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우연이 아니다 (4)
오풍주가 대상으로 확정된 이후.
우리는 자축하거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재빨리 오저당으로 돌아왔다.
그만큼 마음이 급한 상태였다.
기존의 계획은 모두 백지로 돌리고 다시 생산 계획을 짜야 하는 상황이었다.
현재까지는 일반 막걸리가 오풍주보다 4배 정도 많은 생산량을 유지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일반 막걸리를 빚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오풍주의 생산을 더 늘려야 했다.
행사 당일에 우리에게 주문하겠다는 양만 합쳐도 턱없이 부족할 정도였다.
심지어 현송과 태백에서도 대상 소식을 들었는지 곧장 벽향주에 이어서 오풍주를 대량으로 발주 넣었다.
“다들 진짜 소식 빠르네.”
“주류 상사잖아. 이런 소식이 느리면 밥 벌어 먹고살 수 있겠어?”
“하긴 주류 품평회면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상이니까. 이러다가 우리 술이 청와대 만찬주가 되는 거 아닐까?”
“불가능한 거는 아니지.”
기존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아니 대부분이 만찬주로 사용됐다.
그해에 상을 받은 술은 외교부와 청와대 등에서 귀빈 접대와 만찬주로 활용했다.
이미 검증된 술이기 때문이다.
그게 또 엄청난 홍보가 된다.
청와대에 납품되는 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출 단위가 달라진다.
우리 술이 아직 거기까지 도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전에 준비해야 했다.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술이 그냥 만들어지진 않는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
심지어 오풍주는 한 달 동안 숙성하는 벽향주보다 2주의 시간이 더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 혹시 모를 재고 걱정을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지금 당장 빚기 시작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대중에게 수상작이 발표될 때까지 시간이 있었다.
아직 다른 부문은 심사 중이었다.
그 이후에는 대상을 받은 것들 중에서 대통령상을 선정하는 과정도 남아 있다.
“수호야, 발표가 언제라고 했지?”
“심사 때 물어보니 적어도 일주일 후에 발표한다고 했어. 오래 걸리면 열흘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하더라.”
“적어도 그때까지는 여유가 있겠네.”
“이러다가 약·청주 부문에 출품한 벽향주까지 상을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때 호세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설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오풍주보다 벽향주를 더 기대했었다.
이렇게 허겁지겁 움직이는 이유가 오풍주는 벽향주를 내며 덩달아 냈던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오풍주에 이어 벽향주까지 대상이라.
설마 대통령상도 받는 거는 아니겠지.
아마도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지면 우리 셋 다 과로사로 쓰러질 게 분명했다.
괜히 두 개를 같이 출품했나?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어?”
*
그로부터 며칠 뒤.
그 설마 하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일정을 오풍주 생산에 맞춰서 일을 하고 있던 저녁 무렵에 전화가 왔다.
우리 대신 현송의 도 사장님과 품평회에 간 삼촌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한껏 상기된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치겠다. 너희 도대체 뭐냐?]
“왜 그러는데요?”
[벽향주도 약·청주 부문에서 대상 받았다. 그것도 오풍주 못지않은 압도적인 점수가 나왔어.]
“진짜요?”
[그것 때문에 여기 난리야.]
하긴 전례 없는 일이었다.
기존에도 같은 양조장에서 수상을 동시에 하는 일이 아예 없진 않았다.
하지만 보통 우수상이 껴있는 거지 대상을 동시에 받은 일은 품평회 역사상 아직 없었던 거로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상도 어느덧 가시권 안에 들어왔다고 봐도 되었다.
각 부문의 대상이 대통령상의 후보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중의 하나가 올해 최고의 술이라는 자격을 얻게 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단 확률이 두 배가 되었잖아.
기존에는 다섯 개 중의 하나였지만,
이제는 두 개가 되었으니 우리 술이 수상할 가능성이 40% 확률로 높아졌다.
[여기 사람들 모두가 오저당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더라.]
“다른 부문은 평점이 높진 않았나 봐요?”
[끽해야 85점 미만이더라. 너희 술에 받은 점수와는 비교할 수 없지.]
“그렇군요.”
[그리고 현송의 도 사장이 계약서에 쓴 내용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네.]
수도권 일부 지역의 독점.
그리고 벽향주의 납품을 말하는 거다.
당연히 계약의 내용은 지킬 생각이다.
하지만 거기에 오풍주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계약할 당시에 오풍주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새로운 프리미엄 탁주를 내놓을 거라 말을 하긴 했으나 그땐 반응조차 없었다.
현송의 관심은 애초에 벽향주에 쏠려 있었던 터라 막걸리는 그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었다.
‘이제는 상황이 또 달라졌지.’
조금 더 좋은 조건을 받아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적어도 프로모션 정도는 추가로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수호와 호세가 궁금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내가 통화 중에 벽향주가 대상을 받았다는 말은 안 했던가?
“삼촌이 뭐라고 하셔?”
“설마 했던 그 일이 벌어진 건가요?”
“어떤 결과가 나왔을 것 같아?”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말해라. 궁금해 죽을 것 같으니까.”
수호는 나무 주걱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협박을 했다. 야야, 너 같은 녀석한테 그건 흉기나 다를 게 없다고!
안 그래도 덩치가 큰 놈이 요즘 쇠질을 하도 해서 그런지 팔뚝도 더 두꺼워진 것 같았다.
“일단··· 벽향주는 대상 확정!”
나는 곧장 귀를 막을 준비를 했다.
저번처럼 환호를 지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수호와 호세는 좌절한 표정으로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오풍주 때는 정말 기뻤는데 이제는 오히려 걱정될 정도다.”
“주문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도찬아, 아니 주도찬 사장님. 여기서 우리 과로사하면 호세랑 저 산재처리 해주실 거죠?”
충분히 이해가 되긴 했다.
호세가 합류한 이후에 조금 인력난이 해소된 부분이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또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요구되는 생산량이 늘었으니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더구나 수호는 경험도 있었다.
봄부터 지금까지 벽향주의 품절 사태를 직접 겪어봤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충 감이 잡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과한 걱정이었다.
벽향주와 오풍주는 상황이 달랐다.
막걸리는 설비를 이용해서 빚기에 오풍주로 모두 돌려놓으면 벽향주처럼 턱없이 생산량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벽향주가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뭘 해야 하는데?”
“일단은 선생님께 전화드려서 이 소식을 알려드려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평생을 빚어오시던 벽향주가 상을 탔잖아.”
“아차!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곧장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다행히 선생님은 어느덧 건강을 많이 회복하신 상태였다. 새로 만든 오풍주와 벽향주로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려드리자 선생님은 기뻐하셨다.
하지만 통화는 짧게 끝내야 했다.
유치원에서 손녀를 데리고 올 시간이라 길게 통화할 수 없었다. 요즘은 손녀의 재롱을 보는 재미로 사시는 것 같았다.
“많이 건강해지신 것 같지?”
“앞으로 20년쯤은 더 사실 것 같아.”
“그러면 참 좋겠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너희들한테 전해줄 소식이 있어.”
“그게 뭔데?”
나는 대답 대신 책상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서 수호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이력서 아니야?”
“여기 있는 두 친구가 우리 양조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출근하라고 했어.”
“응? 언제 면접을 봤는데?”
“어제 연화 건설 갈 일이 있어서 시내 나갔다가 그곳에서 보고 왔어.”
“그런데 얘들 나이가··· 고등학생이야?”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아직 고3이었고 두 달 후에 졸업할 예정인 친구들이었다
“이제 막 졸업하는 아이들이니까 너희가 잘 데리고 있어야해. 나중에 걔들 도망치면 나도 더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내년이면 군대 가야 하잖아. 차라리 예비역이 더 좋을 것 같은데.”
“너도 알다시피 인력 사무소나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봤는데 결국 소용이 없었잖아.”
우리 나이 또래를 구하자고?
인근 몇 km 이내에 한 명도 없다.
종종 인력 사무소에서 일당을 받고 태백에서 일하러 오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호세처럼 내가 먼저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생각보다 원하는 것도 많았고,
우리 나이를 보고 만만하게 보았다.
심지어 어떤 아저씨는 자기가 윗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서 무척 당황했다.
더구나 이 아이들 군대 갈 일이 없다.
“왜 군대를 안 간다고 장담하는 건데?”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살다가 이번에 보호가 종료돼서 퇴소해야 하거든.”
“아··· 그렇구나.”
나에게 이들을 연결해준 것은 태백 시청에서 일하는 사회 복지사였다.
우연히 내가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겠냐며 나를 직접 설득하러 왔었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일하려면 숙식을 오저당 근처에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새벽부터 술을 관리해야 하기에 출퇴근을 하는 것은 사실상 힘들었다.
오히려 그게 아이들에게는 훨씬 좋은 조건이 되었다. 당장 잠을 청할 곳조차 없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만 18세가 되면 아이들은 사회로 나가야 한다.
그들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고작 500만 원에 불과한 자립정착 지원금이 전부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그 정도의 돈으로는 월세 몇 개월 내면 남는 게 없었다.
“그런데 얘네 쌍둥이인가요?”
호세의 눈썰미가 제법 좋았다.
녀석은 이력서를 번갈아 보더니 헤어 스타일은 다르나 사진 속의 얼굴은 똑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둘이 한 세트로 오는 거야.”
“이야기 들어보니 숙식도 제공하는 조건 같은데 어디서 재우려고?”
“선생님 집을 월 50에 임대하기로 했어. 개조를 해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고.”
더 싸게 해주시겠다고 했지만,
내가 우겨서 그 가격으로 정해졌다.
지금까지 오저당에서 일하신 것이 있으시니 일종의 퇴직 연금이었다.
그 정도의 돈은 있어야 손녀 간식이라도 사주실 거 아닌가.
“그런 의도면 나도 찬성.”
“호세 너도 이 녀석이랑 같이 방 쓰는 게 불편하면 그쪽으로 옮겨도 괜찮아.”
“아니에요. 저는 지금이 좋아요.”
호세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남자 둘이 방을 쓰는 게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다.
하긴 어차피 그쪽으로 옮겨도 혼자 방을 쓰는 것은 아니다. 수호 곁에 있으면 얻어먹는 것이 많다는 것도 이유겠지.
수호의 먹성은 여전했다.
요즘에는 치킨 하나를 먹겠다고 차를 타고 왕복 한 시간을 다녀올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같은 방을 쓰는 호세도 덩달아 입이 호강하고 있었다.
“첫 출근은 언제 하는 거야?”
“조만간 방학이라 그때부터 와서 일할 수 있다고 했어. 날짜 들어보니 대충 숙성 창고가 완공될 때쯤이더라.”
“드디어 완공하는 날이 오는구나.”
3개월이 넘는 공사를 진행한 끝에,
마침내 숙성 창고가 완공될 예정이다.
이미 거의 다 지어져서 최근에 전기 공사와 소방 시설도 설치했고 기타 잡다한 것들만 정리하면 완전히 끝이다.
“날짜 맞춰서 이천 쪽에 주문해 놓은 옹기도 모조리 보내 달라고 해.”
“가능하면 빨리해야지. 거기도 만들어 놓은 옹기 보관할 곳이 없다고 난리더라.”
“하긴 이번에 70개나 주문했으니···.”
그것도 10말짜리 옹기다.
100평짜리 창고를 가득 채울 정도이니 그쪽의 상황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운송비까지 합쳐서 거의 4천만 원에 달하는 주문을 했으니 그 정도는 그쪽에서도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이 친구들까지 오면 조금 안심이다. 우리끼리 그거 다 옮길 거 생각하면 정말 막막했거든.”
“옹기 들어오는 날은 이장님도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마.”
“이모님 말씀대로 고사는 치러야지?”
“그래야겠지.”
하지만 크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머릿고기 조금 놓고 막걸리를 뿌리는 정도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돼지머리가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으나 고사상에 놓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건 너무 징그럽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