁 기사라도 황궁 직원인 나를 이유 없이 함부로 잡아갈 수는 없을 거야.”

‘그래, 황후에게 끌려갔을 때도 아무 이유 없이 끌려갔기에 빠져나올 수 있었지.’

그리고 그 순간 위험할 때마다 지켜준 레온하르트가 생각났다.

‘이제 나 혼자도 아니고 말이야. 후후.’

그때 메리 피도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하하, 그럴까?”

콰당.

큰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무리의 기사들이 직원 휴게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전에 같았으면 두려워 덜덜 떨며 도망갈 궁리를 했을 그녀였다.

하지만 피도르 후작의 그 험악한 덩치들에게도 잡혀 갔다 온 뒤로는 어쩐지 무서움이 덜했다.

아이린은 담담한 얼굴로 스테이크와 가니시를 한 번에 찍어 입에 넣고 음미했다.

‘나도 담이 제법 커졌나 봐. 이 상황에서도 스테이크가 입에서 살살 녹는구나! 황궁 요리사 최고!’

데이지는 한껏 여유를 부리는 아이린의 행동에 초조함이 몰려왔다.

“아이린. 황궁 기사들이야! 내가 가서 황태자 전하를 불러올게.”

데이지는 벌떡 일어나 휴게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황궁 기사들에게 막히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가실 수 없습니다.”

아이린은 천천히 입안에 음식을 다 삼키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휴게실을 왜 나갈 수 없다는 건가요?”

그때 가장 앞에선 기사가 말했다.

“아이린 토트 양, 당신을 절도 혐의로 체포합니다.”

아이린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절도 혐의라니요?”

데이지는 아이린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아이린은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때 기사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방에서 보석이 없어졌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요?”

“그 방에 아무도 없을 때 들어간 사람은 아이린 토트 양 뿐이라며 한 시녀가 증언했습니다.”

아이린은 자신을 방까지 안내해준 시녀를 떠올렸다.

그때 기사들이 데이지를 옆으로 끌어내고 아이린에게 다가섰다.

“자, 가시죠.”

아이린은 일진이 순탄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내 기사 둘이 범죄자처럼 그녀의 양팔을 그러잡았다.

데이지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기사의 팔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러나 기사들은 데이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무시하며 아이린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데이지는 기사들의 힘에 옆으로 쓰러졌다.

“으윽!”

아이린은 놀라 소리쳤다.

“데이지, 괜찮아?”

데이지는 고개를 저으며 이를 앙다물고 일어섰다.

그녀는 이내 다리를 절뚝이며 아이린을 끌고 나가려는 기사들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절대로 아이린을 데려갈 수 없습니다.”

기사들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 또한 기사도를 따르는 황궁 기사단이었다.

그 때문에 어린 영애들을 함부로 다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앞장섰던 기사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상관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이 이상 지체되면 저희도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린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데이지, 난 괜찮으니 비켜 드려.”

데이지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아이린은 그런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기사님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우리 같은 말단 직원들은 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잖아.”

“후우, 알겠어.”

데이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기사들은 이내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 중 그들 앞에 섰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정중하게 모셔라.”

“네!”

이내 기사들은 그녀의 팔을 놓고 절도 있게 옆으로 섰다.

데이지는 그제야 긴장된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아이린,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아이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 안 해. 내 걱정 말고 넌 얼른 의무실로 가봐. 아까 발목 접질린 것 같던데.”

그때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이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부탁드려요.”

“아이린!”

데이지는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도 아이린이 걱정되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그런 데이지를 향해 얼른 손을 흔들었다.

“얼른 가서 치료받고, 맛난 사식 들고 놀러 와!”

아이린은 이내 테이블 위에 화려한 음식들을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파티 음식이었는데. 다 먹지도 못하고!’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후, 알겠어. 이따 파티 음식 싸들고 갈게.”

데이지는 그렇게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의무실로 향했다.

아이린은 이내 에스코트 받는 영애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양옆에 선 기사들을 바라봤다.

“기사님들, 우리도 갈까요?”

기사들은 이 상황에도 의연한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윽고 기사 무리의 대장이 입을 열었다.

“가자!”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피도르 후작 영애에게 살짝 묵례하며 밖으로 나섰다.

그들이 밖으로 나간 후.

직원 휴게실 안에 혼자 남아있던 메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닫힌 문을 바라봤다.

“뭐지? 분명 저것이 기사들에게 끌려갔는데. 왜 이렇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거지?”

메리 피도르는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까 그것이 나갈 때까지 이것을 바라봤지.’

그녀는 테이블 위의 음식을 팔로 모조리 쓸어버렸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음식들이 아이린을 보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호호호, 너도 곧 이렇게 만들어 주겠어.”

그때였다.

누군가 휴게실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황태자와 그의 보좌관 제이드였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메리 피도르는 순간 살기를 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제,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십니까?”

“아이린은 어디 있나?”

“조금 전, 황궁 기사단이 데리고 갔습니다. 황궁 직원 아이린 토트에게 절도 혐의가 있다면서요.”

“그런데 피도르 영애는 그걸 보고만 있었나?”

“네, 제가 한 것이라고는 저 음식들을 쓸어버린 것 밖에 없습니다.”

“아하, 그래? 이곳은 황궁 직원을 위한 휴게실이다. 그럼 황궁 직원도 아닌 이가 휴게실에 들어와 황궁 기물을 파손했다는 말이로군.”

“황태자 전하, 그건 황궁 기물 손괴죄에 해당합니다.”

“그렇지? 어서 기사단을 불러 죄인을 끌고 가도록 하라!”

제이드가 기사단을 부르러 밖으로 나간 사이, 메리 피도르가 외쳤다.

“황태자 전하, 저는 피도르 후작 가문의 딸입니다!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피도르 후작 가문도 다 같은 룩스 제국의 백성이다. 룩스 제국의 백성이면 룩스 제국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그때 제이드와 기사단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끌고 가라!”

“황태자 전하! 후일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전 피도르 후작가의 메리 피도르입니다!”

“시끄럽군.”

그때 제이드가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입을 막고 끌고 가라!”

제이드의 명령에 그들은 얼른 메리 피도르의 입을 막고 포박하여 끌고 갔다.

그녀는 끌려가면서도 발버둥을 치며 그들을 향해 무언가 소리쳤다.

“웅웅웅!”

“입을 막길 잘했구나.”

그때 의무실에 갔던 데이지가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왔다.

“데이지.”

“데이지 씨!”

데이지는 다리를 절뚝이며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황태자 전하, 어디 계셨습니까? 아이린이 기사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어서 아이린을 구해주세요.”

“뭐, 아이린이!”

레온하르트는 다급한 목소리로 기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오늘 오후 엘리자베스 공주의 보석이 없어졌다는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저희는 곧바로 공녀들이 머무는 궁을 탐문하며 수사를 벌였습니다.”

“……!”

“그러던 중에 공녀들의 궁에서 일하는 시녀 하나가 아이린 토트 양이 공주가 없을 때 그 방에 들어갔다고 진술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 시녀의 진술 하나로 황궁 직원을 함부로 잡아갔다는 것인가?”

기사는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긴장한 듯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저희도 본래 그럴 때에는 해당 직원에게 출두를 요청해서 진술을 듣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당장 연행하라는 명령이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위로부터 명령이라. 누구인가? 혹시 아까 그 피도르 후작 영애인가?”

“아, 아닙니다. 그보다 더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때 제이드가 기사에게 물었다.

“혹시, 황후 폐하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데이지가 깜짝 놀라 물었다.

“황후 폐하의 명령이라니요? 그럼 지금 아이린이 위험한 것 아닙니까?”

그때 기사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저희는 3인 1조가 되어 황궁 감옥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린 토트 양 같은 경우는 혐의가 확정된 것이 아니기에 일반 감옥보다는 깨끗한 곳에 계실 것입니다.”

* * *

한편, 황궁 감옥 안.

아이린은 의외의 곳에서 현타를 맞고 있었다.

“대박, 여기 감옥 맞아?”

아이린은 감옥 안을 돌아다니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집보다 좋잖아! 얼핏 보기에도 10평은 돼 보이는걸. 이게 감옥이니 호텔이니?”

사실 아이린은 연행될 때는 의연하게 굴긴 했지만,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벌레가 득실거리는 감옥을 상상했었다.

그 때문에 애써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는데…

정작 그녀가 들어가게 된 감옥은 거의 호텔 수준이었다.

보는 순간 머릿속에 러X 하우스 BGM이 재생될 정도였다.

아니, 그래도 감옥은 감옥이니 X브 프리즌이라고 해야 하나?

감옥 안에는 하얀 시트가 깔린 1인용 침대와 6명은 앉을 수 있어 보이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또 한쪽으로는 깨끗한 욕실과 화장실도 구비되어 있었다.

“와, 게다가 창문까지 있잖아.”

보통 감옥이라고 하면, 지하나 탑 꼭대기에 있고 창문이 없는 컴컴한 곳 아닌가?

아이린은 건물 1층에 있는데다 창문까지 있는 이 ‘감옥’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감옥이라고 창문에 창살이 달려 있긴 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현대 한국에 흔하게 있는 방범창 같은 정도였다.

‘저 창문, 레온의 검기 한방이면 부서지겠는걸.’

아이린은 그렇게 남의 집에 놀러 온 듯 감옥 구경을 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소근 거렸다.

“와! 저 아가씨 쪼그만데 보통이 아니야!”

“그래, 보통은 아니지. 보통 영애들 같으면 감옥에 와서 저렇게 의연하기 힘들 텐데.”

“그래, 지난번에 궁중 시녀 기억나?”

“아, 그 무슨 백작 영애 말이지?”

“그래, 올 때부터 얼마나 시끄러웠냐?”

“맞아! 첫날부터 살려 달라고 창문이며 창살에 매달려 소리를 질러대질 않나, 밤에는 자지도 않고 통곡하고.”

“음식 투정은 얼마나 심했어. 난 그때 내가 기사인지 하녀인지 자괴감이 들더라고.”

“그런데 저 아가씨 봐봐. 완전히 친구 집에 놀러 온 것 같잖아.”

그대 조용히 그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기사 질리언이 입을 열었다.

“후후, 그러네.”

“질리언, 네가 가서 필요한 것 있는지 묻고 와.”

“그래, 밤도 늦었는데 우리보단 여자인 네가 가야 편하실 것 같아.”

“후후, 그래.”

여기사 질리언의 본래 업무는 황족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 기사가 적은 관계로 여성 용의자가 특별감옥에 갇힐 때마다 이곳에 직무 배정되었다.

질리언은 이곳저곳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아이린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이린 토트 양.”

아이린은 그녀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와 그녀 앞에 섰다.

“네, 기사님?”

‘으아아, 이 아가씨 왜 이리 귀여워?’

그저 멀리서 지켜볼 때만 해도 몰랐다.

그런데 가까이 와서 보니, 이목구비가 다 작고 동글동글한 게 어느 하나 귀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이린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여기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질리언은 그 모습에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나 분명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황궁 기사단에 약혼자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린이 무해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았다.

‘으아, 이러다 심장 마비 걸리겠다. 얼른 말하고 가야겠어.’

질리언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기사 질리언입니다. 아이린 토트 양께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여기사의 친절한 말에 아이린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어봐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사 분이 계시니 어쩐지 안심이 되네요. 보통 언제 근무하시나요?”

“저는 주로 밤 근무를 합니다.”

“으아, 피곤하시겠어요.”

“아무래도 남자들이 많은 감옥이기에 여성 죄수 보호 차원으로 밤 근무를 할 때가 많습니다. 혹시 지금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저, 당장은 필요한 것은 생각나지 않네요.”

‘…배가 고프긴 한데. 아, 데이지가 음식 싸들고 오겠다고 했는데 오늘 면회가 되려나?’

“그럼, 저는 이만.”

기사 질리언이 돌아가려는 찰나, 아이린이 물었다.

“저, 혹시 이곳의 면회 시간이 따로 있나요?”

기사 질리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오후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입니다.”

‘그럼 데이지가 오늘 오지는 못하겠네. 오늘 정말 맛있는 것 많았는데.’

아이린은 휴게실에 두고 온 파티 음식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럼 오늘 면회는 끝났겠군요.”

질리언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지금 벌써 10시가 넘었습니다. 오늘은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린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겠죠. 귀찮게 해드려 죄송해요.”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꼭 불러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사 질리언이 감옥 내 근무 초소로 돌아가고.

아이린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병을 들고 물을 컵에 따랐다.

“물배라도 채워야 하나?”

점심 이후에 먹은 것 없이 일만 했던 터라, 지금은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 것만 같았다.

‘후, 어쩔 수 없지.’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물 한 컵을 마시고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그때 창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기사들 교대 시간인가?”

안 그래도 배고파서 잠이 안 오는 차에, 아이린은 벌떡 일어나 창문 밖을 바라봤다.

“어? 저건 레온하고, 제이드 님이랑, 데이지 아냐? 그런데 뭘 저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온 거지?”

아니나 다를까 레온과 제이드는 각각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지가 그 뒤에서 기사의 부축을 밭으며 절뚝절뚝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린은 그런 데이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데이지, 발목을 많이 다쳤나 보네. 오늘 힘들었을 텐데 집에 가서 쉬지.”

얼마 후 그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곧 감옥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감옥 특성상 내부가 잘 울리는 구조이기에 멀리서 말하는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였다.

“지금 아이린 토트를 만나야 한다.”

그때 기사 질리언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됩니다, 황태자 전하. 규정상 면회시간은 오후 12시에서 저녁 6시까지입니다.”

그때 데이지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제발 잠깐이면 됩니다. 얼굴만 보고 가게 해 주십시오.”

질리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황태자 전하.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 주십시오.”

평소 늘 차분하던 제이드까지도 흥분해 말했다.

“감히 황태자 전하를 막겠다는 겁니까?”

기사 질리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히라도 목숨을 걸고 막을 것입니다. 지금 시각에는 황제 폐하시더라도 들어오지 못하십니다.”

아이린은 멀리 보이는 질리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질리언 기사님, 보기와 다르게 단호박이시네. 황제 폐하가 오셔도 막는다니, 어쩐지 안심이 되는데?’

그때 레온하르트가 질렸다는 듯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이 물건만이라도 전해 줄 수 있겠나.”

“네, 그건 가능합니다.”

“휴, 그럼 부탁 좀 하겠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질리언이 감옥 안으로 휘파람을 불자, 안쪽에서 기사 2명이 나왔다.

“여기 이 물건들, 아이린 토트 양에게 전해 드려.”

기사들은 황태자를 향해 묵례하고 그들이 가져온 상자를 들고 갔다.

“황태자 전하, 시간이 늦었으니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고 돌아가십시오. 아이린 토트 양은 오늘 밤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안전하실 것입니다.”

세 사람은 질리언의 단호한 표정에 살짝 질린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믿음이 갔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돌아갔다.

* * *

감옥 안.

질리언의 말대로, 아이린은 정말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했다.

‘허 참, 이사를 온 것도 아니고.’

기사들이 전해준 상자 하나를 여니 그녀가 황태자 안가에서 쓰던 물건과 책, 옷이 들어 있었다.

아이린은 머쓱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바라봤다.

나름 걱정해서 가져다준 거라지만, 유난스러운 거 같아 기사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린은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상자 하나를 또 열었다.

‘으으, 괜히 긴장되네.’

그 순간 작게 떴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질리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토트 양,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아이린은 미안함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과하시라고 드린 말씀이 아니라, 주변 분들이 아이린 토트 양을 매우 아낀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커다란 상자 안에는 식었어도 맛있어 보이는 파티 음식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질리언과 함께 상자를 들고 온 기사들이 하나같이 음식을 보고 군침이 돈다는 표정이었다.

아이린은 음식 상자를 들고 말했다.

“함께 드시겠어요? 보시다시피 제가 혼자 먹기에는 양이 좀 과한 것 같네요.”

질리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남은 음식은 저기 냉장고에 넣어두고 드십시오.”

먹고 싶어 못 견디는 표정인 기사들도 질리언의 말이 맞는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질리언의 말대로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이곳은 식사가 나오지 않나요?”

“물론, 나옵니다. 하지만 드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렇게 맛이 없나요?”

그녀의 순진한 눈빛에 기사들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가운데 질리언만은 웃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이 들었을 위험이 있으니까요.”

아이린은 그만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독, 독이라니요!”

“감옥 입구는 어떤 침입자라도 저희가 막을 수 있습니다.”

뒤의 두 기사가 질리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직접 준 음식이 아니면 드시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설마 누가 제게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질리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 토트 양을 감옥에 보내신 분은 그렇게까지 하실 것입니다.”

“혹시, 피도르 후작 영애 말인가요?”

기사 질리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삭였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십니다.”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리언을 바라보았다.

‘분명 메리 피도르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황후라니?’

어쩐지 예상처럼 쉽게 나갈 순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호랑이 굴에 들어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정신 차리고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자.’

아이린은 이내 그녀처럼 작게 속삭이며 말했다.

“절 이곳에 보낸 게 황후 폐하라니요?”

“네, 황후 폐하의 입김으로 아이린 토트 양이 이곳에 잡혀 오게 된 겁니다.”

‘헐, 황후 폐하 왜 이러십니까? 내게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때 질리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곳에 오셔서 불행 중 다행입니다.”

“이곳에 와서 다행이라니요? 혹시 다른 감옥이 또 있나요?”

“네, 황궁의 감옥은 여러 곳이 있는 있습니다. 황족이 기거하는 궁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궁에 지하 감옥이 있죠.”

“그런데 이곳은 1층인데요?”

“이곳은 기사단 본부 건물과 연결된 곳으로 특별히 1층에 지었습니다.”

“특별히요?”

“네, 황궁 기사단은 전쟁에 나가거나 마물을 퇴치하거나 여러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본부 건물 지하는 무기들로 포화상태지요.”

“아,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거군요.”

질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황궁 안에서 범죄 혐의가 의심되는 이들을 재판 전에 잠시 머무는 용도로 이용됩니다.”

“그럼 저도 그때까지만 이곳에 있을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럼 전 이곳에 일주일 정도 수감될 텐데 왜 이곳 감옥에 와서 다행이라 하신 건지 궁금하네요.”

“지금처럼 여성분을 가두어야 할 때에 지하 감옥마다 방이 하나인 곳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기사단 건물 외에는 기사가 아닌 간수로 뽑은 직원이 경비를 섭니다.”

“간수요?”

“네. 그렇기에 황후 폐하께서 작정하신 지금, 그곳에 갇히셨다면 이 시간까지 살아 계시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이린은 그녀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살아 있기 힘들다니요?”

“우리 기사단은 모든 일을 수행할 때 제국법 안에서 원칙대로 행합니다. 하지만 황후궁의 간수라면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아이린 토트 양이 수감 되어야 하는 감옥은 다른 곳이었을 겁니다.”

질리언이 말했다.

“네, 아까 기사들을 인솔하시던 팀장님이 저를 이곳에 부르고 아이린 토트 양을 데려왔거든요.”

나머지 한 기사도 거들듯 입을 열었다.

“네, 전 그래서 팀장님의 지인이신 줄 알았습니다.”

“지인이요? 저는 오늘 기사님들 모두 처음 뵙는걸요.”

그때 다른 기사가 말했다.

“그게 다 이유가 있죠. 아이린 토트 양은 이송? 체포? 아무튼, 모시고 올 때 그거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매우 신사적이셨거든요.”

그 말에 덩치 큰 기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뭐야? 아가씨에게 신사적이라니.”

그때 아이린이 말했다.

“저, 이쪽으로 잠시 앉으셔서 마저 말씀해주세요.”

덩치 큰 기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두 기사도 그녀에게 살짝 묵례하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내 수다스러웠던 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황궁 안에서 귀족들을 체포할 때는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때리고 할퀴고 반항에, 곧 풀려나면 죽인다느니 어쩌니 하는 협박도 엄청났지요.”

그때 덩치가 2미터가 되어 보이는 기사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동네북이 따로 없었지.”

그때 다소 수다스러운 기사가 덩치 큰 기사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큭큭, 너는 큰 북, 나는 작은 북.”

덩치 큰 기사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후후, 덕분에 외롭지 않네.’

아이린은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내 상자에서 음식과 주스를 꺼내 놓으며 질리언 옆에 앉았다.

“그래, 우리는 그냥 명령대로 감옥까지 호송하는 업무를 맡았을 뿐인데.”

“맞아. 그런데 아이린 토트 양은 달랐거든요.”

질리언과 2미터 거구의 기사는 아이린을 향해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아이린은 빵을 먹다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때부터 기사들은 자신의 앞에 빵을 손으로 떼어 먹으며 말했다.

“쩝쩝, 뭐가 어땠는데? 빨리 말해봐!”

아이린은 그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저 표정을 보니 내 이야기가 팝콘각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팝콘각인 거야?’

그때 셋 중에 말이 많았던 기사가 탁 하고 일어나서 말했다.

“아이린 토트 양의 친우분이 우리를 이렇게 탁 막아섰는데.”

그는 데이지의 흉내를 내고는 이내 아이린의 말투와 표정을 흉내를 내며 말했다.

“아이린 토트 양이 ‘기사님들이 무슨 잘 못이 있겠어. 우리 같은 말단 직원들은 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잖아.’ 그러시는 거야!”

아이린은 순간 머금었던 주스를 막장드라마처럼 뱉을 뻔했다.

수다스러운 기사가 얼마나 맛깔나게 연기하는지.

순간 생활연기 달인 서현X, 조정X을 보는 듯했다.

‘헐, 이거 팝콘각 맞네.’

아이린은 팝콘 대신 쿠키를 먹으며 관전했다.

“그때 아이린 토트 양의 친구가 ‘후우, 알겠어.’ 하며 비켜서는데, 나 정말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더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뭔 말이지? 갑자기 무언가가 끓어오르다니?’

그때 질리언이 아이린을 바라봤다.

“아이린 씨는 어쩌면 공감이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린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사실 그동안 저희는 감옥을 지키는 기사라고 ‘너희가 무슨 기사냐?’ 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거든요.”

질리언의 말에 공감하는지 두 기사는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그럼, 다른 곳으로 지원하시면 어떨까요?”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사단은 순환 근무제입니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순환 근무제요?”

그녀의 물음에 질리언이 대답했다.

“네, 특별히 한 직별에 계속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나가기도 하고, 황족이나 고위직의 직원들을 경호하기도 합니다.”

그때 연기를 맛깔나게 하던 기사가 말했다.

“네, 저도 얼마 전까지 적국의 스파이를 감시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아이린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때 덩치 큰 기사가 말했다.

“그 때문에 기사단원 모두 프라이드가 대단한 녀석들입니다. 감옥에 근무할 때 마다 귀족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으니 답답하고 억울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 질리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기사단 단원들도 대부분 귀족가 태생입니다. 그리고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는 기사이기도 하구요.”

“…….”

“그런데 그때마다 같은 귀족에게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 연기를 맛깔나게 하던 기사가 말했다.

“그런 저희를 이해해 주신 건 아이린 토트 양이 처음이십니다.”

“제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이린은 그때 일을 다시 떠올려 보았지만, 특별하게 기사들을 생각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쩐지 부끄러워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때 연기를 맛깔나게 하는 기사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때 저희는 하고 싶지 않은 업무를 맡은 차에 잔뜩 굳었는데, 아이린 토트 양 덕분에 다들 헤실헤실 풀어졌습니다.”

“네? 풀어졌다니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헤실헤실할 정도로 얼굴이 풀어진 기사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연기를 잘하는 기사가 거구의 기사에게 말했다.

“야, 데이브. 너 미소 지어봐!”

“응, 조셉.”

그의 말에 거구의 기사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올라갔다.

‘헐, 저게 웃는 거였어?’

아이린은 덩치 큰 기사 데이브를 보며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연기를 잘하는 기사가 말했다.

“저희가 하는 업무들이 웃으면 안 되는 부분들이 많다 보니 저 빼고 대부분 표정이 이렇습니다.”

아이린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 기사님은 직업을 잘못 택했네. 연극계로 진출하시는 것이 좋을 텐데.’

아이린은 어쩐지 저 기사가 연기하면 매일 표를 끊고 관람하러 갈 것 같았다.

‘아, 정말 오랜만에 팝콘이 먹고 싶었어.’

그때 연기를 잘하는 기사 조셉이 말했다.

“지금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 이런 생각 하셨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예전에 아카데미 때 연극에 빠졌거든요.”

“……!”

그때 데이브가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녀석 집안은 대대로 기사 집안인데, 큰형이 죽어서 차남인 이 녀석이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질리언이 말했다.

“아, 나도 생각나네. 그래서 조셉이 차라리 셋째인 쟤 동생에게 후계를 물려주라면서 엄청 도망 다녔지?”

데이브가 말했다.

“그래. 조셉 너, 그때 극단을 따라 유랑하기도 했잖아.”

‘유랑극단이라니! 본격적으로 연기를 했었잖아!’

아이린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정말 극단을 따라 유랑도 했어요?”

조셉은 머리를 긁적였다.

“네”

“그런데 어떻게…?”

“기사가 되었느냐고요?”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조셉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

“셋째 동생이….”

‘동생도 죽었나? 어떡해, 괜히 물어봤나 봐!’

아이린은 순간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검에 소질이, 없어도 너무 없었거든요.”

아이린은 그제야 살짝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 녀석 작년에 졸업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어이없는 것이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무가 집안인데 문과 차석이라니요.”

“작년 문과 차석이요?”

조셉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혹시, 마르고 키 크고 안경 쓴?”

조셉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녀석을 아십니까?”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제가 작년 수석이었어요. 그와 동문이죠.”

조셉은 순간 짝하고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황태자 보좌관실에 수석 졸업자가 온다는 소릴 들었는데. 그분이 아이린 토트 양이군요. 하하, 이런 인연이.”

아이린은 얼른 바구니에서 다른 음식을 꺼내 테이블에 얹었다.

“이것도 드셔 보세요.”

그때 데이브가 커다란 덩치를 숙이며 말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이린은 마주 묵례를 하며 그의 손에 쥐어진 모카빵을 바라봤다.

‘분명 가장 커다란 모카빵을 그의 접시에 올렸는데 왜 작은 소보로처럼 보일까?’

그때 데이브가 조셉에게 말했다.

“야, 조셉. 아까 이야기 하던 거 마저 해봐!”

“아차차, 그래. 아까 팀장님이 ‘정중하게 모셔라!’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린 높은 귀족 영애를 경호하듯 여기까지 왔다니까!”

“하하, 정말?”

“그런데 아이린 토트 양이 정말 대단한 건, 친구분에게 이따 파티 음식을 싸오라며 손까지 흔들더라고.”

“그래, 아까 여기 오셔서 집 구경하듯 감옥 구경하신 것 봤지?”

“큭큭, 그래서 팀장님이 좋게 보셨나 보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무용담 같은 이야기에 어쩐지 민망했다.

그녀는 이내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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