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5화 (5/254)

처음이지만, 그래도 괜찮아 (1)

양조장을 맡겠다고 했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삼촌의 고물차였다.

외딴 시골에서 차 없이 살긴 어려웠다.

뭐 하나 사려고 해도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차를 뽑을 돈이 있지도 않았다.

당분간 그 차는 내가 쓰기로 했다.

당연히 보험비나 자동차세는 삼촌이 부담하고 유류비만 내가 내는 조건이었다.

그 외에 투자비도 어느 정도 받아냈다.

술을 빚으려면 당연히 재료가 필요하다.

내 통장에 있는 돈으로는 감당할 수준이 아니기에 삼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게 삼천만 원을 받아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협상된 결과다.

어떻게든 그걸 마중물 삼아서 성과를 내야만 했는데 망해도 갚지 않기로 정해졌다.

삼촌이 떠밀어서 가는 거라 가능한 조건이었다.

전체적인 뉘앙스로 봤을 때.

삼촌은 망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양조장에 오랜 경력과 기술을 가진 정 씨 할아버지가 여전히 계신 덕분이었다.

내가 승낙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곧장 양조장으로 가진 않았다.

이제 막 전역한 나를 곧장 시골로 귀양 가라고 할 정도로 삼촌이 못돼진 않다.

한동안 어반 스카이에 매일 출근(?)하며 술독에 빠져서 살았고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삼촌의 차를 타고 강원도로 향했다.

하지만 목적지는 삼척이 아니었다.

그곳에 가기 전에 먼저 들릴 곳이 있었다.

새벽에 출발해서 내가 향한 곳은 철원이다.

그것도 복무하던 부대 앞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짐을 나눠질 인간이 필요했다.

위병소 근처에 차를 세우자.

마침 우리 중대의 후임이 근무 중이었다.

신병이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상병이 된 녀석이었다. 위병소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곧바로 경계의 눈빛이 느껴졌다.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걸어오던 녀석은 내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엇! 주 병장님 아니십니까?”

“고생이 많다.”

“재입대라도 하시려고 돌아오신 겁니까?”

“이게 미쳤나. 민간인한테 먼지나도록 처맞아봐야 정신 차리지?”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군 생활 내내 폭력을 휘두른 적은 없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폭언이지 않은가.

어제도 전산 실수가 생겼다며 헌병이 신병 교육대로 끌고 가는 꿈을 꿨다.

진짜 기분이 엿 같더라.

“하하. 농담입니다. 그런데 진짜 왜 오신 겁니까?”

“오늘 유수호 그 자식 전역이잖아.”

“아! 동기 사랑이 나라 사랑이라더니, 그래서 오신 거군요.”

“벌써 나간 거는 아니지?”

“아직입니다.”

하긴 벌써 나갔으면 탈영이다.

지금쯤이면 보고하고 있을 것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간부들이 탄 차가 한두 대씩 지나갔는데 최대한 피했다.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아저씨들이랑 말 섞어서 기분을 잡치기 싫었다.

간부라고 다 개새끼는 아니다.

하지만 인성 노답인 놈이 꼭 하나씩 있다.

가능하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잊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유별난 것일지도 모른다.

하이스쿨까지 미국에서 공부했던 내게는 군대 내부의 문화는 이해 불가 그 자체였다.

밑도 끝도 없는 상명하복은 불합리했고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비이성적인 똥 군기는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었다.

위병소를 등지고 한참 서 있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오늘 자로 전역하는 이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그리 많진 않았다.

몇 명의 전역자가 지나간 뒤.

거의 마지막 무렵에 유수호가 나왔다.

후임들이랑 잠시 인사를 나누던 녀석은 내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후다닥 뛰어왔다.

그 방정맞은 모습은 거대한 레트리버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야야! 설마 나 마중 나온 거냐?”

“아니, 납치하러 온 건데.”

“납치든 뭐든 상관없어. 그런데 이 차는 뭐야? 나가자마자 중고차부터 뽑았어?”

“내 취항이 이런 구닥다리인 줄 알아? 삼촌이 타던 차인데 내가 잠시 쓰기로 했어.”

삼촌의 차는 6년 전의 모델이다.

요즘 판매되는 차와 비교하긴 어렵다.

연비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고 대부분의 차에 기본적으로 달려있는 편의 사항도 없다.

그냥 공짜니까 타고 다니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수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런 차라도 좋으니 나한테도 너희 삼촌 같은 분이 있으면 좋겠다. 심지어 비싼 양주도 자주 사주시잖아.”

“그거 공짜 아니야. 삼촌이 어떤 사람인데. 여기 더 서 있으면 PTSD 올 거 같으니 가자.”

“어디 가려고?”

“배고파. 밥부터 먹자.”

새벽부터 운전해서 철원까지 왔다.

원래는 이 부근에서 아침을 먹으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른 시간부터 차가 막힐 줄은 몰랐다. 다행히 배고픈 것은 수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하긴 전역하는데 짬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일단은 차를 몰고 서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꽤 유명한 국밥집이 있었다.

이 동네 부근은 군인들 상대로 배짱 장사를 하는 이들이 많다. 가격은 비싸고 맛은 더럽게 없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국밥집은 맛집 인정이다.

전국에서 오는 손님이 그 증거였다.

아침부터 가게 앞은 여러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쇼핑백부터 녀석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옷가지가 있었다.

수호 녀석이 나보다 덩치가 컸지만,

그래도 삼촌과 체형이 비슷한 편이었다.

이 부근에서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하다니! 역시 센스 좋아.”

수호는 곧장 옷부터 챙겼다.

녀석이 갈아입는 사이에 나는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미리 주문을 했다.

아침에 파는 메뉴는 한정적이라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잠시 후에 녀석이 돌아왔는데 누가 봐도 군인처럼 보였다.

아직 짬밥 냄새가 면상에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옷을 갈아입어도 군바리티가 나는 걸 보면 너는 군대에 말뚝 박아야 했어.”

“밥상머리 뒤집는 수가 있다.”

“국밥이랑 모둠 수육도 주문했어.”

“오케이! 그걸로 용서해주지.”

먹는 거에는 언제나 진심인 녀석이었다.

원래부터 이 녀석이 덩치가 좋지는 않았다.

처음에 봤을 때는 깡말라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군대에서 체질이 바뀐 유형이었다.

이제는 근육 돼지를 꿈꾸는 건지 헬창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진짜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여기서 밥 먹고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정말 납치하러 온 거냐? 나 멸치 잡으러 배 타러 가는 거야? 아니면 염전 노예인가.”

“나 못 믿냐?”

조금은 뜨금 했다.

노예를 찾으러 온 게 맞긴 했다.

염전은 아니지만, 양조장 노예랄까.

너는 곧 나와 함께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벗 삼아 벽향주를 빚어야 하는 운명이야.

하지만 그걸 지금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지금 들으면 식욕이 싹 사라질걸.

녀석도 눈치를 챈 건지 일단 수저부터 들고 수육과 국밥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군인답게 밥도 전투적으로 먹었다.

그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아직 여유롭게 밥 먹는 게 익숙하진 않았다.

그 덕분에 식사 시간이 길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뒤.

차에 올라타서 시동부터 걸었다.

그러자 수호는 한껏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지며 어딜 가려는 건지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디 가려고?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려고 온 거는 아니잖아.”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가능하면 멀리 간 뒤에 이야기하려 했다.

아무런 말이 없자 수호는 내비게이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왜 삼척이 찍혀 있는 거야?”

“곰 같은 게 눈치는 겁나 빨라. 전우가 위기에 처했다. 주 병장을 구해줘.”

“그걸 꼭 전역하는 날에 해야 되니?”

나도 집에 보내주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나부터 살고 보자.

도저히 혼자 헤쳐나갈 길이 안 보이거든.

하지만 너랑 함께하면 가능할 것 같아.

망할 때 망하더라도 심심하진 않겠지.

그러니 죽어도 같이 죽자.

일명 물귀신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희망찬 미래를 제시해야 할 때다.

그때부터 나는 삼촌이 내게 제안한 것을 그대로 수호에게도 공유를 해주었다.

한참 듣고만 있던 녀석은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복학하기 전까지 양조장을 운영하게 되었다는 말이지?”

“너도 벽향주를 만든 양조장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렇기는 하지.”

분명 수호가 그런 말을 하긴 했다.

과거에 삼촌의 바에서 벽향주와 빙하주를 마시고 완전히 빠진 녀석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유나 누나에게 빠졌던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죽하면 휴가 내내 저녁마다 가게를 찾아갔을 정도다.

나는 그 부분을 슬쩍 건드렸다.

“벽향주가 사라지면 누나가 만드는 글래시어 칵테일은 더는 맛볼 수 없어.”

“말도 안 돼! 그걸 개발하려고 누나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가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들은 게 있으니 그렇지.”

앓는 소리는 거의 하지 않지만,

종종 누나는 세계 바텐더 대회인 WCB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줄 때가 있었다.

수상하기까지 과정을 들어보면 상당히 스팩타클하고 우여곡절도 꽤 많았다.

베이스가 대중적이지 않은 한국의 전통주였기에 감점 요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아이디어와 맛으로 승부를 봐서 성과를 낸 것이다. 누나에게 그날의 수상은 일종의 훈장이었다.

“글래시어 칵테일이 사라지면 누나가 삼촌 가게에서 일할 이유가 더는 없어.”

“그렇기는 하지.”

“며칠 전에 이야기 들어보니 뉴욕에 있는 바에서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가 들어왔다더라.”

9할의 진실과 1할의 거짓이다.

실제로 그런 제의가 들어오기는 했다.

며칠 전에 삼촌이 없는 술자리에서 누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자리를 거절했다고 한다.

조건이 맞지 않아서였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수호는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뉴욕? 진짜로 거길 가신다고?”

“아직 정해진 것은 없어. 하지만 벽향주가 사라지면 그럴 가능성은 더 커지겠지.”

“뭐하냐, 어서 출발해.”

사랑의 힘이 이렇게 위대하다.

조금 전까지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 눈깔을 하고 있던 놈이 왜 출발하지 않고 뭉그적거리냐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단순함은 나의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일하면 얼마나 줄거냐?”

“나 못 믿냐. 설마 열정 페이를 강요할 것 같아?”

“적어도 최저 임금 이상은 챙겨줘야 해. 너도 내 사정 알고 있잖아.”

“물론이지. 그건 걱정하지 마.”

아직 세세하게 따져보진 않았지만,

알바하는 것보다는 더 챙겨줘야 한다.

생활비만 벌어서 쓰면 되는 나와 달리 수호는 학비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형과 여동생까지 합치면 녀석의 집은 대학생만 세 명이나 된다.

부모님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호는 학비를 해결해야 하기에 입대 전에 알바를 몇 개나 뛰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불평을 한 적이 없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삼 남매가 모두 같은 상황이다.

심지어 녀석의 형은 명문대에 다니며 장학금까지 받고 내년 봄에 졸업한다.

은근히 형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는 터라 수호도 앓는 소리는 안 했다.

그렇게 삼척을 향해 한참 달려서 마을 부근에 접어들자 수호는 혀를 내둘렀다.

“여기도 철원 못지않게 엄청 깡촌이네.”

“그래서 삼촌에게 차를 받아낸 거잖아.”

“하긴 이거 없으면 힘들긴 하겠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일하면 서울에 갈 일은 아예 없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

서울에 가야 할 일이 있기는 했다.

가게가 가장 바쁜 목요일과 금요일은 당분간 내가 도와줘야 할 상황이다.

양조장에 올인하자니 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알바를 병행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겸사겸사 벽향주도 배송해야 했다.

서울까지 보낼 용달을 부르자니 금액이 상당했고 택배로 보내자니 불안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당분간은 주말이 아니라 평일에 이틀 쉰다고 하자 오히려 수호는 무척 반기는 표정을 지었다.

“서울 갈 때 나도 같이 가도 돼?”

“안 될 이유는 없지.”

“그렇게 일하면 너는 언제 쉬려고?”

“새로 구한 직원이 출근하기 전까지만 일하는 거라 길어봐야 몇 주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오풍리로 들어서는 다리를 넘었다.

양조장 부근에 접어든 나는 작은 할아버지가 물려준 땅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쪽 하천부터 산기슭까지가 양조장과 함께 물려받은 땅이야.”

그때부터 수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을 풍경과 수목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하더니 양조장 앞에서 차가 멈추자 생각지도 못한 조건 하나를 내걸었다.

“여기서 일할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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