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125. 어둠의 성좌
* * *
[ 125. 어둠의 성좌 ]
콰광 !!
“끄아아악!!”
“무슈! 뒤로 피하십시오! 에스티올 군의 중앙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열정과도 같은 적색 흙과 아름다운 바위들, 그리고 푸른 나무들과 어우러진 초원은 낙원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엄청난 마력 탄과 함께 날아오르는 병사들의 시체와 비명 소리는 흡사 지옥과 같았다.
꽈악.
“저 병신들..”
제국과의 서전에서 큰 승리를 했건만, 페르난도 공작은 록티아 산맥의 좁은 진입로들을 지키는 것이 아닌 제국군을 산맥 안쪽 바스티오 반도로 끌어들여 포위 공격하겠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에 라인슈볼츠가 크게 반대하며 험난한 록티아 산맥의 능선들을 요새화해 제국과의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한다 주창했지만, 페르난도 공작은 서전의 승기를 몰아 제국군을 일 거에 섬멸시키는 단기전이 낫다며, 그의 주장을 묵살하곤 연합군을 산맥 뒤편으로 후퇴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 후, 군대를 재정비한 마벨은 연합의 별다른 저항 없이 험난한 록티아 산맥을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었고, 이윽고 에스티올, 베르티아 연합군이 포진하고 있던 마로나 평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귀앵! 란의 병력이 에스티올 중앙군과 가깝다. 이러다간 같이 빨려 들어간다! 어서 저 돌격바보에게 뒤로 물러서라 전해!”
“알겠습니다.”
다급한 라인슈볼츠의 명령에 장교모를 잡아 묵례를 한 귀앵은 경기병대를 이끌고, 에스티올 중앙군을 보조하고 있던 란의 척탄병 연대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라인슈볼츠는 답답하단 듯 망원경으로 연신 전장을 살피며 구시렁 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머저리 가 연합의 사령관이라니! 에스티올인들은 신앙에 심취하더니, 지능까지 떨어졌나?!”
숫자로 보면 마벨군과 연합군은 비슷했지만, 문제는 병사들의 숙련도였다. 과거의 전투에서부터 살아남아 여러 경험을 쌓은 제국의 숙련병들은 새로 징집된 신병들에게 좋은 교관이었고, 다른 왕국의 군대와 다르게 그 점이 많은 전투에 소모되어도 빠르게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슈, 이러다 저희도 위험해지는 게 아닌지..”
멋진 구레나룻와 함께 거대한 풍채의 뮈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라인슈볼츠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망원경에서 눈을 떼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뮈랑, 혹시 겁을 먹은겐가?”
“무.. 무슨 말씀을! 이 뮈랑, 사령관의 명령이라면 당장에라도 돌격할 수 있습니다!”
라인슈볼츠의 장난스러운 핀잔에 얼굴이 빨개진 뮈랑은 당장에라도 증명하겠단 듯 펄쩍 뛰었고, 그 모습에 크게 웃음을 터트린 라인슈볼츠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하하! 됐네, 됐어! 자네의 용맹함은 나중에 보지. 참 보면 순진하다니까?”
“사.. 사령관.”
곰과 같이 덩치 큰 그가 자신을 놀리는 듯한 라인슈볼츠의 장난에 어쩔 줄 몰라하던 그때, 에스티올 중앙군이 프레드릭 백작의 흉갑 기병대에 돌파 당하며 배틀라인이 무너졌다.
“역시, 이제 한계인가..”
처음엔 공작의 뜻대로 산맥에서 나오려는 제국군을 포위하며 마벨의 군대를 밀어붙이며 승기를 잡을 듯싶었지만, 거센 연합군의 포위공격에도 마벨은 병사들의 희생을 감수하며 자리를 사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왜 많은 피해에도 물러서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기 주력으로 연합의 시선을 잡아두는 사이, 블뤼힐 백작과 프레드릭 백작의 군대를 산맥 뒤편으로 돌려 연합의 뒤를 쳤기 때문이었다.
“무슈, 연합군이 후퇴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심각한 전황에 귀앵이 다급히 말을 몰아 다가와 말하자, 라인슈볼츠는 볼장 다 봤단 표정으로 자기 곁에 있던 슈트렐리츠를 툭 치며 몸을 돌렸다.
“가지, 끝난 전쟁이야.”
“흠..”
라인슈볼츠의 말에 슈트렐리츠는 인간들의 전쟁에 흥미가 없단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말에 올라탔고, 통합력 1747년 4월, 연합의 피로 물든 마로나 전투를 시작으로 하켄제국의 에스티올 침략이 그렇게 공포스런 서막을 올렸다.
***
털썩
화약냄새가 가시지 않은 전장은 마치 병사들의 피를 빨아들인 듯 아름다운 석양과 함께 대지는 붉었고, 제국의 근위병에 양팔을 붙잡힌 페르난도 공작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끌려와선 화려한 제복을 입은 제국의 참모들 중앙에 있던 미남자 앞에 꿇려졌다.
“큭.. 이놈들! 난 성 에스티올 왕국, 페르난도 데 카사스 미르베테 공작이다! 당장 이 결박을 풀지 못하겠느냐?!!”
“공작..?”
페르난도 공작의 말에 마벨은 차가운 표정과 함께 싸늘한 조소를 흘리고는 그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묻자, 공작은 얼굴이 빨개지며 마벨을 향해 소리쳤다.
“하켄은 포로에 대한 처우를 이렇게 하는가?! 난 일국의 귀족이고 공작이다! 아무리 패전했다 해도 샹 막시밀럼 조약에 따라..”
퍼억 !
‘..!’
그렇게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던 그때, 허리춤에서 샤벨검집을 풀은 마벨이 주변의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그의 복부를 검집 끝으로 내리 찔러 누르며 으르렁거렸다.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네놈을 찢어발겨 내 연대기에 걸어 놓고 싶으니까 말이야.”
“커흑.. 커억..”
“가.. 각하!”
그런 마벨의 모습에 놀란 그의 부장들이 달려와 말리려 하자 마벨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고는 검집으로 복부를 맞아 괴로워하는 공작의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젖히고 말했다.
“살고 싶다면, 페르폴라로 가는 지름길을 지도에 표시해라, 내가 널 살려 둔 건 그 이유이니까.”
“내 표시할 성싶으..”
타앙 !
‘!!’
거절하는 공작의 말에 마벨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춤에 있던 권총 플린트락을 잡아 꺼내선 망설임 없이 공작의 허벅지에 총을 발사했다.
“끄아아악!!!”
“각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엄연히 포로에 대한 처우가..”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공작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마벨에게 다가온 부장들은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자비심이라곤 없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통에 땅을 구르는 공작의 가슴팍을 군화로 짓누르며 말했다.
“총과 탄약은 많다, 말하고 싶을 때까지 쏴주마.”
“이.. 악마 놈! 네 야만스러움을 신이 용서할 거로 생각하느냐?!!”
“신..?”
타앙 !!
“끄아아악!!!”
공작의 말에 비웃음을 흘린 마벨은 자신을 말리러 온 노르공 백작의 허리춤에 있던 권총 플린트 락을 잡아 꺼내선 멀쩡한 공작의 다른 허벅지에 총을 쏘며 말했다. 마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차가운 눈동자로 절망에 물들어가는 공작을 응시하며 말이다.
“그런 건, 산맥 저편에 버리고 왔다.”
***
“샤벨리아!!”
와락
알레나에게서 도망쳐 블루아 루즈 외곽에 있는 마차로 돌아오던 그때, 많이 걱정했단 듯 페르티안이 성큼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이.. 이 바보, 무.. 무.. 무슨 짓이야..?”
꽈악.
갑작스러운 껴안음에 난 당황한 표정과 함께 얼굴이 빨개지며 어버버 거렸고, 페르티안은 그런 내 모습을 모르는지 더욱 날 껴안으며 속삭였다.
“진짜 샤벨리아구나.”
“그.. 그럼, 나.. 나지. 또 누.. 누가 있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에 몰트겐과 사달수드는 놀리 듯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그들 외에도 모닥불에 모여 있던 다른 이들도 키득거리며 나와 페르티안을 훔쳐보았다.
‘아씨.. 쪼.. 쪽팔려..’
아무리 이전 기억이 돌아왔다 해도 역시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았다. 씰이 아무리 남녀에 대한 성별이 모호하다 해도, 솔직히 말하자면 남성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던 나로선 아직 이런 거에 어색했다.
“또 말없이 가기만 해 봐, 그땐 진짜..”
녀석은 그 말과 함께 살짝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뭘까, 나를 걱정하는 녀석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바보 녀석..’
평소라면 닭살이 돋을 행동이라며 난리 칠 나였지만, 이상했다. 순간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간질간질한 것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하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쎈 녀석이 어리광 부리듯 품에 안긴 모습이라니, 난 피식 웃음과 함께 그런 녀석이 귀엽단 듯 머리를 다정하게 쓰담아주며 말했다.
“미안, 다신 안 그럴게.”
그러자 녀석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알겠단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에 나도 모르게 다정한 미소를 짓던 그때였다.
물컹.
‘응..?’
물컹 물컹.
‘!!’
화악
내 가슴을 감싼 음흉한 손 두 개가 아주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타고 당연하단 듯 움직였고, 난 허리 끝에서부터 뒷목까지 타고 오르는 전율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뭐.. 뭐..”
당황해 말도 나오지 않아 버벅 거리던 그때, 아주 제법 능청스럽고 태연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벨리아, 너 요즘 살쪘어? 아, 아닌가? 감촉이 전보다..”
“뭐 하는 짓이야?!!! 이 변태!!!”
“꾸에엑!!”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얼굴로 있는 힘껏 녀석을 날려 버린 나는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숲속 저편으로 날아간 녀석의 안위 따윈 상관없단 듯 씩씩거리며 몸을 돌렸고, 그 순간 부럽단 듯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양손을 들어 무언가 조물거리는 행동을 하던 리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
“너..”
“샤.. 샤벨리아님, 그거, 아닙니다. 아니예요.”
저벅.
“샤벨리아님? 제 말 듣고 있으시죠? 샤벨리아님?”
리니, 한동안 매타작을 안 당했지? 왜 요즘 얌전하다 했더니, 아주 네가 매를 버는구나.
“으아아아!!!”
“너 거기 안 서?!!”
위험을 감지한 걸까, 리니 녀석 그 뚱뚱한 몸을 돌려 날렵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곤 무섭게 쫓아오는 나를 돌아보며 녀석은 하지 말아야 할 말하고 말았다. 그것이 자기 죽음 더욱 재촉하는 무서운 말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이다.
“그래요 했습니다! 했어요!! 그게 뭐 잘못됐습니까?!! 가슴도 플로헤타님보다 작으면서!!”
빠직
“리. 니!!!”
“우아아악!!”
그렇게 그날, 녀석은 내가 플로헤타보다 부족한 만큼 아낌없이 녀석의 몸을 흠씬 아주 흠씬 두들겨 주었다. 왜냐하면 난 가슴보다 마음이 더 넒은 여자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