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86. 시계(??)제로(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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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시계(??)제로(ZERO) ]
히이잉
다그닥 다그닥.
코르치에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이젤이 이끄는 연합왕국 7만의 군대가 거대한 붉은 물결을 일으키며 진군하고 있었다.
“각하, 적의 좌익이 근처 ‘자스모치’ 마을에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마벨은 어디있지?”
나이젤의 물음에 전령은 저멀리 구릉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침 안개로 시야가 제한적이지만,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저쪽 언덕에 진을 펼쳤다고 합니다.”
“흐음..”
“각하, 본국에서 도착한 지원병까지 모두 출전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2만명은 항구수비로 돌리시는게 어떻습니까?”
갈색 수염이 인상적인 귀족장교 하나가 전장을 바라보던 나이젤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마벨이 우리에게 피해를 봤다지만 아직 8만이란 병력이 건재하네. 게다가 엠블롱 언덕을 잃은 이상 시간을 끌다간 포위되어 섬멸되는 것은 우리 쪽이 될 걸세, 필립 경.”
“허나 안개가 너무 심합니다. 이 상태론 군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자 나이젤은 오히려 잘됐단 듯 미소와 함께 안개 낀 전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시계가 없다는 건 오히려 우리에게 호재일세. 버크셔 자작으로 하여금 자스모치에 있는 적의 좌익을 공격하라 했네.”
“좌익을 말입니까?”
“안개로 적의 연결이 느슨해진 지금, 좌익을 무너트린다면 마벨은 꼼짝없이 우리에게 포위될 걸세.”
“하지만 버크셔 자작의 연대만으론 힘들 수 있습니다.”
나이젤의 전략에 의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무력화시켜야 생각하는 필립이었다.
“맞는 말일세, 그렇기에 자네가 필요한거네.”
그렇게 말한 나이젤은 간이지도를 펼쳐 그에게 보여주며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버크셔 경이 자그모치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동안 자네의 연대가 제국의 좌익과 중앙을 파고들게.”
“자그모치가 아니고 말입니까?”
“이 작전의 핵심은 버크셔 경의 군대가 좌익을 부수고 돌아 때리는 거네. 게다가 이 곳을 공격당한다면 아무리 마벨이라 해도 손쓸 도리가 없겠지.”
“알겠습니다, 바로 군대를 준비하죠.”
“믿겠네.”
나이젤의 말에 필립은 미소와 함께 장교모를 잡아 경례를 하고는 자신의 부관들과 함께 말을 몰아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스윽.
“말씀하십시오.”
필립이 자신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잠시 말안장에 앉아 생각에 잠기던 나이젤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전령하나를 불러선 명령을 내렸다.
“지금 피셔 백작은 어디있지?”
“우익에서 기병대들을 데리고 대기하고 계십니다.”
“피셔에게 전하게, 적의 대규모 기병 공격이 예상된다고 말이야. 적의 좌익과 중앙에서 기병대가 보이지 않는 것이 마벨도 우리와 같은 생각인거 같다.”
“알겠습니다, 이랴!!”
안개가 풀리기 전이 승리의 중요한 승부처였다. 모든 준비를 끝낸 나이젤은 망원경을 펼쳐 마벨이 있는 구릉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릿하지만, 많은 수의 병사들이 보이는 것이 그도 자신처럼 이번 싸움을 물러서지 않으려는 것이 확실했다.
씨익.
얼마만에 느껴보는 전투의 긴장감인가, 나이젤은 미소와 함께 망원경을 내려 접으며 중얼거렸다.
“마벨.. 우리가 육군이 약할거라 생각해 나온거라면 크게 후회하게 될 거다. 이번 전투로 대륙최고의 군대가 누구인지 보여주마.”
***
히이잉
“보고입니다! 적의 좌익이 빠르게 자그모치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각하, 아무래도 우리의 우익이 약하다는 걸 눈치 챈 모양입니다.”
차분한 인상의 슈트라우스 남작이 총탄부상으로 오른쪽 팔을 부목해 있는 마벨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그모치라..”
전령의 말에 마벨의 입가위로 진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대로 가단 카트브라 남작의 군대가 궤멸될 수 있습니다. 어서 지원군을..”
“노르공 백작의 연대가 자그모치를 돌아가는 중일세. 카트브라도 자신이 자그모치에서 적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걸세.”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 다시금 전령하나가 급하게 말을 몰아서 오더니 마벨에게 보고했다.
“큰일났습니다! 연합왕국의 또 다른 연대가 자그모치와 이곳의 연결을 끊으려 하는지 빠르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각하.”
이대로 놔두다간 자그모치도 이곳도 위험할 수 있었다. 더는 관망할 수 없단 듯 슈트라우스가 그를 바라보자, 마벨은 작게 웃음을 흘리는가 싶더니 그를 돌아보며 명령했다.
“멍청한 것들.. 슈트라우스!”
“예, 말씀하십시오.”
“너무 밀어서도 너무 깊게 끌어들여서도 안된다. 지금 올라오는 적의 연대를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붙잡아라.”
“예?”
확실함이 서린 그의 자신있는 표정. 마벨은 차갑게 타오르는 수정처럼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적의 좌익과 중앙이 나를 포위하려다 길게 늘어졌다. 나는 이대로 중앙을 파고들어 나이젤의 군대를 반으로 쪼갤 것이다.”
‘..!’
놀라는 슈트라우스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마벨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여기서 적의 절반을 꺾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명령을 관철해라.”
척.
“과연.. 알겠습니다!”
그의 의도를 깨달은 슈트라우스 남작은 미소와 함께 그에게 절도있게 경례를 붙이더니 대기하고 있던 부관들을 불러 자신의 군대가 있는 곳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스윽.
“예!”
“프레드릭 백작에게 전해라. 첫 교전이 시작되면 지체없이 적의 좌익을 돌격해 헤집으라고.”
“알겠습니다!”
나이젤의 예상대로 그의 기병대는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 따윈 상관없는지 마벨은 안개 낀 전장을 내려다보며 나직히 명령을 내렸다.
“모두 착검.”
두두두두두
“착검!!!”
그의 명령에 중앙에 있던 제국의 엘리트 보병들이 플린트 락에 총검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의 군세, 그런 그들 앞으로 자신의 백마를 몰며 마벨이 외쳤다. 전장의 모두가 똑똑히 들리도록 마력을 증폭시켜서 말이었다.
[ 모든 것은 훈련대로 하면 된다! 옆의 전우를 믿고 선임병들은 뒤의 후배들을 견인해 모범을 보여라!! 두려워마라!! 우리는 패배를 모르는 제국의 군대다!! ]
“와아아아아!!!”
스릉
불편한 왼팔로 샤벨을 빼든 마벨은 적이 있을 안개너머로 칼을 내지르며 외쳤다.
[ 올 하일 하켄!! 올 하일 클로비스4세 만세!!! ]
“올 하일 하켄!! 올 하일 클로비스 4세!!!”
[ 진격! ]
그의 명령과 함께 반듯하게 정렬한 제국의 군대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패배를 모르는 제국의 일원으로써 말이었다.
***
“허억.. 허억..”
얼마나 달렸을까, 땀이 비오듯 쏟아지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거짓인 세계. 나는 지금 마시고 내쉬는 공기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이 세계를 불신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어.. 그렇지 않고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흐릿한 기억들. 마치 거대한 꿈에서 깨어나 좀처럼 기억해낼 수 없는 답답함이 나를 좀먹고 있었다.
‘그 여자라면.. 뭔가 알고 있을거야.’
내 주위를 멤돌던 그녀. 나는 터져오르는 숨과 격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를 처음보았던 그 맞은편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과 아무도 없는 인도를 지나 도착한 정류장은 마치 세상에 혼자 뚝 떨어져 나온 듯 고요하고 아늑했다.
“허억.. 허어억..”
흘러 떨어지는 땀과 함께 허리를 숙여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쉬던 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디야..”
작은 풀벌레 소리만이 전부인 곳에 목이 메어 갈라진 내 목소리만이 처량하게 울렸다.
“어디있어.. 어디있냐고?!!!”
치밀어 오르는 화에 결국 참지 못한 내가 소리를 내질러 보지만, 그 어떠한 것도 내 외침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씨발..”
털썩.
대체 어디서 잘못된걸까, 이 혼란스럽고 또렷한 정신에도 난 나에 관한 어떠한 것도 확실하게 떠올리지 못했다. 세상과 연결됐지만, 단절된 듯한 고독감. 나는 스르륵 무너지며 무릎을 꿇고는 아름답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제발 도와달란 듯 힙없이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이젠 내가 서지웅이었단 것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야.”
나에 대한 확신이 이렇게 없었던 적도 또 있을까. 분노에 강하게 쥐어지는 주먹만큼이나 나에 대한 믿음은 빠르게 그 주먹 틈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조용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알고싶어?”
‘..!’
순간 놀란 내가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자 아침에 봤던, 그리고 길거리에 봤던 그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알고 싶은거야?”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발걸음. 난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이대로 발걸음을 돌려 돌아간다면 지금처럼 평범하게.. 아무 걱정없이 살 수도 있어.”
떨리는 입술과 함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너가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야. 누구보다.. 그 어떤 존재보다도 너가 행복하길 바래.”
“누..”
“다시 한번더 물을게. 정말 버틸.. 자신이 있겠어?”
진심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난 마른 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그 어느때보다 확고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야 너..? 누군데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데?”
그러자 그녀는 미소와 함께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스쳐 변화시켜 말했다.
‘..!’
“나..? 나는 너야, 서지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