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여름이다 (3)
불이 꺼져있는 양조장.
그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밖에 켜놓은 전구가 꽤 많지만,
내부를 환하게 밝혀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양조장 안에서 날아다니는 묘한 느낌의 푸른 빛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어떻게 보면 반딧불 같았다.
하지만 크기는 그보다 훨씬 컸다.
이 동네에서 하천가를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양조장에 서식하는(?) 요정들도 그 빛을 따라서 함께 날아다니고 있었다.
상당히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드론 공연을 보는 기분이었다.
단체로 저렇게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요정들은 항상 제멋대로 돌아다녔지 같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리 가까이 와봐.”
손바닥을 펴고 말을 하자.
그 빛은 곧장 날아와 앉았다.
누가 내게 알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내 말을 따를 거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걸 자세히 설명하긴 어려웠다.
일종의 교감이라 할 수 있다.
요정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수록,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낌이 오고는 했다.
손바닥에 앉은 그 빛을 코앞까지 가져와 자세히 살펴보니 보통 요정과는 달랐다.
일단 크기가 상당히 컸다.
기존에 비해 거의 두 배쯤 되려나.
굳이 비교하자면 기존의 요정은 500원짜리 동전 크기라면 얘는 거의 호두 사이즈는 되는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도 달랐다.
다른 녀석들은 평민과 양반이라면,
이 녀석은 조선 시대의 관복이었다.
심지어 관모까지 쓰고 있어서 작은 사이즈의 피규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모든 요정이 다가와서 나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였다.
분위기도 보통 때와는 달랐다.
새로 나타난 녀석 때문인지 말괄량이 같던 녀석들이 조신한 모습을 보였다.
“어릴 적에 본 도깨비불이 너였냐?”
그냥 해본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자기는 아니었다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뭐지··· 얘는 왜 의사소통이 되는 기분일까?
“너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어?”
혹시 몰라 다시 질문을 하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요정과 달리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말을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까짓거 스무고개 좀 해보지 뭐.
잠시 고민하다가 새로운 요정에게 적당한 이름을 하나 붙여주기로 했다.
단순하게 요정이라 부르기에는 기존의 요정들도 있기에 헷갈릴 것 같았다.
팅커벨? 페어리?
그건 너무 성의 없는 거겠지?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살면서 작명을 해본 적이 있었어야지.
애완동물을 기른 적도 없었기에 그런 기회는 내게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벽향주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적당한 이름이 떠올랐다.
술에 환장하는 요정들이니 오저당의 핵심인 벽향주의 이름을 따기로 했다.
저얼대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앞으로 네 이름은 향이로 하자.”
다행히 꽤 마음에 들었던 걸까.
내 주변을 두어 차례 빙글거리며 돌던 향이는 다시 손바닥 위에 앉았다.
자신만의 이름이 생겼다는 기쁨이 표정과 몸동작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팅커벨··· 아니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띵띵 띠리디링 띵띵.
주머니에서 꺼내 보니 수호였다.
아마 내가 안 보이니 전화한 것 같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수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빠죽겠는데 너 어디에 짱박혀있냐?]
“창고에서 꺼낼 게 있어서 잠깐 왔어.”
[잘됐네. 막걸리 좀 더 꺼내와라.]
“벌써 다 떨어졌어?”
[얼마 안 남았어. 이상하게 오늘따라 막걸리가 인기 대폭발이네. 참고로 누나들 앉아있는 테이블이 대박이야.]
“그분들이 왜?”
[매출 신기록 세울 각이야.]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창고에서 술을 꺼내서 나갔다.
조금 더 이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막걸리가 담긴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오던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향이가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왔다.
다른 요정들의 행동과는 확실히 달랐다.
기존의 녀석들은 술 주변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데 향이는 나만 따라다녔다.
아주 작고 귀여운 댕댕이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그 빛은 물론이고 향이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냐?”
수호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멍하니 날아다니는 요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생긴 일이었다.
“엄청 커다란··· 나방을 본 거 같아서.”
“나방 한두 번 보냐.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줄었잖아.”
“모든 조명을 LED로 바꿨는데 그 정도의 보람은 있어야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저녁마다 벌레와 싸움을 벌였다.
우리도 나름 도시 청년이라 시골 생활 중에 가장 힘든 것이 벌레 출몰이다.
불만 켜면 산에서 온갖 것들이 날아왔다.
정말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군대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시계를 한번 살핀 나는 수호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해야 했다.
“부탁인데 오늘은 정해진 시간에 끝내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어제도 똑같이 말했잖아. 그러고는 손님들이랑 같이 술 마시느라 자정이 넘어서 정리했거든.”
“그거야···합석하자고 하니까 그렇지. 그래도 새벽마다 제때 일어나고 있잖아.”
골든레트리버 같은 녀석다웠다.
호감 가는 사람만 보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가는 습성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양조장이 상당히 외진 곳에 있어서인지 사람의 체취가 그리웠던 것 같았다.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 쉴 수 있을 때 많이 쉬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곧 성수기가 다가온다.
생각만 해도 두려워질 정도였다.
적어도 2주 정도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빠질 것 같았다. 수호도 그걸 알기에 다시 한번 알겠다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온 누나들 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니 녀석은 몸부터 움직였다.
망설이는 기색도 전혀 없을 정도였다.
물론···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평소와 달리 그날 저녁은 제법 흥겨웠다.
“술이 들어간다! 쭈우쭉 쭉쭉쭉!”
*
향이가 나타난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그게 가장 궁금했다.
하지만 말 못 하는 향이는 그것에 대해 내게 설명을 해주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추측되는 바가 있기는 했다.
‘요정의 숫자와 관련된 걸까?’
그게 가장 유력한 추측이었다.
오저당이 나날이 성장할수록,
요정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었다.
마흔 마리(?)가 안 되던 초기와 다르게 지금은 어느덧 백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요정의 숫자가 일정 단위를 넘어서면 상위 요정이 나타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생산량과 연관된 것일지도 모른다. 막걸리를 빚기 시작한 뒤부터 갑자기 더 늘어났기에 가능한 유추다.
그렇다면 오저당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지면 과연 어떤 일이 생길까.
향이와 같은 아이들이 더 많이 생기는 건지 아니면 성장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오늘은 일주일 전에 빚은 벽향주에 요정들이 머물게 해줘.”
“막걸리 맛이 조금 부족한 것 같으니 병입하기 전에 아이들 좀 보내줘.”
“파리가 너무 많으니 잡아줘.”
생각보다 향이는 큰 도움이 되었다.
녀석이 나타난 이후부터 양조장을 관리하는 일이 조금 더 수월해졌다.
이전에는 요정을 관찰하며 술의 상태를 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향이 덕분에 숙성을 임의로 조금씩이나 조절할 수 있었다.
향이에게 부탁해서 조금 상태가 애매한 술이 담긴 옹기 쪽에 요정을 투입하면 기막히게 되살려놨다.
심지어 벌레도 잡아주었다.
다른 요정은 하지 못 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녀석들은 술통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이 가능하나 실체가 없었다.
반면에 향이는 옹기 안으로 스며드는 능력은 없으나 어느 정도의 물리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잡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해도 그게 어디야.’
요정이라 그런가.
벌레를 잡아서 죽이지는 않았다.
그저 잡아서 가두는 것이 전부였다.
어떤 날에는 페트병에 모기만 백여 마리 넘게 잡아놓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내가 내린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며 밤새도록 수집한 결과물이었다.
대신 그 징그러운 것을 처리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수호에게 시키자니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향이 덕분에 모기에게 물리는 일은 거의 없어졌기에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도찬아, 꽃차 한잔할래?”
막걸리를 살피고 나오자,
이모님이 나에게 차를 권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노란 금계국이 찻잔 안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금계국을 차로도 마시나요?”
“나름 맛도 괜찮아. 그리고 이게 해독 작용이 있어서 천연 해열제이기도 해.”
“일단 눈이 가장 즐겁네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잠시 앉아 꽃차를 한잔하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신념을 가진 나였지만, 종종 이렇게 온기 가득한 차를 마시는 것도 꽤 좋았다.
향이도 금계국 꽃차의 향이 좋았는지 찻잔 안으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일하는 거는 안 힘드세요?”
“내가 힘든 게 뭐가 있어.”
“낮에는 양조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음식 만드느라 정신이 없으셨잖아요.”
“동네 어르신들이랑 같이 일하니 힘든지도 모르겠더라. 매일매일 잔칫날 같다고 다들 좋아하셔.”
처음에는 꽤 수월했다.
수호와 나 그리고 이모님까지.
세 명이서 어떻게든 운영이 가능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손님의 숫자가 늘어나는 탓에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다.
저녁에는 대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 SNS와 블로그 등에 현지 맛집처럼 소개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 덕분에 다급히 야외 테이블도 몇 개 더 렌트해서 들여놔야 했을 정도였다.
일손도 당연히 부족해졌다.
처음에는 이장님부터 투입됐다.
식자재는 태백 물산 직원이 공급해 주었지만, 은근히 직접 가서 장을 봐올 잡다한 것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서 오풍리의 할머니들도 번갈아 가며 일손을 보탰다.
집 안팎에서 계속해서 전을 부치고 있기에 진한 기름 냄새가 배어서 밤에는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잘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다행이고요.”
“어차피 바캉스 시즌도 거의 다 지났잖아. 길어봐야 며칠 정도일 텐데 걱정하지 마.”
“어제 저희가 여쭤본 거는 어떻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어요?”
가능하면 이 구조 그대로 가고 싶었다.
봄과 가을에도 낮에는 술을 빚고 밤에는 주막을 열어서 손님을 유치하고 싶었다.
겨울이 빠진 이유는 그 시기에 계곡을 찾는 이들이 정말 드물기 때문이었다.
몸은 조금 더 고단하겠지만,
삶에 활기를 더해주는 것 같았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려면 이모님이 꼭 필요했다.
“여름이 지나면 손님이 많이 오지도 않을 테니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지.”
“다행이네요.”
“하지만 매일 재료를 준비하는 것은 어려워. 메뉴는 조금 줄어야 할 거야.”
“제가 그쪽은 잘 모르니 전적으로 이모 의견대로 진행할게요. 그런데 수호는 어딜 간 건지 오늘따라 안 보이네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거의 1시간 전이었던 것 같았다.
요즘은 요정들을 부려먹는 덕분에 술을 관리하는 것은 혼자서도 가능해졌다.
그래서 그 외에 일은 대부분 수호에게 맡기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창고 정리해야 한다고 아까 우리 바깥양반이랑 같이 나가던데.”
“아··· 맞다. 아까 이장님이랑 화물차 빌려온다고 했는데 제가 깜빡했네요.”
“일할 게 있으면 나한테 시켜도 돼.”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양조장에 오크통이 제법 많았다.
상당히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그걸 치우고 옹기를 더 많이 넣을 생각이다.
오저당에 오크통이 있는 이유는 긴 시간 숙성하기 위해서인데 요즘은 거기에 술을 채울 상황이 아니었다.
만드는 대로 품절이 되는 중이다.
먼 미래의 일을 염두에 둘 여력이 없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생산량을 늘리는 것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옹기도 이천 쪽에 12개나 주문을 넣어놔서 내일쯤에 들어올 예정이다.
그 정도 숫자의 옹기가 들어오면 기존 생산량에서 50% 정도가 늘어난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잠시 차를 마시며 수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승합차 두 대가 동시에 들어왔다.
“누구지···?”
단체로 손님이 온 건가.
개인적으로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가끔 단체로 몰려와서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적지 않게 있었다. 더구나 아직 오후 1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장님과 약속한 대로 오후 5시 이전에는 주막에서는 절대 술을 팔지 않았다.
그런데 그 차에서 내린 것은 삼촌과 어반 스카이 1호점과 2호점의 식구들이었다.
삼촌이 직원들과 함께 놀러 오겠다는 말은 했지만, 저렇게 많이 데리고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삼촌이랑 두어 명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무척 반가웠다.
안 그래도 힘을 쓸 일이 제법 많았다.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노동력이니 어찌 안 반가울 수 있겠는가. 그런 탓인지 몰라도 저절로 간사한 웃음이 터졌다.
“흐흐, 때마침 잘 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