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36화 (36/254)

미래를 향한 교두보 (3)

[주세법 제20조 1항]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주류에 대해서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주세를 면제한다.

1. 수출하는 것

내가 살 길이 거기 있었다.

수출하는 주류는 면세가 된다.

전통주로서 혜택을 받지 않아도 영향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벽향주 자체를 버릴 생각은 없었다.

국내는 일반 벽향주를 팔고,

해외에는 숙성된 벽향주를 판다.

그게 내가 세운 장기 계획 중의 하나다.

수출용은 오크통에 1년 이상 숙성해서 내보낼 생각이었다. 상황상 국내에 팔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모든 계획의 시작점은 협회에서 주관해서 진행하는 상담회가 될 것이다.

명절 연휴가 끝나고 일주일 뒤.

품평회에서 수상한 양조장을 대상으로 바이어 초청 상담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해외에서도 여러 바이어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진 않았다.

괜히 장기 계획이겠어.

하지만 기회가 있다면 잡아야지.

때로는 경험보다 패기가 먹힐 때가 있잖아. 흔히 인생에서 세 번 있다는 기회 중의 한 번은 쓴 것 같았다. 나머지 두 번이 오늘 온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잖아.

“다음 휴게소에서 운전 교대할까?”

이번 여정은 수호도 함께했다.

안타깝게도 게임 속의 육성 캐릭터처럼 삼시 세끼 밥만 준다고 성장하진 않는다.

나중에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려면 이 녀석도 경험치를 먹여 놔야지.

“아직 괜찮아. 그리고 거의 다 왔잖아.”

“시내에 들어가면 막히는 거는 생각 안 하냐? 호의를 베풀 때 받아라.”

“솔직히 말해. 너 이 차 운전해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우리가 타고 있는 차.

예전에 삼촌이 준 차가 아니다.

설날이 끝난 직후에 출고된 픽업트럭인데 워너비로 뽑았던 GMC의 허머 EV였다. 엄청난 덩치에서 뿜어내는 괴수 같은 마력은 정말이지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장점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전기차인 탓에 주유를 하러 멀리 나갈 필요도 없었고 한옥 마당 한쪽에 설치한 충전기만 꽂아 놓으면 된다.

참고로 오저당에서 가장 가까운 주유소가 18km나 떨어져 있는데 주유를 하려면 왕복 40분이나 운전해야 한다.

하지만 허머 EV는 한 번 충전하면 500km 이상 달릴 수 있는 차다.

기름 먹는 하마라 불릴 정도로 연비가 최대 단점이었던 허머답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뽀대 나잖아.

물론, 가격도 엄청났다.

대략 1억 3천만 원 정도였나.

내 돈으로 산 것은 아니고 오저당이 법인으로 바뀌며 법인 명의로 산 차였다.

언제까지 개인사업자로 유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개인적으로 쓰는 돈도 없었다.

버는 족족 대부분 재투자에 들어가고 있으니 기존과 차이가 거의 없었다. 일단 세금이 줄어드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언제 이런 관심을 받아보겠냐.”

“네가 아니라 차에 관심을 보이는 거지.”

“싫으면 마라. 치사하고 더러워서 나도 이런 차 한 대 뽑든지 해야지.”

“불가능한 거는 아니잖아.”

얼마 전에 연봉 인상이 있었다.

기존에 책정된 연봉이 낮아 상여금으로 보완해주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귀찮았다.

더구나 작년 한 해 동안 이뤄낸 성과가 작지 않기에 그에 따른 보상도 줘야 했다.

당연히 가장 많이 혜택을 본 것은 시작부터 함께한 수호였다.

아직 억대 연봉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나이에 받을 수준의 연봉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대기업에 합격한 엄친아와 견줄 정도는 되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매달 적지 않은 수익이 나오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나저나 너 티켓은 예매했어?”

“당연히 해놨지.”

“징한 녀석. 전역하고 1년 만에 부모님 뵈러 가는 게 말이 되냐.”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부모님은 아들이 전역했는데 어떻게 한 번도 보러오실 생각을 안 하실까?”

그것도 자유를 수호하고 평등함을 사랑하는 미국 시민께서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부탁할 게 많아서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처럼 메일로 부탁했다가는 곧장 스팸 메일로 신고하실 게 분명했다.

“양조장만 아니면 나도 너랑 같이 미국에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너 비행기 아직 안 타봤다고 했지?”

“이제껏 뭐 하고 살았는지 몰라.”

“나중에 같이 가자. 이번에는 5박 6일로 일정을 빡세게 잡아서 나 따라오면 후회할걸.”

서울에서 삼척 오가는 것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으로 가는 거다.

일단 부모님이 계신 샌프란시스코까지 비행시간만 10시간이 넘게 걸린다.

거기에 공항까지 이동하는 시간도 다 합치면 이틀 정도는 허비할 것이다.

이게 한두 번이면 참을 만하지만,

반복되면 그만한 고역이 없을 정도다.

“그러니까 조금 더 비싸도 이코노미보다 좋은 좌석으로 업그레이드하라니까.”

“가격 차이가 사백 만 원인데?”

“응, 그건 아닌 것 같다. 잘했어.”

우리가 비록 허머를 타고 있지만, 잠시 편하자고 그 돈을 쓸 정도는 아니다.

평소에는 먹는 것을 제외하면 나름 알뜰살뜰하게 아껴가며 살고 있다.

“나중에 우리 둘이 같이 출장 다니려면 미리 호세랑 쌍둥이 잘 키워놔.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지.”

“지금도 호세는 숙성 상태를 살펴볼 수 있을 정도는 되잖아.

“하지만 녀석들끼리 술을 빚을 수는 없지. 그게 안 되면 아무 의미가 없어.”

“오케이! 접수했어.”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진 않았다.

수호도 하는데 다른 직원이 못 할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녀석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경험해보니 가능해 보였다.

술 빚는 것은 재능보다는 노력의 영역에 가까웠다.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쓴 만큼.

술이 더 잘 빚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어차피 모든 과정은 계량화되었기에 크게 틀어질 일은 없다. 더구나 오저당은 요정들이 24시간 상주하고 있잖아.

밑에서 호세가 치고 올라올 때쯤.

나도 디스틸러에서 경영쪽으로 영역을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직접 술을 빚는 것도 좋으나 총괄할 사람이 필요했다.

멀리 보자면 그게 맞긴 했다.

내 꿈은 위대한 마스터 디스틸러보다는 내실 있는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이다.

장인이란 칭호는 수호와 직원들에게 양보할 생각이었다.

잠시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는 분당에 위치한 협회에 도착했다.

제법 큰 건물에서 한 개의 층을 사용 중인 협회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직원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품평회 당시에 본 이들이 거의 전부였던 것 같았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증류주 부문 대상 탄 거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시간 되면 한 번 놀러 오세요.”

“방 사장. 그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네. 요즘 매출이 많이 올랐다며?”

안에는 이미 사람이 꽤 많았다.

다들 올해 수상한 사장님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평소에 교류가 있었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오는 사람.

그리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사람.

당연히 후자는 우리를 그리 좋게 보지 않는 이들이었다.

이유는 정말 다양했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잘 나가는 이들을 시샘하는 못난 이들도 어딜 가나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은 완전히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곧 상담회가 시작됐다.

순서는 국내와 해외로 나뉘었는데 국내 쪽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미 계약된 곳에 물량을 대주는 것도 아직은 벅찬 수준이었다.

‘해외 바이어는 어디에 있는 거지?’

*

그와 같은 시각.

한 남자가 협회에 들어섰다.

초록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그는 무려 프랑스에서 한국까지 출장을 왔다.

브누아 뫼리스는 긴 비행 때문에 피로감이 밀려왔으나 쉴 수 없었다.

저녁에 마이애미를 거쳐서 쿠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짜증이 났다.

대표님의 지시로 오기는 했지만,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는 한 걸까.

그가 일하는 끌루소만 놓고 보면 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술의 매출은 작다.

아니,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아시아 국적의 사람들이 사서 마시는 편인데 유럽에서 그들의 인구 비중은 그리 큰 편이 아니다. 애초에 다뤄서는 안 될 아이템이었다.

“차라리 내가 추진하던 쿠바에서 생산하는 럼이나 승인해주시지.”

원래는 쿠바 출장만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잠시 들렀다가 가라는 지시가 내려온 덕분에 이 고생이다.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으나 평소답지 않게 대표님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이런 경우는 정말 흔하지 않았다.

아주 큰 계약이 아니면 대부분 직원에게 판단을 맡기는 분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과 성과도 직원의 몫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시스템이 잘 작동한 덕분에 끌루소는 성장을 거듭하는 중이다.

도대체 무슨 술이길래 그러는 걸까.

아마도 직접 마셔보시고 제대로 꽂힌 덕분에 생긴 일 같았다. 그리고 그 배후에 이언 테넌트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는 낯선 술을 가져와서 대표님을 초대하고는 했다.

“혹시 끌루소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네, 연락드렸던 브누아 뫼리스입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한 남자가 다가와서 그를 안내했다.

그가 들어선 곳은 작은 회의실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에게 여러 팸플릿을 건네주려는 직원을 만류하며 뫼리스는 직설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다른 업체는 볼 생각이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메일로 말씀드렸던 그 업체만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시겠습니까?”

“오저당만요?”

“출장 스케줄이 빠듯해서 두 시간 후에 다시 공항으로 가야 합니다.”

조금 더 있어도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공항에 가서 쉬고 말지 관심도 없는 다른 업체를 상대하며 진을 빼고 싶진 않았다.

회사에서 오더 받은 대로 조건을 맞춰서 물량만 챙겨가면 끝나는 일이다.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 역시 술을 사랑하기에 끌루소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예상하지 못했던 양질의 술을 발견하는 그 순간의 쾌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마 이번 출장도 평소처럼 여유롭게 왔다면 조금 전처럼 칼같이 다른 업체와의 만남을 거절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술을 접하기 위해서 이 나라를 헤매고 다녔겠지.

“반갑습니다. 이쪽은 오저당의 디스틸러인 유수호이고 저는 대표인 주도찬이라고 합니다.”

회의실로 두 남자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협회에서 붙여준 통역인 줄 알았으나 대표라니 흥미로웠다.

동양인의 외모만 보고 나이를 추측하는 것은 어려우나 무척 어려 보였다.

더구나 영어가 생각보다 유창했기에 안심이 되었다.

통역을 한 차례 거칠 경우.

시간 소모가 생각보다 심했다.

거기에 의사 전달이 곡해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그다지 선호하진 않았다.

뫼리스 역시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끌루소의 브누아 뫼리스입니다.”

“요즘 끌루소가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자주 듣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전염병 덕분에 이룬 성공이란 말도 많이들 하죠.”

프랑스인답게 뫼리스는 조소쯤은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편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한때 국제 주류 시장이 심한 침체를 겪었으나 전자상거래 위주로 유통하는 끌루소 같은 곳은 성장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일이 많아져서 무려 8배 가까이 온라인 시장의 규모가 늘어났다.

그 영향을 받은 덕분에 끌루소는 매년 50% 이상의 성장 폭을 3년 가까이 유지할 수 있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저당의 대표라는 남자는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당연히 뫼리스는 그들의 양조장에서 빚은 술에 대한 브로슈어나 팸플릿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꺼낸 것은 두 개의 술병과 하나의 테이스팅 잔이었다.

잔까지 가져온 것을 봤을 때 그냥 보여주려고 가져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그 남자는 병의 뚜껑을 열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앞으로 잔을 내밀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일단 한 잔 마시고 이야기하시는 게 빠를 것 같은데, 괜찮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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