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73. 진홍(?)의 카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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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진홍(?)의 카트리나 ]
콰직 !
“커허어억!!”
순간적으로 폭발한 카트리나의 붉은 검기가 슈트렐리츠의 몸을 꿰뚫으며 박았고, 엄청난 그 광경은 저 멀리 설원에서 보일 정도로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파아아
츄즈즈즈
투두두둑
그렇게 응결된 그녀의 붉은 검기는 일순 부풀어 터지는가 싶더니 마치 피의 비를 보듯 설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귀열고 들어.”
“커흑.. 커억..”
“아버지고 뭐고 모르겠는데, 내 눈엔 넌.”
콰악.
“큭..!!”
난 녀석의 머리를 설원에 눌러 박으며 괴로워하는 녀석에게 으르렁거렸다.
“그저 불평쟁이일뿐이야. 그렇게 무섭고 밉다면, 애처럼 굴지 말고 조용히 산속에 들어가 찌그러져 있어.”
“쿨럭.. 하하하.. 여전히 가차 없으시군요..”
“뭐..?”
녀석은 독설에도 재밌단 듯 웃음을 터트리는가 싶더니, 이내 진지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인간에게 도움되는 일을 묻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라고.”
‘내가..?’
“그 말을 따라 떠난 형제가 절반입니다.”
형제란 소리에 난 순간 왕도에서 해맑게 칭얼거리던 플로헤타를 떠올렸다. 천지난만한 그녀도 그처럼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걸까?
“세상은 변할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제국도 제가 놓은 불길에 무너지겠죠.”
“뭐..?”
시이잉
채쟁
“큭.. 이 자식..!”
언제 샤벨을 전송했는지 내게 검을 휘두르며 날 떨어트린 녀석은 고고히 일어나선 내게 말했다.
“왕정은 무너지고,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권리를 얻을 겁니다.”
‘설마 이 녀석..’
나는 이제야 녀석이 말하는 인간들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당신의 집착에 억눌려 있던 세계를 구원하고, 전 아버지를 쓰러트릴겁니다.”
“...”
“창조된 제게 당신이 주셨던 광휘(光?)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말이죠.”
그 말과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 녀석은 굳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과거에 얽매여 있는 당신은 절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썩은 건 썩은 거니까요.”
그렇게 말하곤 녀석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고원을 지나 저 멀리 사라졌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무엇을 방해하는지 말이었다.
“빌어먹을..”
부상을 당해 서로 부축하며 일어나던 11기사단의 옆으로 위풍당당한 제국의 전열보병들이 고원에서 저항하는 공화국군을 몰아붙이며 진격하기 시작했다.
전세가 기울어진 싸움이건만, 고원 위의 공화국군은 마지막 한 명까지 플린트 락을 발사하며 싸웠고, 모두가 죽어서야 질긴 그 싸움은 끝날 수 있었다.
“...”
다그닥.
“꼴이 말이 아니군.”
시체를 정리하는 병사들 사이로 말을 몰아 다가온 마벨이 멍하니 죽은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말을 건넸다.
“보여?”
“뭐가 말이지?”
“저런 병사들에게 고전했다는 게 믿겨지냐고.”
변변찮은 군화조차 없어 헝겊으로 칭칭감은 공화국 전열보병 병사의 발을 가리킨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녀석에게 말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야.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지.”
“...”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일까, 내 차가운 말투에도 마벨은 조용히 입을 다물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날 응시할 뿐이었다.
“오리지널을 쓰러트렸다 들었어.”
“...”
“그 소문이..”
“그 딴게 뭔가 중요한데?!”
화가 났다. 공적이나 인정따윈 상관없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해야할지 안다면 그것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너도 군인이고, 나도 군인이야 카트리나. 많은 생각은.. 많은 것을 주저하게 만들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그는 말에서 내려선 내게 다가왔다.
“제국의 씰인 너와 제국의 원수인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어.”
“...”
“그 어떠한 고결하고 정의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린 악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야.”
“마벨..”
“얄궂은 운명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충실히 이행할 수밖에..”
알고 있던 것이었다. 똑똑한 녀석이니까, 슈트렐리츠의 의미를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까.
옳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입장이란 것은 정말이지 얄궂고 미련스런 인간의 어리석음이니까 말이었다.
“너의 죄책감은 내게 넘겨, 카트리나. 그러라고 있는 마스터니까.”
그렇게 말한 녀석은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며 피가 묻은 볼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특이하고 재밌는 씰, 넌 정말 인간을 좋아하는구나.”
쪼옥.
‘..!’
그 말과 함께 내게 다가온 녀석은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 따뜻하고 감미로운 키스, 그의 혀가 내 입 안으로 들어오고 작은 내 몸은 그에게 이끌려 안겨졌다. 마치 지쳐 있는 날 위로해주듯 그의 키스는 다정하고 또한 상냥했다.
***
프러겔의 왕도, 크리스티네는 토르디에르에서의 승전보에도 귀족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바로 페르티갈 로슈비치의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에르말디아 궁전 중앙홀에 모인 귀족들은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단상 위 왕좌에 앉아 고심하는 에스테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혁명이라고요?”
“예, 국왕 안톤 2세가 처형당하고 수도 플루스가 혁명군 손에 떨어졌단 소식입니다.”
왕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백성들에게 개처럼 끌려가 죽임을 당한 대사건이었다. 같은 왕으로서 에스테리아는 이 일이 자기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하켄의 화친제의에 승낙한 그녀는 하켄처럼 페르티갈 로슈비치를 공격할 군대를 편성하려 했다.
아무리 철천지원수인 하켄이었지만, 나라의 근간인 왕정이 위협당하는 지금 하루빨리 혁명의 불씨를 잠재워야 했다.
“토르디에르도 평정된 지금, 군을 움직일 적기인 거 같군요.”
“동쪽의 키프루스 왕국도 군대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키프루스가요?”
거대한 동토를 지배하는 키프루스 국은 호시탐탐한 하켄과 프러겔이 있는 서쪽으로 진출하려 했는데 이번 페르티갈 로슈비치 사건을 계기로 군을 움직인 듯싶었다.
“그 야만인들이 또 본성을 들어내는군요.”
서쪽의 여러 왕국과 제국들에 비해 문화수준이 낮았던 키프루스는 공공연히 멸시를 받으며 무시 받았지만, 그들은 에우로페 대륙의 일원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쿠로조프 원수를 사령관으로 30만의 대군이 출진했다 합니다.”
“키프루스는 됐고, 우리는 누굴 사령관으로 보내면 좋겠습니까?”
이에 많은 귀족들이 웅성거리던 그때, 앙센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셰이엔 공작을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자 많은 귀족들은 웅성거리며 여왕의 눈치를 보았고, 에스테리아는 한층 심기가 불편해진 얼굴로 앙센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죠, 백작?”
프러겔의 선왕은 그녀에게 왕위를 내려주면서 왕국의 하나밖에 없는 오리지널 씰은 그녀의 남동생인 셰이엔에게 주었는데, 보통 왕위를 잇는 자가 계약까지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에스테리아의 불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플로헤타의 마스터인 그는 자기 씰만 왕도를 수호하는데 남겨두고는 베르니아 공국에서 호화롭게 여가를 즐기며 살고 있었다.
“비록 방탕한 생활을 하고 계시지만, 누구보다 식견이 뛰어나신 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하켄에서는 마벨 원수에 이어 올 라운드까지 투입되었단 소문이 있습니다. 게다가 키프루스가 아무리 미개하다 해도 30만 대군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페르티갈 로슈비치는 세 나라의 국경이 맞닿는 요충지로 누군가에게 넘어갈 경우, 꽤 골치 아파질 수가 있었다.
“게다가 샤벨리아경이 잠이 든 지금, 그들을 맞설 분은..”
앙센은 말을 흐리며 에스테리아의 뒤편에 조용히 시립하는 플로헤타를 응시했다.
“플로헤타를 참전시키잔 말인가요?”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의견에 잠시 생각에 잠기던 에스테리아는 알겠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들으세요, 페르티갈 로슈비치로 군대를 파견하겠어요.”
“예.”
“사령관으론..”
여전히 탐탁지 않단 듯 잠시 망설이던 에스테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렌 백작과 부탁드린단 듯 바라보는 앙센의 눈빛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셰이엔 공작을 임명하고, 부사령관으론 베르텡 후작, 참모로는 앙센백작과 페르티안 준작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왕국 제1성인 플로헤타도 원정에 참여할 겁니다.”
“오오.. 플로헤타님이..”
귀족들은 에스테리아의 말에 기대 반 걱정 반의 모습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시종은 어수선한 홀 분위기에 예식용 긴 창을 내리치며 외쳤다.
타앙 – 타앙
“폐하의 말씀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두 조용해 주십시오!”
다시금 잠잠해진 홀을 바라보던 에스테리아는 자기 뒤에 있던 플로헤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플로, 이번 한 번만 네게 부탁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플로헤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이것 또한 사람들을 위한 길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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