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111. 서쪽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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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서쪽의 빛 ]
“하아..”
황궁에서 돌아온 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페르티안은 그런 내 모습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을 참으며 쿡쿡 거렸다.
“그러다 땅 꺼지겠어, 샤벨리아.”
“제발, 그랬으면.. 흐아아..”
정말이지 꼬리 아홉 개만 달려 있지 않았을 뿐이지, 아주 사람을 은글슬쩍 홀라당 베껴 먹는 것이 아주 구미호가 따로 없었다. 어떻게 날 그 사지(死?)중에 사지인 세베랑스로 보낼 생각한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의 세베랑스가 어떤가? 그 광포하다는 하켄제국의 황제가 눌러앉아 있는 호랑이 굴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나보고 거길 가라고? 이건 뭐 제 발로 호랑이 입에 들어가는 꼴이었다.
“무서운 아줌마야..”
그렇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조용히 있던 나는 그런 나와는 안중에도 없단 듯 왁자지껄 소란스런 주위의 소음에 순간 혈관이 뿔뚝 튀어나오며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
벌떡.
“근데 왜! 니들까지 내 집에 있는 거야?!!”
페르티안이야 같이 사니까 그렇다 치지만, 황궁에 있어야 할 플로헤타며 새로 건축되고 있는 볼펜뷔텔을 감독하고 있어야 할 프레데리카와 데네브카이토스, 그리고 나갔다 붙여 온 킨라라까지 지 집인양 성대한 티파티를 펼치는데 아주 가관이 아니지 않을 수 없었다.
오물오물.
“플룩스도 먹을래?”
“샤링, 차 필요해요?”
‘아..’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깜박이며 홍차 주전자를 드는 플로헤타와 쿠키 여러 개를 볼이 터질 정도로 넣어 오물거리는 데브를 본 순간, 순수함만으로도 사람 속을 터쳐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둘 다 틀렸어. 플룩스는 이 스페셜 머핀이 먹고 싶은 거라고.”
오 신이시여, 오늘 제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날입니까? 둘의 물음에 킨라라는 블루베리 잼이 박힌 머핀 하나를 내 앞에 내밀며 ‘많이 먹어요, 플룩스 헷’하며 귀엽게 윙크를 하는데 테이블을 잡은 내손이 아주 떨리다 못해 거칠게 들썩거렸다.
“호오.. 이런 머핀이 있다니, 나도 돌아가는 길에 구매해야겠구만.”
울컥.
그 순간, 무엇보다 내 집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인간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머핀을 고르는데 그 모습에 결국 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몰트겐!! 당신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왜.. 왜냐니?! 나도 이곳 손님이니까 왔지!!”
“뭐어~? 누가 불렀는데?! 아~ 땅에 떨어진 초대장을 잘못 주워 온 거 아냐?”
“뭐.. 뭐라고?!! 지금 말 다 했나?!!”
그렇게 몰트겐과 얼굴을 마주하며 으르렁 거리던 그때였다. 누군가를 맞이하러 잠시 나갔던 페르티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된 게스트홀을 바라보며 난처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우리를 진정시키듯 손바닥을 치며 나와 몰트겐을 떨어트렸다.
“자자, 샤벨리아 몰트겐 후작님께 무례하게 그러면 안 되지.”
“뭐야? 너 지금 저 영감 편드는거야?!”
“샤벨리아 경, 페르티안 백작의 말을 못 들었나? 무.례.하다지 않나? 백작 집에서 곁방살이 하는 주제에 집주인 행세는., 에잉!”
“이.. 이 영감탱이가! 지금 말 다 했어?! 일루와! 이참에 그 주둥이 확 뽑아버리게!!”
몰트겐의 흰 수염을 모두 뽑아 버릴 생각으로 달려들던 그때, 응접실 문이 활짝 열리며 경쾌한 소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모두 모여 있었구나?”
혹한의 키프루스에서 곧바로 온 듯 고급스러운 코발트빛 외투와 흰색 모피를 걸친 키탈파가 특유의 경쾌한 웃음과 함께 손을 펼치며 모습을 들어냈다.
“키탈파!”
그녀의 모습에 쿠키를 두 손 가득 쥐고 있던 데브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 달음에 달려가 그녀에게 와락 안기며 기뻐했다.
“데.. 데브, 무.. 무거워.”
“헤헤, 키탈파.”
같은 체구의 둘은 꽤 친한 친구처럼 보였는데 쿠키 가루가 한가득 입에 묻은 얼굴로 부비는 데브가 부담스러운지 그 넉살 좋은 키탈파도 난처한 표정과 함께 내게 도와 달란 듯 쳐다보았다.
“쟤 마중 나가러 갔던 거야?”
“응, 이번 작전에 필요할 거라면서 프레데리카가 내게 귀띔해 줬거든.”
“프레데리카가?”
주위가 시끄럽든 말든 고고한 얼음꽃마냥 조용히 찻잔을 들어차를 음미하는 프레데리카를 몰래 힐끔 바라본 나는 의외란 듯 눈을 깜박였다. 물론 키프루스 또한 이번 대하켄 동맹의 연합중 하나였기에 키탈파가 온 것은 어쩌면 당연했지만, 프레데리카가 키탈파를 부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럼, 여기 모인 사람들이 그냥 모인 게 아니구나..?”
“후후, 역시 샤벨리아. 눈치가 빠르군.”
쿠키를 먹는 데브의 손을 잡은 키탈파가 상큼한 미소와 함께 당찬 표정으로 내게 손가락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
“맞아,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번 세베랑스 작전을 성공 시키 위해 내게 엄밀히 선별해 뽑은 사람들이라구!”
‘..!’
내가 놀라는 건 그렇다 쳐도, 프레데리카 넌 왜 놀라는데? 설마 넌 안 가는 줄 알았던 거야?
“훗훗훗, 각본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이 키탈파의 혼신의 역작이니 모두 기대해도 좋아.”
그녀의 허세에 이미 플로헤타와 데브, 킨라라는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눈빛을 빛내며 ‘응응’하며 어서 말해 달란 듯 서성이는데 아주 가관이 아니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알겠지만, 지금 세베랑스로 가는 길은 하켄의 침략으로 국경의 경비는 삼엄하고 블루아 루즈로 가는 길은 꽤 엄중해. 그래서 이 키탈파님에 생각한 작전, 바로 집시 유랑극단이야!”
“집시..?”
올만보다 먼 이국의 땅에서 왔다하는 설도 본래 에우로페 대륙의 실향민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의 한 갈래라는 설도 있지만,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채 대륙을 떠도는 그들은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었다.
유랑민족이라 기예나 점성술, 또는 사기나 도적질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신기해 하면서도 가까이하는 것을 꺼렸다.
“그 수완이 좋다는 무역상들도 까다로워진 행정절차 때문에 세베랑스로 가는 것에 애를 먹고 있지만, 집시들은 예외란 말이지.”
“왜..?”
내 물음에 키탈파는 아직 멀었단 듯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샤벨리아, 세베랑스는 지금 전시야. 이런 전시상황에서 제국이 눈 감아 주는 게 뭐겠어?”
“설마..”
“맞아, 얄궂게도 전쟁과 집시들은 공생관계야. 병사들을 상대로 많은 것을 제공하고 있지, 거리에선 구할 수 없는 환각초에서부터 여자까지 돈이 될 수 있는 건 모두 다 말이야.”
‘..!’
전쟁에 대한 스트레스와 억눌려져 갇힌 병사들의 불만을 해소시키엔 확실히 이보다 좋은 거래가 없었다. 게다가 외출이 자유로운 장교들과 달리 막사근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반병사들일 수록 그 불만이 클 터였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집시극단으로 보일 법한 위장을 하자는 거지.”
그렇게 말한 키탈파는 품속에서 이미 대역들을 추스렸는지 내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곤 벌써 기대가 된단 듯 윙크하며 내게 말했다.
“물품과 옷가지들을 구해 줘, 그 누구도 우릴 의심하지 못하게 꾸며줄게.”
“어째 불안한데..”
“훗.. 걱정 마, 내가 누구야? 이 행운의 키탈파님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에브리띵 올라잇이라구!”
***
에스테리아에게서 명령을 받은지 일주일째가 되던 날, 그렇게 우리는 세베랑스의 마지막 혈통, 로랑 왕자를 구하기 위해 출발했다.
히이잉
날렵한 기병마 대신, 느리지만 짐과 사람을 몰기에 좋은 덩치가 크고 힘이 좋기로 소문난 달루이산 말들이 이끄는 집같은 커다란 마차 두 대가 행렬을 지어 길을 달리고 있었다.
“정말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하하, 뭐 다 잘되겠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말을 몰며 대답하는 페르티안의 모습에 난 뚜한 표정으로 쳐다보았고, 집시들로 위장한 우리 쪽 사람들을 보자니 정말이지 가관이 아니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이국적으로 생긴 사달수드와 아티뤼크는 우리 중 좋은 옷차림을 한 집시 무리의 족장과 족장아들로 둔갑했는데 뭐 둘 다 올만출신이니 딱 어울리는 배역이긴 했다.
둘째로 페히메와 미에 그리고 샤를이 뽑혔는데 아이들은 절대 안 된다는 내 강력한 반대에도 키탈파는 집시무리로 보이려면 아이들이 꼭 있어야 한다며 저 세 명을 이번 작전에 넣어 버렸다.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탐탁지 않은 나였지만, 무슨 여행이라도 가는 듯 상기되어 떠들며 좋아하는 애들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왜! 이걸 몰아 되는 거야?!!”
“큭..”
우리가 탄 큰 두 마차 뒤로 당나귀가 모는 작은 짐마차 마부로 위장한 몰트겐이 잔뜩 심통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키탈파 말로는 아이 외에도 늙은 사람도 있어야 한다면 그를 택했는데 그 이유가 심술궂은 할아버지처럼 생겼다 해서 뽑았다고 했다.
‘큭큭.. 키탈파도 보는 눈이 있다니까.’
“샤벨리아님, 전 언제 마차 탈 수 있습니까?”
“야! 너 누가 이름 부르래?! 죽을래?!”
“아..”
털보 리니, 평소보다 덥수룩한 털을 기른 모습으로 커다란 배낭을 매고 마차와 속도를 맞춰 걷고 있었는데, 그의 배역은 다소 모자란 먹보 짐꾼이란 설정이었다. 덩치도 큰데다 배도 살짝 나온 녀석의 모습은 거대한 곰과 같았는데 아무래도 그 모습이 키탈파의 눈도장을 받은 듯했다. 다만 불쌍한 리니는 자신이 그런 멍청한 배역이란 것을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불쌍한 놈’
“플룩스, 플룩스. 이거 봐봐. 예쁘지?”
그리고 데브와 키탈파는 점성술사로 어디서 구해왔는지 키탈파는 검은색 로브와 모자를 쓰고는 수정구를 닦고 있었고, 그 옆에 데브는 싸구려 보석들로 잔뜩 치장한 옷차림으로 키탈파가 준 타로카드를 내게 보이며 자랑했다.
“저어.. 키탈파.”
“응?”
“옷.. 다른 거 입으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
마지막으로 나와 킨라라, 그리고 프레데리카는 집시극단의 창부역할로 꽤 화려하고 야한 옷차림으로 마차에 타고 있었다. 평소 그 얼굴 변화가 없는 프레데리카가 저리 얼굴이 홍당무가 된 것을 보니 지금의 옷이 꽤 고역인 듯싶었다.
나는 어떠냐고? 훗, 이 미모의 여신인 내게 안 어울리는 배역이 어디 있고 옷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나라서가 아니라 정말이지 한 떨기 장미와 같다면 이해될까? 나란 여자, 왜 이리 완벽한 말인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자아 도취 되어 있던 그때, 옆에 있던 키탈파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집으며 이렇게 말했다.
“뭐지..? 가장 중요한 걸 놓고 온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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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크리스티네.
“히이잉..”
한가득 짐을 꾸린 플로헤타가 모두가 떠나고 텅 빈 샤벨리아의 저택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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