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섬광의 주인 _ 뇌전(雷電)의 샤벨리아-96화 (96/135)

〈 96화 〉 96. 제국의 꽃

* * *

[ 96. 제국의 꽃 ]

해가 넘어가는 어스름한 저녁, 하켄 제국 제도(??) 뷰쉬발크는 마법 공학의 정수이자 최초의 씰을 제작한 현자(?者) 토마 사무엘이 건설했다는 볼펜뷔텔 템플을 포위 공격하는 제국 기사단과 병사들로 인해 일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릉 ­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병사들을 몰고 왔느냐?!!”

쩌렁쩌렁 울리는 미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 웅장하고 거대한 템플의 계단을 에워싸며 올라오던 제국의 전열보병들은 일순 움찔거리며 올라서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시왕께서 계신 신성한 곳이다! 더 이상 무례를 범한다면 네놈들 모두를 몰살 시켜 그 본보기를 세울 것이다!!”

분노에 찬 은발의 푸른 눈을 한 프레데리카가 냉기를 머금은 자기 푸른 샤벨을 빼 들며 외쳤다. 그러자 템플을 공격하려던 장교들과 병사들은 그녀의 기세에 움찔하며 서로 계단 위로 올라서기를 망설였다.

“누가 멈추라 했나?!”

‘..!’

오만한 목소리와 함께 병사들 사이로 길이 열리는가 싶더니 그녀와 같은 흰색 제복의 미남자가 옅은 미소와 함께 앞으로 걸어나오며 모습을 들어냈다.

“홀슈타인..!”

“간만이군, 프레데리카.”

하지만 그만 온 것이 아닌지 회색 머리카락의 미소년 하나가 샤벨을 허리춤에 찬 자세로 그의 뒤에서 손을 바지춤에 찔러 놓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텔게우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생각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프레데리카가 놀라 묻자, 홀슈타인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뭐긴, 역적을 처단하러 왔지.”

“역적..?”

“그래, 감히 황제 폐하의 은혜도 모르고 더러운 계략을 꾸민 뒷방 늙은이를 잡으러 말이야.”

“홀슈타인!! 이놈!!!”

순간 울컥한 프레데리카가 엄청난 냉기를 발산하며 샤벨을 날려 쇄도하자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샤벨을 바라보는 홀슈타인 뒤에서 순간 은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검을 그의 코앞에서 막아서는 베텔게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그그 ­

“베텔, 너 마저 시왕 전하를..”

“난, 진실을 본 것뿐이야.”

카앙 ­!!

뱀처럼 구불거리는 특이하는 샤벨을 쓰는 베텔게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프레데리카를 다시 뒤로 날려 버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검을 검집에 넣었다.

“잘 들어라, 프레데리카. 이것이 황제 폐하의 명이다.”

그렇게 말한 홀슈타인은 품에서 화려하게 치장된 고급종이 하나를 꺼내서는 모두가 들리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켄 대제국 황제, 클로비스 발부르가 프리티마셰 페트로뷔나가 명한다. 짐과 제국을 향해 반란을 획책한 볼펜뷔텔의 수장이자 시왕, 올 라운드 제로 카스토르 폰 벨켐부르크를 속히 잡아 들여라!!”

‘..!’

“거짓말!! 폐하가 그런 명령을 내리실리 없다!! 여긴 초대 프리티마셰 폐하와 토마 사무엘 전하가 약속해 만드신 신성한 곳이다!!”

“훗.. 프레데리카, 우리가 시왕만 체포하기 위해서 온 것 같아?”

“뭐라고..?”

“지금, 이시간부로 볼펜뷔텔은 폐쇄되고, 템플기사단은 해체한다. 그리고 템플의 모든 재산은 황실로 복속하라.”

‘!!!’

템플을 폐쇄한다니, 아무리 침착한 프레데리카라 할지라도 손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의 신전이야! 그런데 어찌 씰인 네가..!!”

모든 씰들의 고향이자 정신적인 상징인 볼펜뷔텔을 폐쇄한다니 프레데리카는 그것도 인간이 아닌 씰인 홀슈타인이 직접 부순다고 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전? 믿음은 장소가 아니라 존재에서 나오는 거야.”

“뭐..?”

“껍데기에 불과한 신전에 함몰된 네가 더 안타깝구나, 프레데리카.”

“이놈..!!!”

엄청난 살기와 함께 시린 냉기가 계단을 얼어붙이고 흉흉한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넘버 포군..”

만만치 않은 그녀의 기세에 살짝 얼굴을 굳힌 홀슈타인은 손을 들어 올리며 나직이 명령을 내렸다. 자신들을 막아서기 위해 입구로 몰려오는 템플 수호 기사단인 ‘블로우’들과 제국 유일 푸른외투의 전열보병, 템플 호위병들의 전투 준비를 올려다보며 말이었다.

“전군, 진격.”

***

호륵 ­

정말이지 이런 어색한 자리가 또 있을까, 플로헤타의 초대(?)아닌 지독한 매달림에 티 다과회에 오긴 했지만, 참석 자들을 보자니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당최 모르겠다.

“맛있죠?”

“응..? 어.. 어.”

나와 플로헤타, 그리고 아슈트로와 엘로이즈. 마지막으로 키프루스에서 온 손님 키탈파가 홍차와 다과가 차려진 테이블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앉아 있었다.

“흥..”

뭐라 핀잔을 주고 싶은지 입술을 씰룩 거리는 아슈트로였지만, 밀로의 홍차실력에 반론을 못 하겠는지 콧방귀만 뀌며 자기 찻잔에 있는 티를 마실 뿐이었다.

“흐으응~”

한편 키탈파는 얼마 담아 있지 않은 홍차에 각설탕을 무려 10개 이상을 넣으며 그 괴랄한 미각을 뽐내고 있었고, 엘로이즈는 뛰어난 홍차맛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우리 뒤에서 시중을 드는 밀로를 계속해 노려보며 홀짝홀짝 티를 마시고 있었다.

“샤벨리아는 오리지널이야?”

“뭐?”

갑작스레 훅 들어오는 키탈파의 물음에 내가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자, 그녀는 신기하단 듯 턱을 괴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와 같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 들어.”

‘다른 느낌..?’

솔직히 내가 오리지널이라고 묻는다면 난 잘 모르겠다. 내 기억이 시작된 건 페르티안을 처음 만난 그때이고, 그 이전의 기억은 이젠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으니까. 어두워지는 내 표정에 플로헤타가 나를 와락 껴안더니 이렇게 말했다.

“샤링은 샤링이야. 난 샤링이 좋아.”

“프.. 플로..?”

누구한테도 뺏기지 않겠단 듯 자기 볼을 내 볼에 밀착시키며 껴안는 플로헤타의 과도한 애정행각에 난감한 나였지만 한편으론 그런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러자 키탈파는 이해가 된단 듯 묘한 미소와 함께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도 싫지 않아.”

“뭐..?”

“너랑 있으면 마치 집에 있는 거 같거든.”

‘집..?’

그렇게 말한 키탈파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씨익 짓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홍차를 마시는 아슈트로를 눈으로 힐끗 가리키며 내게 속삭였다.

“내가 재밌는 거 하나 알려줄까?”

“재밌는 거?”

“아슈트로의 검이 정확하기로 유명한데 이렇게 마나하트만 빗나가 있다는 걸 보니, 저 똘아이도 너가 좋은가 봐.”

아슈트로에게 상처를 입었던 자리는 말끔히 회복이 되었건만 키탈파는 마치 그 흔적이 보인단 듯 배시시 웃으며 조용히 자기 홍차를 마셨다. 그러자 나는 정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아슈트로를 힐끔 쳐다보자,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건지 불쾌한 표정과 함께 홍차컵을 찻잔에 거칠게 내려놓은 아슈트로가 말했다.

“지랄하고 있네, 그냥 반응이 재밌어서 살려 뒀던거뿐이야.”

울컥.

“누가 누굴 살려 줘? 야, 지금이라도 한 판 뜰까?!”

“호오.. 그거 좋지, 미리 말하지만 예전처럼 비실비실 거리진 말아 달라고. 섬.광.의 샤벨리아.”

“이.. 이 새끼가.. 너 지금 비꼰거지?! 어?!!”

테이블을 박차 일어서는 우리 둘의 모습에 플로헤타가 내 허리를 황급히 감싸며 이렇게 외쳤다.

“싸.. 싸움은 안 돼! 플로는 모두하고 차를 마시고 싶단 말이야!!”

플로헤타의 애원에 나와 아슈트로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흥’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전장에서 보자, 썩은 동태 눈.”

“뭐? 동태 눈?”

“그래, 니 눈깔말이야!”

내 말에 아슈트로는 얼굴이 쌔빨게 지는가 싶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꺄하하하!! 썩은 동태 눈이래!!”

“풋..”

그와 동시에 키탈파는 오랜만에 속이 시원하단 듯 배를 잡고 발을 구르며 웃었고, 무표정한 엘로이즈조차 내 말에 동의한단 듯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조용히 헛기침하며 모른 척했다.

“샤벨리아, 이 모욕.. 꼭 기억하마.”

“그래, 기억하라고 한 거야, 병신아.”

“푸흡..”

입으로 아슈트로를 패는 내가 마음에 드는지 키탈파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도 연신 키득거리며 좋아했다. 그러자 아슈트로가 옆에 있던 물수건을 들어 키탈파에게 던지려던 순간, 애꿎게 홍차 잔을 건드린 그는 그 뜨거운 것을 바지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앗 뜨거!!”

“꺄하하하하!! 바보!!!”

홍차로 더럽혀진 자기 바지를 내려보던 아슈트로는 이를 갈며 키탈파에게 말했다.

“네 짓이지, 키탈파!”

“내가 뭘? 지금 내가 뭘 했어?”

“네 권능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아슈트로의 말에 내가 ‘권능?’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플로헤타가 미소와 함께 내게 고개를 젖히며 속삭였다.

“키탈파의 권능은 행운(幸?)이예요.”

“행운..?”

“네, 아버지가 막내인 키탈파를 위해 주신 권능이죠.”

“막내라면..”

플로헤타의 말에 내가 궁금하단 듯 쳐다보자 플로헤타는 머나먼 과거의 일이란 듯 잠시 표정이 씁쓸해지는가 싶더니 아슈트로와 아옹다옹하며 도망치는 키탈파를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오리지널인건 알죠?”

“응, 그야..”

“우린 모두 하켄제국 출신이예요.”

‘..!’

“키탈파는 올 라운드 넘버 서틴. 그리고 전..”

이제껏 본 적없는 슬픈 눈동자를 한 플로헤타가 나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붉은 입술을 떼며 고백했다. 마치 숨길 수 없는 것이란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이었다.

“올 라운드 넘버 쓰리.. 지금의 프러겔 수호자가 아닌.. 제국을 지키는 광역의 마녀란 학살자로 말이예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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