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4화 (4/254)

이게 나의 운명인 것인가 (4)

조금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어린 시절에 술을 빚어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체험에 불과했다.

진지하게 그곳에서 뭔가를 배운 적도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삼촌의 말도 안 되는 농담인 줄 알았다.

“에이, 제가 양조장을 어떻게 운영해요.”

“어차피 지방무형문화재 보유자이신 정 씨 할아버지가 남아 계시잖아. 너는 옆에서 힘쓰는 일만 도와드리면 돼.”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전역한 조카한테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망하면 도찬이한테 무슨 원망을 들으시려고요.”

유나 누나는 삼촌을 만류했다.

술을 빚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다.

단숨에 맛있는 술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막걸리와 달리 벽향주는 정성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비로소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이 진한 청주가 된다.

하지만 삼촌도 물러서지 않았다.

“망해도 돼. 네가 빚는 술은 전부 다 사들여줄 테니 너는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해.”

돈은 걱정하지 말란 뜻이다.

이러려고 날 양조장에 보냈던 걸까.

삼촌의 의중이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입대가 애매하게 밀린 탓에 복학까지 시간이 남긴 했다.

대학생이 입대하기 바라는 날은 비슷했다.

전역 후에 복학하기 위해 가장 좋은 시기에 몰렸고 애석하게도 나는 입대 시기를 놓쳤다.

덕분에 4개월이란 시간이 비었다.

더구나 내 전공이 경영이니 돈 안 들이고 실전을 경험해볼 기회이긴 했다.

“진짜 다 사들여주시는 건가요?”

“기존의 수준을 어느 정도 유지해준다는 조건은 있지. 그리고 거기서 막걸리는 제외야.”

“막걸리는 왜요?”

“내가 팔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하긴 삼촌의 바에서 막걸리는 안 판다.

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유통기한이 짧아서 관리가 어렵다.

수출용이 아닌 보통의 생막걸리 유통기한은 2주에서 한 달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수출용처럼 만들 수도 없다.

초산균을 제어할 멸균시설 같은 것이 오저당 같이 작은 양조장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병을 완전히 틀어막으면 발효되며 병이 터지는 일이 생기니 어지간한 시설로는 엄두도 못 낸다고 알고 있었다.

“제가 양조장에 틀어박혀서 미친 듯이 벽향주를 만들면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술 빚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아?”

“그래서 그럴 경우에는 어쩌시려고요.”

“숙성시켜서 나중에 팔면 되지. 그리고 내게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이 있잖아. 어차피 내 것이라 생각지도 않았던 거야.”

제길! 부러우면 지는 건데···.

그래도 삼촌의 말은 진심 같았다.

작은할아버지에게 그런 돈이 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살아생전 허투루 쓰지 않던 분이다.

오히려 너무 궁핍하게 사셔서 삼촌과 아버지가 들릴 때마다 용돈도 두둑하게 챙겨주시고 병원비까지 내주셨을 정도였다.

“당장 안 팔려도 상관없어. 3년에서 5년 정도 숙성해서 팔아도 되잖아. 요즘 숙성한 증류 소주와 전통주의 인기가 제법 좋아.”

그 이야기를 들으니 이해가 되었다.

소주하면 초록색 병이 떠오를 것이다.

희석식 소주는 시장의 99%를 차지한다.

그러나 요즘은 위스키처럼 조금 더 좋은 소주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술은 유통기한이 없다.

오래 묵힐수록 비싸지는 게 술이다.

증류식 소주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희석식 소주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주정(酒精)에 물과 인공감미료를 섞어 만드는 일반 희석식 소주와 달리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훨씬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다.

전통주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누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몇 년 전에 18년 숙성한 소주가 시중에 나오면서 엄청 인기를 끌기는 했죠.”

우연의 산물이었다.

IMF 때문에 업체 하나가 도산했고,

18년 가까이 재고 상태로 남아 있었다.

줄곧 악성 재고 취급을 받던 술인데 완전히 환골탈태한 것이다. 그마저도 수량이 한정적이라 이제는 없어서 못 사는 제품이다.

가치도 생각 이상으로 올라갔다.

1996년에 원래 판매하던 금액이 650원 정도였는데 100배 가까이 높아졌다.

하지만 단순하게 계산하기 어려웠다.

분명 그 시간 동안 숙성하며 날아간 비율도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거 시중에서는 품귀 현상 때문에 20만 원이 넘는 가격으로 판매되기도 했어.”

“정말 20년씩 묵히시려고요?”

“그럴 리가 있냐. 그때쯤이면 나도 환갑이다.”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유나 누나는 몸서리쳤다.

아마도 시간이 흘러 마흔이 넘은 자신의 모습을 잠깐 떠올린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곧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전역하면 미국에 가서 부모님 뵙고 오기로 하지 않았어?”

“두 달 전에 면회 오셔서 안 가도 돼요. 그리고 지금 가봤자 두 분 모두 바빠요.”

“형은 그렇다고 쳐도 형수님은 왜?”

“얼마 전에 최고 디자인 책임자(CDO)로 승진하면서 일이 많아진 것 같아요.”

아버지는 대학교에 계시지만,

어머니는 디자인 쪽에서 꽤 잘 나갔다.

우리 집의 경제적인 주도권은 아버지보다 어머니 쪽의 입김이 훨씬 강한 편이었다.

연봉 자체가 차원이 다르니 당연했다.

어쩌면 그 덕분에 아버지는 생계 걱정 없이 학계에 남아계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냥 여기서 일하면 안 될까요?”

“네가 일할 자리는 없어.”

“누나가 대회 준비를 해야 한다던데요.”

“이미 사람 구해놨어. 조만간 이쪽으로 출근할 거야.”

이건 완전 철벽이잖아.

삼촌답지 않게 틈이 안 보였다.

“영업시간이 다 됐네. 이 이야기는 영업 끝내고 진지하게 다시 해보자고.”

시계를 보니 이제 곧 퇴근 시간이었다.

손님들이 몰려올 시간이라 카트를 끌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나머지 술을 가져왔다.

그러는 사이에 주방의 이모님과 홀을 담당하며 서빙을 보는 지철이 형도 출근했다.

다른 사람보다 출근 시간이 빠른 두 분인데 아마 장을 보러 다녀오신 것 같았다.

“어제 전역했다며 축하한다.”

“고마워요, 형.”

“이따가 영업 끝나면 찐하게 한잔하자.”

“물론이죠.”

유나 누나가 나의 스승님이라면,

지철이 형은 친형 같은 그런 존재였다.

이곳 루프톱 바에서 일한 것도 수년째인데 사실상 지배인급이라도 봐도 될 정도였다.

삼촌이 하는 역할이라고는 별거 없다.

단골손님과 돈을 관리하는 게 전부였다.

대부분의 일은 형이 처리하고 있었다.

지철이 형은 금세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왔고 곧 바의 문을 열며 외쳤다.

“자자! 영업 시작합니다.”

가게를 오픈하자마자,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는 한정적이고 그만큼 경쟁률이 꽤 높았다.

이곳은 예약도 받아주지 않았다.

다만, 예외인 이들이 있었다.

루프톱 바의 한쪽 편에 마련된 공간.

일명 프라이빗 룸이라 불리는 그곳은 선택받은 일부를 위한 곳이었다.

다른 일반 테이블과는 완전히 분리된 터라 조용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감독부터 시작해서 배우와 가수 같은 이들이 자주 찾았다.

영업이 시작되자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지철이 형은 주문을 받기 시작했고 유나 누나도 칵테일을 만들 준비를 했다.

삼촌마저도 일을 돕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 배짱이 모드를 유지하던 분이 나서는 이유는 오늘이 목요일이기 때문이었다.

목요일과 금요일.

이곳의 매출은 대부분 그때 나온다.

다른 날들도 손님이 제법 있으나 거의 1.5배에서 2배가량 차이가 있을 정도였다.

“주도찬, 너도 와서 도와.”

“일당 주시나요?”

“누가 들으면 공짜로 일 부려먹는 악덕 업주인 줄 알겠다. 눈치껏 오가며 유나랑 지철이 도와줘.”

서빙과 바텐더의 보조.

두 가지 모두 하라는 의미였다.

삼척에서 방금 올라와서 피곤했지만,

집에 간다고 딱히 할 일이 있지도 않았다.

더구나 조금 전에 형이랑 뒤풀이 약속도 해놓았기에 다시 나오는 것도 귀찮았다.

주변을 한 번 살펴본 뒤.

나는 유나 누나를 돕기로 했다.

영업 시작과 함께 손님이 네 테이블이나 동시에 들어와서 주문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손을 닦고 들어서자 누나는 벌써 코블러 셰이커(Cobbler Shaker)를 흔들고 있었다.

“뭐 만들고 계신 거예요?”

“우리 바의 시그니처 메뉴.”

“글래시어(Glacier)는 요즘도 잘 나가요?”

“물론이지. 저렇게 대놓고 광고를 하는데 안 나가는 게 이상한 거 아냐?”

누나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배너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세계 바텐더 대회에서 수상한 칵테일이라는 광고였다.

빙하주라고도 불리는 글래시어는 누나가 창작하고 우리 가게에서 미는 메뉴다.

청량한 느낌이 드는 연한 푸른색.

거기에 살얼음과 박하가루를 얹어서 주기에 여름철에 꽤 많이 팔리는 칵테일이다.

애초에 벽향주라는 이름 자체가 술의 색이 푸르고 향기롭다는 의미다. 하지만 원래 그런 색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맑다는 조상들의 비유였다.

칵테일에는 당연히 리큐르가 섞었다.

얼핏 보면 블루 라군이란 칵테일과 비슷한 느낌이나 맛은 그와 비교할 수 없었다.

대회에서 새롭게 창작한 칵테일로 수상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새롭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벽향주를 더는 구할 수 없게 되면 삼촌으로서는 큰일이긴 하지.’

빙하주에서 벽향주가 빠질 수 없다.

베이스를 바꾸면 완전히 다른 술이 된다.

지금은 어떻게든 더 많이 구해서 놔둬야 당분간 판매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삼촌도 작은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잔 더 만들어야 하는데 네가 해볼래?”

“아니요.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누나처럼 만들지 못하잖아요.”

“그래도 네가 만든 게 가장 비슷해. 그러니 사장님도 너한테 바를 맡기는 거야.”

“저는 얼음이나 준비할게요.”

그때부터는 정신없이 움직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손님이 왔다.

비어있는 테이블은 하나도 없었고 입구에는 자리가 비길 기다리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 덕분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자정이 되어서 영업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와··· 손님이 더 늘어난 것 같아요.”

진심으로 토나올뻔 했다.

총칼을 휘둘러야만 전쟁이 아니다.

생활 전선도 그 못지않게 치열했다.

군대에서 훈련하던 때보다 오히려 더 빡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도 있었다.

난동부리는 주정뱅이는 없었다.

그런 일은 생각보다 드물지 않았다.

예전에 일할 때는 매주 한두 명 정도는 언성을 높이거나 만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인간들이 있었다.

“요즘에는 다른 날도 손님이 상당해.”

누나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따라 칵테일 주문량이 많기는 했다.

하이볼이나 스트레이트는 내가 처리할 수 있으나 칵테일은 오로지 누나의 몫이다.

바쁠 때는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는 주문이 들어오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맞아. 오늘도 도찬이가 도와줘서 망정이지. 엄청 딜레이 생길 뻔했어.”

“홀도 일하던 알바가 그만둬서 죽는 줄 알았어.”

“사장님! 이쯤 되면 홀에도 빨리 사람 뽑아서 붙여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유나 누나는 나를 흘깃 본 뒤.

삼촌을 향해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런데 왜 바가 아니라 멀리 양조장으로 보내려는 거냐는 의문이었다.

“오늘 사용한 벽향주가 몇 병인지 헤아려보긴 했어? 얘가 안 만들면 우리 가게 매출이 얼마나 깎일지 바로 계산 나올 텐데.”

오늘 벽향주를 몇 병 썼더라.

대충 계산을 해보니 내가 가져온 벽향주는 열흘 정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많은 양을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창고에 미리 만들어 놓은 재고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술을 빚지 않으면 앞으로 두어 달 후부터 빙하주 판매는 불가능해진다.

유나 누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모르진 않기에 삼촌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쯤 되자 삼촌은 다시 나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시간을 더 줄까?”

솔직히 조금 고민되긴 했다.

500ml 벽향주의 가격은 만오천 원이다.

물론, 그게 내 주머니에 다 들어오진 않는다.

도매가는 그보다 작고 거기다가 세금과 술을 만들 재료비와 정씨 할아버지의 인건비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판매되는 양도 있었고 만드는 족족 사주겠다고 삼촌이 약속을 해주었다.

적어도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러니 까짓거 해보지 뭐!

“아니요. 한 번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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