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128. 어둠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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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 어둠의 성좌 ]
끼익
“너희들은 숙소에서 대기해라.”
“헤헤, 물론입죠.”
나와 프레데리카, 그리고 킨라라만을 요새 안으로 들여보낸 백작의 부관은 뒤따라 들어오려던 사달수드와 리니를 가로막고는 마구간 근처에 있는 허름한 건물을 가리키며 철문을 잠갔다.
그 모습에 내가 작게 윙크하며 계획대로 움직이란 듯 허리뒤로 작게 수신호를 보냈고, 녀석들은 알겠단 듯 조심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리춤에 숨긴 단도를 자신들의 바지 속으로 안 보이게 숨겼다.
“너희들은 날 따라와라.”
“네..”
저벅.
툭
“아꾸..! 아씨.. 왜 걸음을 멈추는..”
“...”
‘뭐.. 뭐야..?’
요새안을 두리번거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걸어가던 그때,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선 부관의 등에 부딪힌 내가 코를 만지며 뭐냐는 듯 올려다보자, 뭔가 홀린 듯 얼굴이 빨개져선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에 나는 흠칫 놀라며 행여 내 정체가 들켰나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렸다.
“저어.. 제가 뭘 실례라도..?”
“으음.. 아.. 아니다, 어.. 어서 따라와라. 가.. 갈 길이 멀다.”
“..?”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마치 불에 달궈진 화로마냥 붉게 변한 녀석은 호두까기 인형처럼 덜그덕 거리는 모습으로 몸을 돌려선 내 앞을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 뒤로도 뭐가 의심스러운지 나를 자꾸만 뒤돌아 쳐다보았다.
힐끔.
“...”
힐끔.
부들부들.
힐끔.
울컥
‘저거 왜 저래? 그냥 콱 죽..’
의심스럽게 나만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에 짜증 나 주먹을 움켜쥐던 그때, 불만스럽게 볼이 부풀어 오른 킨라라가 옆에서 귀엽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우.. 또 플룩스님이야.”
‘뭐.. 뭐?’
“그러게요.. 이번 건 조금 데미지가 있네요.”
‘프.. 프카?’
휙.
쿠궁
뭐냐는 내 시선에 프레데리카는 됐단 듯 새침히 고개를 돌리는데, 순간 알 것 같으면서 적응 안 되는 그 비참함이 또다시 나를 덮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아니야.. 아니,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울상을 지으며 좁고 긴 계단을 얼마나 올라갔을까, 요새 가운데에 있는 넓은 중앙홀로 나올 수 있었다.
‘오.. 여기가..’
곳곳에 플린트락을 매고 경계를 서고 있는 제국의 전열 보병들의 모습이 보였고, 홀을 통해 사방의 감옥들과 연결되는지 그 안은 볼 수 없게 두터운 나무 문으로 자물쇠를 잠가 보안을 철저히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대기해라.”
끄덕.
문제는 비단 수많은 문만이 아니었다. 견고한 석회석 블록들로 얼기설기 쌓은 두터운 벽은 18파운드 포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는데, 웬만한 화약으론 작은 구멍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왕세자는 어디에 있을까..?’
시간만 있다면 요새안을 샅샅이 뒤져 보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여기는 적지 중 적지였다. 한 번 발동된 경보에 블루아 루즈에 주둔하는 황제의 근위대와 인근에 있을지 모를 올 라운드들과 맞딱드려야 하는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컸다.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운 상황에 엄지손톱을 질근질근 씹던 그때, 어딘가로 사라졌던 부관이 헛기침하며 돌아오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만나는 분들은 제국 내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분들이다. 아무쪼록 실례가 되지 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내 얼굴을 빨개진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보던 녀석은 그걸로 됐단 듯 우리를 중앙계단으로 이어진 문으로 안내했고, 어둡고 싸늘했던 이전 통로와 달리 그곳은 붉은 카펫과 함께 고급스럽게 세공된 양초대들이 늘어져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스윽.
“금발은 백작님께 가고, 은발은 자작님에게 그리고 핑크 머리는 준작님께 가면 된다.”
울컥.
“왜 내가 준작인데?!”
“키.. 킨라라?!”
‘저.. 저 바보!’
고풍스러운 나무 문 앞에서 멈춰 선 부관의 당부에 킨라라가 귀여운 뻐드렁니로 으르르 거리며 물어 죽이겠단 듯 달려들자, 나와 프레데리카는 그런 그녀를 중간에 가로채 붙잡아 입을 막으며 진정시키려 했다.
“뭐.. 뭐냐?!”
“호호.. 아..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우읍..! 웁..!!!”
“가.. 가만히 있으.. 십시오.”
우리 둘 사이에서 버둥거리는 킨라라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부관은 그만하고 들어오라는 듯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똑똑.
“백작님, 주문하신 물건들이 도착했습니다.”
‘물건..?’
빠직.
우리를 물건 취급하는 부관의 말에 혈관이 솟는 나였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오오, 기다리다 지치는 줄 알았네.”
백작의 집무실은 꽤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제법 넓은 녀석의 집무실은 마치 작은 파티장을 만들어 놓은 듯 고급 식기류와 고가의 와인들이 놓여져 있었고, 고급스러운 식탁 위엔 음식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세베랑스 요리들로 가득했다.
‘여기가 궁성이야, 감옥이야..?’
혀를 내두를 술과 요리들에 놀란 내가 눈을 깜박이던 그때, 부관은 아까 말한 대로 이동하란 듯 우리를 그윽한(?) 눈빛으로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귀족 세 명에게 안내하기 시작했다.
“오오! 내 블루아 루즈의 모든 미녀들을 만났다 생각했건만.. 이거야말로 걸작이군!”
덥썩.
“호호.. 과.. 과찬이십니다.”
‘주.. 죽이고 싶다.’
다가온 내 손을 덥썩 잡은 녀석은 내게서 시선을 놓지 못하겠단 듯 뚫어지게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고, 나는 준비되지 않은 스킨쉽에 일어난 거부 반응을 애써 짓누르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녀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은 나뿐만이 아닌지, 다른 귀족들에게 다가간 프레데리카와 킨라라 또한 자기 신체에 접촉한 그들의 스킨쉽에 얼굴은 웃지만 꽤 고역스러워하고 있었다.
“크하하! 수고했네, 페링 중위. 그만 나가보게.”
척.
“옛! 클로비스 4세 만세!”
백작의 명령에 절도 있게 경례를 한 그는 문을 조심스레 닫고는 사라졌고, 녀석들은 부하가 사라지자 노골적으로 우리의 어깨와 허리를 둘러 끌어안고는 즐겁단 듯 자신들 앞에 있는 와인잔을 들며 외쳤다.
“하하하! 자자, 모두 술잔을 들게!! 우리에게 이런 선물을 주신 황제 폐하를 위해! 그리고 앞으로 번성할 제국을 위해!!”
***
샤벨리아가 백작방에 있을 무렵, 마구간 근처에서 세워두었던 마차 안에서 조그마한 인영 세 병이 조심스레 마차계단을 내려왔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샤를과 페히메 그리고 미에였다.
“형 말로는 병영이 이 근처라고 했는데..?”
“저기 아냐?”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단 듯 샤를이 머리를 벅벅 긁던 그때, 페히메가 의수를 들어 어느 한 건물을 가리켰고, 그 모습에 미에 또한 맞는 것 같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사람 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맞는 것 같아.”
외곽 경계가 삼엄한 요새 안이라서 그런지 요새 안에 있는 병영의 경비는 허술했다. 불이 비교적 적은 작은 창을 연 세 꼬마는 서로를 올려주고 잡아주며 병영 안으로 들어갔고, 마치 부엌을 숨어든 작은 햄스터마냥 발걸음 조심하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마셔! 마시라고!!”
작은 회랑에 모인 제국의 병사들은 비번인지 나무잔을 부딪치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꽤 분위기가 올랐는지 붉어진 얼굴로 낄낄 거리며 춤을 추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저기 있다.”
그런 병사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숙여 이동하던 그때, 샤를 시선 앞으로 무기 거치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플린트 락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들 가져 왔지?”
끄덕.
샤를의 말에 페히메와 미에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씨익 짓던 샤를은 자기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를 꺼내며 속삭였다.
“제국놈들 깜짝 놀랄거다. 큭큭..”
***
한편, 발루아가 요새와 떨어져 있는 거대한 석벽건물 지붕 위로 날렵한 인영 두 명이 소리 없이 착지하고는 아래에서 주변을 경계하는 제국의 병사들을 응시했다.
스윽 스윽.
끄덕.
빛이 반사되지 않게 검은 천을 두른 두 인영은 민첩한 고양이 마냥 경계를 서던 병사들 뒤로 착지하더니 예리한 창과 태도와 같은 긴 샤벨을 쥐고는 심장과 목을 노리듯 급소만을 베거나 꿰뚫으며 그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서걱 – 사각
“컥..”
“끅..”
털썩 – 털썩
건물 주변의 경비병들을 모두 처리한 것을 확인한 둘은 다른 경비병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암습한 병사들을 구석진 곳으로 질질 끌고 와 숨겼고, 침입한 흔적을 정리한 하나가 마치 미리 계획을 한 듯 건물을 두른 근처 석벽 너머로 다가가 작게 부엉이 소리를 내었다.
“후꾸.. 후꾸..”
스슥
그러자, 천진난만한 데브의 손에 잡힌 페르티안과 몰트겐이 놀란 표정과 함께 석벽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 순간 이동이라니..?”
특히나 데브의 순간 이동을 처음 경험하는 몰트겐은 신세계를 본 듯 자기 몸과 손을 매만지며 놀라워 했고, 이전 경험을 한 적이 있는 페르티안은 애써 덤덤한 척하고 있었지만 역시 신기한 건 신기한 것이었다.
“페르티안님, 몰트겐님 여기..”
검은 천을 두른 아티뤼크가 아까 죽인 제국군의 제복을 페르티안과 몰트겐에게 가져와 바치자 몰트겐은 아티뤼크가 가져온 제복 중 하나를 얼른 집어 들며 말했다.
“크흠.. 내가 장교복을 입지. 불만 없겠지, 남.작?”
“하하하.. 무.. 물론이죠, 후작님..”
그렇게 제국군의 장교와 병사로 위장한 페르티안과 몰트겐이 어둠에서 나오자 은청색 머리카락을 검은천으로 다시 갈무리한 키탈파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윙크하며 속삭였다. 마치 못된 장난을 치려는 악동과 같은 귀여운 얼굴로 말이다.
“그럼, 시작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