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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의 주인 _ 뇌전(雷電)의 샤벨리아-105화 (105/135)

〈 105화 〉 105. 이슈발랑퀘

* * *

[ 105. 이슈발랑퀘 ]

“하아.. 하아..”

함락된 ‘블루아 루즈’에서 멀지 않는 근교, 핑크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도망가는 인영하나가 보였다. 무엇이 그리 다급한지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조바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손에 쥐어진 흰색 십자가는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삭 ­

“아.. 안 돼..”

블루아 루즈가 함락되기 전 빠르게 도망쳤다고 생각했건만, 추격자들은 자기 생각보다 집요하고 꽤 빠르게 추격하고 있었다.

스윽. 슥.

아무도 없는 초원 위엔 커다란 보름달만이 비추고 있었고, 그 아래로 수 명의 추격자들이 그녀의 뒤를 바짝 쫓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츠즈즈즈 ­

피잉 ­

“Flámmŭla(플람물라).”

‘..!’

순간 몸을 틀어 추격자들을 마주한 그녀는 눈동자 위로 기하학 무늬의 마법진이 발하는가 싶더니 일순 마법을 발동하며 자신을 쫓는 추격들에게 붉은 화염줄기 여러 개를 발사해 날렸다.

“피해라!”

콰아앙! 콰아앙!!

그녀의 마법에 급히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추격자중 하나가 재빠르게 땅을 박차 다시 쇄도하며 샤벨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

일순 벌집모양의 쉴드가 생성되며 샤벨을 틀어막자, 추격자는 쉴드 너머의 그녀를 응시하며 자기 후드를 벗었다.

‘..!’

“또 모습을 바꿨나 보구나, 킨라라.”

“라스알게티..”

푸른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빛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엔 자비라곤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포기하고, 그것을 내놔라.”

“안 돼, 그럴 순 없어.”

라스의 말에 킨라라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눈동자로 응시하며 은은한 빛을 발하는 십자가를 자기 품으로 더욱 숨겼다.

“그것은 폐하의 것이다, 너 따위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란 말이다!!”

쩌저적.

‘..!’

파아앙 ­

“죽어라!!”

킨라라의 쉴드를 부순 라스가 쇄도하던 그때, 붉은 샤벨 하나가 들판을 가로질러 날아오더니 킨라라와 라스를 떨어트리듯 중간에서 폭발했다.

콰아아앙 ­

“큭..! 누구냐?!!”

갑작스러운 훼방꾼에 화가 난 듯 라스가 소리치자, 베이지 머리칼의 귀여운 미소년이 킨라라 앞으로 가볍게 착지하며 재밌게 됐단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와줄 사람이 있다 해서 와봤더니.. 그게 너라니, 오랜만이야 킨라라.”

“슈트렐리츠..”

“어서 도망가,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고.. 고마워.”

슈트렐리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킨라라는 다시금 일어서선 달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인상을 찡그린 라스알게티가 샤벨을 들어 슈트렐리츠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의 네 행동이 그 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란 걸 알고 있겠지?”

“훗.. 어느 쪽의 그분을 말하는 거지? 내가 본 그분은 단 한 분이다.”

“이 무례한.. 너희들은 쫓아라! 내가 이 녀석을 맡고 있겠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라스알게티.”

그 말과 함께 서로를 향해 쏘아진 두 인영은 빠른 섬광과 함께 날카로운 냉병기 소리를 울렸고, 나머지 추격자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도망치는 킨라라를 뒤쫓기 시작했다.

***

“세베랑스가 항복했다고요?”

“예.. 수도 블루아루즈가 제국의 손에 떨어졌다고 합니다다.”

“이럴 수가..”

“폐.. 폐하?!”

에우로페 대륙에서 제국과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대국인 세베랑스가 단 일주일도 안 돼 항복했다니, 프러겔 여황인 에스테리아는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제국과의 전쟁에 구원군을 보내겠단 전령을 보냈건만 일례적인 서전일 뿐이라며 거절했던 세베랑스 왕을 보다 설득하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제국군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죠?”

“황제의 군대는 블루아 루즈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나 모쉘에 있는 마벨 원수의 군대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세베랑스가 무너진 지금 제국의 다음 타깃은 자기 제국이 될 것이 자명했다. 테이블을 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에스테리아는 이내 결심했는지 굳은 얼굴로 엘렌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귀족들을 불러 모으세요. 아무래도 하켄은 우리와의 전쟁을 원하는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 친서를 주변 왕국에 보내도록 하세요.”

“모든 왕국에 말입니까?”

전례가 없는 그녀의 조치에 엘렌 백작이 놀라 묻자 에스테리아는 고개를 끄덕이 말했다.

“네, 그리고 망설이는 왕국이 있다면 말하세요. 우리 제국이 무너지는 순간, 이 대륙에 존속하는 왕국은 단 하나도 없을 거라고요.”

“그리 전하겠습니다.”

여황의 말뜻을 이해한 엘렌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현실을 벗어났고, 옥좌에 기댄 에스테리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아직은 평화로운 크리스티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을 어떻게든 지켜 보이겠어, 어떻게든..”

***

다그닥 다그닥.

오늘도 화창한 크리스티네 거리는 아름다웠다. 붐비는 크리스티네 대로를 가로지르는 마차들 중 눈에 띄는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서둘러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는데, 그 창문 너머로 화려한 푸른 제복 차림의 샤벨리아가 보였다.

“아직도 삐졌어?”

“...”

맞은편 그녀 못지 않게 화려한 제복차림을 한 페르티안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창밖만을 바라보는 샤벨리아를 달래듯 말을 걸었다.

“불편하게 거기 앉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 이 쿠션 되게 편해.”

“흥..”

그래, 엉덩이가 아파 찌그러지겠다 새꺄. 근데 내가 자존심이 있지 갈 것 같아? 난 페르티안의 권유에도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린 채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내가 다시는 그런 꿈 안 꿀게, 약속할게. 응?”

“아우씨 이걸 그냥!”

“아, 왜.. 왜 그러는데?!!”

나는 녀석의 말에 순간 벌떡 일어나 말아쥐어 올렸던 주먹을 내리며 ‘됐다’란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뭐지.. 그게 아닌가..?”

정말 모르겠단 듯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페르티안을 바라보며 난 어젯밤을 떠올렸다.

*

*

*

미에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예쁘게 치장된 내 모습을 녀석에게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 들떠 있었다. 아무래도 제복만 입은 모습보단 이렇게 치장한 모습도 나름 신선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난 일하고 있다는 녀석의 서재로 돌격했다.

철컥 ­

“페르티안!!”

“아, 왔어..?”

‘엥..?’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서재엔 엄청난 서류 더미들과 함께 책상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고, 나를 발견한 녀석은 숙취때문인지 일에 대한 피로인지 지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날 맞이했다.

“미안, 조금만 기다려 줘 이것만 마무리할게.”

“어.. 어.”

털썩.

‘뭐.. 뭐야? 좀 더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뭔가 부족한 녀석의 반응에 살짝 기분이 상한 나는 녀석의 책상이 바로 보이는 소파에 앉아 입을 삐죽 내밀던 그때, 괴르니히의 말이 떠올랐다.

[ 하이힐 신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마다 하겠습니까? ]

‘그래.. 자극이 부족했던 거야.’

뭐 예쁜것도 매일보면 식상해지는 법, 녀석에겐 예쁜 게 아니라 자극적인 게 필요할지도 몰랐다. 무덤덤한 녀석의 반응에 대한 오기일까, 나는 살며시 다리를 꼬며 내 각선미를 녀석에게 슬며시 들어내보였다.

사각사각.

“...”

사각사각 사각.

‘어라..?’

반응이 없다. 뭔가 반응이 더 있어야 하는데 녀석은 책상 아래에 있는 서류에 코를 박고는 반응하지 않았다.

‘자세가 좀 구려서 그런가..?’

노력(?)이 부족했음을 쿨하게 인정한 나는 드레스를 허벅지 위로 좀 더 들어 올리고는 흰색 스타킹에 감싸진 내 다리를 요염히 뽐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

‘윽.. 이 자식이..’

나에 대한 무시일까, 녀석의 펜 움직임이 더욱 빨라질뿐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렇게 무심한 녀석의 모습에 ‘뚜’한 표정과 함께 볼에 바람을 머금은 난 오기로 라도 날 쳐다보게 만들겠단 듯 내 드레스를 조금 더 올렸다.

스윽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

“...”

‘어..? 이.. 이 자식이..?’

뭐지? 더 이상 올릴 드레스도 없는데, 내가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녀석은 뭔 놈의 서류가 나보다 그리 좋은지 아주 뚫을 기세로 펜촉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하씨.. 쉽지 않네.. 쉽지 않어.’

그렇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비참해질 즈음 순간 비상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맞아! 다리가 아니라면..’

물끄럼.

씨익.

그래, 녀석은 이거에 약했다. 방법을 찾은 나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짓고는 헛기침하며 덥단 듯 가슴이 모아진 드레스 턱에 검지 손가락을 걸치고는 부채질 하며 말했다.

“아.. 덥다.. 왜 이렇게 덥지?”

힐끔.

‘..!’

이건 넘어올 거란 생각과 함께 녀석을 힐끔 쳐다보던 그때,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개새끼가 책상에 코를 박고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아닌 나 같이 아름답고 예쁜 아가씨를 앞에 쳐 두고 말이었다.

“이.. 이.. 개새끼가!!!”

순간 분노에 찬 나는 옆에 있던 컵을 녀석의 머리에 날려 버리곤 이렇게 외쳤다.

“내가 다음부터 니 앞에 오나 봐라!! 평생 고자로 죽어버려!!!”

그렇게 저주란 저주를 퍼부으며 나가던 그때, 홍차를 준비해 들어오던 슈바이크와 맞닿드렸다.

“샤벨리아님? 벌써 가시는 겁니까?”

“흥! 됐어요!! 난 내 방에서 마실게요!!!”

“아.. 예..”

씩씩 거리며 나가는 샤벨리아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슈바이크는 자기 주인이 또 그녀에게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널브러진 페르티안에게 다가가던 그때, 슈바이크는 안색이 창백해 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책상 아래로 정체불명의 붉은 피가 다량으로 흘러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 페르티안님!! 이 무..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황급히 그를 일으키자 엄청난 쌍코피와 함께 안색이 눈에 띠게 헬쓱해진 페르티안이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슈바이크.. 샤벨리아가 날 죽이려고 해요.”

“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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