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지만, 그래도 괜찮아 (2)
처음에는 조금 오해했다.
삼시 세끼 고기반찬을 원하는 줄 알았다.
그것도 조건 중의 하나였으나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조경을 전공하는 녀석답게 양조장에 정원을 만들고 싶어 했다.
생긴 거는 곰처럼 바뀌고 있었지만,
꽃과 나무 그리고 흙이 좋아서 조경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말하던 녀석이다.
언젠가 나한테도 비어있는 땅이 있다면 직접 뭔가 꾸며보고 싶다고도 했었지.
내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딱히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거면 돼? 안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결정해도 후회 않겠어?”
“상관없어. 대신 내가 원하는 대로 꾸며도 된다는 약속만 해줘.”
“돈이 많이 들어갈 텐데.”
오히려 그게 걱정이었다.
힘들게 돈을 벌어서 거기에 다 써버리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조경하는 비용은 상당히 비싸다고 했다.
저렴한 조경수는 몇천 원 단위부터 시작하나 비싼 것은 부르는 게 값이다.
“내가 미쳤냐. 저렴한 모종을 사 와서 심는 수준에 불과할 거야.”
“뭐, 그건 네가 알아서 해.”
“그런데 우리는 앞으로 어디서 자?”
“옆에 있는 한옥이 작은할아버지 집이야. 거기에 네가 쓸 방도 있어.”
나는 일단 집부터 보여줬다.
그곳을 확인한 수호는 꽤 만족했다.
침대는 없었으나 생각보다 깔끔했고 무엇보다 혼자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환호했다.
“드디어 내 방이 생기는 건가.”
“아··· 맞다. 너 어릴 때부터 형이랑 같이 방을 썼다고 했지?”
“입대하기 전까지 계속 그랬지. 아주 지긋지긋했는데 잘됐네.”
“형이랑 사이좋지 않았나?”
수호네 집은 우애가 상당했다.
부모님이 바쁘실 때는 수호네 형이랑 동생이 같이 면회를 와줄 정도였다.
훈련하는 기간이 아니면 적어도 두달에 한번 이상은 가족이 찾아왔다.
그 덕분에 나도 꽤 얻어 먹었지.
“아무리 친해도 맨날 붙어있으면 안 싸울 수 없지. 그리고 너도 우리 형이 잔소리 심한 거 직접 봤잖아.”
“잔소리가 아니라 걱정해주는 거지.”
“어쨌든 지금까지는 대만족이야.”
“그러면 이제 양조장에 가보자.”
집 구경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디서 살든 군대보단 양호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우리는 양조장으로 향했다. 이곳에 온 김에 다시 서울로 갈 때 차에 벽향주를 싣고 가야 했다.
지난번에 많이 싣지 않을 탓에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양조장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니 전에 봤던 것들이 여전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수호를 바라봤다.
녀석에게도 저것들이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코앞까지 날아와서 주변을 맴도는 그것들이 전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한 가지 확실해졌다.
양조장에 있는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수호의 어깨며 머리에 앉아도 반응이 없었다.
한동안 미동도 없이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 수호는 이상한 눈빛을 보내왔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나는 그런 녀석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걸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게 최선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
수호의 합류가 결정된 후.
우리는 이틀 뒤에 다시 돌아왔다.
반년 가까이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
적어도 갈아입을 옷이랑 노트북 같은 기본적인 것은 챙겨서 와야 했다.
오는 길에는 대형 마트도 들렸다.
냉장고가 텅 비어서 채워놔야 했다.
오풍리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를 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한다.
마을에 ‘초가 슈퍼’라 불리는 곳이 있기는 했으나 물건의 양이 많지는 않았다.
술과 담배 그리고 과자 같은 간단한 것들만 구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시골 가게가 다 그렇지 뭐.
그런데 너무 많이 사 온 건가.
차에서 장을 봐온 것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누가 보면 피난 가는 사람들처럼 보일 것 같았다.
“겨우 둘이서 먹을 건데 어떻게 마트에서 20만 원이나 쓰냐.”
“언제는 맘껏 고르라며.”
“이 정도로 나올 줄은 몰랐지.”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절반은 쌀이랑 고기 그리고 양념이 차지하잖아. 다음에는 이 정도는 아닐 거야.”
아니, 조금 두려워.
네가 적당히 먹는 편은 아니잖아.
어째 인건비보다 식비가 더 많이 나올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 정도다.
하지만 수호만 탓할 수 없었다.
전역 후에 식욕이 폭발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피자나 치킨은 배달 안 되겠지?”
“당연하지.”
“공기 좋고 한적한 것은 좋은데 그것 하나는 조금 아쉽네.”
그게 아쉽다는 표정이냐?
거의 절망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치킨집도 거의 30분 가까이 떨어져 있다.
왕복 1시간 거리를 배달해줄 가게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장님과 이모님이 계시지 않는가.
저번에 왔을 때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식사는 종종 거기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매일 신세 질 생각은 없었다.
나한테도 염치라는 게 있다.
당연히 완전한 공짜는 아니었다.
이장님은 작은할아버지가 계셨던 때처럼 마을 행사에 참여하길 바랐다.
한마디로 잔치가 열리면 막걸리 등을 저렴한 비용으로 지원해달라는 의미였다.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작은 지역 사회에서 문제없이 살려면 그 정도의 성의는 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풍리에 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라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걸로 정리 끝!”
장을 봐온 것을 냉장고에 넣은 뒤.
우리는 곧장 밖으로 나와서 씻었다.
계곡 부근이라 다른 지역에 비해서 온도는 낮으나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덧 한낮이 되면 저절로 땀이 흐를 정도였다.
“푸하핫, 차가워!”
“시끄러우니 좀 닥쳐.”
“너무 차가운 걸 어떻게 하라고. 불알이 쪼그라드는 기분이라고!”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끼얹자.
수호는 호들갑을 떨며 발버둥 쳤다.
하긴 등목을 하기에는 얼음장 같았다.
그렇게 번갈아 가며 씻고 있자 트럭 한 대가 천천히 양조장 앞으로 다가왔다.
“주문한 거 왔나 보다.”
수호는 내게 수건을 던진 뒤.
트럭을 향해 서둘러서 걸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트럭은 양조장 앞에 멈춘 뒤에 머리숱이 별로 없는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내렸다.
트럭 위에는 포대가 가득했다.
오늘부터 양조장에서 빚을 술을 위해 주문한 멥쌀과 밀가루 등의 재료였다.
오저당에서 십여 년 가까이 거래하던 기존의 거래처가 있는데 힘들여서 새롭게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그쪽이 전화줬던 주도찬··· 사장님?”
호칭이 조금 애매했던 걸까.
기사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며 대답하자 그 아저씨는 자신의 명함부터 꺼내서 내게 주었다.
“10년째 오저당에 주정 재료를 공급하고 벽향주와 막걸리의 도매를 맡고 있는 태백 물산의 심재필이라고 해요.”
“사장님이시네요?”
“오저당이 다시 문을 연다고 하니 안 올 수가 있어야죠. 그러고 보니 우리 초면은 아니네요.”
내가 이 아저씨를 언제 봤더라.
잠시 얼굴을 뜯고 보고 있자 심재필 사장은 웃으며 장례식장을 언급했다.
그제야 살포시 기억났다.
“아! 그때 뵈었군요.”
“회사 직원들이랑 갔는데 잠깐 있어서 아마 기억 안 나실 거예요.”
“편하게 말 놓으셔도 돼요.”
“에이, 그러면 안 되죠. 엄연히 우리 태백 물산의 고객님인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몇 마디 말을 섞진 않았지만,
상당히 호감이 가는 분이었다.
넉살도 좋으셨고 선을 넘지도 않았다.
작은할아버지가 왜 이분에게 도매까지 맡긴 건지 알 것 같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했다.
태백물산이 큰 회사는 아니라 강원도 일부 지역만 술을 공급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고성부터 삼척까지 동해안 지역과 태백 인근까지였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벽향주가 전국구 단위의 유명한 술이라 말하기에는 조금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에도 오저당의 대부분의 매출은 강원도 내에서 발생했다고 알고 있다.
“일단 옮기자.”
수호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벌써 트럭의 옆면을 내리고 있었다.
그 위에 쌓인 포대만 수십 개가 넘었다.
창고에 재료가 약간 남아서 이 정도지 보통은 이것보다 더 많다고 했다.
심지어 무게도 상당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지게차가 있지도 않았다.
다행히 롤러가 달린 레일 같은 게 있어서 트럭에서 포대를 올리면 아래로 밀려갔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피똥 쌀 뻔 했다.
창고에 마지막 포대를 쌓자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재료로 채워진 창고를 보니 든든했다.
“예전에는 어르신들만 계셨을 텐데 이걸 어떻게 옮기셨데요?”
“제가 옮겨드렸죠.”
“사장님 혼자서요?”
수호는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녀석도 힘이 좋은 편이었으나 상상만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포대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양이 많을 때는 직원도 같이 오죠.”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우리 젊은 사장님들이 만드는 막걸리는 언제쯤 나오려나요?”
심재필 사장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듣기로는 태백 물산을 통해서 유통되는 막걸리의 양이 제법 되었다.
하지만 사장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분간은 벽향주에 집중하려고요. 막걸리까지는 아직 무리에요.”
“안타깝네요. 요즘 오저당 막걸리 왜 안나오냐고 문의 전화가 상당했거든요.”
“그 정도인가요?”
“오저당 막걸리가 제법 많이 나갔죠. 소매점 뚫느라 저희가 꽤 노력했거든요.”
조금 아깝기는 했다.
이미 만들어 놓은 판매 루트다.
하지만 당장 거기까지 손대긴 어렵다.
지금은 벽향주를 만들어서 삼촌의 커트 라인부터 통과하는 것이 우선이다.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하자,
심재필 사장은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것 같았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르신도 안 계시니 당장 예전처럼 양조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건 무리죠.”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만약에 막걸리를 생산하게 되면 곧장 달려올 테니 전화주세요.”
마지막까지 신신당부를 한 뒤.
심재필 사장은 트럭을 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양조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 씨 할아버지가 오셨다.
“조금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나?”
“아니에요. 저희 때문에 대구에 계신 아드님 댁에 못 가셔서 죄송합니다.”
“내가 결정한 거니 신경쓰덜마러.”
정 씨 할아버지에게는 대구에 사는 아드님이 계셨다. 원래는 양조장이 문을 닫게 되자 대구로 가실 예정이었다.
오풍리에 혼자 사실 바에는 자신이 모시겠다고 아드님이 설득한 덕분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뤄졌다.
우리가 벽향주를 만들겠다고 나서니 당분간 남아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할아버지가 없으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터라 백골난망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일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 벽향주의 명맥이 끊기지 않게 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덜게 됐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이 친구가 그때 말한 그 친구인가?”
“안녕하세요. 유수호라고 합니다.”
수호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앞으로 스승님처럼 모시겠다는 말에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흡족해했다.
벽향주를 빚는 지방무형문화재 자격을 물려주려면 몇 년의 기간이 필요하기에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는 않으셨다.
제조법이 사라지지 않는 것.
할아버지는 오로지 그것만 바랐다.
당연히 오저당에서도 후계자를 키우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 두어 해도 못 버티고 일을 그만두니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양주(家釀酒) 대부분이 불과 백여 년 사이에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일 때문이다.
그 당시에 집에서 술을 빚지 못하게 허가제를 두었고 군부 시절에는 밀주(密酒)라 부르며 단속을 할 정도였다.
올림픽이 열릴 무렵에 뒤늦게 쌀로 술을 만드는 제한이 풀렸으나 복원하더라도 옛날과 같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일도 힘들고 워낙 외진 산골짜기 마을에서 생활하는 것도 쉽진 않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는데 무기력해 보이던 지금까지의 모습은 사라졌다.
술을 빚는 일에는 진심이신 분이었다.
모처럼 활기찬 표정을 한 할아버지는 우리 둘에게 손짓하며 외쳤다.
“그럼 지금부터 벽향주를 빚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