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이린 나 왔어! …헐, 너 뭐하는 거니?”
“하하, 지루해서 여기 기사님들과 알까기 하고 있지.”
아니나 다를까, 어제 아이린의 짐에 들어 있던 바둑판이 떡하니 테이블 위에 나와 있었다.
물론 이 세계에는 바둑은 없었고, 아이린도 사실 바둑을 둘 줄 몰랐다.
그저 심심하니 오목이나 알까기를 하려고 만든 바둑판이었다.
‘이름을 다시 지어야 하나? 오목판? 알까기 판?’
“어서 오십시오. 아이린 씨 차례입니다.”
“데이지, 아직 점심시간이지? 나 알까기 한 판만 하고 식사할게.”
데이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
“우와! 아이린 양, 알까기 여신이십니다!”
“그러게, 어떻게 연타로 맞추시는지.
“하하, 우리 돌을 다 떨어뜨리고 아슬아슬하게 바둑판에 걸쳐져 있는 돌 좀 봐.”
그렇게 한바탕 알까기가 끝나고 기사들이 눈치껏 근무초소로 나갔다.
“아이린, 너 정말 대단하다.”
“어? 뭐가?”
“지난번에 피도르 후작 영애에게 하는 것 보고도 놀랐는데, 이제는 감옥에 와서 기사들과 게임을 하고 놀고 있다니. 난 이런 얘기 어디 가서 들어보지도 못했어.”
아이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후, 여기가 무슨 감옥이야? 우리 집보다 좋은데.”
데이지는 감옥 안을 훑어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하네.”
“게다가 어제 와봐서 알잖아. 여기가 어느 곳보다 안전한 거.”
데이지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도 그래.”
“그런데 데이지….”
“응?”
“나 여기 있는 동안 음식은 좀 가져다주라.”
데이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음식이라니? 설마 감옥에 식사가 안 나오는 거야?”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아이린은 애써 담담한 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여기 기사님들 말이 음식에 독을 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더라고.”
데이지는 일순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독, 지금 독이라고 했어?”
“아, …응.”
“하, 정말 못됐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먹는 음식으로 장난치다니. 그런데 황후 폐하라면… 그럴 수도 있겠어.”
아이린은 한숨 섞어 말했다.
“후우, 너도 알고 있었구나. 배후에 황후 폐하가 있는 것을.”
“황궁 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중에 네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은 황후 폐하밖에 없잖아. 참! 그리고 엘리자베스 공주가 황후 폐하 편에 섰어.”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갑자기 엘리자베스 공주라니?”
데이지는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놀란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를 좋아해서 매일 찾아온 것 아니었어?”
“아이린은 정말 순진하다니까. 엘리자베스 공주가 황태자를 좋아하다니.”
아이린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데이지는 그런 모습에 피식 헛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보아온 엘리자베스 공주는 단 한 번도 황태자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어.”
“뭐, 뭐라고?”
아이린은 원작의 장면들이 떠올라 머릿속이 매우 복잡해졌다.
‘그럼 그 시작부터 끝까지 로맨스가 한가득 담긴 서사들은 도대체 무엇인 거지?’
그때 데이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그녀도 힘없는 공녀이기에 권력을 좇은 거겠지.”
무언가 생각하는지 입술을 살짝 짓씹던 아이린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부분은 나도 비슷한 거 같아.”
아이린의 말에 데이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이린을 바라봤다.
“너랑 엘리자베스 공주가? 도대체 어디가? 어느 부분이?”
“하하, 그게… 나도 황태자 전하가 황태자라서 더 좋았는걸.”
일순 아이린이 꿈에 빠진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정말 동화에서 나오는 왕자님 같잖아.”
데이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자님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왕자님이지. 그런데, 너… 처음에 황태자 전하의 신분이 부담스러워서 피해 다닌 것 아니었어?”
아이린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뭐지? 데이지 너 전생에 궁예였니?’
“헐, 그걸 어떻게 알았어?”
데이지는 검지를 들어 볼록한 아이린의 볼에 살짝 대었다.
“내가 왜 몰라. 넌 요 얼굴에 다 쓰여 있다고.”
‘레온도 그렇게 말했는데. …설마 진짜 내 볼에 쓰여 있는 건가?’
아이린은 두 손을 올려 볼을 가렸다.
데이지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흩트렸다.
“귀여운 아가씨, 헛생각 그만하시고, 식기 전에 어서 먹기나 해.”
“헤헤, 데이지 넌 이럴 때 보면 엄마 같아.”
데이지는 피식 웃으며 바구니를 열었다.
바구니 안에는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평소에 먹어 보지 못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우와! 데이지, 이게 뭐야? 오늘도 파티 음식이야?”
“잊었어? 신년제 일주일 동안 파티 하는 거?”
“아차! 그랬었지. 덕분에 식사가 럭셔리하네.”
“응, 그러니까 맛있는 거 먹으며 조금만 버텨. 제이드 님도 황태자 전하도 널 구한다고 열심히 뛰고 있으니까.”
“후후, 걱정 하지 마. 아까 못 봤어? 잘 놀고 잘 먹고 나갈 테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셔요.”
“알겠어. 먹기나 해.”
“응.”
데이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린은 양송이 수프를 한 스푼 크게 떠먹었다.
“와! 이 수프 정말 맛있다.”
“그치? 황궁 조리장께서 육수를 끓이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고 하더라고.”
“정말? 대단하다.”
“응, 그분이 음식을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서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셔.”
‘와, 장금이가 따로 없네.’
데이지는 마늘빵 하나를 아이린의 접시에 덜어주며 말했다.
“이 마늘빵을 수프에 찍어 먹어 봐.”
아이린은 데이지가 말 한대로 마늘빵을 들어 수프에 찍어 먹었다.
알싸하면서도 달달하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야들한 마늘빵.
그리고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수프와의 만남.
아이린은 순간 고급 레스토랑에 와 있는 기분을 느꼈다.
“우와, 정말 맛있다! 데이지도 얼른 먹어.”
“응. 고마워.”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사이좋게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 * *
황태자궁 집무실.
레온하르트는 신년제가 끝나고 열리는 국제회의 서류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들고만 있다고 해야 할까?
그는 서류를 들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온갖 상념이 한가득 떠다녔다.
그는 이내 긴 한숨을 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이린.’
레온하르트는 감옥에 있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먹먹했다.
‘내가 대신 갈 수 있었으면.’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제이드가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물었다.
“제이드, 그 증인으로 나섰다던 시녀는 만나봤어?”
제이드는 그늘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림자들을 보냈는데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해. 증인 보호 차원이라나.”
“집으로는 찾아 가 봤대?”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황궁에서도 그녀의 집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어.”
“그림자들을 더 풀어서 알아보지 그랬어.”
“물론 알아봤어. 며칠 전 밤에 시녀의 가족들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하더라고.”
“어떻게 그러지? 시녀라면 귀족 아닌가?”
“알아보니 귀족이 아니더라. 가난한 평민 집안의 하녀 출신인데, 엘리자베스 공주에 의해 시녀로 발탁됐다고 하더라고.”
레온하르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뭐라고? 하녀가 시녀로? 황궁에서 그런 것이 가능했어?”
“규정대로라면 불가능하지. 그런데 각국에서 오는 공녀들 대부분이 방계 왕족이나 한미한 가문 딸을 왕실에 입적시켜서 보낸 가짜 공주라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데 룩스 제국의 귀족 출신인 콧대 높은 시녀들이 그런 공녀들의 측근 시녀가 되고 싶겠어?”
“후우, 그렇겠네.”
“그래, 그러다 보니 하녀 중 자원자를 받아서 공녀들의 측근 시녀로 보내는 편법을 쓰고 있었어.”
“데이지가 측근 시녀 아니었어?”
“응, 데이지 씨도 측근 시녀이지. 공녀들의 측근 시녀는 최소 둘 이상 배정하고 있으니까.”
“그건 나도 알겠어. 혹시 모를 스파이 문제 때문이지?”
“응, 기사들 업무배정 할 때 3인 1조로 움직이게 하는 이유랑 비슷해. 서로 감시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도 반성해야겠군. 이 나라의 황태자인데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조차도 다 모르다니.”
“넌 황태자잖아. 다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지. 상관은 굵직한 일을 고심하고 부하들은 명령에 따라 세세한 일들을 하는 게 당연하니까. 선장과 선원 같은 것이라고 할까?”
“선장과 선원?”
제이드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넌 선장으로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 그리고 작은 일들은 지금처럼 나에게 또는 직원들에게 믿고 맡겨.”
“…….”
“그러다 지금처럼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 함께해 줘. 그게 최고의 상사이니까.”
“고맙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그런데 말이야, 레온.”
“응?”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 같아도 가난한 평민 출신 측근 시녀를 더 믿을 수 있겠다 싶은데. 엘리자베스 공녀가 그런 이유로 그 하녀를 고른 건지도 모르겠어.”
“왜? 그들이 오히려 충성할 수도 있잖아.”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지. 이들은 가난하면 어쩔 수 없이 돈에 쫓기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 물욕이 큰 자라면 돈만 잘 쳐주면 이용하기 쉬우니까.”
“그렇겠군.”
“그래, 그 때문에 시녀와 그 가족들을 숨기기도 쉬웠던 거지. 휴, 정말 어디에 작정하고 숨겨 놓은 건지 정말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다 하더라고.”
“그럼 내가 직접 찾아…!”
제이드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직접 움직이는 건 절대 안 돼! 지금은 보는 눈과 귀가 많아.”
“그래도 변장 마법으로 얼굴을 평범하게 바꾸고 찾아보면 되잖아!”
“알지, 그런데, 레온 네가 답답한 것만큼 나도 아이린 씨가 걱정이 돼.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더 전력을 다하고 있으니 믿고 기다려 줬으면 해.”
“후우. 네가 잠도 못 자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아이린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난 이렇게 평소처럼 일하고 있으니 괴로워서 그래. 내가 황태자가 아니었으면…….”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숙이며 거칠게 마른 세수를 했다.
“그래. 네 마음 알아. 아이린 씨와 사귀는데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큰 문제지. 당장 감옥에서 탈출시키고 싶을 거야. 그런데 레온,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제이드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황태자이든 아니든 바로 앞이 아니라 먼 미래를 생각해야 해. 앞으로 계속 아이린 씨와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난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영원히 아이린만 사랑할 거야.”
제이드는 의도치 않게 레온하르트의 절절한 사랑 고백에 비씩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곧 그는 표정을 굳히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들어봐.”
그 순간 복잡한 마음으로 흐릿한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제이드를 향했다.
“네가 방금 한 아이린 씨가 계속 너와 함께한다는 말은 황태자인 너의 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야.”
“아이린이… 나의 비!”
“그래. 그리고 나아가 룩스 제국의 황후가 되어 이 나라를 너와 함께 다스려 한다는 뜻이고.”
레온하르트는 상념에 빠진 듯 잠시 멍한 눈동자로 어딘가 높은 곳을 바라봤다.
“그런데 아이린은 평민이야. 그리고 넌 평민이 황후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거야.”
레온하르트는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 나의 어머니도 평민 황후셨잖아.”
“그래, 황제 폐하가 황태자 시절에 아카데미에서 너의 어머니를 만나셨다고 했고.”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릴 적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나를 재울 때마다 옛날이야기를 하듯 그 시절 이야기를 해 주셨지. 아카데미에서 아버지인 황제 폐하와 너의 아버지 레이먼드 공작과 함께 보냈던 학창시절을.”
제이드는 점점 낯빛이 어두워졌다.
“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아버지와 황제 폐하의 사이는 나와 너 사이 같았는데.”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도 기억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네 아버지 레이먼드 공작이 그때부터 귀족파 수장이 되었지.”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알 수가 없었어. 심지어 아버지의 측근이나 삼촌들도 그 이유를 모르시더라고.”
“어쩌면… 내 아버지 황제 폐하는 그 이유를 알고 계실까?”
제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레온하르트는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제이드를 보았다. 잠시 후 제이드가 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다시 논점으로 돌아가자.”
“…….”
“황태자인 네가 그렇게 돌아다니다 그 시녀를 찾았다고 생각해봐. 그때는 증인을 찾아도 문제가 생기는 것을 모르겠어?”
레온하르트는 제이드의 알 수 없는 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찾아도 문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제이드는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들은 아마 네가 직접 증인을 찾았다는 사실을 악용할 거야.”
“…어떻게?”
“황태자가 자신의 직원을 구하고자 증인인 시녀를 협박했다는 소문을 흘리겠지. 아니면 네가 그 시녀를 찾기 바로 직전에 죽여 버릴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레온하르트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 또한 살인죄의 혐의를 쓸 수도 있겠군.”
“그래, 그러면 아이린 씨와 너의 입지는 더 나빠질 거야. 따라서 아이린 씨의 재판 상황도 더 나아지지 않을 거고.”
레온하르트는 답답함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 시녀가 이 사건에 유일한 증인인데 이렇게 내가 손쓸 도리가 없다니. 이러다가는 그 증인을 재판에 가서야 만날 수 있겠어.”
“그렇다고 손 놓고 있다간 아이린 씨의 재판 상황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갈 테고.”
“나도 머릿속이 복잡하군. 늦기 전에 증인을 찾든 그 보석을 찾아내든 해야 할 텐데… 이렇게까지 앞이 캄캄한 건 처음이다.”
“나도 그래. 전쟁터에서도 이 정도로 답답하고 앞이 막막한 적이 없었어.”
그때 레온하르트가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 이내 멈추며 입을 열었다.
“…그 엘리자베스 공주가 잃어버렸다는 보석 말이야. 어떻게 생긴 건지는 알아봤어?”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응, 백합궁의 궁인들에게 알아봤는데 엘리자베스 공주가 매일 끼고 다이던 반지라고 하더라고. 붉은 보석이 박힌 금반지라고 했어.”
“매일 끼고 다니던, 붉은 보석이 박힌 금반지라…….”
“그래, 레온. 넌 엘리자베스 공주를 매일 만나다시피 했잖아. 기억을 한 번 떠올려봐.”
레온하르트는 눈을 살짝 감았다. 이내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떠올리려 노력했다.
톡톡.
톡톡톡.
제이드는 그 소리에 어쩐지 더 긴장되는 듯 그를 바라봤다.
잠시 후, 레온하르트가 상념에서 깨어나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눈을 번쩍 떴다.
“왜? 뭐 생각나는 것 있어?”
“하, 내가 그동안 왜 잊고 있었지! 그 반지를.”
이내 제이드의 표정이 환해지며 소리쳤다.
“레온, 기억났구나!”
“응. 그 반지, 가끔 뭔가 불길한 느낌의 오라가 작게 흘러나오더라고. 혹시 마정석이나 마법과 관계된 물건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어.”
제이드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뭐? 그럼 빨리 말했어야지. 룩스 제국에서 허가받지 않은 마도구나 마법사는 불법이잖아.”
“응, 나도 말하려고 했지. 그때 마침 노예 시장 건도 있었고 신년제도 있어서 바쁘다 보니 깜박 잊었어.”
제이드는 동의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긴 정신이 없을 만도 했지. 그동안 일이 좀 많았냐고. 아참, 아이린 씨에겐 언제 가볼 거야?”
“점심시간 끝나고.”
“왜, 가서 점심 같이 먹지 않고?”
“그러고 싶었는데 오늘 데이지가 선수를 치더라고.”
제이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이구, 레온 너랑 데이지 씨 보고 있으면 정말 웃긴 것 알아?”
레온하르트는 다소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뭐가 웃겨? 난 살다 살다 말로 염장을 질러 주먹을 저절로 쥐게 만드는 여인은 처음 봤어.”
“큭큭, 그 누구보다 기사도가 넘치는 너의 두 주먹을 쥐게 하는 여자라니. 아이린 씨가 아니라 데이지 씨가 네 천생연분 아니야?”
“너 친구라는 자식이 저주를 퍼붓는 거냐? 너도 봤잖아, 내가 아이린과 둘만 있고 싶은 시간에도 눈치 없이 떡하니 끼어드는 것.”
“후후, 그건 다소 의도적인 것 같네. 다른 상황에서는 어쩌면 나보다 눈치가 빠른 분인데.”
“그래, 그러니 더 화가 나. 하, 정말 내가 뭐하는 건지. 어디 아이린과 둘만 숨어버릴 데 없나? 아이린을 온전히 나만 소유하고 싶다.”
“워워, 그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아이린 씨가 네 소유가 되길 바라기보다 네가 진정한 아이린 씨의 소유가 되면 되지 않겠어?”
“진정한 아이린의 소유라면, 결혼?”
“그래, 아이린 씨를 하루 빨리 너의 비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우와, 역시 내 친구. 너 정말 천재구나?”
“이런 걸로 천재 소리들을 건 아닌데.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니야?”
“헉!”
“뭐야, 그 표정?”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 네 입에서 나오니 놀라지.”
“너 나를 뭐로 보는 거냐?”
“사람이 아닌 사람?”
제이드는 기가 막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허 참!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듣는다, 그것도 너한테.”
그때 레온하르트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어, 이제 1시 다 되었네. 아이린한테 같이 가자.”
“아니, 난 따로.”
“그건 안 돼. 따로 가지 마!”
“뭐?”
“데이지도 모자라서 너까지 그러면 안 돼! 지금도 내 머리가 포화상태라고.”
“하, 뭐? 이 질투의 화신아.”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 이왕이면 내가 황태자니 질투의 황태자로 불러 주세요.”
제이드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 *
감옥 안.
멀리서 딸깍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왔나?”
아이린이 흠칫하던 그때 레온하르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이린. 우리 왔어.”
아이린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어? 황태자 전하.”
“저도 왔습니다. 아이린 씨.”
“국제회의 준비로 한창 바쁠 땐데 어떻게 오셨어요.”
“바쁘죠. 그래도 아이린 씨가 감옥에 계시는데 어떻게 안 와볼 수가 있겠어요.”
“하하, 걱정 마세요. 여기 기사님도 모두 착해서 잘해주시고, 잘 지내고 있어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이린, 기사님들도 착하다니?”
아이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여기 와서 좋은 기사님들 많이 알게 되었어요.”
“……!”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쟁에 참여한 기사님도 있다 하시던데. 황태자 전하도 아마 그들을 아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제이드가 말했다.
“황궁 기사는 순환 근무지 않습니까. 저희와 함께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도 이곳에 있을 수 있고요.”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야. 저 혈기 넘치는 녀석들이 이곳에 들어오느냐는 것이지.”
제이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질투의 화신.’
그때 아이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들어와서 말동무도 해주시고 식사도 함께 해주시고 그랬어요. 덕분에 외롭거나 불안한 마음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으윽! 아이린, 남자는 모두 늑대라고!’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기사들 덕분에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는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제이드는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아이린을 바라봤다.
‘와! 아이린 씨, 정말 대단한걸. 내 친구지만 저 냉철하고 고집 센 레온하르트를 입 다물게 하다니!’
레온하르트가 매사 고집불통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한 번 정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제이드는 물론 자신의 주관이 분명한 것도 차기 황제로서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가끔은 아랫사람의 말도 좀 들었으면 하는 것이 보좌관으로서 제이드의 바람이었다.
‘아이린 씨면 황후로써 황제가 혹시 모를 아집에 빠질 때 견제하는 것도 가능하겠어.’
제이드는 그렇게 내심 아이린을 미래의 황후로 바라고 있었다.
그때 아이린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며 들려왔다.
“그 증인이라는 시녀는 잠적했죠?”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
“혹시 데이지가 알려 줬어?”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뭐 그걸 말해 줘야 알겠어요. 그냥 조용히 생각해 보니 알겠던데요.”
“정말?”
“네, 이 모두 황후 폐하가 계획하셨다면 결정적 증인이 재판 전에 나타날 리가 없죠.”
“후우, 거기까지 생각했다니 정말 대단해. 맞아. 제이드가 그림자를 보내 찾아봤는데 아이린의 말대로 가족까지 모두 잠적했더군.”
아이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정하고 숨은 것을 어떻게 찾겠어요. 이제 그만 찾아보세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찾아봤자 도움될 것은 없겠더라고요.”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 바라봤다.
이내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이린은 그날에 대해 뭐 생각나는 거 있어? 그 시녀 말고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이라던가.”
아이린은 잠시 고민을 하듯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딱히 특별한 게 떠오르는 건 없긴 한데… 아, 그날 보좌관실에 갔다 나오면서 브라운 선배를 만났어요. 신년제 준비로 일이 많다며, 예산에 관한 서류를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가져다주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바라봤다.
제이드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이린 씨가 백합궁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군요.”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제가 이전에 황궁에서 가본 곳이라고는 황태자궁, 도서관, 그리고 황태자 전하와 함께 가본 사자궁 정원뿐인걸요.”
“정말이야, 아이린?”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곧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차, 제 발로 걸어 들어가지 않았지만 황후궁도 있었네요.”
순간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른 귀족들과 직원들은 황궁 안을 산책하기도 하고 연인이나 가족들과 소풍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린이 황궁에서 제대로 가본 곳은 황태자궁과 도서관뿐이라니.
황궁에 취직한 이후 그야말로 주야장천 일만 했다는 얘기였다.
그 순간 제이드는 레온하르트를 쏘아 봤다.
‘거봐, 내가 직원 진작 많이 뽑으라고 했잖아.’
레온하르트는 머쓱해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이번 신년제 끝나고는 직원을 많이 확충해야겠어. 그럼 칼퇴근하고 아이린과 데이트도 할 수 있겠지?’
레온하르트는 아이린과의 데이트를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그때 아이린의 목소리가 그들의 상념을 깨었다.
“참, 그날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긴 했네요.”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보았다.
“어떤 이상한 일 말씀이십니까?”
“백합궁에 갔을 때 정말 이상하게도 그 시녀 말고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어요.”
“……!”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미심쩍은 부분이 많더라고요. 어떻게 한참 일하는 낮 시간에 사용인이 아무도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때 제이드가 말했다.
“분명 황후 폐하께서 손을 쓰신 것이군요.”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그래요. 이곳에서 조용히 이런저런 정황을 떠올려 보니 황후 폐하의 작품인 것을 알겠더라고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아이린이 백합궁에 그 시녀 말고 아무도 없었다고 했잖아.”
“네.”
“그러면, 역으로 그 시녀도 용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이드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겠군. 그 시각 백합궁 안에 있었던 사람이 딱 두 사람이면 둘 다 용의자이니까 말입니다.”
아이린은 눈을 활처럼 휘며 미소 지었다.
“그래요. 같은 용의자가 증인을 서는 건 신뢰성이 떨어지겠군요.”
제이드는 마치 잘 키운 아들을 보듯이 말했다.
“후후. 황태자 전하, 정말 잘하셨습니다.”
레온하르트는 그의 표정에 어이가 없었다.
그때 아이린이 긴장이 풀린 듯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지금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를 미래를 생각하면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아이린은 이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이윽고 자신의 머리에 따뜻한 무언가가 올려 진 느낌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건 레온하르트의 따듯하고 커다란 손이었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아이린의 미래가 안개 속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 속을 걷게 될 것을 내가 약속할게.”
레온하르트는 세상 아름다운 것을 보듯 그녀를 보았다.
‘헉, 미래… 약속! 설마 결혼?’
아이린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흠흠, 저는 일이 바빠서 이만 가겠습니다. 두 분 말씀 더 나누십시오.”
아이린은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가라앉히며 말했다.
“바쁘신데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제이드는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이린 씨를 만나서 이야기한 덕분에 좋은 방법도 찾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덕분에 깨달은 것도 많았고요.’
아이린은 제이드의 환한 미소에 저절로 헤실헤실하게 얼굴이 풀어졌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손이 가로막았다.
“어? 레온.”
“정말 이래서 한시라도 혼자 둘 수 없다니까. 제이드, 너는 어서 이만 가도록 해.”
‘어휴, 저 질투의 화신!’
제이드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아이린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레온?”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의자로 이끌어 앉혔다.
아이린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는 마음에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이린을 지그시 내려다보다 그녀 앞에 눈높이를 맞추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아이린의 두 손을 자신의 손에 가두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아이린은 갑작스러운 눈 맞춤에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사실 요즘 레온하르트를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려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곤욕이었다.
뻐근한 느낌이 마치 심장병이라도 걸린 느낌이랄까?
그 때문에 레온하르트와 둘이 있을 때면, 그의 눈을 피하거나 일에만 집중하려고 애썼다.
연애를 처음 시작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없는 집무실에서 그의 향기만 맡아도 두근거리는 심장에 그야말로 부정맥이 올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날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볼 때면.’
그때마다 아이린은 저 시리도록 푸른 눈빛에 녹아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생각을 지금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눈동자 가득히 자신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그런 눈빛을 볼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에 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세상이구나.’
그리고 레온하르트도 그녀에게 세상이었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짙은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었다.
“아이린.”
아련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때문에 아이린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레온.”
“나 고백할 것이 있어.”
“네? 갑자기 고백이요?”
아이린은 감옥 안을 둘러보다 그를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한껏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응. 고백. 나, 아무래도 아이린을….”
레온하르트는 망설이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뭐지? 저 표정 왜 이리 심각해? 불안하게. 설마 내가 싫어진 건가?’
아이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매우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순간 그녀의 심장이 여러 의미로 쿵쾅거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네?”
‘레온이 날 사랑하는 건 아는데. 이게 무슨 고백이지?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가?’
그때 어느 때보다 더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난… 너무 질투가 나.”
그 순간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빛이 그를 비췄다.
한들한들 바람이 불 때마다 흐트러지는 그의 금발은 빛에 의해 금실처럼 반짝거렸다.
그런 레온하르트를 바라볼 때면 천사 같은 아름다움은 물론,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까지 느껴졌다.
고백 때문인지 살짝 붉어진 볼이 그가 인간임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이런 남자가 나 때문에 질투를 한다니.’
아이린은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이내 침을 꼴깍 삼키고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무슨… 질투요?”
“후우, 막상 말하려니 좀 부끄러운 이야긴데.”
“……!”
“아이린이 친구인 데이지와 시간을 보낼 때면 그 시간도 내가 그대와 함께 보내고 싶고.”
“……!”
“그대가 제이드를 바라보며 웃을 때면 내 심장이… 나락으로 내려앉는 것 같아. 그때마다 그대를 어딘가에 꽁꽁 가두어 나만 보고 싶어져.”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멍하니 바라봤다.
“…나 정말 못났지.”
‘저 천상계 남자가 지금 뭐라 한 거야? …이거야말로 아름다운 구속인건가? 이곳이 바로 천국!’
아이린은 정말 말문이 막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런 아이린에게 무슨 오해라도 한 건지.
레온하르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아이린은 순간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레, 레온 갑자기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레온하르트는 어깨가 축 처지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저 모자란 내가 아이린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데도 내가… 그대를 포기할 수도 놓아 줄 수도 없어서.”
아이린은 조용히 엄지로 그의 눈물을 닦았다.
“그래서 그대가 나와 멀어지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난 그대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어. 미안해, 아이린.”
이내 아이린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갔다.
순간 레온하르트는 긴장되는지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런 욕심 많은 내가 싫지 않아?”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 순간 아이린이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웃더니, 고개를 살짝 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후, 그런 사랑스런 이유라면 질투는 매일 받고 싶은데요.”
레온하르트는 이내 긴장이 풀리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순간 아이린은 그런 그가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이내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점점 내렸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이내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그녀의 입술처럼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의 눈가의 눈물점이 그녀를 유혹하듯 요요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이린은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아이린은 순간 정신이 들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의 레온하르트는 세상 가장 맛있는 무언가를 음미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아이린은 순간 무언가가 심장을 훑고 지나가는 듯 작은 통증을 느꼈다.
이내 몸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듯 아찔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오히려 눈을 감으니 더 세세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점점 자신의 입술을 탐하는 그의 호흡소리가 매우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의 무르익는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조금만 비켜봐.”
“나도 안 보이거든.”
두 사람은 동시에 감옥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감옥 문의 창살 사이로 기사들이 따닥따닥 붙어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 기사들의 교대 시간이었는지, 창살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눌린 얼굴이 기괴하기도 했다.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그의 뒤로 숨었다.
레온하르트는 화가 난 것인지 짜증난 것인지, 그들을 향해 일갈했다.
“요즘 신년제 때문에 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더니 기사단 기강이 매우 해이해진 것 같군.”
그때야 정신이 들었는지 기사들은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네, 그저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잠깐 보고 간다는 것이….”
“전 매우 부러워서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이린은 그런 기사단의 대답에 어쩐지 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감옥이라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그냥 빨리 가라며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 * *
“오셨습니까?”
2황자 에드먼드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지나쳐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는가?”
엘리자베스는 작게 눈을 접으며 말했다.
“그저 아직 신년제 파티 중인 것을 말씀드리려고요.”
에드먼드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이제 들었으니 이만 가도 되겠지.”
그때 엘리자베스가 낮게 속삭였다.
“앉으시죠. 아직 드릴 말씀이 남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에드먼드는 곧장 문으로 걸어갔다.
“난, 들을 말도 할 말도 없다. 그저 어머니이신 황후 폐하의 장단에 잠시 맞춰드리는 것뿐이지.”
“후후, 그뿐입니까? 아이린 토트는요?”
“……!”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신 이유가 겨우 황후 폐하의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서가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아이린 토트를 보호하려는 것이겠죠.”
에드먼드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바쁘게 나가는 것도 보석 절도 혐의로 잡혀 들어간 아이린 토트 때문에 증인을 찾고 계신 것 아닙니까?”
에드먼드는 잠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증인은 어디에 있지?”
엘리자베스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순간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한걸음에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온 에드먼드는 그녀의 목에 단도를 대며 살기를 띤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몰려오는 공포가 심장을 옥죄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귀에 에드먼드의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리 목숨을 왜 파리 목숨이라 하는지 알고 있나?”
엘리자베스는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어쩐지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에드먼드는 그런 그녀를 음험한 눈빛으로 더 압박하며 말을 이었다.
“사는 것도 죽은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목숨. 누군가 휘두르는 손짓 하나에 순식간에 죽음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지.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엘리자베스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2황자님께 그 시녀가 있는 곳을 알려 드리면 전 황후 폐하께 죽게 됩니다.”
“당장 알려 주지 않으면 지금 나에게 죽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후후, 두 분 다 절 죽이신다 하지요. 하지만 살게 되었을 때 황후 폐하께서 저에게 많은 것을 주시겠죠. 귀하신 아드님을….”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고 애써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게 주신 것처럼요.”
에드먼드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때 엘리자베스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 진작 이렇게 물으셨어야죠.”
에드먼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얼른 말하거라!”
엘리자베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제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지요.”
그녀의 모호한 대답에 에드먼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돌리지 말고 원하는 것을 똑바로 말하도록.”
배부른 사자처럼 나른한 미소를 짓던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저에게 2황자 전하의 약혼자 자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건 이미 어머니에게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엘리자베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약혼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2황자 전하께서 사람들 앞에서 제 약혼자로서 본분을 지키셨으면 합니다.”
에드먼드는 조용히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그것만 지켜 주신다면 단순히 증인을 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린 토트를 감옥에서 빼내 드리겠습니다.”
에드먼드는 진심인지 가늠하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내가 그대의 약속을 어떻게 믿지.”
“2황자께서는 믿고 못 믿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십니다. 오늘 바로 그 약속을 들어 드릴 테니까요.”
“……!”
엘리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보았다.
“물론 2황자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면 말이죠. 그리고 오히려 그 부분을 물어보고 싶은 것은 저입니다. 앞으로 약혼자로서 본분을 다하실 것인지 제가 어떻게 믿지요?”
‘이 약속을 하게 된다면, 더는 아이린과 나는 친구로서도 만날 수 없겠지.’
에드먼드는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믿겠는가? 계약서라도 적어야 하는가?”
엘리자베스는 잠시 그를 지그시 보았다.
그리고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군요.”
“…….”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이린 토트를 오늘 안으로 바로 풀어 드리도록 하죠. 그러면 오늘 연회부터 저의 진정한 약혼자가 되어 주시는 겁니다.”
에드먼드는 다시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알겠다.”
“그럼, 오늘 저녁 7시에 데리러 와 주십시오.”
에드먼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 * *
“아이린!”
“후후, 왔어요?”
“응. 보고 싶어서.”
“2시간 전에도 오셨잖아요.”
레온하르트는 입을 살짝 삐죽이며 말했다.
“아이린이 너무 보고 싶은 걸 어떡해. 면회 시간으로 하루 1시간은 너무 짧아!”
“감옥이잖아요.”
면회 시간도 아닌데 그녀를 어떻게 만나러 왔을까 하겠지만, 사랑에 눈먼 레온하르트가 못 할 일은 없었다.
바로 아이린이 갇혀 있는 감옥의 작은 창문을 통해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면회를 와서 저 창문을 보았을 땐 혹시 모르니 막아 버려야 하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집무실에 가서 그녀가 보고 싶어 눈앞에 어른거릴 때, 감옥의 창문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의 다리가 절로 움직여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 보고 싶다.”
레온하르트는 헤헤 웃으며 창문에 매달려 속삭였다.
그때 기사 질리언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아이린의 감옥으로 달려왔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다.
그때 누군가가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순간 놀라 고개를 돌린 그는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레온하르트를 잡으러 온 저승사자, 바로 제이드였다.
“무슨 소드 마스터가 이렇게 지척에 오는데도 모르시고. 귀빈들이 기다리고 계시는데 지금 여기서 뭐 하십니까? 황.태.자.전.하!”
“하하, 그게… 잠시만 아이린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지.”
“정말 잠시만 보려 했습니까?”
레온하르트는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 잠시만에 잠시만을 더한다고 해야 할까?”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이드는 아이린에게 살짝 묵례한 후 레온하르트의 팔을 붙들고 질질 끌고 갔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아이린에게 팔을 뻗었다.
“으아! 아이린!”
마치 그의 모습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가 된 것 같았다.
아이린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내일 봐요!”
“아이리…인!”
그때 등 뒤에서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기사 질리언이 감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린은 당황하며 말했다.
“질리언 님? 황태자 전하는 방금 가셨어요.”
질리언은 그런 아이린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린 씨! 이제 되었습니다!”
“돼요? 뭐가요?”
“아이린 씨를 지금 당장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네? 석방이요?”
“엘리자베스 공주의 반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반지를 찾았다고요?”
‘날 힘들게 감옥에 보내 놓고 왜 이제 와서 찾았다는 거지?’
아이린은 감옥에서 나가게 되었는데도 기쁨보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질리언이 웃으며 아이린을 재촉했다.
“그렇게 서서 뭐하십니까? 어서 이곳을 나가셔야죠.”
아이린은 크게 기뻐하는 질리언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여기 있는 것이 안전한 것 아냐?’
“저… 하루만 더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무슨 소리 하세요. 감옥에 더 있으면 부정 타요. 당장 필요한 것만 들고 가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챙겨서 가져다 드릴게요.”
아이린은 그렇게 나오고 싶었던 감옥에서 쫓겨나듯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멍하니 황태자궁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에드먼드?’
그 순간 대연회장에서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이해해보려 했지만, 왠지 섭섭한 마음에 날이 선 목소리가 나갔다.
“에드먼드, 무슨 일이에요?”
에드먼드는 순간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일은. 아이린이 보고 싶어서 왔어. …아이린은 날 보고 싶지 않겠지만.”
아이린은 그의 뒷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제가 에드먼드를 보고 싶지 않는다는 것이.”
에드먼드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이린을 감옥에 보낸 건 내 어머니 황후 폐하니까.”
에드먼드는 말끝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참, 황후와 에드먼드가 모자간이라는 사실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네. 에드먼드, 내가 감옥에 간 동안 마음이 매우 불편했겠구나.’
“저 괜찮아요. 그리고 오히려 에드먼드가 보고 싶었죠. 무슨 친구가 이래요? 면회도 오지 않고!”
에드먼드는 아이린의 투정 섞인 말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럼, 날 미워하지 않는 거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내가 왜 에드먼드를 미워해요. 음, 맛있는 것 들고 면회를 안 와서 섭섭하기는 하네요.”
에드먼드는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 미안해!”
“무슨 사과가 이리 빨라요. 칫. 화가 난 척도 할 수 없겠네. 암튼 다음에 맛있는 거 사주기예요.”
에드먼드는 아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에.”
아이린은 어쩐지 슬픔이 묻어나는 그의 눈빛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나?’
그때 에드먼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가야겠다. 나 이제 예전처럼 아이린이랑 못 만날지도 몰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저랑 못 만나다니요.”
에드먼드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약혼하거든.”
“약혼…이요?”
‘갑자기?’
아이린은 의아했다.
두 황자의 비로 여러 가문 영애들의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그 중 누군가로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황태자 전하도 이렇게 갑자기 약혼이 결정되는 게 아닐까?’
아이린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린.”
“…네.”
“괜찮아?”
‘후우, 정신 차려! 미리 겁내지 말자!’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좀….”
‘그래도 이제는 에드먼드의 확실한 편이 생기겠네. 그 약혼자가 황후의 학대도 막아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린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약혼 축하해요.”
“…고마워.”
그녀의 축하에 에드먼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약혼하는 사람의 표정이 왜 저러지? 다른 무슨 일이 있나? 참, 약혼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았네.’
아이린은 내심 궁금했기에 얼른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잘생긴 에드먼드와 약혼하는 그 행운의 영애가 누구예요?”
그 순간 에드먼드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메르헨의 엘리자베스 공주야.”
‘엘리자베스 공주를 에스코트해서 조금은 짐작했었는데. …에드먼드, 그래도 원작에서 못 이룬 사랑을 이뤘네.’
아이린은 어쩐지 잘된 것 같아 속으로 웃었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삐진 척 팔짱을 끼며 입을 삐죽였다.
“칫, 아름다운 약혼자 생겼다고 친구를 바로 버리는 거예요?”
에드먼드는 당황한 듯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야! 내가 어떻게 아이린을 버려.”
‘큭큭, 에드먼드는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이리 순수한데 왜 흑막이라 하는지.’
“그럼요?”
“그저, 또 어머니가 아이린을….”
아이린은 어두워지는 에드먼드의 얼굴을 보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약혼식은 언제예요?”
“신년제 마지막 날 오전.”
“허, 당장 이틀 뒤네요. 그렇게 빨리요?”
에드먼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뭐야, 황후가 완전 작정을 하셨네. 신년제라 손님은 엄청나겠구나.’
아이린은 이내 환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저보다 먼저 솔로를 탈출하다니 좀 괘씸하긴 하지만. 진심으로 축하해요, 에드먼드.”
“축하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정말 미안하지만… 약혼식 초대장은 보내지 못할 것 같아.”
에드먼드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불쌍한 에드먼드. 엘리자베스 공주도 대단한 시월드를 맞았네.’
“괜찮아요. 에드먼드. 마침 저도 신년제라 바쁘고요. 그리고 이렇게 인사했으면 되었죠.”
아이린은 금실로 수놓은 그의 검은 제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바로 엘리자베스 에스코트 하러 가려나 보네.’
“이제, 어서 가요. 엘리자베스 공주가 기다리겠어요.”
에드먼드는 무언가 망설이듯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
‘뭐지. 미안해서 그런가?’
“저 괜찮으니 어서 가 봐요. 저도 이제 방에 가서 쉬어야겠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응, 나중에… 봐.”
아이린은 손을 흔들고는 황태자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에드먼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나중에…. 그때가 언제일까? 다시 지금처럼 웃으며 단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그때 그의 상념을 깨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먼드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고한 백합처럼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였다.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으로 믿었는데요.”
에드먼드는 얼굴을 굳히며 시계를 보았다. 그가 약속한 7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미안하군. 다음부터는 늦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날 찾았나.”
엘리자베스는 샤르르 눈매를 접으며 말했다.
“왠지 이곳을 지나고 계실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에드먼드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만 연회장으로 함께 가지. 엘리자베스 공주.”
엘리자베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네.”
‘그래요. 내 복수를 위해서 당신과 기꺼이 함께 가겠습니다.’
* * *
황제는 2황자의 약혼식을 끝내고 집무실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의자 등받이에 몸을 눕히듯 푹 기대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림자들이 분명 연애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황태자 이놈의 자식은 왜 결혼 소식이 없는 거야?’
그는 하루빨리 귀여운 며느리와 손주를 갖고 싶었다.
‘무뚝뚝한 아들 녀석보다 애교 많은 며느리를 빨리 갖고 싶은데. 그놈 진짜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어이구, 불러서 물어볼 수도 없고.’
어쩐지 답답함에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러다 작은놈이 먼저 장가를 가겠군.”
“누구든 빨리 결혼을 하셔야지요. 후계가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립니다.”
레이먼드 공작이었다.
황제는 못마땅한 듯 눈썹을 움찔거리며 물었다.
“언제 온 건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황제의 집무실을 무슨 자네 집 안방 드나들듯이 하는군.”
“안방이라니요. 분명 노크를 했습니다.”
황제의 목소리에 다소 흥분이 깃들었다.
“누구든 결혼을 해야 한다니. 내가 황태자를 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기 때부터 친구라는 놈이!”
레이먼드 공작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입니다.”
“매정하군.”
“인륜적으로 조카 같은 녀석이 잘되는 것이 좋겠지만, 저는 룩스 제국의 안위가 먼저인 재상이라서요.”
황제는 잠시 회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이먼드, 자네 정말 많이 변했어.”
레이먼드 공작은 조용히 황제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으십니다.”
황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레이먼드 공작이 먼저 그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선 황태자 전하를 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먼저 황태자 전하를 단속부터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단속이라니? 황태자의 무엇을?”
순간 레이먼드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모르시고 계셨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평민 직원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는 소문 말입니다.”
“아, 그거. 레온 녀석이 날 닮아서 그런지 귀엽고 참한 아가씨랑 사귀더군.”
레이먼드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네, 맞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선 폐하를 너무 닮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전 황후가 죽은 후 이렇게 웃는 것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레이먼드 공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아카데미 수석이라 하더군. 지난번 레온이 데려왔는지 사자궁 정원에 놀러왔을 때 살짝 보았네.”
“…….”
황제는 자기 딸내미를 자랑하는 팔불출 아빠처럼 헤벌레 웃었다.
“허허, 얼마나 사랑스럽고 앙증맞게 생겼던지. 하루빨리 내 며느리로 데리고 오고 싶더군.”
레이먼드 공작은 답답함에 황제를 불렀다.
“황제 폐하!”
“뚝뚝하고 불퉁한 레온 녀석보다 엄마를 닮아 머리도 좋고 귀여운 손주를 빨리 보고 싶은데.”
“폐하!”
“레온 녀석, 왜 이리 진도가 느린 건지.”
“폐하! 정말!”
레이먼드 공작은 잔뜩 약이 오른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왜? 부러워서 그러나?”
“부럽긴요. 무엇이 부럽습니까? 그 직원, 평민에 고아라고 합니다. 황태자비로서는 맞지 않습니다.”
“난 내 며느리가 똑똑하고 착하고 귀여우면 되었네.”
‘그 평민 직원이 두 부자를 단단히 홀렸구먼. 제이드도 자주 만나는 것 같던데, 먼저 내 자식부터 단속해야겠군.’
“황제 폐하의 며느리이기 이전에 차기 황후에는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전 황후 폐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또다시 그 일을 겪으시려는 겁니까?”
황제는 긴 한숨을 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황족의 자리는 그 누가 앉아 있더라도 위험한 자리네.”
레이먼드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전 황후 폐하께서 현 황후처럼 든든한 뒷배가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뒷배, 내가 되겠네. 난 아직 젊고 오래오래 건강히 살 거라네.”
“…….”
“내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면 되지 않겠는가. 황제인 나보다 더 든든한 뒷배가 어디 있겠나?”
“허허, 황제 폐하는 아카데미 때나 지금이나 고집불통이십니다.”
“하하, 나같이 착한 고집불통은 괜찮다네.”
그 말에 레이먼드 공작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잘도 하십니다.”
“응, 난 원래 말을 잘하네.”
자신을 향해 빙글빙글 웃는 황제에 레이먼드 공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 어찌 되었든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국제회의를 들어가시려면 체력을 비축하셔야 합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십시오.”
그의 말에 황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니, 고작 아침에 약혼식에 잠깐 참여한 것 가지고 체력을 비축하라니. 나 아직 거뜬해. 아카데미 때부터 소드 마스터인 거 잊었어?”
“알다마다요.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아카데미 때부터 소드 마스터시니, 강철로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어딘가 고장 날 때가 되었습니다.”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 레이먼드 공작을 보았다.
“그건 또 무슨 신박한 개 소리십니까? 이보십시오, 룩스 제국의 재상님. 너나 나나 아직 50도 안 되었는데 늙은이 같은 말은 그만해. 나 아직 전쟁에 나가도 한 번에 수십 명은 거뜬하다고.”
레이먼드 공작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남아 있는 황제의 허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거뜬하신 폐하는 쉬시든 마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 피곤해 먼저 들어갑니다.”
“그래, 레이먼드 공작. 걱정 말고 먼저 가서 쉬도록.”
레이먼드 공작은 살짝 묵례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레이먼드 공작이 돌아가고 집무실에 혼자 남은 황제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황제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아이린, 귀여운 내 며느리. 대체 이 아들놈은 언제 귀여운 며느리를 인사시켜 줄 참인지. 그런데… 이번 일도 황후의 짓이었지.’
순간, 황제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오며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이내 황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림자.”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황제 폐하.”
이내 황제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황궁 직원 아이린 토트의 경호를 더욱 강화하도록 하라.”
“존명.”
황제는 창가에서서 황태자궁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꼭 지켜내겠다.’
* * *
오랜만에 방으로 돌아온 아이린은 긴장이 풀렸는지 무기력하고 나른한 기분에 움직이기가 싫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것인지 그 와중에 눈길이 저절로 책상을 향했다.
“하암, 일이 잔뜩 쌓여 있을 텐데. …에라, 모르겠다.”
이내 그녀는 침대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 그대로 털썩 누웠다.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지는 시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꽃밭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편안한 기분에 절로 입에서 늘어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아아.”
아무리 시설이 좋다고는 하지만, 감옥은 감옥이었다.
황태자가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안전가옥과는 비교가 될 리 없었다.
아이린은 보드라운 침대 시트에 얼굴을 비비며 헤실헤실하게 얼굴이 풀어졌다.
“으아, 그리웠어.”
‘나도 참 간사하네. 곰팡이 핀 천장에 만족하던 것이 얼마 전인데 말이야. 으이구, 이미 자본주의의 맛에 길들어진 어린 양이 된 것이야.’
아이린은 그대로 침대 위를 기어가 폭신한 베개를 베고 그 옆에 긴 쿠션은 팔과 다리로 안았다.
곧 이불을 목까지 덮으니 아이린은 밀려오는 포근함과 함께 몸이 노곤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기분 좋아. 이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침구에 신경을 쓰는 거였어.’
아이린은 이러고 있으니 막 이 세계에 처음 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뻣뻣하고 꿉꿉한 침구 때문에 꽤 고생을 했지.’
어쩐지 집으로 돌아갔을 때 적응이 꽤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배 부분에 묵직한 느낌이 들어 아이린은 몸을 뒤척였다.
그런데 커다란 돌이라도 얹어 놓은 것같이 몸을 아무리 비틀어도 여전히 그 묵직한 것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으으, 뭐야. 답답해.’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눈꺼풀을 올린 순간, 아이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배를 베개 삼아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헐 어쩌지?’
아이린은 감옥 안에서 잘 먹고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좀 더 볼록해진 배가 민망해졌다.
그래서인지, 저절로 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잠든 레온하르트가 불편한지 신음소리와 함께 살짝 뒤척였다.
“흐으음….”
아이린이 얼른 배에 힘을 풀자, 그제야 편해졌다는 듯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맺혔다.
‘잉, 이걸 정말 어째.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아이린은 배에 힘을 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물베개처럼 힘을 빼는 것도 민망했다.
어쩐지 자괴감이 느껴져, 이 상황에서 세상 편히 잠든 그가 괜히 원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아이린의 움직임을 느꼈는지 레온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뭐지, 이 허전함은?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좀 얄미웠는데.’
아이린은 그 순간 이상하게도 허전한 기분이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편 레온하르트는 잠이 덜 깨었는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이린 또한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었다.
“…아이린. 잘 잤어?”
잠시 멍했던 아이린은 그를 뚜렷이 인지하는 그 순간 현타가 밀려왔다.
‘뭐야, 사람 홀리는 저 목소리와 눈빛은? 설마, 자다 깨는 순간에도 남주 버프야? 작가님 그렇게 안 봤는데, 원작 설정 참 결벽증마냥 디테일하네.’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이 없는 아이린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아이린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엎드려 자다 일어나면 자국이라든가 침이라든가 뭐 그런 것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다못해 머리라도 눌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잠시 휴식을 취해서 저런가, 피부가 화장품 회사의 광고 모델 뺨칠 것만 같았다.
그뿐인가? 잠을 깨려는 듯 깜박거리며 움직이는 긴 속눈썹이 하늘하늘 춤을 추는 듯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흐릿한 그의 눈동자마저도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게 레온하르트는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미모로 세계 정복을 할 것 같았다.
아이린은 혹시 몰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남자는 왠지 화장실에서도 아름다움을 뽐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 뭐야, 이 상황. 나 지금 나라를 구한 거야? 뺏긴 거야? 이것이 잘생긴 남친을 가진 보통 여자의 비애인가?’
아이린은 어쩐지 그를 볼 때마다 자괴감에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잖아. 받아들여야지.’
아이린은 자신의 크나큰 용기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내며 이내 해탈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린, 어디 아픈 거야?”
분명 그녀를 걱정해서 물어본 말일 텐데 어쩐지 뼈를 때렸다.
‘그래 아프다, 마음이 만신창이야. 흑흑.’
아이린은 계속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요. 그저 자다 일어나서 그래요. 그런데 왜 여기 있어요?”
“그게… 아이린이 보고 싶어서 왔다가 나도 모르게. 헤헤.”
레온하르트는 이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이린은 그의 티 없이 진실한 미소가 예뻐 그의 입가를 매만졌다.
레온하르트가 순간 멈칫했지만 아이린은 이를 멈추지 않고 그의 입꼬리 끝에 쪽 하며 입을 맞췄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입가에 손을 올렸다.
“아, 아이린.”
아이린은 그런 레온하르트가 귀여워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반대쪽 입가에도 입을 맞췄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붉힌 채 나머지 한 손을 올려 입가를 가리며 그녀를 보았다.
“아이린!”
그때 문이 달칵 열리며 제이드와 데이지가 들어왔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정신이 나간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린은 그 순간 그를 보고 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숙인 그의 금발 사이에 붉은 꽃이 핀 것처럼 귀 끝이 빨갛게 익어있었다.
심장을 강타하는 그의 귀여움에, 아이린은 스마트폰이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으아아, 지금 스마트폰 한 대라도 있었다면 이 순간을 담을 수 있을 텐데.’
아이린은 꿩 대신 닭이라고, 오늘 밤에 그림으로라도 남기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데이지가 언제 가까이 왔는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치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 왜 이러고 계시니? 혹시 어디 아프신 거야?”
그 순간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제이드가 몸을 폴더처럼 접더니 경기를 일으키듯 웃기 시작했다.
“풋, 큭큭. 킥킥. 푸하하하.”
데이지는 순간 놀란 눈으로 제이드를 보며 아이린에게 속삭였다.
“아이린, 우리의 최애는 왜 저러실까?”
데이지가 소파 테이블 앞에 물 잔과 제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혹시 누가 저 물에 무슨 약이라도 탔나?”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러왔다.
데이지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나는 냄새였다.
“데이지, 그거 나 주려고 가지고 온 거야?”
아이린의 물음에 데이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지금 벌써 저녁 식사 때가 한참 지났다고.”
“헐, 벌써?”
“응, 지금 9시가 넘었어. 네가 식당에 안 오길래 챙겨왔지.”
“우와, 데이지 최고!”
그제야 레온하르트가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네?”
레온하르트는 소파 옆 테이블 위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가져왔는데. 맛있는 거.”
아이린은 순간 그의 귀여운 질투에 폭소를 터뜨릴 뻔한 것을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아, 네. 정말 고마워요, 레온.”
그때 제이드가 불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시원한 음료를 가져왔습니다.”
아이린은 제이드를 바라보다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풋, 하하하하.”
그 순간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린을 바라보다 함께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가 아플 정도로 한바탕 웃은 아이린은 이내 입을 열었다.
“아, 저녁이라 아쉽네요. 밖이 따뜻했으면 피크닉이라도 가면 좋았을 텐데.”
그때 레온하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가면 되지, 피크닉. 우리 그런 곳이 있잖아. 그치, 제이드?”
“응?”
잠시 멍하니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던 제이드는 이내 동의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요, 아이린 씨. 가면 되지요. 좋은 곳이 있습니다. 따뜻하면서도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그 순간 아이린과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런 곳이 있어요?”
“있지요, 그런 곳이. 바로 전 황후 폐하의 정원에 있는 유리온실입니다.”
아이린은 순간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그곳은 원작 여주 엘리자베스도 결혼 후 외전에서나 가 본 곳이었잖아? 그런 곳에 우리 모두를 데리고 가겠다는 거야? 이렇게 갑자기?’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편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때 제이드가 그녀의 상념을 깨며 말했다.
“저도 저녁을 걸렀더니 살짝 출출해서 말이에요. 더 늦기 전에 가시죠.”
그 말을 들은 데이지는 깜짝 놀라며 바구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헉, 빈속이 오래가면 크게 아플 수 있어요. 우선 이거라도 드시면서 가세요.”
그녀가 내민 건 마치 칼로리 바처럼 견과류와 곡물이 얽혀 있는 과자였다.
감옥에 있었던 아이린에게 영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데이지는,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바구니를 채워 왔던 것이었다.
제이드는 곧 데이지가 내민 과자를 받아 들며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데이지 씨.”
그 순간 아이린과 데이지에게서 동시에 ‘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온하르트는 이제는 그런 두 사람이 익숙했는지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제이드를 쏘아 보았다.
제이드는 그런 그들의 상태를 모르는 듯 맛있게 과자를 한 입 깨물었다.
“으음.”
그는 평소 단 음식을 즐기지 않지만, 고소함에 어우러진 은은한 달콤함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 먹어 보는 맛이군요. 혹시 파티에 새로 나온 디저트인가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데이지는 얼른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요. 제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데이지 씨께서요?”
제이드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알기론 데이지는 큰 상단을 거느린 부유한 남작가에서, 여느 귀족보다 더 유복하게 살아온 아가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