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3화 (3/254)

이게 나의 운명인 것인가 (3)

내가 원래 이런 걸 보진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 자주 왔고,

양조장 안으로 처음 들어온 것도 아니다.

미성년자였을 때도 술 심부름을 하거나 아버지와 함께 술을 빚는 일도 체험해봤다.

그러니 선천적인 요소는 없다.

그렇다면 의심스러운 것은 단 하나다.

이곳에 도착해서 뭘 먹기도 전에 뻗었다.

내 입을 통해서 들어간 것은 술이 유일했다.

그것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나는 곧장 양조장의 문을 닫고 다시 작은할아버지의 한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뭐에 홀린 것 같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 술병은 안 보였다.

휴지통과 거실을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귀신에 홀린 걸까? 도깨비의 장난일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으나 어린 시절에 나는 이 부근에서 도깨비불을 보았다.

‘그롬, 도깨비는 분명히 있제.’

아버지는 반딧불이라 했지만,

작은할아버지는 항상 내 편이었다.

당시에 내게 해준 말은 아직도 기억난다.

도깨비가 장난을 좋아하긴 해도 사람을 해치는 존재는 아니라고 하셨다.

그게 사실이면 좋겠다.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양조장으로 돌아간 나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재빨리 술을 꺼내 차에 실었다.

깨지지 않게 잘 쌓아야 했는데 트렁크와 뒷좌석에 모두 합쳐서 8박스가 들어갔다.

그런 이후에 곧장 시동부터 걸었다.

하지만 서울로 바로 떠나진 않았다.

떠나기 전에 이장님의 댁부터 가야 했다.

멀리 떨어진 장례식장까지 오셨는데 잘 끝마쳤다고 인사 정도는 드려야 했다.

오풍리의 황석구 이장님은 만능이었다.

마을 곳곳에 그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얼마 전에 방영된 드라마의 홍반장 같달까.

안타깝게도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다.

키는 170 초반 정도 되려나,

체격도 마른 편이나 손재주가 좋았다.

농기계를 다루는 것도 능숙해서 언제나 마을 대소사는 그분의 손을 통해 진행됐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셨으나 이 마을에서는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아저씨, 저 왔어요.”

마을 입구에 있는 초록색 대문.

그곳을 열고 들어가자 이장님이 보였다.

마당에서 농기구를 손보고 계셨는데 평소 바쁘게 돌아다니시는 분이라 출타 중이지 않은 일이 흔하지 않았기에 운이 좋았다.

나를 본 이장님은 반갑게 웃으며 맞아줬다.

“어제 양조장 쪽으로 차가 들어가는 거를 봤는데 언제 오나 했다.”

“멀리 서울에 있는 장례식장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장례는 잘 마치고 봉안당에 계신 할아버지 옆으로 모셨어요.”

“우리 마을에 어르신이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것이 적지 않은데 당연히 가봐야지.”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작은할아버지는 술을 아낌없이 내놨다.

사람들과 모여서 잔치를 즐기는 일을 무척 좋아하시던 분이셨다. 그런 이유 때문에 초반에 적자가 많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이제 와 생각하면 애초에 돈을 크게 벌 생각이 별로 없으셨던 것처럼 느껴졌다.

“조의금을 보내주신 다른 어르신들에게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걱정 마. 내가 전달해드릴게. 이맘때면 밭일이 바빠서 집에 잘 안 계셔. 그분들을 하나씩 찾아뵈려면 며칠은 걸릴 거야.”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 마을에 자주 오기는 했지만,

마을 어르신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나치며 얼굴 한두 번 정도씩 보았던 것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어릴 때의 일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핑크빛 자전거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서연이는 잘 지내요?”

이장님의 딸인 황서연.

그 아이의 안부가 궁금했다.

서연이는 나보다 세 살이 어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오빠라고 불러대며 얼마나 졸졸 쫓아다니던지 귀찮을 정도였다.

이 동네에서 같이 놀 수 있는 연령대가 별로 없었으니 더 그랬던 것 같았다.

“올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해서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지.”

“시간이 참 빠르네요.”

“허허!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도찬이 네가 여기 처음 왔을 때 겨우 요만했던 거 기억도 안 나지?”

이장님은 허리를 숙여 무릎을 가리켰다.

하긴 예전에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보면 서너 살 무렵에 처음으로 이곳에 왔었다.

그리고 이장님은 우리 아버지는 물론이고 삼촌과도 상당히 막역한 사이였다.

술꾼은 술꾼을 알아본달까.

“예전에 우리 서연이가 도찬이 너랑 결혼할 거라고 얼마나 떼를 썼는지 기억해?”

“어휴, 그게 언제적 이야기에요?”

“그때도 그랬지만, 나는 도찬이가 내 사위가 된다면 언제든 환영이야.”

“아마 서연이가 지금 하시는 말을 들었으면 이불킥을 하고 있을 거예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릴 때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서연이를 봤을 때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는데 아는 척도 거의 안 했다.

동네에 돌아다니는 미친개를 본 것처럼 오히려 나를 피해서 도망쳤을 정도였다.

내가 그때 겪었던 일에 대해 말을 하자 이장님은 크게 웃었다.

“사춘기라 부끄러웠나 봐. 혹시 그때 일 때문에 마음 상한 거는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저도 나름 그 나이에 남들 못지않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거든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저야 좋죠!”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였다.

전역 후에 먹은 것이라고는 라면이 전부다.

집밥을 먹은 것은 도대체 언제더라.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모는 안 보이시네요.”

이장님의 아내 되시는 분.

나는 그분을 이모라고 부른다.

남자들이 술독에 빠질 동안 어머니와 이모는 수다 삼매경에 빠지시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마음이 잘 맞으셨는지 자매처럼 친해져서 미국에서도 종종 연락을 주고 받으시는 사이셨다.

“마을의 어르신들 모시고 2박 3일로 온천 여행 갔어. 안 그래도 혼자 밥 먹자니 심심했는데 다행이다.”

이장님은 나를 식탁에 앉힌 뒤.

커다란 통에 담긴 사골국을 끓였다.

역시 장기 외출에 사골은 국룰인 것인가.

그래도 그 맛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모의 손맛은 거의 장금이 수준이라 식당을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았다.

현지에서 자란 제철 재료.

그걸 활용한 음식은 환상적이었다.

짬밥만 먹던 내게는 천상계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근황을 물어가며 식사를 하던 나는 혹시나 싶어서 오늘 본 것에 대해 물어봤다.

“혹시 양조장 부근에서 이상한 것들이 날아다니는 거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 가끔씩 양조장 창고에서 술을 옮길 때 도와드리러 갔었는데 특별한 거는 없었어.”

“흠··· 그런가요?”

“말벌을 본 건가? 그런데 아직 말벌이 집을 지을 시기는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역시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걸까.

정 씨 할아버지도 특별한 말이 없었고 이장님도 내가 본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밥을 두 공기나 먹자 이장님은 커피 믹스를 한 잔 내주셨다.

“잘 먹었습니다. 역시 이모님이 끓여주시는 사골국은 최고인 것 같아요.”

“얼려 놓은 거 있는데 가져갈래?”

“괜찮아요. 삼촌이랑 저는 집에서 밥을 거의 안 먹잖아요.”

“기혁이도 이제 건강 생각을 해야 할 텐데. 너희 삼촌은 아직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니?”

“제가 알기로는 전혀요.”

이장님은 우리 아버지와 동갑이다.

당연히 삼촌보다 이장님이 형님이었다.

한동안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슬쩍 양조장과 땅을 파는 것을 언급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이장님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에는 양조장을 팔 생각이구나.”

“혹시 가능할까요?”

“글쎄, 너도 알다시피 이 동네가 발전도 더디고 교통편도 좋지 않아서 입지가 좋은 편은 아니라 생각보다 어려울 거야.”

이 동네는 땅 거래가 거의 없었다.

양조장에 포함된 땅은 농지도 아니다.

임야가 대부분이라 투자할 가치도 낮았다.

오죽하면 이 동네 어르신들은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곳이 개발될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할 정도라고 하셨다.

“어르신도 몇 년 전부터 계속 정리를 해보려고 했다가 실패하셨거든.”

“그 정도인가요?”

“여기 마을 입구 쪽에 있는 농지도 내놓은 지 5년이 넘어가는데 보러오는 사람조차 없어.”

기대는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막막하긴 했다.

최악의 경우는 양조장은 그냥 폐업하고 한옥과 땅만 팔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알아봐 주시겠어요?”

“알았어. 인근에 있는 부동산에 말해서 만약에 임자가 나타나면 연락해 줄게. 하지만 그리 큰 기대는 마.”

“감사합니다.”

일단은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확실히 단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사이에 빈 종이컵을 내려놓은 나는 시계를 흘깃 바라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장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난 뒤.

곧장 서울로 출발했으나 차가 꽤 막혔다.

강남에 있는 삼촌의 바에 도착하니 어느덧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건물에 주차를 마치고 술이 담긴 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1층으로 올라가니 잠시 멈췄는데 반가운 이와 마주쳤다.

“오! 주도찬, 너 어제가 전역이었다며?”

루프톱 바 ‘어반 스카이’

그곳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유나 누나였다.

본명은 고윤아고 나보다 세 살이 많으나 내게 있어서는 바텐더의 기본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스승님이기도 했다.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이지만,

칵테일 분야에서는 이름난 실력자다.

세계 바텐더 대회 중의 하나인 WCB에서 무려 TOP 5까지 올랐고 삼촌이 누나를 데려오려고 들인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 효과는 상당했다.

누나 덕분에 매출이 엄청 올랐다.

칵테일 만드는 솜씨는 기본이고 외모도 출중해서 어지간한 연예인 뺨칠 수준이었다.

연예계 방면에서 일하고 있는 손님이 오면 어김없이 명함을 주고 갈 정도였다.

더구나 친화력 또한 갑이었다.

남녀노소 안 가리고 금방 친구가 되는 매력 덕분에 단골 손님도 상당히 많아졌다.

그렇게 삼촌의 루프톱 바는 제법 잘나가는 술꾼들의 성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흐흐, 이제 저는 자유랍니다.”

“복학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일할 거지?”

“아직 못 정했어요.”

“가을쯤에 세계 대회에 나갈 예정이라 손이 부족할 텐데 삼촌이 아무런 말도 안 해줬어?”

“전혀요.”

유나 누나는 이상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루프톱 바가 있는 8층에 도달했다. 묵직한 무게의 박스를 들자 누나는 가게 문부터 열어주었다.

“이게 다는 아니지?”

“차에 6박스 더 있어요.”

“안 그래도 찾는 사람이 제법 많았는데 잘됐네. 손님들은 귀신 같이 없는 것만 찾더라.”

“벽향주는 대부분 여기서 판매되는데 차라리 양조장 창고에 있는 것들을 한 번에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매번 몇 박스씩 옮길 수도 없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효율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택배를 이용해서 보냈으나 지금은 그걸 해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직접 가져오자니 오가며 뿌리는 기름값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았다.

“공간의 여유가 없어서 한 번에 다 받기 어려우니 그렇지. 그렇다고 창고를 알아볼 정도의 양도 아니잖아.”

하긴 조금 애매하긴 했다.

1.5톤 트럭 한 대 가득되려나.

애초에 벽향주는 양조장의 주력 상품도 아니었다.

작은할아버지의 양조장은 막걸리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렇기는 하죠.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양조장은 좋은 임자가 나타나면 팔려고요.”

그 이야기를 듣자 누나는 씁쓸해했다.

누나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양조장의 술을 베이스로 여러 칵테일을 개발하는데 누나가 들인 시간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그 레시피를 가지고 칵테일 대회의 창작 부문에서 수상까지 했으니 애정이 남달랐다.

“양조장을 사겠다는 사람은 있어?”

“아직요. 안 그래도 이장님이랑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당장은 어려울 거 같아요.”

“벽향주를 더는 마실 수 없다니 아쉽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고개를 뒤로 돌리자 삼촌이 보였다.

평소에는 가게를 오픈할 무렵에 잘 나오지 않으시는 분이라 조금 의아했다.

보통 이 시간대에는 강북에 있는 바의 지배인님과 저녁을 먹고 계실 분이었다.

삼촌은 내가 들고 온 벽향주가 담긴 박스를 흘깃 바라본 뒤에 내게 제안을 했다.

“복학하기 전까지 경험도 쌓을 겸 양조장을 잠시 운영해보는 것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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