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123. 어둠의 성좌
* * *
[ 123. 어둠의 성좌 ]
‘이 사람이 서지웅..’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영원한 잠에 빠진 노인을 바라보는 내 심경은 복잡했다.
꽈악.
지금껏 내가 한 개고생이 이 인간 때문이라고? 순간 울컥한 난 주먹을 움켜쥐고는 그가 잠든 유리관을 향해 내질렀다.
콰앙 !!
[ 이게 다 네 짓이라고?!! ]
콰앙 ! 콰앙 !!
[ 왜 이딴짓을 벌린 거야?! 대체 왜?!! 말해 봐!! 이 시발새끼야!!! ]
일순 터진 분노는 이성을 날려 버렸고, 나는 깨지지도 않는 그 유리관을 향해 몇 번이고 주먹을 날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타악.
[ 그만해.. ]
이성을 잃은 날보다 못한 또 다른 내가 흐르는 내 주먹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 하아.. 하아.. 개새끼.. ]
으득
무슨 큰 뜻이 있어 사람을 이렇게 괴롭혔는지 모르지만, 만약 그 빌어먹을 사상과 비전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것이라면, 내가 빛의 성좌던 너의 특별한 씰이든 모두 내던지고 널 엿먹이겠단 결심과 함께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
[ 현자는 결코 널.. 아니, 우릴 나쁜 뜻으로 한 것은 아니었어. ]
현자, 내가 알고 있는 현자는 씰들의 창조자 토마 사무엘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씰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의 존재에 난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현자는 토마 사무엘이 아니던가..? ]
그러자 또 다른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단 듯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토마 사무엘은 현자가 생전에 아끼던 제자였지, 씰의 개념을 정립한 건 서지웅 그 자신 본인이야. ]
‘..!’
설마, 예전 정원에 있던 서지웅과 프리티마셰를 찾아왔던 백금발의 미소년 꼬마가 토마 사무엘이었던 건가? 확실히 그 당시 서지웅의 손에는 우리의 마나 하트와 같은 마력체를 쥐고 있었다.
[ 그럼 왜 사람들은 토마 사무엘로 알고 있었던 거지..? ]
그러자 또 다른 나는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건.. 그가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
[ 뭐..? ]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니? 나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또 다른 나는 잠이 든 그를 이해한단 듯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 바보 같게도.. 그는 창조자가 아니라 그저 한 여자의 연인이 되고 싶어 했거든. ]
‘!!’
한 여자를 뜻하는 것이 누구인지 아는 나는 말을 잇지 못했고, 또 다른 나는 이제는 안식을 취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씰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발명한 창조물일 뿐, 무엇을 위해서도 무언가에 쓰기 위해 거창히 만든 게 아니야. 그저 걱정과 불안에 떠는 그녀가 잠시나마 미소 짓길 바래 만든 것뿐이야. ]
[ 뭐..? 겨우.. 그런 이유로.. 우릴 만들었다고..? ]
내 물음에 또 다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래, 왜냐면 우리의 창조주는 아주 엄청난 바보거든. 그것도 사랑에 미친 바보 말이야. ]
[ ... ]
역제 프리티마셰의 역경은 하켄제국에서도 유명한 고난의 시기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임종할 때까지 상대적으로 약소국이었던 하켄은 주변 여러 강대국들의 간섭과 침략에 몸을 떨어야 했고, 그녀가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눈을 감은 것도 이러한 고생과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역사가들의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프리티마셰가 임종 하던 날, 그는 맹세했어. 다시는 사랑하는 이가 고통 속에 살지 않겠단 것과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윤회의 신이 허락하는 순간, 행복한 얼굴로 자기 세계에서 미소 짓는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고 말이야. ]
[ 그래서 만났어..? ]
그러자 또 다른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 만났지, 비록 오리지널인 그는 아니었지만 그의 의지가 깃든 우리가.. 바로 옆에서 말이야. ]
[ !!! ]
‘뭐라고..?’
무슨 말이냔 듯 그를 쳐다보자, 또 다른 나는 미소와 함께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모르겠어? 그녀가 누군지? ]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놀리듯 쳐다보던 나는 내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 네게 다시 생명을 준 사람, 그리고 너의 첫 계약자. 사람들은 그를 기적의.. ]
[ 거.. 거짓말.. ]
녀석의 말에 놀란 내가 입을 손으로 막으며 뒷걸음질 치자 녀석은 긍정의 미소와 함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 녀석이.. 프리티마셰라고..? ]
끄덕.
한심하고 멍청하고, 하는 것이라고 평범한 농사일밖에 모르는 그 덜떨어진 내 마스터가 그 긴 윤회를 거쳐 나타난 그녀의 후생이라니, 난 떨리는 손을 감추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 했다.
[ 넌 우연히 샤벨리아의 육체에서 눈을 뜬 게 아니야. ]
[ 뭐라고..? ]
처음 내게 기억과 이성이란 게 생겼던 그날, 나는 낯선 육체에서 그와 만났다.
[ 카스토르가.. 아니, 균형의 성좌가 이런 날을 대비해 만들어 놓은 거야. ]
[ 미리.. 만들었다고..? ]
내 물음에 또 다른 나는 잠이 든 그의 유리관을 쓸어 만지며 말을 이었다.
[ 아버지는 꽤 현명하고 또한 인자하고 누구보다 사랑에 순수하셨어.. ]
[ ... ]
[ 하지만 그도 인간. 신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었던 거야. ]
[ 뭐가..? ]
잠시 어두운 표정으로 잠이 든 그를 바라보던 또 다른 나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 미련과 집착이 생기셨던 거지, 점점 신과 같이 강해지는 자기 축복 받은 능력에 심취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야. ]
‘..!’
그의 관에서 떨어진 녀석은 내 손을 잡았다.
[ 노년으로 갈수록 그는 영생과 불사에 집착했고, 나중에 광기로 변했지. 하지만 항상 그러셨던 건 아니야. ]
[ 영생..? 불사..? ]
[ 그래, 환생하는 프리티마셰를.. 그리고 보다 완벽한 세계를 만들고 싶단 욕망 말이야. ]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하지만 현자라 불리는 그도 결국 인간이었던 것이었다. 신에게 받은 축복을 어둠 속에서 자라 커져갔던 뒤틀린 욕망과 자기 집착에 조금씩 굴복된 것을 보면 말이었다.
[ 그녀와 함께 꿈과 미래를 꿈꾸던 젊은 시절 만들었던 것이 우리, 빛의 성좌.. 그리고 프리티마셰가 임종하고 보다 나은 현재를 만들겠다 결심한 중년기 때 만든 게 균형의 성좌야. ]
[ 그럼, 어둠의 성좌는.. ]
내 물음에 녀석은 복잡미묘한 표정과 슬픈미소로 입을 뗐다.
[ 그는 두려웠던 거야. 점점 생에 집착하고 첫 이상과 달라져 변질되는 자신을 말이지. ]
[ ... ]
[ 어둠의 성좌인 알레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과거를 수호하는 씰. 점점 타락해 늙어가는 자신에게서 과거를 지키기 위해 녀석을 창조한 거야. ]
‘..!’
과거를 지킨다라, 늙어가는 자기 겉모습 만큼이나 영악해지고 교활해지는 자기 모습에 괴로웠을 그를 떠올리자 나는 왠지 모를 측은함이 느껴졌다.
[ 알레나는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했어, 그렇기에 매일 변해가는 자기 모습에 괴로워하는 그를 어둠 속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지. 그가 당부한 과거를 그가 찾아 변질시키지 못하게 꽁꽁숨켜 지키며 말이야. ]
[ ... ]
[ 하지만 극에 이른 아버지의 능력은 결국 임종직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설 수 있었고, 늙고 썩어가는 육체를 버린 그는.. ]
거기까지 말한 녀석은 안타깝단 듯 슬픈표정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 어떻게 됐는데? ]
[ 우리 셋중 자신을 좋아하는 알레나를 설득하기 시작했어. ]
[ !! ]
영광스러운 자의 말로가 아름다워야 하건만 그도 한낱 인간, 결국엔 모든 인간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그 하찮고 추한 모습을 되풀이 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나라도 어쩌면 그와 같은 선택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왜냐하면 우린 그의 내면을 이은 카피니까.
[ 나와 카스토르는 알레나가 그에게 설득되고 있단 것을 깨닫고는 결심할 수밖에 없었어. ]
[ 결심..? ]
[ 그래, 삶을 집착해 신의 섭리를 저버리고 망령이 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는 녀석을 어둠 속에 영원히 가두기로 말이지. ]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토마 사무엘님은 자기 스승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셨지만, 우린 알고 있었어. 알레나의 굴복으로 변질되는 과거에 우리의 이상과 비전도 그 영향으로 뒤틀려 질거란 걸 말이야. ]
[ 과거와 현재는 미래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
끄덕.
내 말에 녀석은 맞단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확고하고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잠이 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아버지는 이런 일이 일어날걸 아셨던 거야. 그리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우리를 창조하셨던 거지. ]
[ ... ]
[ 타락하고 추해지는 자신을 멈추기 위해서 말이야. ]
그 말과 함께 환하게 빛나던 녀석은 샤벨리아의 모습으로 변해 갔고, 아름답고 화사한 미소와 함께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 그와 알레나의 봉인을 위해 우린 육체를 제물로 바쳐야 했고, 타락한 그가 나오지 못하게 우린 둘로 갈라져 하나는 그를 가두는 쇠사슬로, 그리고 또 하나는 혹시 모를 프리티마셰를 맞이하기 위해 카스토르의 안에서 언제 깰지 모를 잠이 들었지. ]
피이잉
내 손을 잡는 녀석의 손길에 따라 나 또한 녀석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마치 물감에 종이가 물들 듯 그의 생각이 그의 기억이 거짓말과 같이 스며져 들어온다.
주륵
이해하지 못했던 여러 감정들과 마음들이 날 아프게 했고, 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렀다.
[ 자, 이제 하나로 합쳐질 시간이야. ]
[ 아.. ]
원래 하나였던 것이 둘에서 다시 합쳐진다. 뒤틀린 과거에 얽매여 움직이지 못한 나와 해맑게 천방지축마냥 질주했던 철없는 내가 진정한 미래로 가기 위해 다시금 하나가 되고 있었다. 정체된 미래와 방향이 없던 미래가 하나가 된 순간, 난 알 수 있었다.
[ 아버지.. ]
꽈악.
잃어 버렸던 미래만큼 다시 나아갈 미래가 그 무엇보다 밝고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다.
쿠구구구
“크으윽.. 이놈 플룩스!!”
“꺄아악!!”
거칠게 뒤엉키던 순백의 빛과 일렁이며 터지던 황금빛 뇌전이 하나로 합치며 클로비스를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콰아아앙!!
“큭!!”
엄청난 대지의 흔들림과 함께 건물 더미에 박혀 신음을 흘리는 클로비스의 시야 앞으로 엄청난 힘이 갈무리되며 푸르고 아름다운 눈동자와 함께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샤벨리아가 예의 당당하고 당찬 표정과 함께 걸어 나오며 말했다.
“알레나, 넌 이제 뒈졌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