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9화 (9/254)

도대체 무슨 일이야? (1)

아이돌이자 여배우 배수인.

그녀에게는 유명한 별명이 있다.

지난해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획득한 국민 여동생이란 별명이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에서 배수인은 독보적인 청순한 외모와 준수한 연기력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더구나 전직 아이돌이었다.

기존에 쌓인 팬덤도 작지 않았다.

한마디로 최근 연예계에서 대세 중의 대세로 손꼽히는 이였다. 지난해 찍은 광고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운 좋게 얻은 인기는 아니었다.

준비된 스타라고 할까.

그녀는 아역 배우 출신이었다.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들어선 배수인은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곧장 프라이빗 룸 안으로 들어섰다.

“감독님! 설마 저 피하시는 거예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사무실에 갔더니 다들 여기 가보면 감독님 있을 거라고 하던걸요.”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곧장 맞은 편에 앉았다.

하지만 표정을 보면 그리 화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애교 있게 살짝 투정 부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한물이 간 감독과 인기 절정의 배우.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했다.

보통은 감독 쪽이 자신과 함께 작품을 해달라며 매달려야 정상이었다.

자존심을 논하기 이전에 흥행을 위한 현실적인 문제였다.

최근에 배수인을 섭외하는 것은 어지간한 조건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배수인이 오히려 서 감독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쓰는 느낌이었다.

정작 서인국은 무덤덤했다.

“대배우님께서 왜 나를 찾으셨을까.”

“감독님이 쓰신 시나리오 보고 반했다니까요. 꼭 출연하고 싶어요.”

“과연 나 같은 한물간 감독에게 투자하는 데가 있을까?”

“얼마 전에 넷플러스랑 계약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제가 모를 줄 아세요?”

“거··· 소문 참 빠르네.”

서인국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째 이 바닥은 자신의 일보다 남의 일에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잘못된 거라 정정하진 않았다.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지난주에 넷플러스와 함께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기로 계약했다.

국내 투자자와 달리 그들은 한 번 실패했다고 낙인을 찍지는 않았다.

오로지 가능성만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었다고 할 수 있는 6부작 드라마를 꽤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망하면 어쩌려고?”

“저는 괜찮다니까요.”

“이 바닥에서 한번 작품 잘못 골라서 고꾸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야. 배우라고 다를 것이 없어. 네 선배 중에 그런 이들이 한둘인지 알아?”

“감독님은 다시 재기할 거라 항상 믿고 있었어요. 그리고 감독님 덕분에 제가 아역으로 데뷔했잖아요.”

“그랬었나?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해.”

“대신 제가 기억해요. 그때 나중에 성인 연기자가 되면 언젠가 같이 작업하자고 약속하신 거 잊으신 거예요?”

꽤 오래전의 일이다.

거의 10년 전쯤 되려나···.

그 당시에 배수인이 아역으로 출연한 영화는 수익분기점을 가뿐히 넘으며 흥행에도 어느 정도 성공했었다.

심지어 여러 시상식에서 초청을 받아 수상도 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잊었다.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네가 아니라 조연을 부탁할 생각으로 염 배우에게 줬던 거잖아.”

“몰라요. 저는 이미 결심했어요. 회사에 다음 작품 잡지 말라고 벌써 통보했으니 감독님이 책임지세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고 있다는 것은 배수인도 알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반드시 출연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핑계인지도 모른다.

마음 한편으로는 서인국 감독의 재기를 돕고 싶었고 거기에 넷플러스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인 점도 마음에 들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넷플러스에서 직접 투자해서 만드는 오리지널 드라마를 통해 월드 스타가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이돌로 활동하며 해외 팬들이 적지 않고 나름 국내에서도 탑 클래스가 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일단 뭐라도 시키자.”

서인국은 간단하게 설득되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기에 메뉴판을 건넸다. 어릴 때부터 배수인은 악바리로 유명했었다.

쉽게 물러설 아이는 아니었다.

“여기 단골이신 것 같은데 감독님이 맛있는 칵테일로 추천해주세요.”

“수인아. 새벽에 촬영이 있어서 많이 마시면 안 되는 거 알지?”

“아쉽지만, 그렇다네요.”

“그러면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시그니처 칵테일 마셔봐. 그리 센 편은 아니라 젊은 친구들한테 꽤 인기가 좋더라.”

“그럼 저는 그걸로 할게요.”

배수인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냥 자릿세 정도로만 여겼다.

주문도 안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운전을 해야 하는 매니저가 마실 음료수도 잊지 않았다. 그걸 본 서인국은 옛날 그대로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하고 있자 어반 스카이의 사장인 주기혁이 직접 글래시어 칵테일과 술병을 들고 왔다.

프라이빗 룸은 그가 직접 서빙하는 일이 잦았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배수인은 앞에 놓인 푸른 빛이 감도는 칵테일을 꽤 흥미롭게 바라봤다.

“저희 어반 스카이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시그니쳐 메뉴인 글래시어입니다. 손님들은 빙하주라 부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칵테일이 너무 예뻐요.”

“여기 바텐더가 세계 대회에서 순위권에 오를 정도로 실력파야. 이것도 그 친구가 개발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주 사장 나는 벽향주는 주문 안 했는데?”

서인국이 벽향주를 바라보며 묻자, 주기혁은 웃으며 일단 뚜껑부터 열었다.

“맛보시라고 가져왔어요.”

“내가 벽향주 한두 번 마시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뭐야. 아··· 이거는 배수인 배우에게 주는 뇌물인 건가?”

“하하. 그런 거는 아니고요.”

주기혁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자신의 조카가 양조장을 당분간 맡아서 술을 빚고 있는데 기존의 벽향주를 잘 알고 있으니 맛을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예전에 마셨던 것과는 다를 겁니다. 저는 이만 가볼 테니 이야기 나누시고 가실 때 어떠셨는지 말씀해주세요.”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지.”

“그럼 저는 이만···.”

쟁반을 들고 주기혁이 나가자,

서인국은 잔에 벽향주를 가득 따랐다.

그 모습을 본 배수인도 잔을 내밀었다.

왜 자기는 안 주냐는 표정이었다.

“새벽에 촬영 있다며.”

“그래도 처음 보는 술인데 무슨 맛인지 궁금하잖아요.”

“술은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한 거야?”

“성인이 된 지 오래됐거든요. 언제까지 아역 배우 취급하실 거예요?”

“그래 봐야 스물둘이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인국은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런 뒤에 건배를 할 틈도 없이 자신의 잔을 들고 들이켰다. 예전부터 그는 여배우와 건배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아니 애초에 가능하면 같이 술을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배수인은 그제야 웃으며 잔을 비웠다.

자신도 이제 아역 배우가 아닌 여배우로 인정해주는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식도를 훑고 내려가는 술맛에 매료되었다.

“우와! 쓴 맛도 거의 없고 엄청 맛있잖아요. 이거 무슨 술이에요?”

“글쎄다. 내가 도대체 뭘 마신 거지.”

“자주 마시던 술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맛이 달라.”

서인국은 다시 잔을 채워서 마셨다.

확실히 예전에 마셨던 벽향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배수인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자신의 앞에 놓인 글래시어 칵테일과 벽향주를 찍었다.

“설마, 그거 올릴 거는 아니지?”

운전을 해야 하기에 옆에서 콜라를 마시며 지켜보고 있던 매니저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사진 하나를 올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연예인이다.

“실장님이 SNS 계정만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안 한다고 뭐라도 좋으니 좀 올리라고 성화셨잖아.”

“그래도 내일 촬영이 있는데 술 마시고 있는 모습은 조금 그렇지 않나?”

“에이, 이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이거는 며칠 뒤에 올릴 거야.”

실시간으로 올릴 수 없었다.

SNS에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면 반드시 사생팬이 쫓아와서 곤란하게 만든다.

평소에 SNS에서 거의 활동이 없는 배수인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현재 그녀가 서인국 감독에게 매달리고 있는 시나리오의 캐릭터와 연관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도발적이고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주인공이다.

아역 출신의 배우이자 아이돌.

그 범주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니 조금씩이나마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다. 며칠 뒤에 그녀의 SNS에는 하나의 게시물이 올라갔다.

[도심의 밤,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한 잔의 술. 다음 작품 기대해도 좋아요.]

#인생주 #벽향주 #빙하주 #어반스카이

*

양조장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다시 술을 빚었다.

삼촌의 기준도 쉽게 통과되었다.

지금 숙성 중인 벽향주만으로도 삼촌의 투자금은 모두 갚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일부 생산량은 태백 물산을 통해 유통할 예정이라 계속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 심재필 사장도 관심 있었다.

제법 비싼 술이라 막걸리보다는 판매량이 그리 높진 않았으나 그래도 삼척에 겨우 두 가지밖에 없는 전통주였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심재필 사장은 500병을 주문했다.

“그러면 준비해 놓겠습니다.”

심재필 사장의 전화를 끊으며 마당으로 나오자 흙투성이가 된 수호가 보였다.

아침부터 뭘 한 건지 녀석의 손에는 호미가 쥐어져 있었다. 요즘 수호는 틈이 날 때마다 양조장 주변을 가꾸고 있었다.

여유 시간은 생각보다 많았다.

양조장의 특징이기도 했는데 이곳은 일이 많으면서도 또 한없이 널널했다.

일이 한 번에 몰린다는 뜻이다.

술을 빚는 일이 꽤 고되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으나 막걸리를 빚지 않기에 아직 여유가 꽤 있었다.

더구나 오저당에는 요정도 있다.

직접 옹기를 확인하지 않아도 녀석들의 표정과 행동만 봐도 술이 어떤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스트레스는 조금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정원 꾸미는 거는 언제쯤 끝나냐?”

“이제 시작했는데 무슨 소리야. 적어도 여름쯤은 되어야 결과물이 나와.”

“도대체 뭘 심고 있는데?”

“저쪽 입구에는 코스모스랑 금계국을 심었고 이쪽 화단에는 꽃범의 꼬리랑 여러 종류를 섞어서 심고 있는 중이지.”

종종 녀석의 말은 외계어 같았다.

꽃범의 꼬리는 도대체 어떤 꽃일까.

애초에 그런 쪽으로 관심이 없는 탓에 전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전에 걸려온 전화가 더 궁금했다.

평소 전혀 울리지 않던 양조장의 전화가 오늘따라 요란했다.

“아까 네가 받은 전화는 뭐야?”

“혹시 택배로 벽향주를 받을 수 있냐고 묻더라. 그래서 계좌 번호 알려주고 주소랑 전화번호 적어놨어.”

“택배는 어떻게 보내려고?”

“어차피 이따가 장 보러 나갈 예정이잖아. 가는 길에 편의점 택배로 보내려고.”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매를 통해서 파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소매로 파는 것이 우리에겐 이득이었다.

다행히 전통주는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택배로 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 술이나 가능하진 않다.

국산 농산물을 이용해서 만든 전통주가 아니면 그런 형태의 판매는 불가능하다.

그나마 이것도 2017년쯤에 바뀐 정책 덕분이지 그 이전에는 어림도 없었다.

실제로 그 이후부터.

전통주의 판매량은 증가 추세다.

집에서 손쉽게 각 지역의 특색이 담긴 술을 마실 수 있는 덕분이었다.

하지만 수호가 받은 전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여보세요. 벽향주를 주문하고 싶으시다고요?”

“한 병에 만오천 원이요. 택배비는 별도고요. 묶음 배송은 네 개까지만 가능해요. 배송 중에 깨질 수 있거든요.”

“저희가 판매하는 벽향주의 도수는 18도입니다. 죄송하지만, 증류주가 아니라 더 높은 도수는 나오지 않습니다.”

주문과 문의 전화가 쏟아졌다.

오저당은 벽향주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도 없었다. 할아버지 두 명이 운영하던 술도가라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곳의 전화번호를 알고 전화하는 건지 신기했다. 그러던 중에 수호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잠시 통화를 하던 녀석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체국 쇼핑몰인데 벽향주 1,000병을 당장 보내줄 수 있냐고 묻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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