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0)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20.

“아이린 씨, 보좌관실에 가서 당장 빨리 처리해야 할 일들을 취합해 보내달라고 해주세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당장 내일 대대적인 토벌단을 이끌어야 하기에 정신없는 두 사람을 두고 아이린은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돌돌 감아있는 손수건을 꺼내어 열어 보았다.

“다행이야. 아리아 꽃을 알맞은 때에 뿌리째 얻게 되어서.”

아이린은 유리온실에 간 날 레온하르트에게 아리아 꽃 하나를 뿌리째 얻어왔다.

원작에서 레온하르트를 대신해 마물에게 죽임을 당하는 제이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거면 제이드 님도 분명 살 수 있어. 내일 출발 전에 만들어 둬야하니 빨리 서둘러야겠어.’

생각을 끝낸 아이린은 얼른 보좌관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황궁 전체의 하루가 바쁘게 돌아갔다.

다음날 새벽.

황태자와 제이드는 오전 중 출발하는 기사단의 준비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러 일찍 움직였다.

아이린은 데이지와 함께 황태자 궁 앞에 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아이린, 토벌단에 꼭 따라가야 해? 그냥 가지 말고 우리 집에 와있자. 응? 나 너무 걱정 돼.”

아이린은 걱정 많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데이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그래도 황태자 전하 옆이 수도보다 더 안전할걸.”

“그건 맞는 것 같은데…. 에휴, 너 요즘 너무 겁이 없어진 것 같아. 무서운 마물이 나온다는데 이렇게 웃음이 나?”

아이린은 데이지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데 너… 토벌단을 따라 간다는 말은 안 하네? ‘제이드 님이 가시니 나도 따라가겠어요’ 할 줄 알았는데.”

“아이린, 내가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거든.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기사도 아닌 내가 토벌단에 따라가면 괜히 방해만 될 뿐이야. 그러니 너도 나랑 함께 있자.”

아이린은 입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데이지. 네가 걱정하는 바는 알겠지만 이번 토벌단에는 꼭 함께 따라가야 해.”

“왜?”

아이린은 제이드의 죽음을 막으러 가야 한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털어 놓으려면,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아이린은 제이드가 이번에 죽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털어 놓기 위해 더 큰 사실들을 털어 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 세계에서 온 영혼인 ‘서영’이라는 인간이 ‘아이린’의 몸속에 들어와 살게 된 이야기부터.

로판 소설을 읽다보면 믿을 수 있는 인물들에게 사실들을 털어 놓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은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빙의’를 큰 혼란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까?

‘누군가 나에게 그런 사실을 털어 놓는다면… 정신병자라 생각하며 그 사람을 피해 다니겠지?’

아이린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데이지, 미안. 아까 말한 이유가 다야. 나에게는 정말 지금 황태자 전하가 없는 수도가 마물보다 더 위험한 거 같아.”

데이지는 순간 지난 일을 떠올렸다.

지난 일이라고 해봤자 고작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아이린은 많은 위험한 순간들을 넘어왔다.

‘심지어는 며칠 전에는 감옥에 갔다 오고 엘리자베스 공주에 의해 화상까지 입었었지.’

데이지는 찹찹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말이 맞네. …너 그때 과일차는 마셔도 괜찮았다고 했지?”

“응.”

‘그 사실을 알아내고 화상을 입을 뻔 했지만. 마실 수 있는 차를 알아 낸 것만으로도 매우 값진 희생이었어.’

“친한 시녀들에게 부탁해서 과일청을 담아올게. 토벌단을 따라 다니다 보면 추운데 길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몰라. 그때 따뜻한 차라도 마실 수 있어야지.”

“후후, 고마워. 안 그래도 생각이 났는데. 그런데 늦지 않을까?”

데이지는 이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어. 빨리 다녀올게.”

“응.”

그렇게 데이지가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그 형상이 잘 보였는데 은발의 미중년이었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다 제이드를 떠올렸다.

‘제이드 님과 닮았네. 혹시 저분이 제이드 님의 아버지 레이먼드 공작인가?’

레이먼드 공작은 무언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구기며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린은 혹시 뒤에 누가 있나 뒤를 돌아보고 다시 그를 보았다.

‘어? 나를 보는 것 같은데….’

레이먼드 공작은 곧 아이린의 앞에 와서 섰다.

“난 재상 직을 맡고 있는 레이먼드 공작이네.”

아이린은 레이먼드 공작의 냉랭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치마를 살짝 들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먼드 공작님. 저는 황태자 전하의 임시 비서관 아이린 토트입니다.”

“알고 있네.”

‘재상인 레이먼드 공작이 날 어떻게 알고 있지?’

한낱 황태자의 임시 비서관인 그녀도 너무 바빠 재상의 얼굴도 오늘 처음 재대로 보았다.

‘제이드 님의 아버지이면 비슷하게 워커홀릭일 텐데.’

“어른을 앞에 두고 그렇게 생각에 빠지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이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재상님을 뵈어서. 조금 놀랐나 봅니다.”

“아이린 토트 양의 이야기는 요즘 내가 자주 듣고 있네.”

아이린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그렇게 유명한가?’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여러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더군.”

아이린은 곧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그 사건 사고에서 황태자 전하와 내 아들 제이드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으면 하네.”

아이린은 그의 말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내 조소 어린 레이먼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을 끼치다니. 자네에게 일어난 그 어떤 일들도 나에게 걱정을 끼친 적은 없다네.”

“네?”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레이먼드 공작이 그녀의 옆을 지나며 조용히 말했다.

“자신의 신분을 기억하고 경거망동 하지 말도록.”

곧 레이먼드 공작의 모습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이내 그의 발걸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아이린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친근한 얼굴이었는데.”

한동안 씁쓸한 눈빛으로 그쪽을 바라보던 그녀가 가슴 한쪽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좀 따끔거리네.”

* * *

“형님이 토벌단으로 떠난 지금이 어머니에게는 적기일 거야. 형님을 해치우려 자객을 보내겠지.”

에드먼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도서관 창가 아래 넣어둔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외가인 버나드 가문과 어머니인 황후의 비리를 기록한 문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지금이 적기이지.”

그 순간 에드먼드의 머릿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행복한 적이 없었다.

에드먼드는 그런 어머니가 항상 안타까웠다.

그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의 학대를 고스란히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에드먼드에게 황후인 그의 어머니는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불쌍하고 아픈 사람이었다.

이내 그는 상념을 지우고자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찾아 봬야겠어. 그래야 형님도. 아이린도 구할 수 있어. 그래, 아이린을 위해서라면….”

에드먼드는 그대로 서류를 포개어 들고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곧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에드먼드는 오랜만이라 낯설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6살 때 형님을 따라 온 이후 처음인가?”

전 황후인 소피아가 죽고 에드먼드는 일부러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왠지 자신을 보면 증오하거나 더 고통스러워 할 것 같은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불행의 시작을 아들인 자신이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먼드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왔느냐?”

“네. 아버…, 황제 폐하.”

에드먼드는 순간 오랜 만에 만나는 황제의 인자한 표정에 아버지라 부를 뻔하였다.

하지만 이내 호칭을 고치며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형님인 레온하르트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간 날 황제는 인자한 아버지 그 자체였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를 따라 황제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를 향하는 황제의 눈빛이 결코 좋지 않았다.

꼭 자신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듯.

에드먼드는 어린 나이지만 늘 패악을 부리는 어머니 슬하에 있다 보니 눈치가 빨랐다.

그는 그날부터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2황자.”

“네. 그간 찾아 따로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도 나처럼 바쁜 일이 많았던 것이지.”

에드먼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냐?”

에드먼드는 황제의 물음에 순간 상념에서 깨어나듯 눈을 번쩍 떴다.

이내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두터운 서류 꾸러미를 황제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서류 꾸러미를 바라보다 에드먼드를 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서류냐?”

“직접 읽어 보십시오.”

황제는 에드먼드의 얼굴을 슬쩍 본 후 서류 한 장을 넘겼다.

곧 황제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황제는 보던 서류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다음 서류를 넘기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다 무엇이냐?”

에드먼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신 그대로입니다.”

살짝 얼굴이 붉어진 황제가 진위를 가리듯 눈을 가늘게 뜨며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근엄한 목소리로 에드먼드에게 물었다.

“갑자기 이것을 내게 가져 온 이유가 무엇이냐?”

황제는 서류의 내용들의 대부분을 그림자를 통해 보고 받고 있었다.

때문의 에드먼드가 내민 서류를 읽는 순간, 이것이 버나드 가문과 황후의 비리와 범죄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 서류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 서류를 왜 자신에게 들고 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할 수 없었다.

황후는 에드먼드의 어머니였고 버나드 가문은 그의 외가였다.

게다가 에드먼드는 어린 시절부터 그 가문의 후계자 훈련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림자들이 분명 가문 산하의 암흑세계의 수장이라 하였어. 그럼 이 불법적인 일들에 관련이 없을 수가 없을 것인데….’

에드먼드 또한 황제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에드먼드를 보면 볼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무슨 질문부터 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황제가 입을 달싹이고 있을 때 에드먼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버나드 가문과 황후 폐하의 비리와 범죄 내역을 황제 폐하께 바칩니다.”

이내 그는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

“감히 룩스 제국의 황제 폐하를 기만하고 전 황후 폐하를 해친 이들을 이제는 모두 처단하소서.”

그 순간 황제의 집무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2황자,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아는 것이냐?”

에드먼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황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네가 준비한 증거만으로도 너의 외가가 멸족되고 네 어미가 죽음을 면하지 못할 수 있다.”

“그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 염치없지만 어머니의 목숨만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후우. 에드먼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아비로서 묻겠다. 정말 이 증거들을 내가 사용하길 원하느냐?”

에드먼드는 잠시 조용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저분께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구나. 내 아버지일 수 없는 분이신데. 마지막이라 하셔도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렇다. 에드먼드는 자신의 출신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머니가 혼전에 임신한 사생아라는 사실을.

‘감사하게도 황제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개한 적이 없었지.’

에드먼드는 암흑가의 수장으로 정보를 모으며 자신의 출신을 저절로 알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버나드 공작가의 딸로 살고 있었을 때 사랑한 평민 기사와의 결실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의 어머니는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민 기사인 아버지와 도망 하려 했다.

하지만 측근 시녀의 배신으로 저택에 유폐되어 있다가 결국 황궁으로 시집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부는 버나드 공작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일들이 딸을 위한 지나친 사랑이었다면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버나드 공작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고 외손자를 통해 룩스 제국을 먹으려는 속셈이었다.

그 첫 희생자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리고 전 황후 폐하도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도 황제는 그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황자로서 자랄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황제에게 은혜를 갚으려면 평생 충성을 맹세해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버나드 공작이 살아남는 다면 황제 폐하와 형님과 아이린까지 모두 목숨이 위험할 수 있어. 그래도 어머니만은 살려야 해.’

“어머니만 살려 주신다면 그 어떤 것도 황제 폐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리오니 제 어머니의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이내 에드먼드는 황제 앞에 몸을 낮추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내 황제의 긴 한숨이 들려왔다.

“네 어미가 너를 그렇게 학대하였는데도 그렇게도 어미를 살리고 싶으냐?”

“네, 황제 폐하. 제 어머니는 마음의 병이 깊어 저리 되신 것입니다. 버나드 공작만 아니었다면 저리 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겠다. 네 말대로 네 어미는 살려 주겠다. 대신 형벌을 면할 수는 없겠구나.”

“…….”

“네 어미는… 여름 궁전에 유배를 보내도록 하겠다. 그럼 그 마음의 병증도 좀 나아지겠지. …난 네가 이제는 네 어미를 내려놓고 편해 졌으면 한다.”

“감,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 순간 황제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에드먼드.”

에드먼드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이내 황제는 에드먼드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끼리 해결해야 했어야 하는데 어린 네가 고생이 많았다.”

“……!”

“내가 네 외가인 버나드 가문을 싫어했던 것은 인정하마. 그러나 그 옹졸한 마음으로 어린 널 지켜주지 못했으니 그건 정말 내가 잘못한 일이었다.”

“아닙니다, 황제 폐하. 모두 합당한 일이셨습니다. 모두 저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인 일입니다. 황제폐하와 전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까지 저의 외가로 인해 큰 불행을 겪게 되셨으니, 그 죄과를 다 어찌 갚아야 할지…. 정말 송구합니다.”

“네 잘못은 없다. 설사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되었다.”

에드먼드는 이내 다시 한 번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떤 처분이든 주시는 대로 달게 받겠습니다.”

‘허허, 황태자 뒤에 숨어서 맨날 울던 못생긴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듬직하게 자라났는지.’

“그럼, 2황자 에드먼드는 들어라.”

“네, 황제 폐하.”

“지금 이 시간 이후로 황자의 직분을 박탈한다.”

그 순간 에드먼드는 어깨를 살짝 떨었다.

“그리고 현재의 가주 버나드 공작을 폐하고 그대를 새로운 버나드 공작으로 임명한다.”

황제의 명령에 에드먼드는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폐, 폐하!”

“버나드 가문의 현 가주는 룩스 제국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 것이며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

황제는 다시 한 번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일으킬 때 무겁다, 에드먼드. 이제 앞으로는 무릎 꿇지 말거라.”

그 순간 에드먼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황제 폐하.”

“네가 지금 나가고 나면 황후를 만나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일은 나에게 맡기거라.”

“황제 폐하의 지엄하신 명을 따르겠습니다.”

* * *

엘리자베스의 백합궁.

엘리자베스는 호위 기사 로만 경에게 2황자와의 약혼 후 그를 미행하기를 지시했다.

다만 이국의 기사여서 황궁 밖 지리는 익숙하지 않은 만큼 황궁 안에서의 동태만 살피라고.

그런데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아니, 이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일이야.’

처음 2황자가 수상한 서류를 들고 황제를 독대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줄을 잘못 잡은 건가?’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위기가 아닌 기회였다.

‘이 룩스 제국을 내 것으로 만들 기회야. 이미 황후의 측근 시녀인 보발디 백작 부인이 나의 편에 섰어. 모두 황후의 패악 덕분이지.’

엘리자베스는 창밖으로 황후궁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있으면 저곳이 내 것이 되는 건가?

사실 보발디 백작 부인은 황후를 배신하지 않았다. 모두 엘리자베스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일부러 황후와 황제의 독대 사실을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알렸고 일부러 그녀의 명령을 들었다.

그것도 룩스 제국의 황제 폐하를 독살하라는 명령을.

이로써 후에 일이 들킨다 하여도 황후에게는 아무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나 때문에 이리 평생 황궁에 갇혀 살게 되었는데. 이제야 그 빚을 갚을 수 있겠구나.’

보발디 백작 부인은 회한에 가득 찬 얼굴로 차 세트가 준비된 트레이를 밀며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 차 세트를 황후의 시녀가 직접 준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황제의 집무실에 쉽게 들어 갈수 있었다.

보발디 백작 부인은 떨려오는 손을 다잡으며 찻물에 투명한 독을 넣었다.

물론 황후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황후는 늘 상비약으로 해독제를 가지고 다니니, 이 독을 마시더라도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가 죽어야 우리 2황자 전하가 황제가 될 수 있어.’

보발디 백작 부인은 황후의 어릴 적 동무이자 측근 시녀였고 에드먼드의 보모였기도 했다.

아이가 없는 그녀는 자신이 키운 에드먼드에게 더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희생된 황후를 지켜야만 했다.

그때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 황제와 황후가 집무실로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보발디 백작 부인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숨기고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곧 두 사람은 집무실 중앙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 순간 황제가 보발디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나가 있도록.”

보발디 백작 부인이 황후를 바라보자, 황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가라고 고개 짓을 했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황제의 집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그때 황후가 먼저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말씀해 보세요.”

황제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황후, 그대의 아들이 내게 이걸 가지고 왔소.”

황후는 무심히 황제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서류의 첫 장을 보자마자 경악에 빠진 표정으로 황제와 서류를 번갈아 봤다.

“역시 모르고 있었군.”

황후는 이내 아무 말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황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

“네.”

“누군가의 정보가 있었는가?”

“아니요. 제가 그 아이에게 패악을 부리는 나쁜 어미기는 하지만 제 아들이지 않습니까.”

“…….”

“오히려 더 에드먼드에게 패악을 부리며 그 아이가 나를 멈춰 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황후, 그대는 정말 잔인한 어미로군.”

“네, 잔인하지요. 그 아이가 없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12번도 더 했으니까요. 그 아이만 아니었다면 나도 그 사람을 따라갈 수 있었을 텐데.”

“에드먼드가 그대를 살린 셈인가.”

“네, 몸은 살렸지요. 저의 마음은… 죽었지만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네. 그대가 에드먼드 그 아이를 살리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온 게 아닌가.”

황후는 소파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찻잔에 차를 따른 후 자기 몫의 찻잔을 들며 긴 한숨을 쉬었다.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왜, 이제 와 살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그저 에드먼드의 결혼식은 보고 죽고 싶은 소망이 있군요.”

“그리 되진 않을 걸세.”

황후는 이내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즉결처형입니까?”

“생각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유폐에서 끝내기로 결정했네.”

황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저를 살려 두시는 겁니까?”

황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 그대의 아들의 부탁이었네. 자기는 죽어도 좋으니 제 어미의 목숨은 살려 달라 하더군.”

그 순간 황후는 찻잔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안됩니다. 황제 폐하, 저와 제 가문을 멸하시고 그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

황제는 순간 그녀에게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아들의 목숨은 그리 귀하면서 왜 내 아들을 번번이 독살하려고 하였나.”

황후는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독살이라니요?”

“허허, 이제 와서 발뺌할 샘인가?”

“제가 이제 와서 더 발뺌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정말 황태자를 독살하라는 명령은 내린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분명 그대가 보낸 독과 자객에, 황태자뿐만 아니라 제이드까지 목숨이 위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늘!”

“저는 정말 아닙니다. 분명 저는 제 사람들에게 크나큰 패악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명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황제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다 누가 한 일이란 말인가.’

그 순간 그녀의 수족이었던 보발디 백작 부인을 떠올렸다.

황후는 그동안 황태자가 목숨이 위험했었다는 이야기에 충격이 컸는지 떨리는 손으로 차를 따랐다.

그때 황제가 그녀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발디 백작 부인을 얼마나 믿는가?”

황후는 순간 사색이 되며 어깨를 떨었다.

“혹시, 이 모든 게 그녀의 짓이라 의심하십니까?”

“황후 그대가 그 모든 일을 진정 하지 않았다면 그녀밖에 없다.”

황후는 이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황제 또한 갈증이 났는지 다 식은 차를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황후는 그렇게 멍하니 찻잔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그때, 탁 하고 찻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황제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황, 황후. 또… 당신이!”

“아, 아닙니….욱!”

이내 황후도 피를 토하며 그의 곁에 쓰러졌다.

‘정말, 보발디 백작 부인, 네가 또 나를…!’

황후는 이내 배신 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이내 상념을 떨쳐 내며 황제에게 기어갔다.

움직임 때문에 독이 더 빠르게 몸에 퍼져서인지 그녀는 또 한 번 피를 토해냈다.

황제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제가 아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

“그래도… 죄, 죄송합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폐하와 소피아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해서…”

황제는 차 한 잔을 다 마셨기에 황후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흐릿한 눈이 점점 빛을 잃어갔다.

“안돼! 또 이렇게 나 때문에…!”

그 순간 황후는 자신이 가진 해독제가 떠올랐다.

‘으흑, 다행이야. 살릴 수 있어.

그녀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허리춤에 있는 해독제를 꺼냈다.

그리고 이를 앙다물며 황제의 몸을 살짝 일으켰다.

“조금만 참아요.”

황제는 마치 괜찮다는 듯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황후는 그의 입을 벌리며 해독제를 한 번에 쏟아 부었다.

약효가 빠른 해독제이기에 곧바로 황제의 안색이 좋아지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야. 이번에는 살릴 수 있어서.’

황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었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그 남자가 보였다.

‘나쁜 사람. 꿈에라도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더니 이제야 오네요. 이제 나도… 당신 곁으로 갈수 있는 걸까요?’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아이린은 마차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앞에 달려가는 기사단을 바라봤다.

“우와! 흰색 제복도 예쁘지만 군청색은 너무 멋져!”

용맹하기로 유명한 황태자 산하의 기사단 ‘실버 라이언’.

그들이 이번 마물 토벌의 선발대로 나서게 되었다.

실버 라이언 기사단의 정식 제복은 백색의 상의에 은실로 수를 놓은 성스러운 느낌의 제복이다.

그러나 마물이 밝은 색에 민감하다는 이유로 이번 출정에는 특별히 군청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기사단은 말을 타고 열을 지어 빠르게 북상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린이 탄 마차는 마법 처리가 되었기에 그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덕분에 아이린은 기사단의 생동적인 모습을 가까이서 실컷 감상했다.

‘으아아, 영화의 한 장면 같아!’

그 순간 마차 앞에서 달리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그녀 쪽으로 와 소리쳤다.

“아이린, 위험하니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

‘윽, 귀도 밝으셔.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이렇게 좋은 구경을 언제 또 해 보겠어?’

레온하르트는 수도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녀가 고개를 내밀면 저리 단속하였다.

아이린도 처음에는 그가 그녀를 보호한다고 생각하며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눈빛에 질투가 어린 게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아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서 달려가는 기사단을 므흣하게 바라봤다.

“아이린!”

“칫, 알겠어요.”

아이린은 탁 하고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마차 곁을 달리고 있었다.

그때 앞에서 달리던 제이드가 그의 곁으로 와 함께 달렸다.

“황태자 전하, 그렇게 새를 새장에 가두어 두려고만 하시면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알고 있어. 그런데 저 녀석들을 저런 표정으로 바라볼 때는 참기가 힘들어서.”

“룩스 제국의 제국민들은 모두 우리 기사단을 저런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의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저런 표정은 나에게만 지어 줬으면 해.”

레온하르트의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바람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통제는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죠.”

제이드의 말대로인지, 아이린은 여전히 화가 났는지 마차에서 내리기만 하면 제이드를 졸졸 쫓아다녔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붙일 때마다 바쁘다고 밀어내면서.

레온하르트는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의 생각과 다르게 아이린은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제이드가 죽는 시점을 정확히 모르기에 마물 스프레이와 해독제를 들고 그를 쫓아다녔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식사 시간에만 가던 길을 멈추고 계속 빠르게 말을 달렸다.

“질리언, 이거 먹으면서 가요.”

“그게 뭡니까?”

“제 친구가 만든 막대 사탕이에요. 정말 맛있어요.”

아이린은 입안에 파란색 사탕을 넣으며 말했다.

“빨아 먹다 보면 이렇게 혀가 파래지지만요.”

그것을 본 조셉과 데이브도 가까이 와 말했다.

“우하하, 재미있군요. 저도 주십시오.”

“저는 덩치가 크니 두 개 주십시오.”

“큭큭, 그래요. 데이브는 두 개.”

그때였다.

마치 ‘공룡시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커다란 마물이 미친 듯이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앞서 달리던 기사단은 땅 위를 쿵쾅대며 달려오는 마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내 하늘을 나는 마물들은 기사단의 머리 위를 지나 마차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아이린은 생전 처음 보는 마물의 출현에 꿀꺽 침을 삼켰다.

꺄악!

끼아악!

아이린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으윽,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마물의 포효 소리는 매우 컸다.

저 멀리에서부터 날아오는 마물의 기이한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테러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마물을 해치며 그녀의 마차로 달려왔다.

“아이린, 많이 놀라지 않았어?”

“아니요. 조금요.”

“마차를 세워야 할 것 같아. 앞 쪽에는 더 많은 마물들이 날뛰고 있어서. 내가 지켜 줄 테니 걱정 마.”

“네. 전 걱정 말아요.”

레온하르트는 이내 마차를 세우며 말했다.

“이곳에 마도구로 결계를 쳐놓았어. 지금부터 여기서 꼼짝하면 안돼!”

“네.”

아이린은 마물들의 큰 덩치와 기이한 모습에 점점 몸이 떨려 왔다.

그러나 기사들은 오랜만의 사냥을 나서는 사냥꾼처럼, 신이 났는지 하나같이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때 질리언이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가 주변의 기사들에게 소리치며 투 핸드 소드를 꺼내 들었다.

“맨 앞에 저건 내 거다!”

“질리언, 뭐가 네 거야? 나보다 어린 게.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거라고!”

“조셉, 너랑 나랑 한 살 차이거든? 그리고 기사단 기수로 치면 내가 선배라고!”

세 사람은 감옥에서 알게 된 인연이었지만, 아이린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경호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덕분에 아이린은 심심할 틈이 없었다.

심지어 마물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는 지금도, 그들의 말다툼 때문에 어느 정도 공포를 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린은 입에 막대 사탕을 문 채로 기사단의 토벌이라는 이름을 한, ‘마물 사냥’을 구경하였다.

기사들은 마법 처리가 된 검과 방패로 마물들을 하나하나 해치우고 있었다.

그들이 강해 쉽게 해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마물들은 기이한 소리를 낼 때마다 독이나 염산을 내뿜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며 싸우고 있던 그들은, 마물을 대적하는 순간순간 목숨을 위협받고 있던 것이다.

‘그래도 겁먹은 것보다는 나으려나?’

그녀의 눈에 기사들은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한 마리 한 마리 해치울 때마다 환호하였고, 죽은 마물에게서 보석을 얻으면 게임머니를 공짜로 받은 듯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였다.

아이린은 다른 기사의 검에 머리가 날아가는 마물을 보며 생각했다.

‘마물의 피가 무색무취라 다행이네.’

그 덕분에 마물이 검에 팔다리나 머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봐도 징그러움이나 공포감이 덜했다.

그냥 커다란 인형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아, 괜히 많이 긴장했네. 사람들이 괜히 용맹함 하면 ‘실버 라이언’을 말하는 게 아니었어.”

그때 레온하르트가 마물 하나를 해치우고 그녀를 살피러 다가왔다.

“아이린, 괜찮아?”

아이린은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결계 안에 서 있는데요. 뭐.”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뭐지?”

“왜요? 뭐가 있어요?”

“응, 잠깐만.”

그 반짝이는 물건은 결계 바로 밖에 위치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물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점점 가까이 갈수록 그것의 형체가 선명히 보였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반지였다.

아이린은 놀라는 듯한 레온하르트를 보며 가까이 걸어갔다.

“뭐 길래 그래요.”

“반지 같아. 잠시만.”

레온하르트는 결계를 넘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끼약’하는 마수의 소리가 그들의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 마수는 반지를 주우려 몸을 숙인 레온하르트에게 독을 분사하고 있었다.

제이드가 급히 달려와 방패로 그의 앞을 막긴 했지만, 그만 손이 마물의 독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 순간 아이린이 달려가 마물에게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꿰엑!”

마물은 그대로 그들을 넘어 바닥에 떨어졌다.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입을 벌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그대로 제이드의 벌어진 입에 해독제를 부었다.

제이드는 순간 입에 무언가가 들어오는 통에 반사적으로 ‘꿀꺽’ 하고 해독제를 마셨다.

레온하르트와 제이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이린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빤히 보는 거지. 저렇게 보다 눈 튀어나오겠네, 두 사람.’

아이린은 그들의 과도한 놀람에 머쓱해 하며 볼을 긁적였다.

“하하, 이번에 제가 구해 드렸어요.”

그때였다.

무언가 그들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이건 양궁장에서 듣던 소리와 비슷한데.’

눈보다 귀가 예민한 편인 아이린은 소리의 방향이 레온하르트를 향하는 것을 느꼈다.

아이린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몸을 던지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무언가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함께 쓰러졌다.

“으윽.”

이내 화살은 튕겨져 그녀의 팔을 스치고 떨어졌다.

아이린 아래 그대로 깔려 있던 레온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이린!”

바로 옆에 서 있던 제이드는 바로 몸을 숙이며 그녀의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화살촉이 그녀의 팔만 스치고 지나갔어.”

“그런데 아이린이 왜 이렇게 기절한 거야?”

제이드는 이상한 기분에 얼른 화살촉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팔을 스치고 간 화살촉은 용병들이 흔히 사용하는 평범한 화살촉이었다.

그 순간 화살촉 끝에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레온, 큰일이야. 독이야!”

“뭐, 독이라고?”

레온하르트는 얼른 아이린이 메고 있는 작은 가방 속을 뒤적였다.

다행히도 그녀의 가방에 해독제 한 병이 남아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아이린을 얼른 기대 앉히고 그녀의 입을 벌리고 해독제를 입에 조심이 흘려 넣어 주었다.

그때 제이드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다시 화색이 돌고 있어.”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긴 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야. …근데 이게 뭐지?”

레온하르트의 팔에 기댄 아이린의 등 뒤에 작게 불룩한 무언가가 그의 팔을 누르고 있었다.

그는 얼른 그것을 옷 위로 살짝 밀어서 꺼냈다.

“하하, 아이린의 목걸이가 그녀를 살렸어.”

레온하르트는 활짝 웃으며 제이드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자신의 손위에 올려진 목걸이를 본 제이드는 그대로 굳은 듯 얼음이 되고 말았다.

“이, 이 목걸이…!”

“응, 제이드. 그 목걸이 아이린이 보육원에 왔을 때 걸고 있던 목걸이래.”

그 순간 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이린을 보았다.

“그녀의 가족을 찾을 때 도움이 될까 해서 살펴봤는데,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어디서 본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

그때였다.

제이드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 나왔다.

“제이드! 갑자기 왜 울어?”

“레, 레온 나 드디어 찾았어!”

“무엇을 찾았길래 네 표정이…?”

“내 동생, 메이린을!”

레온하르트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그 순간 제이드는 레온하르트에게서 아이린을 빼앗다시피 안아들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를 빼앗긴 레온하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부터 내 동생 메이린은 내가 데리고 가겠어.”

제이드는 그대로 아이린을 안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레온하르트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머리를 잡았다.

* * *

진주보다 하얗고 한 손으로 가려지는 작은 얼굴.

초승달 같이 아름답게 휘어진 눈썹. 과실을 머금은 듯한 입술.

2황자의 약혼자인 엘리자베스가 아름다운 자태로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황태자가 실종되고, 황후가 죽었다. 그리고 황제는 혼수상태에 빠져 오늘내일 하고 있었다.

2황자비 엘리자베스. 그녀 앞에 장애물은 더 이상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오래간만에 맘 편히 잠을 잤다.

‘후후, 이제 룩스 제국의 황후가 되어 메르헨 왕과 피오나 공주를 치울 수 있겠어.’

오늘은 국제회의 마지막을 알리는 송별 연회였다.

물론 연회에 참석하는 귀빈들에게는 황태자가 실종되고, 황후와 황제가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할 것이라 알렸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대신해 오늘의 송별 연회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래, 이 연회에서 앞으로 황후가 될 나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거야.’

연회장 입구에 도착한 엘리자베스는 순진무구한 눈빛을 띄우며 천사 같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시종들이 그녀의 도착을 알리며 문이 열리고.

이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며 엘리자베스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엘리자베스가 예비 황후로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연회가 어느 정도 무르익을 때쯤이었다.

연회장 입구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어어, 황태자 전하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입구에서부터 인파를 가르면 한 무리의 기사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황태자 레온하르트가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들어 오고 있었다.

“이,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실종된 것 아니었어?”

“난 죽었다고 들었는데.”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일부는 미간을 찌푸리고 일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때 황태자 레온하르트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제가 마물 토벌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모두 귀신을 본 것 같군요.”

그 순간 귀족 무리를 이끌며 그의 앞으로 걸어온 엘리자베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 실종되셨다는 소식에 걱정했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네, 없습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에게 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 아쉽나 봐?”

엘리자베스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지만, 이내 그녀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황태자는 귀족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귀빈들을 전송하는 연회에 황태자가 빠질 수야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위한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선물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가 마물 토벌을 나갔다가 반지를 하나 주웠는데 말입니다. 이 반지에 참 신기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일순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속삭였다.

“신기한 능력이 있는 반지라니?”

“뭐지, 신화에나 나오는 마법 반지인가?”

그때 레온하르트가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들이 반지에 가까이 다가오면 더 미처 날뛰게 만들더군요.”

사람들이 또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마물을 날뛰게 하는 반지래.”

“허허, 그런 것을 반지로 만들다니. 저거 끼고 다니다간 미친 마물의 밥이 되겠군.”

레온하르트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물 사냥꾼에게 물어보니 여기 이 붉은색 보석이 ‘마물의 눈’이라 하더군요.”

사람들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반지를 보며 웅성웅성 거렸다.

“엘리자베스 공주. 이 반지, 눈에 많이 익지 않습니까?”

“글, 글쎄요?”

“내가 메르헨에 급히 사람을 보내 이 반지에 대해 알아 봤는데 말입니다. 이 반지가 하이드 공작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고 하더군요.”

엘리자베스의 눈이 살짝 커졌으나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니 제 반지와 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하, 비슷하다니요. 이것이 공주의 반지가 아닙니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네, 아닙니다. 제 것은 여기 있습니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중지 손가락에 아름답게 빛나는 반지는, 레온하르트가 든 것과 마찬가지로 붉은 보석이 박힌 금반지였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연회자의 사람들이 다시 웅성웅성 거렸다.

이때다 하고 황후파 귀족들이 그녀를 옹호하며 나섰다.

“모양이 비슷하긴 하지만 이 반지가 엘리자베스 공주의 것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그래요, 엘리자베스 공주가 바로 이 반지를 끼고 있잖아요.”

황후파 사람들의 계략이 성공한 것인지 엘리자베스에게 동조하고 나서는 이들이 점점 많이 나타났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황태자가 착한 엘리자베스를 모함한다며 쌍심지를 끼고 보는 이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속으로는 황태자 레온하르트에게 비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온화한 눈빛으로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웃고 있었다.

“여러분, 전 괜찮습니다. 디자인이 비슷해서 황태자 전하께서 오해하신 듯합니다. 이제 오해가 풀렸다면 되었습니다.”

그때 한 귀족 영식이 말했다.

“보십시오. 저렇게 온화하신 엘리자베스 공주를 그렇게 모함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 사과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그렇게 안 봤는데. 저리 착한 공주에게 너무하네.”

“황태자 전하. 얼른, 사과하세요!

황태자는 그런 사람들의 원성에도 담담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연회장 입구에서부터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 보좌관 제이드가 기사들을 이끌고 한 여인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어떻게 저 시녀가! …죽지 않은 것이었어?’

그녀는 보석을 훔치고 실종되었던 엘리자베스의 측근 시녀 아베스타였다.

아베스타는 이내 엘리자베스에게 살기를 띤 눈빛으로 쏘아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베스타는 이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엘리자베스를 향해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호위 기사인 로만 경이 튀어 나와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로만 경의 검이 챙 소리를 내며 가로막혔다.

2황자 에드먼드였다.

엘리자베스는 순간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그때 기사들이 나와 로만 경을 포박했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제 호위 기사입니다. 절 저 미친여자에게서 보호하고자 검을 든 것입니다.”

그때 제이드가 얼굴을 굳히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녀 아베스타는 미친 여자가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희생자 아닙니까?”

엘리자베스 공주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흑흑,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의 희생자라니요. 작은 왕국의 공녀로 혈혈단신 이 나라에 왔습니다.”

“……!”

“…그런 제가 누군가를 희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때 기사들 사이에 서 있던 시녀 아베스타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저 여자는 거짓말쟁이에 살인자입니다. 모두 속지 마십시오.”

그때 황후파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미친 여자는 꺼져 버려!”

“그래, 미친 여자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그 순간 아베스타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네, 저는 미친 여자입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대었다.

아베스타는 이어 소리쳤다.

“가족들이 모두 제가 보는 곳에서 살육을 당했는데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살육이라니?”

“저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마물에게 죽었다는 건가?”

그때 아베스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베스타는 얼굴에 감고 있던 천을 풀었다. 얼굴 이곳저곳이 괴물처럼 찢겨나가 있었다.

“아아악!”

“괴, 괴물!”

“하하, 괴물? 네, 이제 저는 괴물입니다.”

사람들은 어쩐지 미쳐서 웃는 듯한 그녀가 소리 내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그 누구도 그녀를 제지할 수가 없었다.

“저를 이렇게 괴물로 만들고 제 가족을 갈가리 찢어 죽인 건 마물보다 더 마물 같은 저 사람입니다.”

시녀 아베스타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팔 끝에는 있어야 할 손이 있지 않았다.

마치 들지 않은 칼로 고기를 썰어낸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저 여자라고! 자신의 가족들의 한을 풀어달라고!

아베스타는 만약 저들이 믿지 않는 다면 그대로 그녀를 향해 뛰어 들어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을 거라고.

아베스타는 힘을 주기 힘들어 떨려오는 팔을 반대쪽 팔로 부축하였다.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엘리자베스를 지목하고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에 경악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말을 잇지 못하며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하, 정말 사람들 앞에서만 약혼자였군.’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던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격렬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모두 황후 폐하가 한 것입니다.”

그때 에드먼드가 이를 앙다물며 입을 열었다.

“이미 너의 손에 돌아가신 황후 폐하시다. 더는 모욕하지 마라.”

그 말에 싸늘한 정적이 연회장을 가득 매웠다.

황후파 귀족들이 정적을 깨며 소리쳤다.

“지금 황후 폐하가 돌아가셨고 폐하를 죽인 것이 저 엘리자베스 공주라고 하신 것입니까?”

에드먼드는 분을 참지 못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독살한 것인가?”

“그럼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가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저 요물 때문이었어?”

순간 황후파, 황제파, 귀족파 할 것 없이 엘리자베스를 차갑게 바라보며 소리쳤다.

“감히 룩스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죽이려고 하다니!”

“저 반역자를 얼른 처단하시오!”

“재판까지 갈 필요도 없소, 지금 당장 죽이시오!”

엘리자베스는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다.

“나, 난 아니야!”

그때였다.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정신이 흐려진 엘리자베스 앞을 로만 경이 막아섰다.

“로, 로만.”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널 지킬 태니.”

로만은 그대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누구든 가까이 온다면 베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그의 뒤에 주저앉아 덜덜 떨었다.

“아아, 아니야, 난 아니야.”

로만은 점점 조여 오는 기사들의 포위망에 검을 손수건으로 칭칭 동여매며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였다.

“내가 이들을 막을 테니, 사람들 많은 쪽으로 달려서 저기 보이는 비상문으로 나가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숙였던 고개를 들며 로만이 가리키는 문을 보았다.

“할 수 있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 조심히 구두를 벗어. 그리고 맨발로 달려 나가. 우리가 술래잡기를 했을 때처럼.”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로만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망설이는 듯한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로만이 속삭였다.

“엘리자베스, 정신 차려. 그때도 내 말대로 해서 술래에게 잡히지 않았잖아. 그러니 오늘도 내 말을 들어. 술래는….”

그 순가 엘리자베스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로만 경은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막을 테니. 자, 셋 하면 뛰는 거다. 하나!”

엘리자베스는 그를 따라 숫자를 셌다.

‘하나!’

“둘!”

‘둘’

“셋!”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로만 경의 앞을 가로막으며 미소를 지었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녀를 보는 로만을 향해 엘리자베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 그때마다 술래에게 잡혀서 죽었잖아. 그러니 이번엔 내가 지켜 줄게.”

그렇게 말한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잡으려는 기사들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 옆에 서 있는 황태자에게 말했다.

“모든 일은 제가 한 일입니다. 저기 있는 로만 경은 제가 한 일에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사실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모든 일을 로만 경 몰래 황후와 함께 처리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기사들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기사들을 얼른 포승줄을 꺼내 엘리자베스의 손목을 구속했다.

로만 경은 놀라 소리쳤다.

“엘리자베스!”

그 순간 기사들과 함께 가던 엘리자베스가 걸음을 잠시 멈추며 로만 경을 바라봤다.

“후후, 이제야 이름을 불러 주는 구나.”

엘리자베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기사들과 함께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 * *

레이먼드 공작가.

제이드는 다시 찾은 여동생을 데리고 그대로 공작가로 돌아왔다.

당연히 아이린을 못마땅해 하던 레이먼드 공작은, 그녀를 안고 온 제이드의 모습에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제이드가 내민 목걸이를 보고 이내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통곡하였다.

그때부터 아이린은 레이먼드 공작가의 귀하신 공녀님이 되어, 공작의 침실보다 더 크고 좋은 방에 눕혀졌다.

그러나 마물의 독에 당한 후 곧바로 해독 처치를 했는데도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작이 제국 최고라 하는 의사들을 모두 불러왔다.

하지만, 하나같이 그녀의 몸에는 이상이 없으니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때문에 세 남자는 반쯤 미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또 새로운 의사가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왜 이리 깨어나지 않는 것인가?”

“억만금이라도 좋으니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약을 만들어 오게.”

의사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가로 지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께서는 매우 건강한 상태십니다. 그러나 왜 깨어나시지 않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 *

그때 아이린의 혼은 또 다른 자신, 서영의 세계를 유영하고 있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어느 병원.

서영의 가족들이 병실에서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가 울면서 무슨 서류에 사인하는 모습도.

그 순간 아이린은 서영일 때 뇌사자 장기기증에 서약했던 것을 떠올렸다.

“흑흑, 서영아, 이 어미가 잘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등을 토닥이며 울고 있었고, 오빠 또한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 순간.

길게 삐이- 하고 이어지는 기계음과 함께 어머니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은 그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녕히 계세요.’

그 순간, 아이린은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쓴맛에 벌떡 일어났다.

“으윽.”

그녀가 누워있는 방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방에 있던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데이지가 아이린을 껴안으며 소리쳤다.

“아이린! 아이린이 깨어났어요!”

레온하르트는 얼른 다가와 아이린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아이린,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윽, 저 죽을 것 같아요.”

그 순간 다들 사색이 되었다.

그때 제이드와 레이먼드 공작이 레온하르트를 밀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죽을 것 같다니?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아이린은 순간 가까이 다가온 레이먼드 공작을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니요. 약 때문에 입이 써서요.”

이내 물잔을 내미는 데이지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뭐야? 왜 레이먼드 공작님이 여기 있어?’

데이지는 아이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내 그녀에게 물을 마시라며 고갯짓을 했다.

아이린은 어벙벙한 표정으로 물 잔을 받아 마셨다.

그렇게 물 한잔을 다 마셨지만, 아직 남아있는 씁쓸한 맛에 미간을 찌푸렸다.

데이지는 그런 그녀의 입에 딸기 맛 막대사탕 하나를 입에 넣어 줬다.

그 순간 아이린은 눈을 초승달처럼 접으며 웃었다.

“흐흐, 고마워. 데이지.”

그때 제이드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이린 씨.”

‘제이드 님은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시지?’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네?”

“혹시 항상 걸고 계시던 그 목걸이 기억하시나요?”

“네.”

아이린은 습관적으로 목 언저리를 만지며 물었다.

“어? 그런데 제 목걸이가…?”

그 순간 제이드가 그녀의 목걸이를 내밀었다.

아이린은 얼른 그 목걸이를 받아 들며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때였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냉기를 풀풀 풍기며 독한 말을 쏘아붙이던 레이먼드 공작이.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런 공작을 보던 아이린은 데이지와 레온하르트 쪽을 보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왜 저러셔? 레이먼드 가문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거야?’

그때 제이드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 목걸이는 아이린 씨가 어릴 때 저의 어머니께서 걸어 준 목걸이입니다.”

아이린은 무슨 소리인가 하며 멍하니 목걸이의 펜던트를 손에 들었다.

그때였다.

파바박 하고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건 아이린이 고아원에 오기 전의 기억이었다.

갑작스럽게 한 번에 들어오는 기억들 때문에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다.

그녀는 이내 머리에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이린!”

그 순간 데이지는 놀라 의사를 찾으러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래, 인사는 잘 하고 왔느냐?’

‘네?’

‘저쪽 세계의 네 가족들 말이다.’

‘누, 누구세요.’

‘큭큭, 날 모르느냐?’

‘…….’

‘네가 그렇게 욕했던 작가 아니냐?’

‘뭐, 뭐라고요?’

‘5000년 동안 쉬지 못해서 연중했더니. 네 댓글이 나를 테러 하지 않았느냐.’

‘저, 테러는 아닌데요. 그저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래, 그래서 네게 써보라 하였지. 착한 심성의 너라면 잘 쓸 것 같아서 말이야.’

‘네?’

‘결국 네가 모두를 살렸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

‘참 그리고 너에게 알려 줄 사실이 있단다.’

‘네? 무엇을요?’

‘사실 이곳의 아이린도 너란다.’

‘네?’

‘난 인간을 위해 두 가지 운명을 만들어 놓았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을 선택하게 해 놓았단다.’

‘그럼 저는…?’

‘그래 넌 ‘서영’이기도 하고 ‘아이린’이기도 하지. 보아하니 너는 아이린의 운명을 선택한 거로구나.’

아이린은 그제야 머리를 괴롭히던 두통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목소리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 왔다.

‘행복하거라. 아이야.’

아이린은 이내 머리를 부여잡은 두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안절부절 하며 그녀를 보고 있던 레이먼드 공작과 제이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오라버니. 메이린이 돌아왔어요.”

두 사람은 눈물가득한 눈으로 아이린을 얼싸 안았다.

“내 동생, 메이린! 메이린이 돌아 왔어.”

“흐흑, 메이린 내 딸아!”

아이린은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안겨 있는 두 남자를 달래 주듯 등을 토닥였다.

이윽고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향해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레온, 사랑해요.”

이윽고 레온하르트는 함박미소를 지으며 그녀처럼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내 사랑 아이린.”

-외전에서 계속

외전.

“…이린!”

“으으음. 누구야?”

“메이린!”

“메이린이 누군데 이른 아침부터 여기서 찾는 거야.”

“메이린, 혹시 일어났니?”

아이린은 자꾸 누군가를 부르는 애절한 목소리에 애써 눈을 떴다.

그녀는 낯설어 보이는 방안을 멍하니 살펴보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생각했다.

‘아차, 내가 메이린이었지.’

아이린은 입가에 흘린 침을 소매로 닦으며 벌떡 일어났다.

“네, 제이드 님! 일어났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이린은 이불 밖으로 기어 나와 침대 끝에 앉았다.

‘근데 제이드 님이 아침부터 왜 여기에…. 으이그, 바보! 함께 외출하기로 약속했었지.’

그때 문밖에서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일어났으면 시녀를 들여보내 마.”

“네!”

곧 문이 열리고 전담 시녀와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줄지어 들어왔다.

‘헐, 뭐 이렇게 줄지어 들어오는 거야?’

“메이린 아가씨,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먼저 세숫물을 놓아 드리겠습니다.”

아이린이 멍하니 끄덕이자, 한 하녀가 그녀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그녀의 대답에 하녀는 작은 나무 탁자를 침대 위에 놓고 물이 든 세숫대야를 얹었다.

곧 아이린이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드니 하녀가 얼른 수건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아이린이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자 하녀는 재빨리 다 닦은 수건을 받아들고 세숫대야를 치우며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다른 하녀 둘이 그녀를 침대에서 부축하며 일어섰다.

아이린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머리를 잡았다.

‘나 이제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야? 중병이 걸린 것도 아닌데.’

“어머! 아가씨, 머리가 아프신가요?”

매우 큰일이라도 일어난 듯한 시녀의 표정에 아이린은 얼른 머리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막 일어났더니 피곤했나 봐요.”

“그럼 조금 더 주무시겠어요?”

아이린은 하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 했다.

“네? 더 자다니요. 지금 밖에서 제이드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도련님이 아가씨께서 피곤해하시면 더 주무시게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아이린은 고개를 돌려 협탁 위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헐, 아침이 아니었구나!’

아이린은 자신의 게으른 행태에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어제 소설을 보느라 좀 무리를 했나보네. 이 시간에 눈을 뜨다니.’

“아니에요. 외출 준비를 하도록 하죠.”

“네, 아가씨, 그럼 드레스 먼저 골라 보시겠어요?”

‘그래, 이렇게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 제이드 님이 밖에서 기다리시는데.’

아이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하녀들이 줄지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곧 그녀들은 찬란한 색색의 드레스들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

‘으윽, 누가 부유하기로 유명한 레이먼드 공작가 하녀 아니랄까봐! 그냥, 적당한 거 두세 개만 가지고 온다는 절충안은 없는 거야?’

아이린은 신년회 전에 갔던 드레스 샵의 악몽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드는 드레스가 없으시면 다른 것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기 가운데 있는 아이보리색 드레스가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시녀는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든 하녀를 향해 손짓하였다.

하녀는 얼른 드레스를 가지고 와 시녀에게 내밀었다.

사실 아이린의 마음에 드는 드레스는 없었다.

물론 공작가에서 최고의 디자이너에게서 구매한 드레스인 만큼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것을 입는다면 가만히 인형처럼 앉아 있어야만 할 것 같아 좀 꺼려졌다.

좀 더 단아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선호하는 그녀였기에 더더욱 하나같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보석이며 장식이 덜 달려 있어서 고른 것이 이 아이보리색 드레스였다.

시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드레스 착용을 도왔다.

“역시 메이린 아가씨는 안목이 높으세요.”

“네? 안목이라니요?”

“아가씨, 저 같은 사용인들에게 말씀 낮추셔도 되세요.”

“아하하, 앞으로 조금 편해지면 그렇게 할게요.”

“그나저나 아가씨, 안목을 타고 나신 것 같아요.”

“아까부터 무슨 안목을 말하는 것인지…?”

“그야 드레스 보는 안목 말씀이지요.”

“네? 드레스요?”

아이린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시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께서 고르신 이 드레스는 심해 진주를 곱게 빻은 가루를 입혀, 은은하고 우아한 멋이 가미된 아름다운 드레스지요. 여기 있는 드레스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가장 고가이기도 하고요.”

‘헉, 가장 고가라니? 난 저게 가장 단순한 디자인이라 고른 건데?’

아이린은 양 손으로 치마 앞쪽을 살짝 들어 보았다.

정말 시녀의 말대로 빛에 은은하게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수도 건물 몇 채 가격에 해당하는 진주가 잔뜩 갈려 들어간 것 같았다.

‘도대체 이 사람들 드레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거 너무 황송해서 편히 입고 다닐 수나 있겠어!’

아이린이 어이가 없어 넋을 놓고 있을 때, 하녀 한명이 와서 그녀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정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하는 구나.’

아이린은 이러다 조만간 소와 돼지의 중간쯤이 되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때 시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 되었습니다. 아가씨.”

아이린은 언제 와서 앉았는지도 모르겠는 화장대 앞에서 일어나 긴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안에는 귀여우면서도 우아한 느낌의 아가씨가 서 있었다.

‘헐, 얘 누구니? 이곳 하녀 언니들 솜씨가 너무 좋은 걸.’

언제 했는지 헤어부터 메이크업까지 완벽하게 드레스와 어우러져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한마디로 인간개조.

드레스, 헤어, 메이크업만 달리 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때 문밖에 서 있던 제이드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린은 무심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 순간 잠시 멈칫한 제이드는 이내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제이드 오빠야. 네가 봐도 평소의 나랑 너무 갭이 크지.’

“우와! 정말 아름답구나, 메이린!”

아이린은 어색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제이드 님.”

“배고프지?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제이드는 그녀를 향해 하얗고 긴 손을 살짝 내밀었다.

‘어머, 손 좀 봐. 무슨 남자 손이 이렇게 예쁜 거야. 만지면 닳을까봐 잡기도 아까운걸.’

아이린은 입꼬리가 찢어지듯 올라가는 것을 애써 다잡으며 그의 손에 손을 살짝 올렸다.

제이드는 눈을 접어 웃으며 그녀를 밖으로 에스코트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린이 레이먼드 공작저에 온 이후로 방을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치료가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공작과 제이드가 너무 과보호를 한 탓이었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애지중지.

살다 살다 그런 애지중지는 처음 봤다.

정말 공작가에 와서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자고 먹고 숨쉬기 정도였다.

일에도 돈에도 쫓기지 않고 여유 있는, 진정 그녀가 원하던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어-무, 지나치게 여유 있는 것 같은데.’

아이린은 어릴 때 보았던 뇌만 사용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아 머리만 커다래진 사람 그림이 떠올랐다.

아이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메이린, 왜 어디가 불편하니?”

“아, 아니에요. 너무 오래 누웠더니 목이 뻐근해서 풀었어요.”

‘윽, 너무 아무 말 대잔치인가.’

“아, 그랬구나.”

‘뭐야? 제이드 님, 이러다 내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겠는데. 뭐… 여긴 메주가 없긴 하지만.’

아이린은 그렇게 제이드의 인도에 따라 복도를 걷고 있었다.

기나긴 복도에는 걸으면서 지루하지 않게 그림과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어, 마치 미술관에 온 것 같았다.

“아름답지?”

“네. 매우 아름다워요.”

“네 방, 그리고 이 복도, 모두 어머니가 손수 꾸미셨어.”

“어머니가요?”

“응, 그분은 너를 매우 사랑하셨단다.”

아이린은 돌아가셔서 만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떠올리니 씁쓸했다.

그렇게 조용히 제이드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다보니 커다란 홀이 나왔다.

높은 천장 한 가운데는 커다랗고 화려한 상들리에가 마치 커다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아래는 책에서나 봤던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와, 이거 무슨! 황궁보다 더 아름답잖아!’

황궁은 연회가 열리는 홀처럼 화려한 곳도 있지만, 집무실이나 회의실 같은 실무 공간에는 장식을 많이 절제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곳 공작가는 곳곳이 마치 유럽의 문화 관광지에 온 것처럼 예술작품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돌아보니 은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건물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공작가의 모습도 엄청나다 생각했는데….’

아이린은 그 모습들을 직접 보니 웅장한 위용에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제이드는 그런 아이린의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후후, 이렇게 밖에 나온 건 오랜 만이지?”

아이린은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공작가의 모습에 넋이 나가 성의 없는 대답을 했다.

“네, 제이드 님.”

“메이린, 저기….”

아이린은 제이드의 부름에 그제야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망설이는 듯한 그의 모습에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제이드 님 무슨 할 말씀이라도?”

“그게, 내가 너의 오라비인데 이름을….”

“참, 죄송해요. 오라버니.”

제이드는 무언가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뭐지? 잘 못 말했나?’

“메이린!”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메이린, 내 딸아!”

레이먼드 공작이었다.

공작은 달리다시피 그녀 가까이 다가와 환하게 웃었다.

“헉헉, 수도 거리에 나간다는 이야기 들었다. 헉헉 나, 나도 같이 가자꾸나.”

아이린은 어쩐지 그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 제이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메이린은 저와 먼저 약속을 했습니다. 순서를 지켜 주시지요.”

“같이 가면 되지 뭘 그리 쩨쩨하게 구는 게냐? 메이린, 이 아빠도 같이 가도 되지?”

레이먼드 공작은 꽃중년의 미모를 뽐내듯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으윽, 눈부셔. 누가 저 얼굴을 20대 자식이 둘이나 있는 아빠라고 보겠어. 근데 지금…. 아, 아빠라고 했어?’

적응되지 않는 공작의 미소와 말투에 잠시 멍해 있던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거봐라. 메이린이 된다고 하지 않느냐? 메이린은 아빠인 나와 함께 가고 싶은 거다.”

제이드는 짐짓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아버지께서 그리 억지를 쓰시니 메이린이 어쩔 수 없이 끄덕인 것이지요.”

제이드는 아이린을 향해 눈을 초승달처럼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으아아, 제이드 님! 아니 제이드 오빠, 그런 미소는 반칙입니다!’

“메이린 이 오빠와 단둘이 가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끄덕인 거지?”

‘하하, 오, 오빠래!’

“아니다, 메이린은 이 아빠와 함께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닙니다. 메이린은 오빠인 나를 더 좋아합니다.”

아이린은 투닥거리는 미모의 두 사람을 보며 진정 자신은 성공한 덕후라는 생각에 환하게 웃었다.

‘후우, 아까만 해도 웃음이 나왔지. 그런데,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해도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

아이린은 그렇게 마차를 타고 공작과 제이드 사이에 앉아 수도 거리로 향했다.

이곳의 가족들과 하는 첫 외출이자 첫 식사.

첫 순서로 레스토랑을 간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레스토랑을 나온 후 디저트 카페에 들어서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문제라고 해야 할까?’

“메이린, 그 케이크 맛있니?”

“네, 엄청 맛있어요.”

“그러면 이곳 파티쉐를 공작가로 데려와야겠구나.”

“네? 파티쉐를요?”

그때 제이드가 말했다.

“아니에요. 메이린이 수도를 나왔을 때 마음 놓고 쉴 수 있게, 아예 이 가게를 매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뭐가 좋겠다고요? 설, 설마 여길 사버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작님!’

아이린은 정말 뒤로 넘어갈 뻔했다.

얼마 전만 해도 이곳의 디저트를 맛보는 것은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사치였는데.

그 뒤로도 수도 거리를 구경할 때마다, 아이린이 ‘여기 좋…’ 까지만 입에 올려도 두 부자는 경쟁하듯 그 가게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일단 아이린의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그 뒤에는 아무리 말려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헐, 이 두 부자는 참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이러다 공작가 거지 되는 거 아니야?’

아이린은 공작가의 재정을 걱정하며 앞서가는 두 부자를 따라 걷다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지치는 듯해 긴 한숨이 나왔다.

“…후우.”

그때 따듯한 무언가가 그녀의 손을 감싸왔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레온하르트였다.

“레…!”

아이린은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지만, 레온하르트가 얼른 검지를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온하르트를 보았다.

이윽고 그는 아이린의 손을 잡은 채 살금살금 뒤쪽으로 걸어가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공작과 제이드는 그제야 발소리를 들은 것인지 멀어지는 두 사람을 향하여 소리쳤다.

“메이린!”

“레온! 메이린의 손을 얼른 놓지 못해!”

두 사람이 쫒아 오려 했지만 이미 둘은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이후였다.

“이런, 놓쳤군.”

제이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 모두 아버지 덕분입니다.”

“내 덕이라니 내가 보기에는 네 덕이 크구나. 그나저나 저 녀석이랑 갔으니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구나.”

“아마, 그렇겠죠.”

“안되겠다. 사람을 써서 메이린을 찾아야겠다.”

제이드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공작을 제지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다 메이린에게 미움 받습니다.”

“그래도 보고만 있어도 아까운 내 딸인데 저런 늑대 같은 놈에게….”

“어쩌겠습니까? 저렇게 좋다고 웃으며 저 늑대 같은 놈을 따라갔는데. 그리고 이제 더는… 7살의 어린 메이린이 아닌 것을요.”

두 사람은 그렇게 아이린이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았다.

* * *

레온하르트는 공작과 제이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달리기를 멈추었다.

“메이린, 미안. 많이 힘들지.”

“헉헉, 아니에요. 오랜만에 달려서 그런 거예요. 그래도 기분은 상쾌한걸요.”

“후후, 그래? 그럼 다행이고. 점심은 먹었어?”

“네, 아까. 아버지와 오라버니랑이요.”

“디저트는?”

아이린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네, 디저트도요. 헤헤.”

“그럼 우리 함께 걸으며 거리 구경하러 갈까?”

‘으흐흐, 거리 구경이라. 정말 오랜만이네.’

“음, 그럼 전에 제가 살던 동네로 가요. 오늘 장이 서는 날이에요.”

“그래? 재미있겠다.”

“그럼, 우리 빨리 가요!”

그렇게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시장으로 향했다.

거리로 들어서니 음식과 갖가지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의 목소리에 시장은 활기로 가득했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난 이곳의 활기찬 분위기가 매우 좋더라.”

“그렇죠. 저도 그래요. 어! 레온,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아이린은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고 수제 악세사리를 파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머! 레온, 이 팔찌 너무 귀여워요.”

그녀가 집어든 것은 여러 가지 색의 실로 엮은 소박한 디자인의 팔찌였다.

아이린은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 실로 엮은 팔찌 한 쌍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머니, 이거랑 이거 주세요.”

“예쁜 아가씨가 안목이 좋으시네. 그거 연인 팔찌라우!”

“연인 팔찌요?”

“그렇다우. 당신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착용하면 그 사랑이 영원히 간다고 한다우.”

“우와! 정말요!”

“그럼, 이 팔찌 매번 나오는 팔찌가 아니라우. 정말 잘 골랐어.”

‘레온과 커플 팔찌 하려고 샀는데, 그런 좋은 의미가 숨어 있었다니!’

아이린은 환하게 웃으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눈을 빛내며 아이린의 손에 있는 팔찌 하나를 들더니 자신의 왼쪽 손목에 끼웠다.

“어! 레온.”

그리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린의 오른 손목에 남은 팔찌를 채워 주었다.

“얼마 입니까?”

“호호, 1실버라우!”

‘헉, 이 아줌마가 정말! 실로 엮어 만든 팔찌가 무슨 1실버씩이나 한다고!’

아이린이 바가지에 항의하려 입을 여는데, 레온하르트가 얼른 상인에게 값을 치르며 그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은 그와 맞잡은 손 위에 나란히 차고 있는 팔찌가 어쩐지 다정해 보였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도, 아이린은 아주머니를 슬쩍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오늘만 바가지 쓸게요. 다음에는 절대 없어요.’

상인 아주머니는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러면서 다들 또 온다우!’

아이린은 순간 자신이 우스웠다.

‘카페를 통째로 사주는 부자 아버지와 오빠가 있는데 실 팔찌에 벌벌 떨다니, 나도 참.’

아이린은 그제야 아주머니를 향해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만나 귀여운 아가씨.”

“네, 다음에 또 올게요.”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맞잡고 거리를 걸었다.

“우와! 봄인데 벌써 아이스크림이 나왔어요.”

“그래, 우리 가서 먹어 볼까?”

“네!”

“아이고, 예쁜 처녀 총각이네. 옷을 보니 저쪽 동네서 왔나 봐…요.”

상인은 평소 습관대로 말을 놓으려다가 말끝을 ‘요’로 끝내며 얼버무렸다.

“네, 맞아요.”

“다음에 놀러 올 때는 저기 보이는 의상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녀요.”

상인은 건너편 의상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끔 질 나쁜 사람들도 있어서 큰일 당할 수도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자, 아이스크림 한번 골라 봐요. 내가 서비스로 많이 줄게.”

“어떤 맛으로 먹을까? 오늘은 딸기 보다 바닐라가 더 먹고 싶네. 어쩌지, 초코도 맛있을 것 같은데.”

아이린이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온하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바닐라 하나 초코 하나 주세요.”

“그래 연인들끼리 다정하게 나눠 먹으면 되지. 예쁜 총각이 똑똑하기까지 하네.”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을 둘 다 내밀어 그녀의 손에 쥐여 줬다.

아이린은 순간 ‘풋’ 하며 웃고는 초코 아이스크림을 그의 오른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내가 둘 다 들고 있으면 손을 못 잡잖아요. 전 이전부터 연인이 생기면 이렇게 손잡고 데이트하는 것이 로망이었다고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연인이라는 말에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연인’이라는 단어는 그냥 흘러 들으면 별다른 단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연인’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달콤하고 그의 심장을 강하게 자극하기 충분했다.

레온하르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녀의 입에 초코 아이스크림을 가까이 대었다.

아이린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머금고 달콤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 얼른 먹어봐요. 그리고 이것도 맛보세요. 여기 아이스크림 정말 맛있어요.”

아이린은 먼저 맛을 보라는 듯 그에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그리고 입가에 초코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달콤한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

곧 그의 고개가 숙여지더니 그녀의 입술을 맛보듯 핥고 지나갔다.

“맛있네.”

순간 아이린의 볼이 터질 듯 붉어졌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무안한 듯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더니 그녀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의 다정한 손길에 어쩐지 귀 끝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린은 달아오른 열기를 가라앉혀 보려고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계속 핥았다.

하지만 열기가 식혀지기는커녕 무슨 맛인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때 아이스크림 가게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좋을 때다.”

“당신, 장사는 안하고 뭘 그렇게 멍하니 보는 거예요!”

여전히 멍하니 그들을 보고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 아저씨는 등짝 스메싱을 맞고 말았다.

짝!

“으윽! 이 여편네가 갑자기 왜 그래!”

“어머, 이이가 증말! 어디다 눈을 부라리는 거예요! 아이스크림 통 뚜껑도 닫지 않아 놓고서. 뭘 잘했다고!”

곧 아이린과 레온하르트는 두 사람의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거리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아이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온.”

“응?”

“나중에 우리도 저렇게 싸울까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절대 싸울 일이 없을 거야.”

“네? 결혼 안한 연인들도 싸울 때가 있는데요.”

레온하르트는 이내 걸음을 멈추며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음, 우리는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항상 질 테니까.”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레온이 항상 지다니요? 제가 잘 못할 때도 있는 거죠.”

레온하르트는 바람결에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정리해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 그대는 항상 옳아. 그리고 원래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약자라잖아.”

아이린은 그의 달달한 말에 순간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으윽 닭살. 저 늠름한 체구에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오다니. 후후, 우리 레온 은근 사랑꾼이라니까.’

“혼자만 먹지 말고 같이 먹어요.”

“어! 여기.”

레온하르트는 얼른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그거 말고요.”

아이린은 그를 향해 손짓했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녀가 서영일 때 맛보았던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초코 바닐라 혼합.

그녀는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항상 반반 섞인 혼합을 즐겨 먹었다.

서영일 때도, 그리고 아이린이 되어서도.

그녀의 취향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 * *

아이린과 레온하르트가 정식으로 연인이 된지 반 년.

드디어 기다리던 결혼식 아침이 밝아왔다.

아이린은 세수를 하자마자 두 달 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고 S라인을 강조해주는 바람직한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그리고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하녀들에게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아, 내 정신 좀 봐. 이제 메이린이라고 해야 하는데.”

“데이지!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화장을 담당하던 하녀가 조용히 말했다.

“공녀님, 화장이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나가 보도록 해요. 데이지, 얼른 이쪽으로 와.”

데이지는 아이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오늘 정말 예쁘네. 내 친구.”

“데이지 너도 오늘 힘 좀 준 것 같은데. 이러다 신부인 나보다 더 예쁘다는 소리 듣겠는걸.”

“어머, 아니야. 그냥 제이드 님이랑 맞추다 보니까…. 하하.”

아이린은 단번에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제이드의 남다른 외모 때문에,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작정하고 꾸민 것이다.

“데이지, 내가 먼저 경험해 봐서 아는데 조금은 마음으로 포기하는 게 행복해지는 지름길이야.”

그녀의 말에 데이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알고는 있는데. 나도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리고 예쁘게 보이고 싶기도 하고.”

“내 생각에는, 제이드 오라버니는 데이지가 행복하게 웃을 때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할걸.”

“그, 그럴까?”

“그럼. 내가 저번에 보니 네가 웃을 때 제이드 오라버니도 환하게 웃더라고. 그러니 그리 불안한 표정 짓지 말고 웃어.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잖아.”

“후후, 고마워. 메이린.”

“그래, 웃으니 보기 좋네. 아참! 그리고 데이지, 매번 이름 가지고 어색해 하지 말고, 편안한 것으로 불러. 두 이름 다 나니까.”

데이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제 네 진정한 가족도 이름도 다시 되찾은 거잖아. 정확하게 불러야지. 메이린 레이먼드 공녀님.”

“후후, 네 말이 맞아. 그런데 나도 아직은 그 이름이 어색해, 데이지.”

데이지는 살짝 야위어 보이는 아이린의 얼굴에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메이린, 오늘 뭘 먹기는 했어?”

허리를 꽉 조이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이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만 조금.”

“후우, 네가 한 달 전부터 디저트를 끊고 평소에 즐기지 않는 코르셋을 입는다 할 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

“인생 단 한 번뿐인 특별한 날이잖아. 오늘은 정말 예쁘게 보이고 싶다고.”

“칫, 그래도 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예쁘고 귀엽다고.”

“너도 나랑 같을 것 같은데. 후후, 그 말 그대로 네 결혼식 때 돌려줄게.”

데이지는 얼마 전부터 제이드와 사귀고 있었다.

아이린의 결혼식을 준비하며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는지 서로 눈이 맞았다고 할까?

‘뭐, 원래 데이지가 제이드 오빠의 덕후였기는 했지만. 결국 나도 데이지도 성공한 덕후가 된 거네. 아니, 공공의 적이 된 건가? 후후.’

데이지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붉어진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메이린, 뭐라는 거야. 제이드 님과 난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아니야.”

‘쿡쿡, 저리 당황하니 왠지 놀려 주고 싶어지네.’

“호호, 그래? 그런 단계가 아니면 제이드 오라버니와 네가 무슨 단계까지 갔는데?”

아이린의 말에 데이지의 얼굴은 다시 점점 빨게 지기 시작했다.

“어어? 왜 이리 얼굴이 빨간 거야, 데이지. 설마 그것도 했던 거야? 설마 그 단계까지?”

데이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라구! 우리는 아직 키스밖에 못했다고.”

“아하, 벌써 키스까지 갔구나.”

‘우리 제이드 오빠 연애 고자인 줄 알았더니 은근히 진도가 빠르신걸.’

“어머, 몰라!”

데이지는 더는 붉어지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제이드가 메이크업을 하던 방안으로 들어왔다.

“데이지는 어딜 저렇게 가는 거야?”

아이린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제이드 오라버니.”

제이드는 얼른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신부 대기실을 향해 함께 걸었다.

“결혼식은 분명 내가 하는데 뭐가 부끄러운지 저렇게 얼굴을 붉히네요. 친구는 일심동체인건가?”

“흐음, 저 얼굴은 분명 우리 일을 두고 네가 놀린 것 같구나. 그리고 부부는 일심동체이겠지.

“에이, 그만큼 덕질 메이트인 데이지와 제가 한 마음이라는 거지요. 아시잖아요. 데이지랑 나, 아카데미 다닐 때 제이드 오라버니 덕질하다 만난 거.”

“후후, 메이린, 그때 내가 그렇게 좋았어?”

“그럼요, 우리 제이드 오라버니, 정말 잘생겼지, 똑똑하지, 착하지. 지금도 좋아해요. 오라버니.”

그 순간 제이드는 울컥했는지, 아이린을 살짝 안으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동생, 메이린. 나도 널 사랑한단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제이드를 아이린에게 때어내며 말했다.

“이제 그 덕질은 이제 나로 갈아 타셔야죠, 황태자비.”

“아니야, 메이린 핏줄은 영원하단다. 이놈이 너한테 잘못하면 언제든 집으로 돌아오는 거다.”

“으윽, 제이드. 그게 친구 결혼식에에서 할 말이야?”

“응, 할 말이지. 여긴 내 동생 결혼식이니까.”

공작가의 공녀로 밝혀진 이후, 레온하르트와 제이드 그리고 공작과 황제까지 매일 만나면 저렇게 아웅다웅했다.

아이린은 대기실 가운데 마련된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후후, 오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

아이린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곧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 느낌이네.’

그때 황궁의 시녀장이 들어와 식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곧 아버지인 레이먼드 공작이 들어왔다.

“너희들은 왜 여기 있는 거야? 어서 제 자리로 가거라. 메이린은 이제 내가 에스코트 할 터이니.”

“그 에스코트 오빠인 제가 해도 됩니다.”

“아닙니다. 신부 에스코트는 신랑인 제가 해도 됩니다.”

공작은 두 사람을 괘씸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내가 건강히 살아있는데 신부가 오빠나 신랑의 손을 잡고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그리고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그래, 저 두 녀석 때문에 내 딸하고 단둘이 오붓하게 데이트 한 번 못 해 봤었지.’

제이드와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젓던 공작은 얼른 아이린을 향해 활짝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메이린, 아빠랑 함께 갈 거지?”

그 순간 아이린은 어린 시절 한 번씩 오빠를 따돌리고 단둘이 외출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런 눈빛으로 손을 내밀며 물어 보셨지.’

곧 그녀의 눈가에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레이먼드 공작은 얼른 그녀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아이린은 제이드와 레온하르트를 슬쩍 바라보고는 곧 레이먼드 공작의 손을 잡았다.

공작은 이겼다는 듯 고개와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며 아이린의 손을 잡고 신부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남은 두 사람은 낭패라는 얼굴로 공작과 아이린의 뒤를 따라 나갔다.

예식이 열리는 황궁의 연회 홀 가득 신부입장을 알리는 웅장한 음악이 울려 펴졌다.

아이린은 어쩐지 긴장되어 손이 떨려왔다.

그때 아버지인 레이먼드 공작의 따뜻한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메이린, 걱정 말거라. 앞으로 네 곁에는 이 아빠가 있단다.”

“아, 아빠.”

“그래, 메이린. 이제 갈까?”

아이린은 공작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빠.”

두 부녀는 다정하게 서로를 향해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반쯤 걸어갔을 때, 레온하르트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순간 여기저기 놀라는 함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호, 신랑이 빨리 신부를 데려가고 싶은가 봐요!”

“황태자 전하, 오늘 참 많이 급하신가 봅니다. 큭큭!”

“급하시겠지. 네 녀석도 작년 결혼식에서 그랬잖아.”

아이린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낯 뜨거운 소리에 얼굴이 붉어졌다.

공작은 레온하르트를 못마땅한 듯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공작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른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공작은 그런 그가 어쩐지 얄밉기도 하고 아이린의 손을 놓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대로 멈춰 태워 버릴 듯한 시선으로 레온하르트를 보았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내 공작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어서 놓으시죠.”

“싫네.”

“메이린이 곤란해 하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거야 자네가 예까지 나와서겠지.”

아이린은 정말 결혼식 날까지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게 될 줄 몰랐다.

그것도 귀빈이 가득 찬 버진 로드 한가운데서.

‘윽, 두 사람 정말.’

아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공작을 불렀다.

“…아빠.”

“후, 그래 메이린. 지금도 늦지 않았다. 집으로 가지 않으련?”

그때 앞쪽에 앉아 있던 황제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식을 시작했으니 메이린은 이제 우리 황가의 사람일세.”

“아닙니다. 반지를 끼지 않았으니 아직 저희 레이먼드 공작가의 사람이지요.”

레이먼드 공작과 황제는 언제 합류 했는지 제이드와 레온은 그렇게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를 바라봤다.

게다가 아이린을 향해 질투에 휩싸인 영애들의 따가운 시선까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정말! 내 꿈꾸던 결혼식이.’

아이린은 순간 눈물이 흘렀다.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흑흑.’

그때 객석에 앉아 있던 데이지가 얼른 다가와 그녀의 눈물을 살짝 닦아 주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매서운 눈초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어서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순간 아이린은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로 깜짝 놀랐다.

데이지 그녀가 매섭게 처다 본 그들 중 황제폐하도 있지 않았던가?

그래도 다행이도 그녀의 윽박이 먹혀들었는지 황제폐하와 제이드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공작 또한 많이 아쉽고 섭섭한 듯 아이린을 보았지만 이내 레온하르트의 손에 그녀를 넘겨주었다.

“레온, 내가 지켜볼 게다. 메이린에게 잘하도록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메이린은 제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공작은 그제야 마음을 놓는다는 듯 아이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잘 살아야한다. 내 아가 메이린.”

“걱정 마세요. 아빠. 잘 살게요.”

레온하르트는 공작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아이린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아카데미 학장의 긴긴 주례가 끝나고 하객들이 지처 갈 때 쯤.

두 사람의 맹세의 키스 시간이 다가왔다.

레온하르트는 이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메이린.”

“저도 사랑해요. 레온.”

레온하르트는 메이린의 머리를 살짝 감싸며 고개를 서서히 내려 입을 맞췄다.

아이린은 이내 눈을 감았다.

* * *

“으음….”

아이린은 몰려오는 피곤함과 허기진 느낌에 잔뜩 무거워진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곧 그녀의 뱃속에서 원초적인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나 참. 내 몸은 참 본능에 충실하네. 윽, 배고파.’

그녀는 팔을 올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어? 여긴 어디?”

그렇게 눈을 떠 보니 화려한 샹들리에와 고급 문양의 벽지가 그녀를 맞이했다.

‘뭐지, 이 익숙한 상황은? 설마 나 또 낯선 세계라던가? …낯선 세계인 거야?’

아이린은 순간 낯선 공간에 당황스러운 눈동자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그때 무언가 단단한 것이 척 하고 그녀의 다리로 올라왔다.

“뭐지? 으어억… 팔, 팔이잖아.”

아이린은 이불을 슬쩍 올려 보았다.

이불속에는 태초 때처럼 헐벗은 레온하르트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레, 레온?”

그제야 아이린은 자신이 어제 결혼식을 한 것이 떠올랐다.

“휴, 다행이다.”

아이린은 순간 자신도 그처럼 헐벗고 있음을 깨달았다.

매우 당황했던지 이불이 내려가 허전함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린은 순간 내적 비명을 질렀다.

‘으악!’

곧 더없이 격렬했던 어젯밤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어쩐지 긴장이 되는 마음에 진정에 도움이 되는 차를 반 잔 마신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이후 차를 마시고 심신이 진정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차는 그녀의 심장을 열심히 운동시키며 심신이 들뜨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차 반 잔으로 그렇게 흥분 상태가 될 일…!’

아이린은 그 순간 차와 함께 먹었던 초콜릿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초콜릿에서 났던 살짝 씁쓸한 끝 맛도.

‘헉. 그냥 다크 초콜릿이라 살짝 쓴가 보다 했는데, 설마 술이 들어간 초콜릿이었어?’

처음에는 어렴풋했던 광란의 어젯밤이 아이린의 머릿속에 점점 선명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이 세계의 가장 강대국인 룩스 제국.

그 룩스 제국 황태자의 결혼식인 만큼 축하 파티는 그야말로 국제적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방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귀빈들에게 황태자로서 인사를 하러 연회 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먼저 돌아간 아이린은 드레스를 벗고 장미꽃을 띄운 물로 목욕을 하며 피로를 풀었다.

그렇게 서서히 긴장이 풀려 갈 때쯤이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시녀들이 준비한 살구색 잠옷을 펼쳤는데 순간 얼굴이 확 하고 붉어졌다.

입으면 몸의 실루엣이 은은히 비칠 것만 같은 그 잠옷을 보고 있으려니 오히려 다시 긴장감이 치솟았다.

난감한 마음에 목욕 가운이 있나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푹 젖은 수건을 두르고 나가긴 찝찝해, 아이린은 어쩔 수 없이 그 잠옷을 입고 나갔다.

욕실 밖에도 시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첫날밤이고 황태자인 레온하르트가 돌아올 시간이 다 되어 시녀들이 모두 물러간 듯 했다.

아이린은 그렇게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시녀들이 준비해둔 차를 반 잔만 따라 마셨다.

따뜻한 차가 조금 들어가면 괜찮겠지 했는데, 배고픔에 데이지가 주고 간 초콜릿을 먹은 것이 정말 화근이었다.

아니, 화근이 아니었던가?

그녀에게 첫날밤의 고통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동안 읽었던 온갖 로맨스 소설 속 첫날밤 장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어쩐지 차에 몸이 살짝 따뜻해진 정도가 아니라 확 달아 오른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녀가 있는 방 가까이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곧 이어 문이 벌컥 열려왔다.

“메이…린!”

방안에 들어온 레온하르트는 장난꾸러기 같으면서도 색스러움이 가미된 그녀의 미소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그 아래의 그녀의 잠옷을 보는 순간 더없이 심장이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급하게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메이린 잠, 잠시만.”

당장 그녀에게 달려들고 싶지만 연회장의 열기로 땀을 흘렸던 것이 기억나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아이린은 그를 향해 음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티 테이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시녀들이 로맨스 소설을 많이 봤는지 커다랗고 새하얀 침대 위에 장미 꽃잎이 오소소 뿌려져 있었다.

어쩐지 로맨틱한 분위기에 아이린은 한층 더 흥분되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침대 한가운데서 은은한 장미향을 맡으며 누워있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나고 욕실 문이 급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건을 허리에 맨 레온하르트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랜 수련으로 이뤄진 탄탄한 근육질의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적당히 볼록한 단단한 가슴과 그 아래로 역삼각형으로 좁아지는 허리.

그 가운데 존재감을 나타내는 초콜릿 모양으로 정확히 갈라진 복근.

아이린은 순간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래, 나 오늘이 처음이 아닌 거잖아.’

사실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그날의 오해는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레온하르트도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고 아이린이 물어보지 않았기에 그날 일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남주의 처음을 가졌다’라는 오해는 아직까지도 남아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린은 용기를 내 다가오는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그를 꼭 안으며 그의 목을 끌어 당겼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손의 이끌림을 따라 아이린을 향해 입술을 내렸다.

아이린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 손을 내려 그의 허리에 살짝 둘러져 있던 수건을 풀어 떨어뜨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대범한 행동에 순간 놀라 숨이 멈출 뻔 했다.

“흡!”

하지만 아이린은 그런 그를 향해 색기가 가득한 눈을 접어 웃으며 키스를 이어 나갔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눈동자를 두리번거렸다.

티 테이블 위에 그녀가 마신 것 같은 찻잔이 놓여 있었다.

‘설마, 차를 마신 거야?’

그렇게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순간 아이린은 그가 집중하지 못한 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의 입술을 살짝 물며 그를 앙칼지게 쳐다봤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머릿속과 심장이 번개를 맞은 듯 번쩍였다.

‘그래, 무슨 걱정이야. 우린 오늘 결혼했는데.’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눈을 반짝이며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이린은 순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으나 다시 그를 향해 유혹적인 미소를 보냈다.

레온하르트는 조심히 그녀를 침대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새하얀 침대위에 붉은 장미 꽃잎, 그리고 은은한 살구색 잠옷을 입은 아이린의 모습은 정말!

레온하르트는 점점 그녀 위로 올라갔다.

아이린은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보니 어쩐지 감질이 나 애가 탔다.

그녀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그의 목을 끌어 당겼다.

그리고 손을 내려 그의 단단한 몸을 쓰다듬듯 훑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결혼식 준비로 단정했던 금발머리는 어느새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호수 같은 푸른 눈이 짙은 열기에 흐려진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왼쪽 눈꼬리 아래의 눈물점이 그의 눈웃음 따라 움직였다.

어쩐지 색스럽고 묘한 느낌은 그녀의 가슴의 열기를 더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 * *

‘그 초콜릿, 데이지가 주고 간 것이었어. 으윽, 그래서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방을 나갔구나!’

긴장을 풀어주려는 좋은 의도였을 수도 있었지만, 초콜릿을 주며 잠시 음흉했던 데이지의 표정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건 뭐!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들이부었구나! 으윽, 데이지 두고 봐 정말. 내가 꼭 복수한다.’

아이린은 어쩐지 부끄러워 순간적으로 이불을 끌어 모았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하아, 어제 밤이 처음이었구나.’

아이린은 이미 그와 처음이 아니라며 한 줄기의 이성마저 떠나보냈던 것이 떠올라 머리를 잡았다.

그 순간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레온하르트가 한쪽 팔을 세워 머리에 괸 채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헉, 무슨 남자가 아침부터 이렇게 예쁜 거야.’

아이린은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을 붉히며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그 순간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은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어 이불 밖으로 눈만 쏙 내놓고 그를 보았다.

“칫, 왜 웃는 거예요.”

“행복해서.”

“네? 뭐가요?”

“그냥 이렇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본 사람이 그대라서. 그리고….”

“…….”

“매일 이렇게 잠들기 전에도 아침에 눈을 뜰 때도 그대를 가장 먼저 만날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

아이린은 얼굴을 가렸던 이불을 천천히 내렸다.

“저도요. 레온.”

“사랑해, 메이린. 영원히!”

“사랑해요!”

* * *

그러나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아이린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다는 그의 바람은 계속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건 바로…!

“아빠! 아빠! 나 배고파!”

레온하르트는 눈을 뜨며 자신의 배위에 올라온 쌍둥이들을 바라봤다.

이제 막 5살 된 아들과 딸 쌍둥이.

레온하르트는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며 아이들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아이린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를 돌보느라 녹초가 된 아이린은 그의 입맞춤에도 아무 미동이 없었다.

“엄마 피곤하시니까 우리 조용히 나가자.”

두 쌍둥이들은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고 방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아이린은 잠들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머리맡에 살짝 앉았다.

‘식사를 하고 자면 좋을 텐데.’

요즘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야위어가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때 아이린이 부스스 일어났다.

“…레온.”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잘 잤어? 내 사랑.”

“으윽 닭살! 아침부터 이러기예요?”

“후후, 내 사랑 보고 내 사랑이라고 하는 건데 내 사랑이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하지?”

아이린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다는 그 드라마를 떠올리며 황망히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일어나세요. 예쁜 아가씨. 피곤하면 식사를 좀 하고 잠들도록 해.”

아이린은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의 따뜻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있어 행복했지만 레온하르트의 소망은 그렇게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린에게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를 만나는 날들이 계속될 것이다.

-Fi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