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의 무기 (2)
보면 볼수록 대단했다.
여기 있는 술의 가격을 다 합치면,
적어도 억 단위는 넘어갈 것 같았다.
이렇게 비싼 것을 사람들이 오가는 회의실 같은 곳에 놔둬도 되는 건가.
나 같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는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유리도 두꺼웠고 잠금장치도 선반마다 달려 있었다.
그 외에 CCTV와 방범 장치가 회의실 안에 설치되어 있으니 엉뚱한 생각을 했다가는 그냥 철컹철컹하겠는걸.
그러니 이렇게 전시하듯이 진열해 놓은 것이겠지.
“이거는 히비키 30년이잖아?”
또 하나의 보물을 찾아냈다.
저가형 히비키는 맛을 봤지만,
30년 된 저것은 거의 4백만 원이 넘어간다.
분명 수상도 많이 했고 좋은 위스키인 것은 맞으나 거품이 너무 낀 술이다.
내 돈으로 마시는 것은 불가능했고 삼촌도 그런 술을 내게 내주진 않았다.
더구나 이건 일본산이잖아.
몇 년 전에 일본이 뻘짓을 한 후부터,
삼촌의 가게에서 일본산 술은 퇴출됐다.
그렇다고 일본 자본이 들어간 맥주까지 모두 다 빼진 않았는데 너무 빡빡하면 장사하기 힘드니 내린 결론이었다.
“히비키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권택경 대리와 함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콧수염이 멋들어진 중년의 아저씨였다.
오오··· 풍기는 포스가 장난이 아닌데.
딱 봐도 이곳 현송주류의 사장님이신 것 같았다.
“저걸 보니 조금 아쉬워서요.”
“뭔가 아쉽습니까?”
“국내에도 히비키 같은 위스키를 빚는 증류소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냥 바람일 뿐이다.
전통주도 못 지키던 시절이다.
70-80년대에 위스키를 생산해서 수십 년 동안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었을까.
당장 내게 많은 돈이 있더라도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에는 시간이 문제다.
맛도 중요하나 시간의 가치도 가미된 것이 위스키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의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
오죽하면 위스키는 ‘시간의 맛’이라는 표현이 있을까.
“최근에 남양주 지역에 위스키 증류소 한 곳이 문을 열었는데 모르시나요?”
“뉴스를 보기는 했습니다.”
“사실 80년대에 몰트위스키 원액을 만들던 곳이 있기는 한데 다들 망했죠.”
“그때와 지금은 또 다르니까요.”
요즘 내 또래도 위스키를 많이 마신다.
뉴스를 통해 본 기억에 의하면 매년 50% 가까이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아직 제 소개를 못 했네요.”
“현송 주류의 도진학 사장님 맞으시죠?”
“하하, 어반 스카이의 주 사장에게 말씀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도진학은 내게 악수를 청한 뒤.
자리에 앉으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그때부터 도진학 사장의 벽향주에 대한 칭찬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거의 찬양하는 수준이었다.
“요즘 제가 벽향주에 완전히 꽂혀서 주 사장님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았습니다.”
“입맛에 잘 맞으셨나 봅니다.”
“이런 좋은 술은 더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저희 현송에게 맡기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그때부터 실무를 담당하는 권택경 대리와 함께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계약의 핵심은 오저당에서 생산하는 물량을 얼마나 가져가냐는 것이었다.
당장의 생산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오저당이 빚는 벽향주는 만드는 족족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오늘은 창고 완공 후에 생산될 벽향주에 대한 부분을 논의하러 온 것이다.
현재 벽향주의 생산량은 1만 병에 불과하나 창고가 완공되면 2만 5천 병 이상을 추가로 얻게 될 거라 예상됐다.
그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과연 그걸 모두 소화 가능할까?
수요 예측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현재까지 계속 완판이 이어지고 있는 탓에 어디까지가 한계치인지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태백 물산만으로는 어렵지.’
아무리 심재필 사장님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기존에 뚫어 놓은 곳도 대부분 막걸리를 위주로 파는 곳들이다. 벽향주를 대량으로 밀어 넣을 곳이 별로 없었다.
그 해결책을 찾으러 온 것이다.
수도권에 면허를 가지고 있는 현송 주류는 소화 가능한 양이 태백 물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곳이다.
“그 정도의 창고면 어느 정도 생산량이 추가되는지 감이 잘 오지 않네요.”
권 대리는 그 부분을 가장 궁금해했다.
오저당의 막걸리는 벽향주와 더불어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거라 논의할 것이 없었으나 메인인 벽향주가 문제였다.
나는 그 내용을 솔직하게 알려줬다.
“빠르면 연말 중에 창고가 완공되는데 그곳에서 술을 빚으면 2월 초부터 최대 2만 5천 병씩 매월 추가 생산될 겁니다.”
“그중에서 저희가 가져올 수 있는 양은 얼마나 될 거라 보시는 거죠?”
“시작부터 숙성 창고를 가득 채우는 것은 저희도 조금 애매합니다. 1만 병부터 시작해서 차츰 늘리는 것은 어떠신가요?”
2만 5천 병은 최대치였다.
시작부터 창고 가득 옹기를 들여놓을 생각은 아직 없었다. 우선 절반쯤 채우는 것으로 계산하면 1만 병이 나온다.
그런데 권 대리의 표정이 묘했다.
“너무 많은가요?”
“아니요. 생각보다 너무 적어요.”
“1만 병이 적다고요? 유통을 시작도 안 했는데 시작부터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는 아닌가요?”
“아니요. 지금까지 벽향주의 판매 추세를 지켜보면 몇 배는 더 주셔야 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권택경 대리는 자신이 뽑은 자료를 내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SNS 해시태그와 검색량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예측하지 못한 수치들을 그만의 해석으로 뽑아놓기도 했다.
이걸 준비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지 추측조차 되지 않았다.
눈 밑에 거뭇한 다크 서클이 왜 생긴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확실히 처음만큼 폭발적인 반응은 없었으나 꾸준하게 벽향주를 찾는 이들이 많기는 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검색량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추측하긴 어렵죠.”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추가로 현송에서 영업과 프로모션도 진행할 수 있으니 그것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그 뒤로도 권 대리의 설명은 이어졌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도 있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의 말 중에 상당수는 공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초반부터 지르기는 부담되는 상황이었다.
내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오히려 마음이 급해진 것은 권경택 대리였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제가 생각했던 거와 달라서요.”
“어떤 부분이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일단은 현송에서 유통하시는 양을 보고 점차 생산량을 늘릴 생각이었습니다.”
현송만 믿고 지를 수는 없잖아.
나중에 이거 안 팔려서 어쩔 수 없어.
이런 소리가 나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잠시 생산량을 조절하는 것으로 해결은 가능하지만, 가능한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라인 증설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품절 대란을 피하고자 과도한 생산을 하다가 손해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도 자주 하는 실수라 항상 그 부분을 염두에 둬야 했다.
옹기값도 조금 부담되었다.
숙성 창고를 가득 채우려면 옹기값만 수천만 원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던 도진학 사장이 테이블을 살짝 두드렸다.
“그냥 이렇게 하시죠. 저희가 벽향주를 반품 없는 조건으로 매달 2만 병까지 받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첫 거래 후 3개월 동안만 유지되는 단기 계약이었다. 그 이후에는 일반적인 계약 내용으로 전환하자고 했다.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현송에서 걸어 놓은 안전장치였다.
대신 우리도 향후 2년 동안 현송이 면허를 가진 지역은 독점을 줘야 했다.
그건 문제가 안 되었다.
어차피 같은 지역 내에 주류 상사 다수를 끼고 영업하는 것은 대기업만 가능하다.
여기 오기 전에 듣기로는 전통주 유통에는 암묵적인 룰이 이 바닥에도 있다고 했다.
더구나 그 정도 조건이면 오저당이 투자하는 옹기값 등을 충분히 뽑아낼 수 있으니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었다.
권경택 대리는 사장의 그런 제안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만류했다.
“사장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계약서를 준비해온 그의 계획에는 없던 내용 같았다. 하지만 정작 도진학 사장은 그런 그를 향해 나무라듯 타일렀다.
“너 자신 없어?”
“자신 없다고는 안 했습니다.”
“이거 남들이 가져가기 전에 꼭 가져와야 한다고 매일 찾아와서 귀찮게 했잖아. 그래서 어렵게 모셔온 거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봐.”
오호··· 그랬던 건가.
나는 도진학 사장이 주도해서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인 줄 알았다. 권 대리가 이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걸 또 받아주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 거래가 큰 것도 아니다.
여기가 작은 규모의 회사도 아니고 나름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곳이다.
그 정도는 어떻게든 팔 자신이 있으니 진행하겠지. 벽향주의 유통 기한이 짧은 것도 아니라 불가능하진 않다.
얼마나 걸리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역시 공짜는 없는 걸까.
거의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권경택 대리가 계약서를 수정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우자 도진학 사장은 나에게 뭔가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혹시 나중에 말입니다. 지금 장기 숙성 중인 벽향주를 팔게 되면 꼭 저한테 먼저 연락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인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삼촌 때문이다.
여름에 오저당에 와서 숙성 테스트용 벽향주를 맛보더니 홀딱 반해버렸다.
그런데 그걸 도진학 사장님에게도 말을 한 것 같았다.
“글쎄요. 테스트용으로 숙성시키는 거라 판매할 정도의 양은 아닙니다.”
“그럼 오크통 하나를 제 이름을 매입해서 숙성시킬 수는 있을까요? 당연히 그에 따른 비용은 드리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만, 사장님 부탁이라면 들어드려야죠.”
어려운 일도 아니다.
창고 한쪽 구석에 오크통을 쌓을 렉을 하나 설치하고 거기에 보관하면 된다.
간혹 숙성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제외하면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최대 6억에 달하는 거래를 했으니 그 정도의 수고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내가 선물로 1년 후에 드리겠다는 말을 하자 도진학 사장은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렇게는 안 되죠. 비용은 꼭 청구해주세요. 그리고 계약 선물은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죠. 여기 있는 술 중에 하나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혹시 저기 있는 글렌피···.”
“주 사장님, 그런 분이셨습니까?”
도진학 사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거두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은 영화에서 반지에 집착하던 누군가와 비슷했다.
하긴 어느 주당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술을 선뜻 내줄까.
“그럴 리가요. 저는 그 옆에 있는 글랙피딕 21년을 말한 겁니다.”
사회 초년생 일 년 연봉에 달하는 술을 달라고 할 정도로 정신 나가진 않았다.
21년 된 것은 20만 원 정도 하려나.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아도 그 정도인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오늘 여기까지 온 교통비와 식비를 합친 금액과 비슷했다.
“하하!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도 사장은 잠겨진 선반을 열은 뒤.
술병 하나를 가져와서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런데 거기에 적힌 숫자가 21이 아니라 30이었다.
9년 차이에 불과하나 21년에 비해서 몇 배나 더 비싼 술이었다.
“이건 너무 과합니다.”
“계약과 별개로 제가 부탁한 벽향주를 1년간 잘 숙성해달라는 청탁입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잘 마시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이었지만,
은근히 그 맛이 어떨지 궁금했다.
향이도 마찬가지였는지 계속 그 옆에서 맴돌며 떠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계약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되돌아온 권 대리의 수정된 계약서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다.
오래 살펴볼 내용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내용 외에 오저당에게 나쁜 조항이 될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아까 말한 그 물량을 반드시 제공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흡족한 거래였다.
더구나 내게도 계획이 있다.
그게 성공한다면 이 거래는 꼭 필요한 것이기에 흔쾌히 사인했다.
나중에는 현송에서 오히려 내게 계약을 맺어줘서 고맙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