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84. 시계(??)제로(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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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시계(??)제로(ZERO) ]
삐비빅 – 삐비빅
“으음..”
오랜만에 느끼는 푹신한 침대와 익숙한 베개의 느낌은 기분이 좋았다. 날카롭게 들려오는 알람 소리에 눈을 찌푸리던 난 떨어지지 않는 눈을 살며시 떠서는 힘겹게 핸드폰을 찾아 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아씨..”
딱 기분 좋게 자고 있었는데 이놈의 알람이 이 좋은 기분을 다 망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핸드폰을 잡아 알람을 끈 내가 다시 베개에 코를 박으며 미소와 함께 눈을 감던 그때,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통과했다.
‘알람..?’
번쩍
알람이라니? 대체 왠 알람이란 말인가? 순간 눈이 떠진 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자 놀랍고도 익숙한 풍경이 내 시야로 박혔다.
“집..?”
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단칸방 고시방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이후 처음으로 본 내 방이었다.
“자.. 잠깐, 내가 집에 왔다면..”
‘..!’
황급히 손을 내려 몸을 더듬자 묵직하면서 소중한 그것이 만져졌다. 이전 황망히 잃어 버렸던 그것이 내게 돌아온 것이었다.
“있어.. 있다고! 씨발!!”
이리 기쁜 적도 또 있었을까? 나는 순간 침대를 폴짝 뛰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고, 더 이상 여자아이의 몸이 아니란 것에 ‘예스’를 연발하며 나만의 세레모니를 이어갔다.
쾅! 쾅!
“거 조용히 좀 합시다! 여기 혼자삽니까?!!”
너무 기뻐 소리를 질렀던 것일까, 옆방에서 짜증이 가득 섞인 이웃의 핀잔이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남자인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크흐..’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나도 모르게 스텝이 밟힌다. 그렇게 혼자 생쇼를 하며 춤을 추던 그때, 난 내가 왜 다시 돌아왔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다쳐서 기절한 것까진 기억나는데..”
마벨의 연대기를 가지고와 건넨 것까진 기억하는데 그 이후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다른 곳도 다른 몸도 아닌 원래의 몸과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온 것이었다.
“에이 씨 몰라.. 내가 거기까지 생각해야 해?”
그렇게 개고생을 했으면 됐지, 내가 뭘 더 해준단 말인가? 큰 흐름에 문제가 없다면 만사 오케이, 올 라윗 올 고 인 거다.
“이 해방감.. 이 자유로움.. 돌아왔어! 내가 돌아왔다고!!! 하하하하!!!!”
칼부림보다 괴로웠던 브래지어도 편히 다리를 벌리며 쉬는 것조차 어려웠던 지난 오욕의 세월들, 하지만 이젠 그런 것을 신경 쓰지도 않아도 됐다.
쾅쾅쾅!!
“저기요!!!”
“아, 죄송합니다~!!”
신경질적인 이웃의 경고에도 나는 바보같이 실실 웃으며 오둥방정 댄스와 함께 작고 좁은 이 단칸방의 공기를 음미했다.
“음~ 그래, 이 냄새야. 이 냄새라고..”
자유의 냄새,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홀가분한 감정과 함께 내가 돌아왔음을 확신했다.
***
셀롱스크가 보이는 설원 위, 말을 탄 페르티안이 시가전을 펼치는 공화국군을 살피던 그때 전령하나가 급하게 말을 몰아 다가오더니 그에게 보고했다.
“급보입니다! 동쪽을 공격했던 샤벨리아경이 적의 공격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상대는 누구죠?”
“공화국의 오리지널이라 합니다.”
“알겠습니다, 군은 계획대로 공격합니다.”
샤벨리아가 중상을 입었단 말에도 아무 일 없단 듯 차분히 명령을 내리는 페르티안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건 그의 부관들이었다.
“페르티안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샤벨리아님이 후송된 곳이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괜찮아요, 발슈테인. 지금은 샤벨리아보다 이 전투가 먼저입니다.”
단호한 페르티안의 모습에 발슈테인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곁에 있던 폰 또한 그의 눈치를 볼 뿐 별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샤벨리아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리니조차 평소와 달리 굳게 입을 다문 채 자기 중대원들과 페르티안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흐음..”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말대로 전투에 집중할 때였다. 발슈테인은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단 듯 안경을 치켜올리고는 작전대로 부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슈트렐리츠에게 부상을 입은 샤벨리아는 페트시아와 아티뤼크의 부축을 받아 막사로 이동하고 있었다. 피가 흘러 떨어지던 상처는 씰답게 어느새 치유되어 멎어 있었고 처음 보다 호전된 그녀의 상태는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다 왔습니다, 조금만 버티세요.”
치유력이 좋은 씰이라 하지만 마력이 깃든 적의 공격은 그녀의 회복을 더디게 했고 특히나 오리지널의 매서운 공격은 어떤 씰보다 지독하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으윽..”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는 샤벨리아를 옆에서 안아 부축한 페트시아는 아티뤼크를 돌아보며 말했다.
“샤벨리아님은 회복이 필요하다, 너는 회복이 될 때까지 막사 앞을 지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페트시아는 샤벨리아가 흘리는 피에 제복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상관이 없단 듯 그녀를 끌어안고는 조심히 안으로 들어갔고, 페트시아의 명령을 받은 아티뤼크는 자기 삼박을 빼 들고는 막사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윽..”
투득..
슈트렐리츠의 신기는 확실히 지독한지 회복되어 아문 듯 보였던 그녀의 상처를 다시 벌리며 피를 흘리게 했고, 샤벨리아는 좀처럼 낫지 않는 상처에 휘청이며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뜨거운 물을 대야에 들고 나오던 밀로가 상처 입은 샤벨리아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더니 한걸음에 다가와 소리쳤다.
“프.. 플로헤타님?!”
목소리 높은 그의 목소리에 샤벨리아는 곤란하단 미소와 함께 검지를 들고는 말했다.
“누가.. 듣겠어, 미.. 밀로..”
“아니, 웬 상처가.. 어서 여기로.”
밀로는 화려한 침구가 놓여 간이침대로 그녀를 안내했고, 샤벨리아는 신음과 함께 몸을 뉘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스스스
마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방금 전까지 황금빛으로 빛나던 그녀의 금발은 마치 밤하늘에 물들 듯 아름다운 검청색 머리카락으로 물들어갔고, 고개를 든 그곳엔 플로헤타가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슈렐이 있을 줄은.. 몰랐어..”
플로헤타의 말에 밀로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강력한 회복마법을 펼치며 그녀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 분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이지 가차 없으시네요!”
“헤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윽..”
밀로의 꾸중에 플로헤타는 ‘히끅’하며 목을 움츠렸고, 더 잔소리를 하려던 밀로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내 입만 아프지’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치료에 집중했다.
“플로헤타님, 그럼 전 마스터에게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고생만했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나 마스터 모두 플로헤타님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페트시아의 말에 플로헤타는 아니란 듯 고개를 젓더니 해맑은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신세는 뭘요, 샤링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요."
***
“...”
돌아온 것을 기뻐야해할지, 아님 슬퍼해야 할지, 난 이 미묘한 감정과 함께 버스정류장에 앉아 도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으.. 일하러 가기 싫어..”
원래 세계로 왔다는 건 다시 내 스케줄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로 꽉차 있던 그 헬 사이클을 다시 소화해야만 했다.
“1시까지 창고알바 끝내고.. 3시부터 카페알바.. 잠깐 쉬고 10시부터 PC방 알바를 가야 되니까.. 음..”
워커홀릭? 아니, 그냥 일에 치여 사는 거다. 이렇게 미친 듯이 알바를 해도 그리 많이 버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모을 수 있는 돈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학력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출 나게 뛰어난 능력도 없었기에 남들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전엔 빈둥거려도 돈은 꼬박꼬박 나왔는데..”
내 것보다 훨씬 큰 페르티안의 금고 한 켠을 빼앗아 왕국에서 준 금화를 한 탑 두 탑 쌓으며 기뻐했던 그때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때가 좋았지..”
금화 하나라도 들고 왔더라면 억울하지나 않지, 어떻게 거기나 여기나 뼈 빠지게 일만 하고 내실은 없는지 나도 참 허당이지 않을 수 없었다.
끼이익
치이
어느새 내가 타고갈 버스가 오고, 사람들을 따라 늘어선 줄을 걷던 중 난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응..?’
건너편 정류장에 앉아 조용히 나를 응시하며 있는 단발의 여자. 처음엔 잘못 본 건가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확실하게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뭐지..?’
의아한 기분과 함께 항상 앉던 맨 뒷자리로 갈 때까지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보일 듯 말 듯 살며시 올라가는 입가의 미소. 악의도 선의도 없는 평범하고 작은 미소지만 난 그 미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잠시 시선을 떼던 내가 다시금 그곳을 돌아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신기루 마냥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고 어느 곳에도 없는 그러한 존재처럼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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