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82. 불완전한 혁명
* * *
[ 82. 불완전한 혁명 ]
“백작님을 보호해라!”
파밧
놀라는 그의 뒤로 붉은 제복의 연합왕국 씰들이 튀어나오며 나를 막기 위해 샤벨을 날렸다.
카앙 – 캉 !!
“몇이 오든 결과는 똑같다.”
녀석들의 샤벨을 튕기며 막은 내 육체는 진한 미소와 함께 마치 나보고 들으란 듯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샤벨리아, 이게 내가.. 그리고 우리가 네게 준 권능이다.”
‘..!’
순간적으로 내 손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그들의 마력줄기들이 붉게 빛나 모이는가 싶더니, 그것을 강하게 움켜쥐며 비틀어 당긴 그가 작게 속삭였다.
“씰로스.”
피잉
‘..!’
거짓말 같은 광경, 내게 달려들던 수많은 씰들의 움직임이 일순 멈춰지는가 싶더니 빛을 잃은 마나하트와 함께 기능을 잃은 씰들이 무릎이 꺾이며 진창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박히기 시작했다.
챙 – 챙그랑 – 쿵!
‘이건..’
“그래, 이전 내가 보여줬던 기술이지.”
하지만 무적은 아닌지 가슴팍에 박힌 내 마나하트에 실금 하나가 가며 순간적으로 모은 마력을 견디질 못하며 고통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큭.. 여기까지인가..”
아쉽다는 녀석의 말과 함께 엄청난 피드백과 강렬한 고통이 내 가슴을 후비벼 전신으로 퍼졌고 힘이 풀린 손에서 해방된 마력들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선 다시금 씰들의 마나하트를 빛내기 시작했다.
‘손이..’
순간적으로 엄습한 고통덕분일까, 빼앗겼던 몸에 대한 제어권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지켜야 돼, 샤벨리아. 나의 바람이.. 그리고 우리의 바람이..”
그 말과 함께 고개가 꺾인 녀석은 다시 침묵을 했고, 기우뚱 거리는 몸에 다리를 앞으로 내디뎌 박은 나는 이를 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개.. 새끼가.. 사고는 지가 치고선.. 뒤치다꺼리는 나한테 줘?!!”
분노에 찬 일갈과 함께 몸을 일으킨 나는 진홍빛으로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돌려주변을 훑으며 경계했다.
‘..!’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찬 눈동자들. 헌팅턴을 비롯한 연합왕국 병사들은 마치 괴물을 보듯 나를 경악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건.. 괴물이야.”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수많은 씰들 가운데서 피칠갑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괴물이었다.
투둑.
‘연대기..’
벌려진 상처 아래로 흘러 떨어지는 피도 잠시 붉은 눈동자를 굴려 연대기를 찾던 나는 굳은 얼굴로 바위에 앉아 쳐다보는 헌팅턴 옆에 처박힌 연대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윽.
“히익..!”
저벅.
“으아악!!
몸을 돌린 것만으로도 흠칫 놀란 연합왕국 병사들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물러섰고, 나는 둘러싼 적들이 파도처럼 갈라지는 기적 속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그렇게 연대기 근처에 도착하자 굳은 얼굴의 헌팅턴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꽈악.
미세하게 떨리는 자기 팔을 손으로 잡아 누르는 그였지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나는 그를 응시하며 천천히 허리를 숙여선 진창으로 엉망이 된 마벨의 연대기를 줍고는 몸을 돌렸다.
“하아..”
긴장이 풀려 내쉬는 녀석의 작은 숨소리를 뒤로한 채 연대기를 어깨에 걸친 나는 올라왔던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렬한 피드백으로 마구잡이로 헤집어지는 안은 피칠갑이 된 외상보다 심각했건만 무슨 일인지 연합왕국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내게 길을 터주었고, 나는 그렇게 감겨지는 눈동자를 겨우 치켜뜨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어..’
천근만근과도 같이 무거워진 다리는 내가 지금 걷는 건지 아님 서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몽롱해졌고,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그 걸음도 잠시 뒤에서 터오는 동과 함께 강렬한 햇볕이 아군의 진지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저.. 저기 봐.”
“뭔데..? 응..?!!”
아군 보초병이 나를 발견했는지, 어수선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다 귀찮다. 어서 이 무거운 것을 건네고 빨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 맙소사..”
진지를 가로지르는 내 모습에 놀란 병사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나를 둘러싸고는 웅성이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휘청.
“워어어.”
비틀거리는 내 작은 몸동작에도 병사들은 크게 놀라며 술렁였고, 그 소리는 진지를 헤집을 만큼 거대했다.
“무슨 일이냐?! 무엇 때문에 이리..”
‘..!’
술렁이는 바깥분위기에 노르공을 비롯한 고위 참모진들이 마벨의 막사 밖으로 나왔고, 이윽고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 어떻게..”
특히나 카트브라 남작은 잃어 버린 연대기를 짊어지고 걸어오는 나를 믿을 수 없단 듯 쳐다보았다.
탁.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노르공 백작 앞에 멈춰 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연대기를 그에게 넘기며 말했다.
“녀.. 녀석에게 말해 줘, 약속은.. 지켰다고.”
스륵.
‘!!’
긴장이 풀린 걸까, 연대기가 노르공 백작의 손에 건네진 것을 확인한순간 다리힘이 풀리며 세상이 기우는 것인지 내 중심이 잘못된 것인지 비틀어져 꺾이는 시야와 함께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쿵 !
“카.. 카트리나 경!!!”
“마도사! 마도사를 불러라!!”
놀라 소리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멀어져가고, 난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미소를 그리며 정신을 잃었다.
스릉
“이 개 같은 연합왕국 놈들!!”
카트리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까, 초급장교 하나가 욕을 내뱉으며 샤벨을 빼 들고는 몸을 돌려 언덕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병사들은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니것만 하나둘 몸을 돌려 자기 무기를 들어 쥐고는 그를 따라 언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 비열한 것들을 쳐 죽이자!!”
“이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
카트리나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은 이내 연합왕국에 대한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바뀌고, 자신들의 상징이 짓밟혀졌단 모욕감에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겠단 듯 거대한 살기를 불태우며 언덕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멈춰라! 멋대로 움직이지 마라!!”
“군령을 지켜라!!”
프레드릭과 예하 부관들이 병사들을 제지해 보지만, 천천히 걸어가던 병사들의 발걸음 점점 빨라지는가 싶더니, 화가 난 표정과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언덕 위를 쇄도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죽여라!! 우리의 여신을 욕보인 저것들을 찢어 죽이자!!”
“와아아아!!!”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연합왕국 쪽이었다. 카트리나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언덕 아래에서 성이 난 제국의 병사들이 몸이 찌릿 거릴 정도의 거대한 함성과 함께 공세를 펼친 것이었다.
“마.. 막아라!!”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 올라오는 검은 물결에 연합왕국의 병사들은 플린트 락을 발사하며 응전해 보지만, 어제와 달리 총탄을 맞고도 쓰러지거나 겁을 먹기는커녕 이를 물고 언덕으로 올라와선 동귀어진하듯 달려들어 공격하는 것이었다.
“죽어!!!
“이 개새끼들!!!”
전술도 전략도 없는 성난 폭도와 같은 난폭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기세에 눌린 연합왕국 병사들은 제국군에 밀려 차례로 참호를 뺏기기 시작했고, 뛰어난 지휘관인 헌팅턴조차 맹렬한 제국군의 공격에 당황할 정도였다.
“배.. 백작님, 어서 후퇴를.”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는지 그의 근위대들은 놀라 눈을 껌벅이는 그를 잡아 언덕 뒤 절벽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저놈이 카트리나 님을 욕보였다!!”
막아선 연합왕국 병사의 배에 여러 개의 총검을 찔러 박은 제국군 병사들은 분이 풀리지 않은 성난 모습과 함께 근위대와 함께 도망치는 헌팅턴을 쫓아 추격하기 시작했다.
“백작님을 보호해라!”
파앙
규율이 잡힌 그의 근위대가 달려드는 제국군 병사들을 막아보지만, 그것도 잠시 밀려든 제국군 병사들에게 잡혀 찔려 죽거나 개머리판으로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 밟혀 죽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후퇴로가 없는 엠블롱이었다. 뒤는 높은 절벽과 가시처럼 솟은 암초가 있는 파도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잠시 절벽 아래 거친 파도를 내려보던 헌팅턴은 이내 마음을 굳혔는지 가슴품에서 보석으로 세공된 작은 십자가를 꺼내 입맞춤을 하더니 허리춤에서 샤벨을 빼 들고는 자신을 포위한 제국군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위대한 연합왕국 만세!!”
***
다그닥 히이이잉 !!
콰앙
“후작각하!!”
시종들의 도움을 받으며 면도를 마친 나이젤이 따뜻한 김과 함께 준비된 모닝티를 들던 그때였다. 사색이 된 전령하나가 그가 있는 저택으로 헐레벌떡 뛰어와선 거칠게 문을 열며 소리쳤다.
“뭐냐?!”
티타임을 방해한 전령의 모습에 화가 난 나이젤이 소리치자 전령은 엠블롱 방향을 가리키며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에.. 엠블롱이 제국군에게 하.. 함락 됐습니다.”
“뭐?!!”
전령의 말에 놀란 나이젤이 입에 대려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고는 옷도 챙겨 입지 않은 모습으로 저택 밖으로 뛰어 나갔다.
“망원경!!”
“여기 있습니다.”
‘..!’
언덕 위로 보이는 검은 제복들과 함께 목이 잘린 헌팅턴과 자기 부관들의 머리가 긴 창에 꽂혀 걸려 있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죽은 자기 병사들이 적의 발에 밀려 절벽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전사한 적의 장교와 병사에 대한 예우는 암묵적인 불문율이거늘, 제국은 그런 불문율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이놈!!!”
이렇게 모욕을 당한 이상 남은 것은 전면전이었다. 피에는 피로 갚아줄 뿐, 그렇게 분개한 나이젤은 거칠게 망원경을 접고는 부관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병사들을 집합시켜라!! 내 친히 제국과 결판을 내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