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94. 시계(??)제로(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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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시계(??)제로(ZERO) ]
하켄 제국의 페르티갈 로슈비치 합병소식은 수도인 플루스를 점령한 프러겔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직 공화국의 잔존세력이 남은 시점에서 보호하고 있던 왕정파를 통해 새로운 국왕을 선출한 제국은 그들의 왕과 귀족 자신의 동의를 얻어 합법적인 합병을 선포한 것이었다.
“마벨..”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주변 왕국들이었기에 실질적 정통성을 가진 페르티갈 로슈비치 왕계과 귀족원의 동의는 제국에 꽤 유리한 입장을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다.
“전하, 이러면 저희가 침공군이 되어 버립니다.”
“...”
앙센의 말에 셰이엔은 안대를 하지 않는 한쪽 눈을 조용히 감으며 중얼거렸다.
“키프루스는?”
“북쪽 전선을 방어하던 공화국 사령관의 배신으로 현재 플루스 북쪽 50km지점까지 내려와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흐음..”
정당성은 제국이 전력을 온전하게 보존한 키프루스는 수도를 내놓으라며 무력시위를 하는 상황에서 프러겔의 입장은 난처했다. 게다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그리고 타 국가의 점령에 흉흉해질 때로 흉흉해진 플루스의 치안은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일 만큼 좋지 못했다.
그렇다 해서 수도를 포기한다면 프러겔은 희생은 희생대로 치르고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샤벨리아는 지금 뭐 하고 있지?”
“그게..”
“응?”
식은땀을 흘리며 자기 수염을 초조한 듯 매만지는 앙센의 모습에 셰이엔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에라 모르겠다’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도시정리 중입니다.”
“도시정리?”
“예..”
같은 시각, 플루스 거리는 난데없이 나타난 금발의 미소녀의 등장에 한바탕 난리가 나고 있었다.
콰앙!!
“끄윽!!”
자신보다 2배는 클법한 덩치를 길거리에 패대기친 샤벨리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허리에 양손을 짚으며 소리쳤다.
“나와!! 어떤 새끼가 돈 안 내고 톡 꼈어?!!”
웅성거리는 군중 앞으로 그녀에게 밤탱이가 된 건달 다섯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샤벨리아의 뒤에는 노점상을 하는 듯한 모자(?子)가 어질러져 있는 집기류 사이에 서 있었다.
“밥을 처먹었으면 돈을 내야지? 응?”
“미.. 미친년..”
빠직.
미친년이란 소리에 팍 인상이 구져지는 샤벨리아와 함께 그녀 뒤에 있던 사달수드는 잘못된 선택을 했단 안쓰러운 표정과 함께 ‘그래 그럴 수 있어 맞기 전엔 말이지’하며 그 건달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퍼억!
“커억..!”
“뭐라고?”
퍼억!
“끄.. 끄윽..”
“말을 하라니까? 응?”
건달의 멱살을 잡아 일대일 박치기를 하며 묻는 그녀의 모습은 괴랄할 정도로 공포감을 주었고, 군중들조차 그 순간만큼은 건달에게 동정심을 느낄 정도로 무자비했다.
“이 새끼가 말을 했으면 하라니까.”
그 말과 함께 다시 머리를 뒤를 젖혀 박치기를 하려하자 뒤에 있던 사달수드가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렸다.
“대.. 대장! 이.. 이만 했으면 됐습니다.”
“뭐가?!! 내가 안 괜찮은데 뭐가 됐어?!! 엉?!!”
누가 건달이고 누가 치안담당자인지 모를 그녀의 거친 언성에 사달수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기.. 기절했습니다.”
“응? 진짜?”
끄덕.
“네.”
사달수드의 말에 샤벨리아는 ‘뭐가 이리 약해?’하며 귀여운 눈동자를 깜박이며 멱살 잡힌 건달을 바라보자, 거품을 물고는 눈이 뒤집혀져 있는 녀석이 추욱 늘어져 있었다.
“에이 씨..”
싱겁단 듯 혀를 차며 녀석의 멱살을 풀은 샤벨리아는 자신보다 큰 녀석을 발로 밀어 몸을 뒤집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품을 뒤지며 돈이 될 만한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흐흐흥~.”
마치 이것이 싸움이 아니라면 아주 아름다운 명화 속에 나올 것 같은 미소녀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돈을 훔치는데 정말이지 혼란을 주는 모습이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해? 니네 안 꺼내니? 내가 꺼내줘?”
“예? 아.. 아닙니다!! 꺼내야죠!!”
그 모습을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던 나머지 건달들을 향해 그녀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묻자 건달들은 화들짝 놀라며 스스로 자기 품을 열심히 뒤지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그녀 앞으로 꺼내 내려놓기 시작했다.
“징집관.”
“예.. 예!!”
충분히 삥(?)을 뜯은 샤벨리아는 만족스럽단 듯 사랑스런 미소와 함께 일어서더니 뒤에 얼어붙은 얼굴로 서 있던 장교하나를 손짓해 불렀다.
“부대에 자리 있지?”
“예.. 예..”
“얘들 데려가 채용해.”
“모두.. 말입니까?”
징집관의 물음에 샤벨리아는 ‘그럼 모두지, 하나만 데려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이 어찌 그리 매정해, 개도를 시작했으면 사후처리까지 응? 딱! 깔끔해야지? 안 그래?”
“마.. 맞는 말씀입니다.”
샤벨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징집관은 그녀 뒤에서 제발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고개를 내젓는 건달들이 더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나쁜 짓은 따끔하게 혼내고, 열심히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을 이렇게 소개 시켜줘야 훌륭한 치안담당관이라 할 수 있지.”
나름 자기 행동이 뿌듯하단 듯 코구멍 평수가 넓어지며 미소를 짓는 샤벨리아였지만 그녀를 따라온 부관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저거 죽으러 가라는 거 맞죠?”
“그러게, 돈을 준다해도 탈영하는 게 병사들인데..”
발슈테인과 페리츠는 자신들이 아는 진실을 그녀에게 전달하지 못한 채 자신들 뒤로 샤벨리아에게 개도와 함께 강제로 징집되어 잡혀 있는 수백의 건달들을 불쌍하단 듯 쳐다볼 뿐이었다.
“자.”
“예..?”
건달에게 받은(?) 돈꾸러미를 노점상 모자에게 건넨 샤벨리아는 미소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빵 한조각을 주우며 말했다.
“빵값.”
“돈이..”
“그리고 깽값. 남에 가게앞에서 깽판 쳤으니 돈을 내야지.”
그렇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모자를 뒤로 한 샤벨리아는 다시금 자신들의 행렬을 손짓으로 이동시키며 들고 있던 빵을 사달수드에게 던지며 말했다.
“네꺼.”
“예? 제꺼요?”
“그래, 먼지 조금 밖에 안 묻었으니까 버리지 말고.”
“...”
사달수드는 그 조금 밖에 안 묻었다는 엄청난 먼지투성이가 된 빵을 내려다보며 이전 일에 대한 샤벨리아의 뒤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거리에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은 그런 빵이라도 들고 있는 사달수드를 부러운 듯 바라보며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역시 전쟁은 싫어.”
들릴 듯 말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사달수드와 발슈테인, 그리고 페리츠는 샤벨리아의 말에 동조한단 듯 착잡한 표정으로 부랑아와 노숙자들이 넘쳐나는 플루스의 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
“콜록.. 콜록..”
“미엘폴스카..”
하얀 설원 위, 플루스의 함락소식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 공화국군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곁에 남아준 것은 씰인 슈트렐리츠 뿐이었다. 눈보라를 피해 근처 버려진 농가로 들어온 그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미엘폴스카를 의자에 앉히고는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추하지?”
“...”
미엘폴스카의 물음에 슈트렐리츠는 묵묵부답으로 불을 지필 뿐이었다. 힘겨운 기침에 손수건을 들어 잠시 콜록거리던 미엘폴스카는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이룰 수 있을거로 생각했는데..”
“...”
“그 결과가 이거라니..”
허무했다. 뜨거운 열정을 품고 꿈에 그리던 공화정을 세웠건만 세상은 그런 그의 이상을 철저히 부시며 과거로 돌려보냈다. 미엘폴스카는 그런 하늘이 조금은 원망스럽단 듯 멍하니 망가진 농가의 천장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말했다.
“슈트렐리츠.”
“응?”
“인간에게 너무 실망하지 마.”
“왜 그렇게 생각하지?”
불이 붙는 난로를 지피는 슈트렐리츠를 바라보며 미엘폴스카가 옅은 미소로 대답했다.
“네 눈에 실망감이 가득한 게 난 보이니까.”
그의 말에 부정도 긍정하지 않는 슈트렐리츠 뒤로 미엘폴스카가 말을 이었다.
“계절을 잘못 알고 먼지 피었을 뿐, 피어질 꽃은 언제가 날을 맞아 피어질거야.”
“...”
“슈트렐리츠..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미엘..”
그의 말에 슈트렐리츠가 돌아보자, 붉은 피가 한가득 묻어나온 자기 손수건을 보여 준 낯빛의 미엘폴스카가 괜찮단 미소로 말했다.
“라인슈볼츠를 도와줘. 그의 야심과 천재성이라면.. 어쩌면.. 우리 꿈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거야.”
“그 인간을 믿는 거야?”
확신하지 못하겠단 슈트렐리츠의 물음에 미엘폴스카는 힘겨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확실한 건 없어, 그저.. 가능성이 있는 것에 매달리는 것뿐이야.”
“...”
“그를 잘 보좌해 줘, 훌륭한 친구지만 가끔.. 나도 무서울 때도 있으니..”
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슈트렐리츠는 얼마 생이 남지 않은 자기 인간친구의 손을 잡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건 널 위해서 하는 거야.”
“고마워..”
슈트렐리츠의 대답에 미엘폴스카는 안심이 된단 듯 미소와 함께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그 짧고 화려 했던 생을 마감했다. 강풍이 몰아치는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날, 그렇게 공화정의 꽃을 피운 봄날의 꽃 같은 남자가 그 운명을 끝냈다. 다시 햇볕과 함께 광명이 비추는 그날을 기다리듯 조용히 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