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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의 주인 _ 뇌전(雷電)의 샤벨리아-110화 (110/135)

〈 110화 〉 110. 이슈발랑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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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이슈발랑퀘 ]

올 라운드의 갑작스러운 수도습격은 아슬아슬하게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프러겔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공포는 강렬한 공격성을 품고 마치 당하지 않았지만, 그리 당하지 않겠단 듯 미래를 대비한 무분별한 방어기재를 펼치며 추악한 본성을 들어내고 있었다.

“당장 공격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세베랑스처럼 당할 뿐입니다!!”

흥분한 귀족들은 열변을 토하며 에스테리아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하켄과의 전쟁을 위해 귀족들을 소집할 그녀였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열된 전쟁열기에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머리를 짚으며 왕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세베랑스의 왕처럼 폐하께서도 처참하게 끌려져 내려오고 싶으신 겁니까?!”

“칼날처럼 선 대리석 바닥을 기었다고 합니다! 불구가 된 세베랑스의 선례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라고 그리되리란 법은 없습니다! 우린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폐하!!”

눈앞에서 본 것도, 그렇다고 스스로가 당해 본 것도 아니건만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 광신도 마냥 피를 토할 듯 굉장한 열변을 뱉으며 아무것도 동조하지 않는 그녀를 맹렬히 비난까지 하기 시작했다.

타앙 ­!

‘..!’

그러던 그때, 청아한 소리를 울리며 검은색 안대를 한 미남자가 모두의 시선을 훔쳤는데, 바로 페르티갈 로슈비치의 공왕이자 에스테리아의 동생인 셰이엔이었다. 그는 평상시와 다른 분노에 휩싸인 얼굴로 대리석 바닥에 검집을 내리치며 이성을 잃은 그들에게 소리쳤다.

“이 무슨 무례인가?! 그대들은 오래된 법도도 순서도 잊을 만큼 짐승이 되었는가?!!”

맹렬한 셰이엔의 비난에 흥분했던 귀족들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기 시작했고, 그는 그런 그들을 비난하듯 손을 들어 가리키며 소리쳤다.

“우리는 세베랑스가 아닌 프러겔이다! 어디 그런 잡스러운 선례를 들고 와 우리를 비교하는가?!!”

스릉 ­

‘..!’

“이는 제국의 모든 신민과 프러겔 황가를 업신여기는 일! 더 이상 망발을 폐하께 한다면 이 셰이엔이 이 자리에서 처단하겠다.”

“으으..”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현재를 봐라! 아직 어떠한 위협도 우리에게 다가오진 않았다!!”

강렬하지만 차분한 그의 음성에 진정되는 듯 혼란에 빠져 있던 홀은 점차 이성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엘렌 백작과 페리티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일순 장내의 분위기를 바꾼 셰이엔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셰이엔, 너무 그들을 책망하지 마세요. 저들의 말도 일리는 있지 않습니까?”

“폐하..”

셰이엔의 외침에 조용해진 홀을 내려다보던 에스테리아는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귀족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전쟁? 그대들은 정녕 전쟁을 원하는가?”

“무.. 물론입니다!”

“제국의 검으로써 폐하를 보호하겠습니다!!”

피식.

맡겨만 달란 듯 허세를 부리는 귀족들의 모습에 싸늘한 조소를 흘린 에스테리아는 냉철한 눈동자를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우리 전력의 3배가 되는 적의 정규군이 우리의 국경 주위를 에워싸고 있고, 우리가 총동원할 수 있는 산업력의 5배를 가진 하켄의 전쟁동원력을 단순히 투지로 이기겠단 말인가?”

“싸.. 싸움은 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 맞습니다, 폐하!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근성을 가지고 싸운다면 하켄에게..”

“모두 몰살당하겠지.”

‘..!’

예기치 못한 여황의 말에 모든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 날, 한 시에 모두가 이 불타는 크리스티네에서 웅장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이 그대들이 내게 말하고 싶은 꿈이 아닌가?”

“그.. 그런 뜻은..”

“밥을 굶는 것보다 든든하게 먹어야 힘을 낼 수 있고, 하나가 아닌 둘이 돌을 옮겨도 효율이 좋다는 것은 거리의 치기들도 아는 사실이거늘.. 하물며 제국의 정책을 제시하는 그대들의 입에서 보이지 않는 투지를 얘기하다니, 내 어찌 그대들을 믿고 나라를 운영하겠는가?!!”

‘..!!’

엄청난 박력과 함께 터져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홀의 귀족들은 모두 놀라 에스테리아의 카리스마에 위축되었다.

“전쟁은 단순한 정신력 싸움이 아니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것을 전부 걸고 싸우는 치열한 생존이란 것을 어찌 그대들은 모르는가?!!”

“...”

“살이 찢기고, 베이고, 감출 수 없는 절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전장 속에서 그대들은 허세 좋은 병정놀이를 할 수 있다 보는가?!”

그녀의 일갈에 서로의 눈치만을 보며 뒷걸음질 치는 귀족들에게 다가간 에스테리아는 어느 누구보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화려한 군복과 멋있는 샤벨을 차니, 전쟁이 아주 우스워 보이는가? 지금 여기서 내게 전쟁을 운운하는 것들은 그 흔한 전쟁터 근처도 나가지도 않은 이들 뿐임을 어찌 모르는가?!!”

그랬다. 하켄과의 전쟁을 치렀던 베르텡과 앙센, 토르디에르에서 산전수전을 겪었던 몰트겐도 그리고 페르티갈 로슈비치에서 험난한 싸움을 했던 셰이엔과 소수의 귀족들은 모두가 얼굴을 굳힌 채 이번 전쟁에 대해 어떠한 말도 꺼내지도 않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알라! 전쟁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그런 멋진 것이 아니다!!”

에스테리아의 뼈있는 외침에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마냥 철부지 언니로 생각했던 그녀가 정색하고 바른 말만 내뱉자 다시금 그녀가 이 제국의 황제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무.. 무서운 언니야..’

나만이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지 내 옆에 있던 플로헤타도 내 옷깃을 살며시 잡으며 놀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에스테리아의 말이 맞았다. 홀슈타인의 습격에 패닉에 빠진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냉정하고도 뼈를 후벼 파는 뜨거운 훈계였다.

“제국은 지금 멸망이냐, 아님 존속이냐란 분기점에 있소.”

“폐하..”

“나도 긍지 높은 프러겔 가의 후손. 선대들의 업적을 내 대에서 끊길 마음따윈 추호에도 없습니다.”

힘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귀족들은 다음 말을 기다리듯 에스테리아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왕좌의 계단에 다시 올라 귀족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신성 프러겔 32대 황제, 에스테리아 폰 요제파 슈트로겐이 명한다!”

스릉 ­

‘..!’

“오늘 이 시간부로 우리 프러겔 제국은 에로우페 대륙의 모든 왕국들과 동맹을 결성해 저 극악무도한 하켄제국에 대항할 것이다!!”

황제의 샤벨을 뽑아든 에스테리아는 결심을 굳힌 듯 위엄있는 얼굴로 자기 의지를 선포하고는 시종이 건네는 씰로 봉인 된 고풍스런 두루마기 모두에게 들어 올리며 외쳤다.

“보라! 이것이 나를 포함한 12개국 지도자들이 맹세한 약속의 증거다!!”

“오오..”

“대박.. 언제 저걸 하셨데..”

감탄하며 내가 중얼거리던 그때, 눈동자를 돌려 나를 힐끔 바라보는 에스테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씨익.

그러곤 불길한 미소와 함께 내게 윙크한 그녀는 두루마기를 내려 시종에게 다시 건네고는 검집에서 뺀 샤벨을 앞으로 들어 올리곤 이렇게 외쳤다.

“에로우페 대륙 모든 씰들의 왕이자 신성 프러겔 제국의 충성스러운 나의 기사. 제1성 샤벨리아 폰 퓌러슈타트는 앞으로 나오라.”

‘뭐.. 뭐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부름에 당황해 눈을 깜박이던 난 모두가 쏠린 시선에 등이 떠밀리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스테리아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샤벨리아.”

“예.. 폐하.”

“그대에게 연합의 사기를 올릴 세베랑스의 선공을 맡기겠소.”

“감사..”

‘뭐..?’

순간 놀란 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자, 에스테리아는 숨길 수 없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세베랑스의 블루아 루즈로 가, 세베랑스 왕가의 마지막 핏줄 로랑 드 마르탱 샤토됭가를 구출하라.”

“..!”

‘뭐.. 뭐라고? 누가 누굴 구해?’

황망하단 내 표정이 재밌단 듯 풋 하고 웃음을 짓던 에스테리아는 이내 ‘큼큼’ 거리며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위엄있는 얼굴로 바꾸더니 들고 있던 샤벨을 들어 내게 하사하듯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이것이 그 증거이다. 어서 이 샤벨을 받아 온 대륙과 연합에 나의 의지를 알려라.”

‘하씨.. 시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요?’란 애처로운 표정으로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묻자, 에스테리아는 내 손 위로 샤벨을 친절히 건네주며 못된 친언니 마냥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그렇게 귀여운 얼굴로 애원해도 안 돼요, 샤벨리아.”

***

“뭐라?!!”

“윽..”

노기가 서린 하켄제국 황제의 일갈에 보고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시립하고 있던 올 라운드들은 머리를 울리는 그녀의 기운에 인상 찡그리며 괴로워했다.

“신기를 뺏긴 것도 모자라, 플룩스마저 각성시켰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폐하.”

날카로운 그녀의 외침에 홀슈타인과 아슈트로, 그리고 주베네하말리는 몸 둘바 모르겠단 듯 고개를 수그리며 용서를 구했다.

“...”

그런 그들을 맹렬한 분노가 느껴지는 흉포한 눈동자로 내려다보던 황제는 화를 추스르듯 눈을 감더니, 작은 심호흡과 함께 다소 진정된 눈동자를 다시금 뜨며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풍파다. 오히려 플룩스에게 살아 나온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감사합니다..”

진정된 그녀의 기운에 올 라운드들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고, 클로비스는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란 듯 시종에게 건네받은 문서를 홀슈타인에게 던지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예..? 무슨..”

‘..!’

황제가 던진 문서를 주워 읽던 홀슈타인은 급격히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 말은..”

“그래, 녀석들이 내게 대항하기로 정한 듯싶다. 어리석은 것들..”

대(?)하켄제국 동맹. 프러겔을 맹주로 한 에우로페 대륙의 13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클로비스는 그것이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단 듯 싸늘한 조소와 함께 왕좌에 턱을 괴며 말했다.

“개새끼 열 마리, 스무마리가 모인다 한들, 천성 개일 뿐. 내 친히 범과 개의 차이를 보여주겠다.”

오만하고도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리고, 그런 그녀의 왕좌 옆으로 개의 목줄이 걸린 하늘색 머리카락의 미소년이 절망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세베랑스 왕가를 상징하는 하얀 백합 무늬의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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