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87. 시계(??)제로(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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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시계(??)제로(ZERO) ]
“나라고..?”
“그래.”
내 얼굴을 한 그녀. 아니 내가 여자였다면 이런 얼굴이 아니었을까 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미소와 함께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놀라 흔들리는 내 얼굴을 부드럽게 만져 주며 말했다.
“놀라지마, 난 네가 앞서 만났던 우리의 일부 중 하나니까.”
“우리의.. 일부?”
“그래, 여러 명이지만 단 하나인 존재. 그리고 너도 그런 우리들 중 하나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여러 명이지만 하나라니,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후회라고 하면 좀 쉬울려나?”
“뭐...?”
“내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내가 그곳을 몰랐더라면, 아님 내가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지.”
그녀란 말에 잠시 녀석의 표정이 서글퍼 보였다면 비약일까, 그녀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며 내게 말했다.
“진짜란 뭘까? 이렇게 모든 것을 느끼건만 남는 것은 의문뿐인 것이 진짜가 아니라서 일까?”
“무슨.. 말하고 싶은 거야?”
내 물음에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부럽단 듯 내게 말했다.
“넌 어떤 우리보다 그에게 가까운 존재야. 자신이 카피란 것을 모를 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믿지.”
‘..!’
카피라니? 뭐가 카피란 말인가? 놀라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기억들이 그가 준 것들이라면 넌.. 받아들일 수 있겠어?”
“무슨.. 나는..”
“서지웅이라고? 하지만 기억해내지 못했잖아.”
혼란스럽다. 내가 기억하고 느끼는 이것이 그럼 내 것이 아니란 말인가? 떨리는 내 손을 포근하게 잡아주며 그녀가 말했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깨어나면 대략적인 것은 알아도, 좀처럼 디테일한 것들은 떠오르지 않지.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모순에도 우린 진실로 받아들여.”
“거.. 짓말..”
“네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이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하.. 하지 마..”
“이 세상에 처음.. 왔기 때문인 거야.”
‘!!!’
내가 가짜라고? 지금까지 믿어왔던 나는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원한다면 난 이대로 조용히 사라져 이 모든 것을 지우고 널 다시 평범하게 살게 해줄 거야.”
“평범.. 하게?”
“그래, 그가 없는 이 세상에선 너가.. 서지웅이니까.”
‘..!’
충격적인 그녀의 말에 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황망히 차가운 인도를 내려보던 나는 그녀에게 한가지 궁금한 것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응..?”
“서지웅.. 아니 그는 어디 있지?”
내 물음에 그녀는 씁쓸하게 미소를 짓더니 잡았던 내 손을 놓아주며 대답했다.
“네가 있던 그 세계.. 그곳에 있어.”
“뭐..?”
“너도 봤잖아, 과거에 있던 그를.. 그리고 우리의 마나하트를 쥔 그의 손을..”
‘..!’
토르디에르에서의 충격으로 보았던 오리지널의 기억, 그는 아득히 먼 과거부터 살아왔던 걸까. 순간 난 초라한 내 존재감에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크흑..”
흘러 떨어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려보지만 눈물을 야속하게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떨어지며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왜..”
궁금하다.
“왜..”
알고 싶다.
“왜 그런 거야..”
“뭐..?”
“왜 날 만든 건데?!!”
부정은 슬픔이 되고 그것이 돌아와 분노로 바뀐다. 나는 눈물로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나를 납득해 줄 수 있는 말을 갈망하지만 그녀는 미안하단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그것은 내게 벅찬 질문이야.”
“벅.. 차다고..?”
“그래.. 나도 너처럼 카피일 뿐이니까.”
“그게 말이라고 생각해?!!”
쿠웅
순간의 분노에 그녀를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인 난 절박함에 점철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애원하듯 그녀에게 물었다.
“나라며.. 너도 그와 같은 우리라며? 근데.. 왜 몰라.. 왜!!!”
그러자 그녀는 너무도 미안하단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냐면.. 우린 너와 달리 불량품이니까.”
‘!!!’
“미안해.. 우리가.. 너만큼 특별했다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보다시피 완벽하지 않거든..”
놀라 흔들리는 내 눈동자와 달리 그녀는 괜찮단 듯 오히려 나를 위로하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너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야. 부족한 만큼 우린.. 너가 행복해지길 바라니까. 그것이 우리들의 소망이고 그에게 버림받은 우리들의 복수니까.”
“버림을.. 받았다고..?”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 위로 따뜻한 빛을 발하며 점점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무슨..”
휘청.
쏟아지는 졸음과 함께 아늑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려지는 시야사이로 그녀의 얼굴과 움직이는 입술이 보였다.
“아무래도 평범하게 살기 바랬던 내 소원은 이루지 못했네.”
“뭐..?”
“괜찮아, 머지 않아 우리의 정점에 선 그가 널 인도할 거니까.”
이전에 만났던 녀석도 그 말을 했었지.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내 이마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걱정 마, 우린 또다시 만날 거야.”
“또.. 만난다고..?”
“그래, 샤벨리아.”
‘..!’
그 말과 함께 내 육체는 거대한 중력에 빨려 들어 가듯 떨어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거대한 암흑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던 그때, 저 아래 환하게 빛나는 구멍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빛에 이끌려 몸이 분해되듯 사라지던 난 거대한 바닷속에 빠지듯 몸이 추락했고 다시금 번쩍 빛나 오르는 푸른빛과 함께 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으음..”
몸이 무겁다. 마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것인지 좀처럼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으..”
쪼개질 듯 띵한 두통에 머리를 감싸며 천천히 일어나던 그때, 내 양 어깨로 무언가 스륵 흘러 떨어졌다.
“응..?”
‘..!’
익숙한 황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아까는 없었던 봉긋한 가슴 두 개가 내게 인사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말이었다.
“씨.. 씨발!!”
순간 눈이 확 떠지며 벌떡 일어선 내가 그 요망한 것에 도망쳐보지만, 그것은 내게 붙은 채 이리저리 부드럽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놀란 강아지처럼 눈을 깜박이며 아래를 내려보던 난 아까와 달리 허벅지 사이가 왠지 허전하단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서.. 설마..”
불안함과 함께 천천히 뒤를 돌아본 순간, 화장대 거울 너머로 화사하게 아름다운 미소녀 하나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태양의 한줄기를 담아 빗은 듯 윤기 있는 금발과 푸른 사파이어를 박은 듯 빛나는 눈동자,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그녀. 그래, 바로 나였다.
“돌아왔어..”
***
이 거대한 저택이 오늘따라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자기 주책인 걸까, 마들린은 전쟁으로 출타한 가주를 대신해 평소보다 저택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꽃다운 어린 마님(?)까지 의식없이 돌아와 침대에 누워 계신 이상 이 어수선한 퓌러스타트 가(家)를 책임질 자는 바로 자신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명감에 다시금 팔을 걷어 부치며 복도를 지나던 그때였다.
달그락 다그락.
“응..?”
모두가 잠든 밤이거늘 어둡고 조용한 복도를 뚫고 누군가 식기를 건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주 간이 큰 놈인지 저 멀리 주방엔 불빛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요 놈 아주 잘 걸렸다. 퉤! 퉤!”
감히 용기도 좋게 자신이 관리하는 주방을 건들다니, 마들린은 보기에도 억쎈 팔뚝과 함께 근처에 있던 빗자루를 힘껏 쥐더니 도둑이 있는 주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미끌어져 놓친 건지 땅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도둑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아씨..”
소리로 본 건데 우측 세 번째 찻잔 식기였다. 세달 전 연합왕국 상인에게서 산 진귀한 찻잔이거늘 그것을 깨먹어? 마들린은 이마 위로 솟아오르는 자기 혈관과 함께 불빛이 새어 나오는 주방문을 잡아 벌컥 열어 제치며 외쳤다.
“언 놈이야?!! 언 놈이 주방을 털러 들어온겨?!! 이 몽둥이로 콱 씨!!!”
“딸꾹 ”
떨어진 찻잔조각을 집어 들던 샤벨리아는 주방의 악마로 현신한 마들린의 모습에 놀랐는지 딸꾹질을 하며 눈을 깜박였고, 마들린 또한 침대에 있어야 할 샤벨리아의 모습에 잠시 인지가 안 되는지 그렇게 둘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아.. 아가씨?!!”
“아.. 안녕? 히끅 ”
정녕 그녀란 말인가? 순간 눈물이 차오르던 마들린은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를 옆으로 던지더니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주방전체를 흔들 듯 뛰어오더니 샤벨리아를 가뿐하게 들어 안았다.
“아가씨!!!!”
“꾸엑..!!!”
“일어나실 줄 알았어요!! 흐윽.. 이 마들린의 정성 하늘이 역시 저버리지 않았군요.”
“수.. 숨.. 마.. 마들린.. 나..”
꽈악
“꼬르륵..”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마들린의 환영에 샤벨리아는 입에 거품을 물며 눈이 뒤집어졌고,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과 함께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압사되어 죽을 수 있는지와 그리고 씰보다 무서운 아줌마의 힘을 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