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의 무기 (3)
현송 주류와 계약은 했지만,
지금 당장 바뀌는 것은 없었다.
모든 일은 숙성 창고가 완공된 후부터 술을 대량으로 빚어야 시작된다.
다행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단조로웠지만, 나름 그 안에서도 재미를 찾고 있었다.
같은 또래의 남자 셋이 살고 있으나 취향과 성향이 제각각이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곧 가을이 오셨다.
그 무렵의 오풍리는 무척 고왔다.
단풍이 울긋불긋한 산과 계곡의 조화는 마음까지 정화시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렵에 오매불망 기다리던 메일이 한 통 왔다.
[불효자식 주도찬은 보거라]
어머니가 보내신 메일이었다.
제목부터 무시무시했는데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미국에 오라고 하셨는데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예 들어오라는 말도 아니고 얼굴 좀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하루 정도 빠지는 거면 모를까.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스케줄을 비워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했다. 아직은 호세와 수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어무이, 성공해서 꼭 효도할게요!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 불효자는 어머니께 파렴치한 부탁을 해야만 했다.
메일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짧은 메시지와 파일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메시지를 읽기 전에 우선 그것부터 열어봤다.
“우리 어머니 솜씨, 아직 솰아있네.”
내가 부탁한 것은 디자인이었다.
최근에 어머니는 임원이 되셔서 직접 디자인을 하신 건 꽤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가진 실력이 어딜 가겠는가.
여전히 미적 감각은 대단하셨다.
내게는 전혀 물려주지 않은 재능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도대체 부모님 중에 어느 분을 닮은 거지. 제각각 개성 넘치는 이런 가족도 흔하진 않을 거다.
[오풍주 라벨 디자인 시안]
내가 바라는 것들은 모두 그 파일 안에 구현되어 있었다. 참고로 오풍주는 오저당의 새로운 막걸리 이름이다.
정말 다양한 이름이 후보로 올라왔는데 정작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오풍주였다.
이름이 중요한가 술맛이 중요하지!
그런 식으로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면 썩 나쁘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그쯤에서 나는 호세와 수호를 문자로 불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녀석이 양조장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운동을 했는지 얼굴에 땀이 잔뜩 흐르고 있었다. 요즘은 그나마 살짝 여유가 있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숙련도도 꽤 늘었다.
이제는 모든 과정이 몸에 익어서 처음보다 짧은 시간 내에 일을 끝냈다.
더구나 이모님은 물론이고 호세도 틈틈이 도와주고 있어서 작업 사이클만 잘 짜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런 날이 오래가진 않을 거다.
올해 연말까지 숙성 창고의 공사를 끝낼 거라고 연화 건설에서 연락이 왔다.
한겨울이 되면 폭설 등의 여러 이유 때문에 공사를 진행하기 어렵기에 신정배 사장은 작업에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혹시 시킬 일이라도 있어···요?”
호세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어설프게나마 존댓말을 썼다.
연화 건설의 아저씨들은 호세가 어리고 교포라고 반말을 써도 귀엽게 봐주셨으나 우리한테는 어림없었다.
배울 거면 제대로 배워야지.
어디서 함부로 말을 놓는 거야.
지난 두 달 가까이 호세는 우리에게 혹독하게 존댓말을 배우고 있었다.
호세를 위해서도 그게 옳았다.
“오풍주 디자인 시안 나왔어.”
“오! 드디어 나왔구나.”
“어서 보여주세요.”
“짜잔, 니들 의견은 어때?”
나는 이미지를 화면에 띄웠다.
오풍주의 라벨은 병을 완전히 둘러싸는 형태였는데 서예 폰트를 쓰는 일반적인 탁주 디자인과는 확실히 달랐다.
고딕 형태로 디자인이 된 폰트 때문인지 뭔가 모던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나만 괜찮다고 생각되진 않은 것 같았다.
다들 반응이 제법 좋았다.
“저는 완전히 마음에 들어요.”
“나도 동감이야. 이런 디자인으로 제품을 내놓으면 젊은 층에게도 먹힐 것 같아.”
“그럼 이걸로 확정하는 거다.”
“디자인도 나왔으니 이제 곧 새로운 막걸리를 출시한다는 게 실감 나네.”
수호의 말에 호세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놀고 있지는 않았다.
선생님이 대구로 가신 이후부터 줄곧 고급 막걸리 라인인 오풍주를 개발하고 런칭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당연히 기존의 막걸리와는 다른 제품이라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맛이 좋은 막걸리를 빚어보겠다고 그간 들인 돈과 시간이 상당했다. 쌀도 종류별로 다 써봤고 빚는 과정도 조금이나 개선해봤다.
무엇보다 숙성 테스트가 문제였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고 그걸 우리가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었다.
거기에 유통기한도 한몫 했다.
과연 우리가 빚은 막걸리가 맛이 가는 게 평균적으로 언제쯤인지 알아놔야 한다.
한 번에 하나씩 진행했다면 정말 1~2년이 걸려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매일 막걸리를 빚으며 동시에 여러 테스트를 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빚은 막걸리가 너무 많아서 시음을 핑계로 한동안 우리는 밤마다 취해서 지낼 정도였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빚으면 되나?”
“지금부터 빚어도 거의 두 달은 걸리니 벽향주와 함께 오풍주를 현송 주류에 납품하려면 조금 서둘러야지.”
국산 유기농 찹쌀과 쌀로 빚은 막걸리인 오풍주는 기존의 막걸리보다 30일의 추가 숙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가격은 13,000원이나 도수는 10%로 보통 막걸리와 비교하면 높은 편이었다.
인공 감미료도 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오저당만의 누룩이었고 거기에 향이와 요정들도 있으니 충분히 맛이 나왔다.
아니, 생각 이상의 결과였다.
“우리가 그동안 개고생한 보람이 있게 벽향주만큼만 팔렸으면 좋겠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게 잘 팔려야 일반 막걸리는 덜 빚어도 되잖아요.”
“저번에 배수인 배우가 벽향주 포스팅 해줬던 것처럼 오풍주도 최고예요! 이런 내용으로 하나만 올려주면 딱인데.”
“그게 가능하겠냐?”
다시 요행을 바랄 수 없다.
연예인이 우리 술을 홍보(?)해주는 일이 다시 있을 거라 기대할 수는 없지.
당시에 벌어진 일은 우연히 생긴 것이고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신제품을 알리는 방법은 많다.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뭘 하더라도 모두 돈으로 연결된다. 우리 같은 소형 양조장에서는 그런 홍보가 쉽지 않았다.
투자 대비 효과를 크게 볼 수 없는 광고는 쓸데없는 돈 낭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의 말처럼 오풍주에 거는 기대는 생각보다 컸다.
“걱정하지 마. 나에게도 생각이 있단다.”
“무슨 꿍꿍이인지 어서 털어놔 봐.”
“너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빚고 있는 술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해?”
“다른 술도가의 고급 막걸리와 비교하면 우리 오풍주가가격 대비 퀄리티가 좋지.”
“일단 다른 술보다 맛있어요.”
둘 다 정답이다.
하지만 그걸 누가 알아줄까.
사람들은 보통 두 종류로 나뉜다.
익숙한 것만 찾는 이들이 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재미를 느끼는 이도 있다.
후자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약간의 호기심만 자극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제품 디자인도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받아냈고 술을 담게 될 병도 일반적인 디자인과는 조금 달랐다.
문제는 변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이 가진 기존의 틀은 단단하다.
소비심리 중에 익숙함을 선택하는 비합리적인 심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자신의 취향과 안 맞을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술에 도전할 이유가 없었다.
“너희는 술을 고를 때 기준이 있어?”
“특별한 기준은 없는데 보통은 가장 먼저 가격부터 살피지 않나?”
“저도 비슷해요.”
“예를 들어서 수상 내력이 있는 만 원짜리 소주와 일반 소주가 있다면?”
“너 품평 내보낼 생각이구나?”
그제야 수호는 눈치를 챘다.
내 계획은 우리가 빚은 술을 주류 품평회 같은 곳에 내보내서 경쟁하는 것이다.
맛은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으니 정면 승부를 볼 생각이다. 거기서 수상을 하게 되면 확실히 판매량 증가에 도움이 된다.
삼촌도 그렇고 작은할아버지 역시 그런 곳에서 상을 탄 술은 꼭 사서 마셨다.
올해 최고의 술이라 불리는 것들이니 안 사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하지만 수호와 달리 호세는 아직 감을 잡지 못했다.
“품평이 뭔가요?”
애초에 품평이란 단어를 배운 적이 없어서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호세는 대화 중에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러니까 그렇게 빨리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던 거겠지.
“La vino calificó. 술의 맛을 평가하는 대회 같은데 참가할 거라는 이야기야.”
“오!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곳에 내보려고?”
“좋은 질문이야.”
나는 곧장 다른 이미지를 열었다.
거기에는 얼마 후에 열리게 되는 ‘제4회 대한민국 주류 품평회’의 정보가 있었다.
그걸 본 수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시작부터 끝판왕으로 가는 거냐?”
“신문사에서 진행하는 주류 품평회에서 상 받아봤자지. 어차피 거기는 돈 받고 리스트 업해서 상을 나눠주잖아.”
“하긴 그런 곳들은 신뢰가 전혀 안 가는 곳이기는 해.”
신문사에서는 검경은 물론이고 온갖 사회 분야에서 상장을 가지고 장사한다.
실제로 오저당을 운영하기 시작한 후부터 공식 메일로 자기네 행사에 출품을 해달라는 연락이 계속 왔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2년 전인가 600개의 주류가 출품했는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브랜드가 수상했다.
그런 상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심지어 출품하는데 돈까지 달란다.
한마디로 돈을 주고 홍보에 쓸 상장을 사 오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주류 품평회는 조금 달랐다.
거기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류 협회와 함께 전통주 등의 국내 시장 활성화를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심지어 거기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대통령상을 받는다.
진행 과정도 꽤 공정했다.
모든 심사는 블라인드 형식이다.
심사를 보는 이들도 국내 장인이 절반쯤 정도 되고 나머지는 해외에서 유명한 디스틸러를 초대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녹화 후에 너튜브 같은 곳에 공개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뒤에서 지저분한 짓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선택한 품평회였다.
“이왕에 하는 거면 적어도 주류 품평회에서 대통령상 정도는 받아야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오풍주나 벽향주에 대통령상을 받은 술이라고 표기하는 상상을 해봐.”
수상하면 특혜가 적지 않다.
대상은 천만 원의 상금을 받은 후.
홍보 책자를 만들고 바이어 시음회까지 많은 기회를 국가에서 만들어준다.
그게 다 공짜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였고 또한 은근히 매출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이건 언제 접수하는 건데?”
“접수는 얼마 안 남았어. 심사랑 발표는 내년 1월 중순에 나올 거야.”
“일정이 조금 타이트하네요.”
호세의 말대로 일정이 빠듯하다.
접수 이전에 제품을 내놔야만 한다.
품평회 등록 조건이 시중에 판매중인 주류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오풍주를 대량 생산하기 전이지만,
테스트 과정을 통해 빚은 술이 있다.
공병과 라벨만 서둘러 준비하고 병입만 하면 출시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수호 너는 전에 네가 알아본 업체에 라벨 디자인 보내서 뽑아달라고 해줘.”
“언제까지 보내 달라고 할까?”
“빠를수록 좋지.”
“오케이. 그거 내 메일로 공유해줘.”
처음에는 나 혼자 끙끙대고 있었지만, 요즘들어 수호가 상당히 많이 도와줬다.
어쩌면 이제야 함께 일한다는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둘 다 다양한 알바 경험이 있다.
하지만 업무를 분담하고 프로젝트를 이끄는 일은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이다.
규모가 작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기업인데 정작 우리는 회사를 다녀본 경험은 없다.
모든 것이 생소한 일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자리 잡아 갔다.
오저당은 조금씩 기업다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우리도 그와 더불어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예전보다 조금 더 속도를 내도 충분한 시기였다.
“자! 이제 바쁘게 움직여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