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40화 (40/254)

바오 양조장 (1)

5박 6일은 무척 짧았다.

눈 떠보니 시간이 모두 흘러갔다.

그래도 모처럼 꿀 같은 휴식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기에 부모님 집에서 머무는 동안은 먹고 자는 일만 반복됐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야 했다.

이제 슬슬 오저당이 걱정됐다.

벽향주는 숙성 중이라 잠시 생산을 멈췄고 오풍주만 수호에게 맡겨놨다.

수호가 못 미더운 게 아니라 숙성 중인 술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이렇게 오래 비운 적이 없었다.

하급 요정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 돌아간 후에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신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 시간 될 때 다시 올게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냉장고에 메모를 붙여놓은 뒤.

문자로도 두 분에게 알려드렸다.

집에서 공항까지 가는 길은 라니가 태워주기로 했다. 녀석도 한국행을 택한 후에 독립했던 집의 월세를 빼고 부모님 댁으로 돌아왔다.

그 집이 우리 집 바로 옆이다.

한결 홀가분해진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라니는 벌써 나와 있었다.

덕분에 편하게 공항까지 도착한 나는 라니와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며 인사를 나눴다.

15시간 후···.

정신 차려보니 오저당이었다.

인천공항에서 내려서 태백행 공항버스를 탄 후에 다시 여기 오저당까지 오는 길은 너무나도 멀고 지루했다.

이러니 집에 한 번 다녀오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것이다.

“야야! 선물 뭐 사 왔어?”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수호였다.

아니지 녀석이 가장 반긴 것은 내가 아닌 캐리어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번에 오저당을 맡기고 떠나며 한 가지 약속한 것이 있었다.

면세점에 있는 고가의 양주.

마트 같은 시중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술을 몇 병 사 오기로 한 것이다.

오풍리에 살면서 다양한 술을 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아예 방법이 없진 않았다.

요즘은 어플로 예약하면 편의점으로 위스키와 와인이 배송이 오는 시대다.

그러나 그곳을 통해 구할 수 없는 술도 꽤 있기에 이번 기회에 제법 많은 돈을 썼다.

“거기 캐리어 안에 들어 있는 거 다 술이니 깨지지 않게 조심해.”

“오오! 역시 주도찬이야.”

“영수증을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거다. 그러니 한 번에 다 마시지 말고 그때그때 테이스팅 노트 쓰는 것도 잊지마.”

더구나 진짜 주인은 따로 있었다.

양조장에 있는 일반 요정들은 위스키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지만, 향이는 어떤 술이라도 안 가리고 좋아했다.

작년에 현송 사장님의 컬렉션을 보고 다짐했던 것처럼 나도 하나씩 술을 모아볼 생각이었다.

향이를 위한 보상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어쩌면 작은할아버지의 술 냉장고도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때도 요정들이 있었다면 술맛이 갑자기 확 좋아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테리해.’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돌아가신 분에게 여쭤볼 수도 없고,

향이는 여전히 대화가 불가능했다.

나중에 천국에서 뵈면 여쭤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당연히 그런 일은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아! 그리고 조만간에 직원 한 명 더 오게 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벽향주 리뉴얼 부탁드렸는데 어림도 없더라. 그래서 디자이너 겸 내 업무를 서포트해줄 사람을 뽑았어.”

오저당의 열두 번째 직원.

아니지 날 빼면 열한 번째 직원.

고라니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 이름을 듣자 수호는 이름이 뭐 그러냐며 웃었다.

“아··· 그건 별명이야. 이름은 라니 오테로인데 우리랑 동갑이야.”

“한국 사람 아니었어?

“미국 국적의 히스패닉이야.”

“예쓰! 저는 대환영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호세는 펄쩍 뛰었다.

자기 외에 또 다른 히스패닉이 온다는 말에 무척이나 반겼다. 아무리 한국어를 배우고 있더라도 모국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수호는 걱정부터 했다.

말이 안 통하는데 어떻게 같이 일하냐는 이야기였다.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나도 할 말이 제법 많이 있었다.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너희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알잖아.”

아마 할 말이 없을걸.

술 빚는 일부터 시작해서,

경리 업무와 주류 상사 관리까지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일해야 했다.

오저당의 모든 역량은 생산과 출고에 쏠려 있는 탓이었다.

“뭐··· 그건 나도 충분히 인정해.”

“대부분의 업무는 너 안 통하고 내가 다이렉트로 시킬 거니 걱정 마.”

“알겠어. 그런데 숙소는 어떻게 해? 한옥은 방이 다 찼고 선생님 댁도 쌍둥이랑 신입 얘들로 채워졌잖아.”

“이모님 댁에서 신세 지기로 했어. 비어 있는 서연이 방에서 하숙하면 돼.”

식사도 거기서 해결하기로 했다.

이 모든 과정은 내가 아닌 어머니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이모한테 직접 전화를 하셔서 부탁까지 하셨단다.

평소 다른 사람 일에는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으시는 분이 라니한테는 유독 약하신 부분이 많았다. 하긴 무뚝뚝한 나와 달리 라니는 유독 살갑게 굴었던 탓에 어머니한테 점수를 많이 땄지.

“아! 그리고 호세 만큼은 아니지만, 그 친구도 한국어 조금은 할 줄 알아. 예전에 나한테서 조금 배웠거든.”

“원래 아는 사이였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래도 실력은 우리 어머니가 보증했으니 일은 잘할 거야. 그리고 오저당 직원 중에 정식으로 입사 지원한 이가 있던가.”

다들 누군가 소개해줬거나,

수소문해서 어렵게 구한 이들이다.

수호 너만 하더라도 라니처럼 내가 직접 뽑아서 데리고 온 거잖아. 그러니 너도 더는 할 말이 없을 거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두 사람 예전에 무슨 사이였어?”

“그러게요.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말해봐.”

뭐야··· 얘네 너무 무서워.

그때부터 수호와 호세는 라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캐묻기 시작했다.

집요함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다고 내가 스스로 흑역사를 털어 놓을 리가 없지.

“겁나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오늘은 나 먼저 들어간다.”

*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부터.

오저당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우리는 술을 빚고 출고하는 나날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얼추 생산과 수요가 균형을 이뤘다는 것이다.

품평회 효과가 다소 떨어졌다.

여기서 더 줄어들지도 모르겠지만,

내 예상으로는 당분간 이 정도 수준은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요즘은 생산량의 10%는 무조건 숙성용 오크통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라니가 왔다.

녀석의 적응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비슷한 또래인 여자아이들과 자매처럼 지냈다.

어눌한 한국어로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심지어 자신을 고라니라고 소개했다.

넉살 좋게도 라니는 오풍 고 씨의 시조가 될 거라면서 고 씨의 성을 앞에 붙였다.

뭐 진심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지만, 마을 어르신들은 꽤 재미있어하셨다.

외국에서 온 처자가 스스로 고라니라고 말하고 다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긴 원래 녀석이 좀 독특했다.

미국에 적응하지 못해서 쭈구리 같이 지내던 내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도 다름 아닌 라니였다.

녀석 덕분에 친해질 수 있었던 친구도 여럿 있었다. 만약 라니가 없었다면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뉴얼 작업도 라니의 주도하에 시작이 되었다.

현재 예상으로는 가을이 되기 전에는 벽향주 리뉴얼이 가능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라벨 디자인과 별개로 외관상 가장 중요한 보틀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예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실용성과 가격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적당한 용기를 찾는 게 쉽진 않았다.

어쨌든 그건 라니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으니 결과만 받아보면 된다.

확실히 직원이 많아지니 이것 하나는 좋았다.

그쯤 되니 오저당도 변화가 생겼다.

직원들이 많아지니 저절로 성별과 나이에 따라 세 개의 그룹이 형성됐다.

수호 그리고 호세를 비롯한 남자들과 라니와 보육원 출신 여자아이들.

그리고 이모와 아주머니로 나뉘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파벌이 나눠진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나뉜 그룹은 라니와 이모 그리고 수호를 통해서 더 손쉽게 관리가 가능했다.

일종의 파트장 같은 역할이라 가벼운 일 처리 정도는 맡기면 되었다.

당연히 그에 맞는 직급도 주었다.

라니와 이모도 실장의 자리에 올랐고 그에 따른 월급과 책임도 주어졌다.

그 덕분에 나는 벽향주를 빚는 날이 아니면 종종 외부 일정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가는 거야?”

“11시 전까지는 삼척 시청에 가야 해.”

“하긴 거기서 다시 홍천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 모처럼 바람 쐬러 다녀온다고 생각하고 갔다 와.”

“충전은 다 해놨지?”

수호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오저당이 보유한 허머는 온갖 곳에 사용되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어제는 논두렁에 바퀴 하나가 빠진 차를 꺼냈다.

어쨌든 나는 그길로 곧장 허머를 끌고 삼척 시청으로 향했다.

관광과의 소정우 주무관.

그를 픽업해서 출발해야 했다.

소정우 주무관은 지금까지 우리 양조장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그 덕분에 오저당은 올봄부터 찾아가는 양조장에도 선정될 수 있었다.

시청 주차장에 도착하자.

주무관님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외모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동그란 테를 쓴 30대 중반의 통통한 몸집인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주무관님! 여기에요.”

“우와··· 차가 엄청 크네요.”

“양조장에서 짐을 옮길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조금 무리해서 샀어요.”

“하긴 젊은 분들이라 상용 트럭보다는 이런 쪽을 더 선호하시겠죠.”

“곧장 홍천으로 가면 되는 거죠?”

소정우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석에 탄 그는 오늘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역시 센스 좋으신 분이셔.

“그런데 그쪽 양조장에 미리 연락을 안 해놔도 될까요?”

“한 달 전에 미리 방문 예약을 해놔서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평소에 어떻게 관리를 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이거 암행을 가는 기분이네요.”

오늘 가는 곳은 홍천의 양조장이었다.

오저당이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전환하기 전에 다른 곳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견학을 하고자 가는 길이었다.

당연히 주무관님도 같은 목적이었다.

요즘 그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정말 사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 삼척은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된 상태고 수년 전에 일어난 산불 때문에 관광 지수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더구나 재정자립도 역시 최악이다.

전국 평균이 43%인데 삼척은 13% 남짓 되려나. 군위나 상주처럼 한 자릿수는 아니나 문제가 꽤 많았다.

해결책으로 지방교부세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관광 수입을 확보하는 것도 무척 중요했다.

“4월부터는 오저당도 찾아가는 양조장 리스트에 등록되는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요?”

“일단은 홈페이지 오픈해놨고 거기서 예약할 수 있게 해놨습니다.”

“혹시 저번에 말씀드렸던 외국인 대상 프로그램도 가능한 거죠?”

“물론이죠. 영어와 스페인어 모두 문제없으니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근덕면의 용화와 장호해변.

두 곳은 서핑 명소가 되고 있었다.

아직은 양양이 서핑으로 더 유명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은근히 이쪽으로 해외 여행객이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요즘 소정우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신경 쓰고 있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달리자,

생각보다 일찍 홍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5년 전에 기존의 양조장을 인수해서 오저당처럼 새로 시작한 바오 양조장이란 곳이 있었다.

“저쪽이 입구인 것 같은데요.”

“제대로 찾아왔네요. 저기 현판에 바오 양조장이라고 적혀 있어요.”

“주 사장님. 분위기가 조금 묘하지 않나요?”

공터에 주차를 하고 난 이후에.

주변을 살펴보니 주무관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마치 문을 닫은 것처럼 양조장에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단정 짓기는 애매했다.

오저당도 종종 그런 오해를 받았다.

대부분의 일은 창고와 양조장 내부에서 하는 편이고 밖에서 활동하는 것은 날씨 좋은 날에 죽을 쑤는 게 전부였다.

외부인이 보기에 문을 닫은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불도 켜져 있고 주차된 차도 있는 거 봐서는 안에 계신 것 같은데요.”

“그렇네요.”

“일단 내려서 가보죠.”

내가 먼저 차에서 내리자,

주무관님도 뒤따라 내려서 내 뒤를 쫒아왔다. 하지만 사무실로 보이는 곳도 닫혀 있었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그쯤 되자 소정우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사장님 말대로 전화를 하고 올 걸 그랬나 봐요. 저는 잠시 저쪽에 가서 마실 물 좀 사면서 혹시 다른 연락처는 없는지 물어보고 올게요.”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소정우는 길 건너에 있는 슈퍼로 향했다.

그가 다녀오는 사이에 차에 기대고 있자 향이가 나의 머리카락을 당겼다.

뭔가 원하는 게 있거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내 질문에 향이는 손짓을 했다.

다급해 보이는 그 표정을 보니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혹시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쓰러져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곧장 향이를 따라 움직였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쓰러져있진 않았다.

향이가 나를 데려간 곳에는 요정 몇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다른 양조장에 가본 적이 없기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양조장마다 요정이 있는 건가.

아니면 여기가 조금 특별한 건가.

그건 지금 당장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정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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