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섬광의 주인 _ 뇌전(雷電)의 샤벨리아-76화 (76/135)

〈 76화 〉 76. 불완전한 혁명

* * *

[ 76. 불완전한 혁명 ]

프러겔과 키프루스의 참전소식은 페르티갈 로슈비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제국과의 싸움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또 다른 침입소식은 공화국 수뇌부를 고민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이를 어쩌면 좋소, 프러겔과 키프루스마저 참전하다니..”

통령은 머리가 아파졌단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나머지 의원들도 침통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창가에 기대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라인슈볼츠와 그의 앞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엘폴스카만은 달랐다.

“콜록.. 콜록..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는 겁니까?”

통령의 물음에 미엘폴스카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라인슈볼츠에게 공화국 수비대 5만을 주어 키프루스 군을 막게 할 것입니다.”

“5만이요? 이보시오, 키프루스 군은 30만이란 말이오! 대체 말이 되는..”

쿵.

미엘폴스카의 말에 황당하단 듯 따지는 의원의 말에 보다 못한 라인슈볼츠가 샤벨검집을 바닥에 강하게 내리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5만이면 충분합니다.”

“뭐.. 뭐요?!”

불쾌하단 듯 쳐다보는 의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라인슈볼츠는 미엘폴스카 곁으로 와선 지도에 배치된 아군 모형 일부를 북부전선으로 돌리며 말했다.

“숫자가 많다해도 보급병만 10만입니다. 게다가 그 먼 동토에서 이곳까지 이어진 보급로를 생각한다면 지금쯤 남아 있는 식량은 별로 없을 겁니다.”

“호오..”

그의 말에 미심쩍어 하던 이들도 조금씩 표정을 풀기 시작했고, 라인슈볼츠는 카리스마 느껴지는 눈동자를 돌려 회의실의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훈련이 잘 된 정예 5만이면 녀석들을 북쪽에서 퍼지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그 말은.. 격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통령의 물음에 라인슈볼츠는 그게 말이 되냔 듯 옅은 조소와 함께 그에게 말했다.

“하하.. 아까는 이길 수 없다 하시더니, 지금은 물리치길 바라시는군요. 정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 아닙니까?”

“어허! 라인슈볼츠!!”

“이 자가 지금 누구께 경망스런 말을 하는겐가?!!”

라인슈볼츠의 비아냥에 의원들은 호통을 쳤지만, 라인슈볼츠는 작은 체구임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모습으로 오히려 좌중을 압도하며 말했다.

“프러겔 선봉대에 남동부 방면 시민군 5만이 궤멸되었습니다. 그토록 반대했건만 여기에 병사를 투입해야 한다 주장했던 분들이 누구시죠?”

그의 말에 통령과 의원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고, 라인슈볼츠는 탁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정치나 전쟁 둘 중 하나만 하십시오. 어설프게 전쟁까지 하다간 그나마 쥐고 있던 정치도 뺏길겁니다.”

“이.. 이 사람이!!”

직설적인 라인슈볼츠의 말에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던 미엘폴스카는 그만하면 됐단 듯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고 불쾌해 하는 의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무래도 젊은 혈기에 직언을 하다 보니 실례를 범했습니다.”

“미엘폴스카 의원, 그대가 저 친구를 아낀다는 것은 알지만 계속되는 무례한 언동에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거요!”

“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따로 주의를 주지요.”

그렇게 말한 미엘폴스카는 그만하면 됐단 듯 라인슈볼츠에게 눈짓을 했고, 그런 그의 신호에 라인슈볼츠는 불만섞인 표정이었지만 이내 의원들에게 사과를 구하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든 것은 공화국을 위해 그런 것 일뿐,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크흠..”

“앞으로 조심하시오!”

진정되는 회의실의 분위기에 미엘폴스카는 마른기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콜록.. 그럼, 라인슈볼츠가 북부전선을 맡을 동안 제가 셀롱스크로 가 직접 남부전선을 지휘하겠습니다.”

“의원이 직접말이오? 하지만 제국과 프러겔 군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데 괜찮겠소?”

그러자 미엘폴스카는 미소와 함께 시종이 건넨 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길은 하나고 지나가고 싶은 이는 둘입니다. 둘 중 하나는 결착을 내야겠죠.”

자신 있어 하는 미엘폴스카의 모습에 의원들은 동의한단 듯 고개를 끄덕였고, 통령은 알겠단 표정과 함께 그에게 말했다.

“좋소, 북쪽의 키프루스군은 라인슈볼츠를 그리고 남쪽의 제국과 프러겔에 대한 방어는 의원에게 모든 지휘권을 위임하겠소.”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렇게 회의를 끝내고 저택을 나오던 그때, 볼멘 라인슈볼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저 쓸모없는 것들을 껴안고 있을 건가?”

“하하.. 자네도 참 성미가 급하군.”

살랑살랑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던 미엘폴스카는 열혈적인 자기 친우에게 말했다.

“자네 뜻을 모르는 것 아니지만, 그렇게 부족하고 못마땅하다고 내쫓기만 한다면 이 나라에서 일할 사람은 없을걸세.”

“누가 그걸 모르는가?! 하나 같이 엉덩이만 깔아 앉은 채 현실과 동떨어진 명령만 하는 것이 속 터지지 않느냔 말이야!”

씩씩 거리는 라인슈볼츠의 모습에 미엘폴스카는 작게 기침을 하며 웃음을 터트리는가 싶더니 그 누구보다 냉정하고 침착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은 나라 밖의 일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일세, 나라 안의 문제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다네.”

“흥.. 말이나 못하면..”

그의 말에 툴툴거리는 라인슈볼츠였지만, 그 뜻은 알고 있단 듯 다시금 쌓은 눈길을 밟으며 그를 지나쳤다.

“아, 그리고..”

“뭔가?”

뚜벅뚜벅 걸어가던 라인슈볼츠는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미엘폴스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몸 잘 추스르게, 요즘들어 기침이 늘었어.”

“하하.. 쓸데없는 걱정은. 알았네, 걱정 말게.”

친우의 걱정에 미엘폴스카는 미소와 함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란 듯 손을 내저었고, 라인슈볼츠는 그런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허리춤의 샤벨을 쥐고는 자기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충격이었다. 나를 봤다니? 그건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러지?”

집무실에서 엄지손톱을 문채 왔다 갔다하는 내 모습을 보다 못한 마벨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훗..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있구만.”

키프루스와 프러겔의 참전 소식에 재빨리 군을 움직일 줄 알았던 녀석은 예상외로 군을 쉽사리 움직이지 않은 채 군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됐어, 넌 니 일이나 해.”

상관하지 말란 듯 내가 손사래를 치자 녀석은 의자를 뒤로 밀어 일어나는가 싶더니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녀석의 등장에 흠칫 놀란 내가 가슴을 교차하며 뒤로 물러서자, 마벨은 어이가 없단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동그랗게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는 내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는 줄 알겠다.”

‘아니야..?’

여자가 된 뒤로 나도 모르게 방어적이 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은은하게 풍겨 오는 녀석의 시트러스 향수는 묘하게 나를 싱숭생숭하게 했다. 역시 남자가 시각적인 동물이라면, 여자는 청각과 후각의 동물인걸까, 나는 묘하게 예민해지는 내 코와 함께 우리 사이에 느껴지는 작은 소리하나 놓치지 않으며 녀석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두근.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이토록 설레는 것이었을까, 그저 녀석의 눈동자를 응시할 뿐이건만 난 두근거림과 함께 머리 가득 차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스윽.

‘..!’

녀석의 손길이 볼에서 느껴져 왔다.

“설마 프러겔의 마녀 때문에 그런 거야?”

울컥.

‘누가 마녀란..’

“괜찮아, 난 내 씰을 믿으니까.”

“뭐..?”

갑작스러운 녀석의 말에 놀라 반문하던 그때,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언젠가 느껴봤던 그 눈빛, 바로 토르디에르에서 페르티안에게서 보았던 그 눈빛이었다.

타악.

‘..!’

순간 놀란 나는 급하게 녀석을 뒤로 밀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더 이상 있었다간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나름 상처가 되는군.”

‘이 자식이..’

내밀침에 피식 웃음을 흘린 녀석은 나름 마음에 상처를 받았단 듯 가슴에 손을 대며 너스레를 떨었고, 그런 능청스런 모습에 난 왠지 모를 약 오름을 느끼며, 잠시였지만 진지하게 두근거렸던 내 심장을 되돌리고 싶었다.

“근데, 왜 출정하지 않고 여기 있는 건데?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프러겔 군에게 선봉을 빼앗길걸?”

공화국의 본 거지인 카엘체를 가기 위해선 셀롱스크를 선점해야 하건만 그는 미할리츠 부대마저 잡아 둘 정도로 군을 움직이는데 소극적이었다. 내 물음에 마벨은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내 걱정을 하는 거야? 아님, 뭔가 만나길 안달나 있는 거야?”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호오.. 이거 버벅거리니까, 더 묻고 싶은 걸?”

이 능구렁이 새끼, 정말이지 쉽게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당황하는 내 모습에 재밌단 듯 웃음을 흘린 그는 여유로운 모습과 함께 허리에 손을 짚고는 말했다.

“카트리나, 지금 셀롱스크를 가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거로 생각해?”

“뭐..?”

“길은 하나인데 그곳을 지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둘이라.. 내가 왜 녀석들의 장단에 맞춰줘야 하지?”

그렇게 말한 마벨은 특유의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게다가 난 셀롱스크보다 원하는 곳이 따로 있거든.”

“다른 곳..?”

“그래, 이번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곳을 말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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