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해라, 핫산 (2)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부터.
오저당의 창고 공사가 시작됐다.
생각보다 일의 진행이 조금 늦어졌다.
설계도를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으나 인허가 과정이 발목을 잡았다.
그 문제는 연화 건설이 해결했다.
아무리 따져봐도 신정배 사장을 제외하면 이 주변에서는 대안이 없었다.
일을 맡긴 뒤에 옆에서 지켜보니 신 사장의 수완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마당발이 따로 없었다.
한 다리 건너면 어떻게든 연결됐다.
더구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설 업체답게 시청에 있는 공무원과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허가 문제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은 알아서 처리했다.
우리가 따로 할 것은 많지 않았다.
달라는 서류만 빼놓지 않고 준비해주고 제때 공사비만 쥐어주면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진 않았다.
소음과 흙먼지.
두 가지가 나를 괴롭혔다.
양조장 바로 옆에 창고를 세우고 있다.
기초 공사를 한다고 거대한 중장비가 오가고 있기에 두 가지는 어떻게 노력을 해도 피할 수 없었다. 공사비가 빠듯한 탓에 뭔가를 더 설치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잠시 쉴 수도 없었다.
이제 막 추가로 들여놓은 옹기로 빚은 벽향주가 나오고 있지만, 벽향주의 완판 기록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입소문으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마니아층의 구매력이 적지 않았다.
그 덕분에 평소 한옥 앞마당에서 밑술을 빚던 우리는 양조장 내부에서 창문까지 모두 닫고 죽을 쒀야 했다.
어느덧 초가을이 되어 밖은 선선했으나 양조장 안쪽은 온도가 꽤 높았다.
“아이구··· 힘들어 죽겠네. 도대체 공사는 언제 끝난다고 하냐?”
“공사 시작한 지 고작 며칠 지났거든. 저번에 신 사장님이 적어도 3개월 이상 걸린다고 설명해줬잖아.”
“3개월 동안 이 짓을 해야 한다고?”
수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창고를 세울 바닥만 정리하면 다시 밖에 나가서 작업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강원도는 겨울이 빨리 온다.
온도가 생명인 작업이다.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래도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서 일을 한다는 점이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때 문이 천천히 열리며 이모가 들어왔다.
“어휴, 여긴 완전 찜질방이네.”
“방금 막걸리를 빚을 지에밥을 쪄서 더 해요. 그런데 오늘은 쉬시는 날인데 왜 나오셨어요.”
“공사장 아저씨들 드릴 간식 가져왔어. 너희 것도 있으니 나와서 먹고 해.”
“다 돈 받고 일하시는 사람들이잖아요. 이렇게 준비 안 해주셔도 돼요.”
“글쎄 과연 그럴까. 못 하나를 박아도 더 정성을 들여줄 것 같은데.”
이모는 웃으며 나오라고 손짓했다.
안 그래도 잠시 쉬려고 했었기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밖으로 서둘러 나왔다.
한때는 사람이 가득하던 마당은 이제 휑한 기분마저 들었다. 임대했던 테이블을 모두 되돌려보낸 탓이었다.
그래도 평상과 테이블 몇 개는 남겼다.
이제 밤에 술을 마시러 오는 이들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낮에 계곡을 찾아오는 이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술보다 이모가 만드는 다양한 꽃차가 더 인기였다.
하지만 주막도 잠시 닫아야 했다.
시끄러운 공사장 옆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모는 그 결정을 반겼다.
안 그래도 농사일이 바쁜 시기였다.
요즘에는 정오에 나오셔서 오후 4시 전에 조기 퇴근하는 날이 많아지셨다.
어차피 시급으로 계산하고 있었고 택배 포장 등의 해야 할 일은 그 시간 내에 다 끝내셔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보다 시급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지금 짓고 있는 창고가 완공되기 전에 사람을 구해야 할 텐데···.’
술을 빚을 사람이 더 필요했다.
처음에 왔을 때에 비해 벽향주의 생산량이 세 배나 늘어난 상황이다.
거기에 막걸리까지 빚으니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고 연말 무렵에 숙성용 창고까지 완공되면 일거리가 늘어난다.
이모님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벌써 지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이 힘들었다. 나라고 수호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싫은 게 아니다.
최근에 여러 곳을 통해 구인을 하고 있는데 소식이 없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두 명.
그 정도는 있어야 양조장이 돌아간다.
지금 매출로도 그 정도의 인력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모가 얼음을 동동 띄운 화채를 내왔다.
“우와, 수박화채네요.”
“벌써 9월이 넘어서 수박이 끝물이긴 한데 이번 거는 아주 달더라.”
“저거 가져다드리면 되죠?”
평상 위에는 큰 통이 하나 있었다.
딱 봐도 화채가 들어있을 것 같았다.
이모와 같이 일하며 새삼스레 느낀 건데 생각보다 손이 엄청 크신 편이었다.
뭘 하나 만들더라도 마을 분들과 나눠서 먹으시는 분이라 생긴 버릇 같았다.
“나 대신 그것 좀 가져다드릴래? 생각보다 엄청 무겁더라.”
“물론이죠. 제가 다녀올게요.”
“아니, 내가 갈게.”
수호가 가겠다고 일어섰지만,
나는 녀석의 어깨를 살포시 눌렀다.
어차피 한 번쯤 가서 공사 상황을 보고 주변 사진도 조금 찍어와야 했다.
요즘 하루에 한번은 공사 현장을 들려서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히스토리를 위한 작업이었다.
공사 전의 오저당과 변화하는 현재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놓는 중이다.
여름에 지철이 형이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너희의 시간을 기록해봐.’
훗날에 필요할지도 모른다.
초창기의 모습을 기억해야만 했다.
시간의 흐름을 담아두면 언젠가 한 번쯤 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거창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곳곳을 찍어두는 것에 불과했다.
공사 현장은 멀지 않았다.
양조장 뒤편으로 50m쯤 되려나.
작업 중에 이동 동선을 짧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가까이 지으려고 잡은 자리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수호가 작은 정원을 만들 예정이었다.
정원의 핵심은 참나무였다.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참나무는 그늘에 앉아 쉬기 딱 좋은 크기의 나였다.
마침 현장도 쉬는 시간인지 참나무 아래 앉아서 다들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중에는 신정배 사장도 있었다.
사장이라고 뒷짐 지고 잡부만 부려먹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직접 나서서 고된 일도 마다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직원들에게도 신망이 꽤 두터운 편이었다.
“쉬는 시간인가 봐요.”
“방금 바닥 정리가 끝났거든.”
“이모님이 만드신 화채 가지고 왔으니 시원할 때 어서 드세요.”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좋지.”
“그런데 호세가 안 보이네요.”
호세는 외국인 노동자 중의 하나다.
요즘 국내 건설 현장이 모두 그렇듯 연화 건설도 외국인 노동자 비율이 꽤 높았다.
전체적인 현장의 감독과 고급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을 제외하고 힘쓰는 일은 거의 대부분 그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호세는 조금 특별했다.
국내에 흔하지 않은 멕시코 국적의 노동자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그의 핏줄이 에네켄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 탓인지 몰라도 라틴 계열의 얼굴인데 묘하게 아시아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 간다고 갔는데 안 오네.”
“이상하네요. 방금 양조장에서 나왔는데 그쪽에서 본 적이 없어요.”
“또 샛길로 빠졌나보지. 그 녀석이 일을 참 열심히 하는데 종종 그러더라.”
“저는 그럼 가볼게요. 다 드시고 수저랑 통은 여기 놔두시면 알아서 치울게요.”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양조장으로 돌아왔다.
수호의 먹성이 나를 서두르게 했다.
더 늦게 가면 화채가 남아있지 않겠지.
일이 많아질수록 수호의 섭취량은 늘어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삼겹살 2근을 혼자 해치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중간에 발걸음을 멈췄다.
양조장 창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이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호세였다.
연화 건설 사람들치고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도대체 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까.
혹시 향이나 요정이 보이는 건가.
내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호세는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그는 스페인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가 뒤섞인 국적 불명의 언어로 변명했다.
“Lo siento, I just··· 구경했어.”
“한국어 공부 중이라며 한국어로 말해.”
생각보다 호세는 한국어가 유창하다.
애초에 우리나라에 온 이유가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한 것이라고 들었다.
나 역시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 하고 호세도 영어를 하기에 종종 말문이 막혀도 의사소통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이 녀석이 아직 존댓말은 서툴렀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 대화를 할 때마다 반말을 툭툭 내뱉었다.
그렇다고 싸가지 없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신기해서 구경했어. 나 어릴 때부터 친척이 운영하는 멕시코 증류소에서 데킬라 만드는 일 했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곳에서 공사를 시작한 후부터.
종종 호세와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다큐에서나 보던 에네켄의 후손이라는 말에 관심이 갔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하긴 물어본 적도 없었지.’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
뭐 그런 것은 관심이 없었다.
호세가 살아온 삶 전체를 조사하듯 물어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에네켄의 후예가 만들었던 데킬라라니 꽤 흥미가 가기도 했다.
일명 애니깽이라 불리던 에네켄은 데킬라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다.
하지만 모든 에네켄이 다 데킬라의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 푸른 용설란이라 불리는 아가베만 사용한다.
“거기서 뭐가 보이기나 해? 안에 들어와서 봐도 돼.”
“안으로 들어가 봐도 돼?”
“내가 있잖아. 그러니 따라와.”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누가 잠시 구경한다고 술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청결을 위해 신발에 덧신을 신는 등의 조치는 취했다.
사람이 마시는 술을 만드는 곳이라 청결은 항상 신경 써야 했다.
호세는 막걸리 시설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거대한 옹기를 유심히 살폈다.
이유를 물어보니 막걸리를 생산하는 시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으나 전통주는 조금 달랐다.
“데킬라는 아람빅(Alambique)이라는 전통 증류기를 사용하는데 한국처럼 이런 항아리를 쓰는 거는 처음 봐.”
“옹기라 부르는 거야.”
“여기서 숙성을 시키는 건가?”
“지금 판매 중인 술은 최소 한 달 이상 여기 있는 옹기에서 숙성시키지. 네가 만들던 데킬라는 얼마나 숙성시켰어?”
내 질문에 호세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당연히 데킬라도 숙성 과정을 거치는데 기간에 따라 3~4단계로 나뉜다.흔히 마시는 데킬라는 2개월 이상쯤 된 것이다.
하지만 일부 고급 데킬라는 3년 이상 숙성시키는 것도 있기는 했다.
미국에서 데킬라가 대유행을 한 것이 거의 20년이 넘은 일이기에 나도 어느 정도 유명한 것은 맛을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런 덕분에 호세와 어느 정도까지는 대화가 가능했다.
뭔가 마음에 딱 맞는 친구 같달까.
수호도 술을 잘 마시고 빚는 것도 어느 정도 단계까지 올라왔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내가 미국에 있을 당시에 가장 친하던 이들 상당수가 라틴 계열이었던 탓에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건 뭐지?”
호세는 작은 오크통을 가리켰다.
현재 오저당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크통인데 크기가 50리터에 불과했다.
모두 합쳐서 다섯 개였는데 그곳에는 나의 보물이 담겨져 있기에 거의 신줏단지 모시듯이 매일 살피는 중이었다.
“숙성 과정을 실험 중이야. 아직 5개월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빚은 술이자 가장 오래된 거야.”
내게는 의미가 깊은 술이다.
처음으로 빚은 술이기도 했고 현재 더 긴 시간 숙성하면 어느 정도의 맛이 나올지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런 데이터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 살펴야 했다.
가능하면 이것은 몇 년이고 더 놔두고 계속 체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 중요성 때문에 이 오크통은 일반 요정이 아니라 향이가 직접 관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특별히 한 번 맛보게 해줄게.”
“귀한 술이라며 나한테 준다고? 그리고 쉬는 시간도 끝나서 일하러 가야 하는데.”
“그냥 맛만 봐.”
많이 줄 생각도 없었다.
아까워서 나도 못 마시는 거다.
과연 벽향주가 외국인 입맛에는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술에 대한 관심도 경험도 많은 호세였다.
수출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시장도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오크통의 마개를 열고 조심스레 반 잔 정도를 따랐다.
“솔직하게 평가해 줘.”
그 이상은 줄 수 없었다.
저얼대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다.
아직 일하는 시간이 남아 있기에 그 이상을 주자니 마음에 걸렸다.
안전 제일 너도 알잖아.
호세는 잔을 받더니 곧장 입안에 털어 넣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이거 정말 5개월 숙성한 게 맞아? 10년쯤 숙성시킨 어지간한 위스키나 최고급 데킬라 못지않은데?”
호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국어로 말을 했지만,
그걸로는 모두 표현되지 않았던 걸까.
이내 영어와 스페인어 사용해서 극찬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옆에 있다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뭐든 한번 파면 끝장을 보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독학으로 배운 한국어 실력만 봐도 끈기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며칠 동안 지켜 보니 일도 착실하게 잘하는 편이라 슬쩍 호세를 떠봤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여기서 나랑 같이 일해볼 생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