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97. 제국의 꽃
* * *
[ 97. 제국의 꽃 ]
카앙 – 캉 !!
“큭..!! 이놈들!!”
계속해 밀려오는 황실 근위보병대와 황제의 직속 기사단, 흑십자 기사단의 쇄도에 템플 기사단과 템플 가드들이 분전해보지만 수많은 사상자와 함께 이미 입구는 홀슈타인이 이끄는 황제군에게 넘어간지 오래였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늘어선 웅장한 신전내부는 자비없는 침입자들로 인해 피바다가 되어 있었고, 신전 곳곳은 전투의 참혹함으로 곳곳이 아비규환이었다.
씰들의 신전인 볼펜뷔텔이었지만, 인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총탄이 날아들고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전투 속에 침입자들을 피해 기둥 뒤에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던 푸르고 하얀 성복을 입은 아이들은 자신들을 향해 샤벨을 번뜩이며 날아오는 황제의 씰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은발을 휘날리며 나타난 프레데리카가 검을 가로 막고는 소리쳤다.
시이잉
카아앙 !!!
“어서 도망가!!”
끄.. 끄덕.
신전 곳곳에 있는 인간들까지 말살시킬 작정인지 템플 곳곳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신전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 찼고, 그 모습은 신전이라기 보단 학살장에 가까웠다.
그그그
“감히 신성한 곳에서 피를 보다니.”
피잉
쩌저적
‘..!’
푸르게 빛나 번쩍이는 그녀의 눈동자와 함께 순식간에 황제의 씰을 얼려 버린 프레데리카는 그대로 마나하트만을 낚아채는 용서할 수 없단 듯 으스러트려 버렸다.
파직 !
“홀슈타인..”
용서할 수 없는 자기 형제를 바라보며 으르렁 거리던 그때, 템플 기사단 블로우 중 하나가 피가 범벅된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프레데리카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가다니?! 난..”
프레데리카의 외침에 블로우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시왕전하를 피신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다.”
“...”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어서 시왕께 가십시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러기 위해 창조된 우리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살아남은 블로우들은 템플 가드들을 학살하며 다가오는 베텔게우스를 막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미안..”
타악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시왕을 보호해야 했다. 빠르게 달려가는 프레데리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분노에 차 있었다.
끼익 – 쿵!
“전하!!”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왕인 카스토르가 제복을 입은 차림으로 열 살 정도 될법한 여자아이의 옷을 여며주고 있었다.
“시간이 됐군.”
외투의 단추를 여며준 카스토르는 허리춤에 매달린 샤벨을 잡고 일어서서는 프레데리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프레데리카, 마지막 부탁을 해야겠군.”
“예..? 부탁이라뇨?! 어서 피신하셔야..”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은 카스토르는 자기 뒤에서 겁먹은 표정과 함께 바지춤을 쥐고 있는 여자아이를 그녀에게 보이며 말했다.
“데네브카이토스를 그에게 데려다주게.”
“그라면..?”
끄덕.
프레데리카의 물음에 카스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자기 바지춤을 붙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그녀에게 건넸다.
“카이토르..?”
“데브,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헤어져? 싫어!!”
와락.
헤어져야 한다는 소리에 프레데리카의 손을 잡았던 데브는 그에게 다시 안기며 어리광을 피웠고, 카이토르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떼어내며 말했다.
“그를 부탁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끄덕.
“그래.. 그래야 데브지.”
미소와 함께 데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카이토르는 프레데리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네.”
“전하..”
“나 대신 그를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치던 프레데리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데브를 안아 방을 빠져나갔고, 카이토르는 이로써 자기 역할은 끝났단 듯 초연한 표정으로 대리석 바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프티, 이걸로 된 거지..?”
***
페르티갈 로슈비치에 대한 분할협정은 순조롭게 마무리가 될 수 있었다. 수도 플루스를 중심으로 북쪽 광산지대와 부동항 ‘그라디아’는 키프루스가 연합왕국과 밀접한 동쪽 해안선과 남동쪽 산업지대는 하켄제국에 편입하기로 합의했다.
프러겔은 수도 플루스와 함께 남서쪽 곡창지대를 가져옴으로써 페르티갈 로슈비치란 나라는 하루아침에 지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나라가 사라졌다 해서 그 나라의 국민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의지도 아닌 타국의 의지로 나눠진 나라의 상황에 많은 신민들이 시위를 하며 항의를 해 보지만, 무력하게 해산되며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삼일 뒤면 이 지긋지긋한 눈도 안녕이군.”
괴랄한 미각을 선보였던 키탈파를 시작으로 플루스를 방문했던 협상단들은 속속히 자신들의 영토로 떠났고, 우리도 본국에서 오는 치안관과 행정관료들이 도착하는 대로 수도로 개선할 예정이었다.
어쩌면 눈보다도 통치청이 되어 버린 과거 페르티갈 로슈비치 왕궁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절망어린 눈빛과 표정을 마주하는 것이 더 힘든 것 일지도 몰랐다. 누구도 아닌 내가 그들의 희망을 아니, 어쩌면 진일보할 수 있었던 인간의 희망을 꺾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칫..”
과거 마벨이 말했던 대로 어쩌면 자기 의지와 다르게 우리는 각각 역사에서 맡은 역할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말처럼 그것이 악역이라도 할지라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운명을 짊어진 위험한 대역으로 말이었다.
연극이라면 막을 내려 새로운 막을 열면 되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아무리 운명을 탓하고 도망치고 싶다해도 모든 것은 내 얄팍한 선택과 양보없는 이기심이 이 역할을 자처했다. 그렇기에 마음이 이렇게 무거운걸지도 몰랐다.
피잉.
청명하게 빛나는 내 마나하트를 만지며 나는 마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협상기간 내내 입은 미소를 지으며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녀석의 눈동자는 어딘가 초조함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난 내심 그것이 나에 대한 것이길 몰래 빌었다. 왜냐하면 가끔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내가 카트리나였을 적 나를 바라보았던 녀석의 눈길처럼 느껴졌다면 나의 망상인건 걸까, 난 페르티안 외에 다른 녀석에게 신경 쓸 일은 없을거로 생각했건만 불안정했던 이전의 마나하트 마냥 내 마음이 요즘 그 모양이었다.
스윽
‘..!’
그러던 그때, 내 몸을 감싸는 따듯한 팔이 느껴져 왔다. 내 몸을 한가득 안은 그 팔은 내 등을 따듯하게 뒤에서 안아주며 불안정했던 내 마음을 안정시켜 주려는 듯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나를 잠식해 왔다.
“페르티안..”
“샤벨리아.”
내 어깨를 파고들어 온 녀석의 얼굴이 가까워져 지나 싶더니 페르티갈 로슈비치의 겨울바람에 얼어 있던 내 볼을 부드러운 입술로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정말 믿기지 않아, 이렇게 내 눈앞에 너가 있다니.”
“...”
애탔던 내 마음만큼이나 녀석 또한 나를 그리워했는지 내 머리칼에 코를 묻은 녀석의 팔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뭐가..?”
“널 두고 잠이 든거..”
“...”
내 사과에 페르티안은 말없이 나를 꼬옥 안아줄 뿐이었다. 그 강한 조임과 거친 숨이 왜인지 난 싫지 않았다. 그리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는 나였지만, 지금의 이 속박만큼은 내게 과분할 만큼 따스한 것이었다.
“괜찮아, 다시 돌아왔잖아.”
피식.
“그래서 넌 바보란 거야.”
어린아이마냥 단순한 녀석의 대답에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고, 어느새 익숙해진 이 여자아이의 몸에 내가 어디까지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내 본질에 대한 의문은 페르티안의 사랑만으로 메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함과 두려움에 흔들리던 그때, 하얗게 내린 설원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빛이 오르기 시작했다.
스릉
“뒤로 비켜있어!”
강력한 마력파동에 일순 얼굴이 굳어진 난 페르티안을 뒤로 물리며 재빠르게 샤벨을 뽑았고, 긴장할 만큼 강한 존재의 느낌에 경계하던 그때, 마법진 위로 전송된 두 명의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올 라운드..?!”
아슈트로와 같이 검은색 외투에 황금 수가 놓아진 백색제복을 입은 은발의 미소녀와 오렌지머리칼을 귀엽게 묶어올린 여자아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파지지직
“제국놈을 무슨 짓을..!”
녀석들의 또 다른 암습이라 생각한 내가 분노하며 뇌전을 일으키던 그때, 은발의 미소녀가 나를 발견해 놀라는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중얼거렸다.
“당신이군요.”
“뭐..?”
스윽.
‘!!’
나를 응시한 그녀는 주저함없이 내게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당신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올 라운드 넘버 포, 프레데리카 폰 벨켐부르크가 인사드립니다. 위대한 파편이시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