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79. 불완전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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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 불완전한 혁명 ]
욱신 욱신.
힘을 개방해 휘둘렀건만, 순간 맞닿은 메이틀랜드의 샤벨로 빨려 들어간 기운은 일순 내 몸을 헤집으며 타격을 주었다.
“커흑.. 컥..”
붉은 피가 한움큼 입 밖으로 흘러 떨어지고, 그녀에게 당한 상처는 꽤 치명상인지 바로 일어날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위까지 다가온 그녀는 날카로운 샤벨을 내 뒷목에 겨누며 내게 일말의 여유 따윈 주지 않겠단 듯 차갑게 말했다.
“그대로 마나하트와 함께 없애드리죠. 곧 끝날겁니다.”
‘빌어먹을..’
뒷목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그래도 살아보겠다며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설원에 떨어트린 샤벨을 더듬으며 쥐려 했지만 메이틀랜드는 그 어떠한 것도 허락하지 않는단 듯 샤벨을 잡은 내 손등을 차가운 군화로 지르밟고는 기운을 담아 샤벨을 들어 올렸다.
시이이잉
‘큭..’
질끈.
끝이란 생각에 눈을 질끈 감던 그때였다. 내 곁으로 순간적으로 이동한 무언가가 강력한 기운과 함께 그녀의 검을 튕겨 내며 날 막아섰다.
카아아앙 !!
“누구냐?!!”
살았단 생각과 함께 눈을 뜬 내 시야로 익숙한 은발 머리카락이 차가운 코르치에나의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새침하고 도도한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지나가는 사람.”
“뭐..?”
황당한 대답에 메이틀랜드는 뭐 이런 것이 있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난 이제는 익숙해진 그 말투와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엘로이즈..”
“정말이지 올 라운드가 되도 손이 많이 가는 애구나.”
“미안..”
차갑고 톡쏘는 말투와 달리 그녀는 부상당한 나를 조심스레 부축하며 일으키고는 걱정가득한 눈빛으로 내 상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체를 밝히기 싫다면, 이대로 죽어라, 제국의 개!”
타앗
자신을 무시하는 엘로이즈의 행동에 화가 난 건지 메이틀랜드는 흉흉한 연보랏빛 검기와 함께 나와 엘로이즈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정말이지, 섬 촌뜨기들은 에티켓이란 것이 없군.”
피잉
가벼운 그녀의 손짓에 순간적으로 메이틀 주위로 생성된 엘로이즈의 보라색 결계는 마름모 모양의 결계장이 되어 메이틀랜드를 가두는가 싶더니, 그대로 크게 줄이며 그녀를 압사할 듯 조여 줄어들기 시작했다.
키이잉
“큭..!!”
옴짝달싹도 못하게 조여드는 엘로이즈의 결계에 저항해 보지만, 단단한 그녀의 결계를 부수기엔 메이틀랜드의 검기는 그리 날카롭지 못한 것 같았다. 엘로이즈는 새침히 자기 머리카락을 정리해 뒤로 넘기더니 모아쥔 손과 함께 결계장을 컨트롤을 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터트려 주겠어.”
‘뭐..?’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엘로이즈는 정말 그렇게 하겠단 듯 더욱 손을 조이며 자기 결계장을 줄이기 시작했다.
우득!
“끄아아악!!”
뼈가 탈골되며 몸이 압축되는 고통에 메이틀랜드가 괴로움에 몸부림 쳐보지만, 차가운 엘로이즈의 분위기만큼이나 무자비한 그녀의 자기장은 천천히 그리고 잔인하게 메이틀랜드를 부수기 시작했다.
“단장님을 구해라!”
안 되겠다 판단한 건지, 붉은 제복의 연합왕국 씰 서너 명이 날카로운 검기를 터트리며 엘로이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바밧
카아아앙 !!
메이틀랜드를 사로잡았던 결계가 풀어짐과 동시에 나와 엘로이즈 주변으로 강력한 결계가 생성되며 공격해 들어온 연합왕국 씰들의 검을 튕겨 내 보호했다.
“컥.. 컥..”
겨우 엘로이즈의 결계장에서 풀려난 메이틀랜드가 수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압박당했던 숨을 몰아 내쉬기 시작했고, 곧이어 흐트러진 연보랏빛 머리카락 사이로 경계의 눈빛과 함께 우리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올 라운드에 이어 마벨의 호위씰이라니.. 저도 참 복이 많군요.”
그렇게 말한 메이틀랜드는 팔을 들더니 ‘딱’하며 손가락을 튕겼고, 이에 우리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마나하트 기척과 함께 예사롭지 않은 붉은제복의 연합왕국 씰들이 겹겹이 포위하며 날카로운 은빛 샤벨을 번뜩였다.
“매복인가..?”
내 중얼거림에 메이틀랜드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설마 아무것도 준비 안한 채 당신들을 기다렸을까요?”
“흥.. 이래서 섬 것들은 음흉하다니까.”
“훗.. 그 말, 칭찬으로 받죠.”
비아냥에도 메이틀랜드는 우리를 잡은 것에 만족한단 듯 짙게 미소를 지었고, 나는 아무리 엘로이즈더라도 이 많은 수의 씰들을 막기엔 무리라 생각했다.
주륵.
‘아직 회복이 덜 됐어..’
아무리 경이로운 회복력을 가진 씰이라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아직도 붉은 피와 함께 욱신거리는 복부를 움켜쥔 나는 엘로이즈의 부축에 겨우 서 있는 것이 전부일 뿐,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가 못됐다.
그렇게 조여 들어오는 적들을 경계하며 주변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슈우웅
‘..!’
콰직 !!
“끄아아악!!”
거대한 검은 창이 연합왕국 씰의 가슴팍을 꿰뚫어 떨어지는가 싶더니 짙은 갈색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푸른 눈동자의 미소녀 하나가 박혀진 창 끝위로 착지하며 말했다.
“역시, 엘로이즈였군.”
“호프슈어, 잘 왔어. 어서 그동안 축냈던 밥값을 하도록 해.”
“...”
뻔뻔한 엘로이즈의 말에 호프슈어는 창 아래로 폴짝 뛰어내리더니 자기 창을 회수하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난 조금만 먹는데..”
갑작스러운 호프슈어의 등장에 당황한 메이틀랜드가 믿을 수 없단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마벨의 씰들은 이 둘이 전부일 텐데. 어떻게..”
“아 진짜? 다들 어디 갔데?”
‘..!’
메이틀랜드 옆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그레조우가 상큼한 미소와 함께 눈웃음을 짓자 놀란 그녀가 샤벨을 휘둘러 그를 공격했다.
스으응
‘!!’
잔상이었던 걸까, 아님 환상이었던 걸까. 그녀의 검격에 그레조우의 형상은 바람 속 물결처럼 일그러지며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메이틀랜드 양쪽에 있던 씰 두 명의가슴이 폭발하는 것이었다.
콰아아앙 !!
후두둑
“연합왕국 씰이라 기대했건만, 이거 실망인걸?”
생글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호프슈어의 옆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레조우는 범상치 않은 마력 탄 서너개를 생성한 모습으로 마치 산책을 나온 듯 두 손은 바지에 찔러 넣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메이틀랜드를 감상하듯 쳐다보았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군요, 인정하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다음에 또 볼 생각을 하다니, 그 말.. 굉장히 불쾌하네?”
상큼한 미소와 함께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메이틀랜드의 기사단과 다시금 일전을 벌이려던 그때, 엠블롱 언덕 쪽에서 붉은 섬광탄이 쏘아져 올랐다.
피유우우우
퍼어엉 !!
‘..!’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나와 엘로이즈, 그리고 호프슈어와 그레조우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후퇴다.”
“뭐라고?!”
그레조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엘로이즈와 호프슈어의 모습에 메이틀랜드가 소리치자, 그는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엄청난 살기와 함께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나중에 사냥해주마.”
“도망치는 거냐?!”
메이틀랜드에 외침에도 그레조우와 호프슈어, 그리고 엘로이즈는 일말의 대꾸도 없이 빠르게 전장을 이탈했고, 나는 엘로이즈와 호프슈어의 부축을 받으며 후송되었다.
“네가 단장이 말한 카트리나구나.”
세르딘 평야 전투이후 처음 만나는 그레조우는 부상당한 나를 돌아보며 말했고,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렇게 만날 줄이야..’
마벨에게 따로 임무를 받고 떠났다던 그레조우와 호프슈어가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마벨은 페르티갈 로슈비치로 갈 때부터 여기까지 염두해 뒀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밤하늘 위로 쏘아 올려진 붉은 섬광탄은 무엇보다 중요한 근원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총사령관의 부상, 아무래도 엠블롱 언덕을 공격하던 마벨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타악.
“누구냐?!”
어두운 설원 저편에서 나타나 착지한 우리의 모습에 보초병들이 플린트 락을 들며 경계하자, 그레조우는 마벨을 상징하는 반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마벨 후작 휘하 11기사단 그레조우 중위다.”
“아..”
그레조우의 문양을 확인한 보초병들은 플린트 락을 어깨에 걸며 경례를 부쳤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손짓하며 진지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레조우, 호프슈어!”
마벨의 막사 근처에서 생각이 잠긴 얼굴로 서성이던 미르파크는 그레조우와 호프슈어의 모습에 반가운 얼굴을 띠며 다가왔다.
“후작각하는?”
“안에, 지금 수술 중이셔.”
“수술?”
그녀의 말에 놀란 그레조우가 묻자 미르파크는 전투에 피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제복은 안중에도 없단 듯 샤벨을 매만지며 말했다.
“적의 총탄이 좋지 않은 곳에 박혔어. 그런데.. 카트리나, 너 몰골이 왜 그래?”
“난 괜찮아, 안에 들어가도 되지?”
“뭐? 카트리나? 카트리나!”
나는 미르파크의 대답도 듣지도 않고는 그렇게 말하곤 천막으로 무작정 들어갔고, 안에서 수술하는 마벨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부관들은 피칠갑이 된 내 모습에 놀라며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카트리나인가..?”
“마벨..”
정말 좋지 않은 곳에 맞았는지 녀석은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함께 마약성분이 든 마취약에 취한 몽롱한 표정으로 힘겹게 고개를 들더니 내게 손짓했다.
“괜찮은 거야?”
“괜찮아.. 별거 아닌 거야..”
그렇게 그는 눈동자를 크게 돌려 잠시 침을 삼키는가 싶더니 내 손을 잡고는 말했다.
“카트리나.. 내 부탁 좀 들어 줘..”
“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들어 줄게.”
“연대기.. 연대기를 되찾아와줘.”
“연대기?”
“그래.. 내일 아침 녀석들이 그것을 병사들에게 보이기전에 찾아.. 와야 해.”
마벨은 자기 상처보다 그것이 마음에 걸린단 듯 내 손을 꽈악 잡으며 신신당부를 했고,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과 함께 알겠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올게.”
“그래.. 그래..”
그제야 안심이 된단 듯 몸을 누은 그는 멈췄던 수술을 다시 받기 시작했고, 나는 다친 부상을 외투로 가리며 그와 함께 싸웠던 카트브라 남작에게 물었다.
“연대기는 지금 어디에 있죠?”
“엠블롱 언덕 책임자인 헌팅턴 백작이 가지고 있습니다.”
연대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었다. 황제가 사사한 군대를 상징하는 군기이자 상징이었다. 그런 깃발이 내일 아침 적의 진지에 있다면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마벨은 아마도 그것이 걱정되어 내게 부탁한 것일 터.
조금씩 잦아드는 고통과 함께 샤벨을 움켜쥔 나는 천막을 나섰다. 비록 첫 전투에선 졌지만 아직 전쟁에선 진 것은 아니었다.
“연합왕국 놈들.. 두 배로 되돌려주마, 꼭 두 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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