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데이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모두 아이린에게 배운 거예요.”
“내게 배우긴. 먹고 싶다며 말로 알려 줬는데 결과물을 만들어온 건 데이지 너였잖아.”
“에이, 아이린이 먹고 싶다는데 당연하지.”
“뭐가 당연해. 전혀 당연하지 않아.”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그녀와 함께 덕질을 하는 친구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덕질을 할 때만 친구지 그 외에 다른 이유로 만난 적이 없었다.
“너 같은 친구는 처음이야, 데이지. 게다가 하녀가 아닌 네가 직접 만들다니! 정말 놀랐어. 고마워.”
데이지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야, 고맙긴. 견과류로 만든 새로운 디저트를 알게 되어서 얼마나 즐거웠다고.”
레온하르트는 입을 삐죽이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나도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제이드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젓고는, 이내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맛있으면서도 영양 가득한 디저트로군요. 이런 디저트라면 저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겠습니다.”
아이린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드 님, 달콤한 것을 싫어하세요?”
제이드는 일순 표정을 굳히다 이내 입을 열었다.
“네, 즐기지는 않습니다.”
“정말요?”
데이지와 아이린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함께 디저트를 먹을 때 매번 맛있게 먹는 모습만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이드는 단 것을 매우 싫어해. 아니 혐오한다고 해야 하나?”
“어, 분명 잘 드셨던 것 같은데.”
제이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독살의 위험 때문이지요. 저의 음식 기호가 알려지면 적들이 황태자 보좌관인 저를 노리기 쉬우니까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그늘이 졌다.
“미안…하다.”
제이드는 그의 뜬금없는 사과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사과야? 너 혹시 누락한 급한 서류라도 있는 거야?”
“아니, 네가 나와 함께 해서 이런 일들이….”
제이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너와 함께 하지 않더라도 그랬을 거야. 우리 가문과 황후의 친정인 버나드 가문은 함께 갈 수 없다는 것 너도 알잖아.”
“…….”
“새삼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레온. 난 어차피 겪을 일을 겪은 거였어. 그리고 힘든 일을 겪는 그 순간에 친우인 네가 함께 있어 좀 더 가뿐히 지나갈 수 있었고.”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종이 위에 펜이 움직이는 쓱쓱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흡.”
아이린이 동그랗게 뜬 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보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데이지는 두 손을 모으고 헤벌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어쩐지 그녀들의 눈빛에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뭐, 뭐하는 거야, 아이린?”
“뭐하긴요. 레온, 잠깐 조용히 있어 봐요.”
“아이린!”
“흐흐흐, 두 사람 지금 딱 좋아요. 그렇게 가만히 계셔 봐요.”
“그래요. 아이린의 말대로 해주세요.”
데이지는 점점 완성되어 가는 아이린의 그림을 보고 흥분하며 소리쳤다.
“우와! 아이린, 역대급 대작이 나올 것 같아.”
아이린은 펜촉을 섬세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응, 데이지. 조금만 기다려 봐!”
방 안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잔뜩 몰입하는 아이린을 보며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도 그녀의 완성된 그림이 궁금해졌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원래 꿈이 화가였나?’
방안에는 종종 데이지의 감탄사와 펜대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사라락. 사락.
“하아!”
쓱쓱쓱.
“어머머, 어떡하니!”
그렇게 30분 정도가 흘러갔을 무렵 아이린은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었다.
“다 했다!”
데이지는 얼른 아이린의 그림을 뺏어 들었다. 그녀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아름다운 장면이야! 바로 앞에서 관람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그림으로 남길 수 있다니! 아이린, 대단해!”
“흥흥, 내가 생각해도 이번 건 역대 최고야!”
“아이린, 나 이거 주면 안 될까? 응?”
아이린은 살짝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응, 데이지 가져. 대신 옮겨 그릴 때 잠시 빌려줘.”
데이지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나 우리 가문의 가보로 남길 거야!”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흥분한 듯 얼굴이 상기된 두 여자를 바라보다 서로를 보았다.
‘무슨 그림이기에 저런 표정이지?’
‘나야 모르지. 궁금하면 네가 가서 봐.’
레온하르트는 궁금한 마음에 데이지에게 가까이 걸어가 그림을 보았다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림 속에는 자신과 제이드가 사랑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서로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그림이기에…?
충격을 크게 받은 듯한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제이드도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보았다.
‘…후,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 이렇게 비춰지니 아직도 혼자이지.’
제이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그림을 외면하며 바구니를 들었다.
“아이린 씨, 데이지 씨, 이제 가요. 이러다 밤새우겠어요.”
그 순간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 데이지의 눈에 제이드가 굳은 표정으로 돌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제이드는 데이지에 대한 충격으로 얼굴이 굳은 것은 아니었지만.
데이지는 정신이 번쩍 들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 설마 제이드 님 있는 곳에서 덕밍아웃(덕후인 것이 주변에 알려짐) 한 거야? 아무 계획도 없이?’
데이지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아이린을 바라봤다.
아이린은 그런 데이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너 제이드 님께 덕밍아웃 한 거야.’
‘으악! 이제 어떻게 제이드 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나름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데이지는 순간 둔기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때 아이린이 데이지가 들고 온 바구니를 들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만 생각하고 가자, 데이지. 머리가 복잡할 때는 먹는 게 최고지!”
그때 눈치껏 방을 먼저 나서던 제이드와 함께 나가던 레온하르트가 돌아서며 싱긋 미소 지었다.
“얼른 나오세요. 귀여운 아가씨들.”
아이린은 얼른 데이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이지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아이린의 손을 잡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룩스 제국의 황태자 레온하르트의 어머니, 전 황후 소피아 브에노.
그 이름처럼 지혜롭고 착하기로 유명했던 그녀는 단순히 자리만 지키는 황후가 아니었다.
황제를 도와 매 순간 백성들을 위해 헌신했고 항상 백성을 위해 고민했다.
덕분에 황제에게 건의한 정책이나 그녀가 선택한 정책은 모두 틀린 적이 없었다.
단 하나, 그녀의 마지막 선택을 제외하고 말이다.
황후는 자신의 뒷배가 되어주던 선황이 돌아가시고 급격히 입지가 좁아졌다.
처음 평민 황후라 결혼을 반대했던 귀족파들이 들고 일어나 그녀를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귀족파들 중에서도 버나드 공작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고자 하였다.
소피아 황후와 황태자에게 암살 위협이 뒤따랐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물론 그의 남편인 지금의 황제가 그림자들을 보내 두 사람을 보호하려 애썼다.
하지만 선황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제는 귀족들을 장악하기에도 바빴다.
그 때문에 직접 나설 수 없었던 그는 그림자들을 보내 두 사람을 보호하려 애썼다.
그러나 버나드 공작은 결국 틈을 발견했고, 바로 그때 어린 황태자 레온하르트의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황후는 그렇게 어린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결국 버나드 공작과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는 대신 자신의 어린 아들은 살려 달라고.
결국 그렇게 버나드 공작의 야욕으로 황후 소피아는 독에 당해 죽게 되었다.
버나드 가문에 의해 암시장에 유통되는 독이 든 향수.
그것이 소피아 황후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황태자가 밝혀내기 전까지는.
황후는 죽기 전 자신이 아끼던 유리온실의 열쇠를 아들에게 맡겼다.
어머니와의 좋은 추억이 많았던 유리온실 ‘피필리오’.
때문에 레온하르트는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유리온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어려움을 이겨낼 돌파구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불안할 때마다 이곳을 찾아 어머니를 만난 듯 안정을 찾았다.
게다가 강화 마법과 은닉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온실은, 어린 시절 그와 제이드의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곳은 그에게도 제이드에게도 매우 의미 깊은 곳이었다.
7살의 어린 나이에 울타리인 어머니를 잃고 성인들의 세계로 떠밀렸던 레온하르트.
하지만 그는 이곳에 남겨진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긍정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어른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소피아 황후 사후 유리온실 피필리오는 레온하르트와 제이드 외에 그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런 피필리오에 아이린과 데이지가 첫 손님이 되었다.
생각보다 그의 결정은 단순했다.
사랑하는 아이린과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친우 데이지라는 이유 하나.
그 마음을 알아챈 제이드가 그의 결정에 무언의 동의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이드 또한 두 사람을 믿었다.
그렇게 그들은 바구니를 들고 소풍을 하듯 전 황후 소피아의 정원에 도착했다.
아이린은 정원을 향하면서 너무 늦은 시간이라 어두울까 걱정하였다.
하지만 밤인데도 정원 안이 야간 꽃 축제에 온 듯 등불로 환하게 밝혀 있었다.
이곳을 처음 보는 아이린과 데이지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아이린, 정말 아름답다!”
“응, 마치 꿈속의 길을 걷는 것 같아.”
정원의 입구에는 전 황후 소피아가 가장 좋아하던 분홍 장미가 그들을 환영하듯 한가득 피어 있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분홍 장미는 황제 폐하께서 어머니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선물로 주신 거라고 해. 비록 그분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아이린은 조용히 장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레온. 황제 폐하의 소원은 이뤄졌어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뜻이 이해되지 않아 눈을 깜박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버지의 소원이 이뤄지다니? 날 사랑으로 키워 주시긴 하셨지만.”
그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침묵을 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새 황후 폐하를 맞이하신 이후, 황제 폐하께서는 이 정원에는 한 번도 오시지 않으셨어.”
그 순간 그의 옆에 서 있던 제이드가 놀라며 말했다.
“레온, 그건…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잊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분은 널 보호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전 황후 폐하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곳을 멀리하신 거야.”
그의 말에 레온하르트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뭐? 제이드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
제이드는 살짝 그늘진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전 황후께서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있던 날, 아버지와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연히 들었어.”
“그, 그런 일이….”
잠시 후 제이드는 회한에 빠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면 진작 알려 줬을 텐데. 아니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친구인 내가 알아채지 못했다니! 정말 미안해, 레온.”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지만 제이드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이드는 잘못 없어. 다 생각이 작은 내 잘못이지.’
그때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소피아 황후 폐하께서도 아마 황제 폐하와 같은 마음이셨을 거예요.”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분의 영원한 사랑의 결실이었던 황태자 전하를 지키려고 모든 것을 거셨을 테니까요.”
그때였다.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두통이 밀려와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이린이 놀라 물었다.
“레온, 괜찮아요?”
제이드는 얼른 레온하르트를 부축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인 소피아 황후가 독살당했던 그날을.
그날은 어머니와 함께 평민 차림으로 외출을 했다.
레온하르트는 의아했지만,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용히 어머니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어떤 골목에 다다르자 망토를 쓴 누군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건 바로…!’
“버나드 공작이었어.”
그때 제이드가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버나드 공작이라니?”
“그때, 내 기억 속의 망토를 쓴 사람 말이야.”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망토를 쓴 사람이요?”
“응,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누군가 망토를 쓰고 나타난 기억이 있었어. 그 뒤에 분명히 망토를 벗는 모습을 봤지만, 이상하게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어. 그저 현 황후가 범인이리라고 생각했는데. 버나드 공작이었다니!”
그때 제이드가 말했다.
“하지만 소피아 황후께서 돌아가신 이후 매번 널 노린 배후가 현 황후라는 건 분명해.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버나드 가문이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정원을 걸었다.
“레온.”
아이린은 작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얼른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데이지를 향해 눈을 접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갈까요?”
그의 미소를 본 순간 데이지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흐흡, 이번 거는 많이 컸어. …난 할 수 있어! 이겨 낼 수 있다! 아자 아자!’
데이지는 자신을 세뇌시키며 애써 마음을 다잡고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뒤이어 제이드와 데이지가 멀찍이 두 사람을 따라 걸었다.
‘헉, 이건 축복일까?’
데이지는 자신의 걸음을 맞추며 천천히 걷는 제이드에게 감동을 넘어 심장이 덜컹거렸다.
마치 당장에라도 심장이 과부하로 터져 버릴 듯 격하게 뛰고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때도 가슴이 들썩이며 숨이 크게 쉬어질 것 같았다.
데이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작게 나눠 쉬느라 매번 고생을 했다.
데이지는 그야말로 제이드에게 홀리고 말았다.
얼마나 홀렸는지 제이드를 만난 날이면 그가 꿈에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고 다음날 아이린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제이드를 만나면 그 꿈이 떠올라 또다시 얼굴을 붉히곤 했다.
데이지는 슬쩍 고개를 들며 앞서서 걷고 있는 황태자를 바라봤다.
‘아, 그래서 들킨 건가?’
그때 그녀의 상념을 깨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지금부터 제 손을 잡고 걸어오십시오.”
그때 제이드가 늘 실내에서 업무를 보느라 새하얀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뭐, 뭐야. 무슨 손가락도 이렇게 하얗고 아름다운 거야.’
데이지는 순간 놀라 입을 가렸다.
업무상 검보다 펜을 오래 쥐어야 하는 제이드다.
살짝 휜 중지에 박인 굳은살은 그의 지적인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가린 손을 살짝 떨며 말했다.
“소, 손을요?”
‘왜 저렇게 떨지? 추운가? 아니면 손을 잡기 싫어서?’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손으로 살짝 얼굴이 가려졌지만, 그녀가 당황하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제이드는 아까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림에는 제이드 자신 말고 레온하르트도 있었다.
그리고 데이지가 아이린이 그린 그림과 함께 그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던 것이 생각났다.
‘데이지 씨는 내가 아니라 레온을 좋아했던 건가? 그래서 그렇게 레온에게 밝게 웃으며 말한 건가?’
제이드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데이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닌 것이 조금 섭섭하기는 한데… 그나저나 데이지 씨, 상처가 크겠어. 짝사랑하는 상대가 친구의 애인이라니.’
제이드는 좀 더 다정히 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데이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 순간 데이지는 레온하르트와 제이드에 관한 거래를 하면서 이성을 잃고 웃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레온하르트를 좋아한다고 제이드에게 오해를 받다니.
데이지가 알게 되면 미치고 팔짝 뛸 만한 오해였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이상한 오해가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르는 데이지는 그의 미소에 그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나저나 룩스 제국 여인들의 심장 학살자 제이드가, 28년 동안 혼자인 것은 황태자 때문만은 아니었나 보다.
레온하르트에게 눈치 없다고 매일 타박하던 제이드도 자신의 연애전선에서만큼은 눈치가 바닥인 듯하니!
그때 제이드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데이지는 여전히 그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내 손을 잡기 싫은 건가?’
“이곳부터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손을 잡지 못 하시겠으면 제 옷자락을 잡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순간 데이지는 고개를 들어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보기만 해도 멀미가 날 것 같이 꼬불꼬불한 미로정원이었다.
‘우와, 저게 다 뭐야?’
“아이린?”
그들 앞에 걷고 있던 레온하르트와 아이린은 이미 미로 속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린 씨는 레온을 따라 정원을 안전하게 통과하고 있을 테니까요.”
“다행이네요.”
“이 미로 정원을 20분쯤 걸어 통과하면 유리온실이 나옵니다.”
그 순간 제이드는 미로정원을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데이지의 손을 잡았다.
‘헉!’
갑작스런 터치에 데이지는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 그를 보았다.
곧 제이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소매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제 가실까요?”
데이지는 순간 그의 달콤한 미소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말끔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애써 이성을 끌어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딸칵.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레온하르트가 말했다.
“어서 들어와.”
그의 말에 아이린은 얼른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와아!”
처음에는 순식간에 한낮의 봄처럼 따뜻해지는 온도를 느껴서.
그다음에는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 보라색 꽃 때문에.
아이린은 매우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레온, 이것은! 어떻게 이것이!”
“응, 아리아 꽃이야.”
‘뭐지? 엘리자베스 공주가 온실에 오는 장면에서 피어 있던 꽃은 분명 분홍 장미였는데. …어떻게 전설 속 최고의 해독제로 불리는 아리아 꽃이 이곳에 있는 거지?’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상념을 깨며 말했다.
“어머니의 취미였어.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나를 생각해서 이 꽃을 기르기 시작하신 것 같아.”
많이 놀랐는지 여전히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아이린을 향해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6살 때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이 꽃의 씨를 이 유리온실에 심으셨어.”
레온하르트는 그 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듯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꽃씨는 분명 어머니의 목걸이 안에 담겨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남겨준 것이라며 소중하게 간직하시던 거였지.”
“…….”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의 일기를 읽으시다가 황제 폐하께 부탁해 이 유리온실을 만들게 된 거야.”
레온하르트는 정원 한쪽에 있는 벤치로 걸어가 몸을 숙이며 무언가를 꺼냈다.
커다란 상자였다.
“그때만 해도 할아버지 선황 폐하께서 살아 계실 때였는데. 어머니께선 앞으로 내가 독에 당할 것을 예감하신 것 같아.”
레온하르트는 상자 뚜껑을 열어 뒤적이더니 낡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물건이 내게 돌아왔어. 아버지이신 황제 폐하께서 보낸 것이었지.”
“…….”
“…그때는 이 물건을 받으며 아버지가 매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물건을 내게 맡기신 것 같아.”
레온하르트는 낡은 노트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이린은 그가 내민 노트를 조심히 받아 들었다.
“외할머니의 일기장이야. 거기 표시된 부분을 한번 읽어 봐.”
아이린은 조심히 노트를 열었다.
‘아리아 꽃의 용법과 효능!’
이윽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외할아버지는 기사로서 공을 세운 단승 귀족이셨어. 선황 폐하께서 이끄는 전쟁을 나갔다가 마물 사냥꾼인 외할머니를 만나셨다더군.”
“네? 마물 사냥꾼이요?”
“응, 동화책을 읽어 주실 때마다 젊으셨을 때는 펄펄 나셨다면서 말씀하시던 것이 이런 의미인지는 나중에 일기장을 보고 알았지만.”
아이린은 일기장을 조심히 넘겨보았다.
순간 그녀는 매우 놀랐다.
제이드 사후에 마물 토벌을 나갔던 레온하르트가 마물을 퇴치할 때 쓰던 약물이 적혀 있었던 것이었다.
‘아, 이 일기장 덕분에 황태자가 나중에 마물을 죽이는 법을 알아냈던 건가?’
아이린은 일기장을 덮으며 아름다운 연보랏빛을 띠는 아리아 꽃을 바라보았다.
동화 혹은 신화에서나 볼 수 있다는 전설의 아리아 꽃.
따뜻한 연보랏빛의 꽃잎은 사람에게는 무해하지만 마물을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성분이 들어 있다.
게다가 아리아 꽃의 뿌리를 달여 먹으면 어떤 독도 해독할 수 있었다.
‘단점은 한 방울만 마셔도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날 만큼 쓰다는 거지.’
아이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아리아 꽃 가까이 쪼그려 앉았다.
‘곧 마물 토벌이 시작될 거야. 그전에 이 꽃으로 스프레이를 많이 만들어 놓으면 제이드 님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어.’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레온, 룩스 제국에 아직 마물이 있나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응, 개체수가 좀 줄어들기는 했지만 마물의 서식지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해.”
“마물의 서식지요?”
“응, 대부분의 마물들은 서식지에서 나오지 않아. 그래서 요즘 마물 사냥꾼의 수도 많이 줄었어.”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개체 수도 적은데다가 서식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니. 그럼 도대체 어째서 마물 토벌을 시작한 것이지? 분명 원작에서 나온 것은 단순한 사냥 정도가 아니라 본격적인 토벌이었는데….’
“아이린,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
“아, 그냥 일기장을 보니 마물을 퇴치하는 스프레이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마물 스프레이요?”
아이린과 레온하르트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아이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데이지가 제이드의 소매를 잡고 수줍게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데이지. 이 기회에 손을 확 잡아 버려야지!’
아이린은 가장 가까운 친구의 심경 변화를 그녀보다 더 잘 알아채고 있었다.
데이지의 마음이 단순한 덕질을 넘어 진심으로 제이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처음에 그렇게 일코를 잘 유지하더니, 이제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나 보네.’
아니나 다를까, 데이지는 슬쩍슬쩍 자신이 잡고 있는 제이드의 소매를 보며 얼굴이 터지기 직전 토마토처럼 붉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데이지는 그의 소매를 놓고 싶지 않은지 끝 부분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때였다. 제이드는 유리온실에 들어와 데이지가 자신의 소매를 놓았다고 생각하며 레온하르트를 향해 확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데이지는 몸의 중심을 잃고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다.
아이린은 조용히 벤치에 앉으며 생각했다.
‘이거 이거, 팝콘 각인데.’
레온하르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녀 옆에 살짝 앉으며 촉촉한 초코 쿠키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아이린은 얼른 받아먹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 순간 로맨스 드라마 한 장면처럼 데이지가 제이드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사무실에서 사는 줄만 알았는데, 나름 관리를 했는지 그의 가슴은 매우 단단했다.
“으아아, 아파.”
데이지는 통증이 이는 코를 잡으며 제이드를 무심코 올려다봤다.
그 순간 데이지의 눈이 마치 사파이어 같은 제이드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헙!”
그리고 이어서 그녀의 귀를 공격하는 제이드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데이지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린, 넌 정말 대단해! 어찌 이런 분과 매일 일해도 괜찮을 수가 있었지? 난 숨쉬기조차 힘든데.’
데이지는 여전히 그의 아름다운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애써 달아난 이성을 끌어 모아 다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의 무게중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는 순간.
‘헉, 이러다 무릎에 시커먼 멍은 예약이겠구나.’
그때였다.
휘청거리는 데이지를 제이드가 그대로 끌어안았다.
곧 데이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탄성 소리가 흘러나왔다.
“와아!”
데이지와 제이드는 동시에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린이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헤벌쭉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레온하르트는 제이드를 향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멋!”
데이지는 순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며 그대로 온실 밖으로 나갔다.
제이드는 레온하르트를 쏘아 보며 그대로 데이지를 따라나갔다.
아이린은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이놈의 입, 왜 그때 감탄하고 그래서…”
“아이린, 그리 데이지가 걱정되면 따라가 봐.”
‘에이구, 이 남자 가끔 눈치가 없다니까.’
분명 뛰쳐나간 건 데이지인데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드 님이 가셨는데, 걱정은요. 그 뒷이야기를 못 봐서 아쉬운 거지.”
레온하르트는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를 보았다.
“그럼, 우리는 따라가 보지 않아도 돼?”
“후우, 잘 들어요. 레온. 이런 상황에서 따라 나가면 정말 눈치 없는 거예요.”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깨달았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네, 자 그럼, 우리는 그들이 올 동안 느긋하게 야식이나 즐길까요?”
아이린은 바구니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순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응.”
‘큭큭, 자동차 강아지 인형이 떠오르네. 이럴 때 보면 정말 대형견 같다니까.’
아이린은 흐뭇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음료를 내밀었다.
그는 또다시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
“고마워.”
아이린은 레온하르트가 작은 것에도 이렇게 매번 웃어 주니 정말 뭐라도 막 퍼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 묻었네?’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샌드위치 소스가 묻은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려다 다시 가방에 넣었다.
레온하르트는 매우 배고팠는지 샌드위치 하나를 더 꺼내 먹고 있었다.
아이린은 예전에 그와 갑작스러운 입맞춤으로 당황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샌드위치를 정신없이 먹어치우던 레온하르는 뒤늦게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보았다.
“아이린, 왜 이리 빤히 보는 거야? 혹시 나 얼굴에 뭐 묻었어?”
레온하르트는 손을 들어 입가를 쓱 닦으려 하였다.
그 순간 아이린의 두 손이 그의 손을 감싸듯 잡아 왔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였다.
아이린의 작고 보드라운 입술이 그의 입가에 와 닿았다.
그러더니 무언가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입가를 핥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레온하르트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윽고 아이린의 얼굴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그녀에게 잡혀 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올려 입가를 매만졌다.
아이린은 혼이 나간 듯 흐릿한 눈빛의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었다.
“복수예요.”
“복수?”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도서관 길 벤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지그시 아이린을 바라봤다.
“복수라고?”
아이린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그의 손을 포박하듯 꼭 잡으며 말했다.
“네, 복수예요. 호호.”
그 순간 그녀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소심한 복수로군.”
아이린의 얼굴에 순간 미소가 걷히고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소심한 복수라고? 뭐가 소심하다는…!’
아이린은 자신을 삼켜 버릴 듯한 눈빛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레, 레온.”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진정한 복수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려 줄게.”
레온하르트는 그와 그녀 사이에 놓여 있던 샌드위치 바구니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어? 저건 왜 내려놓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 복수를 어떻게 알려 준다는 거지?’
아이린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단단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왔다.
그 순간 아이린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이내 그녀는 벤치에 앉은 채로 그의 품에 끌려가고 말았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 손은 이제 놔 주시죠, 아가씨.”
아이린은 그제야 그의 손을 지푸라기 붙잡듯 두 손으로 꽉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아이린은 얼른 그의 손을 놓고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손이 아이린의 목 뒤를 감싸왔다.
아이린은 놀라 그를 불렀다.
“레, 레온!”
곧 레온하르트의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맞닿았다.
이윽고 아이린의 작은 몸이 그대로 그의 넓은 품 안에 쏙 끌어안겼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읍,”
그녀는 순간 놀라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보았다.
묘하게 탁해진 그의 눈빛이 갈증이 난 것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앗!”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아이린은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그의 허리를 안으며 눈을 감았다.
* * *
늦은 야식을 먹고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아서인지 아이린은 이른 아침에 거뜬히 일어났다.
“하암, 잘 잤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다 순간 어제 레온하르트와 나눴던 격정적인 키스가 떠올랐다.
“하, 정말!”
이내 그녀는 얼굴이 뜨거워 짐을 느끼며 손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 사이로 헤벌쭉하고 웃음이 나왔다.
‘참, 행복한 순간이었어.’
순간 침이 흐르는 느낌에 츄릅, 침을 삼키며 입가를 닦았다.
“으싸, 오늘부터 출근이구나. 얼른 출근 준비를 해볼까.”
아이린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와 근무용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역시, 일할 때는 검정이지.”
지난번 데이지에게 미리 부탁해 놓은 것이 감옥에 다녀온 사이에 배달되어 있었다.
아이린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머리가 많이 길었네.’
처음 그녀가 이곳에 왔을 때는 엉덩이까지 오는 긴 곱슬머리였다.
가늘고 보슬보슬한 은발이기에 아침마다 엉켜있는 머리와 씨름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계속 그 길이를 유지했다.
다른 여학생들보다 머리가 짧아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데이지는 귀엽다며 좋아해 주었다.
아이린은 어느새 어깨까지 긴 머리를 손가락에 휘감았다.
신년제 파티장에 온 영애들 모두 긴 머리를 하고 예쁜 장식들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다시 길러 볼까?’
곧 아이린은 머리가 길었던 때를 떠올리며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정말 엉킨 머리 풀다가 대머리 될 뻔했었지.’
긴 머리일 때는 엉킨 머리를 빗으로 풀 때마다 한 움큼씩 머리가 빠졌었다.
아이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파티 때 긴 머리처럼 올림머리를 했더니 레온이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아이린은 찬찬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키, 아직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한 앳된 얼굴.
귀염상이기는 하지만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후우, 이래서는 레온이 아이랑 연애하는 것 같겠네. 머리라도 좀 성숙하게 변화를 줘야 하나?”
아이린은 원래의 귀밑 5센티 단발처럼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해보았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아이린은 슬쩍 시계를 보았다.
아직 오전 7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누구지? 레온인가?’
누구인지 물어보려는 찰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린, 나야. 데이지.”
“응, 데이지, 어서 들어와.”
데이지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데이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러게 말이다. 내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인지.”
아이린은 데이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데이지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잘렸어.”
“뭐? 이 시간에?”
데이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게다가 해고 이유를 물어보니 이유도 없대. 그냥 그만두라면서 그 와중에 또 깨알같이 날 이용해 먹으려고 하더라고.”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널 이용해 먹다니?”
“이거 너에게 전해 주래.”
아이린은 데이지가 내민, 금박으로 수놓은 고급스러운 카드 봉투를 건네받았다.
순백의 카드 봉투에는 금빛 백합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검정색 장미 인장이 찍혀 있었다.
‘뭐지, 이 의외의 문장은? 여인들이 주로 쓰는 백합이나 붉은 장미도 아니고 검은 장미라니!’
아이린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때 데이지가 아이린의 손에서 카드 봉투를 쏙 빼가며 말했다.
“아이린, 이건 내가 열어 볼게.”
“아, 아니. 내가…!”
아이린이 말릴 새도 없이 데이지는 봉투를 거칠게 뜯으며 카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카드를 열어 보던 데이지는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지, 무슨 내용인데 그리 표정이 심각해?”
“그게, 엘리자베스 공주가 자신의 시녀 때문에 네가 피해를 봤다며 사과한대.”
아이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잘됐네.”
데이지는 그런 아이린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지었다.
“그런데 그 사과의 의미로 널 티 파티에 초대하겠다는데.”
아이린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뭐? 티 파티? 그거 귀족 영애들이나 하는 거 아니었어?”
“그렇지, 귀족 영애들의 사교 모임. 그 티 파티를 얼마나 잘 치러 내는지는 누가 그 시즌의 사교계 여왕이 되는지 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
아이린은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들을 상상하며 연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맛있는 티에 곁들이 디저트를 두고 그렇게 골치 아파야 한다니. 예쁜 디저트도, 예쁘게 차려입은 영애들도 조금 불쌍하다.”
“아이린, 그렇게 그녀들을 불쌍해할 때가 아니야. 앞으로 네게도 일어날 일이라고.”
“내게도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니?”
데이지는 초대장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응, 지금도 엘리자베스 공주의 티 파티에 초대받았잖아.”
“아!”
“네가 황태자 전하와 연인이든, 친구이든, 하다못해 그냥 업무적인 사이라고 해도 이렇게 초대되는 일이 앞으로 많이 일어날 거야.”
‘후우, 그리고 레온하르트의 연인인 나는 그녀들에게 견제의 대상이겠지.’
그때 아이린은 데이지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당일 티 파티 초대장이라니! 정말 예의가 없네.”
아이린은 순간 당황했다.
“뭐, 당일? …오늘이라고?”
데이지는 카드의 날짜와 시간을 검지로 가리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이 황당한 시간은? 2시라니, 나는 직장인이라고.”
데이지는 미간을 접으며 말했다.
“그러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엘리자베스 공주가 이번에 황후라는 줄을 잡더니 개념을 상실했나봐.”
“황후라는 줄을 잡아 개념을 상실했다니?”
“2황자 전하의 약혼녀면 황후의 줄을 잡은 거지.”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데이지를 바라봤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에고고, 아이린은 정말 똑똑하면서도 가끔 너무 순수한 것 같아. 아니면 기억상실증인가?’
“응?”
데이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자, 생각해 봐. 너 저번에 도서관에서 2황자를 한두 번쯤 우연히 만났다고 황후 폐하에게 끌려가 죽을 뻔했지?”
“아!”
아이린은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어?”
“응, 엘리자베스가 황후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그녀 또한 목숨이 위험했겠구나.”
“그래, 그런데 위험하기는커녕 끌려 온 공녀가 아니라 벌써 이 나라 황족의 대우를 받고 있어.”
“뭐? 벌써?”
“응, 오늘 궁을 옮긴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시녀를 새로 들인다나.”
그 순간 아이린은 살짝 미간을 접었다.
‘어쩌면 데이지가 내 친구인 것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몰라. 미안해서 어쩌지.’
“데이지, 미안해. 나 때문에.”
데이지는 아이린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라 물었다.
“갑자기 무슨 사과야. 그리고 너 때문이라니.”
“생각해보니 네가 내 친구인 게 알려진 것이 아닌가 해서. 그래서….”
“아, 정말? 그러면 해고로 끝난 게 다행이네.”
“응? 해고로 끝난 것이 다행이라니.”
“엘리자베스 공주, 그 악독한 황후 줄을 잡은 정도면 보통 여자가 아니야. 나한테 패악을 부리지 않고 이 정도에서 깔끔하게 끝내준 게 고마운걸.”
“그래도 너 시녀 일 계속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참, 그건 걱정하지 마. 계속 이 일을 하자면 소속을 옮겨서 계속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제 그만두려고.”
“왜? 갑자기?”
“신년제 파티에 네가 감옥에 가고 너무 정신없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깜박했는데….”
“그 사이 무슨 일 있었어?”
데이지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있었지. 있었어, 아주 큰 일.”
아이린은 데이지의 말에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주 큰일이라니?”
“응, 우리 아버지가….”
“그래, 남작님께서.”
데이지가 이내 활짝 웃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 사기꾼 친구를 찾아서 돈을 모두 되찾아 왔어. 거기다 이자까지 쳐서 받아 왔대.”
“정, 정말이야?”
데이지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아이린은 데이지의 손을 마주잡으며 팔짝 팔짝 뛰었다.
“어머 어머머! 잘 됐다! 잘됐어!”
“하하하, 고마워!”
“그런데, 이자까지 받아 왔다고?”
“응.”
“남작님 정말 대단하시다.”
“대단하긴. 다행히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 놨더라고.”
“단순히 돈을 훔쳐간 게 아니라 오히려 벌었다고?”
“응, 그런 사람 있잖아. 남을 등쳐먹은 돈으로 돈 벌어서 자기만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
아이린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고, 소설 속 세계인데도 엑스트라 사기꾼까지 참 디테일 하구나.’
“그 사람이 여러 사람의 돈을 가지고 선박 무역에 투자해 대박을 냈다 하더라고. 덕분에 합의금으로 더 많은 돈을 받아올 수 있었대.”
“정말, 잘 됐다. 데이지, 축하해.”
“응, 기념으로 이번 주말에 새로 생긴 디저트 카페 내가 쏜다.”
“우와! 데이지 최고! …그런데, 이 초대장은 어쩌지?”
“너 어차피 근무 시간이잖아. 못 가는 거지.”
“그, 그래도 되겠지?”
* * *
아이린은 마시지도 못하는 찻잔을 들며 영애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입으로는 꽃같이 웃고 있지만, 눈빛은 아이린을 태워 죽일 듯 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초대해 놓고 그녀들끼리 작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사람 앞에다 두고. 그런데 나 도대체 왜 여기 있게 된 거지?’
아이린은 오전에 보좌관실 차장에게 불려갔던 일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 공주에게서 정식으로 요청이 왔습니다.」
「네? 티 파티에 공식적인 요청이라뇨.」
「황궁에서는 작은 티 파티도 공식적인 행사이죠. 그 행사에 여직원을 지원 해달라며 아이린 토트 씨를 요청했습니다.」
‘허허. 뭐 이런. 결국 피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거였어.’
「……!」
「아무래 황태자 전하와 보좌관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시간에 맞춰서 요청한 듯합니다. 그래서 이 요청이 나에게까지 온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보좌관실 차장은 평소의 냉기가 빠진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힘이 없는 상사라서 미안합니다.」
아이린은 축 처진 그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보좌관실 막내로서 지원 잘 나갔다 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차장은 그곳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이린은 계속 미안해하는 그의 눈빛에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차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이만 오전 업무 보러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이린은 그곳에서 업무를 보고 점심을 간단히 해결한 뒤에, 막 티 파티에 들어와 앉았던 것이다.
아이린은 디저트를 내려놓는 시녀들을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정말 지원을 나온 것이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아이린은 곧 시녀들이 티 테이블에 놓고 간 미니 마들렌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좋은 것도 있네. 안 그래도 점심이 좀 부실했는데. 그래, 지난 생의 직장 경험을 살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거야.’
아이린은 싱긋 웃으며 마들렌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녀 앞에 앉아 있던 영애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린 토트 양.”
“네.”
“아이린 토트 양은 왜 차를 드시지 않나요?”
그러니 그 옆에 있는 영애들이 아이린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쿠쿡, 어려운 형편이라 차를 즐길 줄 모르시나 봐요.”
‘윽, 나도 즐길 줄 알지. 심지어 취미였다고.’
“그렇죠. 차도 마셔본 사람이 차 맛을 알죠.”
‘딱 봐도 20살도 안되어 보이는데. 차를 마셔 봐도 내가 더 마셔 봤겠구만.’
그때 엘리자베스가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죄송해요. 사과한다고 아이린 토트 양을 초대해 놓고 못 드시는 차를 준비해서.”
‘헐, 말리는 시누이가 더 무섭다더니. 그나저나 이놈의 몸뚱이. 차 하나 못 마셔서 이런 굴욕을 참아야 하는 거야?’
아이린은 카페인에 민감한 몸이 원망스러웠다.
아이린은 속으로 화를 삼키며 애써 웃었다.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럴 수는 없죠. 씁쓸한 맛이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달콤한 과일차를 준비해 드릴게요.”
‘과일차는 괜찮으려나?’
아이린은 계속 거절할 수 없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의 손짓에 시녀가 과일차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우아하게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셔 보세요.”
아이린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찻잔을 바라봤다.
‘뜨거운 건 질색인데. 저렇게 김가지 올라오는 것을 보니 입에 넣는 순간 혀가 익어 버리겠는걸.’
이윽고 아이린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뜨거운 것은 좀 못 먹어서요. 조금 식으면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그 순간 주변의 온도가 쭉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들으라는 듯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뭐지? 저렇게 엘리자베스 공주님의 호의를 무시하다니.”
“그래요, 아무리 사과를 받으러 왔어도 그렇지. 평민 주제에 저렇게 무례해도 되는 건가.”
‘윽, 다 들린다, 이것들아! …휴, 참자 참아. 좀 더 이성적인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그게 다 배우지 못한 티를 내는 거지요. 가족도 가문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것들이 정말! 그래도 고아 앞에서 가족을 들먹이는 건 아니지!’
아이린은 이내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이윽고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다행히 그새 조금 식었는지 김은 나지 않았다.
아이린은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차가 붉은빛을 띠더라니, 딸기청으로 만든 차였네.’
아이린은 딸기를 좋아했기에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찻잔을 든 채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달콤하네요.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 공주님.”
그때였다.
아이린의 옆에 앉아 있던 영애가 마들렌을 잡으려는 듯 움직이더니 그녀의 팔을 툭 쳐버렸다.
그녀는 순간적인 강한 힘에 차를 쏟고 말았다.
“어머!”
“앗!”
아이린은 그대로 사색이 된 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으윽!”
아이린은 그 순간 오른손에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엘리자베스 공주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살피며 말했다.
“아이린 토트 양 괜찮아요?”
아이린은 화상을 입었는지 빨갛게 변한 손을 바라보며 애써 입을 열었다.
“괜, 괜찮습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얼른 아이린의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긴요. 손이 붉은 것이 화상을 입은 것 같네요. 잔은 이리 주세요.”
그러더니 엘리자베스는 한 손으로 찻잔을 받아가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붉어진 손을 꽉 잡았다.
“으윽”
“얼른 치료하셔야 할 것 같네요. 그렇죠?”
아이린은 화상을 입은 손에 점점 파고드는 그녀의 손톱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으읍, 저 연약한 몸에서 어떻게 이런 강한 힘이 나오는 거지?’
아이린은 뿌리치려고 통증을 참으며 손을 틀었지만, 통증만 더할 뿐이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영애들 모두 그녀를 바라보면서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순간 분노와 절망이 아이린의 뇌 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더욱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이린은 잡힌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참, 참아야 돼!’
아이린은 어쩐지 비명을 지르면 저들에게 지는 것 같아 이를 꽉 깨물며 참아냈다.
그때였다.
티 파티가 열리고 있는 작은 홀의 문이 활짝 열리고, 2황자 에드먼드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엘리자베스에게 잡혀 있는 아이린의 붉어진 손을 본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환자는 내가 의무실로 데리고 가겠다.”
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아이린의 손을 꽉 잡은 채 말했다.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손님을 이렇게 많이 초대해 놓고 말인가?”
에드먼드는 얼른 엘리자베스에게 잡혀 있는 아이린의 손을 빼내고 그대로 그녀를 부축하였다.
“약혼자께서는 계속 티 파티를 이어가도록.”
엘리자베스는 무어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2황자 전하. 아이린 토트 양은 얼른 가서 치료하도록 하세요.”
아이린은 그녀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살짝 묵례를 하였다.
에드먼드는 그런 아이린을 부축하며 빠르게 홀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손에 있던 찻잔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동시에 영애들의 비명도 들려왔다.
“어머, 어떻게 해!”
“엘리자베스 공주님!”
시녀들이 달려와 피를 흘리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수건으로 감싸며 말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애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통증을 참는 것처럼 보였는지, 영애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어떡해요!”
“피가 너무 많이 나요.”
“엘리자베스 공주님, 어서 방으로 가서 의사를 부르세요.”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눈꼬리를 내리며 힘없이 말했다.
“죄송해요. 이렇게 티 파티를 망쳐서.”
“어머, 지금 다치셨는데 무슨 그런 걱정을 하세요.”
“그래요. 얼른 돌아가셔서 치료부터 하세요.”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함께 갈게요.…공주님 곁에서 돌봐 드리고 싶어요.”
아이린의 팔을 친 남작 영애였다.
그 순간 다들 그녀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그녀는 이번 티 파티에 초대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신년제 때 엘리자베스를 만난 인연으로 이 자리에 초대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시녀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곧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후우,정말 무서웠어요.”
“어떻게 찻잔이 이렇게 쉽게 깨질 수 있죠.”
“그러게요.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아까 상황이 그래서 웃기는 했는데. 엘리자베스 공주가 보기와 다르게 잔인한 구석이 있었네요.”
“네, 아무래도 그동안의 모습은 모두 가식인 듯 했어요.”
“그래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마치 황후 폐하를 보는 듯했어요.”
“저도요.”
순간 영애들은 황후를 떠올렸는지 어깨를 떨었다.
“우리도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
* * *
엘리자베스가 홀을 벗어나기 전, 아이린은 에드먼드와 함께 가까운 의무실에 도착했다.
의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의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드먼드는 얼른 의무실 한쪽에 마련된 세면대의 물을 틀고는 그녀의 손을 식혔다.
뒤늦게 그런 조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다행히 화끈거리던 통증이 좀 줄어들었다.
아이린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에드먼드는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내가 미안해. 모두 나 때문에….”
아이린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에이, 무슨 이게 에드먼드 때문이에요. 얼른 가서 약이나 찾아봐요.”
그제야 에드먼드는 헐레벌떡 일어나 약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약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의무실을 뒤집어엎고 있었다.
‘…저래서는 더 못 찾겠는데?’
서랍을 열 때마다 약을 못 찾는 것이 답답했는지 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는 것이 보였다.
‘에드먼드, 차분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흥분하는 스타일 이였구나. 쿡쿡.’
그때 쿵쾅쿵쾅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의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곧 레온하르트가 의무실로 뛰어들어왔다.
어디서부터 달려온 건지, 레온하르트는 한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이린은 순간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온!”
에드먼드도 그녀처럼 놀랐는지 서랍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와 울먹이듯 물었다.
“아이린, 어디가 다친 거야!”
아이린은 조용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목부터 손까지 붉어진 화상 위에 엘리자베스에게 할퀴어진 상처로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놀란 것인지 분노한 것인지 부르르 어깨를 떨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플까 봐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그저 손만 뻗었다 거뒀다 하고 있었다.
“의사는?”
그때 에드먼드가 레온하르트에게 걸어와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야. 내가 가서 불러올 테니 형님은 약을 찾아봐.”
에드먼드는 자신이 들고 있던 서랍을 혼이 나간 듯한 그의 손에 쥐여 주며 의무실 밖으로 나갔다.
레온하르트는 에드먼드가 내민 서랍을 뒤적이다 이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유리 장 위에 있는 상자를 내려 약통을 하나 꺼내왔다.
“이거 바르고 나면 좀 나을 거야. 그런데 바르는 동안은 조금 쓰라릴지도 몰라.”
아이린은 그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걱정 마요. 제 살이 여려서 그렇지 보이는 것 보다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는 그녀의 손에 약을 살살 발랐다.
“으윽.”
약은 정말 그의 말처럼 쓰라렸다.
한 가지 그의 말과 다른 점은 조금 쓰라린 정도가 아니라 살갗이 타는 듯 쓰라리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이미 약효가 스며든 곳은 씻은 듯이 낫고 있었다.
‘와, 이렇게 바로 낫다니 후시X보다 더 빠른데.’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이 많이 고통스러워 보이는지 그녀를 향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린, 조금 이따 할까?”
아이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윽, 어차피 발라야 하면 빠르게 쓰라리고 마는 게 낫지.’
“아, 아니요. 그렇게 천천히 바르지 말고 더 빠르게 발라주세요. 으으윽.”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신음소리에 약을 바르지 않는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그녀의 손을 호호 불어 가며 빠르게 약을 발랐다.
그때 살짝 열린 문밖에서 에드먼드가 멍하니 그들을 보며 서 있었다.
의사를 데리고 왔지만, 막상 상처를 살펴본 의사는 이미 잘 처치했으니 잠시 휴게실에서 쉬라고만 말했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이린. …그래. 넌 형님과 있을 때 가장 행복하게 웃으며 살 수 있겠지.’
에드먼드는 그 순간 아들인 자신에게도 악독하게 구는 황후와, 자신보다도 더 어머니를 닮은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여 오는 듯 답답했다.
‘…아이린, 너의 그 미소를 위협하는 것들을 내가 모두 치워 줄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그대는 행복야만 해.’
가슴 한쪽을 붙잡은 에드먼드는 이를 악물며 백합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에드먼드가 백합궁에 도착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이미 치료가 다 끝난 상태였다.
그녀는 매우 말끔한 모습으로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이제야 오셨습니까? 더 빨리 오실 줄 알았는데요.”
에드먼드는 그녀를 향해 살기를 띠며 말했다.
“내가 이야기했을 텐데, 아이린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그 말을 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인가?”
엘리자베스는 순간 어깨를 떨었지만, 이내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네, 그러셨죠. 대신 외적으로는 저의 진정한 약혼자가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요. 그런데 그 화상은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만.”
“아까 그 자리에서 난 너를 살려 두었다. 이만하면 나도 약속을 지킨 것 아닌가?”
에드먼드는 조소하며 엘리자베스를 지그시 바라봤다.
엘리자베스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에드먼드가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한손으로 잡았다.
마치 그 모습이 먹잇감을 사냥하는 매의 움직임과 같았다.
“으읍.”
엘리자베스는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눈가에는 이슬이 살짝 고이고 있었다.
상대가 여느 영애였다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가 양의 탈을 쓴 여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곧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무 시간인 아이린을 티 파티에 초대한 것 자체부터 아주 의도적인 냄새가 났어.”
엘리자베스는 더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는지 발버둥을 치며 그의 가슴을 힘껏 두드렸다.
그 순간 에드먼드는 마치 가슴의 뼈들이 부러지는 듯 격심한 통증을 느꼈다.
에드먼드는 통증을 참으면서도 더 눈을 크게 뜨며 더 또렷이 그녀를 보려 했다.
‘뭐지, 이 강력한 힘은?’
그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엘리자베스의 힘은 결코 연약한 아가씨의 힘이 아니었다.
그 순간 에드먼드의 눈이 이채를 띠며 던지듯 그녀를 놓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자신의 목을 잡으며 켁켁 거렸다.
에드먼드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고도 아랑곳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어머니와 버나드 가문을 믿고 그렇게 날뛰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나 또한 그 버나드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에드먼드가 그렇게 나가고, 그녀의 방문이 부서질 듯한 굉음을 내며 닫혔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로만 경이 들어와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부축했다.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는지 순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자베스! 괜찮은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섰다.
“로만 경. 날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로만은 그 순간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네, 공주님.”
“난 괜찮으니 이만 나가 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이지 마세요.”
로만은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 공주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냉랭한 그녀의 표정에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엘리자베스 공주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반지를 바라봤다.
‘분명 이곳에서 힘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어.’
그녀는 화장대로 달려가 얼른 반지를 던지듯 빼 서랍에 던져 놓았다.
‘아까 분명 그 힘이 발휘되었을 때, 마치 마물이 된 듯 내 이성이 통제되지 않았어.’
엘리자베스는 어쩐지 두려운 마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반지가 든 화장대 서랍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내 그녀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래도 힘을 가졌을 땐 가슴속에서부터 시원한 기운이 올라왔지. 마치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어.’
엘리자베스는 다시 화장대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던져진,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을 좋다고 해야 할까? 싫다고 해야 할까?’
엘리자베스는 다시 그 반지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동안 반지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손가락에 다시 천천히 끼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엘리자베스의 궁을 나온 에드먼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도서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그의 입가에 한줄기의 피가 흘렀다.
그리고 곧 ‘욱’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에드먼드는 얼른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얼마 후 피가 멈추자, 그는 입가를 거칠게 닦아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에드먼드는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그 힘은 결코 아무리 위급해도 연약한 아가씨가 낼만한 힘은 아니었어.’
에드먼드는 이내 창가 아래에 몸을 숙였다. 그리고 수납장을 열듯 그곳을 열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는 나무 벽이 열렸고, 그는 그곳에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연 에드먼드는 그 안에 손을 넣고 뒤적이다 서류 하나를 꺼내었다.
안에 들어 있는 다른 물건들과는 달리 최근에 넣은 듯 별로 낡지 않은 종이 꾸러미였다.
그 서류의 첫 장에는 그의 약혼자,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드먼드는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기사 훈련도, 그 어느 육제적인 훈련도 해본 적이 없군. 혹시 마법사인가?’
계속 서류를 읽어 보았지만, 딱히 마법을 접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었다.
‘룩스 제국에 오기 전까지는 그냥 사랑받는 공작의 딸에 불과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변한 것이지?’
에드먼드는 메르헨 왕실과 관련된 내용 부분을 읽었다.
‘그때 말한 복수가 이들을 향한 것인가? 그렇다 해도 그 힘은 설명되지 않는다.’
에드먼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식?”
평소 미신을 믿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몰려 왔다.
그때였다.
에드먼드의 부하가 창을 통해 들어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큰일 났습니다.”
에드먼드는 호들갑스러운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인가?”
“마물들이 갑자기 날뛰면서 북쪽 서식지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에드먼드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마물이? 마물 서식지의 결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저희 쪽 정보원에 따르면 마물을 막아 놓은 마법 결계를 누군가 파괴한 것 같다고 합니다.”
‘결계를 파괴했다고?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50년 전 룩스 제국의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비밀리에 만들어 놓은 결계였다.
그 이후로 인간은 서식지로 들어갈 수 있지만 마물들은 마치 창살이 쳐진 듯 그곳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마물 사냥꾼이 제국에서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때 그의 부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며 들려왔다.
“결계 밖으로 나온 마물들이 마을로 내려와 사람을 죽이고 미친 듯이 날뛴다는 정보입니다.”
에드먼드는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곧 토벌단이 만들어지겠군.”
“곧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벌써?”
“네, 오늘 열린 국제회의에서 북쪽에 있는 나라들이 토벌단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회의에 참석한 황태자 전하가 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뭐, 형님이 단장으로?”
“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사태가 심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토벌단이 파견되어 마물을 막지 않는다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입니다.”
“토벌단은 언제 출발한다고 하는가?”
“내일 새벽입니다.”
“완벽하게 토벌 준비를 끝내기에는 매우 촉박하군.”
“네, 급박한 상황인 만큼 당장 필요한 무기와 비상식량만 챙기고 나머지는 근처 영지에서 지원받기로 했다고 합니다.”
에드먼드는 한 손을 올려 턱을 살짝 괸 채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착착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리 불길한 느낌이 들지?’
에드먼드의 심장은 불안함에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부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에드먼드는 미간을 접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다.”
곧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한낮의 시간이었지만 매우 어두컴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