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여름이다 (2)
갑자기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양조장에 출퇴근할 때마다.
주변 풍경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어느 사이에 수호가 심은 노란 금계국이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길가를 따라 피어난 금계국은 마치 양조장을 향해 깔린 노란 꽃길 같았다.
그쯤 되자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의도였는지 알 것 같았다.
여름뿐만 아니라,
가을에는 코스모스도 핀단다.
그런 풍경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
조금 이르게 덕월 계곡으로 놀러 온 이들은 그 꽃길을 배경으로 놓고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양조장에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양조장으로 인도된 이들은 양조장에 들러 막걸리를 사 갔다.
현지에 있는 양조장의 술을 마시는 일은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낭만이었다.
“양조장에서 술을 파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계곡에 주점을 여는 것은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야.”
“마을에서 정할 문제라는 말씀이시죠?”
“아무래도 안전과 연관이 있으니까.”
안 그래도 그 부분이 나도 고민이다.
계곡 트레킹을 하기 전에 술을 사가서 마시는 이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취할 정도로 마신 후에 트레킹을 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뎌서 용소(龍沼)라 불리는 깊은 웅덩이에 빠질 수 있다.
맨정신에도 빠져나오기 힘든 곳이다.
취한 상태로 거기 빠지면 대부분이 죽는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말려도 몰래 가져갈 사람들이다.
그나마 막걸리는 도수가 낮은 탓에 만취할 정도로 마시려면 그 무게가 생각 이상으로 무거워서 다행일 정도였다.
그걸 지고 트레킹을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차피 저희도 낮에는 술 빚고 물건 내보내느라 바빠요. 술과 안주를 파는 거는 저녁 5시 이후에나 가능해요.”
매대에서 파는 것은 틈틈이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이나 주점은 저녁에만 가능했다.
그리고 그 수익금의 일부는 마을 발전 기금으로 보탤 생각이었다. 우리가 상류에서 쓰는 물의 양이 제법 많았다.
그 값이라고 여기면 되었다.
긴 시간 고민을 한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쓰레기 문제도 있었다.
계곡 주변에서 꾸준히 오저당의 막걸릿병이 나오고 있다. 우리가 판매한 것이 아니라 1~2년쯤 지난 것들이다.
이게 차라리 눈에 보이는데 있으면, 치우기라도 할 텐데 땅까지 파서 묻었다.
전생에 무슨 두더지였나 뭘 그렇게 파묻는 건지. 어쨌든 그 책임에서 오저당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곳 덕월 계곡은 환경에 민감했다.
청정 지역이라는 이미지는 중요하다.
더구나 이곳의 물을 사용해서 술을 빚는 터라 우리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다.
한동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이모님은 다행히 흥미를 보였다.
“나는 재미있을 거 같은데. 내 음식 솜씨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잖아.”
“집에서 요리하는 거랑 음식을 파는 거랑은 차이가 큰 거 알잖아.”
“사람들이 산골짜기 주점에서 미슐랭 레스토랑 같은 맛을 기대할 거 같아? 그냥 기본만 해도 어느 정도는 만족해.”
그건 이모님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큰 기대치는 없을 것이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는 음식의 맛보다는 정취를 먹고 마신다고 봐도 되었다.
괜히 우리 선조들이 산이며 계곡을 찾아다니며 천렵(川獵)을 하거나 화로에 고기를 구워서 잡수신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이모님의 음식 솜씨가 나쁜 것도 아니고 다들 인정할 정도다.
식당을 하셔도 잘할 거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으셨는데 어쩌면 이번 기회에 그 가능성을 검증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모님 솜씨면 충분하죠!”
수호도 슬쩍 옆에서 거들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술주정하는 인간이 있다면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제야 이장님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어쩌면 그게 가장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았다.
“이모님은 음식만 만들어서 내주시면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크음! 약속한 거다. 우리 마누라가 험한 꼴 당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이 양반이 부끄럽게 갑자기 왜 이래.”
“그건 그렇고 도찬아, 음식을 팔려면 허가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 이전에 준비할 게 많았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영업 신고를 하기 위해 몇 가지가 필요했다.
그중에는 교육 이수증과 보건증도 있었고 사업자 등록증도 고쳐야 한다.
“삼척의 관광과 주무관님과 잠깐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어서 알아봐 주셨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아주 잠깐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주무관님은 자신의 일처럼 내가 구상 중인 부분에 대해서 알아봐 주셨다.
하지만 그게 공짜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분이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대충은 짐작이 가능했다.
‘찾아가는 양조장’ 때문일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선정하는 찾아가는 양조장은 술을 빚는 것 외에도 관광과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하지만 강원도는 그 부분에 취약했다.
홍천과 횡성 두 곳이 전부였다.
타지역에 비해 선정된 곳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삼척에서도 우리 오저당을 거기에 끼워 넣길 바라는 것 같았다.
더구나 바캉스 시즌이 끝나도 소수나마 관광객을 모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강원도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여름에는 미어터질 정도로 몰리지만,
더위가 한풀 꺾이면 관광객이 사라진다.
그나마 설악산이 있는 속초나 양양은 봄과 가을에도 찾아오는 등산객이 많다.
하지만 삼척은 그 부분이 조금 부족했다.
“그런데 술은 어디서 팔려고?”
“저희가 지내고 있는 한옥 앞마당이 넓고 좋잖아요. 그곳을 활용해 보려고요.”
“너도 기혁이 아래에서 일한 기간이 적지 않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이장님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내 자신감의 원천은 그 경험이었다.
보고 배운 게 있기에 누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바텐더 역할도 할 수 있고 글래시어 칵테일도 흉내 낼 수 있다.
칵테일에 사용할 도구는 삼촌에게 잠시 빌려오면 그만이었다.
‘어반 스카이의 비공식 3호점이랄까.’
조금 특색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당연히 그와 관련된 구상도 여럿 있었다.
비록 위에서 내려보는 야경은 없지만,
하늘을 바라보면 별이 쏟아지는 곳이다.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았다.
거기에 조금만 걸어 나가면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니 자연 그대로의 ASMR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
더위는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어느덧 7월의 중순을 넘은 시기였다.
그나마 계곡에 있는 마을이라 오풍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양호한 편이었다.
당연히 사람들도 많아졌다.
전국에서 모이는 피서객들이었다.
사람마다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상당히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백미는 역시 계곡에 발을 담그며 걷는 트레킹이었다.
“밧줄을 잡고 폭포 위로 올라가는 게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오길 잘했어.”
“정말 시원하더라. 왜 여름에는 계곡 트레킹을 권하는지 알 것 같아.”
“호호. 미끄럽다고 우리들 부여잡고 난리를 치던 게 누구더라.”
이십 대 중반의 세 여성.
그들은 트레킹에 흠뻑 빠져 있었다.
올해 여름에는 같이 여행하자고 봄부터 약속을 잡고 온 여행이라 더 흡족했다.
대학교 동창인 그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휴가 일정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의 한계였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휴가가 밀리는 일이 허다했다. 셋이 날짜를 같은 시기로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올해는 운이 정말 좋았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났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걸은 탓일까.
그녀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걸으면 마을 입구의 야영장이고 거기에 주차해 놓은 차에는 고기며 온갖 음식이 있었으나 허기를 참을 수 없었다.
뭐에 홀린 것처럼 냄새를 쫓았다.
그러자 머지않아 묘한 장소가 나왔다.
분명 아까 지나온 길인데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곳이었다.
“아까 이런 곳이 있었나?”
“내 기억으로는 여기 양조장이었던 거 같은데 저녁에는 술집을 운영하나 보네.”
“저기 주막이라고 써 놓은 간판도 있다.”
그녀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주막(酒幕)이라 쓰인 거대한 걸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저당이라는 간판도 함께 보였다. 당연히 세 사람 모두 처음 듣는 술도가의 이름이었다.
“말만 주막이지 분위기는 좋다.”
확실히 잘 꾸민 장소였다.
곳곳에 밝은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엉성하지만, 특색있는 장식도 눈길을 끌었다. 잠시 주막 앞에서 지켜보고 있자 키가 큰 남자가 다가왔다.
제법 훈훈한 외모의 젊은 남성이었다.
“자리를 안내해드릴까요?”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그녀들은 홀린 듯이 뒤따라갔다.
잠시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었다.
“메뉴가 다양하진 않아.”
“그래도 있을 거는 다 있네. 김치전부터 파전에 해물파전도 있고 너희가 좋아하는 골뱅이도 판다.”
“어차피 우리가 장 봐온 것도 있으니 간단하게 먹고 일어나자.”
세 명 중에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 말을 하자 나머지 두 명은 웃음을 터트렸다.
“푸훕··· 간단하게?”
“뭐가 문제인데?”
“너랑 술 마시면 맨날 꽐라되잖아.”
“아직 술이 부족하다고 난리 부리던 너의 모습은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지.”
“나도 때와 장소는 가린다고. 설마 여기서 그렇게 많이 마시겠어? 나 막걸리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그녀의 호언장담은 얼마 못 갔다.
막걸리 두 병과 파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안주의 퀄리티도 좋았으나 무엇보다 술이 맛있었다.
서울에서 마셨던 일반적인 막걸리와는 뭔가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술이 술술 넘어간다.”
“낮에 많이 걷긴 했잖아.”
“야야, 이걸로 간에 기별도 안 가니 안주부터 두어 개 더 시키자. 보니까 나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
“뭐 먹을래?”
가볍게 먹고 일어나자고 약속했지만, 누구도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다음에는 어떤 안주를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두 번째로 시킨 안주는 얼음 동동 띄운 수박화채였다.
더운 여름에 그것만 한 것이 없었다.
잠시 후에 아까 그 훈남과 함께 산적 같은 남자 하나가 화채를 들고 왔는데 시키지도 않은 칵테일까지 같이 왔다.
“그거는 안 시켰는데요?”
“저희가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이곳 오저당에서 빚는 벽향주를 베이스로 만든 글래시어 칵테일입니다.”
“어! 그거 강남에 있는 루프톱 바에서 파는 거 아닌가요?”
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세 여인은 동시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세 사람 모두 요즘 핫플로 유명한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이야··· 이걸 여기서 마실 줄이야.”
“거기 예약도 안 되어서 매번 허탕 치고 돌아서는 일이 많았거든요.”
“그럼 저희가 빚은 술에 대한 테스터가 잠시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거 뇌물이에요.”
내 제안은 곧장 받아들여졌다.
테스터라고 해도 그리 어렵진 않았다.
잠시 후에 우리가 가져온 것은 블라인드 테스트를 위해 숙성 시기별로 구분해 놓은 막걸리와 벽향주였다.
이게 주막을 열은 진짜 이유였다.
이 시기가 되면 각지에서 모인다.
연령대도 다양하기에 이런 테스트를 진행 기회가 좀처럼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막을 찾은 이들을 대상으로 조금 더 다양한 반응을 보고 싶었다.
다행히 반응은 꽤 좋았다.
숙성된 여부에 따른 차이도 있었다.
기존에 출고되고 있는 막걸리보다 30일 가까이 추가 숙성을 한 막걸리에 대한 선호도가 생각보다 매우 높았다.
벽향주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에 출하한 것보다 2달 가까이 더 숙성했더니 맛의 깊이가 꽤 차이가 났다.
확실히 오래 숙성할수록 술맛이 더 좋아지는 게 맞기는 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간단한 설문 조사를 마친 뒤.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한 음식을 서빙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와서 주막도 상당히 바빴다.
그러던 중에 이상한 걸 발견했다.
양조장 안에서 불빛이 일렁였다.
창 너머로 보이는 빛은 조금 특이했다.
마치 어린 시절에 보았던 도깨비불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 옆을 지나치는 수호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요정은 확실히 아니었다.
녀석들은 빛을 뿜어내진 않는다.
같이 생활한 지 몇 개월이나 되었다.
적어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나는 양조장 쪽으로 다급하게 발걸음을 디뎠다.
뭔지 몰라도 서둘러서 확인해야 했다.
혹시라도 요정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이번에는 또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