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섬광의 주인 _ 뇌전(雷電)의 샤벨리아-80화 (80/135)

〈 80화 〉 80. 불완전한 혁명

* * *

[ 80. 불완전한 혁명 ]

콰아아앙 ­

“으아아아악!!”

셰이엔 공작이 이끄는 프러겔 북부원정군은 셀롱스크 외곽에 주둔한 채 페르티안 남작이 이끄는 제1공세군의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척.

“각하, 남작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흠..”

윤기 있는 은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미남자가 검은 안대를 한 모습으로 와인잔을 들고는 폭발과 총성으로 난리가 난 셀롱스크를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리 남작이라도 이건..”

베르텡 후작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와인잔만 돌리는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고, 셰이엔은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능력을 보고 싶군.”

*

*

*

개전 1시간 전 ­

“당장 진격해야 합니다!”

셀롱스크 앞까지 밀고 올라온 프러겔 수뇌부는 연전연승으로 인해 한층 고양되어 있었다. 공화국 남동부 방면 수비군을 연이어 격파한데다 하켄제국마저 자신들의 눈치를 보며 거리를 둔 채 견제만 할 뿐 별다른 공격하지 못하자 페르티갈 로슈비치 이권에 개입한 삼국 중 가장 선두적인 위치에 있는 그들은 요충지인 셀롱스크에 대한 빠른 제압을 원했다.

고위장교들의 호전적인 진언에도 셰이엔은 말없이 눈을 감고 있을 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부사령관의 의견은?”

나지막한 그의 말소리에 웅성이던 막사는 조용해지고 모두 옆에 있던 베르텡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럼, 우리 군에 부사령관이 따로 있나?”

미소와 함께 살며시 눈을 뜬 셰이엔이 그를 힐끔 바라보자 움찔한 베르텡이 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눈을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음..”

그렇게 도움의 손길을 원하듯 주변을 바라보던 그때, 앙센이 자기 옆에 있던 페르티안을 눈짓하며 신호를 주었고, 베르텡은 ‘살았다’란 표정과 함께 울것 같은 미소와 함께 허리를 굽실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페.. 페르티안 남작이 조.. 좋은 생각이 있다 했습니다.”

“남작이?”

갑작스러운 자기 호칭에 페르티안이 놀라 눈을 깜박이자 베르텡이 셰이엔의 뒤에서 손으로 모으며 제발 한 번만 살려달란 듯 애원했다.

“호오.. 세타 강의 기적이자, 토르디에르의 영웅인 남작이 좋은 생각이 있단 말이지?”

나긋하면서도 침착한 셰이엔의 목소리였지만, 막사 안의 고위귀족들은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됨을 느끼며 마른침과 함께 페르티안을 힐끔 쳐다보았다.

“말해 보게 남작, 그 좋은 생각이 뭔지?”

그러자 다시금 모두의 눈이 빠르게 페르티안에게 쏠렸고, 애원하는 베르텡의 눈빛과 미안하게 됐단 듯 쳐다보는 앙센의 신호에 페르티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 걸음 나와 그에게 말했다.

“후퇴해야 합니다.”

“뭐?! 뭐라?!!”

“후퇴라니?!!”

공격이 아니라 후퇴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프러겔 고위장교들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고, 셰이엔은 흥미롭단 듯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턱을 괴며 그에게 물었다.

“이유는?”

“이 전쟁에 명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엄한!!”

“그 말은 여왕 폐하의 선전포고가 잘못되었단 것인가?!”

그의 말에 격분한 프러겔 귀족들이 그에게 소리치기 시작했고, 조용히 그를 응시하던 셰이엔이 페르티안에게 물었다.

“폐하의 명이 떨어진 이상 군을 돌린다는 것은 항명이다. 남작, 좀 더 현실적인 의견을 줬으면 좋겠군. 그런 이상적인 자네 의견 말고 말이지.”

셰이엔의 말에 살며시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던 페르티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직이 이렇게 말했다.

“후퇴할 수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셀롱스크를 하루빨리 함락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말이죠.”

“의외군, 아까는 후퇴하자더니 이제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도시를 함락시키자고 하는군.”

그러자 페르티안은 막사 가운데에 걸린 페르티갈 로슈비치 지도로 다가가며 말했다.

“제국은 지금 셀롱스크에 관심이 없습니다.”

“흐음..”

“마벨의 목적은 아마 셀롱스크가 아닌 코르치에나 항일겁니다.”

“왜지?”

미소를 머금으며 셰이엔이 묻자 페르티안은 해안선 무역로를 가리키며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첩보에 따르면 일주일 전 연합왕국 웨스트모어 항에서 대규모의 육군과 함께 그들의 무적함대인 7함대가 출향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항로를 속이고 싶어도 그 정도의 대규모 원정군을 숨길 순 없습니다. 더구나 삼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페르티갈 로슈비치에게 있어 제대로 운용이 가능한 항구가 있다면 이곳 밖에 없죠.”

잔존하는 여러 항구들은 정변으로 후퇴하던 왕정파의 파괴공작으로 부숴진지 오래였다. 페르티안도 그것을 착안 하고 있었는지 그는 항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셀롱스크가 적의 심장으로 가는 길목이라면, 코르치에나 항은 적의 목숨줄입니다. 그렇기에 제국은 우리를 견제만 할 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겠죠.”

“그럼 우리도 코르치에나로 가야 하지 않나?”

셰이엔의 물음에 페르티안은 그 말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남서부일대와 바다와 이어진 해안선 주변이 구 페르티갈 로슈비치 왕정파들의 세력권입니다. 제국과 왕정파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보급로만 위험하게 만들 뿐 얻는 것은 없습니다.”

“내 생각도 동감이다.”

페르티안의 말에 셰이엔은 턱을 괴던 팔을 풀고는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후퇴할 수도, 적의 허점을 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없다. 오직 남은 건 저기 셀롱스크 뿐.”

“...”

“페르티안 남작.”

스윽.

“하명하십시오.”

그의 부름에 페르티안은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고, 셰이엔은 자기 샤벨을 그에게 건네며 명령을 내렸다.

“프러겔 정예군 3만을 주겠다. 세타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자네라면 셀롱스크의 문도 열 수 있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훗.. 확답은 못 하겠다 이 말인가?”

“...”

말을 아끼는 페르티안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셰이엔은 상관없단 듯 샤벨을 하사하며 말했다.

“칼을 쥘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빨리 목숨을 끊어 주는 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다. 작은 희망도 여지도 주지말고 길을 열어라. 그것이 자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명이다.”

“명령.. 받았습니다.”

셰이엔의 샤벨을 하사받은 페르티안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고, 가슴을 쓸며 안도하는 베르텡과 달리 앙센은 착잡한 얼굴로 그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가혹하군..”

***

사사사삭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한 진창의 언덕을 작은 인영하나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제복은 붉은 피가 굳어 멀쩡한 곳이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고급 흰색 외투가 그녀가 범상치 않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누구냐?!”

슈우우웅 ­

서걱 ­

“커억..!”

보초병의 외침에 순각적으로 도약한 카트리나는 단숨에 병사들의 목을 샤벨로 꿰뚫으며 주저없이 다음 참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빨리.. 더 빨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녀를 막는 병사들의 수는 많아지고, 더욱 촘촘하고 견고한 방어라인이 그녀의 행로를 방해했다.

댕댕 – 댕댕 ­

“적이다! 적의 씰이다!!”

“칫..”

꽤 훈련이 잘된 병사들인지 정찰 참호 몇곳을 지났을 뿐이건만 언덕 전체가 불빛이 오르며 병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발사!!”

파바바바방 ­

전열보병들의 일제사격을 피하며 나는 몸을 돌려 참호 속으로 뛰어내려 착지했다.

“으아아악!! 마.. 막아라!!”

좁은 참호길에 내가 나타나자 연합왕국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다시금 사격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나는 땅을 박차며 그들에게 돌진해 샤벨을 휘두르며 그들의 목과 심장을 찔러 쓰러트리며 진형을 무너트렸다.

“멈춰라! 제국의 씰!!”

채재쟁 – 카앙 ­!!

‘..!’

순간적으로 내게 쇄도해온 두 개의 인영은 샤벨을 교차해 날리며 내 전진을 막아섰고, 범상치 않은 그들의 공격에 뒤로 물러선 내가 쳐다보자, 검푸른 머리카락의 미소년 씰 둘이 나를 경계하며 샤벨을 들고 있었다.

“위대한 연합왕국, 발커레스 기사단 소속 피터.”

“윌리엄 소위다. 정체를 밝혀라!!”

‘쌍둥이인가..?’

나는 피가 묻은 샤벨을 털고는 그들을 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켄제국, 마벨후작 휘하 올 라운드 포틴. 카트리나다.”

“올 라운드..?!”

내 정체에 놀라는 그들의 뒤 멀지 않은 곳에 마벨이 말한 제국의 연대기가 진창 바닥에 짓이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비켜.”

스윽 ­

“멈춰라!!”

내 발걸음에 쌍둥이는 샤벨을 들어 경계를 했고, 나는 붉게 타오르는 마나하트와 함께 무시무시한 붉은 기운을 터트리며 다시금 죽음의 경고를 했다.

“내 시간을 뺏은 만큼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내가 왜 카르리나인지.. 그리고 왜 섬광이라 불렸던 자인지를 똑똑히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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